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사랑의 철학 / 셸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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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 / 셸리

 

샘물이 모여서 강물이 되고

강물이 합쳐서 바다가 된다.

하늘의 바람은 영원히

달콤한 감정과 섞인다.

세상에 외톨이는 없는 법,

만물은 하늘의 법칙에 따라서

서로서로 다른 것과 어울리는데

어찌 내가 당신과 짝이 못 되랴?

 

보라! 산은 높은 하늘과 입맞춤하고

물결은 물결끼리 서로 껴안는다.

동기끼리 얕보는 수가 없는 법이니

꽃다운 누이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햇빛은 대지를 껴안고 있다.

달빛은 바다에 입맞춤한다.

하지만 그대 내게 입맞추지 않는다면

그 모든 입맞춤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요점 정리

작자 : 셸리

이해와 감상

셸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오래 있다가 집으로 온 고드윈의 16세 된 딸 메리를 만나는데, 둘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메리는 예쁘고 매우 지적인데다, 유명한 여권옹호자인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와 철학자 고드윈의 딸로서, 탈관습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셸리는 이런 여자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낭만적 기질을 유감 없이 발휘했고, 여자에 대한 구애를 이런 멋진 시로 표현했다. 특히 낭만파 시들이 가지고 있는 비논리적인 시풍을 떠난 논리적인 전개가 특이해 보인다.

심화 자료

셸리(Percy Bysshe Shelley)

1792. 8. 4 잉글랜드 서식스 호셤 근처 필드플레이스~1822. 7. 8 토스카나 리보르노 앞바다에서 익사. 영국의 낭만파 시인으로 〈프로메테우스의 해방 Prometheus Unbound〉·〈첸치가(家) The Cenci〉·〈아도네이스 Adonais〉와 서정시 〈종달새에게 To a Skylark〉·〈구름 The Cloud〉을 비롯한 대부분의 시를 1818년 이탈리아에 정착한 뒤에 썼다. 그는 배사고로 익사했다.

어린시절과 교육

매우 부유한 지주이며, 휘그당 당원으로 노퍽 공작을 추종했던 티모시 셸리(1815 준남작)의 큰아들으로 태어났다. 미들식스 브렌트퍼드에 있는 시온 하우스 아카데미에 다녔다. 이튼 학교에서 4년을 보내고 1810년 10월에 옥스퍼드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에 입학한 날 밤, 요크셔 노턴의 명문 출신으로서 역시 신입생인 토머스 제퍼슨 호그를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 좋아하여 다른 친구들을 거의 사귀지 않고 밤낮을 함께 보냈다. 그들은 함께 이야기하고 산책하며 독서와 철학공부를 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괴짜 취급을 받았다. 둘 다 유별난 데다가 열정과 방종함까지 서로 비슷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만족하여 〈무신론의 필요성 The Necessity of Atheism〉이라는 소책자를 써서 주교, 대주교, 대학 학장에게 보냈다. 두 사람은 그 내용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아 대학에서 퇴학당했고, 이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함께 1811년 3월 26일 대학을 그만두고 런던으로 갔다. 그러나 부모들이 둘을 떨어져 있게 하려고 했기 때문에, 셸리는 끝까지 버텄지만 결국 호그와 헤어졌다.

셸리는 누이 메리, 헬렌과 함께 클랩험에 있는 학교에 다니는 해리엇 웨스트브룩과 사귀게 되었다. 16세의 아름다운 해리엇은 셸리의 급진적인 생각에 동의하고, 외로운 진보주의자에게 필요한 우정과 용기를 주었다. 셸리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한 듯하며 둘은 1811년 9월 29일 에든버러에서 정식으로 결혼했다. 셸리 부부는 휴가 기간중 스코틀랜드에서 호그를 만나 호그가 법률공부를 하는 요크로 갔다. 그 당시 호그가 자신을 유혹하려 한다는 부인의 말을 듣고 즉시 아내와 함께 요크를 떠났다.

호수지방 거주시기

셸리 부부는 윌리엄 워즈워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로버트 사우디를 만나려고 호수지방의 케직에 정착했다. 그러나 로버트 사우디만을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셸리는 이전부터 사우디의 자유사상과 시를 열렬히 찬미했으나, 사우디가 도덕·종교·정치, 젊은이의 잘못과 미성숙 등 진부한 말을 하는 보수주의자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셸리는 철학자 윌리엄 고드윈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1812년 1월 3일에는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를, 16일에는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그린 글을 보냈다. 이튼에서 고드윈의 걸작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 An Enquiry Concerning Political Justice〉(1793)를 읽었으며, 이 글이 인생 안내서가 되었다고 말했다. 죽을 무렵 고드윈의 사상과 지성에 대해 많은 존경심을 갖고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고드윈의 이 책은 그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셸리는 1812년 10월 4일 마침내 개인적으로 고드윈을 만나게 되고 고드윈이 아일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소개해준 친구들과 사귀면서 지적으로 성장했다. 짧은 풍자소설로 유명했던 철저한 고전주의자이며 시인인 젊은 토머스 러브 피콕도 알게 되었다. 피콕은 셸리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으며, 셸리에게 고전작가들을 진지하게 연구할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시를 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짧은 책 한 권 분량의 시를 이미 썼으며, 장시 브 〈매브 여왕 Queen Mab〉을 1813년 2월에 완성했다. 〈매브 여왕〉은 셸리 일생의 실질적인 개혁기를 시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전기적인 관점에서 이 시는 매우 중요하다. 다른 시보다 셸리의 중요사상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했다. 그는 이 시를 출판하기를 희망했으나, 기소될 위험을 무릅쓸 만한 출판업자가 없었다. 그래서 개인 비용으로 출판하여 복사본을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해리엇은 사람들과의 관계가 즐겁지 않아 종종 집을 떠나 있었다. 셸리 부부 사이가 벌이지기 시작한 것은 1813년이고, 그뒤 심각해지다가 1814년 4월에는 헤어질 조짐을 보였다. 딸 아이앤시가 태어나면서 상태가 호전되기는커녕 더 악화되었다. 1814년 5월 5~6일경에 셸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오래 있다가 집으로 온 고드윈의 16세 된 딸 메리를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메리는 예쁘고 매우 지적인데다, 유명한 여권옹호자인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와 철학자 고드윈의 딸로서, 탈관습적인 생각에 젖어 있었다.

메리 고드윈과의 도피생활

셸리와 메리는 프랑스어를 아는 클레어 클레어몬트와 함께 1814년 7월 28일에 도망가서, 프랑스와 스위스를 6주 동안 여행한 뒤, 돈이 모자라 집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의 투루아에서 셸리는 해리엇에게 여행을 함께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런던에서는 잡히지 않으려고 한동안 숨어 지내야만 했다. 그해 11월 30일에 해리엇은 셸리의 아들 찰스 비시를 낳았다. 여러 번 거처를 옮기면서 몇 달 동안 괴롭게 지내긴 했지만 셸리와 메리는 행복했다. 그들은 계속 책을 읽었고, 그때 런던에서 법률공부를 계속하고 있던 토머스 호그를 만나 즐겁게 지냈으며,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용기가 넘쳤다. 셸리의 할아버지 비시 경이 1815년 1월 6일에 죽자 어느 정도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셸리는 많던 빚의 거의 전부를 갚았고, 1년에 1,000파운드씩 받을 수 있게 되었다.

8월 3일 셸리와 메리는 윈저 공원 입구 가까이의 비숍스게이트에 쾌적한 집을 장만했고, 그곳에서 말로에 사는 피콕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늦은 여름에 셸리는 배를 타고 템스 강을 따라 올라가 옥스퍼드에서 얕은 강을 따라 레클레이드까지 갔다. 이 여행에서 돌아와 첫번째 명시라 할 만한 〈얼래스터 : 고독한 영혼 Alastor, or, The Spirit of Solitude〉을 썼고, 짧은 시 몇 편과 함께 1816년초에 출판했다. 1816년 1월 24일 메리는 비숍스게이트에서 아들 윌리엄을 낳았고, 8월 16일 스위스의 제네바 호수 주변에 집을 얻었다. 바로 그 근처에는 1639년에 밀턴이 묵었다 해서 유명해진 디오다티 빌라에 바이런 경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방문하고, 활기찬 대화를 나누며, 함께 물가로 소풍을 가기도 하면서 날마다 만났다. 두 시인의 10일간 호숫가 여행은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1817년 1월 12일에 클레어 클레어몬트가 바이런과 사이에서 딸을 낳음으로써 극히 우호적이었던 친구 관계가 복잡해졌다. 바이런은 딸의 이름을 알레그라로 지어주었다.

셸리는 9월에 영국에 돌아와 바스에서 지냈으며, 그곳에서 12월 15일에 해리엇이 물에 빠져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녀의 죽음은 셸리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두 아이에 대한 권리마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고통이 가중되었다. 1816년 12월 30일 그는 고드윈이 참석한 가운데 세인트밀드레드 교회에서 메리와 결혼했다. 셸리가 몹시 도움을 필요로 하던 이때 제임스 헨리 리 헌트가 그를 도와줌으로써 둘은 평생토록 좋은 친구로 지내게 되었다. 헌트는 개인적으로 깊은 동정을 표시했고, 햄스테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지내게 해주었다. 또한 지적인 자극을 주고 새 친구를 소개해주었으며, 셸리가 신봉한 자유사상에 대한 열정을 심어주는 등 시를 짓도록 격려했다. 1816년 12월 1일에 헌트가 셸리를 포함한 '젊은 시인들'(Young Poets)에 대한 짧은 글을 발표한 것도 셸리에게 의미가 깊었다. 헌트는 셸리에 대한 인신공격과 작품비판에 대항하여 그의 시를 옹호했다. 셸리에게 헌트가 가장 소중한 친구로 인정을 받은 것은 당연했다.

1817년 2월에 셸리 부부는 템스 강 상류에서 50㎞ 떨어진 버킹엄셔의 말로라는 작은 마을의 앨비언하우스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그들은 저녁마다 서로에게 소리내어 책을 읽어주었고, 호그나 피콕을 초대했다. 그밖에 고드윈이나 리 헌트 및 그의 대가족이 방문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메리는 실용적인 책 〈6주간의 여행 이야기 History of a Six Weeks' Tour〉(1817)를 펴냈고, 유명한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1818 출판)을 썼으며, 9월 2일 딸 클래라를 낳았다. 앨비언하우스에서 지낸 지 6개월 만에 셸리는 가장 긴 시 〈라온과 시스나 Laon and Cythna〉(1818년 〈이슬람교도의 반란 The Revolt of Islam〉으로 제목을 바꿈)를 썼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이상적으로 행복했던 것은 아니다. 클레어가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와 함께 그들 집에서 지냈기 때문에 불편함과 당혹감을 느꼈다. 메리로서는 '아무개 부인'으로 다른 누군가의 자식을 키운다는 애매한 상태를 견딜 수 없었고, 셸리의 평판마저 위태로워졌다. 바이런이 자신의 아이로 흔쾌히 인정하고 양육하겠다고 했으므로, 그들은 1818년 3월에 베네치아에 있는 바이런에게 아이를 데려다주려고 영국을 떠났다.

이밖에도 셸리 가족이 이탈리아로 이주한 다른 이유는 악화된 셸리의 건강과, 해리엇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처럼 메리가 낳은 아이도 법에 의해 뺏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드윈이나 친구들에게조차 정확한 동기를 밝히지는 않았다. 셸리 가족은 밀라노·코모·피사에서 잠깐씩 머문 뒤 리보르노에서 1개월간 지냈다. 4월에 밀라노에서 하녀 1명을 딸려서, 알레그라를 베네치아에 있는 바이런에게 보냈다. 클레어가 알레그라를 몹시 염려하는 까닭에, 8월에 그녀와 셸리 둘이서 루카 온천장에서 베네치아까지 길고 힘든 여행을 했다. 클레어는 파도바에서 여행을 그만두고 신분을 감춘 채 그곳에 머물렀다. 한편 셸리는 바이런을 만나려고 베네치아까지 갔고, 바이런은 그를 반기면서 자신이 사용한 적이 없는 빌라를 쓰라고 했다. 셸리는 메리에게 편지를 보내 가족들을 데리고 즉시 이곳으로 오라고 했다. 메리가 오긴 했으나 어린 딸 클래라가 죽고 말았다. 메리는 은연중에 딸의 죽음이 셸리와 클레어의 탓이라고 비난했고, 이때의 긴장된 관계로 인해 셸리는 〈줄리안과 마달로 Julian and Maddalo〉와 일련의 슬픈 시들을 쓰고 수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때 〈프로메테우스의 해방〉 1막을 썼으며, 시인으로서 가장 원숙한 경지에 들어섰다. 이듬해 여름 로마의 카라칼라 욕탕의 유적에 둘러싸여 〈프로메테우스의 해방〉의 2막과 3막을 썼으며, 〈첸치가〉를 쓰기 시작했다. 6월 7일에 셸리의 3세 된 아들 윌리엄이 죽자 그들 사이에 자녀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그해 6월 10일에 로마를 떠나 여름을 몬테네로에서 보내면서 〈첸치가〉를 끝냈다. 그해 10월 2일부터 다음해 1월 25일까지 피렌체에 있었으나 셸리의 건강이 나쁘고 날씨가 추워 편안히 지내지 못했다. 메리의 심한 우울증은 그해 11월 12일에 아들을 낳으면서 많이 풀렸다. 아이의 이름은 셸리와 태어난 도시의 이름을 따서 퍼시 플로렌스라고 지었다. 이 아이는 셸리와 메리 사이에서 살아 남은 유일한 자식이다.

셸리에게는 리보르노와 루카로 가끔씩 여행을 가거나 레리치 근처의 카사 마그니에서 마지막 여름을 보낸 것을 빼고는, 1820년 1월말에 피사로 옮겨 간 것이 마지막 여행이었다.

셸리가 피사에 간 주된 이유는 유명한 이탈리아의 의사 안드레아 바카 베를링기에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서였다. 곧 셸리는 영국·아일랜드·이탈리아·그리스 출신의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그룹의 핵심인물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바이런도 이 '피사 써클'에 참여했다. 1822년 4월 20일 바이런의 딸 알레그라가 죽게 되어 셸리 가족은 여름을 해변가에서 보내려는 계획을 서둘러서 일찍 진행시켰다. 그들은 클레어가 이 슬픈 소식을 알기 전에 바이런 가까이에서 그녀를 떼놓으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스페지아 만에서 레리치를 마주하고 있는 산테렌초의 카사 마그니에 집을 얻어, 4월 8일에 투숙했다. 7월 1일 셸리는 장비를 갖춘 자신의 요트 '돈주안호'를 타고 리 헌트 부부와, 6명의 아이가 이탈리아에 오는 것을 환영하려고 리보르노에 갔다. 셸리는 헌트의 가족이 피사에 있는 바이런의 저택에 묵을 수 있도록 해주고, 바이런이 발간하려고 한 정기간행물 〈자유주의자 The Liberal〉에 대해 그와 구체적으로 의논했다. 바이런은 이 잡지를 편집하기 위해 셸리를 통해 리 헌트를 이탈리아로 오게 했던 것이다. 셸리는 7월 8일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오던 중 갑작스런 돌풍으로 배가 가라앉아 익사했다.

셸리가 죽은 뒤 메리는 곧 남편의 원고를 정리·보존하고 출판하는 일에 여생을 바치며 전기를 쓰기로 결심했다. 1824년 그녀는 〈유고 시집 Posthumous Poems〉을 출판했으나, 셸리의 아버지 티모시 경이 1839년까지 출판을 금지시켰다. 〈시 작품 Poetical Works〉에 실린 메리의 귀중한 메모는 주로 전기적인 내용이다. F. L. Jones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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