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청산이요
by 송화은율말없는 청산이요
말이 없는 것은 청산이요, 모양이 없는 것은 유수(흐르는 물)로다.
값 없는 것은 바람이요, 주인 없는 것은 밝은 달이로다.
이 아름다운 자연에 묻혀, 병 없는 이 몸은 걱정 없이 늙으리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성혼(成渾)
성격 : 풍류적, 전원적, 달관적(達觀的), 한정가(閑情歌)
표현 : 대구법, 의인법, 초장과 중장에서 대구의 묘미를 살렸으며, '업슨'이라는 시어의 반복을 통해 운율적 효과를 높이고 있음.
제재 : 청산, 유수, 청풍, 명월
심상 : 시각적 심상
주제 : 자연을 벗삼는 즐거움 / 강호 한정의 삶을 다짐함
출전 : 화원악보
내용 연구
태(態) 업슨 : 모양이 없는
갑 업는 :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님자 업슨 : 임자가 없는. 주인이 없는
분별(分別) 업시 : 아무 걱정 없이
말 업슨 靑山(청산)이요, 態(태) 업슨 流水(유수)ㅣ로다. : 청산과 유수가 대구가 되어 자연의 의연함과 영원함을 노래하고 있다. 지은이는 지자(知者)와 인자(仁者)의 조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갑 업슨 淸風(청풍)이요, 님자 업슨 明月(명월)이라. : 청풍과 명월이 대구가 되어 세속을 떠난 자연 친화를 노래하였다.
이 中(중)에 病(병) 업슨 이 몸이 分別(분별) 업시 늙으리라. : 자연 속에 몸을 맡겨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서 세속적인 근심 걱정 같은 것은 잊어버리겠다는 달관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여기서 '청산, 유수, 청풍, 명월'은 이해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탈속적 삶을 추구하는 화자가 지향하는 '자연'을 의미한다.
이해와 감상
사대부들은 자연 속에서 세파에 찌든 마음을 씻고 정신적 안식을 찾았었다. 따라서, 시조의 소재도 자연에서 즐겨 찾았다. 이른바 '강호가도(江湖歌道)'라 일컬어지는 작품들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말 없는 청산(靑山)과 모양이 없는 유수(流水)를 벗하며 세 속의 명리(名利)보다는 학문에 뜻을 두고 살아가는 옛 선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없다'라는 말의 반복으로 표현의 묘를 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작품은 산수 자연 속에 묻혀서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소탈하게 읊고 있다. 초장에서는 청산과 유수가 짝을 이루어 자연의 의연함을 노래하고, 중장에서는 청풍과 명월이 대구를 이루어 세속을 떠나 자연 속에 살고자 하는 화자의 지향을 드러내며, 종장에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룬 가운데 달관의 경지를 나타내었다.
그리고 이 시조가 특별한 특징이 하나 있는데 전체적으로 '업슨'이란 말을 각 장마다 되풀이해서 운율의 묘미를 살리고 있다. 각 장마다 두 번씩, 전부 여섯 번이나 반복되는 '업슨'이라는 시어는, 단지 율동감의 차원만이 아니라, 이러한 반복의 과정을 통하여 시적 대상인 자연물과 시적 화자가 하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청산, 유수, 청풍, 명월이 보여주는 반복되는 '없음'에 화자는 어느덧 동화되어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며, 그 속에서 시적 화자는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이 없이, 늙어 가는 인생조차 편안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심화 자료
성혼(成渾)
1535(중종 30)∼1598(선조31).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우계(牛溪). 현령 충달(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세순(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수침(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사원(士元)의 딸이다. 서울 순화방(順和坊 :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1551년(명종 6)에 생원·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 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그는 〈서실의 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자(朱子)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그는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그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사체(辭遞 ; 사양하여 임명이 보류됨.)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그의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예빈시판관·장흥고주부·종묘서령·광흥창주부·사헌부장령·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에 등대(登對 : 임금을 찾아 봄.)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경장(更張)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미숙(米菽 : 식량)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그는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신탄(薪炭 : 땔감의 하나)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蚊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사옹원정(司饔院正)·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그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파산(坡山)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그를 공격했으므로 자핵상소(自劾上疏 ;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를 하였다. 1587년에는 자지문(自誌文 :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그는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보방(保邦)·율탐(律貪)·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율곡집 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문준(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그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이천(伊川)·연천(連川)·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필(駐魚)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궤(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대조(大朝 : 선조가 있는 곳)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그가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그를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그는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 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대가가 정주·영유(永柔)·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그는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허화완병(許和緩兵 :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을 건의한 이정암(李廷目)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그는 용산으로 나와 걸해소(乞骸疏 :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 6권 6책과 ≪주문지결 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 爲學之方≫ 1책이 있다.
그가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복관사제(復官賜祭 :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출향(黜享 : 배향에서 삭출됨.)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승무(陞黛)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牛溪集, 牛溪年譜, 谿谷集, 淸陰集, 月沙集, 愼獨齋遺稿, 牛溪先生年譜附錄, 牛溪先生年譜補遺, 牛溪先生年譜後錄, 燃藜室記述, 儒敎淵源(張志淵), 朝鮮儒學史(玄相允, 民衆書館, 1949), 東國文廟十八賢年譜(韓國名賢遺蹟硏究所, 1966), 韓國儒學史(裵宗鎬, 延世大學校出版部, 1974), 韓國儒學史(李丙燾, 亞細亞文化社, 1987).(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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