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바이야트 / 오마르 카얌(Omar khayyam)
by 송화은율루바이야트 / 오마르 카얌(Omar khayyam)
1
그대 잠을 깨라. 먼동이 트자 태양은
밤의 들판에서 별들을 패주(敗走)시키고
하늘에서 밤마저 몰아 낸 후
술탄의 성탑(城塔)에 햇빛을 내리쬔다.
2
아침의 허망한 빛이 사라지기 전
주막에서 들려 오는 저 목소리
"사원에 예배 준비가 끝났거늘
어찌하여 기도자는 밖에서 졸고만 있나."
3
꼬끼오, 닭이 울자 주막 앞에서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문을 열어라.
우리들이 머물 시간을 짧디짧고
한 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4
지금은 새해, 옛 욕정이 되살아나고
생각에 잠긴 영혼 고독으로 돌아가니
거긴 모세의 하얀 손이 가지 위에 내밀고
예수의 숨결이 대지에서 꽃피는 곳
5
장미꽃 만발하던 이람 정원 사라지고
잠쉬드의 칠륜배(七輪杯)도 간 데 없지만
루비가 불붙는 포도원은 예와 같고
숱한 정원이 물가에서 꽃피우네.
6
다윗의 입술 다물렸지만, 울리는 건 거룩한
펠레비 노래, "포도주를 다오, 붉은 포도주"
핏기 없는 얼굴을 물들이고자
장미에게 애소(哀訴)하는 나이팅게일.
7
오라, 와서 잔을 채워라, 봄의 열기 속에
회한(悔恨)의 겨울 옷일랑 벗어 던져라
세월의 새는 멀리 날 수 없거늘
어느 새 두 날개를 펴고 있구나.
요점 정리
작자 : 오마르 카얌(Omar khayyam)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현세주의적
제재 : 아름다운 현재
주제 : 생활 공간으로서 오늘의 아름다움
이해와 감상
이 시는 아랍 문화권의 작품으로 아랍 지역의 문화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아랍 지역은 각기 다른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민족적 특성을 같은 경향으로는 볼 수 없다. 기독교적인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 시 "루바이야트"('루바이'의 복수형. 루바이는 4행시라는 뜻)는 4행이 한 연으로 이루어져 있고, 한 수 한 수가 서로 다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작품 전체의 정서는 거의 한결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정서는 '오늘 우리가 머물고 있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워야 한다.'는 현세주의적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
짤막짤막한 시편들로 이어지는 이 작품은 그 한 수 한 수가 다른 화제를 다루고 있지만 정서적 태도는 한결같다고 할 수 있다. 먼동이 트는 데서 시작되는 첫 번째 시에서부터 오늘은 아름다운 것임을 강조하고 있고, 작품이 계속되면서 그런 태도는 더욱 강조된다. '우리들이 머물 시간은 짧디짧고 한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하는 길' 세 번째 시의 표현은 이런 생각을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 나머지 시편들도 모든 이미지가 화사하고 아름다운 것이면서, 그것은 또한 마땅히 즐겨야 하고 오늘이 중요한 것이며,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다. 포도주, 장미 등이 중심 이미지가 되고 있는 이 작품에서 현세주의적 태도를 간파할 수 있다면 작품을 바로 본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아랍 지역의 현실 중심적인 문화와도 관계가 깊다. 이 점은 우리 문학의 주된 정서와는 거리가 있는 특징이며, 이런 특색을 통하여 문학의 보편성과 함께 민족마다의 특성을 파악하게 된다.
시의 배경에는 '사막', '초원' 등 드넓은 공간적 배경이 등장한다. 아랍 문학을 느낄 수 있는 정서와 특성이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하겠다.
심화 자료
오마르 하이얌(Omar Khayyam)
(아)Ghiyth ad-Din Ab al-Fat umar ibn Ibrahm al-Khaiym Annshaburi. (페)Ab ol-Fat Omar Ebn Ebrahm ol-Khayym.
1048. 5. 18 이란 니샤푸르~1131. 12. 4 니샤푸르. 페르시아의 시인·수학자·천문학자.
하이얌('천막 만드는 자')이라는 이름은 그의 아버지의 직업에서 유래했던 것 같다. 그는 고향 네이샤부르(니샤푸르)와 발흐에서 과학과 철학에 관한 훌륭한 교육을 받은 후 사마르칸트로 가서 대수학에 관한 주요논문을 완성했다. 그는 매우 유명해져서 셀주크 술탄 말리크 샤로부터 역법 개정에 필요한 천문 관측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며 다른 천문학자들과 협력하여 이스파한 시에 천문대를 짓도록 위임받았다. 1092년에 후원자가 죽자 메카 순례를 떠났다. 네이샤부르로 돌아와서는 가끔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예보하는 등 궁정을 위해 봉사했다. 철학·법학·역사·수학·의학·천문학 등의 분야에 통달했지만 불행히도 형이상학에 관한 몇몇 짧은 소논문과 유클리드 기하학에 관한 논문 등을 포함해 그의 산문작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서양에서 오마르는 그가 썼다고 하는 로바이야트('4행시') 모음집에 의해 명성을 얻었다(4행시는 4개의 압운된 행으로 완결하는 시이지만 오마르의 로바이야트에서는 3번째 행이 보통 압운되어 있지 않음).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의 시에서 영감을 받아 유명한 〈오마르 하이얌의 루바이야트 The Rubaiyat of Omar Khayyam〉를 쓰기 전까지는 그의 시는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 시집에 실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현재 널리 알려져 있다. "포도주 한 단지, 빵 한 조각, 그리고 그대', "부귀를 좇으라. 명예란 아무려면 어떠랴", "한때 만발하던 꽃은 영원히 죽는다". 이 4행시들은 거의 모든 주요언어로 번역되었으며 페르시아 시에 대한 유럽인의 인식에 영향을 끼친 주요원인이 되었다. 일부 학자들은 오마르가 시를 썼다는 사실을 의심한다. 당대의 사람들은 전혀 그의 시에 대하여 알지 못했고 그가 죽은 지 2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몇몇 4행시가 그의 이름으로 출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A.J.아르베리는 13세기 원고에서 적어도 250수의 로바이야트를 그가 지은 것으로 확인했다.
오마르의 4행시들은 원래 각각 다른 시기에 씌어졌고 그 자체로서 완전한 시를 구성한다. 서로 연관이 없는 이 일련의 로바이야트들을 원본에 결여된 지적 통일성과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연속적인 만가조(挽歌調)의 시로 결합시키려고 한 사람이 피츠제럴드였다. 독창적으로 적절히 의역된 그의 번역작들에는 문체상의 활력과 간결성이 돋보인다. 진심에서 우러난 그의 시를 주의해서 읽으면 그가 사려깊은 사람이며, 실재와 영원의 특성, 인생의 무상함과 불확실성, 인간과 신의 관계 등의 문제로 번민했음을 엿볼 수 있다. 오마르는 신적 섭리의 존재와 내세를 의심하고, 종교적인 확신을 비웃으며, 인간의 약함과 무지로 인해 불안해한다. 자신의 당혹감에 적합한 답변을 구하지 못해 그는 물질세계의 덧없고 감각적인 아름다움에 심취하기로 작정한다. 그러나 그가 소박한 기쁨의 한가로운 상태를 찬양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본질적인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정직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심사숙고하는 것을 방해하지는 못했다.
이슬람 문학(── 文學 : mic literature)
622년 이슬람교의 발생과 더불어 동쪽으로는 페르시아와 터키, 북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 지방, 서쪽으로는 이집트를 비롯한 북부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슬람권에서 발달한 문학.
1,500여 년 간을 지속해온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전한 이슬람 문학 가운데 역사상 모든 시기에 걸쳐 주변의 다른 문학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아랍 문학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슬람교 발생 이전의 문학
이슬람교 발생 이전을 아랍어로 ' 자힐리야'라고 한다. 자힐리야 시대의 문학은 이슬람교 발생 이전의 약 150여 년 간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유목민의 정서에서 시작하여 구전 및 기억으로 전해온 노래시가 주류를 이룬다. 자힐리야 시는 아랍 시의 전형이 되면서 당시의 사회 상황과 순수 아랍 유목민의 심성, 정서, 기질, 인간적 경험과 삶 등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는 역사적 문헌으로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아라비아 반도의 나즈드의 히자즈 지역에서 성장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시는 아랍 시의 기원을 이루는 '사즈아'로,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를 취하는 각운이 있어 각운산문이라고도 불린다. 사즈아에서 훨씬 더 규칙적인 율격을 가진 표현형태인 '라자즈'가 발전되어 나왔다. 자힐리야 시대의 시는 카시다와 단시로 나누어지는데 단시는 카시다의 초기 형태로 여겨지며 라자즈는 단시에 속한다. 당시의 시가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해 씌어졌는지, 또한 시인들이 얼마나 많이 당시의 주위 환경을 반영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그들이 그들 이전의 시형식을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단지 당시의 판에 박힌 시형식을 보이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500년경에 타글리브 부족 출신의 무하마드 이븐 라비아가 쓴 시가 최초의 시로 간주되고 있다.
시인이 끊임없이 다룬 주제들은 사랑과 향수, 결의와 인내, 남자다운 행동, 긍지, 기사도 정신, 지혜, 인간과 자연과 운명 사이의 조화 등이다. 카시다·풍자시·애도시 등이 주요양식으로서, 이러한 양식의 시들은 주로 여류시인들이 썼다. 운문의 기본적인 운율 구조는 간결하면서도 다양한 감동을 느끼게 해준다. 80줄이 넘는 장시들은 몇몇 오래된 시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으며, 대부분의 시들은 훨씬 더 짧았다. 대표적인 시인으로는 임루 알 카이스(500~540)와 타라파 이븐 알 아브드(543~569)가 있다. 자힐리야 시대는 구전 문학 시대로서 분량이 많은 산문은 기억에 문제가 있어 그다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랍 산문의 기원이 자힐리야 시대에서 유래한다는 것은 분명하며 주로 속담·격언·연설문·충고문 등의 형태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슬람 초기 및 우마이야 왕조의 문학
이 시대는 예언자 마호메트가 등장해 아랍인들의 생활과 사고에 엄청난 혁신과 변화를 가져오는데, 특히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은 알라의 온전한 말씀으로 하나의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언어·문법의 기준에 관하여 절대적 권위를 갖는 표본이 되었다.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은 아랍 문학에 새로운 활력소를 공급해, 아랍어를 더욱 세련되게 발전시켰고, 〈코란〉의 사상·언어·운율은 모든 문학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우마이야 시대에 들어 정복 사업의 결과 아랍 시의 무대가 확대되면서 시의 많은 양상들이 개발되고 사랑과 향수들을 주제로 한 새로운 형태와 주제들이 채택되었다. 물론 고전적 형태나 특징을 가진 시작풍은 자리르(653~733)와 파라즈다크(641~732) 같은 시인들에 의해 계속 유지되어왔다. 이 시인들은 자힐리야 시의 암시적이고 원형적인 특징을 배척하고, 순수한 묘사적 측면의 장점만을 받아들였다.
아랍 산문은 8세기 중반 우마이야 왕조의 쇠퇴기에 처음 나타나 발전되기 시작했다. 아랍어 수사법은 이슬람 시대에 들어서도 거의 변화 없이 사용되어왔다. 처음에는 관료들이 그들 고유의 지역방언을 계속 사용했는데, 이러한 영향은 우마이야 왕조 당시 씌어진 초기 산문에 나타나고 있다. 이슬람 발생 이후 나온 초기의 산문 작품들은 대부분이 연설·설교·서간문이었다. 권력투쟁과 종교분쟁의 결과 연설은 광범위하게 장려되었고, 왕조의 관료들은 그들 고유의 어법을 사용해서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청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주로 〈코란〉의 내용에 근거한 연설을 많이 했다. 당시의 주요 서간문 작가들은 시리아 출신으로 추정되는 아브드 알 하미드 알 카티브(750 죽음)와 페르시아 출신의 이븐 알 무카파(756 죽음)로서 둘 다 정치관료들의 연설문을 작성하면서 문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새로운 문화 창조에 기여했다. 이때부터 문어체 아랍어가 복합적인 이슬람 사회의 공용어가 되었다. ' 아다브'(순문학)라는 용어는 주제와 문체가 어떠하든 편집을 통해 언어로 씌어진 모든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 용어의 사용은 문명의 진보와 인간의 참가치는 오직 글을 통해 보존되고 전파될 때만 계속 진보될 수 있다는 것과 모든 학술적이고 창조적인 노력도 '아다브'를 통해서만 그 결실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바스 왕조의 문학
8~10세기의 작가들은 일련의 작품활동을 통해 아랍 및 이슬람 문명을 세계문명의 한 구성요소로 통합시키고, 아랍인의 과거와 시 및 지식을 재조명하려고 시도했다. 이슬람의 율법, 역사, 〈코란〉 해석, 철학 및 신비주의에 대한 연구를 통해 이슬람 교리의 우월성을 인식하고 비아랍적 문화 유산에 대해 아랍인들의 자기인식을 확립하고자 했다.
이슬람을 철저히 신봉하면서 아랍인 우대 정책을 추구했던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자, 여러 혼합 문화를 창출해낸 아바스 왕조가 이슬람 제국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는데, 문학 역시 아랍 문학사에서 찬란한 발전을 보였다. 그 이유는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 확장과 이슬람 전파를 위한 대대적인 정복전쟁의 결과 아랍어는 국어로 받아들여졌고, 순식간에 이슬람권 전역에서 공용어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인도·페르시아는 물론 그리스 문화와 혼합되면서 범문화적인 특징을 가진 새로운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문화는 중앙 아시아에서 스페인의 안달루시아에 이르기까지 당시의 이슬람 사회를 전부 포괄·반영하는 아랍 문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아바스 문학은 수도였던 바그다드에서 꽃피었는데, 당시의 바그다드는 많은 이민족들로 붐비면서 복합적인 문화와 언어가 혼합된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외에도 이라크의 바스라·쿠파도 지역적인 문화 중심지였다. 아바스 문학은 우마이야 왕조가 멸망하고 아바스 왕조가 창건된 750년부터 바그다드가 몽골의 침략으로 함락되고 아바스 왕조가 패망한 1258년까지의 약 500여 년에 걸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는 통치자가 누구인가에 따라 문화적 특징도 시대별로 구분되었는데, 대략 아바스 왕조의 창건에 공헌한 페르시아 출신 마왈리들의 영향에 의해 정치 및 문화면에서 페르시아적인 색채가 짙었던 제1기(750~846), 제8대 칼리프인 무타심부터 고용한 투르크 맘루크의 영향력이 강했던 제2기(846~946), 중앙 분권화가 가속화되면서 여러 개의 지역 국가들로 분열된 제3기(946~1258)로 나누어진다.
제1기 문학
아바스 왕조의 급변하는 정치·사회·문화적 상황은 산문보다 시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시인들이 칼리프나 고급 관료들과 밀착하여 사치스럽고 풍요로운 도시 생활을 즐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초기 시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페르시아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했는데, 이들은 2개의 언어 또는 문화에 익숙했다. 이러한 혼합적 환경 속에서 시의 주제·종류·문체와 운율 등에도 형태 변화가 일어났다. 이들 이민족 출신 시인들은 순수 아랍 혈통은 아니지만 유목민 출신의 아랍 시인들에 뒤지지 않는 표준 아랍어를 구사했다. 당시에는 언어학자들의 활약이 두드러졌는데, 칼리프들은 자녀들이 정확한 아랍어를 익힐 수 있도록 저명한 언어학자들을 궁전으로 초청, 자녀들에게 시를 암송하게 하여 그 형태와 문체를 익히도록했다. 따라서 시인들은 자신들의 시가 언어학자들에 의해 비평받음을 인식하고 언어학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서도 정확한 아랍어로 된 좋은 시를 써야만 했다. 언어학자들은 카시다와 라자즈(정형단시)의 표준을 설정하고 시인들을 위해 파생형, 동사변화, 문법, 시의 음악성, 운율 등에 있어 언어학적 기준을 마련했다. 이것은 후일 '무활라둔 문체'라는 혁신된 문체를 탄생시키는데, 이 문체는 고대 문체에 새로운 감각을 가미한 문체로서 생소한 어휘가 많은 유목민의 언어와 진부한 어휘가 많이 섞인 일반인들의 언어 사이의 중간적인 문체라 할 수 있다.
시인들은 기존에 다루어졌던 칭송시·풍자시·사랑시 등에서 옛 주제들을 주로 다루었다. 그들은 아랍 시의 고전적 특징과 당시의 새로운 감각을 조화시켰는데, 특히 칭송시는 인간에게 부여된 덕목을 제시하는 도덕 및 윤리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었고, 통치자들에게는 정치적 역할의 수행시 지켜야 할 이상적인 기준을 제시했다. 또한 술이 시의 주제로 등장했으며, 대표적인 시인들로는 아부 누와스, 아부 알 아타히야 등이 있다. 아부 탐맘은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는 불행한 정치 현실을 개탄한 시를 쓰면서 세월에 대한 불평과 고통을 주제로 독립된 카시다를 지었는데, 후에 이븐 루미와 알 무타나비 등이 카시다 형식의 불평시를 쓰도록 영향을 주었다. 풍자시는 건전한 사회건설을 위해 버려야 할 개인적·사회적 악덕을 묘사함으로써 칭송시처럼 교훈적인 면을 지녔다. 대표적인 시인들로 우선 바슈샤르 이븐 부르드(714~784)는 우마이야 왕조의 말기와 아바스 왕조의 초기에 걸쳐 살았던 시인이다. 그는 무활라둔을 개척한 선구자로 유목민 방언의 독특함과 진보된 도시문화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혼합 묘사한 새로운 문체를 개발했다. 아부 누와스(762~813)는 바슈샤르의 시처럼 전통적인 면과 새로운 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칭송시·풍자시·애도시·금욕시 등 아랍 시의 모든 종류들을 포함하는 다작가로 평가된다. 주로 칭송시와 애도시에서 전통적인 고전문체를 사용했고, 기타 시들에서는 새로운 개혁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특히 술을 주제로 한 '주시'를 시의 한 독립된 주제로 확립해 이 분야의 독보적인 시인이 되었다. 술에 대한 묘사는 자힐리야 시에서도 자주 나왔지만 그들의 술에 대한 묘사는 관대함을 찬양하기 위해 사용되었을 뿐 시의 한 독립된 주제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아바스 왕조에 들어와 자유가 늘어나고 사치풍조가 만연되자, 시인들은 술집과 유흥장소 등에서 공개적으로 술을 찬미하는 시를 짓고는 했다. 아부 누와스는 술을 혼과 육이 있는 인간의 몸에 비유한 의인화된 내용의 시를 썼다. 말년에 들어 고통과 근심, 아쉬움 등을 주제로 한 슬픈 곡조의 '금욕시'를 지었는데, 분량은 적지만 그가 쓴 가장 아름답고 진실한 시로 간주되며, 고대 아랍 음악시 중 가장 뛰어난 시로 평가된다. 아부 알 아타히야(748~825)는 금욕시를 주로 쓴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에는 사치하고 무절제한 방탕생활을 하는 부류에 반발해서 금욕과 절제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출현했는데, 바슈샤르나 아부 누와스의 금욕시들이 사람들에게 방탕과 술을 묘사하는 가운데 쾌락적인 생활을 장려했음에 반해 알 아타히야의 금욕시는 이들의 시들에 거부감을 느끼며 금욕, 현세에 대한 환멸, 죽음 등을 주제로 한 금욕시를 썼다. 그의 시는 비교적 자연스럽고 쉬운 어휘들을 선택해 단조로우면서 감미로운 운율로 당대의 뛰어난 시로 꼽힌다. 아부 탐맘(845 죽음)은 시인뿐 아니라 다른 시인들의 시모음집을 편찬한 편집가로 유명하다. 그의 칭송시는 전통적인 고전 형식에다 수사학적 미사여구와 논리적인 사고, 자부심 등의 개인적인 성향이 가미되어 있는데 이러한 특징은 후대에 들어 아랍 칭송시의 한 전형을 만들어낸 알 무타나비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인위성이 없는 자연스러운 어휘와 감미로운 운율로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묘사했으나, 시 구성상의 균형과 조화와 결여로 인해 아랍 문학사에서 주목되는 시는 드물다. 그러나 당시의 문화를 시에 접목시킨 선구자로서 알 무타나비의 금언·격언시와 아부 알 알라의 지성시의 초석을 놓으며 아랍 서사시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는 아랍 산문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시기인데 아랍화된 이민족들이 그들 고유의 관습과 전통조차 아랍어로 저술하면서 아랍 산문 발전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직업 서기관, 번역가, 신학자들의 활발한 활동과 다양한 외래 문화의 수용으로 여러 종류의 산문이 출현했는데, 그중에서 연설·설교·이야기·서한문 등이 주를 이룬다. 특히 페르시아어로 된 정치 및 도덕관계 자료들이 아랍어로 번역되면서 아랍 문학 최초로 서한체를 개발한 아브드 알 하미드 알 카티브 이래 공적인 서한체가 발달하게 된다. 주요 산문 작가들로는 우선 페르시아 출신의 압둘라 이븐 알 무카파(724~759)를 들 수 있다. 그는 아바스 왕조에서는 겨우 10년을 살았고 대부분의 생애를 우마이야 왕조하에서 보냈다. 페르시아의 문학 작품과 정치 제도, 역사 등을 아랍어로 번역해 전하면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었다. 당시 사회의 많은 정치적 병폐와 부조리를 목격하고 글로서 개혁하고자 우화적인 이야기 〈칼릴라와 딤나〉를 번역했다. 이 작품은 동물이나 새를 의인화시켜 통치자의 그릇된 행실을 바로 잡는 우화적인 교훈을 담은 이야기이다. 그의 작품은 아랍인의 수사학과 페르시아의 과장법, 그리스의 논리학, 인도의 지혜가 혼합된 것으로, 형식보다는 의미 전달에 중점을 둔 쉽고 간략한 문체를 사용했으며, 이전 작가들에 비해 가운을 적게 사용했다. 그는 번역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면서 후대의 많은 문학가들뿐 아니라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제2기 문학
페르시아인들의 정치 세력이 약화되고 투르크인들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정치적·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부 계층의 사치와 쾌락은 계속되었으나 이러한 무절제한 삶에 대한 반발로 수피주의와 같은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집단이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시문학에서도 두드러져 시인 아부 탐맘에 의하여 이미 고대시의 기능성을 되찾기 시작했는데, 특히 무슬림 이븐 알 왈리드(747~ 823)가 최초로 시도한 일종의 수사학적 기법인 미화법(Badi)이 개발 채택되기 시작했다. 이어서 시인 이븐 알 무타즈(863~908)가 〈미화법〉이라는 저서에서 시의 수사학적 기교를 집대성하여 설명함으로써 시의 기교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작가들은 학술적인 체계를 갖춘 아랍어의 미학적·음악적·문법적·언어학적 특성들을 수월하게 이해하고, 쉽게 시를 해독하거나 음미했다.
이 시기는 활발한 번역과 학술 발전의 결과 많은 문학가들이 여러 문화를 흡수·혼합하여 독특한 특성을 지닌 아랍의 독창적인 새 문화를 창출했다. 아부 알 자히즈는 이슬람 문화와 외래 문화를 조화시켰으며 이븐 쿠타이바는 아랍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혼합을 시도해서 사상과 학문이 혼합된 문학 장르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순수 아랍 사상과 외래 사상과의 자연스러운 만남과 결합은 시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븐 알 루미(835~896)는 시인들 중 외래 사상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국제 감각과 풍부한 지식으로 아랍시를 보다 이성적인 시로 만들었지만, 아랍시가 지닌 문체상의 전통적 특징은 그대로 간직하였다. 그는 무타질라 학파의 이성과 논리중심적 사고에 심취했는데, 그의 카시다는 무타질라 학자들의 대화법을 그대로 모방한 듯 매우 상세하고 부연적인 표현이 많다.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은 시인들은 자신들의 시에 사상을 가미하기는 했으나 시의 근본적인 주제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이전 시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지던 주제들이 정식 주제들로 독립되기도 했는데 아흐마드 이븐 유세프가 칼리프 알 마문을 위해 지은 〈축하시〉가 많은 유행을 하기도 했다. 또한 제 1기에 아부 탐맘과 같은 몇몇 시인들의 시에 나타난 불평의 묘사가 제2기에 들어 거의 모든 시에 보편화되었다. 신을 향한 심령의 갈구와 열정적 사랑, 신과의 합일을 이루고 싶은 갈망 등을 시로 묘사한 수피주의 시가 많이 씌어져 종래의 금욕시와 완전히 구별되었다.
이성과 논리를 중시한 그리스적 문체와 순수 아랍어의 문체를 잘 조화시킨 혼합 문체가 아바스 왕조초에 나타난 이후 산문은 이 시기에 와서 더욱 번성했는데, 특히 문학자이자 신학자였던 아부 알 자히즈(775~ 868)가 대표적인 작가였다. 그는 적절한 어휘 선택을 강조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들리는 각운과 음의 분철을 도입했는데, 후에 이븐 알 무타즈가 〈미화법〉을 저술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아랍 산문에서 독특한 학파를 이끌어간 작가 중 한 사람으로서 기존의 전통을 타파하기 위해 대담성 있는 시작법을 구사해서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에 의해 서민들에게 더욱 익숙해진 아랍 산문은 여러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 더욱 발전되었다. 또한 〈코란〉의 구절이나 하디스를 인용하여 수피주의의 독특한 용어로 해석하는 '무다키린'이라는 새로운 설교가들이 등장했는데, 보통 설교가들에 비해 더욱 철저했던 그들의 금욕과 절제 생활은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알 자히즈를 제외한 다른 산문 작가들의 작품에는 각운 산문체가 도입되어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치는 경향도 나타났으며 이러한 경향은 작가가 지닌 감정과 사상의 자유로운 표현을 제약했다.
제3기 문학
칼리프의 세력이 투르크인들에게 넘어간 제2기 이후 아바스 왕조는 946년에 부이 왕조가 바그다드를 점령한 후부터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되어, 바그다드는 1055년에 다시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점령된다. 946년부터 1055년까지는 아바스 왕조의 통치력 약화로 인해 생겨난 강력한 지방 군주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독립적으로 통치하면서 문화적 후원을 하기 위해 작가들과 시인들을 육성한 시기인데, 기술적인 문학비평의 출현이 주목할 만하다. 9세기말부터 이미 문학적 혹은 예술적 산문에 나타나기 시작한 이러한 비평 방식은 10세기에 들어서는 중동지역의 모든 종류의 아랍 문학에 적용되었다. 10세기 중반부터 이미 각운 산문체가 공적·사적 서한문에까지 채택되어 사용되었고, 디완 서기들이 채택하여 사용하게 되면서 일반 문학에도 도입되어, 거의 모든 종류의 산문에 미려함·재치·세련미가 가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인위적 문체는 작가들로 하여금 삶의 모습을 사실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아랍 문학의 생동감과 정직성을 약화시켰다.
시리아 북부에서 탄생한 함단 왕조는 문학 활동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많은 문학가들을 배출시켰는데, 특히 사이프 알 다울라가 후원한 가장 위대한 아랍 시인 알 무타나비가 있다. 그는 기존 시인들의 부드러운 필체와 기술적인 정교함에 아부 탐맘의 아랍적인 정통성을 혼합하여, 기술적인 구성과 적절한 어휘 사용, 읽을수록 사로잡는 문체 등으로 대단한 명성을 누렸다. 또한 직접 자신의 시를 모아 정리하여 사람들에게 읽어준 후 몇몇 시구에 대한 설명을 받아 적게 한 최초의 시인으로서 칭송시·애도시·풍자시 등의 다양한 주제의 시를 썼다. 특히 칭송시는 그가 쓴 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진부한 어휘나 복잡한 표현, 지나친 과장, 부적합한 비유가 들어 있기는 하지만, 반면 강한 음악적인 여운을 남기는 수사학적 표현의 독특함으로 문학적인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이 시기의 문화와 호화로운 생활이 산문의 문체에도 큰 영향을 주어 산문체도 화려하고 우아한 경향을 띠었다. 수사학과 각운의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기술 연마처럼 인식되었다. 이븐 알 아미드와 카디 가 파딜과 그의 제자들이 수사학을 사용하는 아랍어의 문체를 보존했다. 또한 〈천일야화〉가 아랍어로 번역되었는데, 바그다드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작가들에 의해 순수한 아랍적인 이야기들이 첨가되어 재각색되어졌다. 제3기는 이슬람 제국이 여러 군소 국가들로 갈라져 정치적인 혼란과 분열은 있었으나 함단 왕조와 부이 왕조는 문학 활동을 적극 후원하여 아랍 문학의 황금기를 계속 유지했고, 이후 셀주크 투르크가 침입하면서 그들의 무관심과 작가나 시인들의 수사학적 형식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으로 아바스 왕조의 문학은 침체기를 걷게 되면서 결국 아랍 문학은 쇠퇴기로 접어든다.
안달루시아 문학
안달루시아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의 아랍 명칭으로, 이슬람 정복이 완결된 712년부터 멸망한 1269년까지의 약 8세기 동안 아랍 이슬람교도들이 이 지역에서 이룩한 문학이 안달루시아 문학이다. 초기에는 아바스 왕조의 문학과 그 종류를 모방하면서 같은 수준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특히 자연환경이 바뀌면서 그들의 정신 세계와 상상력이 넓어지자, 특색있는 문학이 탄생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알 하캄 2세가 통치하던 시기가 안달루시아 문학의 전성기였는데, 이 시기는 여러 학문 분야의 발전, 사상 및 표현의 자유 확대, 학문의 우대, 철학과 자연과학의 수용, 번역을 통한 그리스와 라틴 문화와의 접촉, 안달루시아 민족주의의 출현 등으로 인해 안달루시아 문학의 황금기로 간주된다. 특히 시부분에서는 아부 누와스가 주도해온 현대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아랍 시의 복고주의 경향이 두드러졌다. 이 운동은 보수성과 개혁적 성향을 동시에 띠고 있었는데, 즉 카시다의 구성·언어·음악성 및 정신과 성격을 대체로 유지하면서 시의 내용·묘사·표현법과 미학에서는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대체로 안달루시아 시는 아바스 시와 경쟁한 결과 그 주제와 다양성에서 아바스 시와 유사한 양상이었고, 운율과 음악성을 중시한 나머지 당시 유행했던 음악적 분위기에 따라 새로운 운율을 추가한 ' 무와슈샤흐'라는 일종의 노래시를 탄생시켰다. 비교적 쉬운 어법, 다양한 종류의 운율, 각운과 노래를 바탕으로 한 무와슈샤흐가 보급되자 새로운 문학인 ' 자잘'이 출현했다. 환경의 요구를 수용하며 일반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발생한 대중주의적 경향을 띤 무와슈샤흐와 자잘은 복수 각운과 서정성과 음악성을 특징으로 한 독특한 시로서 비이슬람권에까지 전해졌다.
투르크 시대 문학
아바스 왕조가 1258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한 후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집트에 상륙한 1798년까지를 투르크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맘루크들이 독립적으로 번영하던 맘루크 시대(1258~1517)와 아랍 및 이슬람 세계가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는 투르크 시대(1517~1798)로 나누어진다. 맘루크 시대에는 지배자들이 비록 비아랍인이었지만 아랍어가 아직도 공용어와 문화적 매개 언어로서 통용되고 있었고, 상당수의 문인들도 배출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서는 모든 문화 활동의 중심지가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이동되어, 튀르크어가 공식어로 자리잡게 되면서 아랍 문학은 점차 독창성과 창조성, 상상력을 상실하고 침체기에 접어든다. 시와 산문은 내용보다는 수사적 언어에 치우치고, 시는 미사여구와 현학적인 어휘로 표현된 유치함을 지녔으며 이전 시인들을 모방하기에 이른다. 산문은 서한문이 주를 이루는데 공적 서한문은 화려한 수사체의 각운 산문을 선호했고 점차 튀르크어가 섞이게 되었다. 학문도 많은 발전이 이루어져 역사서·지리서·전기집·연대기·백과사전 등의 편찬이 성행했고, 특히 신비주의 분파인 수피주의자들의 전기를 다룬 많은 저술이 나왔다. 이 시대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튀니지 출신의 역사가·철학자·사회학자인 이븐 할둔(1332~ 1406)이 저술한 〈무카디마 Muqaddimah〉(역사서설)인데, 역사적 진실과 과오를 구분해 주는 기준점을 제시하는 역사학의 방법론과 역사철학의 기본 개념을 잘 제시하고 있다.
부흥시대 및 현대 문학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공략한 1798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를 부흥시대라고 하고,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현대 아랍 문학의 시기로 본다. 아랍 문학은 부흥시대를 맞이하여 침체기에서 벗어나 재도약을 시작한다. 현대 아랍 문학은 부흥시대의 지적 성장과 문인들의 부단한 각고 끝에 이룩한 산물이다. 부흥시대의 문학과 비교해 현대 아랍 문학은 질과 양에서 모두 장족의 발전을 보였고 주제도 훨신 다양해졌다. 서구 문화의 영향으로 여성 교육 및 여권의 신장으로 여성 문인 및 시인들이 등장했고, 작가층의 폭도 상류층에서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다양화되었다. 아랍 세계는 광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어 문학 역시 여러 지역에 걸쳐 다양하게 발전되었는데, 초기에는 이집트와 시리아 지역에서 주로 발전했으나, 1930년대 이후에는 모든 아랍 국가들에서 아랍 문학이 자리를 잡았다. 현대 아랍 문학의 활동 중심지는 이집트인데, 나폴레옹의 침략 직후 무하마드 알리가 집권하면서 서구화 정책을 펴고, 초기 시리아 지역 문인들의 이집트 이주 및 아즈하르 대학을 중심으로 활성화되었던 아랍 고전 연구 등이 이집트의 문학발전을 이끈 활력소들이기 때문이다. 부흥 시대의 시인들은 오스만 투르크 지배하에 거의 침체되어 있던 아랍어 고전의 어휘·문체·사상으로부터 그들의 시적인 영감을 얻어내면서 당시의 아랍 조국의 현실과 정치·사회 문제를 다룬 애국적·민족적 시를 주로 썼다. 아랍인들이 개화기에 유럽인들과 접촉하면서 새로운 민족적 각성을 하게 되는데, 특히 기존의 지배 세력이던 오스만 투르크로부터의 독립, 아랍 민족주의의 확립, 아랍 세계의 낙후성 극복을 위한 사회 개혁과 교육제도의 혁신이 대두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펼치려는 개혁가들에 의해 새로운 산문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형식주의에 젖은 당시의 인위적이고 어색한 과거의 산문은 생동감과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개혁의지를 확고히 표현하는 새로운 사상 및 정서를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문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 아랍 시는 수준높은 서구의 시작법과 문학 사조의 영향으로 과거의 고전적인 카시다와 비교해 차원높은 시가 나왔지만 아랍 문학의 모든 장르 중에서 서구의 영향을 가장 적게 그리고 늦게 받은 편이다. 투르크 지배하에서는 침체된 아랍 시를 부흥시키려고 마흐무드 사미 알 바루디(1839~1904)가 과거 아랍 시로의 복귀를 시도하여 신고전주의 시를 썼고, 칼릴 무트란은 낭만주의 시를 썼으며, 1930년대에 들어 아흐마드 자키 아부 사디(1892~1955)가 주도한 아폴로 그룹에 의해 본격적인 낭만주의 시운동이 일어났다. 이어 시리아 출신의 문인들이 미국 등지로 이주하면서 해외에서 이주 문학을 탄생시키는데, 그중에서 칼릴 지브란이 영어로 쓴 〈예언자〉는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작품에 깔린 신비적 색채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이후에는 팔레스타인 시인들에 의해 사실주의 시, 자유시, 참여시 등이 나오는데, 특히 참여시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에 항의하는 저항시의 성격으로 발전했다.
마룬 알 나가시(1817~55)에 의해 현대적 의미의 희곡과 연극이 아랍 문학에 처음으로 도입되는데, 그후 이집트의 타우피크 알 하킴(1904~87)에 이르러 전성기를 이룬다. 그는 스스로 극작가로 자칭한 최초의 아랍 작가로서 전생애를 희곡에 바치며 희곡을 아랍 문학의 한 독립적인 장르로 만들 정도로 발전시킨 작가이다. 아랍 문학은 서구로부터 유입된 문화, 특히 이집트에서 추진된 서구 저서들의 아랍어 번역과 출판 등에 힘입은 바 크다. 프란시스 마르라시(1863~73)가 쓴 〈진리의 숲〉이 아랍 최초의 창작 소설로 인정되고 있으나 알레고리적 요소가 심해,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여러모로 미흡했다. 그후 살림 알 부스타니가 1870년에 발표한 〈시리아 정원에서의 연애〉는 어느 정도 소설의 구성요소를 갖추고 있어 순수한 아랍의 첫 소설로 간주된다. 초기의 아랍 소설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씌어졌는데,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아랍인들은 아랍의 고전 문학인 마카마를 재조명하면서 복고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집트의 소설은 초기의 서구 비판과 경계, 이슬람 사회 수호를 지향하는 신마카마와 함께 다시 신마카마에 대한 반작용으로 씌어지며 전개되었다.
1919년 혁명부터 1952년 나세르의 사회주의 혁명까지는 아랍 소설이 꾸준히 성장한 시기로서 분석 소설, 자전적 소설, 낭만주의 소설, 역사 소설 등이 주가 되는데, 특히 타하 후세인은 첫 소설 〈도요새의 기도〉에 이어 〈나날들〉이라는 자서전적 소설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나지브 마푸즈(1911 태어남)는 당시 파룩 왕의 혹독한 탄압하에서 정치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역사 소설로 묘사하면서 소설가로서 등장했다. 그는 40여 편이 넘는 소설과 10여 편의 단편집을 발표하여, 아랍 세계의 드문 다작 소설가로, 1952년 혁명 이후 7년의 공백기 이후 발표한 〈게벨라위의 아이들〉(1959)로 1988년에 아랍 세계 최초로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현대 아랍 문학의 부흥은 초기의 시리아 지역 문인들의 활약을 제외하고는 주로 이집트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1952년의 나세르 혁명 이후 이집트의 현대 소설은 여러 차례의 대격변을 겪으면서 성숙해갔다. 이집트 외의 다른 아랍 국가들에서도 문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데, 특히 수단 출신의 살리흐 앗 타이이브(1929 태어남)는 〈북으로 이주하는 계절과 알자간의 결혼식〉 등의 소설을 써 수단은 물론 아랍 소설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고, 그의 소설은 구미에까지 번역되어 읽혀진다. 이 소설들은 파리와 런던에 유학가서 서구의 진보된 과학과 물질 문명을 접한 한 아랍 청년이 겪는 문화적 충격과 갈등을 묘사한 소설로 동서양의 문화적 만남과 대립·갈등·화해 및 조화의 양상을 묘사한다. 최근에는 프랑스에서 저작 활동을 해온 모로코 출신의 작가 타하르 이븐 자룬이 〈거룩한 밤〉이라는 소설로 1987년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아랍 문학의 자존심을 올려주기도 했다.
이슬람 문학은 아랍 문명의 오랜 역사와 더불어서 1,500여 년 간에 걸쳐 다양한 흥망성쇠를 거치는 가운데 주변의 다른 문화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아왔다. 특히 현대 아랍 세계는 정치적으로 서구와 반목하고 경제적으로는 서구에 예속되어 있으면서도 사상과 문학등에서는 서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아랍 문학 역시 서구의 문학 사조와 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은 부인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아랍 및 이슬람의 독창성과 전통을 살리면서 정체성을 가진 고유 문학을 생산해야만 세계 문학계에서 창의성과 독창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An. Schimmel 글 | 權亨基 참조집필
터키 문학( ─文學 : Turkish literature)
투르크계의 모든 민족들에 의해 씌어진 문학작품의 총체.
터키 문학의 역사는 세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번째 시기는 투르크 민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 문학이 순수하게 투르크적이었던 시기로서 대략 7~11세기이다. 2번째 시기는 이슬람 문화의 지배기로서 아랍·페르시아 문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11세기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이어진다. 3번째 시기는 유럽의 사상과 문학의 지배적인 영향을 받은 근대 이후의 시기로 술탄 아브둘 메지드 1세 즉위(1839) 이후를 가리킨다.
전이슬람기
이 시기 최고의 문학적 유산은 오르혼 비문(돌궐 비문이라고도 함)이다. 또한 주요한 것으로서 퀼 티긴 비문, 빌게 카간 비문, 토니우쿠크 비문 등이 있다. 이들 비문은 1889~97년에 발견되었고 모두 돌궐문자로 기록되어 있다. 덴마크의 언어학자 빌헬름 톰센은 이 문자를 '투르크 룬' 문자라고 부르고 1893년 해독의 실마리를 찾았다. 퀼 티긴 비문은 돌궐(고대 투르크 민족)의 왕족 퀼 티긴(685~731)의 기념비이고, 빌게 카간 비문은 그의 형 퀼 티긴에게 옹립되었던 돌궐의 군주 빌게 카간(716~734 재위)의 기념비이다. 모두 서사적인 부분을 포함하고 돌궐의 기원, 황금시대, 돌궐의 독립 등에 대해 기록한 것이다. 토니우쿠크 비문은 돌궐의 독립에 즈음하여 공적을 세우고, 특히 빌게 카간의 중신이었던 토니우쿠크가 스스로 자기의 무공을 자랑하여 생전에 세운 것이다. 이들의 문체는 극히 세련되어 튀르크어가 꽤 일찍부터 발달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돌궐문자로 씌어진 비문과 돌은 그밖에도 북몽골 고원, 남시베리아, 투르키스탄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이슬람기
투르크 민족은 이슬람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아랍·페르시아의 운율 및 문학적 전통을 점차 도입했다. 이슬람화된 투르크 문학작품으로 최초의 것은 카슈가르의 술탄의 시종 유수프 하스 하지브의 〈행복을 주는 지식〉(1069)이다. 이것은 6,000개 이상의 2행연구로 이루어진 우의시로, 한 나라를 어떻게 통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군주, 대신, 대신의 아들, 친구가 모여 대화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전이슬람기의 전통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서 투르크의 문학작품에는 차가타이어, 아제르바이잔어, 아나톨리아어 또는 튀르크어의 3종류의 언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차가타이어
동부 투르크족의 문어로 주로 중앙아시아, 킵차크 한국, 이집트, 무굴 제국기의 인도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차가타이어는 정치적·문학적 중심이 없었기 때문에 여러 방언의 영향을 받았다. 알리 시르 네바이(1441~1501), 무굴 제국의 황제 바부르(1483~1530) 및 〈투르크족의 계보〉의 저자 아불가지 바하두르 한(1663 죽음)은 모두 이 방언을 잘 사용한 위대한 고전적 저술가이다. 바부르의 회상록 〈바부르의 서(書)〉는 그의 모험적 생애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다채로운 문체로 씌어진 동부 튀르크어 걸작 산문이다. 차가타이어로 씌어진 것으로는 이들 외에 〈오구즈 카간 전설〉이 남아 있고 이것은 고대 투르크의 서사시 가운데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
아제르바이잔어
동부 오구즈족(서부 페르시아 이라크 오스만 왕조의 정복 이전의 동부 아나톨리아에 거주한 투르크족)의 문어로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어에 가깝다. 네시미는 이 문학의 대표적 인물인데 열렬한 신비주의자였기 때문에 이단자로 몰려 처형되었다(1420경). 그의 시는 아름다운 표현과 종교적 감성이 풍부하다. 이스마일 1세(1487~1524)는 페르시아의 사파위 왕조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하타이라는 필명으로 문학활동을 했고 아나톨리아의 종교적 민중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시에서는 종교적 감동과 정치적 선전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시아파의 교의가 잘 설명되어 있다. 후줄리(1556 죽음)는 고전파의 대표적 인물로 아제르바이잔어와 오스만어의 후배시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대 투르크 서사시의 요소들을 포함한 아제르바이잔어의 중요한 작품 〈데데 코르크트의 서〉는 12편의 서사시적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아나톨리아어 또는 튀르크어
13세기 이후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투르크 및 오스만 제국의 언어로, 이 언어로 씌어진 문학은 전고전기, 고전기, 고전기 이후, 민중문학 등으로 시기가 구분된다. 14~ 15세기에 해당되는 전고전기에는 페르시아 고전문학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다. 이 시기의 가장 걸출한 인물인 유누스 엠레(1320 죽음)는 간소한 단어를 써서 투르크의 전통적인 음절에 의한 운율을 살린 시를 지었다. 유명한 신비주의자 메브라나의 아들 술탄 베레드(1312 죽음)도 똑같이 간소한 문체로 시를 지었다. 이들 외의 대표적인 인물은 아시크 파샤(1332 죽음)와 아흐메드 다이이다. 아시크 파샤는 신비주의적이고 교훈적인 시 〈갈리브 나메〉를 지었고, 다이의 우의적인 이야기시 〈첸그 나메〉는 20세기에 발견되었는데 착상과 문체가 극히 독창적이다. 궁정시인 아흐메디(1334~1413)는 몇 개의 이야기시 외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생애를 다룬 대서사시 〈이스켄데르 나메〉를 지었는데 이 안에 현재 알려진 최고(最古)의 오스만 제국 연대기가 포함되어 있다. 셰이히(1428 죽음)는 그 속편을 썼다. 그는 또 이야기시 〈휴스레브와 시린〉 및 유명한 해학풍자시 〈어리석은 자의 아내〉도 썼다. 쉴레이만 첼레비(1422 죽음)는 마호메트를 칭송한 민중적인 시 〈메브리도〉를 썼는데, 이것은 이슬람 세계에 널리 분포하는 마호메트의 탄생을 칭송한 메브리도 문학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 투르크인에게 가장 애송되는 작품이다. 15세기 중반의 고전기에는 이스탄불에서 투르크 민족의 지위가 확립되어 투르크 문학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의 고전문학은 이미 완전히 흡수·동화되었기 때문에 투르크의 시인은 각각 개성 있는 색채를 띤 순고전적 시풍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시대의 걸출한 시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사람이 있다. 아흐메드 퍄샤(1497 죽음)는 투르크의 고전적 작시수법을 발전시켰고, 더욱 우수한 시재를 갖춘 네자티(1509 죽음)는 세련되고 독창적인 문체로 서정시와 비가를 지었는데 그의 문체는 후세의 시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자티(1546 죽음)는 〈후각과 나방〉을 썼고, 타슈르자르 야히야(1573 죽음)는 요세프와 포테이파의 아내의 이야기에 기초한 이야기시 〈유수프와 즈라이하〉 및 쉴레이만 1세의 왕자 무스타파를 애도하는 유명한 비가를 지었다. 광신·위선·추종을 풍자한 〈테르키브 이 벤드 Terkib-i bend〉(일종의 시 형태)로 알려진 바그다드의 루히(1605 죽음), 푸줄리 파키(1526~1600:시인의 왕으로 알려짐)는 모두 고전기의 대표적 시인이다. 고전기의 산문은 다종다양하여 민간설화, 종교적 요소와 서사시적 요소가 반씩 섞인 이야기, 다소 중후하고 기교적인 문체로 씌어진 작품, 그리고 특히 고전적 산문의 거장인 연대기작가의 저술 등이 있다. 아시크파샤자데(1485 죽음)와 네슈리의 연대기는 일종의 서사시적 성격을 갖추고 있으며 간소한 튀르크어로 씌어졌다. 이븐 케마르(1535 죽음)와 호샤 사데딘(1536~99)에 이르러 역사적 서술에 있어서 문학적 발전은 그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사데딘의 〈역사의 왕관〉은 난해하지만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의 대표적인 연대기이다.
그밖의 연대기작자로는 다수의 논설을 쓰고 또 인류의 창생에서 16세기말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 〈제 사건의 본질〉과 1578~89년 이란 전투의 종군기록〈승리의 서(書)〉를 쓴 무스타파 알리(1606 죽음), 자신이 목격한 사건을 특히 흥미진진하게 서술한 페체비(1650 죽음), 캬티프 체레비(1608~1657), 시라흐다르(1723 죽음)와 투르크 최대의 사가인 무스타파 나이마(1655~1716)를 들 수있다.
고전적 시풍이 부흥한 18세기를 고전기 이후로 분류하는데, 그 전반기에 속하는 시인 아흐메드 네딤(1681~1730)은 아흐메드 3세 치하의 융성한 시대를 다채롭고 화려한 시로 노래했다. 후반기에는 고전파 최후의 대(大)시인 가리프 데데 (1755~98)가 독창적인 신비주의적 이야기시 〈선과 사랑〉을 썼다. 반면에 산문은 쇠퇴했다.
지금까지 서술한 고전기 및 그 이후의 투르크 문학은 모두 오스만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상류계급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궁정문학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당시의 민중으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것뿐이었다. 투르크 대중은 그들만의 민중문학을 즐겼는데 민족 악기 사즈를 한 손에 들고 제국을 떠돌아다니는 음유시인들의 시적인 이야기와, 야외에서 공연하는 촌극과 카라괴즈(karagoz:터키 특유의 연극)가 있다. 음유시인으로는 17세기에 동부 아나톨리아 각지를 편력한 카라자오우란이 대표적인데 간소한 튀르크어로 민중의 생활을 노래했다. 한편 터키인 각 계층 사이에서 가장 친숙하게 전해내려온 민화는 〈나스레딘 호자 이야기〉이다. 이 민화의 성립연대와 주인공 나스레딘 호자의 실재성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지만,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교훈적인 이야기로 터키 국내뿐만 아니라 중앙 아시아, 서아시아, 아제르바이잔, 발칸에 산재하는 투르크계 여러 민족이 공통으로 향유하는 값진 문화유산이다.
근대와 현대
유럽 문예의 유입
19세기 들어 서구에서 들여온 여러 가지 개혁이 진행되면서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주로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시나시(1826~71), 지야 파샤(1825~80), 나무크 케마르(1840~88), 아브뒬하크 하미드(1852~1937) 등의 선구자들이 소설·희곡·에세이 같은 서구의 문학형식을 도입하여 터키 문학에 적용했다. 이 가운데 시나시는 간결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를 가진 새로운 터키 문학의 창조에 노력하면서 저널리즘이라는 새로운 문학활동 분야를 확립하고, 1860년 아기아흐 에펜디(1832~85)와 함께 민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신문 〈세론의 주석〉을 발행했다. 터키에서 자유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상가 나무크 케말은 다양한 정치적·사상적 활동을 하면서도 터키 근대문학 확립에 노력했다. 대표작인 희곡 〈조국 또는 지리즈토레〉는 터키 지식계급 사이에 처음으로 조국이라는 관념을 심어주어 민족주의 사상의 근거를 만들었다. 19세기말에는 소설가 하리드 지야 우샤클리길(1863~1945)과 시인 테우피크 피크레트(1867~1915) 등이 잡지 〈학문의 부 Servetif nun〉를 발간하면서 하나의 문학 유파를 창시했다. 이 파에 속한 문학자들은 수법과 착상에서 그 이전의 사람들보다도 한층 서구적이었다. 이 가운데 피크레트는 보들레르 등의 영향을 받아 이것을 전통적 시형식에 접목시켜 터키 근대시의 창시자가 되었고, 우샤클리길은 프랑스 자연주의를 도입해 튀르크어에 의한 자유로운 산문표현의 가능성을 열었다. 소설가 휴세인 라흐미 귈프날(1864~1944)과 에세이 작가인 아흐메드 라심(1864~1932)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가는 과도기의 이스탄불 생활을 강력한 사실주의 수법으로 묘사했다. 간소한 문체와 사실주의는 문학에 처음으로 터키주의 사상을 도입한 메메드 에민(1869~ 1944), 루사 테우피크(1868~1949)의 시풍에도 보인다. 1908년에 소위 청년 터키당의 혁명 이후 상징주의자 아흐메드 하심(1933 죽음)을 지도자로 하는 젊은 세대의 문학자들은 '미래의 새벽(Fecr-i Ati)파'를 결성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전통적 조류
이 시기에 신고전주의자 야히야 케말 페야트르(1884~1958)의 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케말은 오랜 작가생활을 통해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궁정문학을 전하는 최후의 시인이 되었지만, 상징파 시인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세련된 예술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 민중적 범이슬람주의 시인 메흐메드 아키흐(1873~1936)는 터키 국가(國歌)를 작사했고 여전히 전통적 수법을 고수했다. 아키흐는 주로 일상 튀르크어를 사용하면서 고전적 작시법을 완벽하게 구사했다. 열렬한 이슬람교도로서 교훈적 색채가 농후한 시를 지었지만 종교적 또는 민족적 대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쓴 시들은 서정시의 극치를 이룬다.
민족주의적 문학
이른바 청년 투르크당의 기관지로 된 잡지 명칭을 회고하여 이름붙인 '투르크인의 조국'(Turk Yurdu) 운동 및 사로니카의 잡지 〈어린 펜〉을 중심으로 전개된 튀르크어 간소화 운동에 이어, 지야 괴칼프(1875~1924)를 주된 지도자로 하여 터키 민족의 독자적인 문학 발전이 이루어졌다. 괴칼프는 문학의 기초를 터키 민족주의의 이상 염원에 두고 터키 민족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문학에 생기를 주려고 노력했다. 문학자들은 터키 국가, 터키 민족 등에서 새로운 주제를 구했다. 이 시기에 걸출한 산문작가로는 터키 문학사와 민간전승에 관한 저술이 있는 파트 쾨프륄뤼(1890~1966), 언어개혁을 주장하고 대중적 단편소설을 지은 오메르 세이흐페딘(1884~1920), 야쿠브 카드리 카라오스만오울, 터키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공공생활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하리데 에디브 아두바르(1883~1964), 아나톨리아 민중생활의 현실이 처음으로 담겨진 장편·단편 소설을 쓴 레피크 하리드 카라이(1888~1964), 재기에 넘친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 작가인 파리히 루흐크 아타이(1894~ 1971), 대중소설가 레샤드 누리 긴테킨(1892~1956) 등이 있다. 시단에서는 서정적·애국적 주제를 다룬 소박하고 낭만적인 시로 1920년대의 가장 대중적 시인이 된 파르크 나피즈 차무르베르, 신비주의 시인 네지브 파즈이르 투사기에기 등이 활동했다.
공화국 수립 이후의 문학
케말 아타튀르크의 개혁 이후 다양한 문학이 발전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면서 터키 본래의 독창적 문학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문학은 옛 수도 이스탄불의 중·상류층 생활과 문제들뿐 아니라 터키 국내의 모든 지역에서 민중이 관련되는 문제들과 운명 등에도 점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나즘 히크메트 란(1902~63)은 1920년대 초기에 자유시와 '비전통적'인 시풍을 도입했지만 그의 영향은 1930년대에 나타나기 사작했다. 히크메트는 1921~24년 모스크바의 쿠트베(동양근로자공산주의대학)에서 유학했을 때 마야코프스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뒤에 국제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터키 국내에서는 항상 탄압을 받아 1951년에 최종적으로 모스크바로 망명하고 그해 부라그 국제평화상을 받았다. 전통을 고려하면서 터키의 시풍을 풍부하게 한 시인으로는 용어의 선택, 미묘한 비유적 표현에 의해 음절률(音節聿)을 사용하면서 보기 드물게 음악적 효과를 올린 A. H. 탄브나르(1901~62), A. M. 도라나스, 마음에 젖어드는 유려한 문체로 사람들의 비애와 우울을 주로 다룬 C. S. 타란주(1910~56)가 있다.
오르한 벨리 카누크(1914~50)는 다시 자유시를 도입하여 주제의 범위를 넓혀 새로운 시풍을 개척했다. 오크타이 리파드와 M. C. 안다이 등은 카누크의 용어나 수법을 써서 시를 지었다. 자히트 킬비는 아나톨리아에 대한 향수를 노래한 시를 썼는데, 이것은 터키 문학에서 가장 우수한 민중시로 손꼽힌다. 또 다면적인 시인 베프체트 네자틴기르는 때로 상징파적 경향을 갖는 지적인 문체를 사용하고 주로 인간의 운명을 노래한 시를 발표했다. 그러나 20세기 터키 시단 최대의 인물은 파질 휴스뉘 다아라르자이다. 독창적인 문체로 쓰인 그의 서정시와 서사시에는 정신적 불안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공화국 시기에 두드러진 산문 형식은 단편소설이다. 사회문제 및 하층 민중의 생활에 중심이 놓여 있지만 그와 함께 자서전적이며 심리적인 형태의 단편도 나타났다. 1930년대 초기에 사바하틴 알리(1907~49)는 아나톨리아 농촌의 현실을 스케치했고, 타고난 시인이었던 사이드 파이크 아바시야누크(1907~54)는 일상어를 사용하여 단편소설의 새로운 형식을 개척했다.
1940년대 말기부터 대부분의 산문작가는 오래 무시되었던 문학형식인 소설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농민 및 소도시 민중의 생활과 제문제가 단편 및 장편소설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작가로서는 사밈 코자괴즈, 터키 유르두 운동의 계보를 잇는 ('농민학교' 운동을 낳았던) 새로운 형태의 사회파 농촌작가인 탈리브 아바이둔, 파키르 바이크르드, 특히 르한 타르스와 민중 이야기의 수법을 교묘하게 이용한 야샤르 케말과 오르한 케말 등을 들 수 있다. 야샤르 케말은 현대 터키 문학에서 주요한 조류의 하나인 사회파 문학의 기수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입장을 취했다. 지주에 의해 토지와 연인을 빼앗긴 청년의 복수를 주제로 한 야샤르 케말의 대표작 〈말라깽이 메메드〉는 8개 국어로 번역되었고 노벨 문학상 후보로도 올랐다. 오르한 케말의 소설 〈비옥한 대지 위에서〉(1954)는 아나톨리아의 농민생활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케말 타히르는 어쩌면 그 세대의 가장 우수한 소설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은 터키의 도시 및 촌락에서의 사회문제와 인간관계를 널리 다루고 있다. 크림 반도 출신의 터키인 젠티즈 다쥬는 제2차 세계대전중에 그의 고향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대해서 자서전적인 소설을 써서 큰 호응을 받았다. A. S. 히사르(1888~1963)는 전 세대에 속하지만 그가 걸작을 발표한 것은 1940년대부터였다. 20세기 초기의 문체를 사용한 그의 에세이와 소설은 아브뒬 하미드 2세 치하의 이스탄불의 생활을 상기시킨다. 그외에 현대작가로는 단편작가이자 극작가인 할둔 타네르, 에세이 작가이자 시인인 살라흐 빌셀, 사바하딘 유보울, 대중적 유머 작가이며 극작가인 아지즈 네신, 현대의 가장 우수한 여성작가인 네지헤 메리치 등이 있다. 또 마흐무드 마칼의 〈우리들의 마을〉(1950)은 중부 아나톨리아의 촌락 생활을 힘찬 필체로 묘사한 것이며 1950년대에 출판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문학비평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은 N. 아타치(1898~1957)로, 그는 예리한 감식안을 가지고 많은 신인을 배출시켰다. BIE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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