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
by 송화은율매월당 김시습
김시습은 세종 때인 1435년에 태어나 사상가로, 문학자로 당대를 풍미했으나 평생을 떠돌다시피 하다가 1493년 59세로 무량사에서 일생을 마쳤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세상에 자자하여 다섯 살 때에 신동 소리를 듣고 한번 배우면 곧 익힌다 하여 이름도 시습(時習)으로 지어졌으며 세종대왕에게서 ‘자라면 크게 쓰겠다’는 약조까지 받은 터였다. 열살 무렵에 『예기』(禮記), 『제자백가』(諸子百家) 등까지 익히며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정작 그가 스물 한 살 되던 해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는 일이 벌어지자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깎고서 방랑 길에 들어섰다.
서북지방으로부터 만주벌판에 이르렀다가 다시 동으로 금강산을 거쳐 남쪽 경주 남산, 당시 이름으로는 금오산에 은거해서 지은 것이 『금오신화』(金鰲神話)이다. 『금오신화』는 소설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속세의 명리를 좇지 않고 순수한 인간 그대로를 보여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니 김시습이 추구하던 인간상들이 그려져 있다고 하겠다. 이 10년 은거 동안에 그는 당대를 꼬집는 글들과 많은 시편을 써 남겼으니 지금 남아 있는 『매월당집』23권 중 15권이 시로 2,200여 수에 이른다.
김시습의 성품과 인간관을 잘 드러내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0년이 넘은 오랜 은거 끝에 잠시 서울에 머물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서강(西江)을 지나가다가 어느 벽에 붙은 한명회(韓明澮, 1415~1487)의 글을 보게 되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붙잡고 늙어서는 강호에 묻힌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이 시를 보고 그는 선뜻 붓을 들어 ‘부’(扶) 자를 ‘망’(亡) 자로, ‘와’(臥) 자를 ‘오’(汚) 자로 고쳐 버렸으니 다음과
같이 되었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 (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47세 되던 해(성종 12년, 1481)에는 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으며 다시 부인을 맞아들이기도 했으나 이듬해에 조정에서 윤씨의 폐비 논의가 일어나는 것을 보자 또 모든 것을 버리고 속세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리하여 유랑 끝에 다다른 곳이 이곳 무량사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너를 버릴지어다” 라고 자신을 평가하기도 했다.
율곡 이이(李栗谷)는 그가 지은 「김시습전」에서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느니 그가 받은 기운이 지나치고 중후함은 모자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면서도 다시 “그의 뜻은 일월과 그 빛을 다투게 되고 그의 품성을 듣는 사람들은 겁쟁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이 되고 남음이 있다”고 평가하였으니 뜻을 펼 세상을 만나지 못한 지식인의 처지를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한 듯하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는 방랑으로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수도하며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무량사였다.
죽을 때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3년 동안 시신을 두었다가 장사를 지내려고 열어보니 그 모습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마치 살아 있는 듯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부처가 되었다고 하여 화장을 하니 사리 1과가 나와서 부도를 세우고 안치하였다. 역대의 시인 가운데서 김시습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시로써 말한 시인은 찾아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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