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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 해설 / 손창섭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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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손창섭


 작자 : 손창섭(孫昌涉)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

 배경 : 육이오 전쟁 직후의 여름 비 오는 날(장마) 부산 동래 부근 외딴 마을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어조 : 소외된 인간상을 피학적(被虐的) 어조로 묘사함.

 문체 : 간결체

 성격 : 실존적, 허무적, 냉소적, 비극적

 구성 : 단순 구성, 평면적 구성

 

 발단: 비가 내리는 날이면 원구에게는 동욱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회상됨. - 비내리는 날이면 원구는 동욱, 동옥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떠오르며 마음이 무거워진다.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초라한 몰골의 동욱을 만나 술을 마시는데, 자기 남매는 미군 부대의 초상화를 그리며 살아간다는 말, 자신이 원구라면 동옥과 결혼하겠다는 말 등을 한다. 어깨가 처져 걸어가는 동욱을 보며 목사가 되길 원하면서도 술을 사랑하는 그를 아껴 줘야 하겠다고 생각한다.

 

 전개: 원구는 황폐한 동욱의 집을 방문하여 동욱과 그의 누이동생 동옥을 만남.- 원구는 비 오는 날 음산하고 황폐한 동욱의 집을 찾아가지만 동욱은 없고 동옥이 그를 경계한다. 돌아가는 길에 동욱을 만나 다시 되돌아온 남매의 집은 빗물이 새는  등 생활이 비참하다. 원구는 빗물이 넘치는 바께쓰를 쏟는 바람에 동옥이 소아마비임을 알고 우울해진다.

 

 위기: 동옥의 자조적인 웃음. 그들의 유일한 생계인 초상화 작업을 못하게 함. - 원구는 가끔 동옥의 집을 방문하고 동옥은 차츰 원구에게 마음을 연다. 비가 세차게 퍼부어 원구가 동욱의 집에서 자게 되었을 때, 동욱은 잠꼬대같이 동옥과 결혼해 줄 수 없느냐고 말한다. 사오 일 뒤 동욱이 원구를 찾아와 초상화 일을 못하게 되었다면서 자기가 원구라면 동옥과 결혼하겠다는 말과 자신은 기어코 목사가 되겠노라는 말을 한다.

 

 절정: 동옥이 노파에게 돈을 떼이고, 세 들어 살던 집마저 떠나게 됨.- 며칠 뒤, 원구가 동욱의 집에 들르니 동옥은 뒷방 주인 노파에게 돈을 떼이고 세들어 살던 집에서 마저 쫓겨나게 되어 이틀째 앓아누워 있고, 동욱은 그런 동생을 발길로 걷어차며 속상해 한다.

 

 결말: 원구가 그 집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들은 떠나고 그는 자책(自責)감에 빠져 돌아옴. - 나중에 원구는 동욱의 집을 다시 찾아가지만 집주인은 바뀌어 있고, 동욱 남매는 보이지 않는다. 원구는 새 주인의 말에서 동옥이 팔려간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을 하고 분노하지만, 동욱 남매를 외면한 자신에게도 죄책참을 느끼며 무기력하게 돌아온다.

 

 

 경향 : 전후의 실존주의와 휴머니즘[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은 대체로 우울하다. 동시에 상식을 깨뜨리고 의외의 충동으로 삶과 대치하며, 비사회적이고 우발적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넓은 세계에서 호흡할 수 없으며, 늘상 폐쇄되어 있다. 그 상징적 공간이 '혈서' 등에 중심 배경으로 놓여 있는 '방' 이며 이 소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작자 자신도 그의 소설을 '나와의 공존과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 기성 사회, 기성 권위에 대한 억압된 인간적 발산' 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의 소설을 냉소와 자조, 허위에 대한 불신, 애정의 마비, 생활의 분열로 성격 짓게 한다. 특히, 이 '비 오는 날' 의 경우는 전쟁 상황의 한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삶이기에 그 분위기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고, 특히 '비가 온다.'는 눅눅한 배경 설정은 이를 더욱 짙게 물들인다.]

 

 제재 : 월남한 동욱과 동옥 남매의 삶

 주제 : 전쟁의 극한 상황이 가져다 준 인간의 무기력한 삶과 허무 의식

 

 특징 : 원구라는 인물이 동욱 남매의 불구적 삶의 형태를 회상하는 구성, 사회적 배경과 상황적 배경, 시간 공간적 배경이 적절히 배합되어 생존의 비극성을 밀도있게 구현. '- 것이다'라는 강조 또는 간접 화법 표시의 종결 어미를 자주 사용(사건을 간접적 제기, 사건 자체보다는 그 사건에 의해 환기된 서술자의 냉소적인 감정을 전달), 사태의 심각성을 강조하는 부사어를 자주 사용한다.(인물이 처한 열악한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는 양상을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킨다. 다시 말해서 상황이 그만큼 인물들이 거부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려준다.)


 등장 인물 :
정적(靜的) 인물로 직접 묘사 방법이 주종(主從)을 이루고 있다.

 동욱 : 1·4후퇴시 불구인 여동생 동옥을 데리고 월남하여 미군의 초상화 주문을 맡아 생계를 꾸려 나가던 동욱은 초상화 주문을 맡을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동생 동옥을 버리고 가출해 버리는 절망적인 인물이다.

 동옥 : 불구의 몸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일로 소일하는 동옥은 원구를 믿고 사랑하나 생계가 막연해지고 오빠마저 가출하자 어디론가 떠나 버리는 정적 인물이다.

- 동욱과 동옥을 비교한다면 동욱은 현실 타개를 하려는 형이고, 동옥은 현실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내면에 칩거하는 형

 원구 : 이 소설의 나레이터로서 동욱 남매의 비참하고 절망적 삶을 이야기하는 정적 인물로 동욱 남매에 대한 동정적이지만 무기력하다.

동욱과 동옥은 세상에 내던져져 방향을 상실하고 절대적 가치도 잃은 존재로 파악된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실존주의적 인간관에 바탕을 둔 것이다.

 

 줄거리 : 6·25 전쟁 당시 임시 수도에 피난 와서, 대학생이던 원구는 달구지 목판 장수를 하다가, 친구 동욱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 본다. 원구와 동욱은 한 마을에서 자라, 국민 학교에서 대학까지 줄곧 동창이었으므로 원구는 어린 시절의 동욱의 누이 동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옥이가 중도에 소아마비를 앓아서 불구가 된 것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재회를 통해 알게 된다. 원구가 자주 동욱이네 집으로 와서 동옥을 만나는 사이에 둘은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동욱이 원구를 찾아와, 초상화 그리는 일도 이제 끊겼다고 하면서 동옥이 더욱 외롭고 불안해 하니 가끔 찾아와 위로해 줄 것을 부탁한다. 다시 비 오는 날 그들을 찾아간 원구는 동옥이 그동안 모아둔 돈을 빚낸 주인 노파가 도망을 가버려 절망하는 동옥의 모습에 안타까워한다.

 

한달 가까이 계속된 장마로 일을 쉬고 있던 원구가 다시 동욱을 찾아갔으나, 주인은 바뀌고 동욱 남매는 어디론가 가출한 채 돌아오지 않는다. 주인이 혹시 동옥을 사창가에 팔아먹은 것은 아닐까 하는 격분을 안고 원구는 돌아온다.

 작품 개관 :  '비 오는 날'은 전쟁의 고통과 비참상을 다루거나 전쟁의 후유증과 가치관의 혼란을 다룬 1950년대 문학으로서 전쟁이 우리 문학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 주기 위한 제재로 선정되었다. 이 작품은 전후 소설을 대표하는 것으로, 절망의 시대 분위기가 빚어낸 비인간적이며 무기력하고 참담한 삶의 모습을 그려 내어 전쟁이 가져다 준 물질적, 정신적 상처와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을 얼마나 무기력하고 황폐하게 만드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 작품은 그로 인한 절망이 단순한 인간애로 극복될 수 없다는 인식을 드러내 주고 있다.

 출전 : 1953년 11월 [문예]

 

 

 이렇게 비 내리는 날[배경으로 비극적 상황을 암시, 비의 상징성 : '비 오는 날'에서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라, 이 소설의 분위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 비는 등장인물이 처해 있는 전후 시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으로 질척거리는 거리에 내리는 비는 시대적 부정성을 뜻한다. 청명한 날이 없는 시대, 그들을 계속 무겁게 누르는 불운을 비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는 절망의 시대를 껴안은 채 고통받는 존재들을 질척거리는 비를 맞고 사는 것으로 극화하고 있다.]이면 원구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 남매의 음산[날씨가 흐리고 으스스함. 을씨년스럽고 썰렁함.]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映寫幕) : 영화, 슬라이드. 환등을 비추는 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 여동생 동옥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 원구에게 있어서 눅눅하고 끈끈한 불쾌감을 주는 비와 함께 연상되는 동욱과 동옥, 이들은 비 오는 날처럼 우울하고 불행한 삶의 모습을 지닌 인물들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려져 가는 목조 건물[동욱 남매가 사는 6·25 전쟁 후의 비참하고 절망적인 현실 상황을 드러내 주는 공간적 배경이다.]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의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원구의 귀에는 ~ 것 같았다. : 여기서 비는 전체의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배경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동욱 남매를 생각할 때마다 원구의 심정이 아주 우울해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원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삶이 무기력하고 우울하며, 심지어 불구(不具)적이기까지 한 동욱 남매의 인생, 다시 말해서 우울하고 비참한 삶을 상징]들이었다. - 동욱 남매에 대한 회상(작품 전체의 도입부) 비오는 날의 음울한 분위기와 결합

 

동욱의 거처를 왕방[往訪) : 가서 찾아 봄]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삶의 갈등과 답답함을 해소).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愛酒家)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 끝으로 잔굽[잔 밑바닥에 붙은 나지막한 받침]을 핥았다[동욱의 궁핍한 모습도 나타남].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몇몇 교회에서 다년간 찬양대를 지도해 온 동욱의 과거[기독교 가정에서 ~ 지도해 온 동욱의 과거 : 동욱이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목사가 될 꿈을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전쟁 때문에 꿈이 산산조각 난 비극성을 부각시키고 있다.]를 원구는 생각하며, 요즈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동욱은 멋적게 씽긋 웃고 나서 이따만큼[이따금] 한 번씩 나가노라(전쟁이 가져다 준 신에 대한 회의)고 하고, 그런 때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동욱은 소매와 깃이 너슬너슬한[거칠게 성긴, 다 헤어져 너덜너덜한] 양복 저고리에 교회에서 구제품[재해나 불행으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도와주기 위한 물품.]으로 탄 것이라는,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검은 줄이 죽죽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구두가 아주 명물이었다. 개미 허리처럼 중간이 잘룩한 데다가 코숭이[신줄기의 끝. 여기서는 신발의 앞부분]만 주먹만큼 뭉툭 솟아오른 검정 단화[(短靴)목이 짧아 발목 아래에 오는 구두로 장화(長靴)의 반대]를 신고 있었다. 그건 꼭 채플린[무성 영화 시절 활동한 미국의 대표적인 희극 배우]이나 신음직한 괴이[이상야릇함]한 구두였기 때문에 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원구는 몇 번이나 동욱의 발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동욱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통해 동욱의 비극적인 삶을 강조) - 동욱과의 만남(애주가인 동욱, 성장 배경과 관련한 종교인 기독교)

 

그 동안 무얼하며 지냈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동욱은 끼고 온 보자기를 끄르고 스크랩북을 펴 보이는 것이었다. 몇 장 벌컥벌컥 뒤지는 데 보니, 서양 여자랑 아이들의 초상화가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그 견본을 가지고 미군 부대를 찾아다니며 초상화의 주문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한 것이 아주 헛일은 아니었다고 하며 동욱은 닝글닝글[보기에 별로 유쾌해 보이지 않는 웃음으로 '능글능글'을 응용한 작자의 조어(造語)] 웃었다[동욱이 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녀서 영어를 할 줄 알기에 미군 부대를 다니며 초상화 주문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하며 닝글닝글 웃는 것은 대학 영문과를 다니고도 겨우 초상화 주문이나 받으며 생계를 꾸려 나가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자조이자 자신을 이렇게 만든  세상에 대한 조롱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전쟁으로 인한 극빈이 동욱의 성격마저 일그러지게 했음을 알 수 있다. ]. 동욱의 그 닝글닝글한 웃음을 원구는 이전부터 몹시 꺼렸다.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자조적(自嘲的)이요, 어쩐지 친애감조차 느껴지는(원구 역시 냉소적 성격임을 추리할 수 있으며 역시 원구도 시대의 희생자이기에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끼기에 친애감을 느낀다는 말이다.) 그 닝글닝글한 웃음[동욱의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회적 상황이 동욱을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인물로 만들었음]은 원구에게 어떤 운명적인 중압[극도로 빈곤한 삶에서 오는 고뇌]을 암시하여 감당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상대방을 조롱하는 ~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 동욱의 성격적 특성을 제시한 부분으로  동욱의 웃음이 암울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고서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원구가 결말에서 자책감을 느끼게 되는 관계를 암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동욱이 동생을 자신에게 맡기고 싶어한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대체 그림은 누가 그리느냐니까, 지금 여동생 동옥이와 둘이 지내는데, 동옥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더니 초상화를 곧잘 그린다는 것이다. -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는 남매의 비참한 삶

 

동옥이란 원구의 귀에도 익은 이름이었다. 소학교 시절에 동욱이네 집에 놀러 가면 그 때 대여섯 살밖에 안 되는 동옥이가 귀찮게 졸졸 따라 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동옥은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 한창 유행되었던, '중중 때때중 바랑['배낭'의 변한 말, 중이 등에 지고 다니는 자루 같은 주머니] 메고 어디 가나'를 부르고 다녔다.(전쟁전의 정상적인 삶) 그 사이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보니 동옥의 모습은 전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동욱의 말에 의하면 지난번 1·4 후퇴 당시 데리고 왔는데, 요새 와서는 짐스러워 후회할 때가 있다는 것이었다.[동욱의 말에 ~ 있다는 것이었다. : 동욱의 가학적 행위의 이유가 되는 구절로 사건 결말을 예비하여 필연성을 부각하는 복선(伏線)에 해당한다.] 그의 남편은 못 넘어 왔느냐니까, 뭘 입때[여태] 처년데 했다. 지금 몇 살인데 미혼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원구는 혼기가 지난 동욱이나 자기 자신도 아직 독신인걸 생각하고, 여자도 그럴 수가 있을 거라고 속으로 주억거리며 그는 입을 다물었다. 동옥의 나이가 지금 이십오륙 세가 아닐까 하고 원구는 지나간 세월과 자기 나이에 비추어서 속어림[마음 속으로 헤아려 짐작함]으로 따져보는 것이었다. - 동옥의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

 

술에 취한 동욱은 다자꾸[자꾸. 여러 번, 다시금 되풀이해서] 원구의 어깨를 한 손으로 투덕거리며 동옥이 년이 정말 가엾어, 암만 생각해도 그 총기며 인물이 아까워, 그런 말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다시 잔을 비우고 나서, 할 수 있나 모두가 운명인 걸 하고 고개를 흔드는 것이었다. 동욱은 머리를 떨어뜨린 채 내가 자네람 주저없이 동옥이와 결혼할테야 암 장담하구 말구[가정법을 써서 자신의 희망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동욱의 말이다.], 혼잣말처럼 그렇게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동욱의 그런 말에 원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면서도, 암 그럴테지 하며 동욱의 손을 쥐어 흔드는 것이었다(원구의 동욱에 대한 동정심). - 누이에 대한 동욱의 태도

 

동욱은 음식집을 나와 헤어질 무렵에 두 손을 원구의 양 어깨에 얹고 자기는 꼭 목사가 되겠노라고 했다. 그것이 자기의 갈 길[여기서 '길'에 대한 많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 여기서 '길'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거나 사회가 발전해 가는 데에 지향하는 방향, 지침, 목적이나 전문 분야를 말하고 있다.]인 것 같다고 하며 이제 새 학기에는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것이었다. 어깨가 축 늘어져서 걸어가는 동욱의 초라한 뒷 모양을 바라보고 서서 원구는 또 다시 동욱의 과거와 그 집안을 그려 보며, 목사가 되겠노라고 하면서도 술을 사랑하는 동욱을 아껴 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동욱은 목사가 되려고 하면서도 술을 마시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그가 술을 마시는 행위는 전쟁이 야기한 비참한 상황에 내몰려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목사가 되려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내 목사가 되지 못한다. 현실의 부조리한 제약에서 벗어나 탈출을 꿈꾸지만, 현실 속에 내팽개쳐지는 것이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라고 할 때, 동욱은 그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동욱의 목사가 되겠다는 희망

 

그 뒤 원구가 처음으로 동욱을 찾아간 것은 사십 일이나 계속된 긴 장마가 시작된 어느 날이었다.[그 뒤 원구가 ~ 어느 날이었다. : 장마비는 이 작품 전체의 우울하고 불쾌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동욱 남매의 불구적 삶의 모습을 상징한다] 동래(東萊) 종점에서 전차를 내리자, 동욱이가 쪽지에 그려 준 약도를 몇 번이나 펴 보며 진득진득 걷기 힘든 비탈길을 원구는 조심히 걸어 올라갔다. 비는 여전히 줄기차게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받기는 했으나 비가 후려치고 흙탕물이 뛰고 해서 정강이 밑으로는 말이 아니었다. - 비오는 날 동욱을 찾아감

 

동욱이가 들어 있는 집은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었다(인가에 뚝 떨어져있다는 것은 삶의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한쪽 구석이나 모퉁이로 기울어진 모양(부사)]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한 귀퉁이에 ~ 지탱하고 있었다. : 동욱 남매의 삶이 이 낡은 집같이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양을 비유한다. 월남한 후 극한적인 가난과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구성을 선명히 드러내었다.] 기와를 얹은 지붕에는 두 세 군데 잡초가 반 길이나 무성해 있었다. 나중에 들어 알았지만 왜정 때는 무슨 요양원[(療養院) : 환자들을 수용하여 요양할 수 있도록 시설을 갖추어 놓은 보건 기관]으로 사용되어 온 건물이라는 것이었다. 전면(前面)은 본시 전부가 유리 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때기가 드리워 있었다. 이 폐가(廢家)와 같은 집 앞에 우두커니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이 폐가와 같은 집 앞에 ~ 움직이지 않았다. : 전쟁이 남겨 놓은 폐허와 허무 의식을 상징적으로 제시하며 분위기를 암시하는 공간적 배경과 그 충격을 나타냈다. 여기서 폐가는 절망적 공간] 이런 집에도 대체 사람이 살고 있을까? 아이들 만화책에 나오는 도깨비 집[동욱 남매가 거처하는 집을 비유한 것이다. 그만큼 처참하게 가난하고 황량하게 사는 모습을 은유법을 써서 단적으로 제시하였다 / 음습한 느낌으로 전후의 피폐한 현실 상징]이 연상됐다.금시 대가리에 뿔이 돋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집에 동욱과 동옥이가 살고 있다니 원구는 다시 한번 쪽지에 그린 약도를 펴 보았다. 이 집임에 틀림없었다. 개천을 끼고 올라오다가 그 개천을 건너선 왼쪽 산비탈에는 도대체 집이라고는 이 집 한 채뿐이었다. - 동욱집의 방문과 그 집의 형상

 

원구는 몇 걸음 다가서며 말씀 좀 묻겠습니다 하고 인기척을 냈다. 안에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원구는 같은 말을 또 한 번 되풀이했다. 그래도 잠잠하다. 차차 거세가는 빗소리와 도랑물 소리뿐, 황폐한 건물 자체가 그대로 죽음처럼 고요했다[고독과 적막감을 표현]. 원구는 좀 더 큰 소리로 안녕하십니까? [인물의 말을 간접 화법을 통해 인용함]하고 불러 보았다. 원구는 제 소리에 깜짝 놀랐다. 목에 엉켰던 가래가 풀리며 탁 터져 나오는 음성이 예상 외로 컸던 탓인지, 그것은 마치 무슨 비명처럼 들리었기 때문이다[인사가 비명처럼 들렸다는 것은 실제로 전쟁의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안녕'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 동욱을 찾아 부름

 

그러나 문 안에 친 거적[새끼로 날을 하여 짚으로 두툼하게 쳐서 자리처럼 만든 물건. 가마니로 만든 자리 대용(代用)] 귀퉁이가 들썩하며, 백지에 먹으로 그린 초상화 같은 여인의 얼굴[창백하고 무심한 표정에 말이 없는 동옥의 태도가 주는 인상을 비유적으로 표현]이 나타난 것이다. 살결이 유달리 희고 눈썹이 남보다 검은 그 여인은 원구를 내다보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문 안에 친 거적, ~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 동옥의 창백하고 병적인 모습과 등장 인물의 삶의 양태가 병적이고, 서로를 불신하는 정신적인 폐쇄성을 드러내고, 인물의 무기력하고 음울한 삶의 편린을 엿보게 한다. 다시 말해서 동옥이 외부 사람에 대한 경계심을 의미]. 저게 동옥[동욱의 여동생]인가 보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여기가 김동욱 군의 집이냐는 원구의 물음에 여인은 말없이 약간 고개를끄덕여 보였을 뿐이다(여인의 성격 부각).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는 그 태도는 거만해 보이는 것이었다[눈썹 하나 까닥하지 ~ 거만해 보이는 것이었다. : 오빠 친구인 원구에게 무례함을 보인 동옥은 그 신체적 불구로 남의 이목을 피하고 방 안에 쳐박혀 있으며 오빠로부터 버림받을 줄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 사는 정신적 불구임을 드러낸 부분이다. / 사회성의 결여]. 동욱군 어디 나갔습니까? 하고 재차 묻는 말에도 여인은 먼저처럼 고개만 끄덕했다(여인의 경계심). 그리고 나서 원구를 노려보는 듯[오빠가 자신을 버리고 동옥을 데리러 오는 사람으로 알고 나타내는 적대감, 결말 부분을 보면 이해가 가능]하는 그 눈에는 까닭 모를 모멸(侮蔑)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작중 인물의 삶의 폐쇄성과 불구성)까지 서리어 있는 것이었다.[원구를 노려보는 듯하는 ~ 서리어 있는 것이었다. : 세상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을 보여 준 부분으로 동옥의 정신적 불구성이 드러난다.] 여인은 혹시 자기를 오해하고 있지 않나 싶어 정원구라는 이름을 밝히고 나서 동욱과는 소학교에서 대학까지 동창이었다는 것과, 특히 소학 시절에는 거의 날마다 자기가 동욱이네 집에 놀러가거나, 동욱이가 자기네 집에 놀러 왔다[죽마고우(竹馬故友)]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여인의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원구는 한층 더 부드러운 음성으로 혹시 동욱군의 여동생 아니십니까? 동옥이라구…… 하고 물었다. 여인은 세 번째 고개를 끄덕여 보인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그 얼굴에 조소[(嘲笑) : 비웃음]를 품은 우울한 미소가 약간 어리는 것이었다[그 얼굴에 조소를 품은 ~ 약간 어리는 것이었다. : 인간 모멸과 비정한 사회 현실에 대해 불구인 동욱이 갖는 반항과 저주의 심리가 드러나 있다.]. 동욱이 어디 갔느냐니까, 그제야 모르겠는데요 하고 입을 열었다. 꽤 맑은 음성이었다. 그러면 언제 들어올지 모르겠군요. 하니까, 이번에도 동옥은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무례한 동옥의 태도에 불쾌한 후회를 느끼면서 원구는 발길을 돌이키는 수밖에 없었다. 동욱이가 돌아오거든 자기가 다녀갔다는 말을 전해 달라고 이르고 돌아서는 원구에게 동옥은 아무러한 인사도 하지 않았다. - 동옥과의 만남과 그녀의 태도, 동욱의 부재

 

 물탕에 젖어 꿀쩍거리는 신발 속처럼 자기의 머리는 어쩔 수 없는 우울에 잠뽁 젖어 있는 것이라고 공상하며 원구는 호박 덩굴 우거진 철둑길을 걸어나갔다. 그 무거운 머리를 지탱하기에는 자기의 목이 지나치게 가는 것같이 여겨졌다. 그것은 불안한 생각이었다. 얼마쯤 가다가 원구는 별생각이 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비 속으로 보이는 창연한 건물은 금방 무서운 비명과 함께 모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자기가 발길을 돌리자 아마 쓰러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제나저제나 하고 집을 지켜보고 섰던 원구는 흠칫 놀라듯이 몸을 떨었다. 창문 안에 드리운 거적을 캔버스23) 삼아 그림처럼 선명히 떠올라 있는 흰 얼굴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동옥의 얼굴임에 틀림없었다. 어쩌자고 동옥은 비 뿌리는 창문에 붙어 서서 저렇게 짓궂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어려서 들은, 여우가 사람을 홀린다는 얘기가 연상되어 전신에 오한을 느끼며 발길을 돌이키는 원구의 눈앞에 찢어진 지우산을 받고 다가오는 사나이가 있었다. 다행히도 그것은 동욱이었다. 찬거리를 사러 잠깐 나갔다가 오노라는 동욱은, 푸성귀며 생선 토막이 들어 있는 저자구럭을 한손에 들고 있었다. 이 먼 델 비 맞고 왔다가 그냥 돌아가는 법이 있느냐고 하며 동욱은 원구의 손을 잡아 끄는 것이었다. 말할 기력조차 잃은 사람처럼 원구는 묵묵히 뒤를 따라갔다. 좀 전의 동옥의 수수께기 같은 태도는 더욱 이해할 수 없는 무거운 그림자가 되어 원구의 머리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동욱에게 재촉을 받고 방안에 들어서는 원구를 동옥은 반항적인 태도로 힐끔 쳐다보는 것이었다. 물론 일어서거나 옮겨 앉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비오는 날인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대기로 가리어서 방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다다미 여덟 장 깔리는 방안은 다다미 위에다 시멘트 종이로 장판 바른 듯한 것이었다. 한편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비'가 전쟁하의 비참한 현실을 상징하므로, 그러한 비는 안식처가 되어야 할 '방'조차도 예외 없이 뚫고 들어오고 있음을 암시하는 부분으로 당시의 비참한 현실하에서는 어느 곳도 안식처가 될 수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빗물은 이와 같은 연속적인 음향을 남기며 바께쓰 안에 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덤 속 같은 이 방안의 어둠[동욱 남매의 처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구해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빗물 소리마저 바께쓰에 차츰 물이 늘어갈수록 우울한 음향으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동욱은 별로 원구와 동옥을 인사시키거나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동욱은 젖은 옷을 벗어서 걸고 런닝셔츠와 팬츠바람으로 식사준비를 할 테니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하고 부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부엌이라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옆방이었다. 다다미는 걷어서 벽 한구석에 기대어 놓아, 판장뿐인 실내에는 여기저기 빗물이 오줌발처럼 쏟아졌다. 거기에는 취사 도구가 너저분하니 널려있는 것이었다. 연기가 들어간다고 사잇문을 닫아 버리고 나서, 동욱은 풍로에 불을 피우노라고 부채질을 하며 야단이었다. 열 시가 조금 지난 회중 시계를 사잇문 틈으로 꺼내 보이며 도대체 조반이냐 점심이냐는 원구의 질문에, 동욱은 닝글닝글하며 자기들에게는 삼시의 구별이 없다고 했다. 언제든 배고프면 밥을 끓여 먹고 밥 생각이 없는 날은 종일이라도 굶고 지낸다는 것이었다.

 

 동욱이가 부엌에서 혼자 바삐 돌아가는 동안 동옥은 역시 한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동옥은 가끔 하품을 하며 외국에서 온 낡은 화보를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한 동옥이와 마주앉아 자기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어떠한 포즈를 지속해야 하는가? 원구는, 이런 무의미한 대좌(對坐)를 감당할 수 없어 차라리 부엌에 나가 풍로에 부채질이나마 거들어 줄까도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만한 행동도 이 상태로는 일종의 비약(飛躍)이라 적지 아니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는 동안 원구는 별안간 엉덩이가 척척해 들어옴을 의식하였다. 바께쓰의 빗물이 넘어서 옆에 앉아 있는 원구의 자리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원구는 젖은 양복바지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섰다. 그제서야 동옥도 바께쓰의 물이 넘는 줄을 안 모양이다. 그러나 동옥은 직접 일어나서 제 손으로 치려고 하지도 않았다. 앉은 채 부엌쪽을 향하여, 오빠 물 넘어, 했을 뿐이었다. 동욱은 사잇문을 반쯤 열고 들여다보며 이년아, 네가 좀 치우지 못해? 하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자 자기가 나서기에 절호한 기회라고 생각한 원구는 내가 내다 버리지 하고 한 손으로 바께쓰를 들어올렸다. 그러나 한 걸음도 미처 옮겨 놓을 사이도 없이 바께쓰는 철거렁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옆이 떨어지며 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손잡이의 한쪽 끝갈퀴가 구멍에서 벗겨진 것이었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여지껏 꼼짝도 않고 앉아 있던 동옥도 그제만은 냉큼 일어나 한 걸음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 동옥의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원구에게 또 하나 우울의 씨를 뿌려주는 것이었다.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동옥의 왼쪽 다리가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리를 옮겨 디디는 순간, 동옥의 전신은 한쪽으로 쓰러질 듯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동옥은 다시 한 번 그 가늘고 짧은 다리를 옮겨 놓는 일 없이, 젖지 않은 구석자리에 재빨리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희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독이 오른 눈초리로 원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동옥의 시선을 피하여 탁류의 대하 가운데 떠 있는 것 같은 공포에 몸을 떨며, 원구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허위적거리듯 두 발로 물 괸 방을 허위적거려 보는 것이었다.

 

 그 뒤로는 비가 와서 가게를 벌일 수 없는 날이면 원구는 자주 동욱이네 집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불구인 신체와 같이 불구적인 성격으로 대해 주는 동옥의 태도가 결코 대견할 리 없으면서도, 어느 얄궂은 힘에 조종당하듯이 원구는 또 다시 찾아가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침침한 방안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일까? 동옥의 가늘고 짧은 한쪽 다리가 지니고 있는 슬픔에 중독된 탓일까? 이도 저도 아니면 찾아갈 적마다 차츰 정상적인 데로 돌아오는 동옥의 태도에 색다른 매력을 발견할 탓일까?

 

 정말 동옥의 태도는 원구가 찾아가는 회수에 따라 현저히 부드러워지는 것이었다. 두 번째 찾아갔을 때 동옥은 원구를 보자 얼굴을 붉히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세 번째 찾아갔을 때는 원구를 보자 동옥은 해죽이 웃어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울한 미소였다. 찾아갈 때마다 달라지는 동옥의 태도가 원구에게는 꽤 반가운 것이었다. 인사불성에 빠졌던 환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올 때처럼 고마웠다. 첫 번째 불렀을 때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없던 환자가, 두 번째 부르자 눈을 간신히 떴고, 세 번째 불럿을 때는 제법 완전히 눈을 떠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물 좀 하고 입을 열었을 경우와 같은 반가움을, 원구는 동옥에게서 경험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갔을 때에는 지난 번 빗물 쏟아지던 자리에 바께쓰가 놓여 있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제창 떼꾼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주먹이 두어 개나 드나들 만한 그 구멍은 다다미에서부터 그 밑의 널판까지 뚫려 있었다. 천장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그 구멍을 통과해 널판 밑 흙바닥에 둔탁한 음향을 남기며 떨어졌다. 기실 비는 여러 군데서 새는 모양이었다. 널빤지로 된 천장에는 사방에서 빗물 듣는 소리가 났다. 천장에 떨어진 빗물은 약간 경사진 한쪽으로 오다가 소 눈깔만한 옹이 구멍으로 새어 흐르는 것이었다.

 

 그 날만 해도 원구와 동욱이가 주고받는 말에, 비교적 냉담한 동옥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 갔을 때부터는 원구와 동욱이가 웃을 때는 함께 따라 웃어주는 것이었다. 간혹 한 두 마디씩은 말추렴[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데에 한 몫 끼어 말하는 것]에도 들었다. 그 날은 일찌감치 저녁을 얻어먹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비가 하도 세차게 퍼부어서 자고 오는 수밖에는 없었다. 한 손에 우산을 들고 선 채 회색 장막을 드리운 듯, 비에 뿌예진[부옇게 흐려진] 창 밖을 내다보며 망설이고 있는 원구의 귀에 고집 피우지 말고 자고 가라는 동욱의 말에 뒤이어, 이런 비에는 앞도랑에 물이 불어서 못 건너십니다. 하는 동옥의 음성이 들린 것이었다.[동옥이의 원구에 대한 배려심]

 

 그 날 밤 비로소 원구는 가벼운 기분으로 동옥에게 말을 걸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그림 공부를 했느냐니까, 초상화 따위가 뭐 그림인가요, 하고 그 우울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원구는 동옥의 상처를 건드릴 만한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어렸을 때 얘기가 나와서 어딜 가나 강아지 새끼처럼 쫓아다니는 동옥이가 귀찮았다는 말을 하고 중중 때때중을 자랑스레 부르고 다녔다니까 동옥의 눈이 처음으로 티없이 빛나는 것이었다. 갑자기 동욱이가 중중 때때중하고 부르기 시작하자 동옥도 가느다란 소리로 따라 부르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

 

노래 소리가 그치고 나니 방안에는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비가 들이치는 바람에 바깥 벽판장 틈으로 스며드는 물은 실내의 벽 한 구석까지 적시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동옥을 대하는 동욱의 태도였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도 이년 저년하고 욕을 퍼붓는 것이다[동욱의 가학적 태도]. 부엌에서 들여보내는 음식 그릇을 한 손으로 받는다고 해서, 이년아 한 손으로 그러다가 또 떨어뜨리고 싶으냐, 하고 눈을 흘겼고 남포에 불을 켜는 데 불이 얼른 댕기지 않아 성냥 알을 두 개비째 꺼내려니까 저년은 밥 처먹구 불두 하나 못 켜, 하고 노려보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동옥은 말없이 마주 눈을 흘겼다. 빨래와 바느질만은 동옥의 책임이지만 부엌일은 언제나 동욱이가 맡아 한다는 것이었다. 동옥이가 변소에 간 틈에, 될 수 있는 대로 위로해 주지 않고 왜 그리 사납게 구느냐니까, 병신 고운 데 없다[몸이 성하지 못한 사람은 마음도 바르지 못하다는 말.]고 그년 맘 쓰는 게 모두가 틀렸다는 것이다. 우선 그림 값만 하더라도 얼마 전까지는 받아 오면 반씩 꼭 같이 나눠 가졌는데 근자에 와서는 동욱을 신용할 수가 없다고 대소에 따라 한 장에 얼마씩 또박또박 선금을 받고야 그려 준다는 것이었다. 생활비도 둘이 꼭 같이 절반씩 부담한다는 것이다. 동옥은 자기가 병신이기 때문에 부모말고는 자기를 거두어 오래 돌봐 줄 사람이 없으리라는 것이다. 오빠도 언제든 자기를 버릴 것이 아니겠느냐, 그렇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대로 약간이라도 밑천을 장만해 두어야 비참한 꼴을 면하지 않겠느냐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옥의 심중을 생각할 때 헤어져 있으면 몹시 측은하기도 하지만, 이상하게 낯만 대하면 왜 그런지 안 그러리라 하면서도 동욱은 자꾸 화가 치민다는 것이다.

 

 동옥은 불을 끄고는 외로워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반대로 동욱은 불을 꺼야만 안심하고 잠을 들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남매의 성격 차이]. 동욱은 어둠만이 유일한 휴식이노라 했다. 낮에는 아무리 가만하고 앉았거나 누워 뒹굴어도 걸레처럼 전신에 배어 있는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동욱은 심지를 낮추어서 희미하게 켜놓은 불빛에도 화를 내어 이년아, 아주 꺼 버리지 못해 하고 소리를 질렀다. 동옥은 손을 내밀어 심지를 조금 더 낮추었다. 그리고 나서 누가 데려 오랬나, 차라리 어머니하고 거기 있을 걸 괜히 왔지 하고 쫑알대는 것이었다. 그러자 동욱은 벌떡 일어나며 이년 다시 한 번 그 주둥일 놀려봐라 나두 너 같은 년 끌구 오구 싶지 않았다. 어머니가 하두 애원하시듯, 다 버리구 가더라두 네 년만은 데리구 가라구 하 조르기에 끌구 와 이 꼴이다 하고 골을 내는 것이었다.[성격 갈등]

 

 동옥은 말없이 저편으로 돌아누웠다. 어렴풋이 불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것 같아서 원구는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동욱도 잠이 안 오는 모양이었다. 동옥 역시 필경 잠이 들지 않았으련만 죽은 듯이 가만하고 있었다. 후두둑후두둑 유리 없는 창문으로 들이치는 빗소리를 들으며, 사십 주야를 비가 퍼부어서 산꼭대기에다 배를 묶어 둔 노아네 가족만이 남고 이 세상이 전멸을 해 버렸다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를 원구는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렴풋이 잠이 들려고 하는 때였다. 커다란 적선[착한 일을 많이 함]으로 생각하고 동옥과 결혼할 용기는 없는가 하는 동욱의 음성이 잠꼬대같이 원구의 귀를 스쳤다. 원구는 눈을 떴다. 노려보듯이 천장을 바라보며 그는 반듯이 누워 있었다. 동욱의 입에서 다시 무슨 말이 흘러 나올지도 모른다는 긴장을 느끼면서, 그러나 동욱은 아무 말이 없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 뿐이었다.

 

 원구가 또다시 간신히 잠이 들락 할 때였다. 발치 쪽에서 빠드득 하는 이상한 소리가 났다. 원구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재웠다. 뱀에게 먹히는 개구리 소리 비슷한 그 소리는 뒷벽 쪽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원구는 이번에는 상반신을 일으키고 앉아 귀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동욱이도 눈을 떴다.

 

 저게 무슨 소리냐고 한 즉, 뒷방의 계집애가 자면서 이 가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이 뒷방에도 사람이 사느냐니까 육순이 넘은 노파[동욱 남매를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인간]가 열 두 살 먹은 손녀를 데리고 산다고 했다. 그 노파가 바로 이 집 주인인데 전차 종점 나가는 길목에 하꼬방[판잣집] 가게를 내고 담배, 성냥, 과일, 사탕 같은 것들을 팔아서 근근이 생활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뒷집 소녀는 잠만 들면 반드시 이를 간다는 것이었다. 동욱도 처음 며칠 밤은 그 소리에 골치를 앓았지만 요즘은 습관이 되어 괜찮노라고 했다. 이러한 방에서 빗물 떨어지는 소리와 이 가는 소리를 듣고 지나면 아무라도 신경과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원구는 좀전에 동욱이가 잠꼬대처럼 한 말의 의미[동옥과의 결혼]를 되새겨 보는 것이었다.

 

 사오 일 지나서였다. 오래간만에 비가 그치고 제법 날이 훤해져서 잡화를 가득 벌여 놓은 리어카를 지키고 섰노라니까, 다 저녁때 원구의 어깨를 툭 치는 사람이 있었다. 동욱이었다. 그는 역시 소매와 깃이 다 처진 저고리와 검은 줄이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옷이라고는 그것밖에 없는 모양이라 비에 젖은 것을 그냥 짜서 말리곤 해서 여기 저기 구김살이 져 있었다. 그보다도 괴이한 채플린 식의 검정 단화의 주먹 같은 코숭이가 말이 아니었다. 장화 대용으로 진창을 막 밟고 다녀서 온통 흙투성이였다[변함없는 극빈한 생활상]. 그러한 동욱의 꼴에 원구는 이상하게 정이 갔다.[유대감이 담긴 동류 의식으로 친애감이라는 말과 통함]

 

 리어카를 주인 집에 가져다 맡기고 와서 저녁을 같이 하자고 원구는 동욱의 손을 끌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술 생각이 더 간절하다고 했다. 두 가지 다 먹을 수 있는 집으로 원구는 동욱을 안내했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얼근해지자 동욱은 초상화 '주문 도리[일 주문을 받는 일]'를 폐업했노라고 했다. 요즘은 양키['미국 사람'을 경멸해서 부르는 낮은 말, yankee]들도 아주 약아져서 까딱하면 돈을 잘리거나 농락 당하기가 일쑤라는 것이다. 거기에다 패스 없는 사람의 출입을 각 부대가 엄중히 단속하기 때문에 전처럼 드나들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에는 돈 받으러 몰래 들어갔다가 순찰 장교에게 걸려서 하룻밤 몽키 하우스[감방, 구치소]의 신세를 지고 나왔다는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국민병 수첩까지 분실했으므로 마음놓고 거리에 나와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분실계를 내고 재교부[한 번 내어준 서류나 증명서 등을 다시 내어줌] 신청을 하라니까, 그 때문에 동회로 파출소로 사오 차나 쫓아다녀 봤지만, 까다롭게만 굴고 잘 들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까짓거 나중에는 산수갑산[(三水甲山) :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한 산골이라 이르던 삼수와 갑산. 조선 시대에 귀양지의 하나였다. 몹시 어려운 지경 *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자신에게 닥쳐올 어떤 위험도 무릅쓰고라도 어떤 일을 단행할 때 하는 말. 유사어로는 삼수갑산을 가서 산전을 일궈 먹더라도. 삼수갑산에 가는 한이 있어도 그놈만큼은 내 손으로 잡겠다.]엘 갈 망정 내버려 둘 테라고 했다. 그래 차라리 군에라도 들어가 버릴까 싶어, 마침 통역장교를 모집하기에 그 원서를 타러 나왔던 길이노라고 했다. 어디 원서를 좀 구경하자니까 동욱은 능글능글 웃으며 수속이 하두 복잡하고 번거로워 아예 단념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동욱은 한동안 말이 없이 술잔을 빨고 앉았다가, 가끔 찾아와서 동옥을 좀 위로해 주라는 것이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조소하고 멸시한다고만 생각하고 있는 동옥은, 맑은 날일지라도 일절[(一切) : 여기서는 아주, 전혀, 절대로의 뜻으로, 흔히 사물을 부인하거나 행위를 금지할 때에 쓰는 말. '일체'로 읽을 때는 ①모든 것.  ② '전부' 또는 '완전히'의 뜻을 나타내는 말.] 바깥출입을 않고 두더지처럼 방에만 처박혀 산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반감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동옥도 원구만은 자기를 업신여기지 않고 자연스레 대하여 준다고 해서 자주 찾아와 주기를 여간 기다리지 않는다고 했다.

 

 초상화가 팔리지 않게 된 다음부터는 동옥은 초조와 불안 속에서 한층 더 자신의 고독을 주체하지 못해 쩔쩔맨다는 것이었다. 동욱은 그러한 동옥이가 측은해 못 견디겠노라고 했다. 언젠가처럼, 내가 자네람 동옥이와 결혼할 테야, 암 하구 말구 동욱은 고개를 주억거리는[끄덕이는] 것이었다. 술집을 나와 동욱은 이번에도 원구의 손을 꼭 쥐고 자기는 기어코 목사가 되겠노라고 했다. 동옥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그것만이 이 무거운 짐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 뒤에 한 번은 딴 볼일로 동래까지 갔던 길에 동욱이네 집에 잠깐 들른 일이 있었다. 역시 그날도 장마는 구질구질 계속되고 있었다. 우산을 접으며 마루에 올라서도 동욱만이 머리를 내밀고 맞아줄 뿐 동옥의 기척이 없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동옥은 담요로 머리까지 푹 뒤집어쓰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었다. 이틀째나 저러고 자빠져 있다고 하며 동욱은 그 까닭을 설명했다. 동옥은 뒷방에 살고 있는 주인 노파에게 동욱이도 모르게 이만 환이나 빚을 주고 있었는데[동옥 역시 미덥지 않은 동욱보다는 '돈'에 기대는 것이 자신의 생존을 보장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동옥 몰래 빚을 주었던 것이다.], 노파는 이 집까지도 팔아먹고 귀신같이 도주해 버렸다는 것이다. 어제 아침에 집을 산 사람이 갑자기 이사를 왔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았는데, 이게 또한 어지간히 감때 사나운[매우 억세고 사나워서 휘어잡기 힘든] 자여서 당장 방을 비워 내라고 위협하듯 한다는 것이다. 말을 마치고 난 동욱은 요 맹꽁이 같은 년아, 글쎄 이게 집이라구 믿고 돈을 줘 하고 발길로 동옥의 옆구리를 걷어찼다[초상화 주문도 못하는 상태로 생계 수단이 없어서 불안을 느끼고 있던 차에 동옥이가 돈을 떼이자 앞날에 대한 불안감이 심화되어 동옥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다.]. 이 년아, 이만 환이면 구화[새로 발행된 화폐에 대하여 이전에 발행된 화폐, 예전 돈]로 얼만 줄 아니, 이백만 환[(?)우리나라의 옛 화폐 단위. 1환은 1전(錢)의 100배이다. 1953년 2월 15일부터 1962년 6월 9일까지 통용되었다]이야, 내 돈을 내가 떼였는데 오빠가 무슨 상관이냐구[동옥이 처지는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데가 없음)으로 볼 수 있음], 그래, 내가 없으면 네년이 굶어 죽지 않구 살 테냐? 너 같은 병신이 단 한 달을 독력[혼자 힘]으로 살아?[동욱은 다리를 절기 때문에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처지에 놓인 동옥을 염려하면서도 짐스러워 한다. 동욱의 모순된 마음이 나타난 구절이다.] 동욱은 다시 생각해도 악이 받치는 모양이었다. - 주인 노파에게 돈을 떼인 동옥

 

[전후의 피폐한 삶 :  '비 오는 날'은 소외된 변두리 인간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들은 정상적인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특히 여주인공 동옥은 절름발이로, 이들은 현실 상황이 주는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인물이어서 불행한 생활 조건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든다. 그녀는 육체적 불구임과 동시에 정신적 외상을 입은 존재이다. 동욱 역시 정신적 불구자이다. 가난에 지쳐있고, 불투명한 미래에 낙망하며, 이상과 현실의 갈림길에서 방황하면 행동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이렇게 불행에 지친 자아는 동기간의 애정까지도 말살하게 된다. 동생을 사랑하면서도 저주하는 일은 삶을 전면적으로 부정할 때에 가능한 정신 상태이다.

 

 동욱과 동옥 남매는 결국 마지막 생활의 터전에서나마 이탈되어 저주의 땅으로 내몰리게 된다. 이들의 이러한 고립은 결국 시대와 사회의 병리현상 때문이다. 허무와 절망의 자의식, 내일이 없는 사회적 무력감, 극도의 경제적 궁핍 등이 남매로 하여금 자폐적 개인화로 내몬 것이다. 결국, 이 소설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철저히 파괴되어 가는 인간 군상을 묘사한 작품이라 하겠다. ]

 

 원구를 위해 동욱은 초밥을 만든다고 분주히 부엌으로 들락날락 했으나 원구는 초밥을 얻어먹자고 그러고 앉아 견딜 수는 없었다. 그보다도 동옥이 이틀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저러고 누워있다고 하니, 혹시 동욱이가 잠든 틈에라도 몰래 일어나 수면제 같은 것을 먹고 죽어 있지나 않는가 싶어 불안한 생각이 솟았다[원구가 동옥의  자살을 염려하는 것으로 이는 비단 동옥만이 아니라 동욱 남매 모두의 앞날에 대하여  원구가 불안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욱 남매의 불행한 결말에 대한 복선]. 원구는 조금이라도 더 앉아 견디기가 답답해서 자리를 일어서며 아무래도 방을 비워 주어야 하겠거든 자기도 어디 구해 보겠노라고 하니까, 동옥이가 인가(人家) 많은 데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 근처에다 외딴 집을 구하는 수밖에 없다는 동욱의 대답이었다.

 

 그 뒤로는 원구도 생활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나 장마로 놀고 보니 자연 시원치 않은 장사 밑천을 그럭저럭 축나게[일정한 양이나 수에서 부족이 생기게] 된 것이다. 원구가 얻어 있는 방도 지리한 비에 습기로 눅룩해졌다.[원구는 동욱이 남매를 돕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인물로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에서 얼마간 떨어진 인물로 보인. 그러나 그 역시 암울한 시대 상황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동욱 남매가 '비에 젖은 인생'으로 묘사된 것처럼 그 또한 '비에 젖은' 모습으로 그려짐으로써, 전쟁의 피해자임을 드러내고 있다.] 벗어놓은 옷가지며 이부자리에까지도 곰팡이가 끼었다. 그의 마음 속까지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았다[원구가 얻어 있는 -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았다 : 원구를 염려하고 동정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전쟁의 참상에서 얼마간 비켜 서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동옥 남매 그 역시 당시의 암울한 현실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동욱 남매가 비에 젖은 인생이듯이 역시 원구도 비에 젖어가는 모습으로 그림으로써, 그 또한 전쟁의 피해자임이 드러나고 있다.]. 이런 날, 이런 음산한 방에 처박혀 있자니, 동욱과 동옥의 일이 자연 무겁고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점심때가 되어서 원구는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집을 나섰다. 오늘은 동욱이와 마주 앉아 곰팡이 슨 속[삼순-구식(三旬九食) : 삼십 일 동안 아홉 끼니밖에 먹지 못한다는 뜻으로, 몹시 가난함을 이르는 말. ]을 씻어 내리며, 동옥이도 위로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원구는 술과 통조림을 사들고 찾아갔다.

 

 

 낡은 목조 건물은 전과 마찬가지로 금방 쓰러질 듯 빗속에 서 있었다[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인물의 운명]. 유리 없는 창문에는 거적도 그대로 드리워 있었다. 그러나, 동욱이, 하고 원구가 불렀을 때 곰처럼 마루로 기어 나오는 사나이[새주인]는 동욱이가 아니었다. 이 집에 살던 젊은 남녀는 어디 갔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우락부락하게는 생겼으되 맺힌 데[꼭 짜여서 빈틈이 없어 보이는]가 없이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사십 전후의 그 사나이는, 아하 당신이 정(丁) 뭐라는 사람이냐고 하고 대답 대신 혼자 머리를 끄덕끄덕하는 것이었다. 원구가 재차 묻는 말에 사나이는 자기가 이 집주인이노라 하고 나서, 동욱은 외출한 채 소식 없이 돌아오지 않게 되었고, 그 뒤 동옥 역시 어디로 가 버렸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동욱이가 안 돌아오는 지는 열흘이나 되었고 동옥은 바로 이삼 일 전에 나갔다는 것이다.

 

 원구는 더 무슨 말이 없이 서 있었다. 한 손에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한 손으로는 우산을 받고 선 채, 원구는 사나이의 얼굴만 멍하니 바라보는 것이었다[동욱 남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서도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허망해 하는 원구의 모습으로 이는 곧 동욱 남매의 불행에 대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원구의 처지를 상징한다.]. 원구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다가 되돌아와 보자기에 싼 물건을 끌러 주인 사나이에게 주었다. 이거 원, 하며 주인 사나이는 대뜸 입이 해 벌어졌다[어울리지 않도록 넓게 벌어졌다.]. 그리고는 자기 여편네와 아이들이 장사 나갔기 때문에 점심 한 그릇 대접할 수는 없으나 좀 올라와 담배라도 피우고 가라고 권하는 것이었다.

 

 무슨 재미로 쉬어 가겠느냐고 하며, 원구가 돌아서려니까, 주인은 잠깐만 하고 불러 세우고 나서,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노라고 하며 사실은 동옥이가 정(丁) 누구라고 하는 분이 찾아오면 전해 달라고 편지를 맡기고 갔는데, 그만 간수를 잘못해서 아이들이 찢어 없앴다는 것이다[이 작품은 삶의 부조리를 탐구하는 실존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동옥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주요한 편지가 아이들의 장난으로 찢어 없어지는데, 이는 동옥과 원구가 만날 수 없는 삶의 부조리함을 의미한다.]. 그래도 아무 말 않고 멍청히 서 있는 원구를 주인 사나이는 무안한 눈길로 바라보며, 동욱은 아마 십중팔구 군대에 끌려나갔을 거라고 하고, 동옥은 아이들처럼 어머니를 부르며 가끔 밤중에 울기에, 뭐라고 좀 나무랐더니, 그 다음날 저녁에 어디론가 나가 버렸다는 것이다.

 

 죽지나 않았을까, 자살을 하든 굶어 죽든... 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원구의 등에다 대고, 중요한 옷가지랑은 꾸려 갖고 간 모양이니 자살을 할 의사는 없었음이 분명하고, 한편 병신이긴 하지만 얼굴이 고만큼 밴밴하고서야[반반하고서야, 반드름하게 잘 생겨서야, 어지간히 예쁘고서야 ] 어디가 몸을 판들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고[다리를 절기는 하지만 얼굴이 상당히 반반해 어디 가서 매춘이라도 할 수 있으므로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인 사나이는 지껄이는 것이었다[주인이 방값을 내지 못하는 동옥에게 매춘을 강요했을 가능성을 암시]. 얼굴이 고만큼 밴밴하고서야 어디가 몸을 판들 굶어 죽기야 하겠느냐는 말에, 이상하게 원구는 정신이 펄쩍 들어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 하고 대들 듯한 격분[몹시 분함을 느껴 성이 벌컥 치받침]을 마음속 한구석에 의식하면서도, 천근의 무게로 내리누르는 듯한 육체의 중량을 감당할 수 없이 그는 말없이 발길을 돌이키었다. [원구도 장마가 계속됨에 따라 생계가 어려운 형편이다. 그래서 주인 남자가 동옥을 팔아넘겼다고 짐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추궁하여 동옥을 되찾는 데 신경을 쓰기보다는 당장의 생계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고 생각하고서는 그냥 돌아서게 된다.]

 

 이놈, 네가 동옥을 팔아먹었구나[실제로 주인 사내가 동옥이를 사창가에 팔아먹었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동옥이가 집을 나가도록 방치한 것이라든가, 얼굴이 반반하므로 몸을 팔아서라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해 버리는 것 등이 결국 동옥이 같은 여성을 그런 곳으로 내몰았다는 의미이다. 이 비난은 비단 사내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원구 자신도 그 비난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깨닫고 자책감을 느끼게 된다. 동욱 남매에 대한 방관을 반성] 하는 흥분한 소리가 까마득히 먼 곳에서 자기를 향하고 날아오는 것 같은 착각에 오한[몸이 오슬오슬 춥고 떨리는 증세]을 느끼며[흥분한 소리가 - 오한을 느끼며 : 원구가 동옥의 행방을 추구하지 않고 불의에 침묵하여 그냥 돌아선 자신도 동옥을 팔아먹은 주인 남자와 다를 바 없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 원구는 호박 덩굴 우거진 밭두둑[밭과 밭 사이에 경계를 이루어 놓은 언덕] 길을, 앓고 난 사람 모양 허적거리는[다리의 힘이 빠져서 쓰러질 듯이] 다리로 걸어나가는 것이었다.[이러한 결말은 전쟁하의 상황이 각자에게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 살 것을 강요할 뿐,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서로 교류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 [결말의 부재는 손창섭 문학의 특징이다.]


브레히트 '살아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1. 이 작품의 서두에 제시된 배경에 대한 작자의 의도를 염두에 두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비 내리는 모습의 묘사에서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적어보자. 이와 관련할 때 '비'는 소설 속에서 어떤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겠는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배경 묘사가 소설의 주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확인 할 수 있다. 소설의 배경은 주인공이 처한 삶의 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점을 주지시킨다. 음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비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주목하게 한다.

 

예시답안 :

 이 작품에서 '비'는 단순한 비가 아니라, 이 소설의 분위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이 비는 등장인물이 처해 있는 전후 시대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그린 것이다. 질척거리는 거리에 내리는 비는 그대로 절망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질척거리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2) 동욱이 살고 있는 집에 대한 묘사는 어떤 분위기를 자아내는지 적어보자. 이러한 배경 묘사를 한 작자의 의도를 이 작품이 쓰인 시대적 상황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배경 묘사가 소설의 주제에 어떻게 기여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교과서에서 집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 읽고, 그러한 묘사에서 받는 느낌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도록 한다.

 

예시답안 :

 동욱이 사는 집은 기울어져 가는 낡은 목조 건물로, 지붕에는 잡초가 무성하며, 유리창은 깨어진 채, 가마니때기로 창을 대신하고 있는 집으로 그려진다. 이 집에 대한 원구의 인상도 '금시 대가리에 뿔이 돋은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았다.'고 한다. 이렇게 음습한 느낌을 자아내는 폐가는 전후의 우리 민족의 현실의 모습 그 자체이다. 작자는 이렇게 집을 묘사함으로써 전후의 피폐한 삶의 현실과 황폐한 인간의 상황을 고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이 작품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의 태도와 모습을 통해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동욱과 동옥 남매는 어떤 삶의 상황에 처해 있는지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인물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를 위해 마련되었다. 작품을 바탕으로 동욱과 동옥 남매가 어떻게 생계를 이어나가는지 확인하게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상황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하게 한다.

 

예시답안 :

 육체적 불구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는 동옥과 그녀가 그린 초상화를 미군들에게 팔아 연명해야 하는 동욱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희생되어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상태이다.

(2) 원구를 대하는 동옥의 태도는 '모멸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로 그려져 있다. 왜 그런 태도가 형성되었을지 친구들과 서로 이야기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등장인물의 태도와 심리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당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심리를 생각해 본다. 일반적으로 소외당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소외시키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음을 깨닫도록 지도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동옥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주관적·객관적 환경이 어떠한지를 알아보도록 지도하면 된다.

 

예시답안 :

 동옥은 여러 모로 소외당하고 있다. 그녀는 몸이 불구인 상태이기 때문에 변변한 직업을 갖지 못하고 오빠가 가져다 주는 일거리를 해결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있다. 그리고 아주 퇴락한 판잣집에서 지극히 암울한 생활을 하고 있다. 더욱이 유일한 혈육인 오빠로부터도 천대를 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누구도 자신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 주지 않고 있다. 심지어 집주인으로부터 사기를 당해 어렵게 모은 돈을 모두 날려 버린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동옥이 '모멸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를 보인 것은 이처럼 절망적인 삶의 조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겠다. 몇 번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원구에게 마음이 열리면서 타인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것은, 동옥이 그만큼 오랫동안 따뜻한 온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1. 이 소설에서 동옥 남매에게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동욱과 동옥은 왜 서로 감싸주지 못하고 날카로운 감정 대립을 하게 되었을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소설의 등장인물의 성격이 사회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개인의 성격적인 이유가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회적인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예시답안 :

 허무(虛無)와 절망(絶望)의 자의식(自意識), 내일이 없는 사회적 무력감, 극도의 경제적 궁핍 등이 남매(男妹)로 하여금 날카로운 감정 대립을 하게 하였다.

 

(2) 동욱남매가 떠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원구는 왜 그 사실에 대해 자책감을 갖는지에 대해 친구들과 서로 의견을 나누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등장인물의 심리에 대해서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사회 전체적으로도 커다란 피해를 입히지만, 한 개인으로서는 의지를 펼치지 못하게 하고 욕망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든다. 이런 점에 유의하여 원구의 자책감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판단해 보도록 지도한다. 그리고 사실에 근거한 자책감도 있을 수 있지만, 도덕적인 의무감에서 출발할 수도 있음을 이해하도록 할 필요도 있다.

 

예시답안 :

 원구는 동욱 남매에게 온정을 베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매우 소극적인 것이었다. 육체적 불구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는 동옥이나 그녀가 그린 초상화를 미군들에게 팔아 연명해야 하는 동욱은 모두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인생들로, 그들 남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희생된 인물들이다. 원구는 이들에게 연민과 동정의 손길을 뻗칠 수는 있었으나 특별히 나은 생활 조건을 가진 것도 아니어서 한계가 있었다. 동옥이 사창가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라는 판단은 예측에 불과하지만, 원구는 이것이 결국 그들에게 좀 더 적극적인 관심과 온정을 쏟지 못한 결과라고 믿고 있다. 더군다나 암울한 생활 속에서도 동옥은 원구에게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그래서 원구는 자신이 동옥을 팔아먹었다는 환청(幻聽)을 듣게 되는 것이다.

 

 

2. 이 소설의 배경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이 소설에서 전쟁 당시의 피난지 분산의 현실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을 찾아보고, 당시의 실제 생활상은 어떠했는지 조사해서 발표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을 통해 소설이 쓰여질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배경 묘사가 작품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 그리고 인물들의 직업이나 대화에서도 배경의 구체적인 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학에서 형성화되는 현실이란 역사적 환경 그 자체가 아님을 주지시켜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소 과장될 수도 있고, 무시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시답안 :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서 서 있는 동욱 남매의 집을 묘사한 대목이 상징적으로 부산의 현실을 대변해 준다. 구체적인 통계가 없어 추산하기 어렵지만, 실제로 이시기 부산은 임시 수도로서 전국의 피난민들이 모여 생존을 위한 각축전을 벌이고 있었다.

 

(2) 1950년대 우리 소설에서 전쟁을 소재로 한 작품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고, 그 작품들이 실존주의 사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아보자.

이끌어주기 :

 1950년대가 전쟁과 더불어 시작되었다는 역사적 조건은 문학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시에서도 소설에서도 전쟁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 대거 출현하게 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서구에서 들어온 실존주의(實存主義) 사상이 국내의 황폐한 사회 상황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지도시에는 어떠한 외래 사상도 원형 그대로 수입되는 것이 아니라, 수입된 지역이나 나라의 실정에 맞게 새로운 해석이 시도된다는 점을 강조하도록 한다. 전후 문학도 하이데거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이 그래도 투영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도록 한다.

 

예시답안 :

전후의 소설 문학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당대 현실의 이념적 허구성과 역사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

- 장용학의 ‘요한시집’, ‘원형의 전설’ 등 :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보여 준다.

- 김성한의 ‘오분간’, 바비도‘ 등 :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워 비리의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인간성을 제시하였다.

- 선우휘의 ‘불꽃’ : 격동의 역사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행동적 결단과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2. 전후 현실과 사회를 배경으로 기성세대의 윤리 의식과 사회 도덕적 가치개념에 대한 반항 의식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 경향

- 손창섭의 ‘혈서’, ‘미해결의 장’, ‘잉여인간’ 등 : 전정이 빚어낸 왜곡된 인간상을 그려 냄으로써, 전후 현실의 문제성을 고발한다.

- 박경리의 ‘불신시대’, 전광용의 ‘꺼삐딴 리’, 이범선의 ‘오발탄’ 등 : 사회적 혼란과 윤리의 붕괴를 전면에서 다루면서 인간의 도덕적 타락을 조장하는 현실의 비리를 비판하고 있다.

 

3. 전쟁 자체보다는 전쟁이 초래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민을 다루는 경향

- 유주현의 ‘장씨일가’, 이호철의 ‘닳아지는 살들’, 최상규의 ‘포인트’, 서기원의 ‘암사지도’, 오상원의 ‘증인’, 송병수의 ‘잔해’ 등 전후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을 단면을 통해 상황의 문제성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실존주의는 195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 도입되어 문학 창작과 비평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기성 사회 계급에 대한 저항이나 기계 문명에 대한 엄숙한 인간 선언으로 자리매김되는 서구의 실존주의는, 전쟁 상황과 전후의 황폐한 세태를 반영하고 있는 한국 문학에서는 약간의 변형을 겪는다. 주로 의지와 희망을 상실한 절망적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생을 그려내는 일련의 한국 실존주의 문학은 삶의 원형적은 모습을 탐색하거나 단절된 인간 관계에서 절망하는 인간을 그려내는 데 집중하게 된다. 위의 세 경향 모두 직간접적으로 이러한 실존주의 문학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

 

 

 전후 소설을 상호텍스트적 이해

 문학 교육은 개별 작품의 면밀한 읽기를 통한 미적 체험에 그치지 않고, 한 시대의 문학적 대응 양식을 고구하는 문학사적 가능성을 지향할 수 있다. 이는 텍스트의 개별성보다 오히려 텍스트가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와 맺고 있는 상호관련성을 파악함으로써 더욱 명료해진다. 그리고 그 상호관련성, 곧 상호텍스트성은 특정한 작품이 여타의 작품과 공유하고 있는 보편성을 기저로 삼아 특수성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한다.

 

 1950년대 소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쟁의 참화로 인한 전락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완미한 인간본질을 구현하지 못한 채, 세계의 폭력을 내면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내면화는 의당 현실의 구체적인 삶으로 포착되며, 삶의 구체성은 가계 혹은 촌락의 붕괴 (오영수. ‘학마을 사람들’)로 나타나거나, 혹독한 궁핍 (최일남, ‘쑥이야기’)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개인에게서 드러나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결핍으로 구체화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은 하근찬의 ‘수난 이대’ 와 이범선의 ‘오발탄’으로 집약된다. 하근찬의 작품이 육체적인 결락과 상처를 문제삼는다면, 이범선의 작품은 정신적인 내상을 다루고 있다. 물론 육체와 정신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하지만 인물이 처한 존재론적 상황으로 인해 분리되어 나타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예컨대 ‘수난 이대’가 육체적 상처에 초점을 맞추어 다룰 수 있는 것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현실을 지적으로 통어하기 어려운 하층민들이기에 가능하며, ‘오발탄’이 정신적 파탄을 거론할 수 있는 것은 서술 초점이 그나마 현실의 관념화가 가능한 화자를 통해 제시되기 때문이다. ‘비 오는 날’은 동옥을 통해 비록 절름발이라는 육체적 결략을 다루고 있기는 하나, 그것은 내면의 자의식으로 관철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서술자의 선택은 곧 결말의 구조와 직결된다. 하근찬의 ‘수난 이대’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부과된 육체적인 결함을 난관적으로 극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이채롭다면, 이범선, 손창섭의 인물들이 정신적으로 파탄으로 종결되는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 어떠한 전망도 가능하지 않은 현실이 작품의 현실을 통어하기 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오발탄'에 등장하는 한 가족의 군상들은 다양한 선택항들을 적어도 열어 두고 있다. 비록 그 선택조차 온전한 삶에 대한 희망이라기보다 견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투항이라고 평가함이 정당할 것이다. 하지만 몸을 팔고, 건달이 되고, 맹목적인 열망 속에 과거로의 복귀를 희원하는 누이와 동생, 그리고 어머니는 적어도 삶의 도정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손창섭에게는 그러한 생활의 세계가 차단되어 있다. ‘비 오는 날’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세계의 폭력에 절대적으로 무기력하게 굴복한다. 무력하게 패퇴해가는 것이다. 동욱은 군대로 끌려가고, 동욱은 누추하기 그지없는 집에서 조차 쫓겨가며, 원구는 ‘위로’를 건네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킬 기회를 놓쳐버리고 쫓기듯 되돌아오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보다 손창섭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고통의 근원이 역사적·사회적 현실로 단순히 환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수난 이대’의 인물이 식민지 시대의 징용과 한국 전쟁이란 구체적인 역사적 연원을 지니며, ‘오발탄’이 전쟁 이후 근거지를 상실한 월남민의 참담한 생활상을 드러내고 있음에 반해, ‘비 오는 날’은 피난지 부산이라는 상황이 원경으로 자리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고통은 현실과 깊숙이 결합되어 있지 못하다. 동옥의 다리는 현실로부터 부과된 육체적 결락이 아닌, 원초적인 절망적 상황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이러한 비역사성은 존재의 비극적 본질에 한층 가깝게 다가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상적인 무시간성’으로 유리될 우려를 항상 지니게 된다. 이는 손창섭의 전기적 고리를 통해 규명함이 타당할 것이다.(출처 : 김상욱, ‘전후 소설의 교육적 해석 방법론’)

 

 손창섭은 전후 세대(前後世代) 문학의 대표 작가이며, 그의 작품이 보여 주는 음울한 분위기와 비정상적 인물만이 등장하는 불구성(不具性)은 전후 문학의 상징적 의미를 집약시킨 것이다. 이 작품의 의미는 첫 단락에 나타나 있다. 원구에게 동욱 남매의 삶은 항상 비 오는 날의 음울한 분위기와 결부되어 회상되고 있다. 비 오는 날의 음산한 풍경은 작품 전체의 분위기뿐만이 아니라 작중 인물의 심정과도 관련되어 있다. 즉, 등장 인물들의 무기력, 우울, 절망, 나아가서는 불구성(不具性)까지 비 오는 날의 구질구질함과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동욱 남매의 삶은 지극히 비정상적이다. 전쟁이라는 극한적(極限的) 상황이 가져온 이 무기력한 삶은 아무런 필연성도 없이 '우연히' 살아 있는 인간의 허망함을 말해 주고 있다. 신체 장애자 동옥이 보이는 까닭없는 모멸(侮蔑)과 반항 역시 이 허망함에서 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격변기의 사회에서 뿌리를 잃어버린 자들이 얼마나 빨리 철저하게 허물어지는가를 예리한 관찰로 보여 주고 있다.

 

 

 이해와 감상 1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비가 내리는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불구인 등장 인물들의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이 그려져 있다. 절망에 처한 전후의 폐허 상태와 맞물려 있는 인간의 병적이고도 무기력한 내면 상태를 파헤침으로써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모멸의 극한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인간 모멸 의식'으로 일관한 손창섭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가져다 준 인간의 무기력한 삶, 또는 허무 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된 이 소설은 그 배경부터 전쟁이 가져다 준 폐해와 절망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의 전쟁 중의 부산은 절망적인 삶을 유지해 가는 비극적인 공간이다. 더욱이 이동욱 남매의 황폐한 거처는 그들의 무기력과 허무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시간적 배경은 장마철, 비오는 날이다. 장마철의 고습하고 눅눅한 느낌, 그리고 그로 인한 불쾌와 우울은 이 작품의 분위기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의 '비'란 소설의 분위기 전체를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전후의 상황을 암시하는 요소이다.

 

음울한 분위기와 비정상적인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구성은 전후 상황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즉 삶은 모두 비정상적이다. 전쟁이 가져다 준 정상적인 삶의 파괴는 무기력과 절망적인 삶을 가져다 주고 이는 무의미함으로 확대된다. 즉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을 얼마나 무기력하고 황폐하게 만드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비'라는 배경, 그리고 부산이라는 피난지 배경과 인물들이 보여주는 불구성과 비정상성을 통해서 더욱 고조시킨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작가의 시선 역시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적이다. 전쟁의 상흔, 그리고 그로 인한 절망이 단순히 인간애에 의해서 극복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작가는 어떠한 극복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저 우울과 무기력만이 가득한 공간, 그것이 1950년대의 부산의 상황이라고 보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시선이야말로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황폐화를 오히려 적나라하게 그려내는 바탕이 되고 있다.

 

비정상적이고 불구적인 인물들이 등장하여 전쟁으로 인한 삶의 황폐화를 표현하면서 상황에 의해서, 그리고 우연에 의해서 희생당한 인간들의 무기력을 통해서 현실의 부조리함을 파헤친 작품이다. 더욱이 이 작품은 결말, 즉 해결이 부재되어 있다. 비 내리는 날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작중 인물들의 남루한 삶과 황폐한 내면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대로 절망과 무기력과 무위로 구질구질한 작중 인물들의 심경을 드러내 준다. 또한 그 비는 계속해서 내린다는 점에서 앞이 캄캄하게 막혀 있음을 암시한다. 아무 것도 끝나지 않으니 소설 속의 모든 사태는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결말 부재는 인간의 모든 행위가 절망적이고 무의미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죽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기존의 문학에서 인간을 가치 있고 이성적인 존재로 보고 그 바탕 위에서 인간을 탐구하려 했다면 손창섭은 인간의 생활을 더 무의미한 면의 누적으로 파악하였다.

 

손창섭의 초기 소설은 넓은 의미에서의 병자가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때의 남성 인물들 대부분이 무능하거나 나약하거나 떳떳치 못한 인간상으로 처리되어 있다. 이 작품 역시 그렇다. 현실 앞에서 동욱은 끝내 신경질 환자로 변화해 가며, 대학까지 나온 그는 장차 목사가 되겠다면서 불구자인 누이동생 하나 건사하는 것마저 실패하는 무능한 인간으로 나온다.

 

이들 남매의 새디즘과 매저키즘으로 동욱은 동옥을 이유 없이 학대하고 동옥은 그 학대를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동욱은 목사가 되겠노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냉소와 자조, 실의와 체념, 윤리의 파탄 등이 이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데 이러한 인물과 그들 간의 관계의 형상화는 전쟁의 폐허 위에 남은 지식인의 뿌리 뽑힌 삶과 좌절, 상실의 감정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피난지 부산이다. 당시 부산은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극의 장소이다. 그리고 시간적 배경은 장마철로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가 지배한다. 이는 전후의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당대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사건 자체가 전쟁 후의 현실 적응 문제이며 그 문제에 부닥친 인물들은 모두 병적인 인물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즉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과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삶을 통해 전쟁이 가져다 준 물질적 정신적 상처와 전후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는 작가는 끝까지 냉소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결국 허무주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 2

 이런 류의 작품으로 이범선의 <오발탄>도 이와 비슷한 분위기를 보여 준다. 이 작품은 6·25 직후의 부산을 배경으로 동욱 남매의 불행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비가 오는 음산한 풍경을 배면(背面)에 깔면서, 이상 성격자 동욱과 동옥의 절망과 무기력이 음울한 문체로 표현되어 있는데, 손창섭의 소설의 인물들은 대체로 음울하다. 동시에, 상식을 깨뜨리고 의외의 충동으로 삶과 대치(對峙)한다. 비(非)사회적이며 우발적이다. 때문에 그들은 넓은 세계에서 호흡할 수 없으며, 늘상 폐쇄되어 있다. 그 상징적 공간이 '혈서(血書)' 등에 중심 배경으로 놓여 있는 '방(房)'인데, 이 소설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작가 자신도 그의 소설을 '나와의 공존과 공감을 허용하지 않는 기성 사회, 기성 권위에 대한 억압된 인간적 발산'이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결국 그의 소설을 냉소와 자조(自嘲), 허위에 대한 불신, 애정의 마비, 생활의 분열로 성격 짓게 한다. 특히, 이 '비 오는 날'의 경우는 전쟁 상황의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삶이기에 그 분위기가 더욱 어두울 수밖에 없고, 이를 짙게 물들이는 것이 '비가 온다'는 눅눅한 배경 설정이다.

 

 역사적 조건이 빚어 놓은 병리적 사회 현상이 개인을 암울하고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아넣고, 그 상황 속에서 개인은 무기력하게 피폐해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소설의 주제다. 이 때 '비 오는 날'이란 상황 설정은 피난지에서 폐가나 다름없는 동욱의 집과 함께 주제를 더욱 선명히 부각시켜 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소설은 사회적 배경과 상황적 배경,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생존의 비극성을 밀도 있게 구현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육체적 불구로 인해 소외될 수밖에 없는 동옥. 그녀가 그린 초상화를 미군들에게 팔아 연명해야 하는 동욱 ― 이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내몰린 인생들로, 그들 남매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 희생된 인물들이다.

 

 이 작품의 배경은 부산이다. 부산은 한국전쟁 중에 고향을 떠나 남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극적인 장소이다. '폐가와 장마'라는 배경 또한 주제 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의 우울한 내면 심리를 다룬 전후문학이다. 사건의 직접 제시보다 어떤 사건에 의해 환기된 심경의 변화를 그리는 일이 앞서고, 객관적 인물 묘사보다 처음부터 작가에 의해 주관화된 냉소적인 관찰로 인물 묘사가 행해지는 특이한 소설양식을 갖고 있다. 주로 간접 화법에 의해 대화가 처리되며, 부사어 및 '것이다'가 빈번하게 사용되는 것으로 이를 알 수 있다. 아무튼 이 작품은 6.25 라는 전쟁이 개인을 어떻게 황폐화시킬 수 있었던 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이해와 감상 3

  6.25 직후 젊은이들의 뿌리뽑힌 삶과 정신적 방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비정상적으로 만드는가를 보여주고, 그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비정상적인 삶을 통해 전후의 사회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손창섭의 작품이 보여주는 다른 작품들처럼 "비 오는 날"에도 예외 없이 정상적인 인간과 비정상적인 인간이 등장한다. 대학생 신분으로 행상을 해서 먹고사는 주인공 원구는 비교적 정상적인 인물로 그려져 있다. 절름발이면서 '백지에 먹으로 그린 초상화' 같은 여자 동옥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기를 조소하고 멸시한다고 생각하여 맑은 날에도 일절 바깥출입을 않고 두더지처럼 방에만 처박혀 지낸다. 불구인 자기 누이동생을 터무니없이 구박하는 동욱은 영문과를 다닌 경력으로 미군 부대에 드나들면서 초상화 주문을 받으러 다닌다. 이 세 사람이 6.25 직후 썰렁한 부산에 내던져 있다.

 

 동욱이가 들어 있는 집은 인가에서 뚝 떨어져 외따로이 서 있었다. 낡은 목조 건물이었다. 한 귀퉁이에 버티고 있는 두 개의 통나무 기둥이 모로 기울어지려는 집을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다. .... 전면은 본시 전부가 유리창문이었는데 유리는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들이치는 비를 막기 위해서 오른편 창문 안에는 가마니때기가 드리워 있었다. 이 을씨년스러운 폐가 속에서 동옥 남매는 서로에게 증오를 키우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위에 40일 간 계속되는 장마는 끊임없이 비를 뿌린다. 소설 구성의 한 요소로 일컬어지는 배경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퇴락해 가는 폐가와 음산하게 계속되는 장마비, 이것은 6.25 직후의 아무런 희망도 찾아볼 수 없었던 '물탕에 젖어 꿀쩍거리는 신발 속' 같은 시대 상황이면서 동시에 절망과 무력감에 젖어 사로잡혀 있던 전후 청년들의 심리 상태에 다름 아니다.

 

 이 소설에서 주의 깊게 읽어야 할 대목은 외부 세계에 적대감을 가진 채 철저히 불신으로 살아가던 동옥을 향한 원구의 관심이다. 처음 친구 동욱을 찾아 이 폐가를 방문한 원구에게 보여지던 동옥의 태도는 적대감과 무관심 바로 그것이었다. 처음 이러한 동옥에게 원구는 불쾌감을 갖는다. 그러나 동옥의 적대감이 그녀의 신체적 불구에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원구는 그녀에게 따뜻한 관심과 시선을 보낸다. 자기의 관심에 따라 변화를 보이는 동옥의 태도에 흥미와 기쁨을 느낀다.  인사불성에 빠졌던 환자가 제 정신으로 돌아온 때처럼 고마웠다. 첫 번 불렀을 때는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반응도 없던 환자가, 두 번째 부르자 눈을 간신히 떴고, 세 번째 불렀을 때는 제법 완전히 눈을 떠서 좌우를 둘러보다가 물 좀, 하고 입을 열었을 경우와 같은 반가움을 원구는 동옥에게서 경험하는 것이다.

 

 상기한 내용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아주 작지만 화해가 싹트기 시작한다는 인간성 회복의 조짐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중한 믿음은 이내 산산이 깨어져 버리고 만다. 초상화를 그려 어렵게 모은 돈을 집주인이 사기를 쳐 달아나고 이에 참지 못한 동욱은 불구의 여동생을 버려 둔 채 입대해 버리고 동옥조차 원구가 찾아가 보지 못한 사이에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만 것이다. 작품 끝머리에, 새로 집주인으로 들어온 사내가 동옥을 사창가에 팔아 넘겼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암시가 나오는데 이로써 인간 대(對) 인간의 화해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만다.

 

 

 

손창섭(孫昌涉 1922- )

 

손창섭론 자료 :

평양 출생의 소설가로서 착실한 필치로 이상 성격의 인간들의 모습을 그려 내어 1950년대의 불안한 상황을 형상하는 데 주력했다. 대표작으로는 "비 오는 날", "잉여 인간", "낙서록" 등이 있다. 6.25 전쟁의 충격으로 뒤틀린 한국 현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구 상태를 압축하여 인간 본래의 면목을 드러내는 다수의 작품을 썼다.

 

손창섭 소설의 형식적 특징은 우선, 결말의 부재이다. 즉 사태가 끝나지 않고 있다. 종래의 소설에 대한 도전이다. 그리고 모든 등장 인물의 명칭이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종래의 표기 방식에 대한 거부이다. 이런 표기 방식은 사건 또는 스토리를 거의 무시하고 인물의 성격만 문제 삼는 그의 소설 세계와 맞물린다. 또 문장의 대부분이 '것이다/것이었다'란 특이한 종지형으로 서술된다. 이는 어떤 감정도 가치 판단도 개입되지 않은 철저하게 방관적인 이방인과 같은 태도를 드러낸다. 손창섭은 전쟁이라든가 그로 인한 1950년대 현실의 황폐상 등 객관 현실의 탐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해방 후의 혼란과 6.25라는 민족사의 비극 속에서 불구적인 육체와 비정상적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을 등장시켜 인간에 대한 부정과 야유의 시선을 던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에는 인간의 따스한 애정에 대한 향수가 깃들어 있다.

 

그리고, 손창섭의 작품 중에 "비 오는 날" 외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잉여 인간"이 있다.  

"잉여 인간"(1958년)은 "비 오는 날", "혈서" 등과 함께 손창섭의 전후(戰後)소설에 속하는 작품이다. 한국 소설은 전후 소설에 이르러 그 의식이나 기법 면에서 현대 소설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후 소설이란 한국전쟁 이후 약 10여 년간 손창섭 ,장용학, 서기원, 오상원, 이범선 등의 소설에 나타나는 어떤 경향으로 특징지어졌는데 전쟁의 참혹성과 거기에서 오는 허무의식, 인간성의 파괴, 그리고 생활의 의욕을 상실하고 방황하는 황폐한 삶의 양태 등이 짙게 반영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손창섭의 소설은 전후(戰後) 의식을 새로운 소설 기법으로 수용하는 경향을 띠고 있다. 작가는 전쟁의 상흔을 숙명적으로 안고 살아가는 처참한 인간상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간의 출현은 인간 자체의 정신적 결함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후 현실의 어두운 상황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것이 특징적이다. 바로 이러한 점, 다시 말하면 인간의 모든 문제를 인간 밖의 역사나 사회로 돌리고 자신들의 고통을 과장한다는 비판을, 전후세대를 이어 등장한 60년대 작가들로부터 듣게 된다.

 

소설 "잉여 인간"은 전후의 사회상과 그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도는 인간의 몇 가지 유형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제시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가 한국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경험하였으며 동시에 전쟁의 후유증이 산재해 있는 비정상적인 사회 구조에서 배된 인물들인 것이다. 작가는 전후의 현실과 그 속에서 음지식물처럼 서식하는 인물 유형을 제시함으로써 전쟁이 남긴 참상을 고발한다.

 

서만기 치과의원의 원장인 서만기, 그의 아내와 처제, 간호원 홍인숙, 거의 날마다 치과의원에 출근하다시피 하는 채익준과 천봉우, 천봉우의 아내, 이들이 이 소설의 중요 인물들이다. 주인공 서만기는 어떤 사람인가? 작품의 일부를 통해 알아 보기로 한다.

 

.... 자기의 분수를 알고 함부로 부딪치지도 않고 꺾이지도 않고 자기의 능력과 노력과 성의로써 차근차근 자기의 길을 잃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놀라운 일에 부딪치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을 대해서도 도리어 반감을 느낄 만큼 그는 침착하고 기품 있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 문벌 있는 가문에 태어나서, 화초 가꾸듯 정성어린 어른들의 손에서 구김살  이 곧게 자라난 만기는, 예의범절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을 뿐 아니라 미술, 음악, 문학을 비롯해서 무용, 스포츠, 영화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와 고급한 감상안을 갖추고 있었다. ... 게다가 만기는 서양 사람처럼 후리후리한 키와 알맞은 몸집에 귀공자다운 해사한 면모를 빛내고 있었다. 또한 넓고 반듯한 이마와 맑고 잔잔한 눈은 그의 총명성과 기품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

 

말하자면 그는 완벽한 인간이다. 전쟁의 참화도 서만기의 그 고상함만은 비켜 갔는가? 거의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서만기는 살아 움직이는 인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작가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생명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서만기를 둘러싸고 있는 인간들은 그의 아내와 간호원 홍인숙(그녀들도 지나치게 선하다는 점에서 현실감이 없지만)을 제외하고는 전부 문제를 안고 있는 인물들뿐이다. 채익준은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기사를 보면 탁자를 내리치며 고함을 지르기 일쑤인 비분강개파이지만 정작 자신의 아내가 죽어 가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고 떠도는 인간이며, 천봉우는 성적으로 문란한 아내와의 가정 생활에는 서만기에게 노골적인 추파를 던지고, 더욱 가관인 것은 만기의 처제는 형부임에도 불구하고 만기를 향한 애정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 두드러진 악인은 없다. 그러나 모두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생을 살지 못하고 잘못 짜여진 시간표에 휩쓸려 잘못된 열정에 들떠 살아가는 인간들이다. 이 소설의 제목이 시사해 주듯 그 전쟁통에도 죽지 못하고 살아남은 나머지 인생들인 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볼 때 작가 손창섭은 전후에 살아남은 자들에게 어떤 저주를 퍼붓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서 그 험악한 세월을 살아남은 비애가 짙게 드리워져 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다.(출처 : 서주홍의 문학속으로 다운 자료)

 

 

 손창섭 소설의 인물과 묘사상의 특징  

손창섭 소설의 인물들에게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인물 묘사가 거의 없다. 용모라든지 신상 등에 대해서 작가는 거의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희극적인 대사나, 깊은 것은 아니면서도 작가의 인간 통찰에서 나온 심리적 묘사나, 인간에 대한 냉소적인 관찰로서 리얼리티를 획득하고 있다. 또한, 인물들은 정상적인 육체와 삶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 그의 초기 단편들은 심신 장애자가, 후기는 비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인간들이 주인공이다.

 

 이 작품에서도 여주인공인 동옥은 절름발이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인물을 더욱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울한 배경이다. 이 작품에서도 동옥 남매의 사는 곳이 '금방 도깨비가 나올 듯한 폐가같은 집'이고 시간적 배경도 비가 오거나 저녁 때의 음산한 분위기이다. 원국 동옥 남매를 방문하는 때는 늘 비가 오는 날이고, 반대로 동옥이 원구를 찾아갈 때는 비가 오지 않는 날이지만 저녁 때이다.

 

 게다가 그 인물들은 현실 상황이 주는 압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물이어서, 그들의 불행한 생활 조건을 더욱 절망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의 소설에는 반공 포로, 상이 군인, 병역 기피자, 고아 등 해방과 6?25전쟁으로 정신적, 물질적 상처를 입은 인물들이 주로 등장하는데, 이들이 보여주는 부정적 생활관은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비롯된 작가의 운명론적 인간관이 투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소설들은 이 격변기의 사회에서 뿌리를 잃어버린 자들이 얼마나 빨리 철저하게 허물어지는가를 예리하게 묘사한다. 그의 숙명적 인간관은 바로 격변기를 사는 인간의 부정적 생활관의 한 장면이다.

 

 

 '비오는 날'의 공간적 배경과 주제의 상관 관계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은 피난지 부산이다. 부산은 6?25전쟁 중에 고향을 떠나 남으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원구나 동욱 남매에게서 보듯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극의 장소이다. 더구나 폐가나 다름없는 동욱 남매의 집을 배경으로 설정한 것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결정해 작품 전체의 흐름을 이끌고 있다.  

 

 또 시간적 배경은 장마철이다. 이것 역시 작품의 분위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장마철의 눅눅한 분위기와 같은 끈끈한 불쾌감, 우울함이 이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무기력함이나 허무, 절망 같은 정서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한다. 원구가 동욱의 집을 방문할 때는 반드시 비가 오는 날이었음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 : 질척하게 내리는 비는 아내의 죽음을 알리는 암시

김승옥의 '무진기행' : 안개는 주인공의 우울과 혼돈이라는 내면 의식을 상징

김유정의 '동백꽃' : 배경은 농촌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닭싸움과 같은 농촌의 풍물을 매개로 사건이 진행되고, 토속적인 농촌 분위기가 인물의 심성과 조화됨

 

 

 '비오는 날'의 문체상 특징  

 이 작품의 서술은 ‘- 것이다’라는 종결 어미를 많이 활용한 간접 화법이 주를 이룬다. 인물들 간의 대화에서도 사용된 이러한 문체는 작가의 목소리를 개입시키고자 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며, 이것을 통해 사건의 추이를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냉소적·비판적 묘사가 가능해진다. (출처 : 구인환·김흥규, 문학(상) 한샘출판사)

 

'~ 것이다'라는 종결 어미의 사용은 사건을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독자들의 의식 속에 사건보다는 그 사건에 의해 환기된 나레이터의 감정을 전달한다.

 

 손창섭의 소설 문체는 지적인 비판이나 서정적·시적 묘사보다도 정서 환기를 목적으로 한다. 대개 '점착력 있는 집요한 문장'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정의된 그의 문장은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가뜩이나, 걸핏하면, 툭 하면, 벌컥' 따위의 부사들과, 사건의 추이를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동시에, 상황의 압도적 작용을 속도 있게 제시하는 '것이다'라는 종결 어미의 빈번한 사용으로 독자들의 의식 속에 사건보다는 그 사건에 의해 환기된 감정을 전달해 준다. (출처 : 김윤식·김현, '한국문학사')

 

 이 소설에서도 역시 '것이다'는 작가 자신이 그의 주인공을 냉소적으로 묘사할 때 예외 없이 쓰이고 있다.

 

 

 실존주의(實存主義, existentialism)

세계 내의 인간 실존에 대한 해석에 힘쓰며 인간 실존의 구체성과 문제적 성격을 강조하는 철학으로 주로 20세기의 철학운동으로 대표자는 독일의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 프랑스의 가브리엘 마르셀, 장 폴 사르트르, 모리스 메를로 퐁티, 스페인의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러시아의 니콜라이 베르댜예프, 이탈리아의 니콜라 아바냐노 등이다. 그러나 실존주의의 주요특징은 이미 19세기에 프리드리히 니체와 쇠렌 키에르케고르에게서 나타났다. 에트문트 후설과 G. W. F. 헤겔은 실존주의자는 아니지만 실존주의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존주의 사상의 성격

실존주의의 기본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실존은 항상 특수하고 개별적이다. 둘째, 실존은 주로 실존의 존재양식에 대한 문제이다. 따라서 실존은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 셋째, 존재 의미에 대한 탐구는 끊임없이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며 인간은 이 가능성들 가운데서 선택하고 이 선택에 몸을 맡겨야 한다. 넷째, 이 가능성들은 인간과 다른 사물 및 타인과의 관계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실존은 항상 세계내존재이다. 즉 실존은 선택을 제한·제약하는 구체적 상황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인간은 현존재(Dasein)라 불린다.

 

이상의 주장들로 인해 실존주의는 첫째, 인간을 절대적이거나 무한한 실체의 현현(顯現)으로 보는 견해와 대립하며 의식·정신·이성·이데아 등을 강조하는 관념론 대부분의 형태에 반대한다. 둘째, 인간을 주어진 완성된 실재로 보고 이 실재의 요소를 분석해야만 인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여기는 학설과도 대립한다. 그래서 실존주의는 외적 사실의 실재성을 강조하는 객관주의나 과학주의의 모든 형태에 반대한다. 셋째, 모든 형태의 필연주의와 대립한다. 넷째, 유아론(나만이 존재한다)이나 인식론적 관념론(인식대상은 정신적인 것이다)과 대립한다. 실존은 다른 존재와의 관계로서 항상 자기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는 이와 같은 토대에서 출발하지만 그 방향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실존(existence)과 관련해 존재(being)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이 초월성이 실존의 기초 또는 기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유신론적 형태를 취할 수도 있고, 인간 실존은 절대적 자유로서 자신을 기투(企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급진적 무신론의 형태를 띨 수도 있으며 인간 실존의 유한성, 즉 기투와 선택의 가능성에 내재한 한계를 강조함으로써 인문주의의 형태를 띨 수도 있다. 실존주의는 이렇게 여러 방향을 취하면서 실존의 여러 측면에 초점을 맞춘다. 첫째, 인간 상황의 문제적 성격인데, 이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다양한 가능성에 직면하며 선택하고 기투할 수 있다. 둘째, 이런 인간 상황의 현상 특히 부정적 현상으로서, 이를테면 사물·타인과의 관계에 매달려 있는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관심이나 선입견, 죽음·고통 등 넘을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인한 '난파', 상황의 반복에서 오는 권태 등이다. 셋째, 실존에 내재하는 상호주관성으로서, 이것은 나와 너(타인 또는 신) 사이의 인격적 관계일 수도 있고, 익명의 군중과 개별 자아 사이의 비인격적 관계일 수도 있다. 넷째, 존재의 일반적 의미에 관한 학설인 존재론이다. 다섯째, 실존적 분석의 치료적 가치로서, 실존적 분석은 일상생활에서 빠지기 쉬운 미혹과 타락에서 인간 실존을 해방하고 실존이 그 본래성을 향하도록 한다.

 

 

방법론적 논점

실존주의자들이 실존 해석에서 사용하는 방법은 해석자와 해석되는 것, 존재 문제와 존재 자체 사이의 관계가 직접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이다. 이 2가지 항은 실존 속에서 일치한다. 왜냐하면 '존재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인간은 이 물음을 자신에게 제기하지 않을 수 없고 또 자신의 존재에서 출발하지 않고서는 이 물음에 대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공통적 배경에서 출발하면서도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각기 실존 해석의 독자적 방법을 발전시켰다. 하이데거는 후설의 현상학을 이용한다. 하이데거에서 현상은 단순한 가상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현현이다. 현상학은 존재의 구조를 드러낼 수 있으며 따라서 존재론이다. 다만 이때의 존재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는 존재, 곧 인간이다.

 

야스퍼스는 실존의 합리적 해명방법을 채택한다. 그에 따르면 실존은 존재에 대한 추구로서 인간의 합리적 자기이해 노력 또는 의사소통 노력이다. 그의 방법은 실존과 이성이 인간 존재의 두 기둥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이성은 가능적 실존이다. 사르트르에서 철학의 방법은 실존적 정신분석 즉 인간 실존을 구성하는 '근본 기투'에 관한 분석이다. 마르셀에 따르면 철학의 방법은 존재의 신비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서 객관적·합리적 분석이나 증명을 통해서는 존재를 발견할 수 없다. 아바냐노와 메를로 퐁티 등의 인문주의적 실존주의는 실존을 구성하는 구조 즉 인간을 다른 존재와 연결해주는 관계를 과학을 비롯한 모든 이용가능한 기술을 사용하여 분석하고 규정한다.

 

내용상의 논점

존재론과 인간 실존의 방식은 모두 실존주의의 관심사이다.

 

존재론

실존주의적 존재론의 근본 특징은 실존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서 가능성에 우위를 둔다는 것이다. 이때 가능성은 모순의 부재라는 순수 논리적 의미도 아니고 현실성이 될 운명에 처해 있는 잠재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도 아니며 인간 실존의 구조인 존재적·객관적 가능성의 의미이다. 그것은 인간 존재의 특유한 양상이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주장은 이런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주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은 그 존재 및 행동 양식을 결정하는 본성을 갖지 않으며 이 양식이란 곧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현존재는 항상 그 자신의 가능성이다"라고 말한다. 가능성으로서 인간 실존은 미래의 선취·예기·기투이다. 미래는 근본적인 시간의 차원이며 현재와 과거는 부차적이다. 또한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초월이기도 하다. 초월한다는 것은 그 자신을 넘어서 세계의 다른 존재(사물과 타인)로 총체로서의 세계로 향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실존주의자에 따르면 이 다른 실재의 존재는 인간 실존의 존재와는 다른 양상을 가진다. 즉 실존에 고유한 양상은 가능성인 데 반해 존재에 고유한 양상은 현실성 또는 사실성이다. 그결과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존재의 무(無), 사실의 모든 현실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난다. 하이데거는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Was ist Metaphysik?〉(1929)에서 "인간 실존은 무의 한가운데 머무르지 않고서는 존재와 관계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실존주의자들에게 '무'란 사실의 현실성에 대한 부정으로서 가능적 실존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가능적인 것은 그 자신(itself)이 '되기에는' 대자(For-itself)가 결여된 '어떤 것'으로 그것은 객체가 되기에는 주체가 결여된 것이며 결여로서만 존재할 뿐이다"라고 했다.

 

실존을 무로 환원하는 것은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첫째, 사르트르, 카뮈, 무신론적 실존주의처럼 의미의 결여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즉 실존과 모든 기투의 부조리로 나아갈 수 있다. 둘째, 후기 하이데거, 야스퍼스, 신학적 실존주의처럼 실존을 구성하는 가능성을 넘어서 실존과 존재 사이의 더욱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런 방향에서 존재는 실존 속에서 언어적·신앙적·신비적 종교 등을 통해 그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 실존의 방식

실존주의는 때로 인간의 운명을 인간 자신이 맡는다는 의미에서 인문주의 성향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실존에 대해 존재의 우위를 강조하는 조류도 있다. 이 2가지 관점의 차이는 자유의 문제를 푸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항상 일정한 상황에 처해 있으며 인간을 구성하는 가능성은 이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에서는 상황이 인간의 선택을 결정한다. 반대로 사르트르에서는 선택이 상황을 결정한다. 이처럼 실존주의는 운명 개념과 급진적 자유 개념 사이에서 동요한다.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의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며 사르트르의 자유론적 관점에서 과거의 의미는 현재의 기투에 의존한다. 그러나 운명론적 관점에서도 인간에게 선택의 여지는 있다. 이때의 선택이란 자신의 무를 이해하느냐 않느냐 사이의 선택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이 실존의 뛰어넘을 수 없는 가능성(그 표지는 죽음)을 이해할 때 '진정한 실존'을 달성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인간에게 제공된 유일한 선택은 상황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사이의 선택이다. 이처럼 실존주의적 존재론은 존재와 무 사이를 동요하면서 무를 존재에 관한 유일한 계시로 여긴다.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신이 되려고 분투하는"(사르트르) 자이다. 우주론적·신학적 실존주의에서는 존재가 인간을 무로부터 되찾기 위해 다소 신비적인 방식으로 개입한다.

 

실존주의의 사회적·역사적 기획

인문주의적 실존주의는 인간이 역사에서 가질 수 있는 어느 정도 적극적이고도 결정적인 역할을 인정해왔다. 예를 들어 메를로 퐁티는 인간이 사회 변혁을 위해 효과적으로 행동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향해 나아갔다. 실존주의는 인간은 자연·사회와 원초적이고 제거할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일치한다. 〈변증법적 이성 비판 Critique de la raison dialectique〉(1960)에서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옹호했던 '기투' 개념을 수정하고 마르크스가 이해한 변증법 개념을 이용하여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종합하려 했다. 실존을 구성하는 기투는 전에 사르트르가 주장했듯이 자의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객관적 가능성의 제약을 받는다. 사르트르는 마르크스처럼 이 객관적 가능성을 '실존의 물질적 조건'과 동일시한다. 물론 기투는 어디까지나 유일무이한 의식을 가진 특수한 개인의 기투이다. 그러나 이 의식은 총체화하려고 노력하는 즉 점차 포괄적인 인간 집단을 구성하기 위해 타인과의 관계에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의식이다. 변증법적 이성은 바로 이런 총체화 증대의 과정이다. 나아가 변증법적 이성은 역사의 진정한 주역이 되며 역사에 참여하는 개인의 내적 자유와 동일시된다. 사르트르는 이처럼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는 태도에서 역사의 절대적인 변증법적 필연성(물론 이 필연성은 개인들에 의해 내면화하고 체험됨)을 옹호하는 태도로 옮겨갔다.

 

실존주의는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하면서 철학과 현대 문화 전반에 개념적 도구를 제공해왔다. 이 도구의 성격과 사용 기술은 아직도 해명되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도구란 '문제성'·'기회'·'조건'·'선택'·'자유'·'기투'와 같은 용어들을 말한다. 이런 도구는 인식론·윤리학·미학·교육·정치학 등의 분야에서 실존의 해석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N. Abbagnano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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