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봄날 - 여상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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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 여상현

 

 

논두렁가로 바스락 바스락 땅강아지 기어나고

아침 망웃 뭉게뭉게 김이 서리다

 

꼬추잠자리 저자를 선* 황토물 연못가엔

약에 쓴다고 비단개구리 잡는 꼬마둥이 녀석들이 움성거렸다

 

바구니 낀 계집애들은 푸른 보리밭 고랑으로 기어들고

까투리는 쟁끼* 꼬리를 물고 산기슭을 내리는구나

 

꿀벌떼 노오란 장다리* 밭에서 잉잉거리고

동구밖 지름길론 갈모*를 달아맨 괴나리봇짐*이 하나 떠나간다

 

성황당 돌무데기 우거진 찔레

사철 하얀 종이쪽이 나풀거리더니 꽃이 피었네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에 무슨 소식이 왔다

 

(시집 '해방기념시집', 1945.12)

 

* 저자를 서다 : 장이 서다. 여기에서는 잠자리들이 매우 많다는 의미.

* 쟁끼 : 장끼[수꿩]의 방언.

* 장다리 : 무나 배추 따위의 꽃줄기.

* 갈모 : 기름 종이로 만들어,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 쓰는 것.

* 괴나리봇짐 : 걸어갈 때 등에 짊어지는 조그마한 봇짐.


<감상의 길잡이>

1936󰡔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등단한 여상현은, 해방 이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현실 인식이 뚜렷한 일련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뒤늦게 고평된 시인이다.

 

이 시는 󰡔해방기념시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해방의 감격을 어떠한 흥분도 없이 담담히 서술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시인 자신은 자신의 시집에서는 이 시를 해방 이전의 시와 함께 취급하고 있어서 창작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해방 이전에 창작된 작품이라면, 이 시의 의미는 만주 유랑민의 소식을 전해받는 것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 어느 봄날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의 풍경을 친근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15연까지는 논, 연못가, 보리밭, 성황당을 배경으로 한 봄날의 한가하고 나른한 풍경이 계속된다. 각 연은 모두 2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연은 각 행마다 봄날을 맞는 동물과 인간의 행위를 병치시켜 놓아서, 봄날이 베풀어 주는 여유로움이 물아일체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5연에서는 성황당이 지니는 기복(祈福)의 인간적 행위와 찔레나무의 순환적 질서가 맞물려 이러한 봄날의 표정이 해마다 반복됨을 암시한다. 이러한 여유로움은 마지막 6연에서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의 출현으로 갑자기 긴장감에 휩싸인다. 특히, 그 색깔을 봄날의 밝은 이미지 속에서 뚜렷이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돌연한 무슨 소식의 실체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진다. 분명 자는 듯 고요한 마을을 흥분으로 깨우는 어떤 소식이 온 것이 분명하다. 그 소식은 무엇인가. 비록 봄날이라는 시기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소식을 해방의 메시지로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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