국어문학창고

대화에 대하여 / 몽테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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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에 대하여 / 몽테뉴(M.E.de Montaigne)


회화(會話)

우리들의 정신을 단련하는 가장 유효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은 내 생각으로는 사람과의 대화이다. 나는 이 방법의 사용을 우리 인생의 다른 무슨 행위보다도 감미로운 것으로 생각한다. 이래서 나는, 만약에 지금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면, 아마도 듣기와 말하기를 빼앗기기보다는 차라리 보기를 빼앗길 것에 동의하리라고 생각한다. 아테네인들과 더욱이 로마인들은 아카데미에서 대화의 연습을 극히 명예로운 위치에 놓고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이탈리아인들이 다소 그 흔적을 간직해서 크게 그 덕을 보고 있는데, 그것은 가령 우리들의 오성(悟性)과 그네들의 오성을 비교해 보면 나타난다. 책에 의한 공부는 맥이 풀리고 약한 운동으로, 조금도 열을 돋궈 주지 못한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변론은 단번에 공부와 운동을 시켜 준다. 만약에 내가 어느 굳센 영혼의 호락호락하지 않은 상대와 변론을 트는 경우에 그는 나의 측면을 공격하고, 좌로 우로 찔러댄다. 그의 사상은 나의 사상을 약동(躍動)케 한다. 질투심, 명예심, 경쟁위기가 나를 충동해 실력 이상의 나로 밀어 올린다. 그리고 합의 일치한 변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권태로운 요소이다. 우리의 정신은 힘차고 잘 가다듬어진 정신들과의 교류에 의해서 강화되는 것처럼, 저속하고 병적인 정신들과의 계속적인 교제와 왕래에 있어서 얼마나 손실을 보고 얼마나 타락하는지, 그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이것처럼 잘 퍼지는 전염병은 없다. 나는 어지간히 많은 경험에 의해 그 손실의 정도를 잘 알고 있다. 나는 반박하고 변론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하고나 하며, 나를 위해서 하는 것에 한한다. 세도가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경쟁 삼아 자기의 재치와 말 주변 자랑을 해 대는 것은 점잖은 사람에게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확고한 의견이 뚫고 들어가 거기에 깊은 뿌리를 박기에는 나의 영혼은 적당한 터전이 못 되는만큼, 나는 아주 자유롭고 거침없이 변론과 토론에 들어간다. 무슨 명제도 나를 놀라게 하지 않고 무슨 신념도 내 비위를 거슬리지 않는다. 비록 아무리 부정 없고 황당 무계한 생각이더라도, 나에게 인간 정신의 소산으로서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들 회의주의자는 우리들의 판단에 일체의 결정을 내릴 권리도 주지 않고 있는 터라, 상반되는 의견들을 물렁물렁하게 바라다본다. 그리고 비록 거기에 판단은 가하지 않지만, 쉽사리 귀는 기울여 준다. 저울 한쪽 접시가 완전히 텅 비어 있을 때에는, 나는 일개 노파의 꿈이라도 올려놓아 다른 쪽 접시가 흔들거리도록 해 놓는다. 그리고 내가 짝수보다 오히려 홀수를 택하더라도, 금요일보다는 목요일을 택하더라도, 식탁에서 13번보다는 12번이나 14번을 더 좋아하더라도, 내가 길을 갈 때에 토끼가 내 앞길을 질러 건너가는 것보다는 옆에 나란히 가 주는 것을 보고 싶어하더라도, 신을 신을 때에 오른발보다 왼발을 먼저 내 놓는다 해도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서 믿어지고 있는 이런 등속의 맹랑한 생각들도, 모두 최소한 한 번 귀 기울여 볼 만하다. 내 생각으로 그것들은 어쨌든 공허보다는 더 무거운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속간의 종없는 잡설도 본시 무(無)보다는 나은 것이다. 그리고 여러 가지 양보하려 들지 않는 사람은, 아마도 미신이란 악덕을 피하려다가 완고라는 악덕에 빠져 들지도 모른다.


훌륭한 토론상의 질서

결국 나는 모든 종류의 공격을, 그것이 정로(正路)를 통해 직통으로 가해져 왔을 때에는, 비록 아무리 미약한 것일지라도 받아들이고, 패배를 고백한다. 그 대신 형식을 몰각한 공격에는 좀체로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내용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나에게는 의견이란 모두가 한가지이다. 그리고 어느 주제가 이기느냐에는 거의 무관심이다. 논쟁의 진행이 질서있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나는 하루 온종일이라도 천하 태평으로 토론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힘이나 재간보다도 오히려 질서이다. 목동이나 어린 점원들의 말다툼에서 매일같이 볼 수 있는 그 질서를 우리들 사이에서는 영영 구경할 수가 없다. 그들은 혹 탈선을 하더라고, 그것은 예절을 무시하는 면에서일 따름이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도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들의 소란과 격정은 그들을 그들의 주제에서 이탈시키지 않는다.―― 그들의 화제는 여전히 저 갈 길을 이어 간다. 그들은 자기 차례가 오기도 전에 말을 하는 수가 있어도 적으나마 서로를 이해한다. 서로 격에 맞게만 답변한다면 나로서는 언제나 그것이 휼륭하고도 남음이 있는 답변이다. 그러나 토론이 혼란하고 질서가 없어지면, 나는 토론을 저버리고 울화와 무절제한 형식에만 매인다. 그리고 고집스럽고, 심술궂고, 안하 무인의 논쟁 방식에 빠져 버려, 그 뒤에 낯이 뜨거워지곤 한다.

바보를 데리고 진심으로 토론하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생떼거리 양반의 손에 걸리면 나의 판단력만이 아니라 양심까지도 썩어 버린다.

우리들의 논쟁도 다른 언어상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금지되고 처벌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무슨 악덕인들 불러일으켜 쌓아 놓지 못하겠는가. 늘 분노에 지배되고 명령받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오직 반박하기 위해서만 토론하기를 배운다. 그리고 제각기 반박하고 반박당하기로만 일관하니, 결국은 토론의 성과란 진실을 잃어버리고 전멸시키는 일이라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래서 플라톤은 그의 '공화국'에서 무능하고 못 되게 태어난 정신들에게 이 논쟁의 훈련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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