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더지의 혼인 / 동화 / 방정환
by 송화은율두더지의 혼인
기다리던 설이 와서 기뻤습니다. 여러분! 과세나 잘들 하셨습나까? 이번
새해는 쥐의 해니까 이번에는 특별히 쥐에 관계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니 조용하게 앉아서 들으셔요.
저 충청도 은진이라는 시골에 은진 미륵이라는 굉장히 큰 미륵님이 있습니
다. 온몸을 큰 바위로 깎아 만든 것인데, 카가 60척 7촌(약 18.4m)이나 되
어서 하늘을 찌를 듯이 높다랗게 우뚝 서 있습니다.
그 은진 미륵님 있는 근처 땅 속에 땅두더지 내외가 딸 하나를 데리고 사
는데, 딸의 얼굴이 어떻게도 예쁘고 얌전하게 생겼는지, 이 넓은 세상에 내
딸보다 더 잘 생긴 얼굴이 또 있을까 싶어서, 이렇게 천하 일등으로 잘 생
긴 딸을 가졌으니, 사위를 얻되 역시 이 세상 천지 중에 제일 높고 제일 윗
자리 가는 것을 고르고 골라서 혼인을 하리라 하고 늘 그 생각만 하고 있었
습니다.
그래서 이 친구 저 친구 아무나 만나는 대로 붙잡고는 이 세상에서 제일
첫째 가는 잘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모두,
“그야, 이 세상에서 저 파란 하느님이 제일이지요. 하느님보다 더 높고
잘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래서 땅두더지 영감은 보퉁이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어 가
며 하느님께로 갔습니다. 먼저 딸 잘 생긴 자랑을 하고 나서,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 제일 높으신 어른이시니 제 딸과 혼인하시지 않
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파란 두루마기를 입으신 하느님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
면서,
“아니 아니, 이 세상에는 나보다도 더 잘난 것이 있다네. 해님께로 찾아
가게. 해님이야말로 이 세상을 자기 뜻대로 훤히 밝은 낮도 되게 하고 캄캄
한 밤도 되게 하니 그보다 더 잘난 것이 어디 있겠나”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딴은 해님이 이 세상에서 제일이겠으므로,
두더지 영감은 하느님께 하직하고 다시 지팡이를 짚고 해님께로 찾아가서
딸 잘 생긴 자랑을 한 다음 혼인하는 것이 어떠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해님이 하는 말이,
“말을 들으니 고맙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잘난 것이 있다
네. 내가 아무리 세상을 밝히려고 해도 구름이 와서 내 앞을 가리면 내 힘
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으니, 구름은 확실히 나보다 잘난 것이 아니겠
나 . 구름에게로 가서 혼인을 청하는 것이 좋을 것일세.”
하였습니다. 딴은 그럴 듯 싶습니다. 해님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구름을 만
나기만 하면 숨어버리고 마는 것을 보아도 구름이 더 잘난 것이 확실한데,
구름하고 혼인을 하자니 구름은 원래 정처없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라, 그 귀여운 딸을 주기는 섭섭하기는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것을 골라 사위 삼으려는 마음이 간절한 그는 그 길로 구름에게
로 달려갔습니다.
그 때 구름은 성난 얼굴로 우르릉 우르릉 하고 천둥 소리를 지르면서 비를
자꾸 뿌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두더지 영감이 야단이나 만나지 아니할까
하고, 속으로 겁을 내면서 간신히 혼인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
“하느님보다 해님이 더 잘난 이인데, 당신은 해님보다도 또 더 잘난 양반
이기 때문에 찾아왔으니 제 딸하고 혼인을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더니 구름은 비를 뿌리던 것을 멈추고, 두더지 쪽으
로 돌아앉기에 두더지는 허락하는 줄 알고 기뻐했습니다. 그랬더니 구름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하는 말이,
“그야, 그까짓 해쯤이야 내가 우습게 여기지만, 나보다도 더 잘난 놈이
있다네. 내가 이렇게 해를 숨겨 버리고 비를 많이 뿌려서 세상이 모두 비에
떠내려가게 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저 바람이란 놈만 만나면 그만 슬슬 쫓
겨나게 되네그려. 자네도 보지 않았나? 구름이 암만 많이 쌓여 있어도 바람
이란 놈이 오기만 하면 그만 슬슬 몰려서 산산히 헤어져 버리고 마는 것
을……. 바람이 우리보다 몇 갑절 더 나으니 바람에게로 가게. 바람은 반드
시 혼인할걸세.”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두더지 영감 생각에도 그럴 듯싶어서, 거기서 바
람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바람이 와서 구름을 다 쫓은 후에 혼인 이야
기를 건네었습니다. 거만스럽고 사나운 줄 알았던 바람은, 그리 거만하거나
사납지도 아니하고 부끄러운 듯이 수줍어하는 얼굴로,
“예, 사위를 삼으시겠다는 말씀은 대단히 고맙습니다마는, 저보다도 더
잘난 것이 있어 걱정입니다. 제가 힘껏 불면 구름도 쫓겨 달아나고, 배도
파선이 되고, 나무도 부러져 달아나고, 안 쫓겨 가는 놈이 없는데, 그 중에
충청도에 있는 은진 미륵님만을 영 꼼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암만 내가 몹
시 불어도 눈 하나 깜짝거리지 않지요. 나중에는 골이 나서 재채기질이나
하게 하려고 그 콧구멍 속으로 바람을 몹시 넣어도, 그래도 까딱 아니하고
웃는 얼굴 그대로 있습니다. 에 참 어떻게 그렇게 장사인지 무서워요. 암만
해도 그 미륵님이 없어지기 전에는 제가 세상에 제일이란 말을 못하겠습니
다.”
고 하였습니다 딴은 그 . 말을 들으니 바람보다도 자기 시골에 서 있는 미륵
님이 더 잘나기는 하였는데, 인제 두더지 영감은 고단하여서 기운이 지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허덕허덕 지팡이를 짚고 자기 시골로 돌아와서, 미륵님
께로 간신히 갔습니다.
가서는 갖은 말재주를 다하고 미륵님께 찾아온 말씀을 하고 제발 자기 딸
과 혼인을 하여 달라고 졸랐습니다.
그러자 그 큰 미륵님은 그 큰 눈을 딱 뜨고, 그 넓은 입을 딱 다물고 점잖
게 듣고 있더니, 두더지 영감의 말이 간신히 끝난 후에야 천천히 말하기 시
작하였습니다.
“으응, 자네 말이 그럴 듯하네, 나는 키가 크기도 하고 무서운 것도 없이
지내네. 해가 뜨거나 말거나, 어둡거나 밝거나, 춥거나 덥거나 걱정해 본
일이 없고, 또 구름이 항상 내 머리 옆을 지다나디지만, 그 놈이 비를 뿌리
건 천둥 소리를 지르건 조금도 두렵거나 겁나는 일이 없었고, 또 아무리 세
찬 바람이 불어와도, 콧구멍에 아무리 찬바람을 불어넣어도 까딱한 일이 없
으니 내가 참말 이 세상에 제일은 제일일걸세.”
하는 말들 듣고 두더지 영감은 그만 좋아서,
“예, 제일이고말고요. 그러니 제 딸하고 혼인해 주시겠지요. 예? 혼인하
시지요?”
하고 승낙하기를 독촉하였습니다.
미륵님은 천천히 또 말하기를,
“응, 그런데 내게도 꼭 한 가지 무서운 놈이 있는데.”
하므로 두더지 영감은 눈을 부릅뜨고 바싹 다가앉으면서,
“무서운 거이 무엇입니까, 무엇이어요?”
하고 조급히 물었습니다. 미륵님은 역시 천천히,
“그 꼭 한 가지 무서운 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 발밑 구멍에 구멍을 파
고 두더지 한 마리가 살고 았다네. 그 놈이 호리 같은 발로 흙을 자꾸 후벼
파고 있으니 어찌 겁이 나지 않겠나? 해도 무섭지 않고 구름도 바람도 무서
워 하지 않는 내가, 그 두더지에게는 어떻게 당할 재주가 없으니 어쩐단 말
인가. 그 놈이 그렇게 내 발 밑에 구멍을 자꾸 파면, 나중에는 세상에 제일
이란던 내 몸이 그냥 쓰러져 버리고 말 터이니, 그렇게 무섭고 한심스러운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아아, 참말이지 이 넓은 세상에 두더지처럼 무섭고
두더지보다 더 잘난 놈은 없는 줄 아네.”
하고 탄식하는 것을 보고 두더지 영감은,
“이 세상에 제일 무섭고 제일 잘난 것은 역시 우리 두더지밖에 없구나!”
생각하고, 곧 그 은진 미륵님 발 밑에 산다는 두더지를 찾아가 보니, 아주
젊디 젊은 잘 생긴 사내 두더지였습니다.
그래서 혼인 이야기도 손쉽게 이루어져서, 곧 좋은 날을 가리어 혼인 잔치
를 크게 차리고, 그 잘 생긴 딸을 젊은 두더지에게로 시집보냈습니다.
잔치도 즐겁고 재미있게 무사히 치르고, 이 젊고 잘 생긴 두더지 신랑 색
시는 복이 많아서 오래도록 땅 속에서 잘 살았답니다.
〈《어린이》2권 1호, 1924년 1월>
출처 : 공유마당
이용조건 : CC 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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