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사고의 자립 / 박이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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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의 자립 / 박이문

  어떤 경우이든 무엇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할 때 반드시 위험이 내포되어 있음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다. 왜냐 하면 그러한 진술과 맞지 않는 예외가 흔히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을 의식하면서도 나는 현재 한국인의 사고가 대체로 말해서 아직도 자립하고 있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사고는 의식의 이성적 활동을 의미한다. 모든 앎, 모든 이론, 모든 과학은 이성의 열매에 불과하다. 구체적으로 이성적 활동은 자연 과학, 인문·사회 과학 등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한국의 사고가 아직도 자립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다름 아니라 '앎'의 분야, 과학적·이론적인 분야에서 우리의 이성적 활동이 빈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문의 방법이 비교적 단순한 자연 과학계는 어떨는지 모르지만 그 밖의 여러 학계와 문화계에서 우리는 뚜렷한 우리들 자신의 이론을 세워 본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을 성취하려는 의욕조차 가져 볼 수 없을 만큼 우리 자신 스스로의 사고를 멈추고 남의 사고에 의지해 오는 데만 급급해 왔고 아직도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고는 기억이 아니다. 그것은 이성에 의해서 이성의 엄격하고 보편적인 법칙을 따라서 어떤 사실, 사태, 사건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문자 그대로의 '이치'의 추구력을 말한다. 진리와 오류는 반드시 증명되어야만 한다. 증명하려는 불같은 의욕이 없는 사고는 있을 수 없으며 이성을 등한히하는 사고는 사고의 죽음과 마찬가지다. 참된 사고에는 엄청난 지적 긴장이 수반돼 피땀 나는 지적 노력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그저 결론만을 찾으려는 가지가지 유혹이 사고하는 과정 속에 항상 따르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한국인 사고의 빈곤은 모든 학문의 영역에서 뚜렷하게 독창적인 이론이 하나도 한국에서 세워지지 않고 있다는 것으로 증명되거니와 학계나 문화계에서 볼 수 있는 이른바 학자, 지식인들의 태도 혹은 경향 속에서 한국의 사고가 얼마만큼 자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볼 수 있다. 현재 한국인의 사고하는 태도에서 대략 세 가지 경향을 들 수 있다.

  첫째, 사대주의이다.


  멀쩡하고 아름다운 우리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신문, 잡지에는 그런 말 대신 알 수도 없는 외국어를 쓰려는 경향이 특히 근래 심해지고 있다. 빌어 쓴 외국어가 흔히 잘못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우습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경향은 잠재적이나마 외국어 숭배의 심리를 반증한다. 사대 심리는 여기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외국문화의 인기, 무조건적인 외국인 학자에의 엄청난 관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용상으로 볼 때 별로, 아니 전혀 관계도 없는 기사나 원고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의 것이라고, 외국의 것이라고, 무조건 대대적으로 신문이나 잡지에 보도되고 실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위주의는 일종의 사대주의다. 왜냐 하면 사대주의는 근본적으로 외국 문화의 권위를 인정함으로써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국인 사고의 권위주의에서 일종의 사대 사상을 또한 찾아볼 수 있다. 대단치도 않은 학술론 잡문에도 필자의 학술적 유식을 보이려는 듯이 흔히 외국 문서의 참조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을 보는가 하면, 필요도 없는데 공연히 외국어를 원문대로 삽입한다. 그뿐 아니다. 어떤 주장을 할 때 그 주장을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기에 앞서 이미 권위 있는 사람들, 특히 외국인들의 견해를 인용함으로써 그 주장이 옳다고 보이려는 은근한 압력이 많다. 그러나 사고는 권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참다운 사고는 우선 권위를 비평적으로 대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어떠한 사실 혹은 주장, 권위 있는 사람이 그것을 인정해서 옳아지는 게 아니다. 어떤 사실이 정말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사실이 정말이기 때문이요. 어떤 주장이 옳다면 그것은 뒷받침하는 논리에 빈틈이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사고를 통해 본 현재 한국인의 태도는 사대주의에의 반동으로 나타나는 국수주의이다.

  이 경향은 첫째의 경향에 비해서 약하지만 무시 못할 경향이다. 국수주의적 사고는 '옳고 그름'의 기준, 가치의 기준을 문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념 혹은 감정에 두고 있는 사고 방식이다. 한 이론이나 주장은 그것이 동양인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옳은 것이 되고. 한 예술 작품은 그것이 한국인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좋아진다. 사대 사상 열등 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을 무조건 무시하는 자학을 해서는 안 됨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애국심이나 어떤 감정에 좌우되어 그와는 정반대의 길을 택함은 사고하는 태도가 아니라 자위 행위이다. 자위 행위가 건전한 기쁨을 가져오지 않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런 행위를 하는 본인에게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해로움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적 사고의 특색은 냉소주의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냉소주의자들은 전혀 사고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어떤 우연이나 다른 이유에 따라 사고하는 사람들, 즉 학자·교수·문화인이란 명칭을 받게 된 사람들이거나 혹은 사고할 능력은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사고하기를 중지한 게으름뱅이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 자신을 사고인의 범주 속에 넣고 있고 그렇게 해 주기를 바란다. 그들은 삼사십이 못 되어 이미 '도'를 통해서 우주적 고차원에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들의 눈에는 무엇을 더 알고 따지고 캐보려는 모든 지적 노력이 철없는 짓으로 보인다. 그들에게는 열심히 수학을 따지고, 예술을 논하며 정의를 찾으려는 사고가 유치한 것으로 보이고 참다운 사고는 그러한 작은 사고의 테두리를 넘어서 주말이면 낚싯대나 잡고 바라보는 구름 속에서만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사고의 죽음을 의미한다. 냉소주의자들은 사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고를 부정하는 패배자에 지나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한국에는 사고가 없다. 설령 사고가 있다 해도 한국의 사고는 아직도 자립해 있지 않다.

한 사람이 정말로 한 분야에서일지라도 자주적인 사고를 할 만한 정도에 이르려면 오랫동안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고, 특히 진리를 찾으려는 강력하고 꾸준한 의욕이 있어야만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문화가 자주성을 가지려면 오랜 세월을 두고 시련과 노력을 쌓아야만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들의 태도와 체계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한국의 사고는 어떻게 해야 진정한 자주성을 찾게 될 것인가?

  장기적인 방법으로서 우선 주입식 교육에서 비평적 교육으로 교육의 목적을 바꿀 필요가 있다. 그것은 기억 중심을 버리고 논리적 사고력을 기르는 데 힘쓰는 것이다. 당장 실시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각 분야에서 건전한 토론과 논쟁이 있을 수 있는 분위기나 조직과 훈련이 필요하다. 학자나 지식인들이 상호 찬미로 끝날 때, 사고는 끝이 나고 진리는 숨겨진다.

  중요한 것은 진리에의 앎에 대한 끊임없는 정열, 창조에의 끝없는, 파우스트 같은 의욕이 없이는 모든 것은 형식에 그치게 된다. 이러한 진리에의 코미트먼트야말로 사고하는 사람의 가장 근본적인 윤리가 된다. 이러한 윤리는 진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사고의 독립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한국의 독립은 없다. 이러한 독립을 위해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따져야 한다. 끊임없이 말하며 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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