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팔 없는 소년 / 동화 / 방정환
by 송화은율두 팔 없는 소년
내가 이번에 시골 갔다가 보고 온 불쌍한 팔 없는 소년의 슬픈 이야기입니
다.
충청 남도 홍성 나의 본집이 그 곳이어서 이번에는 십여 일이나 가서 있었
지만, 그 곳은 간신히 철도가 개통하였을 뿐 아주 한적한 곳입니다.
볼 만한 거리도 없고 볼 만한 경치도 없고 심심하고 쓸쓸한 신작로에 햇볕
만 환하게 비치는 곳이라 명절 때에도 하도 심심하여서 촌 부인들은 쓸쓸한
정거장에 기차 다니는 구경이나 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없는 심심한 곳입니
다.
그런데, 이번 추석 명절 지난 지 며칠 후에 심심하고 한적한 홍성읍에 울
긋불긋한 요술 구경 광고가 두어 곳에 걸리고 예전 학교터 넓은 마당에 높
다랗게 포막집(포장집)을 짓기 시작하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아무런 구경이고 일 년에 한두 번밖에 보지 못하는 곳이라 희한한 구경이
오는 것처럼,
“요술 구경이 온다지?”
“궤짝 속에 처녀를 넣고 칼로 찌른다지?”
“어느 날부턴가……. 구경 표는 사십 전씩이라지?”
촌마다 집마다 그 요술 구경의 소문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들떴습니다.
웬일인지 서울서는 그런 구경을 시들하게 알아 눈도 떠보지 않던 나의 마
음도 그 요술단이 오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졌습니다.
언제인가 여러 해 전에 경성 명치좌(지금의 예술 극장) 동양 척식 회사 앞
에 포막집에서 곡마단(말광대) 구경을 하였을 때, 거기서 말 타고 재주부리
던 가여운 소년, 그가 일본 사람이 아니고 조선 소년이 어릴 때부터 곡마단
에 팔려 다니는 것인데, 주인이 조선 사람이라고 못하게 한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몹시 불쌍하게 가엾게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나는 어디서든지 곡마단의 구슬픈 나팔 소리만 들으면 반드
시 그 말 위에서 위험한 재주를 부리던 가여운 소년을 생각하게 되었습니
다.
아버지 어머니도 없이 어린 몸이 무지한 말광대 틈에 끼어서 조선 사람이
란 말도 못하고, 이 시골 저 시골 정처없이 다니는 그 소년이 반드시 높다
란 그네 끝에서나 말등 위에서 구슬픈 나팔 소리에 맞추어 재주를 부리다
가, 혼자 눈물 짓는 때가 많이 있을 것이고 지금도 어느 나라 어느 시골에
가서 눈물 나는 재주를 부리고 있겠지! 하고 생각되어 몹시 궁금해집니다.
이런 맘 저런 생각하여 지금 이 한적한 시골 홍성으로 돈벌이 오는 그 종
류의 일행이 오는 것을 저절로 기다려지는 것이었습니다.
왔습니다! 그 요술 그 요술 구경패의 일행이 홍성에 와서 골목마다 길다란
기를 꽂아 놓고, 다 지어논 포막집에서 구슬픈 음악을 불기 시작하였습니
다. 시월 십사일 저녁 나는 우리 집의 어린 사람들과 함께 구경하러 갔습니
다.
시골이건만 구경꾼이 남녀 한 500명 포막집이 가득하였습니다.
손수건이 변하여 비둘기가 되어 날아가고, 금시계가 변하여 하얀 재가 되
어 나오고, 어여쁜 여자가 공중에 떠서 춤추고, 궤짝 속에 묶어 넣은 여자
가 남자로 바뀌어 나오고, 짚으로 만든 인형이 나팔을 불면서 걸어가고, 사
람의 해골이 춤을 추고, 가지가지로 신기한 요술이 여러 가지 끝나고, 중국
여자의 접시 돌리는 재주도 재미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모두 끝이 난 후에 두 팔이 아주 없다 하는 소년이
모자를 쓰고 나오더니, 발을 번쩍 들어 모자를 벗어 들더니 인사를 꾸벅합
니다.
처음에, 나는 일부러 팔을 감추어 두고 우습게 요술을 하려나보다 하였습
니다. 그러나, 그 소년도 입을 벌려 어린 목소리로,
“여러분, 나는 날 적부터 두 팔이 없습니다. 자세히 보시게 하기 위하여
웃옷을 벗겠습니다.”
하고, 그 말을 국어로도 한 번 하더니 일어선 채, 자기 발을 번쩍 들어 발
가락으로 저고리 고름을 풀어서 홀딱 벗어 버렸습니다.
아아, 참말이었습니다. 어깨만 산머리같이 오뚝하고 두 팔은 자국도 흔적
도 없이 뻔뻔하였습니다.
그 비참한 꼴을 눈 앞에 보자, 나는 그만 못 먹을 음식을 먹은 것같이 가
슴이 뜨끔하고 무겁게 울리었습니다.
휘장 뒤에서 청승스럽고, 구슬픈 음악 소리가 나더니, 불쌍한 팔 없는 소
년은 마룻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서 음악에 맞추어 발가락을 놀리어 여러 가
지 동작(발재주)을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팔 없는 소년은 발가락과 발가락으로 밥그릇을 들고 젓가락질을 하여 밥을
먹고, 발가락으로 주전자를 번쩍 들어 물을 따라먹고, 발가락으로 담배갑과
성냥갑을 집어서 발가락으로 담배와 성냥개비를 빼어 불을 그어 불을 붙여
먹고, 모든 일에 손 대신 발가락을 묘하게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보
다도 신기한 일은 왼발가락에 바늘을 쥐고 바른발가락으로 실을 풀어 실 끝
을 부벼 꼬아서 발가락으로 그 실을 그 바늘 구멍에 꿰어 가지고 또 발가락
으로 그 실끝을 매듭까지 지어 들더니 발가락으로 손수건에 바느질을 훌륭
히 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가위와 종이를 주니까 두 발가락으로 가위질을
하여 잠깐 동안에 종이를 오려서 훌륭한 무늬 그림을 새겨 놓았습니다.
뜻밖의 재주에 감탄하는 손뼉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구슬픈 음악
소리도 그치지 않고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아, 슬픈 일이었습니다. 이러
한 일을 이러한 곳에서 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습니다. 나는 그 밤에
구경이 끝나고 구경꾼들이 모두 헤어져 간 후에, 주인과 그 소년을 찾아 약
간의 동정의 말을 하고 돌아와서,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
집에 불쌍한 동무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팔 없는 불쌍한 소년! 그는 이제 열네 살이고 경상 남도 거창군 마리면 대
동리라는 곳에서 난 전판문(全判文) 씨였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튼튼한 몸이었건만 판문 씨는 날 때부터 두 팔이 없
이 낳았고, 몸이 아프거나 어디가 거북한 데도 없이 밥도 잘 먹고, 총기도
좋고, 다만 보통 사람과 같이 젖이 둘이 아니고 셋이었습니다. 둘은 보통
있는 곳에 있고 또 하나는 가슴 바른편 젖 가까운 곳에 조그마하게 있는 데
세 살 때부터 발가락으로 밥을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집안은 넉넉지는 못하였으나 굶을 지경도 아니었고, 판문 씨 아래로 일곱
살 되는 순달이라는 여동생이 있어 정을 붙이고 살았으나, 일곱 살 되던 해
에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 영영 돌아오지 아니하고, 열세 살 되던 작년 여
름에 어머니는 동네 김 서방이란 사람에게 판문 씨를 돈 받고 팔아 넘기고,
순달이만 데리고 어디로인지도 모르게 넌지시 살림하러 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도 버림을 받고, 어머니에게도 버림을 받은 판문 씨의
어린 마음이 갖추갖추 슬픈 신세를 생각하고 혼자서 얼마나 외롭게 울었겠
습니까? 울면서 울면서 불행한 몸을 탄식하는 그를 김 서방이란 자는 서울
로 데리고 올라와서 이 집 저 집 구걸을 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팔 없는
병신 몸을 동무에게도 보이기 싫어하던 판문 씨가 서울 장안에 아침부터 밤
까지 돌아다니면서 하루 오 원도 벌고, 십 원도 벌어서 김 서방에게로 가지
고 가면 그 돈은 모두 김 서방이 빼앗아 가지고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또
벌어 오라고 내어쫓고 쫓고 하였습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죽기보다 싫은 구걸을 하기 꼭 두 달, 그 동안
에 번 돈이 퍽 많이 되었건마는 김 서방이라는 자는 그 돈을 가지고 판문
씨 몰래 어디로 도망해 가고 말았습니다.
넓으나 넓은 장안에 아는 사람조차 없이 외따로 떨어진 어린 병신 몸이 길
거리 처마 밑에 밤이 새도록 슬프게 울고 있으나 누구라도 불쌍히 거들떠
보아 주는 이도 있을 리 없었습니다.
하루 또 하루 슬픔과 원한만 쌓여 가는데 차차로 날까지 추워지므로 하는
수 없이 한 푼 두 푼 다시 모아 가지고 바랄 것 없는 시골을 그래도 고향이
라고 더듬어 내려갔습니다.
가 보니 어머니까지도 도망간 후이라 몸 하나 붙일 곳이 없어서 먼촌 되는
아주머님 댁을 찾아가 있었더니, 원수보다 더 미워하면서 날마다 때마다 구
박이 성화 같아서 나중에는 밥도 주지 않고 자기의 식구만 둘러앉아 먹는지
라 이틀 사흘 주린 배를 참다 못하여 죽기를 결단코 어두운 밤에 우물을 찾
아간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죽어지지도 않고, 아무것보다
쓰라린 배고픈 생활을 걸어가는 중에 금년 봄 삼월에 일본 사람 가마다 마
술단이 그 곳에 왔을 때 판문 씨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였든지…… 같
이 가자고 하여서, 당장에 밥만 먹여 준다면 아무 데라도 가고 싶은 터이라
즉시 따라 나섰더니 이번에는 어디든지 데리고 다니면서 판문 씨를 그림으
로 그리어 내어 놓고, 오백 명 육백 명씩 구경꾼이 모인 앞에 나가 웃통을
벗고 구경시키라고 하므로 부끄럽고 서러워서 못견디겠으나, 그냥저냥 참아
가면서 그 노릇을 하며 돌아다닌다 합니다.
아아, 무어라 말하였으면 좋겠습니까? 사람의 세상에는 왜 이렇게 불행이
많으며 불행한 사람을 왜 이렇게 박대하게 됩니까?
아버지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고, 그래도 어린 동생 순달이를 보고 싶어하
면서 이 시골 또 저 시골 끌려 다니는 판문 씨는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또 어느 시골엔지 가서 그 구슬픈 음악 소리에 맞추어 눈물의 재주를 부리
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어린이》 1925년 1월, 《소파 전집》(박문 서관 간) 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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