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박완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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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목마른 계절(季節)'의 세계

鄭奎雄

 

 

 

  박완서는 특이한 감성을 지닌 작가이다. 그 감성은 어떤 기교나 꾸밈도 거부한다. 그 특이한 감성 때문에 우리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그 소설 속에 나타나는 시대와 상황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든지 아니든지, 또 우리가 겪었든지 안 겪었든지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그가 어떤 시대, 어떤 상황, 또는 어떤 주인공을 내세우거나 누구나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훌륭하게 보편화시킬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을 갖추고 있음을 뜻한다. 소설의 상업화 현상과 몇몇 상업적인 소설에 나타나는 기교와 꾸밈의 감성이 비판적으로 논의되고 있는 요즘에 상업주의의 관점에서 이야기되지 않아도 좋을 박 완서의 소설들이 널리 읽히고 있음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작가 생활을 시작한 뒤에 첫 장편 소설인「목마른 계절」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면서도 재미 속에 빠져들게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던 해인 1950년 6월부터 그 이듬해 5월까지 한 해 동안의 이야기를 달마다 나누어 엮고 있다.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이데올로기라는 허상이 삶의 실상을 얼마나 파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작가 자신이 후기에서 <곳곳에 체험이 너무 생경하게 노출돼 있다>고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대학의 신입생으로 등장하는 주인공 하진의 상황을 작가 자신의 체험과 굳이 관련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이 작가 자신이 겪은 것이거나 아니거나 그 이야기는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개인적인 질병이 아닌> 것이라면 시대의 상혼으로서 충분히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육이오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육이오를 겪지 않은 세대들에게까지 폭넓게 공감을 줄 수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문학 작품에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는 것만큼 까다로운 일은 없다. 옳고 그름에 대한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도 어렵지만 자칫하면 작가의 주관이 객관적인 진실을 외면하게 될 가능성마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이데올로기의 전쟁이라는 육이오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제약을 딛고 넘어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작품이 지니는 가장 큰 강점이다.

 

  육이오라는 거대한 비극의 서곡을 알리는 전쟁의 소리를 들으면서 주인공 하진의 이렇게 생각한다. <전쟁이 살육과 파괴만이 목적이 아닐진대 반드시 썩고 묵은 질서의 붕괴와 찬란한 새로운 질서의 교체가 뒤따를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하진의 친구 향아가 말한 대로 <세상에 널린 숱한 불공평에 대한 분노>에서 출발한 것일 테지만 본질적으로는 실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저네들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막연한 환상인 셈이다. 그러한 환상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하진은 석달 동안의 빨갱이 세상에서 뼈저리게 겪는다. 그리하여 하진은 공산주의 세계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네들이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확인한다. 그것은 소녀다운 감상에서 시작한 것만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는 전쟁을 만들고 비극을 만들 뿐이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무런 기능도 가질 수 없음이 하진의 의식을 통하여 투영된다. 그가 그런 의식을 갖게 되기까지에는 그의 오빠인 열과 친구 향아의 약혼자인 민준식의 존재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하진은 육이오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열과 준식에게 똑같은 거부 반응을 느낀다. 열에게는 좌익 학생 운동을 하다가 전향하여 자자분한 가정의 행복에 빠져 버리는 데에 대한 못땅함이며. 준식에게는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 고생이란 걸 모르고 자라나 국회의원의 딸인 향아와 정략 약혼한 데에 대한 반발이다. 그러나 열이 가정의 행복에 빠져든 것이나 준식의 정략 약혼이나, 이데올로기의 전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에 견주어볼 때에 그것은 평범한 삶의 한 단면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하진의 빨갱이 치하에서 <빨갱이>의 모습으로 만난 준식에게 <같이 빨갱이 짓을 고만두자>고 권하기에 이른다. 이와 같은 하진과 준식의 모습은 이데올로기의 전쟁에 희생되는 우리 민족의 비극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할 갈림길에서 이들 남녀가 보인 태도는 매우 중요한 뜻을 지닌다.

 

  하진은 <당이 자기들 편이라고 믿고 있는 무산 계급도 결코 공화국의 하늘 아래서 행복하지 않다는 확증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봐 두고 싶었다>하고 하며, 준식은 <내 몸뚱이가 노동자의 몽뚱이와 어떻게 다른가를 벌거벗고 비교하는 일은 아주 필요한 일이야. 적어도 나에게는 도저히 거역할 수 없어>하고 말한다. 여기서 그네들이 저마다 어느 쪽을 택했는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로 하여금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상황이다. 왜냐하면 양쪽을 다 취하거나 양쪽을 다 버리는 것이 이들에게는, 아니 그러한 상황에서의 모든 우리 민족에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이면서도 또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넘어서는 삶 그 자체의 문제이다. 비극의 서곡을 알리는 전쟁의 소리를 꿈꿨던 하진의 환상은 마침내 이데올로기와 전쟁에 대한 극도의 혐오증으로 뻗친다. 걱정없이 살 수 있는 삶, 곧 공포심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삶,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싸움이나 전쟁이 없음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하진은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그가 육이오 전쟁을 통하여 느낄 수 있었던 유일한 편안함을 <빨갱이 나라에 살고 있는지 흰둥이 나라에 살고 있는지 그것조차 분간이 안 되는> 상황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역설을 낳는다.

 

  하진의 이 같은 생각의 변모는 일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성장에 따른 것만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그것은 하진뿐만이 아니라 육이오 전쟁을 겪었던 우리 모든 민족이 겪었음직한 생각의 변모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이데올로기의 허상과 전쟁의 비극에 대한 보편적인 진지는 인민군에게 오빠가 사살당하고 그 때문에 어머니가 미쳐버리는 비극을 겪은 하진의 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된다.

 

   "툭하면 <자유 민주주의를 위해서라면>, 저쪽편에선 <수령이나 사회주의 낙원을 위해서라면> 일전도 불사할 결의를 보여야만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치졸한 애국 애족에서 깨어나 좀더 깊이 생각하게 될 거예요. 결국 이데올로기라는 것도 사람을 잘 살게 하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낸 거지 이데올로기 나고 사람 난 건 아니잖나 하고."

 

   그러한 진술은 이데올로기가 제 아무리 그럴 듯한 명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명분을 내세워 인간의 삶을 파괴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러나 「목마른 계절」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데올로기의 문제만을 내세운 작품은 물론 아니다. 그러한 문제를 떠나서라도 우리는 이 작품에서 삶의 여러 가지 본질적인 문제와 부딪칠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이 작품은 극적인 요소와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함께 지니고 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그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이 차분하게, 그러나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음은 박 완서가 지닌 특별한 재능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박완서의 단편들

金榮茂

 

 

 우리 나가 여성 작가들 가운데서 박완서만큼 안이한 소시민적 인생관과 삶의 방식에 대해 강렬한 반발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도 드믈 터인데, 그것은 그가 뛰어난 현실 감각을 갖춘 여성이며, 섬세한 감수성과 아울러 삶을 바라보는 구체적이고 건강한 눈과 건전한 상식을 함께 지닌 양식 있는 작가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 각자의 개인적인 삶 속에 들어와 있는 사회적인 요소들을 가장 철저히 깨닫고 있는 여성 소설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 나라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서 물처럼 흔하게 발견되는 사치한 감정의 관념적 갈등, 생활의 무게와 실감이 전혀 얹혀 있지 않은 자기 만족적인 감상적 자의식과 고민 따위를 말끔히 쓸어버린 자리에 박완서의 소설은 서 있다.

 

  실상 내가 독자에게 관심있게 봐 주기를 바란 것은 누가 행복하게 되고 누가 불행하게 됐나보다는, 어떠어떠한 것들이 허 성씨가의 조용한 몰락에 작용했나 하는 것이다. 부자도 가난뱅이도 아닌 보통으로 사는 사람의 생활과 양심의 몰락을 통해 우리가 사는 시대의 정직한 단면을 보여 주고자 했을 뿐이다.

 

  이것은 1976년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휘청거리는 오후」를 끝내면서 작가 박완서가 한 말 가운데 한 토막이다. 이 글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소설가로서의 박완서의 주요 관심 가운데 하나는 오늘날 우리의 사회가 개인과 사회를 어떻게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마비시키고 타락시키는가 하는 문제, 이런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착하고 순한 <보통> 사람들을 어떻게 소리도 없이 몰락시켜 버리는가 하는 문제들을 날카롭게 파헤쳐 보여 주는 작업이다.

 

  같은 해 겨울에 발표한 단편 「조그만 체험기(記體驗)」에서도 그는 이런 문제를 다시 한번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실감나게 생생해서 검찰청과 구치소 주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에 관한 단순한 고발이나 증언쯤으로 이해될 가능성이 없지 않으나, 이 소설에서 작가가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은 오늘날 우리 사회 전체의 이지러진 정신 구조, 이러한 사회 구조가 개개인에게 요구하는 비뚤어진 삶의 방식, 이런 삶의 방식이 모르는 사이에 가져오는 개인 및 사회의 몰락과 파면 등 매우 포괄적이고 심각한 것들이다.

 

  이 소설을 통해 드러난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떤 것인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그 머저리 우리의 밥이더라>하는 식의 일종의 비웃음의 소리가 되는 사회, 빽 있는 놈은 빽으로 빽 없는 사람은 그들 나름의 부정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 강변호사나 권주임처럼 철면피한 사람들이 판을 치고 출세하는 사회, 칼이나 총이 결코 칼이나 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듯이 <법이 결코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의 편일 수는 없다는 깨달음>을 주는 사회, 다시 말해서 어떤 믿을 만한 질서나 규범에 의해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맨홀에 빠지는 것과 같이 재수없는 사람만 봉변을 당하고 달리 하소연할 곳도 별로 없는 <으슥한 골목길> 같은 세상이 이 작품의 소설적 문맥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된 우리 사회의 발가벗은 현실이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올바름에 토대를 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질서와 규범의 밑받침이 없는 이러한 사회는 마땅히 따질 곳에서 따질 것을 따지는 사람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따지냐>고 걸레쪽처럼 주눅들게 만들며 모든 인간적인 존엄성과 위엄이 발붙일 수 없게 만든다.

 

    면회하기 위해 내가 통과해야 하는 절차와 사람을 가시 철망으로 생각하면 됐다. 가시 철망치고도 땅에 낮게 드리운 가시 철망이라고, 그 가시 철망을 상처입지 않고 통과하는 길은 오로지 구더기처럼 그 밑을 기는 길밖에 없다고, 행여 구더기 이상의 고급 동물인 척 머리를 들다간 만신창이 되기 꼭 알맞다고 알아차리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답게 살려는 모든 노력과 사람으로서의 긍지를 포기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는 이런 고장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구더기가 되어야 하며, 모든 인간적인 부끄러움을 잃은 채, 강변호사처럼 <거 참 이상한데요. 암만해도 이상해요 작가의 남편이 상인, 이래도 이상하고, 상인의 부인이 작가, 이래도 이상하고> 하는 식으로 문제의 핵심에는 관심이 없고 남의 삶에 대한 <속기스러운 호기심과 안이한 이해 방법>에 젖어 살아가게 된다.

 

  사람을 겁주고 더 나아가서 걸레쪽처럼 주눅들게 하는 사회와 그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에 따라 작중 설자(說者)이며 소설가인 <나>도 다른 재소자들의 어머니와 누이와 아내들처럼 주민등록증과 함께 오백원권을 내밀 줄 알게 길들여졌고, 구더기처럼 길 줄도 아는 처지로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조용히 몰락해 버렸다. 이렇게 몰락한 <나>는 오늘의 사회 현실이 자신에게서 앗아간 인간적 긍지와 위엄 앞에서 억울함을 느끼며, <억눌리고 약한 자가 스스로의 긍지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으로 가지는 <오기>마저 꺾어야 살아 남을 수 있는 이 고장이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황폐한 삶의 현장임을 깨닫는다.

 

  「조그만 체험기」와 비슷한 현실 조명을 보여 주는 작품으로「연인들」이 있다. 대학생인 <나>는 어느 날 여자 친구가 먼저 건너간 육교를 건너려나 순경의 가로막음 때문에 건너갈 수 없게 된다. 순경은 통행 금지의 까닭을 전혀 설명하지 않고 무뚝뚝하기만 하다. <갈길이 막혀 고이고 있는 게 막힌 하수구의 구정물이 아니라 바로 사람이란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까닭도 모르고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사람들이 불평을 한다. 그러나 그런 불평은 순경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의 응얼거림으로 그치기가 일쑤였다.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고작 <비겁한 쑥덕공론>밖에 못 하는 사람들 때문에 더욱 참을 수 없게 된 젊은 <나>는 <용기를 내서> 순경 앞으로 다가선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느냐고 따진다. 그러나 순경은 그의 따짐을 묵살해 버린다.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억울하지 않을 자유>마저 없는 고장에서는 이와 같이 마땅히 따질 곳에서 따질 것을 따지는 당연한 일을 하는 데에도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며, 설사 용기를 내서 그 당연한 일을 했다 해도 <뭐 이런 게 다 있어> 하는 식의 대접을 받게 된다.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 비정상적이고 시건방진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자신의 항의가 묵살당하자 더욱 화가 난 <나>는 순경의 제지를 <묵살>하고 육교의 층계를 뛰어 오르지만 우악스런 순경에게 뒷덜미를 잡히고 만다. <나>는 순경에 의해 길가에 내동댕이쳐지고, 사람들은 재미있다는 듯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구경에 열중한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법과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불법과 비리는 합리화하는 이런 현실에서 사람들은 현실에 단순히 순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실과 손을 잡고 비리를 공모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하는 식의<비열의 철학>을 터득하여 고분고분 잘 길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제 <나>는 <내가 이미 그 길들이기 음모의 교활한 톱니바퀴에 말려들었다는 사실>과 <내가 속한 사회가 이렇게 잘 길들여진 사람들에 의하여 참여되고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기게 이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오늘 우리의 사회를 이렇게 사람다운 사람이 발붙이고 살기 힘든 황폐한 고장으로 만들어 버렸는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원인과 숱한 사연들이 있겠으나, 그 결정적인 원인 가운데 하나는 오늘 우리의 사회가 분단된 나라의 냉전적 사고방식 위에 서 있는 사회라는 사실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라는 단편에서 박완서는 분단시대의 냉전적 현실 구조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위축시키고 황폐화시키는지를 극명히 밝혀 보여 준다.

 

  이 작품은 남편이 화가인 설희 엄마네의 어려운 생활과 ××청의 만년 계장인 남편과 친정 어머니를 모신 <나>의 가정 생활이라는 두 가닥의 이야기가 얽혀서 전개되는 소설이다. 어느 날 <나>의 식구들은 모 정보 기관에 차례차례 연행되어 심문을 박게 된다. <그곳에는 나의 과거와 현재, 또 삼십 팔 년 동안 살아오면서 맺은 온갖 인연, 지연의 말초적인 부분까지가 유리 상자에 표본처럼 질서 있게 정리돼 있었다. …… 6·25때 피난갔던 외가댁 마을 이름까지, 또 비교적 손이 번성했던 외가의 허구 많은 사촌에서 십 몇 촌까지의 친척 이름까지 낱낱이> 조사되어 있었다. 연행의 까닭인즉 6·25때 의용군으로 끌려간 <나>의 오빠가 곧 간첩으로 남파되리라는 정보가 들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나>의 식구들에게는 대문에서 인기척만 들려도 겁이 덜컥 나는 불안한 나날이 시작되었고, 남편은 간첩 처남을 두었기 때문에 승진도 못하고 언제 직장에서 쫓겨날지 모른다면 마구 술을 퍼마시고 하루하루 난폭해져 간다.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기도> 했던 남편은 이와 같이 정신적으로 파면하기 시작했고, <나>와 어머니는 오빠가 휴전선을 넘어오다 차라리 총에 맞아 죽기를 바라기에 이른다. <간첩이 된 혈연과의 상봉이 몰고 올 사건과의 당면이 두려운 나머지, 18평 블록집 속의 안일이 소중한 나머지, 어머니와 나는 마녀보다도 더 잔인해>진 것이다.

 

  사람을 정신적·윤리적으로 타락시키고 마비시키는 이러한 사회는 또한 늘 아름다운 물빛 항아리를 그리던 설희 아빠라는 예술가를 미국의 어느 보험회사 사원으로 몰락시킨 사회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에이 지긋지긋해. 살아가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걸치적대는 것도 많은 놈의 세상‥‥‥당신이나 나나 어디로 이민이나 갈까?> 하는 식의 절실한 외침을 터뜨리게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현실은 천근의 무게로 턱뼈를 눌러 꼭 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주는 틀니, 우리 몸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동화될 수 없는 틀니가 주는 아픔과 거북함으로 개개인의 삶을 구석구석까지 압박한다. 그리하여 주인공인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또 하나의 틀니의 중압감 밑에 옴짝달싹 못 하고 놓여진>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조그만 체험기」「연인들」「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등 몇 편의 단편을 중심으로 뛰어난 현실 감각과 섬세한 감수성과 건전한 상식을 아울러 갖춘 여성 작가 박완서의 소설 세계의 핵심적인 한 면모를 거칠게나마 살펴보았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은 위에서 검토한 작품들에서처럼 주로 사람답게 사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병든 사회에서 개인 개인이 겪게 되는 좌절과 패배, 이러한 현실에 대한 깨달음과 반항, 반항의 좌절 등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인공들은 덫에 걸려 있는 또는 울에 갇혀 있는 짐승처럼 절망하기도 하고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 몸부림치기도 한다.

 

     그런데 「겨울 나들이」는 박완서의 또 다른 일면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야무지고 매섭고 때로는 지나치게 앙칼진 사회 비판의 목소리를 계속 들려줌으로써 너그러움과 사람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듣고 있는 이 작가의 다른 대부분의 단편들에 비해, 「겨울 나들이」는 따뜻하고 다정한 손길이 주는 안온함과 너그러움 같은 것, 삶에 대한 궁극적인 애정 같은 것을 감동적으로 전해 준다.

 

  작정 설자인 <나>의 남편은 6·25때 아내와 생이별한 뒤 딸 하나를 데리고 홀로 남하한 꽤 개성 있는 화가다. 어느 날 <나>는 남편이 모델로 삼아 그리는 출가한 딸(전처의 딸)의 모습에서 남편과 이별했을 당시의 전처의 영상 같은 것을 읽어 내고는 일종의 배반감 같은 것을 느낀다. <홀아비와 어미 없는 어린 것을 궁기를 닦아 내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게 큰 허탕을 친 것> 같은, 이제까지의 삶이 말짱 헛 살아온 삶인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떠나 인적 없는 겨울 유원지의 어떤 여인숙에 들게 되고, 이 여인숙 여주인과 시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보람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온다. 이상이 <나>를 중심으로 한 이 작품의 겉으로 드러난 줄거리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표면적인 줄거리 밑에 여인숙 여주인의 이야기라는 또 하나의 속 이야기를 안고 있다. 겉 이야기와 속 이야기라는 두 가닥의 이야기가 서로 겹치고 대조되는 데서 이 소설은 새로운 의미의 차원으로 뛰어 오른다. 두 이야기가 만나는 표면적인 계기는 <내>가 여인숙에 감으로써 마련되지만, 이 두 이야기를 보다 깊은 곳에서 이어 주는 내면적인 연결의 고리는 6·25의 비극이다.

 

  여인숙 여주인의 시어머니는 6·25때 바로 눈앞에서 아들이 총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참혹한 광경을 목격하고는 그 충격으로 체머리를 흔드는 고질병을 앓게 된다. 잠잘 때는 빼고는 계속 도리질을 하는 시어머니를 위해 이십 오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온갖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 온 며느리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젠 고쳐 드려야겠다는 생각보단 도와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도와 드리다니요? 어떻게요?

  "당신 임의로는 못 하시는 일이고, 얼마나 힘이 드시겠어요. 삼시 잡숫는 거라도 정성껏    잡숫게 해드리고 몸 편케 보살펴 드리고, 뭐, 그런 거죠, 대사업을 완수하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그거야 못 해 드리겠어요."

 

   <나>는 허구한 날 체머리나 흔드는 일을 <대사업>이라는 여주인의 얼굴에서 <정말 대사업을 힘껏 보필하는 이의 사명감과 긍지> 같은 것이 <은은히 빛나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 <어쩌면 이 아주머니야말로 대사업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여인숙 아주머니와의 대화 중에 <나>는 <문득 남편이 서럽도록 보고 싶어>지는 그리움에 휩싸이게 되는데,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정말로 위대한 일, 참으로 고귀하고 값진 일이 무엇인지에 대한 깨달음을 얻어 정신적으로 성숙해진 <나>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감정이다. <여지껏 악착같이 집착했던, 내가 이룩한 생활을 헌신짝처럼 차 버리고 훨훨 자유로와 지고 싶어서> 떠난 여행에서 <나>는 이제까지의 삶――<이북에 노부모와 아내를 남겨두고 어린 딸 하나만 업고 내려온 빈털터리‥‥‥직업도 불안정한 무명 화가를 불쌍해 하다가 그만 사랑하게 돼서 결혼까지 하고, 홀아비와 어미 없는 어린것의 궁기를 닦아 내고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온> 것이, 결코 헛 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마주잡고 있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는 <나>의 행위는 이러한 깨달음을 밑받침으로 하고 있는 것이어서 자연스럽고 감동적이다.

 

   남남끼리이면서 가장 친한 두 손, 대사업의 동업자끼리이기도 한 이 두 손 사이를 맥맥히    흐르는 그 무엇을 직접 내 손으로 맥짚어 보고, 느끼고, 오래 기억해 두고 싶었다. 마치     이 세상 온갖 것 중 허망하지 않은 단 하나의 것에 닿아 볼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    회라도 되는 듯이 나는 감지덕지 그 일을 했다. 거칠지만 푸근한 두 손 위에 내 유약한  한 손이 경건하게 보태졌다.

 

   시어머니가 받은 심리적 타격과 체머리라는 고질병을 대사업으로 여기고 힘 자라는 데까지 거들고 있는 며느리의 삶이 정말 엄숙하고 고귀한 <대사업>이듯이, 남편이 받은 정신적 상처와 짐을 정성껏 보살펴 온 <나>의 삶도 한없이 고귀한 것이다. 그리고 인정과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없을 것 같아 보이는 황량하고 싸늘하게 얼어 버린 겨울 유원지에 뜻밖에도 가장 값진 사랑의 관계로 맺어진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살듯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겉보기에 아주 하찮은 것 같은 관계와 사물들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겨울 나들이」의 주인공 <나>는 자신을 에워싼 허망한 듯한 현실을 박차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나들이를 떠났고 이 나들이에서 가장 귀중한 삶의 진리 가운데 하나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어느 영국 작가의 다음과 같은 말과 궤를 같이하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인간은 생명 있는 고향에 살 때 자유로운 것이지 방황하거나 도망갈 때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인간은 생생하고 유기적이고 믿음을 가진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채 실현 안 된,  어쩌면 채 인식조차 되지 않은 어떤 목적을 실천하려고 활동하고 있을 때 자유로운 것이다.

 

  〔로렌스(D. H. Lawrence〕의 산문「The Sprit of Place」중에서〕

 

 

   이렇게 볼 때 박완서는 날카로운 사회 비평가의 분노에 찬 매서운 목소리와 사람들 사이에 맥맥히 흐르는 참다운 사랑의 소중함을 이야기하는 자상하고 다정한 목소리――얼핏보기에 대립되는 두 가지의 음색을 갖춘 작가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박완서에 있어 상호 견제적인 것으로서, 그의 소설이 지나치게 폐쇄적이고 도식적인 사회 소설이나 교훈적 설화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 주며 동시에 온갖 막연한 감상주의의 입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지해 준다.

 

     우리는 박완서의 작품이 어떤 식으로 시작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주목함으로써 그의 소설의 성격을 어느 정도 어림해 볼 수 있다.

 

   많이 늙었다. 이마에 늘어진 머리카락 속에 몇 가닥의 흰머리도 보인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그가 좋다. ‥‥‥그가 좋아서 막 신바람이 날 만큼 그렇게 좋다.

 

  돈을 잘 버는 남편을 가졌다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이요, 자랑일까?

  가난했던 게 바로 일 년 전쯤인데 아니 아주 형편이 핀 건 바로 올가을쯤부터인데 어쩌면 가난은 그렇게 멀고 구질구질한 것일까? (「歲暮」)

 

  "나한테 업히지 않겠어요?" 그 여편네는 정말 나에게 등까지 들어댄다. ……나는 이 진창길에 긴 치마에 고무신 차림으로 들어서고 만 것이다. 이미 버선이나 신 꼴을 돌보기는 단념하고 있었지만 이곳 진창은 그저 진창과는 달라 그 저변에 집요한 흡인력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문제였다. 내발을 빨아들여 남게 마련이었다. 다시 고무신 속에 발을 넣어 끌어  올리자니 그 고초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니 내 보행인들 얼마나 더뎠겠는가?(「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던 남편이 통금시간이 지나도 안 들어올 때 보통 아내들은 어떤 걱정을 할까?

  대개 교통사고 아니면 으슥한 골목길에 입을 벌리고 있을지도 모를 맨홀을 걱정하리라, 나도 이 두 가지 걱정을 번갈아 하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조그만 體驗記」)

 

   박완서 소설은 다른 작가들이 흔히 쓰는 어떤 풍경 묘사나 일기 설명으로 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위에 든 예문처럼 시작되는 것이 보통이다(물론 언제나 이런 식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종류의 서두가 특징적으로 눈에 띈다는 얘기다). 박완서가 즐겨 쓰는 이런 서두를 성경에 나오는 다음 구절과 비교해 볼 때 우리는 놀라운 유사성을 발견하게 된다.

   어떤 여인에게 은전 열닢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닢을 잃었다면 그 여자는 등불을 켜고 집안을 온통 쓸며 그 돈을 찾기까지 샅샅이 다 뒤지지 않겠는가? 그러다가 돈을 찾게 되면"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은전을 찾았습니다." 하며 친구들과 이웃들을 모두 불러모으지 않겠는가? (「누가 복음」15:8∼9)

 

   성서학자들, 특히 양식(樣式)비평의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이론에 따르면 이야기가 이런 식의 물음의 형식으로 시작되면 그것은 그 이야기가 비유(gleichnis)의 양식을 취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비유의 양식적 특징은 무엇인가? 이유는 흔히 누구나 다 아는 일,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 항상 언제나 되풀이되는 일, 즉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일들이나 현상들을 이야기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유에는 대개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일상성의 법칙성이 깃들어 있는 바, 이러한 사실에서 비유의 고유한 논증력 내지 설득력이 생겨난다. 그러나 비유 중에는 전형적이고 일상적인 사건이나 현상이 아닌 비상한,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는 사건들이 묘사되는 그런 비유도 물론 있다. 이런 종류의 비유를 양식 비평가들은 특히 패러블(parable)이라고 부른다. 패라블은 애초부터 비유임을 숨김없이 밝히는 명백한 비유와는 달리 사실 보도를 위장한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컨데,

 

   한 고을에 두 사람이 살았다. 한 사람은 부유하고 한 사람은 가난했다. 그 부자는 상당히 많은 양과 염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가난한 자는 그가 사들인 어린 양 한 마리 외에는 가진 것이 없었다. 그는 이것을 키웠고 그것은 그와 그의 자녀들에게서 자랐다. 그것은 그의 밥을 먹고 그의 음료를 마셨으며 그의 품에서 자고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딸과 같았다.

  그때 그 부자에게 손님이 왔다. 그는 자신의 양들 또는 염소들 중에서 하나를 취하여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까웠다. 그리하여 그는 그 가난한 자의 어린양을 취하여 그를

방문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대접했다. (「사무엘서」하 12:1∼4)

 

   이것은 예언자 나단이 다윗왕에게 들려 준 가난한 자의 어린 양에 관한 패러블이다. 다윗은 헷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탐내고 있었는데, 우리아는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운다. 난처해진 다윗은 우리아를 계획적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아 버린다. 이때 나단이 다윗에게 위에 인용한 이야기를 들려 준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나단의 이야기가 자신을 빗대어 규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 까닭은 이 이야기가 비유로서 곧 이해될 만한 특징을 제공하지 않고 마치 실제 어떤 곳에서 일어났던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기 때문이다. 나단은 의도적으로 사실 보도인지 비유인지 분간키 어려운 이야기를 매우 상세히 긴장된 언어로 전달했던 것이다. 패러블의 묘미와 특징이 바로 이런 데 있다.

 

  그리고 패러블을 포함한 모든 비유는 그 비유가 매개되는 실제적인 사건의 순수한 사실성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성 속에 하나의 상(像)으로 들어 있는 보다 깊은 현실에 관여한다.

 

  우리가 앞에 열거한    의 소설 첫머리 부분들은 이미 지적한 대로 비유 양식의 특징적 서두들이다. 「조그만 체험기」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 작품이 발표되고 얼마 뒤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둘러싸고 약간의 잡음이 있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던 일이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 있는데 이것은 이 소설이 지니는 비유적 특징, 특히 사실보도와 비유의 경계가 교묘히 은폐된 패러블의 특징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생긴 웃지 못할 한 토막의 일화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은 단순히 검찰청과 구치소 주변의 부조리라는 사실성을 관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비유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점은 앞에서 지적한 대로다. 박완서의 작품 중 비교적 성공적인 작품 가운데는 이런 비유적 양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많다는 사실은 그의 소설들에 짙게 배어 있는 강한 도덕적 정열과 무관한 것이 아닌 것 같아 자못 흥미롭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 현실에 대한 증언이며 동시에 그 사회 현실로 대표되는 어떤 전체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적 비유를 이루는 이 작가의 뛰어난 소설들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소할 것 같은 현실적 사건과 인물을 통해,

 

   무명폭처럼 좁은 하늘,

   언제적 내린 눈인지 녹지도 않고 먼지만 겹겹이 뒤집어쓰고 있어 흡사 더러운 흩이불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눈,

    찌개 냄비 속의 멸치처럼 눈을 동자 없이 하얗게 뒤집어쓴 추한 주검과 냄새나는 가난,

   대낮에 계란 파크를 뒤집어쓰고 나자빠졌는 흡사 합성 섬유의 누더기 같은 여편네의 꼴,

   세상을 되는 뒷박이 좀 후할 법도 한데,

   간장 종지처럼 작고 소박한 자유

 

 등등의 표현 속에서 생활의 무게와 실감을 그대로 간직한 채 리얼하게 제시된다.

  또한 통금시간이 지나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을 때 아내들은 대개 교통 사고나 <으슥한 골목길>에 입을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맨홀을 걱정할 것이라는  의 서두로 시작되는 「조그만 체험기」, 천신만고 끝에 한 쪽을 뽑으면 다른 쪽 발이 진창에 박히고, 나일론 끈으로 신발을 질끈 동여매거나 장화를 신어야 건널 수 있는 <집요한 흡인력>을 가진 진창길의 묘사로( ) 시작되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틀니」,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기분 좋아하기 전에, 참기름을 사던 때의 버릇으로 <이 온천물이 진짜일까 가짜일까>를 심각하게 의심한다로 시작되는 「겨울 나들이」의 도입부 등등은 그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사회 현실의 내면적 구조――으슥한 골목길같이 혹은 헤어나기 어려운 진창길같이 믿을 만한 어떤 질서나 규범이 해체된 상태의 사회 현실에 대한 상징적 의미마저 획득한다.

 

    우리는 박완서가 개인의 삶이 얼마나 사회와 밀착되어 있으며, 개인개인이 겪는 슬픔과 기쁨, 아픔과 환희, 성공과 실패가 사회 현실의 전체적인 문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아울러, 구체적인 생활 체험에 뿌리를 내린 날카로운 직관력과 만만치 않은 언어 감각을 함께 갖춘 훌륭한 작가 가운데 하나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성공적인 소설들은 개인과 사회라는 추상적인 실체들의 관념적인 상호 작용의 해부에 머물지 않고, 개인의 가장 깊은 내면적 충동과 두려움 속에서 구체적인 현실과 개인의 의식이 어떻게 만나며 매듭을 이루는가, 이런 매듭 안에서 어떻게 개인과 사회가 동시에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마비되고 내적으로 붕괴하는가 하는 통찰을 보여 준다는 것도 살펴보았다. 또한  떳떳하고 건강한 삶의 가능성이 소멸된 답답한 현실에서 자유로워지려는 개성적 인간들의 힘찬 내면적 <반란>,  그러한 반란의 좌절,  <어떡하든 너는 이 사회에 순응해서 이득을 보는 사람이 돼야지 괜히 사회의 병폐란 병폐는 도맡아 허풍을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지 말 것을 가르치는 사회가 약속하는 행복이 허상(虛像)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 허상의 덫에 걸린 소시민들의 조용한 몰락 과정,   내면적으로 붕괴된 속물들에 대한 강한 모멸,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서럽고 서러운 일인가> 하는 식의 삶의 근원적 외로움과 슬픔에 대한 인식 등등이 박 완서 소설의 기본적 체험 구조를 이루고 있음은 이미 암시한 바와 같다.

 

  그러나 많은 경우 그의 소설은 여러 사람의 지적대로 다분히 교훈적이고 도식적이며 인물 창조에 있어 지나친 과장과 난폭한 단순화 및 희화화로 흐르는 경향이 또한 없지 않다(이것은 그의 소설의 패러블적 특성과도 관계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을 만한 규범과 질서가 붕괴된 사회의 모습을 제시하는 데는 뛰어난 솜씨를 보이면서도 그러한 사회와 개인의 갈등을 다루는 자세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단순하고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입장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희망의 빛이라고는 한 가닥도 없는 것 같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개인은 언제나 무기력하고 패배와 좌절만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 더 나아가서는 우리의 삶이란 것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은 「겨울 나들이」의 여인숙 여주인의 경우가 잘 입증해 주는 바이기도 하다. 남편의 참혹한 죽음을 견뎌야 했고, 이십 오년 간이나 체머리를 흔들고 있는 병든 시어머니를 돌봐야 했으며, 또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느라고 온갖 아픔과 어려움을 겪어야 했지만 그녀는 인간의 착한 본 마음과 손상되지 않은 건강한 인간성과 마음의 평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인간의 모습은 극히 예외적으로 뛰어난 존재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의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온갖 인위적인 지배와 조직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본래 이 여인같이 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박완서는 이런 인간상을 단 한 번밖에 성공적으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뛰어난 현실 감각, 건전한 상식,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건강한 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혼 세상이 낡은 차가 되어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나를 마구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나는 또 다시 그놈의 지긋지긋한 멀미를 느낀 것이다. 그러나 도피하고 굴종해야 할 것으로 느낀 게 아니라 맞서 감당하고 극복해야 할 것이라고 느꼈다. ‥‥‥다시는 비겁하지는 말아야겠다>는 평범하고 시시한 인물들의 다짐에 깊은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삶의 전체적인 진실을 포괄적으로 수용할 수 잇는 참으로 성숙한 눈과 마음을 갖추는 데는 멀리 미치지 못한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런 성숙한 비전을 얻는 날 그의 소설은 그가 바라는 대로 <사람의 속을 꿰뚫어보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날카롭지 않은 맑고 깨끗한 눈이 있는 그리운 얼굴>로, <적의와 그리움이 싱싱하게 갈등하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설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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