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變身) / 카프카(Franz kafka)
by 송화은율변신(變身) / 카프카(Franz kafka)
(앞부분의 줄거리)
가족을 위해 상점의 판매원으로 고달픈 생활을 반복해 오던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속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한다. 문 밖에서는 그의 출근을 재촉하는 부모와 여동생의 소리가 들리고, 한 시간도 채 못되어 상점에서 지배인이 달려와 출근을 조른다. 그레고르는 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못하여 번민한다. 잠겨 있던 방문이 열리고 벌레로 변신한 그레고르를 보는 순간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지배인은 모두 놀라고 그를 한낱 독충으로 간주한다.
(전략)
잠시 동안 시간이 흘렀다. 그레고르는 힘없이 누워 있었다. 주위는 고요했다. 아마도 좋은 징조일 것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물론 하녀는 부엌에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레테가 문을 열러 나가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니?"
이것이 그의 첫마디 말이었다. 그레테의 표정을 보고 모든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그레테는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어물어물 이렇게 대답했다.
"어머니가 기절하셨어요. 그러나 이젠 괜찮아요. 글쎄, 그레고르가 기어나왔지 뭐예요."
"내 그럴 줄 알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너희들에게 늘 말하지 않더냐. 그래도 엄마와 너는 들어먹으려 하지 않으니 이 꼴이지."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그레테의 너무나 간단한 보고로 나쁜 인상을 받아, 그레고르가 어떤 난폭한 짓을 저질렀다고 오해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우선 아버지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시도해 보았다. 아무튼 아버지에게 사정을 설명할 시간 여유뿐만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조차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 방 도어 옆으로 재빨리 기어가서 도어에다 몸을 착 붙이고 기댔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버지는 현관 방에서 여기로 들어오자마자, 그레고르가 자기 방으로 곧 돌아가려는 착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 그를 쫓아보낼 필요도 없으며, 단지 도어를 열어주기만 하면 자기 방으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사실을 쉽사리 알아차릴 것이었다. 그레고르는 그렇게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미묘한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기분이 되어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방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치 격분한 것 같으면서도 기뻐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야!"
하고 외쳤다. 그레고르는 머리를 도어에서 돌려서 아버지 쪽을 쳐다보았다.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그러한 모습의 아버지는 이제껏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최근에 와서는 이리저리 기어다니기에 정신이 팔려서, 전과 같이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서 관심을 두는 것을 게을리하고 있었다. 사실 전과 다른 사정에 부딪쳐도 그리 당황하거나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지금 웬일인가? 전에 그레고르가 상점 일로 여행을 떠날 때, 피로해서 침대에 묻혀 누워 계시던 바로 그 아버지란 말인가. 또 그가 저녁에 돌아올 때면 잠옷을 입은 채 안락의자에 앉아서 자기를 맞아주시던 바로 그 아버지란 말인가. 또 아버지는 잘 일어서지도 못하고, 반갑다는 표시로 두 팔만 쳐들고 맞아주셨다. 1년에 두서너 번 일요일이나 큰 축제날에 어쩌다가 가족들과 함께 산보를 할 때는, 그렇지 않아도 걸음이 느린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 끼어서, 그보다 더 느린 속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때, 그는 낡은 외투를 몸에다 두르고 언제나 조심스럽게 지팡이를 짚고 걸어갔으며, 어떤 말이라도 하려면 거의 언제나 걸음을 멈추고, 함께 따라가는 가족들을 자기 가까이 불러 모으시던 그런 아버지가 바로 이 분이란 말인가?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꼿꼿이 바로 서 있었다. 마치 은행의 사환들이 입고 있는 옷처럼, 노란 금단추가 달려 있는 팽팽한 파란 빛깔의 정복을 입고 있었다. 윗도리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불룩하게 두 겹의 군턱이 내밀고 있었다. 총총하고 짙은 눈썹 밑에서 까만 눈동자가 생기 있고 조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전에는 거칠고 더부룩했던 흰머리칼이, 단정하게 가리마를 타서 빗어내리던 머리에 착 붙어서 번지르르하게 광이 나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모를 내던졌다. 제모는 노란 금실로 큰 글자가 수놓여진 것으로 미뤄 보아, 아마도 은행 마크임에 틀림없었다. 제모는 방안에 아치형의 선을 그으면서 소파 위에 떨어졌다. 아버지는 기다란 제복 윗도리의 옷자락을 활짝 뒤로 젖히고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못 마땅한 듯이 상을 찌뿌리면서 그레고를 향해 걸어왔다. 아버지는 자기가 어떻게 하려는지 자신도 모르면서, 어느 때와 달리 발을 번쩍번쩍 들며 걸어왔다. 그때,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넓은 장화 바닥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나 그레고르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의 새 생활이 시작된 첫날부터 아버지가 자기에게는 아주 엄격하게 대하는 것만이 적당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가 다가오면 쫓기듯이 일어나고, 아버지가 멈추면 자기도 멈추고, 아버지가 움직이는 기색이 보이면 앞으로 피해 달아났다. 이렇게 그들은 별다른 소동을 일으키지 않은 채 벌써 몇 번이나 방안을 빙빙 돌아다녔다. 그리고 동작이 느렸기 때문에 겉으로는 추격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만일 벽이나 천정으로 도망을 치면, 특별한 악의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고 아버지에게 오해를 받을까봐 두려워서, 그는 잠시 마룻바닥에서 머물러 있기로 했다. 어쨌든 그레고르는 이렇게 기어다니는 것이 오래 계속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한 발짝 옮겨 놓는 동안에 그는 무수한 운동을 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벌써 숨이 가쁜 것을 느낄 정도였다. 변신하기 전에도 그는 사람으로서 튼튼한 폐를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이렇게 숨이 찬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기어다니려고 안간힘을 다해서 비틀거리고 있는 동안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띵하니 머리가 흐려져서 이제는 마룻바닥을 기어서 도망치는 것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았다. 또 자유롭게 벽을 기어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날에 이 방의 벽돌은, 온통 톱니 모양과 뾰족한 장식으로 가득 차 있는데, 세밀하게 조각된 가구들로 말미암아 막혀 있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바로 옆에 무엇인지 가볍게 던져져서 자기 앞으로 굴러 왔는데 그것은 사과였다. 곧 둘 째번 사과가 날아왔다.
그레고르는 겁에 질린 나머지 그만 그 자리에 발을 멈췄다. 앞으로 달아나도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과로 자기를 폭격하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천장 위에 있는 과일 접시에서 사과를 꺼내어 주머니에 가득 채우고 처음에는 겨누지도 않고 사과를 연달아 던졌다. 이 조그마한 빨간 사과들은 마치 전기 장치처럼 마루 위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서로 부딪치기도 했다. 살짝 던져진 사과 하나가 그레고르의 등을 스쳤지만 다치지는 않고 빗나갔다. 그러나 다음에 날아온 사과가 바로 그레고르의 등에 박히고 말았다. 뜻밖에 받은 심한 고통을 자리를 옮김으로써 가시게 할 수 있다는 듯이 그레고르는 천천히 앞으로 몸을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꼼짝달싹 못하게 못 박힌 것처럼 느껴졌으며, 온 감각이 산란해져 그 자리에 뻗어 버리고 말았다. (전원성 옮김/ 세계 문학전집)
(중략의 줄거리)
날이 갈수록 가족으로부터 자애를 느낄 수 없음을 알고, 그레고르는 마침내 인간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포기하고 벌레로서의 생활에 만족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변신 이전에 가졌던 인간으로서의 애정을 그대로 유지하려 한다. 한편 그는 가정을 위한 자신의 희생이 쓸모 없는 것임을 알게 된다. 파산해서 생활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던 부모에게는 저축해 놓은 돈이 있었고, 자신이 원상으로 복구될 가능성이 없자 아버지는 은행의 수위로, 어머니는 잡화상의 바느질 일로, 여동생은 그렇게 좋아하던 바이올린 공부 대신에 상점의 여자 판매원으로 식구 모두들 동분 서주한다.
그런데도 벌레로서 새 생활에 적응해 보려고 애써 봤으나 가족들의 냉대는 날로 심해간다. 식구 중에 그레고르가 가장 아껴오던 여동생은 그의 방안의 가구들을 옆방에 치워 버리고, 하숙인을 받기 위해 내다팔 수 없는 모든 잡동사니는 그의 방으로 옮겨 놓는다. 이 과정에서 그림에 달라 붙은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어머니가 기절한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는 사과를 그에게 던진다. 그 사과가 등에 박혀, 그레고르는 상처를 입고 한 달 동안 고생을 하게 된다.
(중략)
누이동생은 바이올린을 타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제각기 자리잡은 위치에서 주의 깊게 딸의 두 손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그레고르는 바이올린 소리에 마음이 끌려서 자기도 모르게 약간 앞으로 나아가서 머리를 거실 쪽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는 요사이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내 온 것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전 같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고려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니만큼 지금에 와서는 다른 사람의 눈 앞에서 몸을 숨겨야 할 이유가 더욱 절실했을 것이다. 왜냐 하면 그의 방안에는 어디나 먼지가 소복이 쌓여 있었으며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먼지가 펄펄 날려 온몸이 먼지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뿐더러 실오라기, 머리털, 먹다 남은 음식찌꺼기 같은 것을 등허리와 옆구리에 붙인 채 끌고 돌아다녔다.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무관심한 태도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래서 전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랬지만, 요사이는 벌렁 등을 대고 누워서 양탄자에 몸을 비비는 일도 없었다. 이러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티끌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은 깨끗한 거실 마룻바닥 위를 기어갔지만,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을 뿐더러 부끄러운 줄도 몰랐다.
그런데 그가 기어 나오는 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가족들은 완전히 바이올린 연주에 황홀해져서 정신이 팔려 있었다. 하숙인들도 처음에는 두 손을 바지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누이동생의 스탠드 바로 뒤에 자리잡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악보를 들여다 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누이동생에게는 확실히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잠시 후 머리를 수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면서 창문 옆으로 물러섰다. 아버지는 염려하는 눈초리로 창문 옆에 머물러 있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누가 보더라도 아름답고 재미있는 바이올린 연주를 들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였던 그들은 기대에 어긋나서 실망하고 싫증이 난 기색이었다. 체면을 생각하고 예의를 지킨다는 입장에서, 할 수 없이 듣고 있는 눈치가 분명했다. 특히 그들이 모두 담배 연기를 코와 입으로 허공에 내뿜는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초조한 기색을 느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도 누이동생은 매우 훌륭하게 연주했다. 고개를 옆으로 갸우뚱거리며 눈초리는 감정에 젖은 듯이 슬픈 표정으로 악보의 줄을 더듬고 있었다. 그레고르는 조금 더 앞으로 기어 나갔다. 그리고 혹시나 누이동생의 시선과 마주칠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고개를 마루 위에 바짝 대다시피 수그리고 있었다. 이처럼 음악 소리에 감동을 느끼는데도 그는 역시 동물이란 말인가? 그는 마치 자기도 모르게 그리던 마음의 양식을 얻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누이동생 옆으로 기어 나가려고 했다. 누이동생의 치맛자락을 끌어당겨서 누이동생이 바이올린을 가지고 자기 방으로 건너와 주었으면 하는 뜻을 알려 주려고 했다. 왜냐 하면 여기에서는 아무도 자기만큼 그 연주를 칭찬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동안은 적어도 누이동생을 자기 방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의 흉악한 모습은 처음으로 도움이 될 것이다. 자기 방에 있는 도어마다, 언제나 정신 바싹 차리고 지켜 서 있다가 들어오는 놈들에게 으르렁대며 덤벼들 것이다. 그러나 누이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 되며,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자기 옆에서 지내게 해야 한다. 자기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서 자기 쪽으로 귀를 기울이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이동생에게 그녀를 음악 학교에 보내 주려고 확고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는 것과, 이런 불행한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떤 반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구애되지 않고 지난 크리스마스 날 저녁에―그런데 도대체 크리스마스가 벌써 지났을까?―여러 사람들 앞에서 명백히 자기 계획을 발표했으리라는 것을 알려 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누이동생은 틀림없이 감격한 나머지 울음을 터뜨릴 것이다. 그러면 그레고르는 어깨까지 기어 올라가서 누이동생 목에 키스를 해 주려고 했다. 누이동생은 직장에 나가게 되면서부터 리본도 칼라도 없이 목을 내놓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잠자 씨!"
하고 두목격인 남자가 아버지에게 소리를 쳤다. 그리고 그는 그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앞으로 기어 나오는 그레고르를 집게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바이올린 소리가 멈췄다. 두목격인 그 남자는 우선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친구들에게 미소를 던지고, 다시 그레고르 쪽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그레고르를 쫓아 내는 것보다는 먼저 하숙인들을 진정시키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하숙인들은 흥분하기는커녕 바이올린 연주보다도 도리어 그레고르에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들에게로 뛰어가서 두 팔을 벌리고 하숙인들을 자기 방으로 돌려 보내려고 애를 쓰는 동시에, 자기 몸으로 그레고르가 보이지 않도록 가리려고 했다. 그 때 그들은 아닌게아니라 약간 화를 내는 기색이었다.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 화를 냈는지, 또는 그레고르 같은 것이 이웃 방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다가 그제서야 알게 되어 화를 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은 아버지에게 해명을 요구하고, 그들쪽에서도 팔을 쳐들며 불안스럽게 수염을 비비 꼬면서 천천히 자기 방으로 물러갔다. 그 동안 누이동생은, 별안간 연주가 중단된 후 잠시 정신 없이 멍하고 있다가 바로 정신을 차리고 얼마 동안 축 늘어뜨린 두 손에 바이올린과 활을 쥐고 계속 연주를 하고 있는 것처럼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이어서 누이동생은 어머니―숨이 막히는 듯 가슴을 들먹거리며 아직도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무릎 위에 악기를 놓고, 옆방으로 앞질러 뛰어들어갔다. 하숙인들은 아버지에게 쫓겨서 앞서 보다 더 빨리 옆방(그들의 방)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누이동생은 익숙한 솜씨로 침대 위에 놓여 있던 이부자리와 베개를 툭툭 털어 위로 올리더니 순식간에 보기 좋게 정돈해 놓았다. 하숙인들이 방으로 몰려들어오기 전에 침대를 정돈해 버린 다음, 그녀는 살짝 빠져 나왔다. 아버지는 또다시 자기 옹고집에 사로잡혀서 늘 하숙인들에게 베풀던 존경심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버지는 악착같이 그들을 밀치고만 있었다. 드디어 방의 도어까지 다다랐을 때 두목격인 남자가 쾅 하고 발을 굴렀기 때문에 아버지도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나는 이 자리에서 선언하지만……"
그 남자는 한쪽 손을 쳐들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힐끔 바라본 다음 이렇게 말했다.
"현재 이 집과 이 가족들 속에 감돌고 있는 불쾌한 분위기를 고려해서―여기서 그 남자는 선뜻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마루 위에 침을 뱉았다―나는 방을 해약합니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기간의 방세에 대해서는 한푼도 지불할 수가 없습니다. 그 대신 나는 앞으로―거짓말이 아닙니다―아주 쉽게 근거를 대고 이유를 붙일 수 있는 어떠한 손해 배상 청구를 당신에게 제기해야 될 것인지 이 점을 신중히 고려해 볼 작정입니다."
그 남자는 입을 다물고, 마치 무엇을 기대하는 듯이 똑바로 앞을 쳐다보았다. 아닌게 아니라 두 친구들도 바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역시 이 자리에서 당장에 해약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두목격인 남자는 도어의 핸들을 쥐고 탕 하고 요란스럽게 도어를 닫았다.
아버지는 손으로 의자를 더듬으며 비틀거리더니, 힘없이 그 위에 푹 쓰러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손발을 축 늘어뜨리고 전과 같이 저녁잠을 자는 것처럼 보였으나, 고개를 가만히 둘 수 없는 듯 쉴새없이 끄떡거리고 있는 꼴을 보면 전혀 자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레고르는 그 동안 자기가 하숙인들에게 들켰던 바로 그 자리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자기의 계획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과 아마도 오랫동안 굶주렸기 때문에 몸이 극도로 쇠약해진 듯, 그는 도저히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자기 몸 위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한꺼번에 무자비하게 허물어져서 닥쳐올 것이라고 확실히 느끼면서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어머니의 손가락이 떨리더니 바이올린이 어머니 무릎에서 떨어지며 소리가 크게 울렸지만 그레고르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어머니!……아버지!"
하고 누이동생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기 전에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 이상 더 못견디겠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직 사정을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저런 괴물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것을 없애야 한단 말이에요. 저것을 먹여 살리려고 참고 견디며,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왔어요. 아무도 우리들을 나무랄 사람은 없어요."
"그래 네 말이 옳다."
아버지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직도 완전히 숨을 돌리지 못하는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과 같은 눈초리로, 손을 입에 대고 먹먹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은 어머니 옆으로 달려가서 이마를 짚어 주었다. 아버지는 누이 동생의 말을 듣고서 무엇인지 마음 속에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의자 위에 똑바로 앉아서 하숙인들이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에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접시들 사이에서, 급사의 제모를 주물럭거리면서 가끔 가만히 누워 있는 그레고르 쪽을 쳐다보았다.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려야만 해요."
하고, 그저 아버지만 쳐다보며 누이동생은 다짐하듯이 말했다. 왜냐 하면, 어머니는 기침하느라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을 거예요. 어쩐지 저는 그렇게만 생각되요. 우리들은 모두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일해야 되는데, 이처럼 끝없는 두통거리를 집안에 두고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요? 저는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누이동생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눈물이 어머니의 얼굴에 흘러내렸으며 누이동생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더니 어머니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었다.
"얘야."
하고 아버지는 매우 너그럽게, 동감하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쩌면 좋단 말이냐?"
누이동생은 아버지에게 아무 구체적인 방안도 없다고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다. 그녀는 울고 있는 동안에 앞서 그처럼 단호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정말 어쩌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놈이 우리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주었으면……"
하고 아버지는 반쯤 물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누이동생은 울면서, 그런 일은 전해 생각해 볼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한쪽 손을 성급히 내저었다.
"저놈이 우리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주었으면……"
하고 아버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누이동생의 확신을 자기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다면 저놈하고 타협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저 모양 저 꼴이니……"
"내쫓아야 해요!"
하고 누이동생이 외쳤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만 돼요. 우리들이 이제껏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이 우리들 자신의 불행이었어요. 어째서 저것이 오빠란 말이예요? 만일 정말 오빠라면, 사람이 저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스스로 나가 버렸을 거예요. 그러면 오빠는 없을망정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 갈 수 있고, 언제까지나 오빠를 소중하게 회상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저것은 우리들을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쫓아 낼뿐더러, 나중에는 아마 이 집 전체를 차지하고 우리들까지 길가에서 잠을 자게 할 거예요―저것 좀 보세요, 아버지."
하고 누이동생이 갑자기 외쳤다.
"또 장난을 시작했어요!"
그레고르에게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 누이동생은 어머니 곁을 떠나, 마치 그녀가 우두커니 그레고르 옆에 있느니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를 희생시키는 편이 낫다는 듯이, 어머니의 의자를 박차고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그녀는 아버지의 뒤로 달려갔다. 아버지도 누이동생의 동작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똑같이 일어나 누이동생을 보호하려는 듯이 두 팔을 앞으로 쳐들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누이동생은 물론이고, 아무에게도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단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비참한 상태로는 조금만 몸을 돌리려고 해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머리의 반동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머리를 쳐들었다가는 마룻바닥 위에 내리쳤다. 따라서, 이 같은 괴상한 동작은 말할 나위도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레고르의 악의 없는 의도만은 그래도 알아 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저 순간적으로 놀랐을 따름이다. 이제 가족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서 두 다리를 모아 쭉 뻗치고 있었다. 극도로 피로했기 때문에 눈꺼풀이 거의 덮일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누이동생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누이동생은 한쪽 손으로 아버지의 목을 감고 있었다.
'자, 이제는 방향을 돌려도 상관 없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에 지쳐서 숨이 가쁘고 호흡이 거칠어졌기 때문에 숨을 돌리려고 이따금 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쫓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이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방향을 돌리고 나서 자기 방으로 곧장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방까지의 거리가 그다지도 먼 데 대해서 크게 놀랐다. 그래서 조금 전에 쇠약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 이처럼 먼 거리를 멀다고 느끼지도 않고 기어왔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저 빨리 기어가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말을 걸거나 소리를 쳐서 자기를 방해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도 못했다. 겨우 도어 앞까지 갔을 때 비로소 한 번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잘 돌지 않았다.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자기 뒤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누이동생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어머니를 힐끗 스쳤는데, 어머니는 그 때 깜빡 잠이 들어있었다.
그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어느 새 성급히 도어가 닫히더니 고리가 잠기고 그대로 방 안에 갇히고 말았다. 별안간 뒤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레고르는 너무나 놀라 다리가 휘청 굽혀져서 부러질 지경이었다. 급히 달려온 사람은 누이동생이었다. 누이동생은 미리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레고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번개같이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레고르는 다가오는 누이동생의 발자국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그녀는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넣어서 돌리며,
"됐어요!"
하고 양친을 향해서 외쳤다.
"자, 이제부터 어쩔 셈이지?"
그레고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는 곧 자기가 그 이상 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이 가느다란 다리로 여기까지 기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 밖에는 어느 정도 쾌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온 몸이 아팠지만 점점 아픈 것이 가시고 결국 머지 않아서 완전히 가라앉을 것 같았다. 등에 박힌 썩은 사과도, 부드러운 먼지에 싸인 그 주위의 염증도, 벌써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애정을 가지고,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아마도 훨씬 더 절실했을 것이다. 교회에서 탑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창 밖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한 것을 그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
아침 일찍이 할멈이 왔을 때―그런 짓만은 제발 말라고 지금까지도 몇번이나 타일렀지만, 성급히 힘껏 도어란 도어를 모조리 닫기 때문에 이 할멈이 오면 온 집안 사람들은 편히 잠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멈은 보통 때처럼 슬쩍 그레고르의 방을 들여다보았으나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할멈은 그가 감정이 상해서 일부러 꼼짝도 않고 누워 능글능글 불쾌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할멈은 그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할멈은 때마침 손에 기다란 비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도어 밖에서 비를 내밀어 그레고르를 간지르려고 하였다. 그래도 아무 효과가 없자 할멈은 바짝 화가 나서, 그레고르의 몸을 약간 쑤셔 보았다. 그레고르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밀려갔을 때 비로소 할멈은 이상하다는 듯이 주의 깊게 살펴 보았다. 곧 그 진상을 알게 되자, 할멈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휙 하고 불었다. 그리고 그 이상 그 자리에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갑자기 잠자 부부의 침실 도어를 열어 젖히고 어둠 속을 향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좀 가봐요, 저것이 뻗었어요. 저기 자빠져서 그만 뻗어 버리고 말았어요!"
잠자 부부는 후딱 더블 베드에서 일어나서 할멈의 보고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우선 할멈 앞에서 그들의 당황한 꼬락서니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 부부는 기겁을 하며 침대 좌우로 내려와 잠자 씨는 어깨에 담요를 걸치고, 부인은 잠옷을 입은 채 침실에서 나와 그레고르의 방으로 들러갔다. 그러는 동안에 거실의 도어도 열렸다. 하숙을 친 다음부터 그레테가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그레테는 한잠도 자지 못한 것처럼 제대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창백한 얼굴빛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죽었다니?"
잠자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할멈을 쳐다보았다. 물론 자기가 알아보아도 알 수 있었고,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은 것 같아요."
할멈은 이렇게 말하고 증거라도 보이려는 듯이 비로 그레고르의 시체를 옆으로 멀리 쭉 떠밀어 보였다. 잠자 부인은 그 비를 가로막으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사실 막지는 않았다.
"자아, 아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거야."
잠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어머니와 딸도 그가 하는 대로 따라서 똑같은 동작을 했다. 그 때까지 시체에서 한눈도 팔지 않고 있었던 그레테가 입을 열었다.
"좀 보세요, 오빠는 어쩌면 저렇게 말랐을까요. 벌써 오래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어요. 음식을 갖다 주어도 그냥 그대로 내보냈지 뭐예요."
사실 그레고르의 몸은 너무 말라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미 다리들이 몸뚱이를 위로 떠받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밖의 아무것도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 비로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게 되었다.
"그레테야, 이리 좀 온."
하고 잠자 부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레테는 시체를 돌아다보며, 부모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할멈은 도어를 닫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신선한 공기 속에는 어딘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느덧 벌써 3월 말이었다.
세 하숙인들은 방에서 나와 아침 식사를 찾았으나,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숙인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아침 식사는 어디 있어요?"
하고 그들 가운데 두목격인 남자가 투덜거리며 할멈에게 물었다. 그러나 할멈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급히 서두르며 그레고르의 방에 가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들은 그레고르의 방으로 가서 약간 낡은 웃옷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그레고르의 시체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방안은 이미 환하게 밝아졌다.
그 때 침실의 도어가 열렸다. 잠자 씨는 급사의 제복을 입고, 한 쪽 팔은 아내에게, 또 다른 쪽 팔은 딸에게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세 사람은 모두들 약간 운 듯 눈이 부어 있었다. 그레테는 때때로 아버지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주시오!"
잠자 씨는 이렇게 말하고, 아내와 딸을 자기 몸에서 떼지도 않은 채 현관문 쪽을 가리켰다.
"무슨 말씀인지요?"
그 두목격인 남자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싱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뒷짐을 진 채로 끊임없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마치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벌어지게 될 언쟁을 마음 속으로 은근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말한 바로 그대로라니까요."
잠자 씨는 이렇게 대답하고, 아내와 딸을 옆에 거느린 채 그대로 나란히 서서 하숙인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처음에는 두목격인 남자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마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정리하려는 듯이 잠시 마루 위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나가지요."
하고 그는 말하고 잠자 씨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갑자기 자기를 엄습해 온 겸손한 기분 속에서 이와 같이 새삼 결심한 데 대해서까지도 주인에게 새로운 승인이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자 씨는 눈을 부릅뜨고, 그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곧 현관방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두 친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곧 그 두목의 뒤를 쫓아갔다. 마치 잠자 씨가 자기들보다 먼저 앞질러서 현관방에 들어가 자기들과 두목 사이를 끊어 놓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현관방에서 그 세 사람은 옷걸이에서 모자를 손에 집어 들고, 지팡이를 세웠던 곳에서 꺼내 들은 다음,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전혀 아무 근거도 없는 의심을 품고서―그의 의혹이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밝혀졌지만―잠자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계단 앞으로 나가서 난간에 기대어 떠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세 사람은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발을 옮겨서 긴 계단을 내려갔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데 따라서 층계마다 중간의 커브 도는 곳에서 언뜻 자취를 감추었다가, 2, 3초 후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이 더욱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들에 대한 잠자 가족의 관심도 점점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저 밑에서 세 사람을 향해서 올라오던 푸줏간 급사가 마침내 그들을 지나쳐서 머리에 짐을 이고 뽐내듯이 퉁퉁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그 때야 비로소 잠자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난간을 떠나 가벼운 기분으로 집안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오늘 하루를 쉬면서 산보나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일을 쉴만한 이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책상 옆에 앉아서 잠자 씨는 자기 지배인에게, 잠자 부인은 내재봉 주문자에게, 그리고 그레테는 상점 주인에게 각각 결근계를 썼다. 결근계를 쓰고 있을 때, 할멈이 아침 일이 다 끝났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던 그들은 얼굴도 들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나 할멈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내며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하고 잠자 씨가 물었다. 할멈은 도어 옆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할멈은 가족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지만 상대방이 캐묻지 않으면 선뜻 알려 주지 않겠다는 그런 태도였다. 할멈의 모자 위에 타조의 작은 깃이 하나 꼿꼿이 꽂혀 있었는데 가볍게 이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할멈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잠자 씨는 그 깃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요?"
하고 잠자 부인이 물었다. 할멈은 이 집에서 부인을 가장 존경하고 있었다.
"네……"
할멈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정답게 웃느라고 바로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저어 옆방에 있는 그것을 치울 걱정은 조금도 마세요. 벌써 제가 다 치워버렸으니까요."
잠자 부인과 그레테는 결근계를 계속해서 쓰려는 듯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잠자 씨는 할멈이 모든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하는 눈치를 했을 때, 손을 내밀며 한사코 거절했다. 할멈은 거절을 당하자, 자기도 매우 바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상한 듯이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하고 외치고 홱 돌아서더니 요란스럽게 도어를 닫고서 집을 나가 버렸다.
"저녁에 돌아오면 할멈은 내보내."
잠자 씨가 이렇게 말했으나, 아내나 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써서 간신히 얻은 마음의 안식이 할멈 때문에 다시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옆으로 가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잠자 씨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두 사람 쪽으로 돌리더니, 잠시 동안 조용히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자, 그만 이리 좀 와. 지난 일을 더 생각해서 뭘 해. 자아 이제는 나도 좀 생각해 달란 말이야!"
아내와 딸은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그를 위로한 다음, 빨리 결근계를 써 버렸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처럼 함께 집을 나섰다. 몇 달 동안이나 이런 일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전차에는 오붓하게 그들 가족뿐이었다. 따뜻한 햇빛이 차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장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앞날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 하면 이제까지 서로 물어 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막상 서로 이야기해 보니 세 사람의 직업은 모조리 퍽 훌륭한 것이며, 특히 앞으로는 더욱 유망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우선 당장에 집안 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이사를 가기만 하면 쉽사리 해결될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택한 현재의 주택에서 쭉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그들은 현재의 주택보다도 작고 집세가 싸지만 그래도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주택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잠자 부부는 점점 활기를 띠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고 거의 동시에 다음과 같은 현상을 눈치챘다. 즉, 그레테는 최근에 얼굴빛이 창백해지도록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벌써 토실토실 예쁘게 피어난 처녀의 자태로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잠자 부부는 점점 말을 잊고 심각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과 눈으로 마음을 통하면서, 이제는 슬슬 딸을 위해 훌륭한 신랑감을 얻어 주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닿았을 때, 딸은 제일 먼저 일어나 풍만한 젊은 육체를 쭉 폈다. 딸의 모습은 잠자 부부의 눈에는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다짐해 주는 것처럼 비쳤다.
요점 정리
작자 : 카프카(Franz kafka)
갈래 : 중편 소설, 실존주의 소설
경향 : 실존주의적
성격 : 객관적, 사실적, 실존적, 내적 독백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그러나 그레고르가 자신의 상황에 몰입해 버린 나머지 마치 1인칭 내부 시점과 같은 결과를 보인다. 그레고르의 의식의 내면이 독백의 형식으로 서술되며 어떤 화자도 끼어들지 않고 그레고르의 생각들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 이 작품은 인물 서술 시점에 의해 씌어진 소설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물 서술 시점이란 작품 속의 화자가 작중 인물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적게 말하는 시점으로서, 화자에 의한 객관적이고 해설적인 서술이 거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다시 말해, 서술자가 이야기 속에 참견하는 것을 절제하고 소설의 인물들 뒤로 물러남으로써 독자 자신이 사건의 무대 위에 올라가 있는 듯한 환상을 갖게 하거나, 독자가 한 작중 인물의 눈을 통하여 작품 속의 세계를 관찰하고 있는 듯한 환영을 갖게 하는 시점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화자의 해설보다는 작중 인물인 그레고르 잠자 자신의 독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레고르의 내면이 독자에게 훨씬 효과적으로 전달되고 있다. 물론 화자가 전혀 개입하지 않으므로 그레고르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판단은 독자 자신이 내려야 한다.
배경 : 시간(현대). 공간(독일 소시민 가정)
구성 : 왜 주인공이 벌레로 변신했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고 처음부터 이를 기정 사실로 다루고 있다. 놀라움이 없는 각성의 순간부터 이야기가 진행되며 그레고르가 죽고 가족이 평온을 되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귀결된다.
문체 : 보고(報告)조의 문체
제재 : 고독한 인간의 존재, 벌레로 변한 인간
주제 : 고독한 인간 존재의 허무, 소외된 인간의 고독, 인간 실존의 허무
줄거리 :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어떤 평화스러운 꿈에서 깨어났을 때 침대 위에서 자신이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신해 있음을 깨닫는다. 그레고르는 상과대학을 나와서 군대까지 마치고, 현재는 세일즈맨으로 살고 있다. 5년 전 아버지가 파산한 이후, 부모와 17살의 여동생 그레테를 부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급작스러운 불행으로 인해 그레고르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다. 출근 시간의 기차 소리는 들려오는데, 자신의 몸은 거대한 벌레가 되어 수많은 다리들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출근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가족들은 문을 두드리고 회사의 지배인은 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온다. 불쾌해진 그는 그레고르의 수상쩍은 행동을 회사문제와 연관시켜 의심하고는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레고르는 안으로 잠긴 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다. 얼마 후 힘들여 문을 열고 나간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기절할 듯 도망치고 부모는 충격을 받고 당황해 한다. 아버지는 위협적인 동작으로 벌레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때 그레고르는 큰 충격으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린다. 이 일이 생긴 후에 하녀는 휴가를 내고 나가버리고, 아버지와 여동생은 취직을 하게 되며, 어머니는 바느질 일감을 구해와 밤을 새며 일을 한다. 여동생은 더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밤에는 속기와 불어도 배우러 다닌다. 그레고르는 바이올린을 좋아하는 여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음악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이런 당황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주인공은 문틈으로 가족들을 관찰한다. 그의 모습에 질린 누이동생은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지만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주일 후 어머니가 그의 방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벌레의 형상에 놀라 실신하고 만다. 한번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가자 아버지는 분노한 나머지 벌레에게 사과를 던져 심한 상처를 입힌다. 게다가 살림에 보태기 위해 세 명의 하숙생을 한 방에 받게 되면서 그레고르의 방은 창고처럼 변해버린다. 어느 날 저녁 누이동생이 저녁식사 후에 하숙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주인공은 거실로 기어 들어간다. 하숙인들은 벌레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누이동생은 벌레를 더 이상 오빠로 간주할 수 없다며 벌레를 없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한다. 그레고르는 힘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시름거리다 결국 뻣뻣해진 모습으로 발견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 이로서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하녀는 벌레의 시체를 치우고, 한결 가벼워진 가족은 행복한 기분으로 전차를 타고 산책을 간다.
의의 : 현대 문명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의를 잃고 살아가는 소외된 인간 모습을 형상화한 표현주의적 소설이며, 실존의 문제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실존주의 소설로 간주되기도 한다.
특징 : 어느 날 아침 갑자기 거대한 갑충으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의 이야기를 통하여 돈 버는 기계가 아닌 새로운 '사적'(私的) 존재로서의 출발이 완전한 고립과 죽음으로 귀착됨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카프카는 일상에 당연한 것으로 침투해 있는 비합리성을 그 특유의 그로테스크하고 몽상적인 형상들과 간명한 언어로 폭로하고 있다
출전 : 변신(變身)
내용 연구
마치 은행의 사환들이 입고 있는 - 정복을 입고 있었다 : 그레고르가 벌레가 되어 집안의 수입이 없어지자, 아버지는 은행 수위로 취직을 했다. 아버지의 복장은 은행 수위가 입는 제복이다.
아버지가 한 발짝 옮겨 - 운동을 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레고르가 현재 변해 있는 벌레는 수많은 마디마다 다리가 달린, 곧 지네나 노래기와 같이 생긴 벌레였으므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여러 다리를 모두 움직여서 재빨리 피해야 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려야만 해요 : 20세기에 접어 들어 인간 사회는 공동 사회에서 이익 사회로 급격히 변화하게 된다. 돈이 현대 산업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고, 인간은 단지 자본 증식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또, 인간 상호간에 진실된 사랑의 관계가 사라진다.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벌레로 변하여 가족의 이익에 공헌하지 못하게 되자 가족들 사이에 주인공을 제거하자는 의견이 대두하게 된다.
오빠는 없을망정 - 할 거예요 : 아무리 가족간이라도 인간 관계에는 허위나 위선. 이기적인 판단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작자의 생각이 내재되어 있는 구절이다.
"어머니!……아버지!"
하고 누이동생은 이야기를 끄집어 내기 전에 손으로 탁자를 쳤다.
"이 이상 더 못견디겠어요.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직 사정을 모르시겠지만 저는 잘 알고 있어요. 저는 저런 괴물(벌레로 변한 그레고르를 의미함) 앞에서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것을 없애야 한단 말이에요(비정한 누이). 저것을 먹여 살리려고 참고 견디며, 우리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다해왔어요. 아무도 우리들을 나무랄 사람은 없어요." - 벌레로 변한 오빠를 없애자는 누이 동생의 주장
"그래 네 말이 옳다."
아버지는 혼자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독백하듯이). 아직도 완전히 숨을 돌리지 못하는 어머니는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과 같은 눈초리로, 손을 입에 대고 먹먹하게(소리가 귀에 잘 들리지 않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누이동생은 어머니 옆으로 달려가서 이마를 짚어 주었다. 아버지는 누이 동생의 말을 듣고서 무엇인지 마음 속에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보였다. 아버지는 의자 위에 똑바로 앉아서 하숙인들이 저녁 식사를 끝낸 다음에도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접시들 사이에서, 급사의 제모를 주물럭거리면서 가끔 가만히 누워 있는 그레고르 쪽을 쳐다보았다. - 누이 동생의 말에 동의하는 아버지와 충격을 받은 어머니
"우리는 저것을 없애 버려야만 해요."
하고, 그저 아버지만 쳐다보며 누이동생은 다짐하듯이 말했다. 왜냐 하면, 어머니는 기침하느라고 아무 말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숨을 빼앗을 거예요. 어쩐지 저는 그렇게만 생각되요. 우리들은 모두 갖은 고생을 다하면서 일해야 되는데, 이처럼 끝없는 두통거리(그레고르)를 집안에 두고 어떻게 참을 수가 있겠어요? 저는 이 이상 더 참을 수가 없어요."
이렇게 말하고 누이동생은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눈물이 어머니의 얼굴에 흘러내렸으며 누이동생은 기계적으로 손을 움직이더니 어머니의 얼굴에서 눈물을 씻었다. - 벌레로 변한 오빠를 없애자고 다시 한번 누이 동생이 주장
<이 부분은 작품의 구성상 갈등이 심화되는 '위기'의 단계에 해당하며, 이제까지 동정적이던 가족들의 인내심이 드디어 종말을 고하는 대목이다. 특히 주인공이 평소에 가장 아끼던 누이동생이 벌레로 변한 주인공을 없애 버리자고 말하는 장면은 현대 사회의 가족 관계가 더 이상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여실하게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가족들은 주인공이 벌레가 됨으로써 경제적인 능력을 상실하고 가족의 이익에 공헌하지 못하게 되자, 이제 다른 가족을 위하여 없애 버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부분에서는 현대 사회야말로 금전과 이익이 가족 관계보다도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파편화된 사회라는 점이 뚜렷이 밝혀진다.>
"얘야."
하고 아버지는 매우 너그럽게, 동감하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쩌면 좋단 말이냐?"
누이동생은 아버지에게 아무 구체적인 방안도 없다고 어깨를 움츠렸을 뿐이다. 그녀는 울고 있는 동안에 앞서 그처럼 단호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정말 어쩌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놈이 우리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주었으면……"
하고 아버지는 반쯤 물어 보는 것처럼 말했다. 누이동생은 울면서, 그런 일은 전해 생각해 볼 여지조차 없다는 듯이 한쪽 손을 성급히 내저었다.
"저놈이 우리 마음을 조금이라도 알아 주었으면……"
하고 아버지는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누이동생의 확신을 자기도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듯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렇다면 저놈하고 타협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저 모양 저 꼴이니……"
"내쫓아야 해요!"
하고 누이동생이 외쳤다.
"그렇게 하는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그레고르 오빠라는 생각을 버리셔야만 돼요. 우리들이 이제껏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믿어 왔던 것이 우리들 자신의 불행이었어요. 어째서 저것이 오빠란 말이예요? 만일 정말 오빠라면, 사람이 저런 동물과 함께 살 수 없다는 것쯤은 벌써 알아차리고 스스로 나가 버렸을 거예요. 그러면 오빠는 없을망정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 갈 수 있고, 언제까지나 오빠를 소중하게 회상할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저것은 우리들을 못살게 굴고 하숙인들을 쫓아낼 뿐더러, 나중에는 아마 이 집 전체를 차지하고 우리들까지 길가에서 잠을 자게 할 거예요―저것 좀 보세요, 아버지."
하고 누이동생이 갑자기 외쳤다.
"또 장난을 시작했어요!"
그레고르에게도 이해가 가지 않는 이상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 누이동생은 어머니 곁을 떠나, 마치 그녀가 우두커니 그레고르 옆에 있느니보다는 오히려 어머니를 희생시키는 편이 낫다는 듯이, 어머니의 의자를 박차고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그녀는 아버지의 뒤로 달려갔다. 아버지도 누이동생의 동작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자리에서 똑같이 일어나 누이동생을 보호하려는 듯이 두 팔을 앞으로 쳐들었다.
그러나 그레고르는 누이동생은 물론이고, 아무에게도 공포심을 일으키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는 단지 자기 방으로 돌아가려고 몸을 돌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의 비참한 상태로는 조금만 몸을 돌리려고 해도 힘이 들었기 때문에 머리의 반동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래서 몇 번이고 머리를 쳐들었다가는 마룻바닥 위에 내리쳤다. 따라서, 이 같은 괴상한 동작은 말할 나위도 없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는 동작을 멈추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레고르의 악의 없는 의도만은 그래도 알아 주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저 순간적으로 놀랐을 따름이다. 이제 가족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아서 두 다리를 모아 쭉 뻗치고 있었다. 극도로 피로했기 때문에 눈꺼풀이 거의 덮일 것만 같았다. 아버지와 누이동생은 나란히 앉아 있었다. 누이동생은 한쪽 손으로 아버지의 목을 감고 있었다.
'자, 이제는 방향을 돌려도 상관 없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돌기 시작했다. 그는 그 일에 지쳐서 숨이 가쁘고 호흡이 거칠어졌기 때문에 숨을 돌리려고 이따금 쉬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그를 쫓는 사람은 없었다. 무엇이든,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는 방향을 돌리고 나서 자기 방으로 곧장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 방까지의 거리가 그다지도 먼 데 대해서 크게 놀랐다. 그래서 조금 전에 쇠약한 몸을 이끌고 어떻게 이처럼 먼 거리를 멀다고 느끼지도 않고 기어왔는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저 빨리 기어가려고만 생각했기 때문에 가족들이 말을 걸거나 소리를 쳐서 자기를 방해하는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거의 눈치채지도 못했다. 겨우 도어 앞까지 갔을 때 비로소 한 번 고개를 돌려 보려고 했으나 제대로 잘 돌지 않았다. 굳어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후 자기 뒤에서는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다만 누이동생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을 뿐이다. 그의 마지막 시선이 어머니를 힐끗 스쳤는데, 어머니는 그 때 깜빡 잠이 들어있었다. - 그레고르에 대한 문제로 가족들끼리 의 비정한 논의
그가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어느 새 성급히 도어가 닫히더니 고리가 잠기고 그대로 방 안에 갇히고 말았다. 별안간 뒤에서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기 때문에 그레고르는 너무나 놀라 다리가 휘청 굽혀져서 부러질 지경이었다. 급히 달려온 사람은 누이동생이었다. 누이동생은 미리 서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레고르가 방에 들어가자마자 번개같이 달려왔던 것이었다. 그레고르는 다가오는 누이동생의 발자국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었다. 그녀는 열쇠를 자물쇠 구멍에 넣어서 돌리며,
"됐어요!"
하고 양친을 향해서 외쳤다. - 그레고르를 방 안에 가두고 문을 잠그는 누이동생
"자, 이제부터 어쩔 셈이지?"
그레고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 보며 어둠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현대인의 소외와 고독)
그는 곧 자기가 그 이상 더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이 가느다란 다리로 여기까지 기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생각될 정도였다. 그 밖에는 어느 정도 쾌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사실 그는 온 몸이 아팠지만 점점 아픈 것이 가시고 결국 머지 않아서 완전히 가라앉을 것 같았다. 등에 박힌 썩은 사과도, 부드러운 먼지에 싸인 그 주위의 염증도, 벌써 거의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감동과 애정을 가지고,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그것보다 아마도 훨씬 더 절실했을 것이다(주인공의 심리는 포기 상태). 교회에서 탑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창 밖이 훤하게 밝아 오기 시작한 것을 그는 짐작할 수가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밑으로 푹 수그러졌다. 그리고 그의 콧구멍으로부터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죽었다.). - 방 안에 갇힌 채 최후 통첩을 맞는 그레고르
아침 일찍이 할멈이 왔을 때―그런 짓만은 제발 말라고 지금까지도 몇번이나 타일렀지만, 성급히 힘껏 도어란 도어를 모조리 닫기 때문에 이 할멈이 오면 온 집안 사람들은 편히 잠도 잘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할멈은 보통 때처럼 슬쩍 그레고르의 방을 들여다보았으나 처음에는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했다. 할멈은 그가 감정이 상해서 일부러 꼼짝도 않고 누워 능글능글 불쾌스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할멈은 그가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할멈은 때마침 손에 기다란 비를 들고 있었기 때문에 도어 밖에서 비를 내밀어 그레고르를 간지르려고 하였다. 그래도 아무 효과가 없자 할멈은 바짝 화가 나서, 그레고르의 몸을 약간 쑤셔 보았다. 그레고르가 아무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밀려갔을 때 비로소 할멈은 이상하다는 듯이 주의 깊게 살펴 보았다. 곧 그 진상을 알게 되자, 할멈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자기도 모르게 휘파람을 휙 하고 불었다. 그리고 그 이상 그 자리에서 우물쭈물하지 않고 갑자기 잠자 부부의 침실 도어를 열어 젖히고 어둠 속을 향해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좀 가봐요, 저것이 뻗었어요. 저기 자빠져서 그만 뻗어 버리고 말았어요('죽었어요'의 속어- 인간 경시 풍조)!" - 그레고르의 죽음을 확인하는 할멈
<구성 단계상 절정에 해당하는 이 부분에서는 주인공과 누이동생과 할멈의 행동이 집중적으로 형상화되는데, 먼저 벌레로 변한 주인공을 없애 버리려는 누이동생의 비정함이 묘사된다. 다음으로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채 어둠 속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그레고르의 고독과 허무가 그려지고, 마지막으로 그레고르의 죽음을 확인한 할멈이 기쁜 나머지 휘파람을 부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처럼 세 사람의 행동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고 있는 이 부분에서는 무엇보다도 겉으로 보기에 각기 독립적으로 그려진 세 사람의 행동이 본질적으로는 이 작품의 주제인 '현실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인간 존재의 허무와 비극'의 구현을 위해 하나로 응집되어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잠자 부부는 후딱 더블 베드에서 일어나서 할멈의 보고 내용을 알아보기도 전에, 우선 할멈 앞에서 그들의 당황한 꼬락서니를 감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잠자 부부는 기겁을 하며 침대 좌우로 내려와 잠자 씨는 어깨에 담요를 걸치고, 부인은 잠옷을 입은 채 침실에서 나와 그레고르의 방으로 들러갔다. 그러는 동안에 거실의 도어도 열렸다. 하숙을 친 다음부터 그레테가 거실에서 자고 있었다. 그레테는 한잠도 자지 못한 것처럼 제대로 단정하게 옷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창백한 얼굴빛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죽었다니?"
잠자 부인은 이렇게 말하면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할멈을 쳐다보았다. 물론 자기가 알아보아도 알 수 있었고,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죽은 것 같아요."
할멈은 이렇게 말하고 증거라도 보이려는 듯이 비로 그레고르의 시체를 옆으로 멀리 쭉 떠밀어 보였다. 잠자 부인은 그 비를 가로막으려는 태도를 보였으나 사실 막지는 않았다.
"자아, 아제 우리는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거야."
잠자 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가슴에 십자가를 그었다. 어머니와 딸도 그가 하는 대로 따라서 똑같은 동작을 했다. 그 때까지 시체에서 한눈도 팔지 않고 있었던 그레테가 입을 열었다.
"좀 보세요, 오빠는 어쩌면 저렇게 말랐을까요. 벌써 오래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를 않았어요. 음식을 갖다 주어도 그냥 그대로 내보냈지 뭐예요."
사실 그레고르의 몸은 너무 말라서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미 다리들이 몸뚱이를 위로 떠받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밖의 아무것도 사람들의 주의를 딴 데로 돌리게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린 지금에 와서 비로소 사람들은 그 사실을 똑똑하게 알게 되었다.
"그레테야, 이리 좀 온."
하고 잠자 부인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레테는 시체를 돌아다보며, 부모의 뒤를 따라 침실로 들어갔다. 할멈은 도어를 닫고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아직 이른 아침이지만, 신선한 공기 속에는 어딘지 훈훈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어느덧 벌써 3월 말이었다.
세 하숙인들은 방에서 나와 아침 식사를 찾았으나, 모두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하숙인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아침 식사는 어디 있어요?"
하고 그들 가운데 두목격인 남자가 투덜거리며 할멈에게 물었다. 그러나 할멈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성급히 서두르며 그레고르의 방에 가보라고 눈짓을 했다. 그들은 그레고르의 방으로 가서 약간 낡은 웃옷 주머니에 두 손을 집어넣고 그레고르의 시체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방안은 이미 환하게 밝아졌다.
그 때 침실의 도어가 열렸다. 잠자 씨는 급사의 제복을 입고, 한 쪽 팔은 아내에게, 또 다른 쪽 팔은 딸에게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세 사람은 모두들 약간 운 듯 눈이 부어 있었다. 그레테는 때때로 아버지의 팔에 얼굴을 파묻었다.
"당장 우리 집에서 나가 주시오!"
잠자 씨는 이렇게 말하고, 아내와 딸을 자기 몸에서 떼지도 않은 채 현관문 쪽을 가리켰다.
"무슨 말씀인지요?"
그 두목격인 남자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싱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뒷짐을 진 채로 끊임없이 손을 비비고 있었다. 마치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벌어지게 될 언쟁을 마음 속으로 은근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지금 내가 말한 바로 그대로라니까요."
잠자 씨는 이렇게 대답하고, 아내와 딸을 옆에 거느린 채 그대로 나란히 서서 하숙인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처음에는 두목격인 남자는 꼼짝도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마치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일을 정리하려는 듯이 잠시 마루 위를 내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나가지요."
하고 그는 말하고 잠자 씨를 쳐다보았다. 그 남자는 갑자기 자기를 엄습해 온 겸손한 기분 속에서 이와 같이 새삼 결심한 데 대해서까지도 주인에게 새로운 승인이라도 얻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잠자 씨는 눈을 부릅뜨고, 그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 남자는 곧 현관방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두 친구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잠시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나, 곧 그 두목의 뒤를 쫓아갔다. 마치 잠자 씨가 자기들보다 먼저 앞질러서 현관방에 들어가 자기들과 두목 사이를 끊어 놓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현관방에서 그 세 사람은 옷걸이에서 모자를 손에 집어 들고, 지팡이를 세웠던 곳에서 꺼내 들은 다음, 무뚝뚝하게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전혀 아무 근거도 없는 의심을 품고서―그의 의혹이 단순한 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바로 밝혀졌지만―잠자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계단 앞으로 나가서 난간에 기대어 떠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세 사람은 천천히 그리고 고르게 발을 옮겨서 긴 계단을 내려갔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데 따라서 층계마다 중간의 커브 도는 곳에서 언뜻 자취를 감추었다가, 2, 3초 후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그들이 더욱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들에 대한 잠자 가족의 관심도 점점 사라져 갔다. 처음에는 저 밑에서 세 사람을 향해서 올라오던 푸줏간 급사가 마침내 그들을 지나쳐서 머리에 짐을 이고 뽐내듯이 퉁퉁거리며 계단을 올라왔다. 그 때야 비로소 잠자 씨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난간을 떠나 가벼운 기분으로 집안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은 오늘 하루를 쉬면서 산보나 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일을 쉴만한 이유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쉴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책상 옆에 앉아서 잠자 씨는 자기 지배인에게, 잠자 부인은 내재봉 주문자에게, 그리고 그레테는 상점 주인에게 각각 결근계를 썼다. 결근계를 쓰고 있을 때, 할멈이 아침 일이 다 끝났으니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글을 쓰고 있던 그들은 얼굴도 들지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러나 할멈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내며 얼굴을 들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하고 잠자 씨가 물었다. 할멈은 도어 옆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할멈은 가족들에게 매우 반가운 소식을 전해 주려고 왔지만 상대방이 캐묻지 않으면 선뜻 알려 주지 않겠다는 그런 태도였다. 할멈의 모자 위에 타조의 작은 깃이 하나 꼿꼿이 꽂혀 있었는데 가볍게 이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할멈이 자기 집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잠자 씨는 그 깃이 몹시 비위에 거슬렸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요?"
하고 잠자 부인이 물었다. 할멈은 이 집에서 부인을 가장 존경하고 있었다.
"네……"
할멈은 이렇게 대답을 하고 정답게 웃느라고 바로 말을 계속하지 못했다.
"저어 옆방에 있는 그것을 치울 걱정은 조금도 마세요. 벌써 제가 다 치워버렸으니까요."
잠자 부인과 그레테는 결근계를 계속해서 쓰려는 듯이 고개를 수그리고 있었다. 잠자 씨는 할멈이 모든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려고 하는 눈치를 했을 때, 손을 내밀며 한사코 거절했다. 할멈은 거절을 당하자, 자기도 매우 바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상한 듯이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하고 외치고 홱 돌아서더니 요란스럽게 도어를 닫고서 집을 나가 버렸다. - 시체를 치우고 와서 의기양양해 하는 할멈과 애써 태연하려는 가족들
"저녁에 돌아오면 할멈은 내보내."
잠자 씨가 이렇게 말했으나, 아내나 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애써서 간신히 얻은 마음의 안식이 할멈 때문에 다시 수포로 돌아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내와 딸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옆으로 가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있었다. 잠자 씨는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두 사람 쪽으로 돌리더니, 잠시 동안 조용히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자, 그만 이리 좀 와. 지난 일을 더 생각해서 뭘 해. 자아 이제는 나도 좀 생각해 달란 말이야!"
아내와 딸은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그를 위로한 다음, 빨리 결근계를 써 버렸다. - 죽은 그레고르 때문에 다시 괴로워하는 모녀(母女)와 위로하는 아버지
그러고 나서 그들은 모처럼 함께 집을 나섰다. 몇 달 동안이나 이런 일은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차를 타고 교외로 나갔다. 전차에는 오붓하게 그들 가족뿐이었다. 따뜻한 햇빛이 차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그들은 좌석에 편안하게 몸을 기대고, 장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세히 생각해 보면, 그들의 앞날은 전혀 희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 하면 이제까지 서로 물어 볼 기회조차 없었지만, 막상 서로 이야기해 보니 세 사람의 직업은 모조리 퍽 훌륭한 것이며, 특히 앞으로는 더욱 유망할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교외로 나와 장래의 일을 의논하면서 모처럼 오붓함을 느끼는 가족들
우선 당장에 집안 환경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이사를 가기만 하면 쉽사리 해결될 것 같았다. 그들은 그레고르가 택한 현재의 주택에서 쭉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앞으로 그들은 현재의 주택보다도 작고 집세가 싸지만 그래도 위치가 좋고, 무엇보다도 실용적인 주택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들이 이와 같이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잠자 부부는 점점 활기를 띠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고 거의 동시에 다음과 같은 현상을 눈치챘다. 즉, 그레테는 최근에 얼굴빛이 창백해지도록 갖은 고생을 다했지만, 벌써 토실토실 예쁘게 피어난 처녀의 자태로 자라났다는 사실이다. 잠자 부부는 점점 말을 잊고 심각해지며, 또 거의 무의식적으로 눈과 눈으로 마음을 통하면서, 이제는 슬슬 딸을 위해 훌륭한 신랑감을 얻어 주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드디어 전차가 목적지에 닿았을 때, 딸은 제일 먼저 일어나 풍만한 젊은 육체를 쭉 폈다. 딸의 모습은 잠자 부부의 눈에는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을 다짐해 주는 것처럼 비쳤다. - 처녀가 다 된 딸의 모습을 보며 새로운 꿈에 젖는 잠자 부부
< 이 부분은 작품 전체의 결말에 해당되며, 여기에는 그레고르가 죽고 난 이후에 그의 시체를 치우고서 의기 양양해 하는 할멈과 다시 잠깐 동안의 슬픔에 잠겼다가 활기를 되찾는 가족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가족들은 모처럼 교외로 나가게 되는데, 모두들 장래의 일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오랜만에 오붓함을 느끼고 희망에 들뜨게 된다. 그들이 그레고르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꿈에 젖어드는 이유는 그레고르야말로 이제까지 자신들에게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주지 못하던 애물 단지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번 현대 사회의 가족 윤리가 얼마나 이해타산(利害打算)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가를 확인하게 된다.>
이해와 감상
카프카는 이 작품에서 돌연한 사태를 제시하여 인간 조건을 돌아보게 한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은 작가의 자의적 설정이지만 그 사태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는 눈여겨보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를 독자는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동물을 소재로 취하고 있지만,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 사회를 풍자하는 전통적인 우화(寓話)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벌레라는 실체를 통하여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그레고르가 생활비를 버는 동안 가족들은 그에게 감사한다. 하지만 그것이 습관이 되고 타성이 되면서 감사의 마음은 없다. 그러나 그가 벌레가 되어 버리자 존재가 문제시되고 그의 사회적 가정적 역할이 무엇이었는가가 재인식된다. 그러나 그의 빈자리는 곧 채워지고 만다. 아버지가 돈을 벌고 누이동생은 하숙생들과 음악을 연주하며 즐거운 생활을 보낸다. 이것은 그레고르가 죽었을 때 가족들이 교외로 놀러 가는 데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즉 그레고르의 실존의 자리는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감상2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해 오던 선량한 세일즈맨 그레고르는 잠자는 어느 날 갑자기 한 마리의 거대한 벌레로 변신하게 된다. 벌레가 된 그는 모든 인간적 생활 관습으로부터 철저히 차단되고 소외된 상태에서 몇 달 동안 고생을 거듭하다가 스스로 비참한 죽음에 이른다. 이 작품은 동물을 소재로 취하고 있지만, 의인화된 동물을 등장시켜 사회를 풍자하는 전통적인 우화(寓話)와는 성격을 달리한다. 벌레라는 실체를 통하여 인간 상호간의 소통과 이해가 단절된 소외 상황을 암시한다.
가족들은 그레고르가 모든 힘을 다해 돈을 벌어 올 때는 감사하게 대한다. 그러나 그것도 습관화되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 고마운 마음은 줄어들고, 마침내 일상적인 것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벌레가 되어 쓸모 없는 존재가 되자 냉대하고 없어지기를 바란다. 이는 사회나 가정에서의 모든 인간 관계가 허위와 위선을 바탕을 두고 있음을 말한다. 인간의 순수한 본성이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단절된 사회 속에서 개인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감상3
카프카가 지은 중편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하나의 상상적인 현실 속에서의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세일즈맨인 청년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한 마리의 커다란 독충의 모습으로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동정적이던 가족들도 점차로 그를 혐오하게 되고, 결국 그레고르는 죽음에 이르게 된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의 실존적 상황은 우리가 직면할 수 있는 현실적 상황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인간의 가상적인 현실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고립되고 소외당한 현대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가족과 사회에서 소외당한 채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되는 그레고르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카프카는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의 중산층의 몰락과 대중 사회의 비인간화를 배경으로 하여 고독한 인간의 존재의 허무를 이 소설에서 보여 주고 있다. (출처 : 김태준 외 3인저 민문고 문학교과서)
감상4
이 작품은 카프카 생전에 간행된 소수의 작품 중의 하나이며, 변형 기담에 특유한 유머와 이상한 사건을 예사로운 일처럼 묘사하는 작자의 냉정하고 사실적인 문체는 독자로 하여금 실존(實存)의 차원과 부조리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박력을 지니고 있다. 언제 어느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르는 절망적인 세계 속에 유폐된 현대인의 소시민적 생활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카프카 문학 중에서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심화 자료
실존주의 문학(實存主義文學)
1940∼50년대 프랑스에서 전개된 문학 경향의 하나. 존재의 부조리성에 대한 의식(존재에 대한 불안)에서 출발하여 자기의 본질을 완성시키기 위해 인생을 선택하고 책임있는 행동을 하며, <상황(situation)> 속에서 역사나 사회에 <참가(engagement)>하면서 그 상황을 인식, 극복하여 진정한 자유를 획득하려는 인간을 묘사하려고 하는 문학이다. 실존의식을 바탕으로하는 문학은 이전부터 있었으나(C.P.보들레르·G.모파상·F.M.도스토예프스키·F.카프카 등의 작품), 인간의 한 새로운 생활방식으로서 실존의 문제를 제기한 것은 제2차세계대전 뒤의 J.P.사르트르·A.카뮈·S.보부아르 등의 문학이었다.
이와 같은 문학의 발생 계기가 된 것은 20세기 전반에 거듭되었던 전쟁과 동란이었다. 특히 제2차세계대전에 의해 인간은 자기의 개성과 본질 및 그것들이 형성하는 자유가 역사·사회 및 현실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깨달았다. 그래서 신이 본질을 만든다고 하는 종래의 사고방식을 거부하고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存在)>, 즉 <즉자(卽自, ensoi;단순히 존재함)>에서 <대자(對自, poursoi;존재함에 대한 의식)>로 이행하는 <존재>를 중심명제로 한 무신론적 실존주의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
카프카의 실존주의 문학
카프카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현대인을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의해 일체의 관계를 박탈당한 채 고독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기계 문명에 의한 인간의 자기 소외와 공동 사회에 대한 개인의 대립 속에서 인간 실존의 자각을 모색하였다. 즉, 그의 문학은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카프카의 문학 세계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부조리로 규정하면서 그 부조리로부터 벗어나 인간의 참된 존재인 실존을 회복하려 했던 실존주의와 거의 일치하고 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문학
사르트르는 처음에 예술로 존재를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했으나, 전쟁체험을 통하여 진정한 자유의 획득과 함께 진정한 존재의 완성은 역사·사회 및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획득하여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장편소설 《구토(1938)》에는 실존의식을 자각한 인간이 소설을 쓰는 일(예술)로 생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단편소설 《벽(1937)》에서는 인생을 선택할 수 없고 단지 존재하는 것만으로서의 존재하는 인간을 그렸다. 희곡 《파리떼(1943)》에서는 자기의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행동에 의해 자기를 판정하는 인간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실존주의문학이 사회참여의 문학인 이상, 작가는 서재에서의 고독한 창작활동에만 머무르는 일을 중지하고 적극적으로 사회와 정치문제에 대해 발언하고 활동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르트르는 사회·정치·시사 문제(헝가리사건·알제리문제 등)에 정면으로 부닥쳤다. 그러한 참여를 통하여 정치에서의 목적과 수단을 묘사한 희곡 《악마와 신(1951)》 등의 작품을 썼다. 이런 이유로 사르트르의 문학 및 실존주의문학은 새로운 의미에서의 휴머니즘문학이라 일컬어진다.
카뮈의 실존주의 문학
카뮈의 경우 사르트르의 《구토》와 같은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 《이방인(1942)》이다. 주인공은 <부조리> 의식을 가진 까닭에 일상성과 양식을 대표하는 사회에 의해 살인죄로 재판받지만, 사실은 재판하는 측도 자기기만죄로 고발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카뮈는 인간에게 허위와 기만을 강요하며 인간의 진정한 존재를 부정하는 부조리와의 싸움이야말로 인간의 의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의무는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항의·반항의 형태를 취하여 에세이 《시시포스의 신화(1942)》에서는 계속해서 벼랑 위로 바위를 밀어 올려야만 하는 절망적인 인간의 반항행위 속에서 존재해야 할 인간의 모습을 보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카뮈에게서는 반항이 부조리의식을 가지는 인간의 참여행위가 된다. 이것을 구현한 것이 장편소설 《페스트(1947)》의 주인공으로서, 그는 페스트 때문에 공황이 일어난 도시에서 신이나 악마의 무력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고독이라는 지옥에 빠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인습이나 안이한 타협에 만족하지 않고 인간의 연대에 의지하여 자기의 직무를 수행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조리에 반항하여 계속 인간성을 추구하는 길은 역시 휴머니즘과 통한다. 그리고 부조리적 인간의 성실한 인간성 탐구의 길이 이와 같은 반항과 행동을 취하는 까닭에 카뮈의 부조리문학도 필연적으로 사회 참여가 된다.
보부아르의 실존주의 문학
보부아르는 학생시절에 사르트르를 만났는데 두 사람의 결합은 격렬한 반순응주의와 출생환경(부르주아지)에 대한 반항에 의해 확고해졌으며, 이 2가지 명제가 그녀의 문학적 출발점이 되었다. 보부아르의 문학활동은 여성의 <본질>과 여성이 되는 <실존> 사이의 모순상극의 고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장편소설 《초대받은 여자(1943)》는 질투라는 영원한 테마를 새롭게 다룬 것인데, 주인공 프랑수아즈는 자기와 남편 사이에 개입된 <타인>이란 존재, 즉 초대받은 여자 구사비에르를 살해한다. 타인의 행복에 대한 지향과 타인의 존재는 항상 자아의 파괴라는 인식이 묘사되어 있다. 장편소설 《타인의 피(1944)》에서는 레지스탕스의 연대와 책임문제를 다루었고, 방대한 사회학적·심리학적·문학적 여성론인 《제2의 성(性) 1949》은 <여성은 암컷과 거세자의 중간적 존재로서 사회적·심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며 여성이 타인에 의해 자기를 규정시키는 것은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관점에서 여성의 복권을 추구하였다.
그 밖의 작가들과 영향
J.주네는 사르트르로부터 <성(聖) 주네>라고 불린 <참여문학자>로서 알려졌다. 《도둑일기(1949)》 《꽃의 노트르담(1944)》 등은 초현실주의 형식의 수법으로 쓴 장편소설인데, 동성연애자, 직업적 범죄자로서의 자기의 굴욕과 반항의 반생을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고 묘사하였다. 사르트르의 친구로 제2차세계대전중 전사한 P.니장은 자기계급에 대한 반항, 사회의 위선을 문학 형태로 고발하였다. 보부아르에게 인정받았던 여류작가 V.르듹의 자전적 소설 《사생아(1964)》는 동성연애자인 자기를 모든 관점에서 더럽고 추한 존재로 규정하며 그 속박으로부터 달아나지 않고 고독의 고리를 스스로 깨려고 하는 이야기이다.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문학은 문학적 의식, 문학의 방법, 작가 및 문학작품의 사회참여 등의 측면에서 이후의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의식을 <사물> 쪽으로 소외시키면서 인간의 조건과 형성을 생각한다는 점에서 누보로망 문학에 근본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실존주의문학
언제 들어왔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제2차세계대전 뒤 특히 1950년을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1940년대에는 사르트르의 《프랑스인이 본 미국 작가(1946)》, 전창식(田昌植) 번역의 《벽(1948)》, 양주동(梁柱東)의 평론 《사르트르의 실존주의(1949)》, 김명원(金明遠) 번역의 《흑사병(1950)》 등이 발표되었다. 50년대에는 정명환(鄭明煥) 번역의 《자유의 길(1958)》 《벽(1958)》, 방곤(方坤) 번역의 《구토(1959)》 등의 사르트르의 작품과 김붕구(金鵬九) 번역의《카뮈의 문학과 사상(1958)》, 정명환 번역의 《현대의 증인》 등의 카뮈의 해설 및 작품번역이 나와 실존주의가 한국의 문단을 주도하는 인상을 주었다. 이와 같은 분위기는 손창섭(孫昌涉)·오상원(吳尙源) 등 한국작가들에게도 인간조건의 추구라는 점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사르트르의 앙가주망이론은 50년대 말 이후 참여문학의 이론적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내적 독백(內的獨白/interior monologue)
극적이거나 비극적(非劇的)인 허구 속에서 주인공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드러내기 위해 쓰는 서술적 기법으로 이렇게 표현되는 생각들은 자유로운 연상처럼 느슨히 이어지는 인상일 수도 있고 보다 합리적으로 짜여진 사고와 감정의 연속일 수도 있다. 내적 독백은 극화된 내적 갈등, 자기 분석, 상상적 대화(T.S. 엘리엇의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에서처럼), 추리 등 몇 가지 형식을 포함한다. 또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 (1922)의 결말에 나오는 몰리 블룸의 독백처럼 명백하게 작가의 선택이나 통제가 들어 있지 않은 1인칭적 표현일 수도 있으며, "그가 생각하기를" 또는 "그의 생각이 바뀌어"와 같은 말로 시작되는 3인칭적 방법일 수도 있다.
내적 독백이라는 용어는 종종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과 바뀌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적 독백은 인물의 의식에 떠오르는 아직 정리되어 있지 않은 모든 사고·인상·연상들을 반영할 수도 있지만, 그 인물의 이성적인 생각들을 조리있게 엮어내는 것에 그칠 수도 있다. 내적 독백은 독백이나 극적인 독백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에두아르 뒤자르댕의 〈월계수들은 베어졌다 Les Lauriers sont coupes〉(1887)에서 처음으로 폭넓게 쓰였고, 그뒤 20세기 심리소설에서 특히 많이 쓰였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숄즈와 켈로그는 내적 독백을 작중 인물의 자기 언급이 있다면 1인칭이고, 언어, 즉 사투리, 말투, 단어, 문장의 선택은 화자가 어디서 끼어들든지, 인물의 성격을 증명할 수 있다는 등의 특징을 내놓으며, '내적 독백'을 어떤 화자도 끼어들지 않고, 한 인물의 무언의 사고들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意識 ──/stream of consciousness)
소설에서 사용되는 서술기법의 하나로 개인의 의식에 떠올라 그의 이성적 사고의 흐름에 병행하여 의식의 일부를 이루는 시각적·청각적·물리적·연상적·잠재의식적인 수많은 인상의 흐름을 표현하기 위한 기법이다. 의식의 흐름이라는 말은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심리학의 원리 The Principles of Psychology〉(1890)에서 처음 썼다. 20세기에 심리소설이 발전하면서 일부 소설가들은 이성적인 사고에만 국한하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 전체를 포착하고자 했다. 풍부하고 빠르며 미묘한 사고의 활동을 충분히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단속적이고 일관성없는 생각들과 비문법적인 구문, 언표(言表) 이전 단계에 속하는 사고, 심상, 언어의 자유연상 등을 도입했다.
의식의 흐름 소설은 일반적으로 내적 독백의 서술적 기법을 사용한다. 대표적 예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Ulysses〉(1922)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등장인물인 레오폴드 블룸, 몰리 블룸, 스티븐 데들러스의 내적 상태를 복잡하게 표현한 소설이다. 그밖에 유명한 작품으로는 일찍이 의식의 흐름을 사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 전의 빈의 분위기를 재현한 작품인 아르투어 슈니츨러의 〈구스틀 대위 Leutnant Gustl〉(1901)와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1929)가 있다. 〈음향과 분노〉는 콤슨가(家)의 세 사람의 의식 속에서 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여러 사건에 대해 일어나는 단편적이고 인상적인 반응들을 기록하고 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나에게 책의 고유명사는 카프카였다 -카프카의 『변신』 - 전 경 린
신의 죽음과 동시에 우리는 실존의 고뇌에 휩싸였다. 실존이란 곧 세계 내에서의 고아적인 삶을 예정하며, 고독과 분열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운명은 거론하기조차 남루할 정도로 이미 명백한 것이다. 우리는 절대와 신들을 넘어선 탐미적인 황무지, 불쾌한 고독 혹은 존재의 영지점에서 살고 있다. 인간은 철저히 세계내적 존재가 되었고, 현실과 비현실을 나누어줄 어떤 안전한 근거도 없으며 세상은 허깨비로 가득 찬 거울의 방처럼 실체를 상실한 채 파편적인 피사체로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누구도 죽지 않는다. 다만 심연 속으로 사라질 뿐. 카프카의 작품들은 언제나 이 황폐한 운명 위에서 현기증이 나도록 갑작스럽게 시작한다.
어느 날 아침, 잠자던 그레고르 잠자는 뒤숭숭한 꿈자리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로 시작되는 이 작품을 처음 맞닥뜨린 것은, 내 나이 열세 살의 봄이었다. 나는 그때 머리를 자로 댄 듯 자르고 여중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폐결핵을 앓고 있었다. 벽장 속에는 분홍색 알약과 흰색 알약이 가득 들어 있었고, 나는 한꺼번에 그 알약들을 스무 알씩을 삼켜야 했다. 매일 오후에는 보건소에서 두 대의 주사를 맞고, 한 달에 한 번쯤은 이제 막 몽우리가 서기 시작한 가슴을 차갑고 딱딱한 이물질에 대고 흉부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으며, 알 수 없는 이유로 검은 비닐 시트가 씌워진 철제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있어야 했다. 학교에서는 오후 수업을 받지 않는 특혜 학생이었다. 아이들이 성냥갑 속의 성냥처럼 빼곡히 들어찬 교사들을 뒤로 하고 비현실적으로 환한 햇빛을 받으며 학교 뒷문을 빠져나올 때마다, 가파르게 흐르는 강물 위에서 배를 바꾸어 타듯 머릿속이 적막하고 어지러웠다.
나는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와 세 명의 동생들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는데, 할머니는 지독한 골초셨다. 우리는 모두 무지 속에 있었다. 사철 내내 무릎이 시린 할머니는 방문을 닫은 채, 쉼없이 담배를 피웠고 한밤중이면, 몸속에서 지진이 일어나듯 기침이 솟구쳐 나는 컹컹거리며 방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잠든 가족들이 깰까봐 고양이들이 나다니는 검은 담장 밑에 쪼그리고 앉아 숨을 죽여가며 멈추지 않을 것 같은 기침을 했다. 기침은 밤외출을 나갔던 고양이가 이슬을 맞고 돌아오는 새벽까지 계속되어, 나중엔 누가 삽으로 가슴 살을 다 파내어 가버린 듯 생살이 아팠다. 두 손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며 기침을 하고 있을 때면, 가끔 엄마와 아버지가 주무시는 방에 불이 켜졌다가 잠시 후 꺼졌다. 어느 때는 불이 켜지면 나 때문에 마음 쓸까봐 숨을 멎어버리기도 했지만, 어느 때는 불 켜지지 않는 그 방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엄마를 부르며 엎어져 울고 싶기도 했다. 그런 때였다. 그때 카프카의 『변신』이 우연히도 나의 수중에 들어왔다.
작고 너덜거리는 문고판이었다. 그것이 어디서, 누구에 의해 묻어 우리집에 이르렀을까? 그런 것도 생에서 내가 느끼는 신비의 일종이다. 나는 심각하게 책을 읽었다. 그 봄날 저녁의 며칠, 차가운 부엌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카프카를 읽는 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뚜렷해서 흡사 스냅 사진을 찍어 앨범에 넣어둔 게 아닌가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다. 물론 앨범을 넘겨본다 해도 그런 스냅 사진 따윈 없다. 그런데도 이토록 뚜렷하게 나 자신이 보일 수가 있을까……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며칠 동안 첫 페이지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솔직히 두번째 페이지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때 문학을 보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문학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데는 카프카의 첫 페이지를 열고 놀라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열세 살 때 나는 이미 한 지붕 밑에 잠드는 가족이란 것이 얼마나 머나먼 존재들의 섬인지, 그 사이에 얼마나 절망적인 단절이 걸쳐져 있는지 스스로 체득해버린 뒤였다. 나는 그후 약봉지들을 들고 다락방으로 올라갔고 그곳에서 혼자 자고, 식구들과 따로 밥을 먹었다. 나는 전염성 보균자여서 가족으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는 사실과, 할머니의 담배가 나를 악화시켜왔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스무 살에 다시 카프카를 읽게 되었다. 카프카처럼 나 역시 무언가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절대성. 영원성. 태생적인 삶을 초월할 수 있는 다른 가능성, 바람이 어디로 불든, 세월이 어느 곳으로 흘러가든 상관없이 평생 목을 맬 튼튼한 나무 한 그루. 그때 나는 가족 속의 국외자였다. 나는 태생적인 것들로부터 완전히 고아가 되기 위해 고립무원의 성을 쌓고 있었다. 벌레라도 되어서 가족으로부터 잊혀져버렸으면…… 벌레만큼만이라도 자유로워졌으면, 스무 살이 된 여자애의 꿈이 이상하게도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스무 살에게 세상은 오염된 바다의 표피처럼 번들거리기만 했고, 어디에도 바늘귀를 꿰지 못한 채, 나는 가족 속에 자신을 유폐시키고 뜻없이 굶주리며 딱딱한 갑각의 껍질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나는, 그레고르 잠자가 자신이 벌레가 된 상황을 죽기 직전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너무나 인간적으로 번뇌하는 모습, 다름아닌 그의 아버지가 던져서 등에 박아넣은 사과와 그 먼지에 싸인 커다란 염증, 염증의 고통과 가족을 향한 사랑과 절망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간 그레고르 잠자, 그의 시체가 치워지자마자 달콤하도록 평화롭게 소풍을 떠나는 갑각류 같은 소시민의 일상, 등이 고통스러웠고 그것이 인간의 진실이기에 불쾌했다. 그러나 아직 단순했고 생 속에 만연한 야만과 고질병 같은 불안과 블랙홀 같은 존재의 영지점을 알지 못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카프카와 나 사이에 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책의 고유명사는 늘 카프카이다. 그는 존재를 흉부 엑스레이 필름처럼 햇볕 속에 걸어놓았다. 그러나 열세 살 때의 흉부 사진 " 한쪽 가슴을 결핵균이 파먹어, 베어먹힌 빵처럼, 구멍 난 바위처럼 컴컴하던 엑스레이 필름이 내게 던졌던 충격이 희미해졌듯 카프카도 많이 부드러워졌다. 이제 나는 나의 고독과 타인의 고독, 나의 통속과 타인의 통속이 마구 뒤섞인 삶을 살고 싶다. 발 밑이 살얼음인지 굳은 얼음인지, 불안한 발길질을 하며 위태로운 겨울 여정을 하기도 지쳤다. 이쯤에서 길을 바꾸어 짐을 가볍게 새로 싸고 풀밭 위를 소풍하듯 가볍게 걷고 싶기도 하다. 사람들은 그런 해결을 성숙이라 하고, 안정이라 하고, 행복이라 하며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던가. 그저그런 다정한 누더기 같은 개인적인 삶, 혹은 크리스털처럼 빛나는 통속적인 삶…….
그러나 안심하고 걷던 봄의 들판에서 느닷없이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게 되듯 " 카프카의 이름은 체코말로 까마귀라는 뜻이다 " 나의 내부는 카프카에 빚지고 있는 것 같다. 일상과의 밋밋한 데탕트는 서른여섯 시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발을 잘못 딛듯 아득한 틈 사이로 추락해버리고, 심연 속에서 생각하면 그런 해결이란 생에 대한 변명처럼 창백하게만 보이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나의 정신은 충족 속에서는 호흡곤란을 느끼고, 결핍 속에서만 후드득 물방울을 털며 깨어나며, 더구나 해결될 가망이 없는 광대하게 열린 결핍 속에서만 깊은 숨을 내쉴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카프카를 통해 나는 문학에서 결코 채워지지 않을 광대한 결핍을 발견한 것 같다. 내게 카프카는 문학의 신화이며, 자신의 고독을 다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음으로써 존재의 영지점 아니, 영 이하의 지점에 위치했던 문학의 순교자이다. 카프카는 신의 죽음 뒤에 현대를 구원할 그 어떤 절대성에 관한 탐구를 통해 새로운 영원에 도달하려 했다. 카프카의 질문은 지금도 거듭 살아나는 유령처럼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는 마침표를 찍을 대답을 하기 위해 글을 쓴 것이 아니라 출발이 될 질문을 하기 위해 썼던 것이다. 나는 마법과 같은 그 질문이 풀리기를, 그래서 우리가 카프카 다음의 세계로 나아가기를 꿈꾸어본다. 하지만 지금 만연하는 것은 카프카가 이미 우려했던 대로 물질과의 밀월, 질문을 녹슬게 만드는 곰팡이같이 무성한 말장난, 생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해 회피하려는 자세, 자극에 대한 불감증, 인간의 정신과 본질에 관한 환멸이 만연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것을 성숙하고 세련된 초현대적 해결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해결이란 나에겐 생에 대한 억측과 변명으로 들린다. 우리가 잠자는 동안 현대를 향해 쏜 카프카의 화살은 아직도 햇볕 속에 번쩍이며 날아가고 있다. (출처 : 문학동네)
(출처 : http://windshoes.hihome.com/novel-kafka.htm)
카프카(Franz Kafka)
1883. 7. 3 프라하~1924. 6. 3 빈 근처 키를링. 체크 태생 독일의 작가.
환상적인 작품세계를 보이며, 사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특히 〈심판 Der Prozess〉(1925)·〈성 Das Schloss〉(1926) 등은 20세기 인간의 불안과 소외를 그린 작품이다.
생애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상인이었던 헤르만 카프카와 율리에 뢰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두 형이 어려서 죽었기 때문에 맏아들이 된 카프카는 죽을 때까지 맏이로서의 역할을 의식하며 살았다. 가족 가운데 그와 제일 가까웠던 사람은 세 여동생 중 막내인 오틀라였다. 카프카는 영적이고 이지적이며 경건하고 유대의 율법을 열심히 배우고, 기벽(奇癖)이 있는 괴짜들이며, 감성적인 기질에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섬세함을 지닌 어머니쪽 혈통과 강한 일체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특별히 어머니와 가까웠던 것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헌신하는 단순한 여인으로, 위압적이고 화를 잘 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고된 사업을 거들면서, 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들이 아무 이익도 없고 건강을 해칠지도 모르는 글쓰기에 몰두하는 것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카프카는 부모의 몰이해 속에 '몽상적인 내면 생활'을 기록해갔다.
아버지의 형상은 카프카의 존재뿐만 아니라 작품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으며, 사실 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유형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질적인 성공과 사회적인 출세 외에는 숭배할 것이 없는, 이 거칠고 실질적이며 오만한 상점주인이자 가부장인 아버지는 카프카의 상상 속에서 거인족의 일원으로, 무시무시하고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혐오스러운 폭군으로 등장한다. 1919년에 쓴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Brief an den Vater〉는 자서전에 대한 매우 중요한 시도였는데, 실제 주소로 부친 편지는 결코 아니었다. 여기서 카프카는 그의 내면에 자신이 무능하다는 생각을 주입시켜준 위압적인 아버지 덕분에, 아버지에게 묶인 끈을 잘라버리고 스스로 결혼하여 자신 또한 한 아버지가 되는 평범한 삶에 실패하여 문학으로 도피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아버지가 자신의 삶의 의지를 꺾어버렸다고 느꼈으며, 이런 아버지와의 갈등을 직접 반영한 작품이 〈판결 Das Urteil〉(1916)이다. 사람을 현혹할 정도로 맑고 간결한 산문으로 씌어진 카프카의 소설들은 압도적인 힘과의 절망적인 투쟁을 그리고 있는데, 미지의 힘은 〈심판〉에서처럼 희생자를 짓궂게 괴롭히며 심문하기도 하고 〈성〉에서처럼 그것을 인정받기 위해 추구하고 갈망하지만 허사로 만든다. 그렇지만 카프카의 불안과 절망의 뿌리는 그가 성인이 되어 더욱 가까이 지내고자 했던 아버지와 가족과의 관계에 있지 않았다. 그의 절망의 원천은 그가 아끼던 친구들, 사랑한 여인들, 싫어한 직업, 살아간 사회 등이 모든 인간존재와 그가 진정한 불멸의 존재라고 생각한 신과 진정한 친교를 맺지 못한 채 궁극적으로 고립되어 있다는 의식에 있었다.
아버지는 자칭 동화된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공동체의 예배와 의례를 마지못해 지킬 뿐이었으므로 카프카는 언어면에서나 문화면에서나 독일인이었다. 소심하고 죄의식을 지닌 온순한 소년이었던 그는 초등학교에서도 학구적인 엘리트를 양성하는 규율이 엄격한 고등학교인 알트슈테터 슈타츠 김나지움에서도 모범생이었다. 교사들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했다. 그렇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이 권위주의적인 제도와 기계적인 암기식 학습, 고전어들을 강조하면서 인문과학을 비인간화시키는 교과과정에 대한 반란이 일고 있었다. 카프카가 기성사회에 대해 명백한 적대감을 표명한 것은 청년이 되어 자신을 사회주의자·무신론자라고 선언했을 때였다. 성인이 되자 줄곧 한정적이긴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공감을 표시했고,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체크 무정부주의자 회합에 참석했으며 말년에는 사회주의화된 시오니즘에 뚜렷한 관심과 공감을 보였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는 수동적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방관적인 자세를 고수했다. 유대인이기에 프라하의 독일인 사회에서 고립되어 있었고, 현대 지식인이기에 유대의 유산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었다. 체크의 정치적·문화적 열망에 공감했지만 독일 문화에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공감은 억눌린 채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회적 고립과 근거 상실로 카프카는 일생 동안 개인적으로 불행하게 지냈다. 그렇지만 그는 프라하에 있는 일부 독일계 유대 지식인·문학자 들과 친해지게 되었다. 1902년 막스 브로트를 만나게 되었다. 바로 이 이류 문학예술가가 카프카의 친구들 중 가장 가깝고 그를 염려해주는 친구가 되었다. 결국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의 글을 장려하고 구제하고 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영향력 있는 전기작가로 부상했다.
이 두 사람이 알게 된 것은 카프카가 프라하대학교에서 별 관심 없이 법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1906년 박사학위를 받고 1907년 한 보험회사에 상근하기 시작했는데, 이 일반보험회사의 긴 근무시간과 엄격한 요구사항들 때문에 카프카는 글쓰기에 몰두할 수 없었다. 1908년 프라하의 보헤미아 왕국 노동자 상해보험회사라는 준(準)국가기관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폐병으로 중간에 병가를 얻어야 했던 1917년까지 그곳에 머물다가 마침내 죽기 2년 전인 1922년 연금을 받으며 은퇴했다. 이 직장에서 그는 일에 열성적으로 매달렸으며 사장도 그의 능력을 인정해주었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그를 좋아했다. 사실 카프카는 간명하고 지적이며 유머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낮에는 일상적인 회사 일을 해야 했고 그때문에 주로 밤에만 글을 쓸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고된 이중생활을 극도로 괴로운 고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그에게는 보다 내밀한 내면의 사적 관계들이 노이로제를 일으킬 만큼 혼란스러웠다. 그의 열등감과 모순된 성격에서 비롯된 갈등의 성향은 성적 관계에서도 표출되었다. 그의 금욕적 태도는 펠리체 바우어와의 관계를 고통스럽게 방해했는데 그녀와 2번이나 약혼했다가 결국 1917년 헤어지게 되었다. 나중의 밀레나 예젠스카 폴라크에 대한 사랑도 역시 장애에 부딪혔다. 건강이 나빠진데다 회사 일이 그를 기진맥진하게 했다. 1917년 폐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그때부터 자주 요양원 신세를 져야 했다.
1923년 카프카는 아버지의 가부장적 억압으로부터 벗어나 글쓰기에 전념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여기서 사회주의자인 젊은 유대 여성 도라 디만트와의 우정으로 삶의 용기를 얻었지만 1924년 겨울에 결정적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베를린 체류는 짧은 기간으로 끝났다. 도라 디만트와 함께 프라하에 잠시 머물렀다가 빈 근처의 한 요양원에서 죽었다.
작품
전위문학을 주도하던 출판업자들의 요청으로 카프카는 마지못해 생전에 쓴 글 가운데 일부를 출판했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어느 투쟁의 묘사 Beschreibung eines Kampfes〉(1936)에 수록된 2편의 소설(1909)과 단편 산문집 〈고찰 Betrachtung〉(1913), 성숙된 예술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1912년에 씌어진 장편 〈판결〉· 〈변신 Die Verwandlung〉(1915)·〈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1919)와 단편집 〈시골의사 Ein Landarzt〉(1919)이다. 간결하고 투명한 문체의 특성을 보여주는 4편의 후기 소설집 〈굶주린 예술가 Ein Hungerkunstler〉(1924)는 출판을 준비했으나 사후에야 발행되었다. 실제로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에 불안을 느껴 죽기 전에 미발표 원고들을 전부 폐기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유언 집행자였던 막스 브로트는 소설 〈심판〉·〈성〉·〈아메리카 Amerika〉를 각각 1925, 1926, 1927년에 출판했다. 단편집 〈만리장성을 쌓을 때 Beim Bau der chinesischen Mauer〉는 1931년 출판되었다. 1904년경에 쓰기 시작한 〈어느 투쟁의 묘사〉· 〈고찰〉 등과 같은 초기작품은 후기작품보다 양식면에서 구체적인 표현법을 쓰고 구조면에서 더 부조리하지만 그래도 특유의 독창성을 지니고 있다. 다른 사람과의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작중인물들은 정상적·일상적인 논리를 비웃는 은폐된 논리를 따르며, 그들의 세계는 괴기하고 폭력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밖으로 분출해나온다. 등장인물들은 헛되이 세상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구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믿고자 방법을 묻는 고뇌의 대변자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카의 많은 우화들은 정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이 종잡을 수 없이 불가해하게 뒤섞인 혼합물이다. 그러나 때때로 기묘함은 문학적 또는 표현장치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를테면 병리상태의 기만성에 현실의 지위가 부여되거나, 일상적인 발언의 은유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판결〉에서는 아들이 추호의 의심도 없이 늙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며, 〈변신〉에서는 잠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기괴하고 흉칙한 벌레로 변해 있음을 발견한 아들이 가족의 수치감과 무시뿐만 아니라 자책 어린 절망감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간다. 더욱 불가해한 이야기들도 많다. 〈유형지에서〉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장교는 자신의 의무에 헌신적임을 과시하려고 스스로를 고문도구로 무시무시하게 절단하는(분석적으로 묘사됨) 조처를 받아들인다. 맡은 임무의 모호한 가치와 그 임무에의 기괴한 헌신이라는 이 주제들은 카프카가 항상 열중하여 다루는 문제들 가운데 하나로, 〈굶주린 예술가〉에서 다시 등장한다. 나중에 〈심판〉에 삽입된 이야기 〈법 앞에서 Vor dem Gesetz〉(1914)는 접근하기 어려운 의미(법)와 그것에 대한 인간의 끈질긴 열망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생애 마지막 시기인 1923~24년에 씌어진 글들은 모두 이해와 평정을 얻기 위한 개인의 허영심, 그러나 굽히지 않는 투지에 집중되어 있다.
단편소설에 나타난 많은 주제들은 장편소설에서도 등장한다. 예를 들어 〈아메리카〉의 주인공인 소년 카를 로스만은 가족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지는데, 거기서 아버지와 같은 유형의 많은 인물들과 은신처를 찾고자 애쓰지만 그의 순진성과 단순성으로 인해 어디서나 이용당하며, 마지막 장의 묘사에 따르면 꿈의 세계인 '오클라호마의 자연극장'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다. 카프카는 로스만이 궁극적으로 파멸하게 되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심판〉에 나오는 능력 있고 양심적인 은행원이자 독신자인 요제프 K.는 그를 체포하러 온 사람에 의해 잠이 깬다. 치안판사의 법정에서 행해지는 심문은 환멸스러운 어릿광대극으로 바뀌고 그가 체포된 혐의는 결코 설명되지 않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법정은 더이상의 발의권을 갖지 못하지만, 요제프 K.는 스스로 접근할 수 없는 법정을 찾아 그가 알지도 못하는 죄로부터 무죄 석방을 받기 위해 전념한다. 그는 중재자들에게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충고와 설명은 오히려 새로운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터무니없는 책략을 써보기도 하지만 더럽고 어둡고 음탕한 결과만을 초래했다. 한 성당에서 쉬고 있을 때, 어떤 신부가 나타나 결백성을 주장한 것 자체가 죄의 표지이며 그가 억지로 찾아나서게 된 정의의 문은 영원히 열리지 않으리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여전히 주위에 도움을 청하면서 최후까지 저항하지만 결국 형이 집행되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마감된다. 카프카의 가장 암울한 작품으로, 악은 도처에 있으며 무죄 석방이나 구제는 얻을 수 없는 것이고 광란의 노력은 다만 인간의 현실적인 무능을 가리킬 뿐임을 보여준다.
카프카의 후기작품 가운데 하나인 〈성〉의 무대는 어떤 성의 지배를 받는 조그마한 촌락이다. 이곳의 겨울 풍경 속에서 시간은 흡사 정지해버린 것 같고 거의 모든 장면은 어둠 속에서 벌어진다. K.는 성 당국이 임명한 측량기사라고 주장하며 마을에 도착하지만, 마을 관리들은 그의 주장을 물리친다. 이 소설은 K.가 성으로부터 다시 인정받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성에 있는 사람, 그럴 권한이 있는 사람은 요제프 K.(〈심판〉의 주인공)의 법정만큼이나 접근하기 어렵다. 그러나 K.는 희생자가 아니라 공격자로서, 하찮고 거만한 관리들과 그들의 권위를 받아들이는 마을사람들 모두에게 도전한다. 그렇지만 그의 책략은 모두 실패한다. 요제프 K.처럼 그 역시 하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술집 여급 프리다는 그가 그녀를 단순히 이용하는 것뿐임을 알게 되자 그를 떠난다. 브로트의 말에 따르면 카프카는 K.가 온갖 노력 끝에 탈진하게 되지만 임종의 자리에서 그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는 허락의 통지를 받게 할 의향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에서는 새로운 요소들이 보인다. 이 작품은 비극적이지만 황량하지는 않고, 대부분 카프카의 인물들이 역할자에 불과하지만 프리다는 확고한 개성을 지니며 냉정하고 사실적인 성격으로 나타난다. 프리다를 통해 K.는 해결의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통찰하게 되며, 그가 애정을 갖고 그녀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고독감을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카프카의 작품은 단편이건 장편이건 모두 풍부한 해석을 야기시켰다. 브로트와 카프카의 영어 번역자인 뮤어 부부(윌라와 에드윈)는 카프카의 소설들을 성총의 상징으로 보았고, 실존주의자들은 카프카의 죄와 절망의 세계를 진정한 실존을 건설할 토대로 간주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노이로제 증세를 보일 정도로 아버지에게 얽혀 있는 상황을 그의 작품의 핵심으로 보았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회적 비판, 권력자와 그 대리인의 비인간성, 정상적인 일상 밑에 웅크리고 숨어 있는 폭력과 야만성을 강조했다. 〈심판〉에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마구잡이 관료주의에 대한 공포를 통해 카프카가 풍부한 상상력으로 전체주의를 예견했음을 발견해낸 사람들도 있고, 초현실주의자들은 부조리의 끊임없는 침투를 보며 기뻐하기도 했다. 이런 각각의 해석들의 타당한 증거를 작품이나 일기에서 찾아낼 수는 있으나, 카프카의 작품 전체는 이 모든 것을 넘어선다. 어떤 비평가가 그의 작품들이 '열린 비유'로서 결코 그 최종적 의미를 매듭지을 수 없다고 평한 것은 이 점을 가장 정확히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카프카의 작품에도 한계는 있다. 각 작품마다 절망적으로, 그러나 항상 내면에서 의미와 안정, 자기 가치와 목적 의미를 추구하면서 정신과 육체 양쪽으로 고통받는 인간이 등장한다. 카프카 자신은 글쓰기와 그것이 뜻하는 창작활동을 '구제'의 수단으로, '기도의 형식'으로 생각했고, 이를 통해 세상과 화해할 수 있거나 세상에 대한 부정적 경험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여겼다. 투명하게 묘사되었지만 불가해하게 어두운 그의 작품들은 카프카 자신의 개인적 노력이 허사였음을 폭로한다. 무력한 인물들과 그들에게 닥치는 기이한 사건들을 통해 작가는 20세기 세상 속의 불안과 소외를 폭넓게 암시하는 매혹적인 상징주의를 이룩했다.
죽을 무렵 카프카가 사귄 문학인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카프카는 막스 브로트에게 출판되지 않은 원고는 전부 없애고 이미 인쇄되어 나온 작품은 재판 발행을 중지해달라고 유언했는데, 브로트가 그의 유언대로 했더라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은 살아남지 않았을 것이다. 브로트는 유언과는 반대의 길을 밟았고, 그로 인해 카프카의 이름과 작품이 사후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그의 명성은 처음 히틀러 점령시 프랑스와 영어 사용국에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카프카의 세 누이동생이 강제수용소에 유배되어 살해된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재발견되어 독일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이후였고, 1960년대에는 공산 체코슬로바키아의 지식인·문학계·정치계까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변신'의 사회적 배경
이 작품은 세계 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의 암울한 서구 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시기는 산업 혁명으로부터 시작된 서구의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나머지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한 채 물질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는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하였고, 합리적인 이성도 그 기능을 상실하여 온 유럽의 국가가 전쟁을 향해 치닫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인간 자체마저 도구화되고 기계화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카프카는 바로 이와 같은 인간 존재의 자기 상실을 깊이 있게 탐구하였다.
'그레고르'의 가족관
세일즈 맨 그레고르는 열심히 일을 하여 가족의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희생이 가족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착각이었다. 왜냐 하면, 가족들은 그가 벌레로 변했을 때 그를 냉대하고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가족들은 그가 죽었을 때 활기찬 모습까지 보였었다. 그러므르 그레고르의 희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보면 사랑을 베풀지 않음으로써 그레고르를 죽게 만든 가족들은 모두가 사랑보다는 물질적 이익을 더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식 수도자 (Ein Hungerkunstler, 1912/22)
이것은 관중(觀衆)에게 자신의 단식술을 보여주는 광대에 관한 이야기로, 관중들은 관심은 처음보다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밤에도 구경꾼이 몰려든다. 40일 후 흥행주는 단식 수도자에게 다시 음식을 조금 먹을 것을 설득한다. 그리고 관중들과 함께 단식의 성공적인 완료를 즐기는 작은 축제를 벌인다. 그러나 몇 년 후 상황이 급변한다. 단식가에 대한 관중의 흥미는 점점 줄어들어 이 사람은 어느 곡마단에 취직을 하게 되고 여기서 동물우리 옆방 하나를 배정받는다. 얼마 후 관리인이 이 광대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 만다. 그리하여 그의 단식일을 기록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완전히 탈진할 때까지 계속 단식을 한다. 죽기 직전에 그는 자신이 광적으로 단식할 이유를 털어놓는다. 즉 자신의 입에 맞는 음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죽고 난 후 그의 빈 우리는 젊고 싱싱한 표범으로 채워진다.
단식 수도자는 세계 속에서의 예술의 문제 또는 수도자의 존재를 형상화(形象化)한 것으로 보인다. 카프카로서는 이 당시 결핵의 발병(發病)과 세 번째의 파혼, 아버지와의 위기, 밀레나와의 체험 등 다양한 삶의 고통을 겪고 나서 죽음을 예감하던 시기였고,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예술적 삶에 대한 자기확인을 '단식 수도자'로 표현한 것이다. 대체로 그의 말년의 분위기는 절망이라든가 비극성, 문학적 생산이나 외부사회에서의 궁극적인 좌절감 등이 구조를 이룬다. 자신에 대한 이러한 시각은 작품의 주인공이 처한 상황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단식은 예술의 허구적 변형으로 보인다. 작가 자신이 늘 문학적 생산에 회의를 느꼈고 외부사회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지 않는 내면세계의 문학을 고집한 것처럼 주인공의 단식술도 동일한 특성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무엇을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굶는 비생산적인 것이다. 인간의 삶과 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먹지 못하는 무능력, 마음껏 운동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창살 속의 좁은 우리 안에서 움직이지 않는 부자유, 바로 이것이 단식 수도자가 그 사회에 보여줄 수 있는 가치이다.
그 자신만이 갖추고 있는 이러한 단식술은 시초에는 많은 관중이 몰려듦으로써 수도자의 내면적 세계가 사회와 커뮤니케이션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늘 재미를 찾는 관중의 일시적인 변덕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점점 줄어들어 나중에는 곡마단으로 쫓겨가고 거기서도 관중의 흥미는 동물들에게로 향하게 되어 결국 무관심 속에 죽는 것이다. 즉, 수도자의 궁극적인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할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 다음에 보듯이 그가 스스로 좋아서 하는 단식의 이유를 관중은 커녕 흥행주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0일이 된 지금에 왜 단식을 중단해야 하는가? 앞으로 얼마든지 더 견뎌낼 수 있는데, 왜 지금 그만둬야 한단 말인가? (……) 좀더 계속하려는 단식의 영광을 왜 박탈하겠다는 건가? (……) 한번은 어떤 인정 많은 사람이 나타나 광대가 우울해 하는 원인은 아마 단식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하려 했다. 그때는 마침 단식이 절정을 향해 가는 때였다. 수도자는 그 설명에 갑자기 화를 내며 야수처럼 우리의 창살을 요란하게 흔들어 구경꾼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에 대해서 벌써 흥행주가 즐겨 쓰는 해결책이 있었다. 흥행주는 관중 앞에 나가서 수도자를 위해 변명을 하는 것이었다. "배불이 먹는 여러분께서는 아마 이해하기 곤란하겠지만 단식을 하던 사람이 성을 내기가 쉽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이해해 주신다면 광대의 난폭한 행위를 용서할 수 있을 겁니다."
단식 수도자 자신이 스스로 만족을 찾아 선택한 행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 따라서 단식에 대해 그 자신만이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관객이라고 할 수 있다. 40일이라고 하는 한계가 흥행주가 최대의 흥행효과를 위해 임의로 정한 기한이지 단식가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더욱이 그는 40일이 경과하면 관중들 앞에서 다시 원기를 회복하고 새로운 단식에 도전한다는 우스꽝스런 의식을 위해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는 식사를 해야 한다. 그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관중 중에 누구도 없고, 둘도 없는 동료인 흥행주도 모른다. 그 결과 그는 항상 서글픈 심정이고, 그의 감정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기에 더 우울해지는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인공의 단식은 구미에 맞는 제대로 된 음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음식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은 삶을 지탱해 갈 길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작가적 환경으로 다시 눈을 돌릴 때 자신의 문학적 삶이 외부세계의 생존과는 양립될 수 없다는 카프카의 자기인식과 유사하다. 공동체와의 소통의 수단으로, 동시에 영위되지 못한 삶의 대체물로서 그의 문학은 아버지에게 끝까지 수용되지 못했고, 꿈 같은 내면의 기록이 사회에 이해되리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유고를 파기해 달라는 유언도 나온 것이다. 이해하지 못하는 이 세상과 맞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는 주인공의 인식은 세계와 대치된 가운데 자신의 카프카의 자기확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가 앓은 후두결핵은 실제로 그에게 아사(餓死) 선고를 내린 방이다. 그가 키얼링의 요양소에 있을 때 '단식 수도자'의 교정을 봤다는 사실은 수도자의 소외를 단식(斷食)이라는 형태로 허구화시켰으리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카프카의 말년, 요양소에서 도라 디아만트와 더불어 그에게 헌식적인 도움을 준 로버트 클로크슈토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증언은 이 작품에 임하는 작가의 필사적인 자세를 보여준다.
이 무렵의 카프카의 육체적인 상태나, 말 그대로 굶어 죽은 전반적인 상황은 정말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그는 교정을 끝냈는데, 이것은 끔찍한 정도의 정신적인 긴장을 주는 작업으로서 감동적인 정신과의 재회였다. 이때 그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 카프카에게서 이런 식의 감정표현을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늘 초인간적인 극기의 힘을 지녔던 것이다.
이 같은 증언은 '단식 수도자'에 스며 있는 작가의 강한 자기투영을 직감케 해준다. 그는 그로테스크한 아이러니의 수단을 자신의 예술성에 의문을 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젊은 표범의 모습은 외부세계의 삶이 최후의 승리를 차지한다는 다른 작품들의 자취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표범은 활동적인 사회적 삶의 요구를 대표하고 있다. 단식술을 지닌 수도자는 표범에 맞서 주장할 수 있는 바가 없다. 표범은 '아무리 우둔한 인간이라도 밝은 감정을 느끼게' 해줄 뿐만 아니라, '즐비한 이빨 사이에라도 자유가 숨겨져 있는 듯한' 동시에 '생에 대한 환희가 목구멍으로부터 강한 열기를 내뿜는' 그 자태로부터 관객들의 환호를 살 만한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볼 수가 없다. 정상적인 삶의 요구가 자기파괴적인 단식수도자 앞에서 무제한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관객의 반응을 전적으로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나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이들 집단은 다른 한편으로 비정하고 만족만 추구하는 것으로 천박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어느쪽이 정당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예술과 활력적인 삶의 요구 사이에서 카프카는 분명한 결정을 유보하고 있는 셈이다. 다만 언어기능을 상실한 '변신 Die Verwandlung'의 그레고르처럼 외부환경과 전혀 소통되지 못하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유일한 관객으로서 존재하는 단식가는 소외된 개체의 숙명을 조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와의 고통이 단절된 가운데 그 사회와 투쟁해야 하는 소외된 개체의 실존은 출구부재의 숙명적 순환으로 암시된다 할 것이다.
변신 (Die Verwandlung, 1912)
이 작품은 『선고』와 달리 여러 차례 개작을 거듭한 끝에 완성된 것이고, 작가 자신도 "읽어줄 수 없는" 결말이라는 말로 은연중 불만을 내비치고 있기도 하지만 유언에서 폐기 제외 목록에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애착을 느낀 것도 같다.
젊은 세일즈맨인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칙한 벌레로 변신한 것을 발견했다. 출근시간이 지나도 기척이 없자 가족들은 문을 두드리고 회사의 지배인은 왜 그레고르가 출근하지 않는지 알아보려고 찾아온다. 불쾌해진 그는 그레고르의 수상쩍은 행동을 회사문제와 연관시켜 의심하고는 해고하겠다고 위협한다. 그레고르는 안으로 잠긴 문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려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남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얼마 후 힘들여 문을 열고 나간 그레고르의 모습을 본 지배인은 혼비백산해 도망치고 부모는 충격을 받고 당황해 한다. 아버지는 위협적인 동작으로 벌레를 다시 방으로 들여보내는데, 이때 그레고르는 큰 충격으로 상처를 받고 피를 흘린다.
주인공은 문틈으로 가족들을 관찰한다. 그의 모습에 질린 누이동생은 공포를 느끼며 그에게 음식을 갖다 주지만 그는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2주일 후 어머니가 그의 방 을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벌레의 형상에 놀라 실신하고 만다. 한번은 그레고르가 방에서 나가자 아버지는 분노한 나머지 벌레에게 사과를 던져 심한 사어를 입힌다. 그레고르가 더 이상 부양의 능력이 없자 가족들은 스스로 생활대책을 강구한다. 아버지는 은행에 일자리를 마련하고 방을 하나 비워 하숙인을 받아들인다.
어느날 저녁 누이동생이 저녁식사 후에 하숙인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을 때 음악에 이끌린 주인공은 거실로 기어 들어간다. 하숙인들은 벌레의 출현에 깜짝 놀라며 하숙을 해약하겠다고 위협을 한다. 누이동생은 벌레를 더 이상 오빠로 간주할 수 없다며 벌레를 없앨 모든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고 부모를 설득하다. 주인공은 힘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죽는다. 하녀가 벌레의 시체를 치우고 한결 가벼워진 가족은 행복한 기분으로 휴일에 소풍을 간다.
그레고르 잠자의 운명은 이 작품에 앞서 1970년에 완성된 '시골에서 결혼 준비'에 나오는 라반의 꿈을 기억나게 해 준다. 라반은 여기서 자신의 옷을 입은 육체를 보내 세상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대신 자신은 벌레의 형상으로 남아 침대에서 쉬고자 하는데, 바로 순수자아의 의지와 달리 외부세계에 불과한 벌레 같은 존재라는 자의식이 두 작품에 공통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독자도 변신의 이유를 모른다. 다 만, 육체와 달리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하는 그레고르의 사고를 통해 전반적인 삶의 환경이 드러나는 가운데 어렴풋이 추정해 볼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삶은 비참한 것이고, 또 직업이나 가족에 대해 불만이 있음이 밝혀진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낯선 상황의 발생에 대해 여러 가지로 원인분석을 해 보는데, 그의 일상이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레고르는 늘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세일즈맨이다.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런 힘든 직업을 택했을까? 날이면 날마다 출장을 다녀야 한다. 본점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업무상의 긴장감이 훨씬 심하다. 그밖에도 여행의 괴로움, 열차시간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하고 조잡한 식사, 항상 바뀌어 결코 지속되지도 못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인간관계가 있다.
그레고르의 하루하루가 늘 피곤하고 불안에 쫓기는 것임이 돌발적인 상황에서의 숙고로 인해 밝혀진다. 게다가 그는 가족에 대한 부양자로서 가족은 선량한 그를 이용하는 생활구조이다. 이러한 일상에서 변신은 그레고르로 하여금 억눌러 온 소망을 실현시켜 주는 계기라는 측면이 있다. 그는 사회 속에서의 온갖 인간관계에서 탈피함으로써 자신에게 늘 긴장된 업무를 강요하는 사회권력에 맞서고, 직장상사와 아버지에게 맞선다는 은밀한 소망을 간직해 왔는데, 이것은 변신을 통해 그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외부세계에 대 한 저항의 상징으로서, 도전적인 잠재의식으로서 변신은 그레고르에게 노예 같은 생활을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역할은 뒤바뀌어 가족은 생활전선에 나가야 하고 그는 기생적인 생존방식으로 쉬는 위치에 놓인다고 할 수도 있다. 이리하여 가족은 그를 없어져 야 할 무용지물이라고 여기게 된다. 가족의 입장은 사실상의 사형선고라고 볼 수도 있을 누이동생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대변되고 있다.
"내쫓아야 해요" 누이동생이 외쳤다. "그 수밖에 없어요, 아버지, 저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세요……."
누이동생은 지금까지 그레고르가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한 인물이고, 겉으로 말하지는 않았어도 자신의 후원으로 음악학교에 진학시키려는 계획까지 갖고 있었는데 그녀로부터 가장 차갑게 따돌림 당하는 현실이 노출된다. 전반적인 상황을 검토해 본 그레고르는 자신의 기생적 존재방식이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가족들을 원망함이 없이 화해의 감정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물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았고, 아버지의 사과 공격으로 생긴 상처가 점차 확대된 외부적인 요인도 없지 않지만, 죽음은 그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인상이 강하다. 그레고르가 죽는 대목에서는 평화적 분위기마저 감돈다.
또한 마음이 느긋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전신이 아팠지만 아픈 것이 점점 가라앉아 머지않아서 완전히 가라앉고 결국은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 같았다. 오래 전에 등 에 박혀 썩은 사과는 부드러운 먼지에 싸여 느끼지 않게 되었다. 수없는 동정과 애정을 갖고 그는 가족들을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누이동생의 의견보다 훨씬 더 절실했을 것이다. 교회의 탑시계가 새벽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그처럼 허전하고 고요한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의 머리가 자기도 모르게 수그러지고 콧구멍으로부터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나왔다.
죽음에 대한 그레고르의 동의는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야기된 자신의 고립의 의지와 저항의 소망에 대해 죄의식을 느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카프카의 자아분열이라는 공식에 대입해 보면, 외부사회에서 지치고 소외된 일상적 삶을 도피하는 방법으로서 의 변신은 실패한 것이고, 죽음과 타협함으로써 순수영역으로 복귀하고 싶다는 타나토스적 욕망이 발동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변신이라는 가상의 전제 앞에서 가족도 유죄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아버지의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표되는 이들의 비인간적인 속성은 이전에도 드러나지 않다가 아들의 변신을 계기로 그 비천한 본질이 폭로되며, 벌레를 치운 후 딸의 젊은 육체에서 미래의 희망을 기대하며 소풍을 떠나는 결말은 벌레의 비인간적인 육체에 못지 않게 비인간적인 존재방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변신이라는 환상적 설정을 놓고 이것이 외형의 사건이 아니라 '주인공의 내 면의 심리묘사'라는 해석도 있고, 병든 주인공의 망상으로서 '꿈으로 왜곡된 고독'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주장에 따른다면 카프카의 모든 작품은 꿈의 묘사이고, 내면의 심리나 망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이라는 데 문제가 있다. 카프카 의 환상적 모티프를 두고 '반동화(反童話)'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마법의 주문에 빠진 것 같은 상황이 동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인 반면, 동화와 달리 끝까지 이 마법에서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적된 주장이다.
문제는 불가사의 리얼리티를 찾아내기 위해 동원하는 카프카 고유의 묘사 수단, 즉 현실적 언어와 환상적 형상을 합성시켜 우리들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려는 형상화의 스타일이다. 변신을 통해 자본주의적인 경쟁사회에서 쫓기고 소외된 생존방식이 각성되는 것이고, 인간 내면의 비인간적인 속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동시에 작품의 말미에서 더 이상 아버지나 어머니, 누이동생이 아니라 잠자씨, 잠자부인, 잠자양으로 표현되는 가족의 움직임은 외부세계의 생존방식으로서의 삶이 궁극적인 승리를 차지한다는 강한 암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고 (Das Urteil, 1912)
이 단편은 1912년에 완성되고 1913년에 발표되었는데, 카프카의 일기에 따르면 9월 22일 밤 10시부터 23일 새벽 6시에 걸쳐 단숨에 쓰여졌다고 한다. 앉아 있는 동안 뻣뻣해진 다리를 책상에서 빼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브로트에게 보내는 유서를 통해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작가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의심의 여지없이' 마음에 들어한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게오르크 벤데만은 젊은 상인으로서 3년 전부터 러시아에서 거주하고 있는 친구에 게 편지를 통해 자신이 유복한 집안의 딸인 프리다 브란덴펠트와 약혼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자 한다. 이어 편지 내용을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이 소식을 듣고 분명치 않은 비난 을 퍼붓는다. 아버지를 염려하는 게오르크는 그를 침대로 옮기고 이불을 덮어 준다. 이때 아버지는 거대한 형상을 하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게오르크가 자 신과 멀리 떨어진 친구를 져버렸다는 일종의 논죄를 한다. 프리다와의 약혼이 자신과 죽은 어머니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이어 아버지는 아들에게 익사하라는 선고를 내린다. 게 오르크는 비틀거리며 집을 나와 강으로 달려가서 물속으로 뛰어든다. 일기에 의하면 이 글을 쓰면서 카프카는 브로트의 『아놀트 베어』, 또 자신이 이전에 일 기에 초고를 기록해 놓은 『도시의 세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작가 자신이 작 품의 소재 원천을 밝힌 셈이다. 특히, 1911년에 기록된 『도시의 세계』는 『선고』를 집필 하게 한 동기를 주는 듯한 줄거리로 되어 있다. 즉 주인공 오스카는 방탕한 생활로 부모를 서서히 파멸시킨다는 비난을 아버지로부터 받는데, 이것을 일종의 살인고발로 간주한다면 『선고』에서 아들에게 내리는 아버지의 익사선고는 인과응보의 성격을 지닌다는 풀이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이듬해인 1913년 일기에는 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중요한 단서가 될 표현이 나온다.
내 경우에 대한 『선고』의 결과들, 이 이야기는 간접적으로 그녀 때문에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약혼녀 때문에 파멸한다.
여기서 그녀라는 것은 이 소설이 헌정된 펠리체 바우어를 말한다. 이 부분의 일기를 쓴 시 점은 결혼을 놓고 상당한 고민을 거듭하던 때로서 펠리체와의 약혼, 혹은 결혼에 대해 작가 특유의 양가치적인 평가나 망설임의 고백이 소설로 형상화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여기서 작품 속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덴펠트가 펠리체 바우어와 똑같 은 F. B.의 두 음을 지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작품을 읽고 난 독자가 느끼는 최대의 의문은 게오르크 벤데만이 실제로 자신의 죄를 시인할 수 없다면 도대체 왜 아버지의 선고에 따라 자살하느냐 하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 에 대해 대체로 서술시점의 기준이 되는 게오르크와 러시아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친구와 의 관계에서 그 해답을 읽어내고자 한다. 게오르크는 사업의 수완이 있고 사회에 적응력이 있는 성공한 인간인 데 비해 멀리 러시아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는 친구는 곤궁하고 병들었으며, 사업적인 성공도 모르고 게오르크의 결혼을 부러워하는 존재이다. 게다가 금욕적으로 살아가는 독신자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서술할 수 있는 비 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 친구의 정체를 좀더 가까이 관찰해 보도록 하자.
그는 집안살림에 불만을 품고 몇 해 전에 러시아로 가버린 그 친구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떤 사업을 경영해 처음에는 괜찮았던 모양이었으나, 수년 전부터 그의 귀향은 점점 드물어졌고 그때마다 고충을 털어놓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업이 기울어진 것 같았다. 이 친구는 쓸데없이 외국에서 죽도록 고생만 했고, 어린 시절부터 낯익은 그 얼굴에는 이채로운 수염만이 거칠었으나 누린 안색은 무슨 병에라도 걸려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말하는 폼으로 보아 그는 동향 사람들인 그 지방의 독일 사람들과 별로 연락도 없었다. 게 다가 토착민과의 접촉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는 결정적으로 독신생활을 하고 있었다. 확 실히 길을 잘못 든 사람, 누구나 동정은 하면서도 도와줄 수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도대체 뭐라고 편지를 쓴단 말인가.
친구의 묘사를 다소 길게 인용한 것은 이 인물이 본 작품의 해석에 열쇠가 되는 역할이라 고 보기 때문이다. 동시에 게오르크의 시점에서 보는 친구의 모습 역시 결정적이기 때문이 다. 친구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문학을 지향하는 작가의 형상과 동일하다. 카프카 자신도 문학 작업에 확신을 갖지 못했듯이 이 친구는 '사업이 기울었고', '병에 걸린' 모습이며, 그가 고독한 환경에 있는 것과 같이 '접촉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고, 무엇보다 '독신자'로서 살 아가고 있다. 그리고 문학이 쓸쓸한 작업이듯이 그 친구 역시 멀리 떨어진 러시아에서 쓸쓸 히 생활하고 있다. 이 같은 친구의 존재와 시민적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는 게오르크의 관계는 결혼과 문학을 놓고 번민을 거듭한 작가의 두 가지 존재방식이 투영된 것으로 여겨진 다. 즉, 결혼은 외부세계적 삶의 형태이면서 따뜻하고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는 데 비해 문학의 길은 쓸쓸하고 곤궁한 독신자적인 삶의 방식인 것이다. 다만 문제는 두 가지 존재방식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인데, 익사선고를 통해 게오르크를 죽임으로써 외부세계 지향의 자아를 단죄하는 자의식이 엿보인다 할 것이다. 동시에 고독하고 곤궁한 독신자의 삶이지만 순수자인 친구는 살아남는다. 여기서 게오르크의 아버지는 카프카의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와는 반대의 역할을 한다. 즉, 헤르만 카프카는 실제로 문학에 늘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여기서의 아버지는 러시아의 친구를 지지하고 나중 에는 그 친구의 대리인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함으로써 내면세계의 가치를 대변해 주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한편 게오르크가 아버지에게 이불을 덮어 주는 행위는 아버지를 죽이려는 무의식적인 제스쳐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그럼으로써 계획된 프리다와의 결혼을 성취하고 동시에 아버지의 지위로 올라서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친구를 지지하고 대변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보았을 때, 순수자아를 억누르고 일상적인 시민적 삶의 욕구를 성취하려는 분열된 자아의 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카프카는 게오르크 아버지의 형상화를 통해 평소 자신이 바라던 아버지 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항상 문학작업을 통해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게오르크의 존재방식을 향한 것이다. 게오르크의 아버지가 내리는 익사선고는 게오르크와 동시에 시민적 존재방식을 향한 것이다. 그리고 게오르크가 순순히 선고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 및 작가적 존재인 친구와의 결속을 염원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분열된 자아로 보이는 친구와 달리 안정적 시민적 삶에 안주함으로써 고유한 본래의 소망을 벗어난 것에 자책하여 아버지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다. 시민적 존재에 대한 사형선고, 이것이 바로 펠리체와 결혼을 놓고 고민을 거듭한 작가가 예술적 소망을 통해 내리는 내면적 결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이 펠리체 바우어에게 바쳐졌고, 게오르크의 약혼녀 프리다 브란덴펠트가 바우어의 모델이라는 배경을 생각할 때 주인공에게 내려지는 익사선고는 펠리체와의 결혼에 대한 순수자아의 단죄라는 해석이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선고를 통해 러시아에 있는 또 하나의 자아는 결혼으로 인해 예술적 존재가 침해받을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작가가 마음에 들어한 전기적 사실에서도 알 수 있지만, 『선고』야말로 카프카의 문학적 명제를 가 장 핵심적으로 요약한 단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예술적 삶이 외부 세계에서는 극단적인 개인의 소외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식의 에센스이기 때문이다.
성 (Das Schloß, 1922)
1926년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이 소설은 『실종자』, 『소송 Der Prozeß』과 더불어 흔히 '고독의 3부작'으로 불리우는 장편으로서 형식적으로는 미완성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완성작이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겨울밤에 K.는 성에 소속된 한 마을에 도착한다. 마을의 여관에서 그는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직접 자기를 측량기사로 초빙했다고 주장한다. 이튿날 아침 K.는 성으로 가려고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길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는 여관으로 돌아와 두 명의 조수를 만난다. 이어 전령인 바르나바스가 클람이라는 고관이 서명한 편지를 가지고 온다. 내용은 성 당국에서 그를 채용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저녁 K.는 술집에서 프리다라는 여자를 만나는데 프리다는 클람의 애인으로서 K.에게 몸을 바친다. 이튿날 두 사람은 K.의 방에서 잠을 자며 보낸다.
도착한 지 사흘 후 마을의 면장을 만난 K.는 마을에서는 측량기사가 필요 없지만 학교의 사환으로 일하도록 주선해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 나흘 째 되는 날 K.는 술집에서 클람을 기다리다 소용이 없자 그에게 서면으로 만나자는 요청을 한다. 그리고 밤에는 학교에서 프리다와 함께 보낸다. 교사들과 논쟁을 벌인 다음 그는 두 조수를 해고시키고 바르나바스 집을 방문한다. 바르나바스의 누이인 올가는 자신의 가족이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녀의 동생인 아말리아가 성의 관리로부터 외설적인 제안을 받고 거절했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프리다는 K.가 배척받는 집안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그와 헤어지고 술집으로 돌아간다.
성의 서기인 에어랑거에게 가려던 K.는 문을 잘못 알고 뷔르겔의 방으로 들어가는데 이 사람은 그가 채용되도록 도와주겠다고 말한 바 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순간에 K.는 극심한 피곤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놓치고 만다. 에어랑거는 잠이 든 K.를 깨우고 클람을 생각해서 프리다를 놓아주라고 명령한다. 다음날 아침 K.는 하인들이 담당관리들에게 서류를 분배하는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목격한다. K.는 다음날까지 오랫동안 잠을 자고 하녀 페피는 자기 방에서 K.와 함께 살기를 원한다. 여기서 이 소설은 중단된다.
작품은 여기서 미완으로 끝나지만 카프카가 죽기 전에 대화를 통해 그의 작품 구상을 전해들은 브로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즉, 주인공 K.가 기력이 다하여 죽어갈 때, 성 당국으로부터 "마을에 거주하겠다는 K.의 요구를 수용할 수는 없지만 사정을 참작하여 그곳에 살면서 일하도록 해주겠다"는 내용이 전달되고, K.는 이 통지를 받은 다음 죽는다는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 일관되는 흐름은 성의 신비스럽고 어두운 정체이다. K.가 아무리 백방으로 그곳에 도달하려고 노력해 보아도 번번이 허사로 끝날 뿐이다. 이 같은 특징은 독자로 하여금 성은 과연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K.의 시야에 전개되는 성과 마을의 모습은 마치 그와의 사이에 놓인 다리를 경계로 현실세계와 비현실의 세계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마을은 눈에 깊숙이 파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산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며 성조차도 어두움과 안개 속에 묻혀 있었다. 때문에 커다란 성이 있음을 알려 주는 엷은 빛의 등불조차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K.는 한참동안 대로에서 마을로 통하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희뿌연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인상은 그대로 현실화되어 나무다리를 통과해 건너간 마을에서 성의 정체를 밝히려고 K.의 노력은 끝내 좌절되고 만다. 또한 동시에 성은 마을에서 움직이는 K.의 움직임이 하나하나를 감시하고 통제할 정도의 차가운 객관적 현실로 그를 짓누르기도 한다. 『소송』에서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요제프 K.의 운명을 좌우하는 최고재판소처럼 성은 K.의 세계에서 도달 불가능한 초현실적 영역인 동시에 객관적인 현실인 것이다. 그런데 작품 서두에는 작가적인 배경과 관련해 성이 상징하는 바를 암시해 주는 듯한 묘사가 나온다. K.는 도착 이튿날 성을 관찰하는데 그것의 중심부에 있는 첨탑 둘레의 흉벽은 다음가 같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발코니 모양으로 생긴 의 끝에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흉벽이 달려 있어서 이것이 겁을 먹거나 또는 버릇없는 어린애 손으로 그려진 것 같이 불확실하고도 불규칙적으로 부서지듯이 맑은 하늘에 윤곽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법의 제재에 의하여 집안에서 가장 구석진 곳에 떨어져 잇는 방에 갇혀서 우울해 하는 거주자가 자기의 몸을 밝은 세상에 내놓기 위하여 지붕을 뚫고 조심스레 몸을 일으킨 모습과도 같았다.
첨탑 주위의 '겁을 먹은' 어린애라는 표현이나 '우울해 하는 거주자', '구석진 방의 거주자' 등의 의인화는 카프카와 아버지의 관계를 상기시켜 준다. 모든 것을 규정하고 통제하는 관료의 세계라고 할 성은 확실히 헤르만 카프카의 권위적인 이미지와 유사하다. 심지어 벤야민 같은 사람은 성이 아버지의 형상일 뿐 아니라 부패한 아버지 세계의 상징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 같은 개인적인 체험의 형상화가 아니다. 카프카에게 있어 부자갈등의 모티프는 세계의 원칙으로 화해 거대한 부권지배의 체계나 불합리한 권력기구에 대한 체험으로 확장되는 특성을 갖는다. 비록 개인적 모델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이것이 사적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인을 지배하는 권력 메카니즘의 본질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카프카의 소설은 개인적 갈등을 초월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후세대의 인류에게 세계의 숨겨진 모습을 체험하는 감동을 주는 것이다.
성은 K.와 마을 주민들에게 내외적으로 종속시켜 이들의 자유로운 삶을 방해하는 전체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 성주인인 백작의 허락 없이는 마을에 머물 수도 없고, 모든 것은 서의 소유이며 일상의 삶을 지배하면서도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특성은 바르나바스 가족의 상황에서 잘 드러난다. 그들은 관리의 추악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삶을 묵묵히 따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성은 부패성과 동시에 불투명한 속성으로 K.를 압도한다. 마을에서 성으로 가는 길은 성에서 멀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가까워지는 것도 아닌 형태로 K.를 지치게 한다. 마을에서도 성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성의 특성은 고관인 클람을 통해 가장 명시적으로 노출된다. 그는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프로테우스적 존재라고 엠리히도 지적했지만 마을에 올 때와 갈 때가 다르고 맥주를 마시기 전과 마시고 난 후가 다르며 잠잘 때와 깨어 있을 때가, 혼자 있을 때와 대화중일 때가 다른 변화무쌍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올가는 말한다. K.는 클람의 전 애인인 프리다와 정사를 벌이는데 클람의 세력은 공사에 구분이 없어서 K.의 침실에까지 그의 세력을 미치는 초월적인 존재로 드러난다. 마을사람들과도 면담한 적이 한번도 없다는 술집 여주인의 말은 그와의 면담을 원하는 K.의 의지를 좌절시키기에 족한 것이다. 클람의 존재는 K.에게 불운의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다.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바르나바스를 통해 편지를 보냄으로써 늘 K.를 감시한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클람의 정체는 술집 여주인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K.와는 불가분의 숙명적 관계임이 드러난다.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이 불행해지는 일도 없었으며 일이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아서 우두커니 서 있지 않아도 됐고 (……) 또한 클람이 없었더라면 당신은 인생에 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았을 거에요. (……) 이 모든 것을 보아도 충분히 클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 당신은 과거를 잊어버리려고 노력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몸을 돌보지 않고 일을 하지도 않았을 거에요. (……) 또한 모든 것을 무시하더라도 클람은 당신의 병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불행해지는 일"이란 말을 술집 여주인의 견해로서 이 같은 그녀의 주장은 클람의 애인 프리다와 결혼하려는 K.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 당국과 접촉하려는 최대의 목표 앞에서 여자에게 관심을 돌리는 K.의 행위에서는 에로스적 욕망 속에서 자기파괴를 실현하는 카프카 인물들의 특성이 반복되고 있다. 동시에 프리다를 이용해 성에 접근하려는 의도를 보임으로써 애정과는 무관하게 여자를 물화시키는 자세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투명하면서도 일체의 삶을 지배하는 성의 모습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 같은 클람의 분위기를 통해 전달된다. 모호하고 불투명한 것은 K.에게도 적용되는 특징이다. 그는 성을 자신이 도달해야 하는 영역으로 인식하면서도 나는 투쟁하기 위해 여기 왔다고 말함으로써 성을 투쟁 대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성』의 전편을 통해 성과 접촉하여 측량사로서 채용되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이는 동시에 그는 이미 3장에서 프리다를 안 직후 그녀에게 "클람을 버리고 내 애인이 되어주시오"라고 말하면서 자신이 몰려오는 적 앞에 노출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여자는 적과의 투쟁을 위한 선전포고의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권력자 클람으로부터 프리다를 탈취함으로써 에로스를 투쟁의 방편으로 누리는 것이다. 한편으로 K.의 투쟁이 지닌 이중성은 성에 도달하려는 열망 외에 성에 종속되지 않고 항상 자유인으로 있기를 원하는 데서도 드러나고 있다.
『성』의 몽상적인 흐름을 본 독자가 느끼는 의문은 도대체 성은 실체로 존재하는 대상인가, K.는 정말 측량기사로 초대받았는가 하는 점이다. 우선 성의 정체는 K.가 접하는 여러 가지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모호한 본질을 보여준다. K. 자신의 체험이나 그 체험에 대한 해석, 다른 쪽의 정보나 이에 대한 해석이 모두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로 클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는 면장에 의해 당신이 채용되었다는 것은 당신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됨으로써 그 가치가 의문시되고, 이런 견해는 다시 술집 여주인에 의해 무시된다. 더구나 K.는 뭐든지 오해하는 버릇을 지닌 인물임으로 그의 시각으로 독자에게 비쳐지는 성의 모습은 확실하지 않다. K.가 측량기사로 초대되었다는 증거도 그 자신의 주장 외에는 분명하지 않다.
과거부터 같이 일하던 그의 조수들이 클람으로부터 파견된 것이 틀림없다는 프리다의 주장에 K.가 반박하지 못하는 것도 서에 대한 K.의 이중적인 태도와 더불어 성의 초월적인 성격을 말해주고 있다.
텍스트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정황들을 볼 때 성은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것은 부친 콤플렉스에서 각인된 작가의 동경과 불안의 산물로 여겨진다. 동시에 성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형상화한 것으로 보여진다. 성에 대한 K.의 투쟁이 개인의 소외를 강요하는 외부세계에서 자유로운 존재의 가능성 여부를 진단한 것이라면 성의 기형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 비밀을 찾는 K.의 시도도 좌절된다는 작품구조는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작가의 비관적인 인식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소송 (Der Prozeß, 1915)
카프카는 펠리체와 파혼하고 난 직후에 『소송 Der Prozeß』의 집필을 시작하는데, 이 작품은 그의 사후인 1925년에 가서 막스 브로트에 의해 발표된 장편이다.
은행지배인 유제프 K.는 30회 생일날 아침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가운데 체포당한다. 체포는 되었지만 일상생활은 계속 이어가는 형태였다. 그는 체포 시에 방이 어지렵혀진 것을 옆방의 뷔르스트너 양에게 사과하며 공격적인 애무를 한다. 그러나 법정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고 법정에 가서는 자신을 보호하며 법정을 마음껏 야유한다. 법정은 온갖 불투명한 것 투성이어서 몇 시에 오라는 것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막상 찾아가 보아도 어둡고 답답한 것이 마치 미로와 같다. 그는 체포당국과 접촉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실패하고 만다. 또한 소송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법정에 관계되는 여인들, 법정소속 화가, 변호사, 교도신부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지만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31회 생일 전날밤에 찾아온 처형관들에게 채석장으로 끌려가 아무런 절차도 없이 살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제기되는 핵심적인 문제는 과연 요제프 K.는 유죄인가 하는 것이다. 그는 시종일관 자신의 죄를 부인한다. 오히려 법정에 가서는 "죄는 이 조직과 고관들에게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죄를 부인하면 할 수록 그는 죄의 혐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죄를 시인하는 길만이 소송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즉 부인유죄, 시인무죄라는 공식이 성립되는 셈이다. 여기서 법정세계의 인물들 중 누구에 의해서도 유죄의 증거로 제시되는 것은 오직 주인공 자신의 법에 대한 '무지'와 '죄의 부인' 뿐이기 때문이다. 다만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그가 유죄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그는 거짓말을 하며, 스스로 동정하던 감시인들을 '개'라고 칭하며, 어머니를 벌써 몇 년째 찾아보지도 않았고, 직장으로 찾아온 사촌 여동생도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송을 위해 뇌물로 매수를 하려는 의도까지 갖고 있다.
하지만 의식 속의 행동과는 달리 무의식적인 반응에서는 죄를 부인하지 못하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그는 아는 검사에게 전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기피하고, 검사와의 요트놀이도 거절하며, 마지막 장에서 처형관들이 방문할 때는 미리 예고도 없었는데도 기다린 듯이 검은 예복을 입고 대기하는 형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 자신은 일기에서 『실종자』의 카를 로스만을 '무죄인'이라고 표현한 데 비해 요제프 K.는 '유죄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작품이 펠리체와의 약혼 직후 쓰여졌고 카프카가 파혼에 대해 죄의식을 느꼈다는 사실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요제프 K.가 31회 생일 전날 파혼을 결심하며 파혼이 이루어진 베를린의 호텔방을 '법정'이라고까지 표현한 바 있다. 요컨대 순수세계를 지키기 위해 결혼을 포기했지만 이것은 동시에 외부세계에 대한, 즉 소속으로서의 존재에 대한 죄의식을 낳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 자신이 언급하는 요제프 K.의 '유죄', 작품 내에서 거론되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죄가 자아의 분열에 의한 내면의 반영에 기인한다고 할 때, 관심은 그를 체포하고 처형하는 법정의 정체로 향하게 된다. 우선 법정은 정체가 불투명하고, 확인되는 면모는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K.를 감시하는 감시인들은 그의 밥을 먹어치우고 내의를 훔쳤다는 이유로 태형을 당하며, K.가 확인한 법전은 포르노 사진첩으로 밝혀진다. 또 피고인 K.자신의 집무실보다 훨씬 초라한 판사의 방은 어두컴컴한 지붕 밑의 다락방에 위치해 있고, 변화사의 방은 이보다 더 비참해서 바다그이 구멍으로 사람의 발이 빠지면 아래층의 천정으로 그 발이 보일 정도이다. 카프카가 이 작품을 쓴 후에 친구들 앞에서 1장을 낭독했을 때, 모두들 웃음을 참지 못했으며 카프카 자신도 너무 웃어서 낭독을 계속하지 못할 정도였다는 브로트의 증언을 보면 『소송』에서의 희극성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문제는 이 희극성이 웃음으로 지속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카프카에게서의 희극성은 '검은 유머'라는 지적대로 갑자기 웃음을 정지시키고 싸늘한 침묵이나 잔인한 공포를 유발하는데, 법정세계 역시 우스꽝스러운 외관과는 달리 시종 숨막힐 정도로 피고를 조여 오는 잔인한 본질을 노출한다. 피고에게 재판시기나 장소도 알려 주지 않는 불친절 외에도 현기증을 안겨 주며, 결정적인 권한이 있는 최고 재판소는 일체의 접근을 불허하기 때문이다. 이런 법정에서 피고가 느끼는 것은 '배멀리'와 도저히 빠져 나갈 길이 없다는 축구부재의 확인이다.
그러므로 '검은 유머'는 웃음이 아니라 웃음을 차단시키는 역할을 한다. 앞에서 『변신 Die Verwandlung』에서 지배인이 도망치는 꼴은 우습고 권력층이라는 점에서 후련하기까지 하지만, 동시에 그로 인해 그레고르와 그의 수입에 의존하는 가족의 미래가 암담해지는 것처럼 법정의 특성 하나하나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끔찍한 속성을 보여준다. "카프카에서의 유머는 웃어야 할 지 진지하게 있어야 할 지 모르게 한다"는 엠리히(Wihelm Emrich)의 주장대로 법정의 모습은 끔찍하다는 점에서 희극성이 부인된다. 그렇다고 비극적인 것도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외관에서 비극성이 부인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K.를 체포하는 법정당국의 정체는 불투명한 가운데 비우호적이고 적대적이며 여러 가지 면에서 죄를 다룰 자격이 없는 우스꽝스러운 외관을 지니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권력과 잔인함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접근을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피고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다. 카프카의 작품이 대개 그렇듯이 K.가 아무리 시도를 해봐도 대화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그것의 단절에 기여할 뿐이다.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뿐만 아니라 K.자신의 내면에서도 기인하고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을 체포한 당국과 투쟁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국에 도움을 받으려고 함으로써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여준다. 또한 의식적으로는 무죄라고 주장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는 죄인처럼 행동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황에서 그의 윤리상의 죄가 드러나는 사실을 볼 때, 정상을 벗어나고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법정 역시 실제의 법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이 사회 속에 투영된, 자신의 생존방식을 보는 K.의 자의식의 반영이라는 것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출구부재의 환경은 법정이 지닌 냉혹함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내면에서도 불기피한 일면이 있는 것이다.
윤리적 죄는 K.의 퍼스낼리티와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카프카는 아포리즘에서 인간의 으뜸가는 죄를 '성급함'과 '태만'이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K.가 법정과 투쟁하면서 보여주는 모습에서는 부단히 성급한 태도와 태만한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법정을 자기 추측대로 찾아가는 것이나 변호사와 해약, 소송이 진행되는데도 여자들에게 관심을 돌리는 것, 은행장 대리와의 관계, 상인 블로크를 대하는 태도, 모친에 대한 냉담 등 그의 모든 관행은 카프카 자신이 말한 으뜸가는 죄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 사회에 보여준 성급함은 바로 그 사회에 의해 모든 재판절차가 무시된 채 그를 처형하는 성급함으로 되돌아오는 것이다.
본 작품의 해석을 둘러싼 핵심은 여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그는 시종일관 여자들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이는데, 카프카의 모든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진정한 애정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가 아니라 충동적이다. 물론 창녀의 속성을 지닌 여자들 쪽에서 유혹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의 성애는 공격적이며 독신자답게 결혼과는 무관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여자들로부터 성적충동을 받고 벌이는 성애 외에 그가 여자들에게서 필요로 하는 것은 애정이 아니라 소송을 위해 무슨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이기적인 것들이다. 뷔르스터너양이나 레니와의 관계도 그녀들이 소송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설 때는 주저 없이 버리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K.의 성애는 애정과는 유리된 탈인간화의 것이고, 여자를 목적을 위한 단순한 수단으로서 물화시키는 속성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법정사환의 부인을 빼앗겼을 때는 법정과의 투쟁에서 맞이한 '최초의 명백한 패배'로 인식하는 데서 이런 자취는 발견된다.
K.의 성애에는 육체의 소멸을 암시하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특징이 있다. 가령 엠리히는 뷔르스트너양의 '식도'에 키스한 K.가 식도를 잡힌 채 칼을 맞는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는데, 다음은 K.가 1장에서 뷔르스트너양과 연출하는 성애장면과 10장에서 처형되는 장면이다.
"알았어요, 가요"하고 K.는 말하더니 뒤따라가서는 그녀를 부둥켜안고 그녀의 입과 얼굴에다 마구 키스를 했다. 그것은 마치 목마른 짐승이 마침내 발견한 샘물에 혀를 빼고 덤벼드는 것 같았다. 나중에는 식도 부위의 목에다 키스를 하고 오랫동안 입술을 대고 있었다.
그러나 한 남자의 손이 K.의 식도를 누르는 동안 다른 사람은 그의 가슴 깊숙이 칼을 꽂고 두 번 회전시켰다.
식도에 키스를 한 K.의 식도가 집행관의 손에 눌리는 체스쳐를 통해 이미 K.의 성애는 죽음과 소송에서의 파멸을 예고해 준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성애와 죽음의 혼합은 삶을 향유하려는 성욕과 이 외부적 삶의 형태에 대한 반대성향, 즉 죽음의 욕망, 두 방향에 대한 분리된 자아의 흔들림이라고 여겨진다. 환언하면 이것은 에로스로 표현되는 외부사회 지향의 자아와 타나토스를 지향하는 순수세계의 자아로 분열된 나머지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고 두 방향을 동시에 추구하다 좌절하는 카프카적 양가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K.는 또한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양방향을 쫓다 하나도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뷔르스트너양과 만나고 온 뒤 '만족했지만 좀더 만족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법정사환의 부인과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 그녀를 빼앗기로 만다. 삶과 죽음의 양방향의 자아를 쫓는 K.는 죽음에서도 만족할 만한 성취감을 맛보지 못한다. 우선 체포된 직후 갑자기 그는 자살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며 처형장으로 끌려갈 때는 집행관들을 끌다시피 하고, 심지어 처형 직전에도 자살의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생과 사의 앰비벨런스를 가장 극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K.는 자기 머리 위에서 칼이 오고갈 때 그것을 빼앗아 들고 자기 가슴을 찔러 버리는 것이 자기 의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K.는 그런 짓은 하지 않고 자유스럽게 목을 돌리며 주위의 동정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확인되듯이 자신의 의무라고 느끼는 자살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는다. 의식 속의 의도는 발동되지 못하고 무의식적인 행위가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자살이 의무라는 의식 속의 자각은 죽음 직전까지 '자유스럽게 목을 돌려 주위를 살피는' 무의식적인 삶의 애착으로 분열되어 나타난다. 죽음 역시 동경의 대상이지만 성취되지는 못한다. 죽음은 K.의 내면세계에서 소망되지만 동시에 처형될 때까지 자아에 의해 끝까지 수용되지 않는 양면성을 지니는 것이다. 소송의 전과정을 통해 죽음과 더 친숙한 태도를 취하지만, 죽음으로써 추구부재의 공간을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은 보여주지 못한다. 소송에서 K.가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를 유일한 길은 화가 티토렐리의 제안에서 감지된다. 그는 소송문제를 조언해 주는데 있어 가장 사실적인 논리를 지니고 있어 열쇠가 되는 핵심적 인물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가 K.에게 열거하는 방법은 진정한 무제선고, 형식상의 무죄선고, 그리고 지연작전 세 가지가 있는데, 진정한 무죄선고는 일단 배제된다. 이것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최고재판소만이 내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 형식상의 무죄선고는 별다른 수고가 필요 없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일시적인 무죄선고일 뿐이다. 즉 무죄가 되면 다시 체포되고, 다시 무죄가 되고 또 체포되고 하는 식으로 끝없는 악순환을 계속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끝없이 바위를 산꼭대기로 굴려 올려야만 생존할 수 있는 시지프스의 형상을 닮고 고달프고 긴장된 방법이지만 악순환이 계속되는 동안 삶은 이어지는 결정적 장점이 있다. 바로 이것이 요제프 K.에게 주어진 유일한 출구하고 보여진다.
지연작전은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고 늘 긴장 속에서 피곤하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것으로 앞의 방법과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유죄선고를 막아주지만 동시에 진정한 무죄선고도 저지한다는 데 핵심이 있다 할 것이다. 이 두가지 가능성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은행지배인으로서의 K.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본주의 경쟁적인 생존형태로서 자유를 포기한 종속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K.는 티톨렐리가 제시한 방법을 진정한 무죄선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죄선고가 불가능하듯이, 이런 형태 외의 존재방식은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긴장되고 피곤하며 종속적이지만 삶을 지탱해 주는 가능한 생존방식과 타협을 거부하고 불가능한 방법을 고집하다 좌절한다는 점에서 그의 운명은 비극적이다. 『소송』의 전체적인 구조는 고유한 '존재'를 지향하는 순수자아와 '소속'을 지향하는 사회적 존재의 갈등을 다루는 카프카의 문학적 명제를 예시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법을 필요로 하면서 그 법 때문에 파멸하는 『법 앞에서 』의 시골사람 같이 요제프 K.는 소송으로 뒤덮인 세계 속에 살고자 하면서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싶어하는, 그 세계에 의해 처형된다. 다시 말해 그는 이 세계와 더불어 생존할 수도, 이 세계를 떠나서 생존할 수도 없는 것이다.
시골의사 (Ein Landarzt, 1917)
밤의 종소리를 듣고 나이 든 시골의사는 중환자에게 불려간다. 그곳까지 가기 위해 그는 마차를 끌 새 말 한 마리가 필요한데 그것은 그의 말이 과로로 인해 죽었기 때문이다. 하녀는 동네사람들에게 말을 빌리려고 하지만 눈보라가 치는 밤에 말을 빌려 줄 사람이 없었다. 이때 갑자기 돼지우리에서 튼튼한 말 두 마리가 나타난다. 이어 낯선 마부가 말을 마차에 메고는 마차를 출발시킨다. 의사는 짐승 같은 마부에게 하녀 로자를 맡기는 것이 싫어서 가기를 거절하지만 이미 마차는 환자의 집에 도착해 있다.
처음에 보니 환자는 전혀 아픈 게 아니다. 그러나 말들이 창문을 통해 방안으로 고개를 디밀고 있을 때 다시 확인하니 환자인 소년의 엉덩이에는 치료할 수 없는 커다란 상처가 나 있다. 환자의 집에서도 의사는 로자에 대한 격정을 멈출 수가 없다. 이번에는 의사 자신이 환자가 되어 소년의 옆에 눕혀진다. 소년의 부모와 누이가 이 과정을 지켜보는 가운데 학교 합창대의 이상한 노래가 들려 온다. 소년은 의사의 무능을 비난한다. 주변 상황이 위협적으로 변함에 따라 의사는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채 서둘러 마차에 오른다. 그러나 말들이 올 때와는 달리 천천히 마차를 끄는 가운데 합창대의 노랫소리가 뒤를 따른다.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의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눈 내리는 한밤의 벌판에서 헤맨다.
이 단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기적인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일인칭 화자로 나오는 시골의사는 트리쉬에서 실제로 시골의사로 있었던 카프카의 외삼촌 지그프리트 뢰비의 특징을 지녔다는 점이다. 앞에서 간단히 소개된 대로 그는 카프카가 가장 따르는 삼촌이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쓰여진 1917년에는 펠리체와의 두 번째 약혼이 있었고, 8월에는 결핵으로 인한 최초의 각혈이 있었다. 12월에 들어서 카프카는 재차 파혼을 하게 된다.
시골의사에게는 대치된 두 영역이 존재한다. 하나는 하녀 로자와 독신자로 살아가는 의사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눈보라가 치는 먼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환자의 집이다. 여기서 밤에 그를 호출하는 종소리는 작가인 카프카 본래의 자아인 작가적 존재로부터의 부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고 카프카는 문학에서 자신의 본래 사명을 찾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술적 존재와 사회적 존재 사이의 갈등이라는 중심 테마가 여전히 카프카를 괴롭히던 이 무렵은 결혼에 대한 갈등이 각혈로 인해 한층 더 심화된 시기이고, 이런 정신적 배경이 시골의사가 움직이는 공간에 투영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독신자로 하녀와 살아가는 공간은 소외된 영역이다. 의사는 아무에게서도 말을 빌릴 수 없는 동네에서 고립된 채 하녀인 로자의 소중함도 모르며 살아왔다. 그런데 로자에 대한 인식은 짐승 같은 마부가 등장함으로써 새롭게 그를 괴롭힌다. 환자에게 가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면전에서 하녀를 덥석 끌어안고 얼굴을 갖다 대는 마부 때문에 그는 출발을 포기하려고 한다. 거기에 가는 대가로서 하녀를 헐값에 넘겨주고 싶은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자와 자기의 문학적 존재의 결합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쉽사리 약혼을 포기하지 못하는 작가의식과 동일하다. 약혼자와의 결합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면서도 쉽사리 포기하지 않듯이 작품 끝까지 의사는 로자에 대한 걱정을 금하지 못한다. 작가로서의 삶에 대한 대가는 관능적 삶의 포기이지만, 평생 여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와 마찬가지로 의사는 로자에게 집착하다가 두 영역의 중간지대에서 실종되고 마는 것이다. 로자가 마부를 피해 문을 모조리 걸어 잠그고 실내로 숨은 뒤 환자의 집으로 향하는 그 순간에 의사의 귀에 들리는 것은 마부의 습격으로 산산히 부서지는 문소리이다. 자신의 본분을 찾으러 가는 그 순간에도 에로스적인 삶을 강하게 의식하는 것이다.
그를 환자의 집으로 데려다 주는 말들은 비지상적인 것들이다. 그 자신의 말이 죽은 것은 문학적 영감이 죽었다는 것으로 풀이되는데 미지의 영감의 힘이 등장하여 그를 본래의 자아와 만나게 해준다. 따라서 환자는 의사와 동일한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하녀와 살아온 의사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껍데기 자아라면 환자는 본래의 자아이다. 이것은 그가 환자 곁에 누운 뒤 들리는 목소리를 통해 선명하게 묘사되어 있다.
"알겠느냐?" 나의 귓속에다 대고 소곤대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나는 너를 별로 믿지 않는다. 너도 또한 네 발로 온 것이 아니라, 그 어느 곳엔가 내던져졌을 뿐이다. 도와주는 대신에 너는 나의 죽음의 자리를 좁게만 해주고 있다."
이것은 분열된 두 자아의 관계에서 이해할 때 자아 내면의 독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본래의 자아로 귀환한 뒤에도 자신을 하녀를 약탈당한 의사로 규정하는 등, 끊임없이 로자를 돌아보는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순수자아인 환자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는 핀잔을 듣는다고 볼 수 있다. 환자와 로자는 상호대치된 영역의 상징들이다. 작가적 부름이라 할 환자치료 때문에 로자와의 관계가 방해받는다면 순수자아인 환자는 로자에 대한 의사의 집착 때문에 방해받는다. 환자의 상처가 장미빛이라는 것은 로자로 대표되는 에로스적 삶이 작가적 존재를 방해한다는 의식이 투영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카프카의 발병이 약혼을 종국적으로 포기하게 하듯이 의사는 환자의 병 때문에 로자와 궁극적으로 이별하게 된다. 그런데 그가 로자를 계속 돌아보게 되는 것은 환자의 흔들리는 태도에도 기인한다. 소년은 "죽게 내버려 둬라"고 하다가 다시 "살려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의사의 눈에도 환자는 건강한 것으로 보였다가 다시 커다란 상처가 발견되기도 한다. 작가적 삶과 지상적 존재의 사이에서 여자문제가 카프카를 시종 괴롭혔듯이 환자의 상처에 대한 판단도 계속 흔들린다. 심지어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제 로자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소년이 죽고 싶다고 한 말은 옳고 타당했다. 나 역시 죽고 싶다. 끝없는 겨울, 여기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단 말인가? 내 말은 죽어 버렸고 마을에서는 말을 빌려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나의 밤의 종소리의 도움을 빌어 온 지방이 나를 괴롭혀 왔는데, 이제는 로자조차 희생시켜야 했다. 여러 해 동안 내게서 주의조차 듣지 않은 그 처녀, 나의 집에서 살아온 그 아름다운 처녀를 - 이 희생은 너무 크다. (……) 최선의 의지로서도 로자를 나에게 들려줄 수 없는 이 가족들 …….
로자에 대한 걱정은 본래의 영역에서 다시 사회적 삶에 대해 집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영역의 대표자인 의사와 환자는 갈등의 구조에서 너무 지쳐 둘 다 죽고 싶어한다. 또한 환자의 상처는 치료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사로서의 그는 그곳에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러니 '무엇을 한단 말인가?'라는 자문이 생기는 것이다. 더욱이 자신의 본문을 찾아왔지만 그로서도 치료는 불가능했고 대신 로자만 마부에게 빼앗겼다. 그것은 '너무 큰' 희생이다. 두 세계의 틈바구니에서 흔들린 결과는 어느 곳에도 소속하지 못하고 한겨울의 무주공간에서 떠도는 운명으로 결말지어진다.
의사를 각성시켜 주는 계기는 자신의 것이 아닌 미지의 것들이다. 가령 "그 자의 옷을 벗기라, 그러면 나으리니, 그래도 낫지 않으면 그를 죽이라"고 노래하는 합창대와 비지상적인 말들이다. 이것들을 통해 자신의 본래영역에 돌아왔지만 자신의 의술도 잃었고 로자도 잃어버린 운명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이렇게 집에 갈 수 없다. 꽃 피어나는 나의 찬란한 의술은 사라져 버렸다. (……) 발가숭이로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에 몸을 내맡겼다. 현세의 마차와 비현세의 말을 몰아 이 늙은 사나이 나는 빙빙 돌고 있다. (……) 속았구나, 속았구나! 한번 밤 종소리가 울린 것을 따르다니. 다시는 결코 돌이킬 수 없다.
"이 불행한 시대의 혹한"이라는 표현은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를 일깨워 주는 분위기를 담고 있다. 본분으로서의 의사의 옷을 벗긴 그는 벌거벗은 채 의사 역할도 끝난 늙은이로서 빙빙 도는 처지에 놓여 있다. 어느 세계로도 돌아가지 못하는 그는 두 세계의 중간지대를 빙빙 돌며 한겨울의 혹한을 견뎌야 하는 운명에 빠진 것이다. 작가적 세계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 그것 때문에 일상의 삶을 포기했지만 스스로에게 속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그 결정은 늙은이로서는 그대로 종국적인 성격을 갖기에 돌이킬 수 없다는 인식이 그를 덮치는 것이다. 결국 두 개의 자아에 대한 양방향의 집착은 동일성을 상실하는 불행한 시대를 인식시켜 주고 그 결과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는 혹한의 추위를 안겨준 채 무주공간에서 떨게 하는 비극적 운명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유형지에서 (In der Strafkolonie, 1914)
어느 탐험 여행가가 유형지를 방문했다. 여기서 근무하는 장교는 자신이 긍지를 갖고 능숙하게 다루는 처형기계로 어느 죄수의 처형을 보여주려고 한다. 재판관이면서 동시에 처형관인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기계의 우수하고 완벽한 성능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죄수는 야간보초 중 잠이 든 것과 상관에게 들켰는데도 사과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 유일한 죄목이었다. 기계를 다루는 장교는 어떤 범죄건 확실하기 때문에 조사나 심문이 필요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죄수로 끌려온 사병에게는 변명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처형기계는 죄수의 몸에 그가 위반한 죄목을 바늘로 기록하고 몸에서 흐르는 피를 닦도록 고안된 장치이다. 12시간이 지나면 죄수는 죽어서 구덩이로 던져지게 되어 있다. 이런 처형제도는 전임 사령관이 애착을 갖고 실시하던 것인데, 그가 죽고 신임사령관이 부임한 이후에는 논란거리여서 장교는 탐험가에게 이 제도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탐험가는 거절한다. 탐험가를 납득시키기 위해서 장교는 죄수를 석방하고 자신이 직접 기계 속으로 들어가 눕는다. 그런데 기계는 정상적인 작동을 하지 않는다. 장교는 고문하는 대신 죽여 버리는 것이다.
이 단편의 주제는 비인간적인 권력제도가 갖는 정의의 극단적인 왜곡으로 보인다. 권력 자신의 전체주의적인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의 전통을 고집하거나 사이비 종교적인 광신적 수단에 의존하는 맹종성, 맹목성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치국가의 모든 사법제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입법, 사법, 집행 등 모든 것이 기계를 담당하는 장교의 한 손아귀에 들어 있다. 또한 피고의 죄는 처음부터 확고부동하게 결정되어 있다. 왜냐하면 장교가 말하듯 '어떤 범되건 의심할 여지없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이런 세계에서의 처형은 이미 범죄 자체와는 무관하다. 장교가 내리는 판결은 완전무결하고 이의제기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죽은 전임사령관을 광신적으로 숭배하는 장교는 한계를 모르는 권력에 종속되어 왜곡된 정의의 이념으로 가득 차 있는 인물이다. 그의 맹종은 스스로 처형기계에 누워 희생될 만큼 광적인 것이다. 그러나 최고의 판결을 정확하게 수행해야 할 기계는 예기치 못한 불완전한 작동을 보여준다. 법제도의 충실한 수호자이며 신봉자인 장교가 스스로 완벽하다고 믿는 제도에 의해 희생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믿음이 미혹이고 착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죽는다. 『소송 Der Prozeß』의 요제프 K.와 장교는 법에 대한 전도된 관계를 보여주는 일면이 있다. 즉 K.가 법에 의해 '무지한' 결과로 죽는 데 비해 장교는 법을 신봉하면서 수호하는 법의 종사자로 희생되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법 앞에서』의 시골사람이 좀더 확실한 대비가 되고 있다. 그가 법을 구경하기 위해, 법의 내부를 보기 위해 평생 기다리다 죽는다면, 장교는 평생 법을 지키고 법대로 살다가 죽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왜곡된 정의가 스스로 지양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자기미망에 사로잡힌 채 스스로 법의 정신을 오해하여 정의의 왜곡된 제도에 맹종하다가 그 제도 자체가 허물어지는 의미인 것이다. 장교가 상징하는 왜곡된 정의는 무의미하고 허망한 종말을 통해 그 실체를 스스로 입증하고 있다. 그의 '살아 있을 때 그대로의' 죽은 모습은 그처럼 그가 확언하던 구원의 징조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문학적 자기처단의 기록으로 보는 브로트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장교의 죽음은 외부세계에 종속되어 집착한 카프카의 자기처단이라는 형상으로 비유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이 복종하는 제도를 따르다가 그 제도에 의해 파멸하는 장교는 이부세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절망적인 최후를 암시해 준다. 그가 구원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표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탐험가의 역할은 예술을 지향하는 자아의 한 변형으로 보여진다. 예술가가 과학자의 얼굴로 등장했다는 한 가지 가정을 해보면, 이 사람이 유형지의 비인간성과 잘못된 법제도에 반대하면서도 간여하지 않는 태도에서 우리는 유형지처럼 소외와 모순투성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외부사회로 향하려는 자아를 적극 제지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함을 느낄 수 있다.
탐험가는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떤 낯선 사정에 결정적인 간섭을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이다. 탐험가는 이 유형지의 주민도, 유형지를 통치하는 국가의 국민도 아니었다. 그래서 이런 사형에 대해 찬성하지 않는다는 뜻을 표하거나 그걸 방해하려고 한다면 너는 외국인이니 까 잠자코 있으라고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면 거기에 더 이상 답변할 여지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런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생각이 막혀 버렸다. 견문을 넓히려고 여행을 하는 것이지, 남의 나라의 재판제도를 개혁하겠다는 당치도 않는 의도는 조금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곳의 여러가지 사정은 역시 호기심을 끄는 것이었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 자신만의 주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죄수는 사실 자기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남이며, 동족도 아니거니와 동정할 만한 인물도 아니었다.
서술시점의 기준이 되는 탐험가의 태도는 확실히 방관적이다. 재판수속이 부당하며 사형집행이 비인도적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유형지의 주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연의 진리와 세계의 진실을 파헤치는 탐험가 본연의 의무를 저버리는 모습을 노출하고 있다. 장교의 확신이 옳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죽은 얼굴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지만, 탐험가는 유형지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제도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적어도 옳지 않다고 말할 과학자의 진실에 대한 용기마저도 결여한 채 서둘러 섬을 떠난다. 더구나 기계담당 사병과 풀려난 죄수가 함께 데려다 달라고 애원하는데도 이들을 유형지에 두고 가버린다.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태도에서 장교와 탐험가는 대조적이다. 잘못된 믿음이지만 장교는 강한 추진력을 갖고 확고부동한 자세인 데 비해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추진할 용기를 탐험가는 갖고 있지 못하다. 끝까지 관찰자로 남을 뿐이다.
탐험가가 카프카의 예술적 자아의 입장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외부세계에 대한 강한 부정의 의지를 못 가진 방관자의 우유부단한 태도이다. 즉 어느 하나의 세계에 소속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양가치적 자아의 소산이라고 보여진다. 이 세계가 모순된 제도로 가득 차 있고 그 속에서의 정의가 왜곡되었으며 곳곳에서 비인간적인 잔인함이 드러나 있고 이런 잔인한 세계의 제도를 추종한 결과가 허무한 파멸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대항할 엄두를 못 낼 뿐 아니라, 세계를 진실하게 개선할 예술가로서의 의무마저 포기하는 연약한 의지의 형상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이 작품이 살인기구의 기능을 통해 전쟁을 풍자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고 나치즘의 강제수용소를 예언한 것이라는 풀이도 있지만, 이것이 『소송』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예술과 삶이라는 분열적 위기를 한참 겪는 시점에 쓰여졌다는 배경을 생각하면 장교와 탐험가라는 대조적인 인물이 한 공간에서 연출되는 묘사를 볼 때, 내외 세계의 분열적 관점에서 보는 견해가 보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특히 법과 제도의 무거운 주제가 일단락된 뒤 탐험가가 유형지를 떠나기 전의 묘사가 일상의 진부한 찌꺼기들을 보여줌으로써, 카프카에게 되풀이하여 나타나듯이 최후의 승리는 외부사회의 삶이 차지한다는 결말구조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Ein Bericht fur eine Akademie, 1917)
1917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단편은 E. T. A 호프만의 『개 베르간차의 최근 운명에 관한 보고』와 빌헬름 하우프의 『젊은 영국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연극으로도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다. 국내에서 1970년대부터 80년대에 걸쳐 장기 흥행에 성공한 추송웅의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은 바로 이것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변신』과는 반대로 여기서는 동물의 인간화가 다루어지고 있다.
인간화된 원숭이 빨간 피터는 학자들의 모임에서 요구한 바에 따라 원숭이로서의 전생(前生)과 자신의 인간화에 대해 강연을 한다. 그는 인습적인 아카데미의 정중한 어법을 노련하게 구사하며 대단한 능변으로 이 과제를 완주한다. 그는 자기도취로 가득 차 있고 힘겹게 도달한 신분에 대단한 긍지를 보인다. 다른 작품과는 달리 여기서는 카프카와 주인공의 동일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원숭이 빨간 피터는 교양도 아직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이고, 일종의 벼락 출세를 한 입장에서 과잉 적응을 한 시각으로 자신의 체험을 언급하기 때문에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요컨대 그는 자기기만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자기과거를 회고하면서 동물상태로 있을 때의 자유를 과대평가하는데 사실 그의 기억이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는 사냥꾼들에게 포획되어 배에 실린 시점이다.
현재의 피터의 지위는 무대 위에서의 쇼 공연가인데 이것 역시 그에게 진정한 자유의 상태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에 갇힌 고통스러운 삶이 그에게 이런 상태를 '출구'로서 강요한 결과이다. 그가 포획되어 실려온 배는 그에게 '생애 처음으로 출구 없는' 상황을 안겨 주었고, 그는 '출구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원숭이로 남기를 포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출구'라는 것은 자기실현의 길이 아니라 강요된 적응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귀향』이나 『시골의사 Ein Landarzt』, 『성 Das Schloß』 등에 나타나듯, 카프카의 많은 주인공들이 부닥치는 잘못된 도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숭이가 아니지만 진정한 인간도 아니다. 대용품으로서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잡종일 뿐이다. 그것은 낮과 밤이 다른 이중생활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낮에는 쇼 무대에서 공연을 하지만 밤에는 침팬지와 동침함으로써 동물의 본성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어설픈 인간화는 이 작품이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조롱이라는 유력한 해석을 가능하게 해준다. 동시에 문명이라는 애매한 표현 속에 감추어진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나 불안전성을 풍자한 것으로 볼 수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간 피터가 인간세계로 진입했다는 증거들은 대체로 외형적인 것들이다. 침뱉기라든가 악수, 소주 마시기 등의 인간적인 관습들은 그가 인간세계의 일원임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인간화의 표피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들이다. 즉 이것은 자기를 과시하는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인간의 자유는 철봉곡예사의 운동의 자유로 야유되기도 한다. 즉 극히 좁은 공간에서의 단조로운 반복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 으른바 인간의 자유가 지닌 한계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빨간 피터가 인간화 과정의 교육을 위해 많은 선생을 필요로 했다는 것은 인습을 풍자한 것으로 보여진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는 카프카의 작품에서는 드물게 작가와 주인공의 동일성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관계로 본서의 테마인 내외세계의 분열로 접근하기보다는 지금까지 연구된 해석 중 앞에서 언급되지 않은 몇 가지만 소개해 보기로 하겠다.
1. 정신분석학적인 연구에서는 술을 마신다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원숭이가 인간세계로 수용되는 것을 작가가 성인 남자의 사회로 진입하는 것에 비유한다. 빨간 피터는 포획시에 총 두 방을 맞는데, 한 방은 음부 부위에 상처를 주고 이것은 카프카의 거세공포로 풀이된다. 우리에서 견뎌내야만 하는 고통은 카프카의 성적궁핍으로 여겨진다. 카프카는 아동기 체험의 여파로 성적억압의 고통을 당한 바 있는데 원숭이가 완전한 인간이 못 되었다는 것은 정상적인 욕구 분출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2. 이 단편은 개종을 통해 환경에 적응하려는 유대인의 동화 노력에 대한 풍자이다.
3. 인간과는 별개의 종(種)에 소속된 것처럼 보는 카프카 자신의 체험과 자신의 성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묘사된 것이다.
4. 인간의 사회화를 풍자한 것이다. 성공적인 순화과정은 빨간 피터가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공연예술가로 부상하는 대목에서 절정에 달한다.
(출처 : http://www.woosuk.hs.kr/~kafka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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