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 박완서

by 송화은율
반응형

1.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박완서)의 고백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 박완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할 수 없는 완벽한 정의를 하나 가지고 싶어서 조바심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썼다는 얘기가 된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는 주제에 소설가 소리 먼저 듣게 돼 버린 허술함 때문인지 나는 그런 정의를 무슨 신분증처럼 지님으로써 마음을 놓고 싶었던 것 같다. 행여 누가 내가 소설가인지 아닌지 시험하려 들거나,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하려는 눈치만 보이면 여봐란 듯이 꺼내보이기 위한 거였기 때문에 그 정의는 권위 있고 엄숙한 것일수록 좋았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쓰고 본 주제에 내가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중에서도 뛰어난 소설가야 물론 우러러보이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지만 소설가 외의 딴 직업이나 신분은 아무리 높아도 부러워해 본 적이 없다.

아직도 비록 신분증은 못 얻어 가졌지만 "나는 소설가다."라는 자각 하나로 제아무리 강한 세도가나 내로라 하는 잘난 사람 앞에서도 힘 안들이고 기죽을 거 없이 당당할 수 있고, 제아무리 보잘것없는 밑바닥 못난이들하고 어울려도 내가 한 치도 더 잘난 거 없으니 이 아니 유쾌한가.

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하나 얻어 가지고 싶어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마땅히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마땅히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소설에 엄숙한 정의를 내리지 못해 조바심하던 시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는 참으로 뛰어난 이야기꾼이셨다. 무작정 상경한 세 식구가 차린 최초의 서울 살림은 필시 곤궁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었을 텐데도 지극히 행복하고 충만한 시절로 회상된다.

어머니는 밤늦도록 바느질품을 파시고 나는 그 옆 반닫이 위에 오도카니 올라앉아 이야기를 졸랐었다. 어머니는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을뿐더러 이야기의 효능까지도 무궁무진한 길로 믿으셨던 것 같다.

왜냐 하면 내가 심심해할 때뿐 아니라, 주전부리를 하고 싶어할 때도, 남과 같이 고운 옷을 입고 싶어할 때도, 약아 빠진 서울 아이들한테 놀림받아 자존심이 다쳤을 때도, 고향 친구가 그리워 외로움을 탈 때도, 시험점수를 못 받아 기가 죽었을 때도,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어머니가 당신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이야기밖에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들이댈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어머니는 때때로 낮은 한숨을 쉬시면서 이렇게 조바심하였다.

이야기를 너무 바치면 가난하게 산다는데.”

그건 이야기를 즐겨 만드는 사람, 즐겨 듣는 사람, 쌍방에 다 적용될 수 있는 얼마나 그럴싸한 예언인가.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 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2. 박완서의 작품 세계에 대한 평론

 

현실주의자로서의 박완서는 개인에게 상처로 각인된 분단만을 이야기한다. 박완서 문학에서의 분단은 그리고 그 분단을 낳은 전쟁은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분단의 원인을 알면 분단을 해소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분단이 해소됨으로 해서 죽은 사람이 되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상처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박완서는 그렇게 말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분단의 원인을 찾지 않아도 전쟁의 원인을 찾지 않아도, 아니 찾음으로 해서 비로소 한 개인의 비극이 그 고통의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바로 그럼으로써만 말이다. 이 점에서 박완서는 현실주의자다. 그는 '현실적'인 것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그 현실적인 것이란, 바로 박완서 개인의 '기억'과 체험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최소한 우리 세대에까지는 공유될 수 있는 박완서의 체험이 과연 새로운 세대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일까. 새로운 세대, 지금의 세대는 오히려 박완서의 체험을 낯선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것은 그들에게는 없었던 세계이기 때문이다. 없었던 세계를 이해하라는 요구는 때로는 부당한 요구일 수 있다. 모든 세대는 비록 그 이전 세대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 이전의 세대를 다시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하고 시작하는 모든 말들은 이제 그야말로 진짜 쓸데없는 넋두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닐까.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아니라 근대에서 탈근대를 넘보는 이 새로운 세대에게 말이다. 소설이 상처의 기록이고, 상처받은 영혼의 외침이고, 그리고 또 상처를 덧들이기라고 하더라도, 그 기록을 읽을 사람이 덧들일 상처가 없는 사람이라면 어떡하겠는가? 이 질문은 박완서에게 던지는 질문이 아니라, 바로 소설에 대해 던지는 질문이다. (문학사상, 20007)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