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뉴에트 / 모파상(Guy de Maupassant)/ 방곤 옮김
by 송화은율미뉴에트 / 모파상(Guy de Maupassant)
"아무리 큰 불행도 날 슬프게 할 수는 없지요." 하고 장 부리델은 말했다. 그는 회의주의자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 전쟁을 가까이서 목격했어요. 그리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시체를 밟고 넘기도 했어요. 대자연이나 인간의 온갖 엄청난 야수성이 전율 또는 분개로 하여 함성을 지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어떤 조그마한 슬픈 일을 눈으로 볼 때처럼 등골에 소름이 오싹 끼치고,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안겨 주지는 않아요.
두말 할 것 없이, 인간이 체험하는 것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어머니로서는 자식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사나이로서는 어머니를 잃어버리는 거겠지요. 그건 분명히 무섭고 끔찍한 일이요, 정신이 나갈 일이요, 가슴이 미어질 일이긴 해요. 그렇지만 흡사 피가 마구 쏟아지는 큰 상처와 같은 그런 재앙은 쉬 아물게 마련이지요. 그런데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일어난 눈에 잘 띄지 않고 짐작밖에 할 수 없는 사소한 일에서 오는 어떤 은밀한 슬픔이나 불신(不信) 같은 것은, 인간의 고통을 휘저어 갑자기 고뇌의 문을 눈앞에 열어 보이는데, 이건 얼키고 설켜서 좀처럼 치유가 되지 않아요.
고통이 심하여 어쩌 보면 무슨 시련 같기도 하고, 너무나 쥐어짜는 아픔이라 얼른 종잡을 수 없으며, 또한 너무나 끈덕진 괴로움이나 거의 습관처럼 생각되어 마치 고통의 흔적이나 쓰디쓴 입맛, 또는 오랜 시일이 지나야 헤어날 수 있는 환상적인 감작이나 되는 듯이 그대로 가슴 속에 팽개쳐 두기가 일쑤지요.
내 눈앞에는 항상 몇 가지 기억이 떠올라요……. 이런 따위는 여느 사람 같으면 숫제 눈에도 띄지 않았을 터이지만, 내 가슴에는 곧잘 뚫고 들어와서, 마치 빼낼 수 없는 가시 자국처럼 되어 버렸어요.
여러분은 아마도 그런 순간적인 인상에서 시작하여 이렇게 뚜렷이 남아 있는 감정을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울 테지요.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어요.
그것은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생각되는군요. 그러므로 지금 머릿속에 그려 보기만 해도 그 당시의 감동이 새롭게 느껴져요. 나는 올해 나이가 쉰인데, 이 이야기는 내가 아직 젊어서 법률 공부를 하던 때의 일이지요. 나는 그 무렵에 좀 우울하고 꿈 많은 청년으로, 염세적인 철학에 빠져, 시끄러운 친구들과 어울려 소란한 카페에 드나들며 어리석은 계집애들과 상종하는 따위에 맞지 않았어요.
나는 아침이면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내가 가장 즐기는 도락의 하나는 아침 여덟 시쯤에 뤽상부르 임업 시험장을 혼자서 산책하는 것이었어요.
여러분들은 아마 이 임업 시험장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겠지요? 그것은 전세기(世紀)부터 이미 세상에서 잊혀진 정원으로, 노인네의 인자한 미소와도 같은 아늑한 곳이었어요. 우거진 나무 울타리의 무성한 가지가 비좁은 오솔길에 쭉 늘어서 있었으며, 정원사는 커다란 가위로 쉴새없이 그 가지들을 손질하고 있었어요. 마치 소풍을 가는 중학생들처럼 늘어선 어린 나무들이며, 울창한 장미와 과일 나무가 숲을 이룬 가운데 군데군데 여러 가지 꽃이 만발한 꽃밭이 눈에 띄었어요.
내 시선을 송두리째 빼앗은 그 숲 속 한곁에는 꿀벌 일가가 살고 있었어요. 짚으로 된 벌통들은 나뭇가지 사이에 적당한 간격을 두고 하늘을 향해 얌전히 놓이고, 재봉틀 뚜껑 같은 널따란 문이 열러 있었어요. 그리하여 근처의 길가에는 어디나 금빛 꿀벌들이 붕붕거리며 고요한 정원의 주인 아씨로 행세하고 있었는데, 이들이야말로 이 주랑(柱廊) 같은 고요한 숲길의 진정한 산책자가 아니겠어요.
나는 거의 매일같이 이 정원을 찾아와서 의자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어요. 때로는 책을 무릎에 올려 놓고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주위에서 파리 떼가 떠드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해묵은 관목 숲속의 무한한 휴식을 즐기곤 했어요.
그런데 나는 이윽고 이 정원에 드나드는 단골 손님이 나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 우거진 숲 속 한모퉁이 같은 데서 때때로, 몸집이 작달막한 어떤 기이한 노인과 마주치곤 했어요.
그는 승마복 같은 바지에 스페인식의 밤색 프록코트를 두르고 버클이 달린 단화를 신고 있었어요. 넥타이 대신 레이스를 졸라매고, 챙이 넓고 긴 털이 달린 커다란 모자를 쓴 모습이 흡사 노아의 홍수 시절을 연상케 하는 노인이었어요. 그는 몸이 매우 가냘프고 뼈대가 앙상하니 드러났으며, 얼굴을 찌그러뜨리면서 미소를 지어 보였어요. 그리고 끊임없이 눈까풀을 움직이며 눈동자를 번뜩이고 손잡이에 금이 박힌 단장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이 단장에는 굉장한 추억이 서려 있는 듯 싶었어요.
나는 처음에 이 노인을 만나자 꽤 놀랐지만, 나중에는 상당한 흥미거리가 되었어요.
나는 담을 이룬 나무 잎사귀 사이로 노인을 바라보며 멀찌감치 뒤를 밟으면서 그의 눈에 뜨지 않도록 숲 모퉁이를 돌아갈 적마다 발길을 멈추곤 했어요.
하루는 그 노인이 자기 혼자만 있는 줄 알고, 괴상한 몸놀림을 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깡충깡충 뛰다가 멈춰 서서 한 번 경례를 붙이더니, 성큼 뛰어오르면서 그 가느다란 다리로 짝짜꿍을 하고 나서, 맵시 있게 빙그르르 돌며 괴상한 모습으로 다시 뛰어오른 후에 흡사 여러 관중이라도 앞에 있는 것처럼, 인상을 쓰며 포옹을 하는 듯한 몸짓을 하고 한바탕 웃는 것이었어요. 그러고 이어서 그 인형 같은 초라한 몸을 뒤틀면서 텅 빈 정원을 향해 우스울 정도로 정다운 절을 가볍게 해 보이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는 깜짝 놀라 잠자코 멈춰 서서 분명히 우리 두 사람 중에서 어느 하나가 미쳤구나 했어요. 그리하여 저 노인이 미쳤나, 아니면 내가 미쳤나 입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그러자 그는 갑자기 춤을 멈추더니, 마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하듯이, 앞으로 나갔다가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두 줄의 나무 숲을 향해 희극배우처럼 떨리는 손으로 입맞춤을 해 보이고는 의젓한 산책을 계속하는 것이었어요.
그 후로 나는 잠시도 놓치지 않고, 그 노인의 뒤를 밟아 보았어요. 그리하여 나는 그가 날마다 그 괴상한 짓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네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에게 절을 하고 이렇게 말했어요.
"오늘은 날씨가 꽤 좋군요."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말했어요.
"그래, 꼭 옛날의 그 날씨야!"
한 주일 후에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어요. 그리하여 나는 그의 과거를 알게 되었어요.
노인은 루이 15세 때부터 오페라단에서 무용을 가르쳐 온 분으로, 그 멋진 단장은 끌데르몽 백작이 선사한 것이었어요. 그는 무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면, 입을 다물 줄 모르고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것이었어요.
어느 날 노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을 털어놓았어요.
"나는 라 까스뜨리쓰와 결혼했었지. 원한다면 자네에게 소개해 주지. 그런데 아내는 저녁때라야 이리로 오네. 이 정원은 바로 우리들의 기쁨이자 생명이거든. 옛 것 중에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것뿐이라네. 만일 우리에게 이것마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가는 재미를 잃을 걸세. 나는 여기 오면 젊은 시절과 다름없는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라네. 그래 우리 내외는 언제나 오후를 여기서 보내네. 그런데 난 아침 나절에 미리 이리로 발길을 옮기네. 난 아침에 워낙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니까."
나는 점심을 먹고 다시 뤽상부르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 노인도 와 있었어요.
그는 검은 옷을 걸친 작달막한 할머니에게 점잖게 팔을 내어 맡기고 나를 소개했어요. 할머니가 바로 라 까스뜨리쓰로, 임금님들과 귀공자들을 비롯하여 온세계에 낭만의 달콤한 씨를 뿌리고 다닌, 모든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위대한 무용가였어요. 산뜻한 숲의 숨결에는 여러 가지 꽃 향기가 풍겨오고, 부드러운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흘러들어, 물방울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 군데군데 떨어지곤 했어요. 그리고 라 까스뜨리쓰의 검은 드레스는 햇살이 배어 유난히 번들거렸어요.
정원에는 아무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마차가 굴러가는 소리만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어요.
나는 노인에게 부탁했어요.
"인제 그 미뉴에트 무용의 유래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몸을 한참 떨더니 설명하기 시작했어요.
"미뉴에트는 춤 가운데서 단연 으뜸으로, 이를테면 춤의 여왕이란 말이야. 알겠어? 그러나 임금님들이 없어지면서부터 이 춤도 자취를 감추어 버렸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위엄 있는 태도로 매우 선정적(煽情的)인 긴 무용을 시작하였으나,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나는 그 스텝과 몸놀림과 자세만은 기억해 두고 싶었어요. 노인은 몸이 말을 잘 듣지 않아 혼란을 일으키고는, 화가 나서 짜증을 부리면서 서글픈 얼굴을 했어요. 그러더니 그는 갑자기 엄숙한 태도로 잠잠히 지켜보는 옛 동료를 향해 말했어요.
"엘리지, 어때요? 한번 출래요? 이분에게 미뉴에트가 뭔지 우리 같이 보여 주지 않으려우? 당신 의향은 어때요?"
할멈은 불안한 듯한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고는 말없이 일어나 영감과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어요.
그리하여 나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을 간직하게 되었어요.
두 늙은이가 꼭 어린아이 모양 이리저리 오가면서 히죽거리는가 하면, 서로 몸을 의지하며 공손하게 인사도 하고, 깡충깡충 뛰는 모습이, 흡사 낡은 두 인형이 녹슬은 기계―옛날에는 상당히 정교한 기술자의 손으로 된 것이지만, 지금은 금이 간―의 힘으로 날뛰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커다란 감동을 받았어요. 그리하여 가슴이 설레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애수로 하여 흥분되는 것이었어요. 마치 서글퍼지면서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환상이랄까, 아무튼 1세기쯤 뒤떨어진 어떤 그림자를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리하여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터져 나오는 것이었어요.
이윽고 두 분은 춤을 멈추고 정상으로 돌아오더니 한동안 서로 마주 바라보며 놀라운 표정을 짓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흐느껴 우는 것이었어요.
사흘 후에 나는 지방으로 떠났어요. 그러고는 두 분을 만날 기회가 없었어요. 2년 후 내가 파리에 돌아왔을 때에는 그 임업 시험장은 이미 없어진 뒤였어요. 그 정든 옛 추억의 장소인 정원을 잃은 두 늙은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궁(迷宮)처럼 숲이 우거진 정원의 사라진 옛 향취 같은 그 꾸불꾸불한 오솔길이 잊혀지지 않는군요.
그 두 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을까요? 그리하여 그 망령이 희망을 잃은 망명객처럼, 현대식 거리를 방황하고 있을까요? 그 창백한 망령은 지금도 달 없는 밤 같은 때, 묘지의 나무숲을 누비며, 샛길을 무대로 그 꿈결같은 미뉴에트를 추고 있을까요?
두 분에 대한 추억은 잠시도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마음을 아프게 하여, 무슨 불치의 병이나 되는 것처럼 나의 체내에 살고 있어요. 무슨 까닭일까요? 나로서는 알 수 없어요.
여러분께서는 우스운 일이라고 조롱하실 테지만.
요점 정리
작가 : 모파상(Guy de Maupassant)/ 방곤 옮김
갈래 : 단편 소설, 자연주의 소설
성격 : 문명 비판적, 염세주의적
문체 : 객관적 묘사에 의한 간결체
배경 : 1800년대의 파리 교외
제재 : 무용수 노인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주제 :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비애
구성 : 액자 구성, 4단 구성
외부 액자(도입) : 장 부리델이 회상을 시작함
발단 : 장 부리델과 기이한 노인의 만남
전개 : 노인의 신분이 밝혀짐
절정 : 노부부가 미뉴에트를 춤
결말 : 무용수였던 노인을 추억함
표현상 특징 : 회상의 형식을 취했으며, 사실주의 수법을 사용함, 객관적인 입장에서 인물의 심리 상태를 묘사함
줄거리 : 젊은 시절,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임업 시험장을 산책하면서 자연과 명상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어느 날 기이한 복장에 괴상한 몸짓을 하는 노인을 만나게 된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건네 보고 싶은 충동을 억제할 수 없어서 용기를 내어 유명한 무용수였고, 그 아내 또한 그랬다. 어느 날, 미뉴에트에 대해 설명해 달라는 나의 앞에서 노인 부부는 젊은 날의 추억을 되살리면서 미뉴에트를 춘다. 나는 흡사 낡은 두 인형이 녹슨 기계의 힘으로 날뛰는 듯한 노인 부부를 바라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애수와 감동을 받는다. 노인과 헤어졌다가 2년 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 나는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된 무용수 노인을 잊지 못한다.
내용 연구
회의주의자 : 어떤 일이 진정으로 올바르고 확실한지에 대해 판단을 내리려 하기보다는 의심을 가지고 보려는 사람.
치유(治癒) : 치료를 받아 병을 고침
염세적 : 인생을 비관하고 세상을 덧없이 여기는 것
상종(相從): 서로 친하게 지냄.
임업시험장 : 임업 기술의 시험, 연구, 조사를 목적으로 산림을 육성, 보호하는 곳.
주랑(柱廊) : 나무 기둥이 늘어선 복도
프록코트 : 연미복, 저고리 길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색의 서양식 예복
단장 : 짧은 지팡이
애수(哀愁) : 가슴에 스며드는 슬픔
미궁(迷宮) : 한번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쉽게 찾을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곳
"아무리 큰 불행도 날 슬프게 ~ 알려진 사람이었다. : 장 부리델의 성격을 암시하고, 동시에 염세주의자로 알려진 모파상 자신의 결정론적 인생관을 엿보게 함
그리고 별로 대수롭지 않게 시체를 밟고 넘기도 했어요. : 죽음에조차 별다른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주인공의 회의주의적 행동을 엿보게 하는 대목
대자연이나 인간의 ~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안겨 주지는 않아요. : 큰 아픔이나 슬픔은 오히려 쉽게 잊혀질 수 있다는 역설을 내포한 구절 다시 말해서 재앙이나, 전쟁 같은 것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필연적인 것이기에 오히려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장 부리델은 진정한 슬픔과 감동은 큰 사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일 속에서 발견하는 진실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고통이 심하여 어찌 보면 ~그대로 가슴 속에 팽개쳐 두기가 일쑤지요. : 사소한 일에서 오는 고통을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이 고통은 큰 아픔과는 달리 마음 속에 은밀히 찾아와 남몰래 고통을 주는 시련과도 같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여러분은 아마도 ~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어요 : 진정한 슬픔과 진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내 줄 사건의 시작을 암시하는 부분이다.
나는 올해 나이가 쉰인데 ~ 때의 일지요 : 앞으로의 이야기가 젊은 날의 일시적 감상도, 주관적 판단도 아님을 암시하려는 지은이의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 아득한 곳이었어요. : 임업 시험장은 문명의 손이 아직 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지역이라는 뜻이고, 제목 미뉴에트와 함께 세상에서 잊혀져 가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화자의 아쉬움이 담긴 부분이다.
나는 거의 매일같이 ~ 즐기곤 했어요. : 자연 예찬자의 품성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나는 ~ 마주치곤 했어요. : 이야기의 중심이 화자에서 무용수 노인으로 옮겨져 가는 부분이다. 자연과 명상을 즐기는 장 부리델은 어느 날 자신이 즐겨 찾는 임업시험장에서 기이한 노인을 만난다.
그는 승마복을 같은 ~ 노인이었어요. : 노인의 기이한 복장은 젊은 날의 영화와 추억을 잊지 못하는 노인의 애처로운 안간힘을 표현한 것
그는 몸이 매우 가냘프고 ~ 서려 있는 듯 싶었어요. : 이미 몸은 쇠약해졌지만 손에 든 단장이나 복장으로 보아 평범한 노인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앙상한 노인의 몸은 밀려오는 문명의 파도에 의해 쇠잔해 가는 자연의 상징일 수도 있다. 즉, 유행에서 멀어진 미뉴에트, 도시의 한 귀퉁이에 유물처럼 남겨진 임업시험장, 추억으로만 사는 노인은 사라져 가는 아름다운 것의 상징이다.
처음에는 깡충깡충 ~ 아니겠어요. : 노인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인생의 비극성을 보다 강조하려는 지은이의 의도가 숨어 있는 대목이다.
그러자 그는 ~ 계속하는 것이었어요. : 노인의 직업을 암시하는 구절이며, 희극 배우처럼 보이지만, 그의 진지한 모습은 보이는 이에게 감동을 준다.
그래 ~ 그 날씨야! : 노인이 늘 추억 속에 잠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인은 ~ 것이었어요. : 노인의 신분이 밝혀짐으로써 그의 괴상한 몸짓이 주는 희극성이 비극적인 것으로 전환된다. 장 부리델은 노인이 젊은 날의 무용수라는 것을 알고 깊은 관심을 갖는다.
산뜻한 숲의 숨결에는 ~ 떨어지곤 했어요 : 자연주의 작가인 지은이가 낭만적인 수법으로 아름답게 묘사한 부분
정원에는 아무도 ~ 들려 올 뿐이었어요 : 숲 속의 정적과 그것을 깨고 들려 오는 마차 소리는 시간을 정지시켜 보려는 무용수 노인의 의식 세계를 표상한다.
그는 몸을 한참 떨더니 ~ 시작했어요. : 미뉴에트에 대해 생각만 해도 기쁨과 흥분에 넘치는 노인의 심정을 묘사한 부분이다.
화가 나서 ~ 서글픈 얼굴을 했어요. : 마음으로는 멋있는 미뉴에트를 보여주고 싶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아 자신의 늙음을 실감하는 노인의 심리가 나타난 부분이다.
할멈은 ~ 시작했어요. : 할멈이 훨씬 이성적이지만, 역시 그녀도 옛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두 늙은이가 ~ 같았어요 :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 두 노인의 우스꽝스러운 춤추는 모습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무용수 노인은 젊은 날의 추억을 되살려 부인과 춤을 춘다.
가슴이 설레고 ~ 터져 나오는 것이었어요 : 두 노인의 어설픈 춤을 통해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는 감정은 울음을, 위태로운 춤 동작의 기이한 모습은 웃음을 가져오게 했다는 말이다. 화자가 아직 인생을 비극으로만 볼 수 없는 젊은이임을 상기시키는 부분이다.
이윽고 두 분은 ~ 우는 것이었어요. : 춤을 끝낸 두 노인은 환상에서 깨어나 다시 현실을 발견하고 눈물을 흘린다. 작품의 절정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사흘 후에 ~ 기회가 없었어요 : 사건의 전환과 함께 결말을 암시한다. 작품 서두 부분인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과 연결해서 읽어야 할 대목이다.
두 분에 대한 추억은 ~ 알 수 없어요 : 반어법을 사용해서 감동과 깊은 공감을 이끌어 내는 대목이다. 늙은 무용수의 애처로운 몸짓은 젊음에서 늙음으로, 생에서 죽음으로 이끌려 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노인과 헤어졌다가 2년 후에 다시 파리로 돌아온 장 부리델은 가슴 깊이 새겨진 무용수 노인을 잊지 못한다.
이해와 감상
회상을 서술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는 파리 소시민들의 애환과 진실을 사실적이며 간결, 정확한 문체로 그려내는 지은이의 문학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문명화된 도시 한 귀퉁이에 자연의 상징처럼 남아 있는 임업 시험장, 그 속에서 화려한 젊은 날의 추억을 반추하며 춤추는 무용수 노인의 허황한 몸짓, 그리고 그런 환상 같은 모습을 보며 느끼는 '나'의 감동과 슬픔은 우리 인생 축도(縮圖)의 표현이다.
이 작품은 인간은 누구나 치유될 수 없는 은밀한 슬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는 지은이의 인생관과 함께 우리가 쉽게 잊고 소홀하게 넘겨 버리기 쉬운 것에 더 큰 삶의 진실이 있다는 진지한 메시지를 전해 주고 있다. 교과서에는 전편(全篇)을 수록하였다. (출처 : 박경신 외 3인저 문학교과서)
심화 자료
염세주의 厭世主義(pessimism)
(라틴어로 '나쁘다'라는 뜻의 malus의 최상급 pessimum에서 유래)
주로 쇼펜하우어의 철학사상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는 용어.
라틴어로 '좋다'는 뜻의 bonus의 최상급 optimum에서 유래한 optimism과 대응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맹목적인 생명의 의지에 이끌려 불행하고 비참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 자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명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우리는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은 악(惡)이 지배하고 있고 사람이 사는 동안은 이를 없앨 수 없다는 생각이며, 흔히 인생은 살 가치가 없다는 사상으로까지 발전한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신(神)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實在)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二元論的) 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된다. 지상(地上)에서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럽혀진 것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육신을 지니고 이 세상에 남아 있는 한, 인간은 생식(生殖)과 죽음의 법칙에 얽매여 암흑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에 구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일 것이다. 죽음에 의해서만 목숨의 죄가 보상되고 일자(一者) 안에서, 광명에 싸인 통일 속에서 영혼이 소생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이러한 염세사상은 영육분리적(靈肉分離的)인 오르피즘(신화상의 시인 오르페우스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고대 그리스의 밀의종교로,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됨으로써 신과 합일할 수 있다고 함)의 영향을 받은 그리스인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페시미즘의 철학을 역설한 사람은 A.쇼펜하우어로, 그의 말을 따르면 세계는 불합리하고 맹목적인 의지가 지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괴로움이며 이 괴로움에서 해탈하려면 쾌락의 부질없음을 깨닫고 무욕(無欲)의 상태 즉, 완전한 의지부정(意志否定)에 의해 현상세계(現象世界)가 무(無)로 돌아가는 열반(涅槃)의 경지에 달해야 한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는 그의 성장환경 및 당시의 사회적·문화적 배경과도 관련이 있는데 W.듀랜트는 그의 〈철학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에서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의 원인을 그 시대의 낭만주의적 기대와 태도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즉 젊은이는 세상으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데 그런 낙관주의가 환멸을 겪은 후에 염세주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염세주의는 환멸을 겪은 젊은이, 불행한 삶을 체험한 개인, 역사적 불행 속에 성장한 세대에 흔히 발견된다.(출처 : 브리태니커와 동아대백과사전 정리)
회의주의(懷疑主義/skepticism)
여러 영역에서 주장하는 지식에 대해 의심을 품는 철학적 태도.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이 어떤 기초에 입각해 있으며 실제로 무엇을 확립하는지 물음으로써 그 주장의 적합성 또는 신뢰성에 도전해왔다. 고대부터 회의주의자들은 독단적인 철학자·과학자·신학자의 주장을 비판하는 논증을 전개해 왔다. 온갖 독단주의에 반대하는 회의주의자들의 논증은 서양철학사에 등장하는 여러 철학 문제와 그 해결책이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다양한 의미와 용법
회의주의는 지식을 형성하는 온갖 분야에 걸쳐 전개되었다. 예를 들어 형이상학이나 과학 분야에서는 확실한 지식의 획득 여부가 문제시되었다. 의학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치료법에 관한 확실한 지식의 획득이, 윤리학에서는 규범·관습의 수용과 가치 판단의 객관적 기준이, 종교에서는 전통을 달리 하는 교리들이 회의주의의 의심을 받았다. 또 흄이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들은 경험 세계의 배후, 즉 현상의 원인에 대해서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회의주의의 대표적 형태는 지식 일반에 관한 것으로 인식론적 회의주의라고 불리며 어떤 것이 과연 완전하고 충분한 확실성을 갖고 우리에게 알려지는가를 문제삼는다. 인식론적 회의주의는 의심이 일어나는 영역, 즉 의심이 이성을 향하느냐, 감각을 향하느냐, 사물 자체의 인식을 향하느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 있고, 의심하는 사람의 동기, 이를테면 이데올로기적 이유인가, 실용적이거나 실천적인 이유인가에 따라서도 구분될 수 있다. 또 회의주의는 얼마나 엄격하고 철저한가에 따라, 즉 특정 영역 및 지식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냐에 따라 그 종류가 구분될 수도 있다.
고대의 회의주의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에 엘레아 학파는 변화하는 다자(多者)의 세계, 곧 감각 세계의 실재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재를 일상 경험의 범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헤라클레이토스와 그의 제자 크라틸로스는 세계가 끊임없는 유동 상태에 있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영구불변의 진리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또 크세노파네스는 참된 지식과 거짓된 지식을 구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었다.
소크라테스와 2명의 소피스트에 이르러 회의주의는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지식에 늘 의문을 제기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초기 대화록 〈변명 Apologia〉에서 자신이 정말로 아는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하면서 궁극적으로 참된 견해란 절대로 있을 수 없고 모든 견해는 인간 각자의 의견일 뿐이라는 회의주의적 상대주의를 피력했다. 나아가 또다른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는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혹 그런 것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나아가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남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고 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바탕한 허무주의적 회의주의 철학을 표방한 최초의 학파는 BC 3세기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에서 발전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 학파였다. 이 학파를 이끈 아르케실라우스와 카르네아데스는 주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에 맞서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기준이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고, 대신에 어떤 지식이 이성에 입각한 것이냐 아니면 추정에 입각한 것이냐를 알 수 있는 표준만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제한된 개연적 회의주의는 키케로가 아카데메이아의 학생이던 BC 1세기까지 이 학원의 견해였다. 고대 회의주의의 또다른 주요형태는 피론주의였다. 아이네시데무스에 의해 시작된 이 운동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을 비판했는데, 그 까닭은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자들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더 개연성이 많다고 하는 등 사실상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나아가 다양한 종류의 지식에 반대하는 일련의 방법으로 판단중지(epoch)를 제시했다. 피론주의적 태도는 피론주의의 마지막 지도자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작 〈피론주의 개관 Outlines of Pyrrhonism〉·〈수학에 반대하여 Adversus mathematicos〉 등에 담겨 있다. 섹스토스 엠피리코스는 자신의 주장이 사람들을 평정(ataraxia) 상태로 이끄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했다. 실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늘 불안하고 좌절했으며, 판단중지에 이를 수 있다면 마음의 평화를 찾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세의 회의주의
그리스도교의 권위가 절정에 달한 중세에는 회의주의가 주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형태로 연명했다. 〈아카데메이아 학파에 반대하여 Contra academicos〉에서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를 묘사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견해에 매력을 느꼈으나 계시를 통해 그 견해를 극복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으로써 인식을 얻으려 했다. 서유럽보다 고대의 학문을 더많이 접한 이슬람 치하의 스페인에서는 반(反)합리주의적 형태를 띤 회의주의가 알 가잘리 등 이슬람 신학자들과 유다 하 레비 등 유대 신학자들 사이에서 발전했다. 특히 유다 하 레비는 사람들이 신비적 신앙 속에서 종교적 진리를 받아들이도록 회의주의에 입각하여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을 공격했다.
근대 회의주의
근대 회의주의는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불러일으킨 지적 위기와 회의주의적 고전들의 재발견에서 비롯했다.
종교개혁
종교개혁에 의해 제기된 회의주의적 쟁점은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와 루터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났다. 에라스무스는 아카데메이아 회의주의의 자료를 이용, 논쟁중인 쟁점들은 결코 해결될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판단중지하고 교회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루터는 참되고 확실한 종교적 지식은 양심을 통해 얻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라스무스의 견해는 종교적 지식에는 적절한 증거가 없으므로 신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전통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그리스도교 회의주의를 발전시켰고, 루터의 견해는 훗날 칼뱅의 견해와 더불어 내적 체험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마련했다. 에라스무스의 뒤를 이어 인문주의자 조반니 피코 델라 미란돌라 2세와 주술적 신비주의 철학자이자 의사인 H. C. 아그리파는 스콜라주의와 르네상스 자연주의, 그리고 인간을 '참된 종교'로 인도한다는 다른 많은 견해에 대항하여 회의주의의 주장을 피력했다. 가톨릭 학자 장티앙 에르베는 1569년 자신이 편집한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 관한 책의 서문에서 회의주의의 주장이 칼뱅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답변이자 진정한 그리스도교에 이르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7세기
회의주의에 대한 새로운 관심은 미셸 드 몽테뉴와 그의 사촌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에 의해 철학적으로 일반화된 모습을 띠고 나타났는데, 두 사람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이 주장하는 지식은 극히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미셸 드 몽테뉴는 자연과 관습에 따라 살면서 신이 계시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받아들일 것을 권했고, 프란시스코 산체스 몽테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인정하는 선에서 극히 제한된 경험과학적 정보를 획득하는 데 노력할 것을 옹호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17세기초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에르 샤롱, J.P. 카뮈, 라 모트 르 바이예 등이 미셸 드 몽테뉴의 견해를 널리 퍼뜨렸으며, 많은 반종교개혁가들이 칼뱅주의를 공격하기 위해 미셸 드 몽테뉴와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주장을 이용했다. 미셸 드 몽테뉴의 회의주의는 새로운 과학을 포함한 온갖 종류의 학문 분야를 반대하고 경건주의와 결합했다.
1620년대에는 이러한 새로운 회의주의를 반박하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이 나타났다. 원래 회의주의자였던 에피쿠로스주의자 피에르 가생디와 당시 지적 혁명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마랭 메르센은 실재에 관한 지식을 인식론적으로 의심하면서도 과학이 세계에 관한 쓸모 있고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고 인정했다. 가생디와 메르센의 건설적 회의주의는 산체스 몽테뉴의 태도를 새로운 과학에 대한 가설적·경험적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르네 데카르트는 새로운 회의주의를 근본적으로 반박했다. 데카르트는 거짓일지도 모르는 모든 믿음을 의심하는 회의적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정말로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 곧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를 발견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진리로부터 참된 지식의 기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사용함으로써 신 존재, 즉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고 우리의 명석·판명한 관념을 보증하는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으며, 외부 세계의 존재와 아울러 수학적 자연학을 통해 세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회의주의에서 출발하여 실재의 지식에 대한 새로운 토대를 찾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7세기 전체를 통해 메르센, 가생디, 시몽 푸세, 피에르 다니엘 위예 등 회의주의적 비판가들은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을 철저히 밀고 나가면 그의 새로운 체계가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시도가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로크를 비롯한 영국의 철학자들은 인간이 '합리적'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심하기란 블가능하다는 상식에 호소하여 회의주의를 약화하려 애썼다. 직접적인 경험을 넘어선 지식을 지지하는 충분한 증거가 없다고 해서 모든 것이 의심스러운 것은 아니며, 상식이라는 기준을 사용할 경우 우리의 많은 믿음은 적절한 기초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팡세 Pensees〉에서 회의주의를 아주 강하게 드러낸 블레즈 파스칼도 완전한 회의주의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파스칼에 따르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대해 결코 이성적인 대답을 할 수 없는 인간은 신의 도움만을 받아 의심을 극복해야 한다. 17세기 회의주의는 피에르 벨의 저술, 특히 〈역사적·비판적 사전 Dictionnaire historique et critique〉(1697~1702)에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탁월한 변증론가인 벨은 고대·근대의 철학·과학·신학 이론들이 혼란·역설·모순 등에 귀착한다면서 그 이론들에 도전했다. 또 회의주의에 입각해 분석할 경우 데카르트·라이프니츠·스피노자·말브랑슈 등의 이론은 세계에 관한 모든 정보, 심지어 세계의 존재까지도 의문시한다고 주장했다. 벨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지적 활동의 신뢰성을 약화하기 위해 감각적 정보, 인간의 판단, 논리적 설명 등에 대한 회의주의의 주장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벨은 인간이 이성적 활동을 포기하고 신앙과 계시에 맹목적으로 의지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참된 신앙을 결정하는 아무런 기준 없이 자신의 양심만 따를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
18세기 사상가들은 대개 베일의 주장을 받아들이면서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한 요구를 포기했다. 경험론자이자 관념론자인 조지 버클리는 현상과 실재를 동일시하고 유심론적 형이상학을 제시함으로써 회의주의에 대항했다. 그러나 경험을 초월한 세계를 부정했기 때문에 또다른 회의주의자로 여겨졌다. 벨을 계승한 18세기의 주요인물은 데이비드 흄이었다. 경험론과 회의주의를 결합한 흄은 귀납적 증거와 연역적 증거 둘다 사실의 진리를 확립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지식은 경험을 초월해서는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경험 안에서 어떤 필연적 관련이나 경험의 근원을 찾을 수 없다. 세계에 대한 믿음은 이성이나 증거에 기초하지도 않고 자연의 제일성(齊一性)에도 호소하지 않으며 단지 습관과 관습에 의존할 따름이다. 즉 믿음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외부세계·자아·신 등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일상적이지만 이러한 믿음을 뒷받침하는 적절한 증거는 하나도 없다. 인간은 믿음을 토대로 세계를 과학적으로 기술할 수 있지만 만일 그 믿음을 정당화하려 한다면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연은 인간이 이렇게 완전한 회의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인간에게 정당화될 수 없는 믿음, 즉 상식을 회복하도록 해준다. 흄의 이러한 신앙주의는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적인 것이었다.
귀납과 인과성의 기초, 외부세계와 자아에 관한 지식, 신 존재 증명 등 흄의 회의주의적 분석의 중심 주제는 그뒤 철학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토머스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가 데카르트에게서 시작하는 근대 철학의 근본 가정이 낳은 논리적 결과라고 논박했다. 그리고 이 불행한 재앙을 초래하는 근본 가정은 상식적 원리를 위해서 포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흄과 칸트가 지적한 것처럼 리드는 흄의 회의주의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상식적인 삶에 호소함으로써 핵심을 비켜나갔을 뿐이었다. 즉 그는 믿음에 대한 이론적 기초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고 믿음을 의심하는 주장에 대해 반박한 것도 아니었다. 칸트는 흄이 인간의 모든 지식에 근본적으로 도전했다고 보았다. 흄의 회의주의에 대답하기 위해 밝혀야 할 점은 지식이 가능하다는 사실보다는 지식이 '어떻게' 가능하냐는 문제였다. 칸트는 형이상학적 지식에 대해서는 회의주의를 표명한 반면 경험적 지식은 어떤 보편적·필연적 조건들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즉 이 조건들에 의해 모든 가능한 경험의 형식인 시간·공간과 범주에 대한 참된 인식이 성립할 수 있으며, 이 형식을 모든 가능한 경험을 초월한 세계에 적용하면 모순과 회의주의에 이르게 된다. 칸트에 따르면 물자체, 즉 경험의 원인에 대한 인식은 불가능하다.
칸트는 자신이 회의주의의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의 철학이 회의주의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평가했다. 칸트주의에 대한 저명한 비판가 G.E. 슐체는 칸트의 이론에 따를 경우 사물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유대인 비판가 잘로몬 마이몬은 설사 선천적 개념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경험에 적용하면 항상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에 대한 또다른 회의주의적 비판가 J.G. 하만은 흄과 칸트의 철학이 신앙주의에 새로운 기초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즉 실재에 대한 인식을 이성적 수단으로 얻을 수 없다면 우리는 신앙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하만은 흄의 노력에 기초하여, 칸트에게 신앙주의적 그리스도교도가 되라고 설득하는 가운데 반(反)합리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현대철학
비합리적 회의주의는 19세기 쇠렌 키에르케고르에 의해 실존주의로 발전했다. 키에르케고르는 전통 회의주의를 이용하여 헤겔주의와 자유주의적 그리스도교를 공격하면서 신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정당화되지도 않고 정당화될 수도 없는 '신앙에의 도약'만이 확실성을 보장해준다. 근대 신정통 신학자와 실존주의 신학자는 회의주의가 인간이 신앙과 신에의 헌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궁극적 진리를 결코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견해를 비종교적 형태로 전개한 사람이었다.
그밖의 회의주의의 여러 종류는 다양한 형태의 현대철학 속에 나타나 있다. 영국의 관념론자 F. H. 브래들리는 자신의 저서 〈현상과 실재:형이상학 소론 Appearance and Reality:A Metaphysical Essay〉에서 고전적 회의주의를 이용, 세계는 경험론이나 유물론으로는 이해할 수 없으며 참된 지식은 현상 세계를 초월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비판적 실재론자 조지 산타야나는 〈회의주의와 동물적 신념 Scepticism and Animal Faith〉에서 자연주의적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직접적이거나 직관적인 경험에 의거한 해석은 모두 의문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 인간은 생물학적·사회적 요소에 따라 '동물적 신앙'으로써 세계를 해석한다. 그결과로 얻어지는 믿음은 비록 정당화되지 않고 터무니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세계의 풍부함을 유지·발견하도록 해준다. 회의주의의 유형은 논리실증주의(→실증주의)와 다양한 형태의 언어철학(→분석철학)에서도 나타난다(→ 색인 : 논리실증주의, 언어철학). 물리학자이자 초기 실증주의자 에른스트 마흐, 버트런드 러셀, 논리실증주의의 산실인 빈 학파의 거두 루돌프 카르나프 등은 사변적 형이상학을 공격했는데, 이러한 공격은 경험이나 논리적 동어반복을 초월한 지식의 획득가능성에 대해 회의주의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러셀과 저명한 과학철학자카를 포퍼는 귀납원리가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했으며, 특히 포퍼는 경험적 검증에 기초한 인식론을 비판했다. 언어분석의 창시자 프리츠 마우트너는 모든 언어가 언어 사용자에 상대적이며 결국 주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내용의 회의주의를 제시했다. 진리를 이야기하는 모든 시도는 객관적 사태가 아니라 언어적 형식으로 귀결되므로 결국 실재에 대한 완전한 회의주의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마우트너의 언어 회의주의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 표현된 견해와 어느 정도 비슷하다. R. H. Popkin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프랑스 3대 단편 소설가 : 모파상, 메리메, 알퐁스 도데
메리메(Prosper Merimee)
1803. 9. 28 파리~1870. 9. 23 칸.
프랑스의 극작가·역사가·고고학자.
단편소설의 거장으로, 낭만적 주제에 고전적이고 절제된 문체를 사용한 그의 작품들은 낭만주의 시대에 고전주의를 되살린 것이었다. 노르망디 출신의 교양있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처음에는 법률을 공부했지만 그리스어·스페인어·영어·러시아어 등을 배우고 그 나라들의 문학을 공부하는 일에 더 열중했다. 그는 19세에 첫번째 희곡 〈크롬웰 Cromwell〉(1822)을 썼다. 가까운 친구인 소설가 스탕달은 그가 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준 장본인이었다.
희곡집 〈클라라 가쥘의 연극 Le Theatre de Clara Gazul〉은 1825년에 출판되었다. 속임수를 써서 남을 당황하게 만드는 취미에 탐닉해 있던 그는 이 희곡집이 스페인의 한 여배우가 쓴 작품을 조제프 레스트랑주라는 사람이 번역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2번째 작품 〈라 귀즐라 La Guzla〉(1827)도 역시 '히아셍트 마글라노비치'라는 사람이 쓴 작품으로 발표되었는데, 살인과 복수 및 흡혈귀를 노래한 이 작품은 아마 일리리아 (아드리아 해 동쪽 연안에 있던 고대국가) 민요집의 번역일 것이다. 이 두 작품에는 당대의 학자들까지도 속아넘어갔다.
그는 신비주의와 역사 및 유별난 것에 열중했다. 영국의 월터 스콧 경이 확립한 역사소설이 유행하는 데 영감을 얻은 그는 봉건시대의 농민 반란을 묘사한 36개의 극적인 장면으로 이루어진 〈자크리의 반란 La Jacquerie〉(1828)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와 평화로울 때의 프랑스 궁정 생활을 묘사한 장편소설 〈샤를 9세 시대의 연대기 La Chronique du temps de Charles Ⅸ〉를 썼다.
그의 단편소설들은 그가 지닌 상상력과 우울한 성격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의 단편소은 대부분 이국 취향과 지방색이 짙은 추리소설이다. 스페인과 러시아가 그의 주요한 문학적 원천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러시아 문학을 이해한 사람이었다. 푸슈킨은 그의 스승이었고 특히 그가 폭력과 잔인함, 그뒤에 숨어 있는 인간 심리를 종종 주제로 다룬 것은 푸슈킨의 영향이었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소설 가운데 하나인 〈마테오 팔코네 Mateo Falcone〉(1833)에서는 아버지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아들을 죽인다. 단편집 〈모자이크 Mosaique〉(1833)에 이어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중편소설들이 발표되었는데, 〈콜롱바 Colomba〉는 복수를 위해 살인을 저지르도록 오빠에게 강요하는 코르시카의 한 젊은 아가씨를 묘사하고 있으며, 〈카르멘 Carmen〉에서는 부정한 집시소녀가 그녀를 사랑한 군인에게 살해당한다. 이 〈카르멘〉은 비제의 오페라를 통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로키스 Lokis〉(1869)·〈푸른 방 La Chambre bleue〉(1872)은 초자연적인 것에 매혹되어 있는 자신을 보여준다. 1831년에 제니 다캥이라는 소녀를 만나 평생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 편지들은 그가 죽은 뒤 〈미지의 소녀에게 보낸 편지 Lettres a une inconnue〉(1874)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는 프랑스 해군 본부에서 역사적 기념물을 관리하는 총감독관으로 일하면서, 그리스와 스페인, 투르크와 프랑스를 여행한 경험을 적은 〈항해기록…… Notes de voyages……〉(1835~40)을 썼다. 그는 또한 뛰어난 역사가이자 고고학자로서 이 분야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저술했고, 문학 평론도 썼다. 그는 1830년에 스페인에서 만난 몬티호 백작 부인과 오랫동안 우정을 나누었다. 그후 1853년에 몬티호 백작 부인의 딸이 프랑스의 외제니 황후가 되자, 그는 황제의 측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상원의원에도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나폴레옹 3세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심으로 황제를 모시는 궁정 신하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가 대영 박물관의 수석 사서이자 노년기에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앤소니 패니치 경에게 보낸 편지는 '프랑스 제2제정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편지들은 그가 죽은 뒤 〈패니치 씨에게 보낸 편지:1850~70 Lettres a M. Panizzi:1850~70〉(1881)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집필 방식은 꼼꼼하고 신중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가장 훌륭한 단편소설들은 신비와 향토색으로 물들어 있지만, 이국취미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는 결코 없는 것 같다. 초자연적이고 환상적인 것의 존재를 분명히 입증하기 위해 사실주의적인 세부 묘사와 정확한 서술법을 사용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냉혹할 만큼 강렬하고 열정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며, 그런 성격 때문에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예외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 5. 13 프랑스 님~1897. 12. 16 파리(?).
프랑스의 작가.
도데
주로 프랑스 남부 지방의 인물과 생활을 익살스럽고 정감있게 묘사한 것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그의 장편소설 〈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 Fromont jeune et Risler aine〉(1874)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았다.
생애
도데는 견직물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9년에 아버지는 공장을 팔고 리옹으로 이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옹에 간 알퐁스는 처음에는 그 습기찬 공기에 불쾌감을 느꼈지만, 곧 엉뚱한 짓과 론 강의 생활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는 14세 때 처음으로 시와 소설을 썼다. 1857년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도데는 대학 진학의 꿈을 버려야 했다. 그는 알레스에 있는 한 학교에서 사환으로 일했는데, 이 불행한 생활은 6개월 만에 결국 해고당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의 반(半)자서전적 소설인 〈꼬마 Le Petit Chose〉(1868)에 주제를 제공해주었다. 이 소설은 그때의 경험에 살을 붙이거나 생략하여 재미있게 꾸민 것이다. 1857년말에 그는 형 에르네스트가 있는 파리로 갔다.
그후 도데는 글쓰는 일에 몰두하는 한편 보헤미안 문단과 사교계 문단을 모두 드나들기 시작했다. 젊고 잘생긴 그는 모델인 마리 리외와 관계를 맺고, 유일한 시집인 〈연인들 Les Amoureuses〉(1858)을 리외에게 헌정했다. 그는 리외와 오랫동안 골치아픈 관계를 계속했는데, 이 관계는 훨씬 나중에 〈사포 Sapho〉(1884)라는 반자서전적 소설에 반영되었다. 그는 또한 신문, 특히 〈피가로 Le Figaro〉지에 자주 작품을 기고했다. 1860년에 그는 19세기 프로방스어 문학부흥운동의 지도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을 만나, 남프랑스의 생활에 열중하게 되었다. 남프랑스의 생활은 북부의 윤리적이고 지적인 엄격성과는 반대로 열정적이고 예술적이며 관능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같은 해 그는 모르니 공작의 비서로 일자리를 얻었다.
그의 건강은 가난과 그리고 결국은 그의 목숨을 앗아간 성병에 서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도데는 1861년에서 186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을 알제리에서 보냈다. 이 여행에서 얻은 성과 가운데 하나가 〈사자 사냥꾼 샤파탱 Chapatin le tueur de lions〉(1863)으로, 이 소설의 주인공인 사자 사냥꾼은 도데의 미래의 주인공 타르타랭의 첫번째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도데가 처음으로 쓴 희곡 〈마지막 우상 La Derniere Idole〉은 1862년에 파리의 오데옹 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커다란 반향을 얻었다. 〈방앗간 소식 Lettres de mon moulin〉(1869)에서 그는 1862년말 코르시카에서 보낸 겨울을 회상하고 있다. 1863~65년(모르니 공작이 죽을 때까지)에 겪은 풍부한 사회생활은 그가 〈르 나바브 Le Nabab〉(1877)에서 무자비하게 분석한 자료를 그에게 제공해주었다. 1867년 1월에 그는 재능있는 작가인 쥘리아 알라르와 결혼했는데, 그는 그녀를 깊이 사랑했고, 그녀는 그의 이후 작품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레옹과 뤼시앵이라는 두 아들과 에드메라는 딸 하나를 낳았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은 그의 2번째 단편집 〈월요일 이야기 Les Contes du lundi〉(1873)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의 글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 때 도데는 군에 입대했지만, 1871년 파리 코뮌의 공포정치 때 파리를 탈출했다. 그의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 Les Aventures prodigieuses de Tartarin de Tarascon〉(1872)은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천진함과 허풍스러움을 풍자한 인물로서 유명하다. 〈아를의 여인 L'Arlesienne〉이라는 희곡도 역시 실패했으나 1885년에 재공연되었을 때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의 다음 소설인 〈동생 프로몽과 형 리슬레르〉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상을 받고 성공을 거두었으며, 그후 몇 년 동안(적대적인 비평이 전혀 없지는 않았음) 그는 부귀와 명성을 누렸다.
말년에 도데는 성병이 척수까지 번져 심한 고통을 겪었다. 〈고통 La Doulou〉(1931년까지 출판되지 않았음)은 고통을 연구함으로써 완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그는 감탄할 만한 자제심으로 온갖 종류의 책을 써서 파리의 문단과 음악계를 계속 즐겁게 해주었다. 그는 젊은 작가들(예를 들면 마르셀 프루스트)의 친절한 후원자였다. 1895년에 그는 런던과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그리고 2년 뒤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평가
심리학적으로 볼 때, 도데는 상충하는 요소들의 통합을 보여준다. 모든 사회계층에서, 그리고 여행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은 체험은 그가 타고난 재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남프랑스 사람이었던 도데는 정념에 대한 이해와 지중해적인 세계관을 결합했고, 인간행동의 세부에 대한 관심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을 관찰한 내용을 작은 공책들에 기록했고, 이 공책들을 영감의 보고로 이용했다. 소설은 "어떤 역사도 갖지 못할 사람들의 역사"이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접근 방식은 냉정한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그는 줄곧 감상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선입관에서 자유로웠던 그는 동료 자연주의자들과는 달리, 세계의 추악한 면에만 관심을 쏟는 소설가들은 세계의 다양성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그는 겉으로 드러난 세부적인 면에 객관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의 글에는 이런 관심과 동시에 유난히 동정심이 많은 인간성과 사물 및 개인의 신비에 대한 외경심도 표현되어 있다. 그의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내적인 진실성을 갖고 있으며, 그는 물질적 현상을 묘사할 때처럼 충실하게 이 진실성을 재현했다. 나아가, 그는 정념에는 운명의 힘과도 같은 무엇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생각은 그의 많은 글에서 열매를 맺어 그의 풍자는 동정심으로 부드러워지곤 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모파상뿐 아니라 영국의 찰스 디킨스와도 유사점을 갖는다.
도데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의 계통을 따라 계속 발전했다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문학적 경향이 서로 동떨어진 삽화들처럼 잇따라 나타난 일련의 과정이었다. 그래도 〈타라스콩의 타르타랭이 겪은 놀라운 모험〉에 나타난 반낭만주의적 풍자는 〈방앗간 소식〉에서는 점묘파나 인상파 화가들과 비슷한 사실주의로 바뀌었고, 이것은 다시 남프랑스의 특성을 조롱한 초기작품을 수정하기 위해 쓴 〈아를의 여인〉의 비극적 색조로 이어졌다. 또한 〈꼬마〉와 〈월요일 이야기〉에는 풍자보다 오히려 동정과 염려가 더 많이 담겨 있다. 도데는 나이가 들수록 인간관계의 갈등에 점점 더 몰두하게 되었다. 〈자크 Jack〉(1876)는 육체적 사랑과 모성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여인을 묘사하고 있고, 〈뉘마 루메스탕 Numa Roumestan〉(1881)은 남자와 여자의 북부적 성격과 남부적 성격 사이의 적개심을 묘사하고 있으며, 〈전도사 L'Evangeliste〉(1883)는 종교적 광신과 싸우는 아들의 애정을, 〈작은 교구 La Petite Paroisse〉(1884)는 질투심의 모순을 다루고 있다. 〈사포〉에서 제기하는 도덕적 문제는 자신이 버리고 떠나는 소녀에 대한 동정심과 자유 사이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연인의 해묵은 고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한 세대 전체의 청년들에 대한 도데의 평가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아를라탕의 보물 Le Tresor d'Arlatan〉(1897)과 〈삶에 대한 단상(斷想) Notes sur la vie〉 및 〈새로운 단상 Nouvelles notes〉은 프로이트보다 앞서서 억압된 잠재 의식을 분석한 대담한 심리학자 도데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데의 걸작에는 서로 대립하는 요소들, 즉 진실과 환상, 무자비한 묘사와 시, 명석한 진지함과 유머 감각, 아이러니와 연민 등 인간의 존엄성을 이루는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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