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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인간과 신화 / 요약 / 크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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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인간과 신화 / 요약 / 크릴

1장  전설과 진상

공자는 기원전 약 500년경에 중국의 노나라에서 태어나 당시로서는 장수인 70여년을 살다 죽었다. 그러나 2500년이 지난 지금 까지 그의 탄생은 잊혀지지 않고 있다. 무엇이 공자라는 한 인간을 아직까지 기억하게 하는가.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공자 자신은 '나는 젊었을 때 미천했었다.'고 고백한다. 또 그는 자신의 이상을 펴기 위해 벼슬을 줄 위정자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혹은 그의 사후 오랫동안) 그의 인생은 다소 일그러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고귀한 가문의 후예이며, 태어날 때 용과 천제의  사자들이 하늘을 배회했다고 한다. 그는 사물의 이치에 통달해서 방안에 앉아서 세상을 알았으며 처음 본 물건의 이름을 맞추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반면에 그는 세습적 귀족정치를 추구한 반동가라고 하는 의견도 있으며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추구한 개혁가라고 하는 의견도 있다. 또 그가 민중의 의견을 대신한 선각자라고도 하고 세습 귀족에 빌붙은 봉건주의자라고도 한다.
무엇이 이토록 공자라는 한 인간의 평가를 다양하고도 서로 상반되게 하는지 먼저 알아보아야만 그의 사상이나 모습을 비교적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을 것이다.

공자가 살던 시절은 바야흐로 춘추전국 시대였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군주의 자리를 탐했다. 제후의 가신이나 가신의 가신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강대국은 약소국을 시시탐탐 침략했으며 점령한 나라도 제후나 가신들의 반란으로 유지할 수 없었다. 국가가 커지면 중앙에선 커진 국토를 다스리기 위해 신하를 봉건영주를 책봉했고 영주가 된 제후는 능력을 키워 이내 독립을 선언하며 자신의 군주를 쳐들어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고통 당하는 것은 서민들이었다. 법과 질서는 무너지고 지배 계층의 관심은 정벌이나 사치 뿐 이었으므로 서민들은 전쟁과 폭압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공자는 이런 모순을 용납하지 못했고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방법을 남에게 설득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지배자의 성공 여부를 권력이나 영토가 아닌 백성의 복리 증진 정도에 두었으며 이는 많은 이들의 호응을 불러 그를 유명한 교사로 만들었다.


공자는 또한 궁극적으로 세습 귀족을 타파하여 유능하고 백성의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는 이를 빈천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관리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서민들의 교육 수준은 형편없었기 때문에 그는 젊은이들의 교육에 먼저 치중했다. 그렇지만 그는 직접 이런 세상이 오는 것을 보고 싶어했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 시켜 줄 군주를 찾아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소원을 이룰 수 없음을 알게 된 그는 고향인 노나라로 돌아와 제자 교육에 몰두하다 곧 죽었다. 이후 그의 생각은 제자들에 의해 점차 널리 퍼졌으며 지배자가 덕과 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관념과 정부의 목적이 백성의 행복 증진이라는 관념은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권력을 독점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공자의 관념이 전파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 세력이 너무나 컷기 때문에 그들은 유가를 매수하거나 공자의 말이 적힌 책에 전제주의적 발언을 삽입함으로써 마치 공자도 자기네 편이었던 것처럼 조작을 했다.


이렇게 공자의 모습을 왜곡 시킨 것은 그의 반대파만은 아니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공자가 벼슬도 못하고 그렇게 꿈을 실현시키지도 못하고 그냥 죽었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따라서 공자를 유력한 정치가로 묘사하거나 귀족의 태생인 것처럼 꾸민 전기를 속속 내놓았다.


그렇지만 소수의 사람들은 거짓과 참을 구분할 수 있었으며 마침내 유럽까지 전파되어 Leibniz, Wolff, Voltaire등 서양의 계몽주의 철학 이후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2장  공자에 관한 자료

공자에 관한 전설에 관해서는 그 정확성이 오래 전부터 의심 받아 왔다. 공자에 관한 기록은 기원전 100년에 저술된 '史記'의 공자 세가에 근거를 두는 것인데 사건의 배열이나 인과가 뒤죽박죽으로 뒤섞여 있어 저자인 사마천의 악의 마저도 의심받고 있는 중이다. 이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어쨌든 공자의 전기에서 사실과 전설을 구별해 내는 일은 무척 중요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서로 상반된 진술이 동일한 서적 안에서 발견되고 그것이 둘다 공자의 말이었다고 한다면 결국 공자는 2500년이나 인류에 영향을 끼칠 만한 위인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그토록 오랜 기간을 인류가 속았을리 없고 당장 그의 제자들이 그런 이중적인 스승의 모습을 보고 옆에 붙어 있었을 리가 없다.


따라서 공자에 관한 자료 중에서 전설을 구별해 내는 일은 불가결 하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인용할 책 목록에 관해서는 생략.




3장  공자시대의 중국

공자를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세상에서 살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공자 시대의 중국은 역사의 전환점에 있었다. 중국의 역사는 사실상 기원전 14세기의 商왕조에서 시작되는데 문화가 많이 발전해 있던 이 나라는 기원전 1122년에 서쪽 변경에서 침입한 이민족 연합에게 정복되고 말았다. 이 이민족 연합을 이끌고 있는 것은 周족이었고 그들은 周왕조를 건설했다.  商왕조에 비해 문화가 많이 뒤떨어져 있던 周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유지할 수 있을 만한 문화적 역량을 갖지 못했고 따라서 할 수 없이 친척과 정복사업에 협력한 다른 부족에게 영토를 나누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왕조 내의 평화를 위협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영토를 맘대로 지배하는 봉건제도가 발전했다.


그러나 周가 마치 이상향의 국가처럼 묘사된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당시 주조된 청동기 명문을 보면 제후들은 다른 이민족의 침략에 늘 직면해 있었고 이는 제후간의 결속으로 극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피지배민을 회유하기 위해 지나친 억압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편으로 사용 된 것이 자신들의 정복을 정당화하는 선전이었다. 즉, 周이전의 왕조인 夏나 商이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 폭군을 냈음을 지적하고 자신들의 정복은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천명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한 것은 아닐지라도 나중에 중국에서 혁명권이 나오게 만든 요인이었다.


해가 갈수록 제후들은 서로 협력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에 따라 전쟁이 빈번해졌고 공자가 태어나기 200년전인 기원전 771년엔 봉건 제후와 이민족이 손을 잡고 周의 石를 공격해 周는 멸망하고 東周시대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주는 이미 힘을 잃은 상태여서 일부 제후의 괴뢰에 불과하였다. 이에 동주국가들은 동맹 내의 가장 강력한 제후를 뽑아 '覇'라는 칭호를 주고 사실상 왕의 역할을 대신하게 했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 중국은 이미 주변 강국과 중원의 약소국으로 나뉘어 있었다. 공자의 고향인 魯나라는 약소국이면서도 周의 정통성을 가진 周公이 세운 나라이며 고대 문화의 보고라는 이유로 쉽게 멸망당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노나라 역시 침략에 시달렸고 이는 대부분의 중원 국가와 마찬가지였다. 이런 혼란상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힘이 없는 약소국은 정복당할 때마다 강대국과 귀신의 이름 앞에 약정을 맺었고 이 약정은 다른 강대국이 쳐들어올 때까지만 유효했다. 사회에는 점차 회의주의가 만연하고 약속보다는 힘을 중시하는 윤리가 고개를 들었다. 또 귀신의 존재마저 의심받게 되는 등 인간의 사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받는 것은 서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는 고사하고 안전조차 항상 위협받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전쟁에 서민들을 동원했고 전쟁이 없는 평시에는 사냥을 다니거나 단순한 취미로 농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이유 없이 백성들을 죽이기도 했다. 형벌은 잔혹해서 齊에서는 발 을 자르는 벌이 너무 흔해 발을 잘린 사람들을 위한 신발을 시장에서 팔 정도였다고 한다. 충절을 지키는 신하도 있었으나 이런 사람들은 극히 적었고 근친상간이나 권력을 이용해 남의 아내를 빼앗는 일은 보편화되어 있었다. 게다가 귀족은 물론 귀족의 가신들도 자신의 군주와 같은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길 원했기 때문에 서민들의 처지는 갈수록 궁핍해 갔다.


이러한 사회의 상황은 자기 모순을 낳았고 스스로 붕괴될 조짐을 만들었다. 여자를 맘대로 차지하게 된 귀족들은 아들들을 너무 많이 낳아 곧 모두 관직이나   영지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닥쳤고 혈통이나 교육은 귀족으로 받았으나 생활은 일반 서민과 다를 게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생겨났다. 그들은 자신의 처지를 억울해 했고 사회를 증오했으며 전체 백성의 입장까지 생각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사람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다.

  
4장  전기

공자의 가계는 확실치 않다. 그의 족보가 '左傳'에 나오기는 하지만 공자가 商王朝의 직계 후손이라는 점은 믿기 어렵다. 그는 魯나라 諏邑에서 기원전 551년에 태어났으며 형과 조카딸 그리고 딸과 아들이 한 명씩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고아였다는 주장을 부인할 수는 없으며 부인에 관한 이야기도 찾아볼 수 없어 후세의 전설에 이혼했다는 설도 있다.


공자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미천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교육도 받았고 음악과 궁술에 관심을 가질 만큼 여유가 있었던 것을 보면 그의 조상은 하급이나마 귀족이 아니었나 한다. 공자는 젊은 시절 창고지기나 목장 관리를 하며 생계를 이었으나 이 때의 고생은 그에게 일반 백성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했다. 이는 후에 신분을 초월한, 능력에 의한 기회균등을 주장하게 되는데 영향을 끼쳤다.


공자는 아첨할 줄을 몰랐으며 정치가로서보다는 타고난 철학자요 교사로서의 재능을 가졌다. 하지만 공자의 꿈은 훌륭한 철학자나 유명한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명성을 얻고 인류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대부분 관료가 됨으로서 성취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관직을 얻고자 열망했다. 하지만 관직을 얻지 못함으로서 그는 오히려 그는 당시 빈약했던 학문 연구와 교육, 그리고 궁전의 의례를 연구할 시간과 지적인 평정을 가질 수 있었다.


공자는 당시 중국에서 가장 학식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었지만 이것은 그가 고전을 많이 읽었다는 뜻은 아니다. 고전 중에는 그 때 아직 저술되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었고 책도 귀해서 끽해야 대나무에 글을 써서 끈으로 묶은 冊이 책의 역할을 대신했다. 물론 시경을 비롯해 책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는 문헌을 인용할 때 극히 겸손했고 다른 사람이 의견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가 고전의 연구를 통한 고대 질서의 부활을 꿈꾸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많이 다른 것이다.


주왕조의 영광을 공자가 찬양한 곳이 논어에 가끔 보이는데 이것은 사실 공자가 주나라 시대를 그리워 했다기 보다는 제후가 난립하는 세상에서 이들을 평정할 강력한 하나의 왕조의 탄생을 기대하고 周를 그 하나의 모델로서 상정한 것이 라고 보는 것이 옳다. 제후가 난립하는 상황에선 정상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 그런 국가가 공자 생존 중에 탄생했다면 그는 아마 격렬한 어구로 이 위대한 단일 왕조의 역사적 숙제를 강조했을 것이다. 그것은 신분 귀족제의 폐지와 실력과 인격에 기초한 관리 선발이다. 궁극적으로는 왕도 이런 원리에 의해 백성 가운데서 선발할 것을 생각했겠지만 공자는 지나친 이상향 주장으로 현실적인 성취마저도 잃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이점에 관해서는 10장 개혁가 편에서 다시 다룬다.


사실 공자는 세력 있는 지위를 상속받지도 못하였고 권력자에게 아첨을 할만큼 권모술수에 능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이상을 세상에 펼칠 만한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점은 공자가 영원한 이상가로 남는데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공자는 魯에서 높은 관직을 지내고 국사를 좌우했다고 하는데 齊와의 회담에서 기지를 발휘해 노공을 납치하려는 제의 계획은 좌절되고 빼앗긴 영토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논어나 맹자엔 이런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고 좌전에만 있는 것을 볼 때 조작이라고 생각된다. 실제 이런 일이 있었다면 공자는 큰 공을 세운 것이 되고 높은 벼슬까지도 했을 것이다. 이런 식의 공자에 대한 거짓 전설은 자신의 우상을 자신의 이상향에 투영하려는 후세의 욕심에서 나온 것이다. 마징가 제트나 슈퍼맨을 우상으로 삼고 이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으려는 어린아이들의 심리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자의 위대함은 '위대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野人으로서 인류의 갈 길을 밝힌 점에 있는 것이다. 만약 모든 훌륭한 사상이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사람들에게서 나왔다면 인류는 자신의 평범함에 슬퍼하며 학문의 연구는 위인에게 맡기고 머리칼이나 뜯었을지 모른다. 잠시 이야기가 샜지만 어쨋든 공자는 관직을 바라는데 한계를 느꼈기 때문에 자신을 기용할 군주를 찾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공자는 魯에 있을 때와 여행 중에 딱 두번 벼슬을 제의 받았는데 두 번 다 그리 정통성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한번은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 費에서 온 제의였고 또 한번은  晋의 가신이 성을 점령하고 공자를 초청한 것이었다. 두번 다 공자는 제의를 수락하려 하였으나 제자인 子路의 반대로 무산되고 만다. 동양의 대학자가 작은 읍, 그것도 반란군의 관리가 되고 싶어하였다는 사실로 살아 있을 때 그가 얼마나 이상을 펴고 싶어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 얼마나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표면적으론 아무 성과도 없는 이 여행은 공자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가장 큰 사건이 되었다. 앞에 먼저 말했지만 이 여행으로 그가 얼마나 평범하고도 무시 받던 사람이었나를 알 수 있으며 또 그가 얼마나 이론의 실현을 위해 절치부심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고국에 돌아 온 공자는 이웃 齊국의 어린 임금이 귀족인 陣에 의해 살해 된 사건을 접하고 정부에 군사 개입을 간언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묵살되고 마침 아들과 가장 아끼는 제자 顔回의 죽음을 맞게 되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자로는 자신의 군주를 지키다가 살해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공자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했으며 개인적으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한 인간은 "나를 알아주는 이가 세상에 없구나!" 하고 비통해 했다.
그리고 그는 기원전 479년 숨을 거두었다.


5장  인간

공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에 관한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으나 단정지을 수 있는 건 그 역시 어떤 면에선 가장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후세에서 지어낸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가 태어날 때 하늘에선 천제와 용의 사자가 하늘을 배회했다고도 하며 그의 출신이 명문 귀족이나 왕족이었다고도 한다. 또 그는 말년에 노장 사상에 심취해 노자의 문하로 들어갔다는 얘기도 전해지며 언젠가는 높은 벼슬을 거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상반되는 이런 진술 때문에 이 이야기들은 더욱 믿을 수 없다.


그 중에 가장 일관된 이야기를 싣고 있어 가장 믿을 수 있다는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귀절이 많이 남아 있다. 近親姦이나 구설수로 악명이 높던 남자(이름과 달리 여자임.)를 만났을 때 제자인 자로가 거세게 항의하자 공자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았다."며 당황해 하는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제자 안회가 젊은 나이로 죽었을 때 머리를 풀어헤치고 울부짖었다고도 한다. 또 무례한 친척의 정강이를 지팡이로 때린 적도 있으며 孺悲가 만나고자 하자 병을 핑계로 이를 거절하면서 심부름꾼이 집을 나갈 때 비파를 연주했다고도 한다. 모두 공자가 완벽하지 않은 한 인간이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동서를 막론하고 가장 위대한 성인은 가장 인간적이었다.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는 모습은 예수를 더욱 대중의 가까이에 가져다 놓았다. 첩을 넷 가진 마호멧이나 악처에게 고통받던 소크라테스 모두 진정한 성인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모습을 가장 진솔하게 표출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 싶다.


공자가 제자들과 諸國을 여행할 때였다. 한 번은 공자와 제자들이 서로 떨어진 모양인데 공자를 찾던 제자들의 수소문에 한 행인이 그를 묘사하며 마치 길 잃은 개와 같았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공자는 화를 내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끌끌...그럴지도 모르지' 하며 자조하였다. 쓸데없는 말을 전한 제자도 이상하지만 공자의 반응 역시 그의 인간성의 그릇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공자는 성자도 아니요 완전무결한 인간도 아니었지만 동시에 가장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6장  제자

공자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제자들을 고찰해 봄이 필요하다. 현대 중국학자 錢穆은 공자의 제자를 여행 전의 제자와 여행 후의 제자로 나누는데 초기의 제자들이란 그저 친구들에 불과하며 儒家學團도 처음엔 비공식적인 토론회였던 것 같다. 그 중 자로는 공자와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고 하며 사마우는 齊로부터 邑 하나를 봉읍 받을 만한 귀족이었다. 이들은 모든 조건이나 신분을 떠나 충성과 헌신의 門徒化하였다.


그럼 그들을 거의 맹목적인 문도로 만든 요인은 무엇일까?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공자의 그의 매력적인 성격이다. 그 시대의 어떤 사람도 그와 같은 높은 수준 높은 문학, 역사, 철학 공부의 기회를 제공 할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손했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으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 할 줄 알았다. 이것은 권위를 손상시키기는 커녕 더욱 그를 빛나게 했다.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공자의 매력은 향기를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다른 이유로 그의 추천장과 교육이 출세하는데 도움이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공자의 사상은 백성을 풍요롭게 하는 정부 구성을 중시했기 때문에 자연히 정치술이나 정치에 필요한 상식을 가르쳐야 했고 이는 당시 꽤 권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명문대학 졸업장과 같다고나 할까? 공자의 제자의 수는 과장되어 알려져 있는데 논어에 나오는 22명의 제자 가운데 21명은 높은 지위를 가졌으며 한명은 자리를 거절했다. 이 가운데 많은 수는 공자의 추천에 의해 임명된 것으로 보이며 그게 아니라 해도 공자의 명성은 승진에 도움이 되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한가지 공자가 신분귀족제를 못마땅해하고 틈틈이 영주들에게 듣기 싫어할 만한 설교를 한 흔적이 여러 군데 보이는데 왜 그들은 공자의 제자를 등용했을까? Gibbon이 지적한 대로 어떤 절대군주라 해도 모든 인민에게 적용되는 도덕률을 무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하나의 도덕 집단을 이루던 유가학단을 관리에 앉히는 것이 인심을 얻는데 효과가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유의해야 할 것은 그들이 등용된 것은 단지 그들이 쓸모 있었기 때문이지 학문에 대한 존경 때문이나 도덕에 대한 미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에는  후세와 같은 학문에 대한 존경이나 엄격한 도덕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랬다면 공자가 각국의 영주들로부터 그렇게 푸대접을 받았을 리가 없다.


또한 공자와 季康子의 관계에서 공자의 제자들이 출세하게 된 배경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季康子는 공자의 비판성보다 진실성을 더 좋아했다. 한번은 그가 子路, 子貢,  求가 훌륭한 관리가 될 수 있겠느냐고 묻자 공자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季康子는 아버지 季桓子에게 이들을 추천한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잡은 그는 나중에 공자의 제자를 많이 등용했다.


그렇지만 공자 자신은 젊은이들의 이런 성향을 극히 싫어했다. 물질적인 보답을 바라지 않고 3년 동안 공부하려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한탄한 것이 논어에 보인다.
다음은 제자 가운데 중요한 인물과 그 성격 및 요지를 간추려 본 것이다.

子路 : 제자 중 최연장자. 성실 강직하면서도 온화하고 정의로운 성격. 자신의 상사를 지키다 도끼칼에 맞아 죽음.
 求 :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으나 이익에 영합하여 공자의 파면을 받음.
子貢 : 제자 가운데 가장 중용의 덕을 잘 갖춘 사람. 능력에서나 도덕에서 혹은 경제적으로도 성공했다. 공자 사후 사례의 주재자로 추천됨. 6년간 공자묘를 지키기도 했다.
顔回 : 공자가 가장 아낀 제자. 관직을 얻지 못하고 요절.
宰予 : 제자 가운데 가장 반항아. 공자를 비웃고 교훈을 어겨 공자로 하여금 사람을 완전히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魯公과 대담을 나눌 정도로 출세.
子游 : 문학과 의례에 관심. 조정의 음악과 의례를 서민에게 전파.
子張 : 제자 가운데 가장 정력적인 성격을 지님. 동료들에게 인정받진 못했지만 공자 사후 유교 일파를 세웠다고 전함.
子夏 : 현학적이며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공자의 가르침을 체계화하는데 중요한 인물.
曾參 : 효의 이론화로 유명. 정치나 치세보다는 개인의 수양에 관심.

초기 제자들은 여행 전의 공자처럼 관직을 얻어 사회를 개혁하려과 하였다. 반면에 후기 제자들은 교육이나 의례에 더 관심을 가졌으며 사회 전체의 개혁보다는 개인이 수양에 더 힘썼다. 여행 후 관직의 꿈을 버리고 제자양성에 주력한 공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론 후기 제자들이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교육을 통해 보다 더 사회개혁에 기여했다고 생각하며 이는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는 것이다.


7장   교사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것만으로 사회를 개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공자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교사로서의 공자는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확실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당시는 전문적인 교육기관도 없었을 뿐더러 교육이라 해봐야 귀족 자제를 대상으로 한 가정교육이 전부였다. 일반 서민은 사실상 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분과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최소한의 성의만 보이면 제자로 맞아 들였다고 하는 점은 당시로선 기인으로 보이기에 충분했다.


그의 교육목표는 단순한 행정가나 정치인 양성이 아닌 하나의 이상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훌륭한 정치는 기술이 아닌 덕과 인격을 지닐 때 나오는 것이며 이것을 지닐 때 인간 행위의 마땅한 준칙인 道를 깨우치게 된다는 것이다. 공자가 이상적인 인간으로 내세운 君子라는 말의 뜻도 '君'이 임금을 뜻하는 말임을 알면 이 말이 곧 임금이나 그 친척, 즉 귀족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사람을 가르키는 것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공자가 말한 귀족이란 세습이 아닌 능력과 인격에 의한 귀족이었으므로 자신은 학생을 받는데 제한을 두지 않았다. 단, 멍청하거나 돈과 지위에만 관심 있는 사람은 회피한 것으로 보이는데 어쨌든 이런 경향은 대대로 유교에 전통이 되어 지켜졌다.


집이 먼 제자들은 공자의 집에서 숙식을 함께 하며 공부를 했는데 교육방법이라봐야 질문하고 토론하고 때때로 논쟁을 벌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제자들로부터 신뢰를 잃지 않았고 오히려 형이나 아버지 또는 친구가 되어 그들을 대함으로서 그들간의 인격적 유대는 점점 강해졌다. 묵자나 순자가 후에 자신들의 권위를 강조하며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말한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것은 공자가 의도한 것이 실력 양성이 아닌 인격적으로 성숙된 군자를 키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자는 학생들을 편하게 해주는 선생이었지만 학생들에게 아무것도 기대 하지 않는 선생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제자들을 다그쳤으며 엄격한 지도를 펼쳤다. 한번은 子貢이 남을 비평하자 공자는 말했다. '자공은 완전 무결한 인간이 되었구나. 나는 아직도 그럴 만한 능력이 없는데...'  


하지만 이런 부드러운 훈계를 받은 제자들은 규율이 잃거나 반항을 일삼기는커녕 진심 어린 존경을 공자에게 보냈다. 위의 표에서 되먹지 못한 인간으로 묘사된 宰予조차 그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라고 단언했다. 그러나 군자와 小人을 철저히 구분하고 제자들에게 군자의 도리를 가르친 공자의 교육방식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나 하는 것은 의심이 남는다. 백성과 함께 숨쉴 것을 요구한 그가 나는 그들(小人)과 다르다고 하는 엘리트 의식을 가졌다는 것은 의외라 할 수있다.


물론 그 사소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작은 사람(인격적으로든 경제, 신분적으로든)이라는 뜻과 평민이라는 뜻이 함께 있는 소인이라는 용어를 공자가 사용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이런 점이 유교를 갈수록 권위적이고 외퉁수적으로 만들어 간 숨은 요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의문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군자라는 개념을 통해 禮라는 또 다른 개념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사견이지만 어떤 의식이 대중화되면 그 참된 의미보다 세속적인 요구가 강조되는 경향을 볼 때 교육받은 소수로부터의 전파는 허용하되 그렇지 못한 다수로부터의 전파를 억제한 것은 예의 순수성 보전에 중대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禮란 도덕적 기준이 무너진 세상에 정형화된 가치기준을 가져다 줄 행동방식으로 그 의미가 강조되었다. 그러나 禮는 단순한 예의규범이 아니며 단지 감정을 표현하는 형식이며 그 표현은 사회적으로 용납된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유가가 말하는 禮의 實踐은 사회의 전통적인 관행에 대한 지식과 아울러 상황과 상식에 따르는 행동을 하며 그것을 조절하는 능력까지 말하는 것이었다.


공자가 강조한 또다른 하나는 음악이었다. 음악은 심성을 가다듬고 예를 완성하는데 유용하다고 한 말이 나온다. 음악은 보통 시에 반주를 붙여 연주했다. 논어에 자주 언급되는 '詩經'은 마치 인간 행위의 지침서처럼 다루어지지만 실제론 周代로 부터 전해져 오는 시들을 모아 놓은 것에 불과한 듯 하다. 하지만 감정에 충실한 이 시들은 어떤 효용이 있었던 것 같으며 공자도 몇 번은 이 시들을 인용했다고 한다. 또 그 효용 중엔 외교 회담 중에 자신의 뜻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고자 할 때 시가 쓰인 점도 들 수 있다. 마치 오늘날 지하철에 흔히 붙어 있는 유명한 사람의 명언과 같은 역할이 아니었나 한다. 누구나가 아는 짧은 말로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권위 있는 말들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공자가 군자로서 갖추어야 할 품성을 이야기 한 것은 아니지만  '書'에 있는 말을 인용한 것이 눈에 띄는데 이는 단순히 문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공자 사후에야 집대성되어 書經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하지만 예를 행하도록 공자가 직접 지도했다는 말은 찾아볼 수 없으며 시나 음악 혹은 서를 공부시켰다는 진술도 없다. 공자가 정작 중요시한 것은 성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자는 단지 말로만 성실 하는 것은 불충분하며 이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경우에 따라서는 원칙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공자가 제시한 것이 바로 士였다. 士란 서양의 기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쓰이나 서양의 그것이 세습적인 것이라 한다면 공자의 士는 평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며 무사도 아니었다. 그 결과 오랜 후에 중국에선 전사보다 학자를 더 훌륭하게 보는 경향이 자리잡게 되었다.


8장 학인

공자는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 70에 천명을 알았다고 말했다. 그의 인생이 학문으로 점철된 듯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그는 처음부터 교사가 될 생각도 아니었고 학자가 되려고 맘 먹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어떻게 역사를 통틀어 篤學之士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을까?


공자가 책을 많이 읽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많은 인용구와 유교의 라이벌인 묵가조차 그의 박학다식을 인정했다는 것이 증거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칠 때 책에만 의존하지 않았고 학문이라는 개념도 인격수양의 방향에서만 사용했다. 여기서 학계의 가장 해묵은 논쟁 거리가 바로 공자가 책을 지었느냐 하는 것이다. 史記에는 본래 3000편이던 시경을 공자가 305수로 줄였다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공자가 시경에 실린 시를 두차례나 비난하고 시경에 없는 시를 한번 인용한 것을 보아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또 書經에 대해 맹자는 書를 다 믿는다면 書가 없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함으로서 이 역시 공자의 저작이 아님을 암시했다. 반면에 맹자는 춘추라는 책을 공자가 저술하자 亂臣 賊子들이 두려워했다고 했는데 현재의 춘추에는 그럴 만한 귀절이 보이지 않는다. 춘추라는 제목의 책이 여럿있는게 사실이므로 혹 제목만 같은 다른 책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易經이나 禮記 같은 책도 공자가 썼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점을 치더라도 뎍을 지키지 못하면 치욕을 받기 쉽다고 논어에 언급함으로써 易이나 占卜에 관심이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크릴 교수는 어떤 제자가 농사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자 찾아오자 공자가 군자가 배울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한 일화를 사회적 해악이 정치권에 있으므로 초점을 이 쪽으로 둔 것이라고 해석했는데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공자는 같은 시간을 들여 배울 수 있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므로 세부적인 학문보다 포괄적인 학문에 관심을 가진 것 뿐이다. 少年易老學難成 皆前梧葉己秋聲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는 공자가 책을 저술했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기에 앞서 이를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다. 의심나는 것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라는 공자의 가르침에 따라    


9장  철인

공자 시대의 역사현상은 고대 그리이스나 B.C 2100년경의 이집트에서 처럼 개인주의의 발전이 전통적 유대를 이완시키는 시대였다(-빈셀반트). 혼란과 무정부 상태가 계속 될수록 통찰력있는 사람들은 자기반성을 통한 사회규범 회복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런 상황이 그리이스에선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낳았고 중국에선 공자의 철학을 낳았다. 이같은 도덕적 정치적 위기가 닥치면 인간은 본래의 인간성을 되돌아보기 마련이다. 과거의 신은 더 이상 권위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해하는 보다 근원적인 것을 논하게 된다. 공자는 이것을 天이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본질적인 美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철학은 위기가 사라지고 나면 곧 타락하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은 플라톤에 의해 다듬어 졌으나 Plotinus와  Porphyrios의 신플라토니즘의 신비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공자철학도 마찬가지여서 유학은 漢代 동중서와 왕충의 지극히 추상적인 기일원론으로 전개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그와 직접 접한 플라톤이나 크세노폰의 저작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남아 있는 반면 공자의 철학을 가장 선명히 전해 주고 있는 논어마저도 그가 죽은지 한 세기나 지나서 쓰여졌다. 따라서 공자의 철학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부분이 많으며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여기에는 그의 思惟型이 위에 말한 역사적 이유로 포착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으나 그보다 먼저 공자 사상의 근원에 대해 짚고 넘어가야만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어떤 학자는 공자가 당시 중국에서 일어나던 변화를 저지시키고 과거를 부활시키려 했으므로 반동가요 반혁명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공자가 고대 유산을 자주 언급했고 그의 사상 일부의 바탕이 거기서 나온 게 분명하긴 하지만 반면에 그는 고대 문화의 부흥을 주장하지도 않았고, 공자가상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중 거기서 발견할 수 없는 요소도 있다. 또 다른 어떤 이는 공자 이전에 이미 공자보다 훨씬 유능한 사람들이 발전시킨 사상으로 공자가 우연히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그들이 그 근거로 삼는 좌전에는 실재로 공자 직전에 생존한 사람들이 등장해 논어에 보이는 것과 같은 주장을 한 것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들이 1세기 후 까지의 사건을 정확히 예언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이것이 1세기 후 에 쓰여진 조작이라는 증거다.


공자사상의 근원을 알기 위해 그의 종교관을 살펴보면 다소 복잡한 문제에 닿게 된다.
기원전 1122년 이전의 商代 殷人들은 '帝'라는 조상신을 믿었으며 이들에 의해 인간의 운명이 좌우된다고 믿었다. 商을 정복한 주족은 殷人들의 종교적 요소를 받아들여 '天'이라는 신을 최고신으로 모셨다. 이는 사람의 모양(大)에 단순히 획을 하나 더한 것으로 중요한 인물 즉, 죽어서 하늘에 거처하는 조상신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天과 帝가 동일시 된 것이다. 왕은 이들의 도움을 받아 통치를 했고 종교의식은 국가적 의식이었다. 그러나 교통이 발달하고 사람들이 다양한 종교를 접하는 한편 수많은 조상신 앞에서의 서약이 단순한 군사적 우열로 쉽게 깨지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점차 종교에 대한 회의주의가 대두되었다.


공자는 어떤 면에선 전통 종교의 측면을 찬성하고 강조했지만 어떤 면에선 반대하고 억제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는 종교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문제 제기를 삼갔는데 그가 추구한 현실 개혁에 형이상학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자가 祭儀 자체를 즐겼으며 그 형식에 관한 연구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을 天이 보위하는 사람이라고 말했고 절망에 빠졌을 때는 天이 나를 이해할 것이라고 자위했으며 총애하는 제자 안회가 죽었을 때 天이 나를 버렸다고 말하며 울부짖었다고 한걸 보면 종교에 대한 공자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단 마지막 예는 단순한 고통의 울부짖음으로 보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것이 天이 정의의 편이 승리할 것임을 보장해 준다거나 덕의 성공을 보장해 준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랬다면 공자 말년에 쓸쓸히 죽어 가며 비통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결코 그렇게 죽지 않았다. 어쨌던 그는 전설상의 제왕 禹를 귀신을 잘 모셨다고 칭찬하기도 했고 귀신을 섬기는 법을 묻는 자로에게 사람 섬기는 것이나 배우라고 일침을 주기도 했다.  


공자가 天을 생각한 사고방식으로 중요한 예를 들어보자.
공자 이전의 문헌에 덕도 제물처럼 天을 기쁘게 한다는 귀절이 있다. 공자가 이러한 측면을 강조했다면 공자의 윤리적 측면과 일치하는 것이다. 한 예로 商代로 부터 공자시대까지 인신으로 제사를 지내거나 장례식 때 사람을 함께 묻는 관습이 있었는데 공자는 이 뿐 아니라 인형을 함께 묻는 것까지도 강하게 비난하였다. 일반적으로 유가는 인신희생을 반대했고 20세기에 와서는 그 흔적이 발견 될 때까지 아무도 그러한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만큼 이것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공자가 말한 천의 개념에는 비인격적인 윤리의 섭리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천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命의 개념이다. 이것은 운명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그는 위기에 처했을 때 원칙보다는 생명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포기하고 말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가 운명론자처럼 보이는 데가 있다. 子路가 季氏를 섬기고 있을 때였다. 어떤 사람이 공자를 중상하고 있음을 안 子路가 공자에게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겠다고 하자 공자는 '道가 행해져도 命이고 道가 행해지지 않아도 命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이것은 비열한 방법이라고 말해서 입힐 상처를 피하기 위해 명을 끌어낸 것이다.


또 공자는 말했다. "군자의 관심은 도를 행하는 것이다. 빈곤 따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道를 행하는 이외의 일은 하늘에 달렸다고 일축하는 것이다. 마치 아이들에게 방문을 닫지 않으면 생기는 불이익에 대해 구차하게 설명하는 것을 피하고 그저 귀신이 내려본다며 간단히 설명하는 우리 조상들의 방식과 유사한 방식이다.


그렇다면 이제 공자의 종교에 대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다. 공자는 분명 종교적 신앙을 가졌지만 세상을 개혁하는데 들일 정력을 여기에 소모할 만큼 관심을 가진 건 아니었다. 종교는 인간으로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다루는 반면 공자는 인간이 기여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10장  개혁가

공자는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행복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깊은 번뇌에 빠졌고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가 세상을 개조하기 위해 내세운 사상의 근원은 무엇인가.


공자는 단순히 古道의 부활만을 추구하였고 유덕한 선왕의 도로 돌아가라고 권했을 뿐이라는 게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였다. 공자가 자신의 사상적 근원으로 고도를 인용한 것이 두번 있었고 과거에 비교해 현재를 자주 비난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위정자에게 한 비난은 자신에게 개혁의 기회를 주지 않음을 비난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전통을 강조한 것은 공자만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악을 제거하는 이외의 어떤 변혁도 금지했고 입법자(?)들은 옛것을 숭상하는 정신을 심어 주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전통을 강조했다는 것은 일면 당시의 문화가 상당히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반개혁적이라고 간단히 단정짓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공자도 단순한 추종이 아닌 적절하고 상식에 맞는 전통을 생각했다. "周는 앞선 두 왕조의 경험을 살필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다. 周의 문화는 정말 찬란하구나. 나는 周의 전통을 따르겠다." 는 말에서 볼 수 있듯이 공자가 전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추종한 예는 없다. 맹자가 공자는 상고의 제왕 堯, 舜, 禹의 敎說을 받았다고 했으나 논어에는 완벽한 정치의 방편으로 그들을 모방하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없으며 그들을 언급한 것도 아주 적은 수이다. 하지만 공자는 周 文王의 정신적 계승자를 자처했고 文王의 아들 周公을 존경한다고 했다. 이런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周公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주공은 공자보다 500년을 앞서 태어나 인물임에도 그를 유가 사상의 근원으로 보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書經에는 주공이 직접 지은 것으로 보이는 곳이 있는데 공자사상과 유사함을 보이고 있는 면이 있어 놀랍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문화가 낮은 周족이 문화적으로 우월한 商족을 지배하려면 필연적으로 가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周初의 지도자는 넓은 땅을 정복하기 위해 극히 유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대표적인 이가 周公이다. 周의 지도자들은 교통이나 화폐제도에 관한 경험이 상대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봉건제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현명했던 그는 힘만으로 중국을 계속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자신들의 무력사용을 天의 명령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며 입지를 강화시켜 나아갔다.(3장 공자 시대의 중국 참조)


周왕들이 유덕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키케로나 로마인들이 고대 덕의 전형으로 칭찬했던 카토가 손님을 접대한 후엔 습관적으로 손님 접대에 부실했던 노예를 직접 채찍을 들고 가 때렸다고 하는걸 보면 유덕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商족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周公은 백성의 비위를 맞출 필요를 절실하게 느꼈고 그의 생각은 임금의 의무는 백성의 복리를 가져오는 것이며 이를 지키지 못하는 군주는 자격이 없다는 관념을 깊이 심어 놓았다. 이것이 실제로는 지켜지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도 공자로서는 큰 힘이 되었다.


이제 공자가 왜 주나라 周公을 존경한다고 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공자가 생각한 세상은 백성을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써 질서를 바로 잡는 세상이다. 사해동포로 대표되는 이런 생각은 민주주의적인 사고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공자의 민주주의가 다른 점은 공자가 그런 사회를 접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백성을 신뢰했다는 것이다. 공자는 모든 잘못은 군주에게 돌렸고 군주가 선량하고 유능하기만 하다면 백성은 할 바를 다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역할을 다하기만 하면 신분에 맞는 약간의 사치를 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허나 그렇지 않은 군주의 사치는 거머리와 같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공자가 백성 편이었다 해도 그는 단 한번도 정치를 백성에게 맡기자고 한 적은 없었다. 공자가 소인을 논의에서 제외한 것을 7장에서 못마땅하게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는 건 교육의 기회균등을 주장한 점이다. 소인도 가르침을 받으면 군자가 될 수 있고 군자는 사회를 바르게 이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자가 말한 民이 귀족을 뜻하는 것인지 모든 사람을 뜻하는 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확실히 중국에는 노예제가 있었으나 그 수는 극히 적어서 漢代에도 전 국민의 1%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머지도 강력한 통제 아래 살았으며 지배자들의 백성에 대한 지배권은 절대적이었다. 공자가 원한 것은 이런 규제를 풀고 백성이 보다 많은 자유를 얻는 것이었다. 물론 방법은 없었지만... 공자는 반란군의 세력에 두번이나 가담하려 했지만 이는 단순한 세습귀족의 대체를 위한 반란이었음을 상기할 때 공자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의 전말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백성들은 정치하는 방법을 몰랐고 교육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민 중에 왕이 나오게 된 것은 유교 교육이 널리 퍼진 몇 세기 후의 일이었다. 따라서 공자는 백성 전체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정부의 운영과 행정에 참여하도록 누구에게나 기회를 주되 능력이 입증된 사람에게만 자격을 줄 것을 제안했다. 이는 일종의 귀족정치이긴 하지만 세습에 의한 것이 아닌 덕망과 능력에 의한 귀족정치였다. 크릴 교수는 공자의 지배이론이 부실함을 지적했으나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아직 대중적인 교육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지배까지 논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당시엔 분명 지배 능력을 귀족만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자는 이상만을 고집하며 현실을 부정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귀족정치를 부정하기 보다(궁극적으론 그것이 목적이었겠지만) 어느 한도 내에서 귀족정치를 인정했고 귀족들을 군림자가 아닌 봉사자로 만드려고 했다.


그는 인류에 공헌하는 사람을 칭찬했으나 만용을 자랑하는 사람을 경멸했고 육체적 용기를 도덕적 용기보다 낮게 평가했다. 이런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는 귀족들을 경멸했고 儒라는 집단에 희망을 걸었다.


공자는 君子혹은 士라고 부르는 이들에게 붓과 책을 무기로 주어 권좌에 앉아 있는 강자를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대체할 것을 명하였다. 이것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하였다.

  
11장  儒/유

儒란 말은 귀족들이 공자처럼 학식에만 의존하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논어에 이 글자가 보이는 건 단 한번뿐이지만 기원전 3세기부터는 유가들도 이 글자를 자랑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유교는 기원전 2세기경에 승리를 쟁취하고 말았다. 3세기에 걸친 투쟁은 유교의 성격을 상당히 바꾸어 놓았고 공자에 대한 관념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 3세기 동안 중국은 과거를 벗어나 정치 사회 정신적인 변화를 거듭했다. 이 시기에 각국의 군주들은 서로 중국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절치부심했다. 곧 통일 왕조가 등장하리라는 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도의 정치술을 제공하는 유가들은 크게 대우받았다. 군주들이 전 중국을 차지하려는 각축전에서 학자들의 도움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평민에게 교육이 점차 보급되면서 해방의 기운이 조성되자 군주들도 더이상 자기 맘대로 통치할 수 없게 되었다. 또 한가지 유가에는 유치한 수준이지만 관료후보생을 교육하는 일정한 기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가의 라이벌인 법가 묵가 도가 등에서는 유가의 주장을 따르면 중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순자와 맹자의 주장을 반박하며 나름대로 유가에 버금가는 철학을 내세웠다.


하지만 유가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체적인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순자가 俗儒라고 부른 이들은 공자의 가르침보다 돈에 관심을 가졌고 반대파에게 유교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어 주었다. 이는 제자를 받는데 제한을 두지 않은 공자의 방침이 큰 이유가 되었다. 모든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그의 태도는 옳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발언 때문에 후세의 유가들은 학생을 뽑는 기준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공자의 다른 실책은 자신의 위대함이 역경에서 만들어진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일찌기 공자는 어린시절을 회고하며 스스로 미천했다고 하였지만 정작 교육은 정치술이나 궁중제례에 치중한 것이다. 하지만 유가 중에는 욕심없고 인격수양을 이룬 사람들이 분명 많이 있었다.


12장   傳設의 발전

공자 직후에 성립되어 유가를 통렬히 비난하고 나선 묵가를 통해 보면 공자 이후의 유가는 이미 상당한 변질을 가져오고 있었다. 묵자가 유가의 운명론을 비난하고 나섰다는 점이나 지나치게 옛것을 무조건 모방한다고 비난한 걸 보면 공자의 생각과 후의 유가의 생각이 상당히 동떨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일부 유가는 학문에는 관심이 없고 정치적인 출세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이 꽤 되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공자의 교육방침으로 보아 이미 예측된 것이었다. 공자는 사유에 대한 원칙은 제시했지만 진리의 고정된 척도는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개개인에게 진리를 발견할 책임과 자유를 맡겼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철학이나 생각이 절대 진리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공자가 죽자마자 절대적인 지적 권위를 찾기 시작한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古聖王에 대한 설화는 급속히 발전하고 또 증가하였다. 禹왕은 한때 농부였다고 하는 주장이 확산되고 상고 시대에는 德望의 有無로 대신이 선발되었다고 하는 주장이 일반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세습 귀족들이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자리까지 독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실제로 이들의 주장대로 왕위를 신하에게 물려주는 예가 있었으나 이는 수만 명이 목숨을 잃는 비극으로 끝났다.


하지만 유가가 궁극적으로 왕위를 德의 유무로 평민 가운데서 선발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내세운 증거인 堯典은 공자 사후 150년 이내에 지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식의 위작은 매우 성행해서 맹자가 '역사서를 모두 믿는다면 차라리 그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위작의 결과 공자상은 너무나 왜곡되었다
맹자는 공자 사후 1세기가 지나 태어났다. 그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백성을 중시하고 공자보다 일보 전진한 구체적인 경제 철학 정치에 관한 학설을 많이 주장하였는데 학자를 대하는 군주의 태도에 대해서도 역설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 같다. 하지만 그도 다른 俗儒와 마찬가지로 호사스런 생활을 동경했으며 그런 그가 그 시대 가장 뛰어난 유가였다는 사실은 다른 학파로부터 공격을 받는데 부단히 이용되었다. 도가나 법가 묵가들은 끈질긴 노력을 통해 유가학풍내에 자신들의 이론을 삽입시키는데 성공했으며 그럴수록 공자의 진면목은 더욱 찾기 어렵게 되었다. 맹자도 이런 설화를 믿었던 것 같으며 마침내 공자가 노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지냈다고 말하기도 해 공자상의 왜곡에 한 몫을 했다.


법가나 도가에 의한 유교의 왜곡은 더욱 심한 것이었다. 易經이 그 예인데 이 점치는 책을 공자가 썼다고 하는 설이 있지만 이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또 공자는 점복에 대해 인정한 적이 한번도 없는 것이다.


13장   재난  

권력의 부침이 왕성했던 시대 공자만이 이런 세상을 개혁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법가라고 부르는 사상가 집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순자의 제자였던 韓非子로 대표되는 법가는 전체주의적인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군주의 자리마저 백성들 중에서 선발할 것을 주장하는 유가와는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법가는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성을 무지의 상태로 둘 것을 주장했고 도가의 사상은 이들의 전제군주제 확립에 요긴하게 쓰였다. 따라서 도가적인 것과 법가적인 것은 상호 공생적인 관계에 있었고 실제로 가장 법가적이라 일컬어지는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하려 신하를 보내는 등 초현실적이고 신비적인 도가적 행동을 많이 했다.


반면에 유가는 백성의 교육에 노력한 게 사실이었고 백성이 똑똑해질수록 황제는 그들을 맘대로 지배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법가의 눈엔 유가가 눈엣가시처럼 보였다. 유교 교육이 상당히 퍼진 지역에선 법가 사상이 발을 붙이지 못했다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진시황의 秦은 문화가 낙후된 서쪽 변방 국가였던 것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게 된 데는 순자의 제자인 韓非子와 李斯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진을 방문한 순자가 나라의 질서 정연함과 관리에 복종하는 백성들의 모습에 감탄했다는 기록을 볼 때 그의 제자인 韓非子나 李斯가 법가사상의 선두가 된 점은 납득할 수 있다.


진은 가공할 공포정치로 중국을 지배했다. 능률은 인명보다 우선 가치였으며 백성은 황제의 소유일 뿐이었다. 법가가 봉건제를 폐지하려 한 것은 봉건제로 인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만 그들이 군주에게 준 중앙집권의 권력은 백성들에겐 봉건영주가 행사하던 폭정과 다를 게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가들은 황제가 봉건제를 시행하지 않는다고 거세게 항의했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이 요구가 먹혀들리 없었지만 진시황으로 하여금 유가를 억압토록 해 반대로 유교 운동을 강화시켰다. 법가사상이 유교에 미친 진정한 영향은 탄압이 아니라 왜곡이었다. 민주적이고 대중적인 유가는 법가에게 치명적인 해악이었으므로 그들은 유교경전에 법가적인 문구를 삽입함으로서 유교의 혼란을 부추겼고 이는 크게 성공했다. 이때부터 공자는 황제를 옹호하고 신분제를 주장한 과거회기적인 인물로 둔갑했다. 논어에 있는 이런 많은 구절이 이들의 조작임이 밝혀지고 있다. 즉 無所不知라는 성인관념을 유교내에 확고하게 심어 놓은 것이다.


법가가 漢代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고 유교에 대한 공작을 완료했을 땐 이미 공자고 유교고간에 그 진면목은 철저히 파괴되고 만 후였다.


14장  승리
  
기원전 2세기 한의 황제가 유교를 공인한 것은 일반백성이 유교를 지지하였고 유교의 공인을 장기간 군주에게 강요한 결과였다. 유능한 백성중에 관리를 뽑아 이들을 백성을 행복하게 만드는가의 여부로 판단해야 한다는 유교와 백성은 아무것도 알 필요가 없고 군주를 따르기만 하면 된다는 법가는 첨예하게 대립되었던 것이다.


몇 세기 동안 서로 치열하게 투쟁해 온 유가와 법가는 진시황이 법가를 선택함으로서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러나 진시황이 법가를 선택하게 된 데에는 순수한 그의 학문적 경향보다는 개인적 환경이 영향을 끼친 바가 더 많았다. 진시황은 13살에 재위에 올랐으며 그의 어머니는 매춘부였다. 그는 어머니의 정부에게 광대한 봉토를 주었는데 스무살 때는 군대를 장악한 동생이 반란을 일으켜 힘겹게 이를 진압했으며 어머니의 정부마저 반란을 일으켜 진압해야 했다. 이런 사건은 진시황으로 하여금 타인을 믿기보다 의심하며 정권을 혼자 장악할 것을 주장하는 법가를 추종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중국을 정복한 이후에도 하루에 백근이나 되는 서류들을 혼자 검토했으며 신하들을 배제한 채 모든 결정을 혼자 내렸다고 한다.


이런 통치는 일견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수많은 사람들은 산 속으로 도망가거나 유가의 진정한 왕자와 진시황을 비교하며 불만분자가 되어 갔다. 그러나 진시황이 반유교적인 인물이며 철저한 법가 사상가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유가를 죽인 것은 사실이나 그 수는 과장되었고 불지른 책도 역시 과장되었다. 다만 자신의 정책을 비난해 기분을 상하게 하는 자가 유가에 있다는 사실이 탄압의 직접적인 이유가 될 것이다.


최초의 반란은 일개 농민인 陣涉이었다. 요역에 징발되었으나 기일을 지키지 못해 처형당할 처지에 처한 그는 동료들을 설득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동부지역을  휩쓸었다. 그는 자신을 楚王이라 자칭했으나 진군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다.
진섭을 이은 차기 주자는 項羽였다. 그는 타고난 전사였음에도 힘만으로 중국을 정복하려 들었기 때문에 유방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유방이 漢高祖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유교를 존중하고 철저히 유교적인 지배를 단행했기 때문이었다. 무식한 그에게 유가들의 궁중의례는 필요한 것이었다. 또한 유가는 고대문화의 유일한 수호자였고 따라서 왕자의 가정교사는 으례이 유가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민주적이고 온화한 유교를 지지했던 것이다.


한고조를 이은 文帝는 유교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로 중국을 전무후무한 태평성대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 때 법가가 철저히 배척 당한 건 아니었다. 유가들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려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秦代의 세련된 통치법을 차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文帝 다음의 武帝는 관료 선발에 법가를 제외시키고 유교경전을 연구하는 博士官을 두는 한편 유교를 공인했다.


그러나 무제는 秦 이후 어느 정권보다 중앙집권적이었고 전제적이었으며 권위주의적이었다. 이미 한비자의 이론에 흥미를 느끼고 있던 무제는 유가를 가장한 법가 公孫弘을 측근에 앉히고 점차 전제주의적인 통치를 해 나아갔다. 그는 귀찮은 유가들을 순교자로 만들기 보다 회유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고 학문을 연구했다. 물론 그들이 연구한 학문이란 정부 비판과 거리가 먼 경전의 해석에 치우친 학문이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치부의 도구로 학문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점점 공자상은 왜곡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정부의 관리 선발 시험마저 문헌을 강조했기 때문에 고전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경향이 한무제 때부터 시작되었다.


흔히 한무제 당시는 유교의 승리기로 규정되지만 사실 유교의 왜곡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무제는 유교를 지원하고 학자를 우대했지만 이는 꿀로 학자들의 입을 막은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학자들도 자신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생활 기반이 되어 주는 황제를 비난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군주에 대한 충성보다 원칙에 대한 충성을 지킬 것을 강조한 공자의 가르침은 잊혀지지 않았으며 황제의 교묘한 유가통치책 못지 않게 유가들도 황제를 견제할 수 있었다. 오히려 유가들의 입김은 황제의 통제보다 더 강한 경우가 많았다. 정치에 미친 유교의 영향은 시대마다 달랐지만 그 영향은 구석구석 스며들어 거대한 중국에서 2000년 이상 원칙으로 존중되어 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게다가 공자의 가르침은 중국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전파되어 오늘날의 민주주의를 꽃피게 만들었다.


15장  유교와 서구민주주의

서구의 민주주의는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 의해 크게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혁명들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았는데 유교의 기본 원리와 계몽주의 철학에는 유사한 점이 많고 계몽주의 철학이 발전한 17,8세기는 중국의 유교가 유럽에 소개된 시기라는 점이 흥미롭다.  


프랑스 혁명이 유교의 영향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논쟁 거리로 남아 있다. 이점은 양문명을 중재했던 제주이트 선교사들의 활동에서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중국에 관해 거의 아는 것이 없던 서양인들에게 이들이 보낸 중국에 대한 자료는 경이로운 것이었다. 세습도 없고 관료는 시험에 의해 선발되며 특전도 없다는 사실은 당시 서양인들에겐 충격이었다. 중국 궁정안에서 상당한 지위를 확보한 제주이트 선교사들은 당시 유행하던 형이상학적인 유교 대신 공자의 초기 유교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것만을 선별해 고국으로 보냈던 것이다. 라이히바인이 '계몽주의는 공자의 중국밖에 알지 못한다'고 말한 이유가 여기 있다. 계몽주의는 공자에게서 많은 영감을 얻었으며 형이상학적 윤리학과 봉건사회의 유대를 타파하려는 사고가 이미 2000년 전에 공자에 의해 주장되었음을 알고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의 중국이 결코 이상사회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서구의 많은 학자는 공자마저 제주이트 선교사들의 조작으로까지 보려 했다. 당시의 중국은 明말의 부패가 횡횡할 때였고 만주족들의 침략이 시작될 때였기 때문이었다. 결국, 제주이트 선교사들은 불신을 받은 끝에 각국에서 추방되어 마침내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개 드는 일은 서양에서 없었다.


그러나 유교정치 사상이 서구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핫터슬리는 Short History of Democracy 라는 저서에서 아시아 고대문명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이상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음을 지적했고 케네는 중상주의 이론을 발표할 때 단지 중국의 이론을 해설한 것에 불과하다고 덧붙였다.


미국의 초기 교육제도마저도 중국의 교육제도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제퍼슨은 덕망과 재능에 따른 인위적인 귀족제도를 인정하고 교육의 3가지 원칙을 천명했는데 교육이 국가적 관심사이며 능력 있는 학생을 지역별적 규모와 전국적 규모로 나눠 삼단계로 나눠 선발할 것(중국의 縣, 省, 京師의 시험처럼) 그리고 빈부나 가문의 차이를 두지 않고 유능한 사람을 관리로 임명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교육제도 혹은 교육관념과 같다.


제퍼슨의 案이 채택되진 않았지만 능력을 기초로 하는 관리선발은 설득력을 얻어 서구에서 문관제도가 자리 잡는데 초석이 되었다.


16장   공자와 중화민국

공자와 중화민국의 관계는 부정적인 것이었다. 유교사상이 황제의 권위를 드높이는데 사용되었다는 견해 때문에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중화민국 관계자들에게는 혁명을 서구의 민주주의로 유교를 대체하려는 것으로 보게끔 만들었다. 그러나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여러 번 자신이 유가철학의 현대적인 계승자라고 자처하며 공자를 민주주의자라고 호칭했다.


손문은 이 밖에도 유가적인 도덕의 회복을 주장하고 유가경전을 국보로 보전하자고 까지 말했다. 중국이 서구에 뒤떨어진 것은 과학과 기술뿐이지 정치, 철학은 더 앞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이면에는 중국인의 자신감을 회복하려 한 그의 희망이 담겨 있는 게 사실이지만 단순히 그것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상이 담겨 있다. 이점은 마르크스 이론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잘 알 수 있다.


손문이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인데 유교적인 사회 성원간의 협동과 사해동포적인 애정을 강조하며 마르크스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잉여가치설을 부정한 것은 그의 사상적 토대가 공자의 유교에 있음을 잘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손문은 서구의 민주주의가 기대했던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로 잘못된 인간 평등관을 들었다. 그는 공자나 제퍼슨 처럼 능력에 의한 신분제를 인정했고 진정한 평등은 기회균등뿐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서구와 달리 5권 분립제를 도입했는데, 이중 2개는 고시원과 감사원으로 유교적 관념이 짙게 배어있다. 고시원과 감사원 모두 기회의 균등한 제공 여부를 관장하는 역할을 함은 물론이다. 이 기구가 역할을 다하지는 못했지만 앞으로 중국 민족이 앞으로도 오랫동안은 공자의 영향 아래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증거는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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