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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언해 (杜詩諺解)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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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언해 (杜詩諺解)

두시언해 해설

 

성당 때의 시인 두보의 시를 국역한 시집으로 원명은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로 원(元)나라 때 편찬된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를 원본으로 삼아 두보의 시 1,647편 전부와 다른 사람의 시 16편에 주석을 달고 풀이한 책으로, 초간본(初刊本)과 중간본(重刊本)이 있으며, 초간 '두시언해'는 1443년(세종 25) 4월에 착수, 1438년 만인 1481년(성종 12)에 비로소 간행된 한국의 첫 역시집(譯詩集)이다. 세종 ·성종 때에 걸쳐 왕명으로 승려 의침(義砧)을 비롯하여 유윤겸(柳允謙) ·유휴복(柳休復) ·조위(曺偉) 등이 주해하였는데, 당시 두시(杜詩)에 통달한 사람은 신분과 상관없이 종사하게 한 대대적인 번역사업이었으며, 전 25권, 활자본으로 간행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1∼4권과 11∼14권 등 모두 8권은 산일(散佚)되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 후 중간 '두시언해'는 초간본을 바탕으로 하여 그대로 옮긴 것으로서, 1632년(인조 10) 3월에 경상감사 오숙(吳塡)이 대구부사 김상복(金尙宓)에게 시켜 관하 각 읍에서 목판본 전 25권으로 분간(分刊)하게 한 것이다.

두시 언해의 동기

 

두보의 시는 그 사상적 바탕이 유교적이고 그 정서가 우국적이어서 한시의 모범이라고 생각되어 이의 일반화를 위하여 번역한 것으로, 두시를 언해한 의도가 초간본에는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조위의 서(序)에 두시를 읽히고자 함은 민간의 세교(世敎)풍화(風化)를 위함이라고 한 점으로 보아, 언해는 두시를 더욱 널리 많이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중간본 '두시언해'의 서에는 언해의도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것을 들어보면 위학자 또는 시가들이 회득(會得 :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알아차림)하지 못하며, 미창(未暢)한 바가 있으므로, 마땅히 언해되어야 하며, 아직 미발명된 밀의(密意 : 비밀한 뜻. 또는 숨은 뜻)오의(奧義 :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지니고 있는 깊은 뜻)를 밝히기 위해서 언해가 미도(迷途 : 해결책을 못 찾아 갈팡질팡하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지남(指南 : 가리켜 지시함. 또는 이끌어 가르침 혹은 미로(迷路)를 뜻함)과 같다고 하였다.

문학적 의의와 어학적 의의

 

문학적 의의 : 국문학사상 최초의 번역시집인 점과 한시 및 국문학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점(한시의 모범으로 삼아 연구할 가치를 지닌 점)

어학적 의의 : 초간본과 중간본의 연대 차이가 150년 간이나 되므로, 그 동안의 우리말의 음운 변천을 연구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 점

두시 언해 초간본과 중간본의 대비

구분

초간본

중간본

비고

간행연대

1481년 12월(성종12)

1632년 2월(인조10)

약 150년 차이

역주자(발행인)

유윤겸, 조위, 의침

오숙, 김상복

오숙, 김상복은 발행인

서문

조위

장유

자체(字體)와

판본

강희안의 을해자, 활자본

목판본

표기

음운

방점

있음

없음

 

철자법

연철

간혹 분철이 있음

이스른> 이슬은

 

씌었음

없어졌음

 

구개음화현상

나타나지 않음

간혹 나타남

 

모음조화현상

모음조화현상에서 약화된 것이 적음

모음조화현상에서 약화된 것이 많음

 

삽임모음 사용

규칙적임

불규칙적임

자음 동화

자음이 동화된 대로 기록된 것이 비교적 적음

자음이 동화된 대로 기록된 것이 많음

 

현전본

1,2,4,12권은 전하지 않고, 나머지는 전함

전 25권이 다 전함

두보의 생애

중국 성당시대(盛唐時代)의 시인.

호 : 소릉(少陵)

본명 : 두보

별칭 : 자 자미(子美)

국적 : 중국 당(唐)

활동분야 : 시

출생지 : 중국 허난성[河南省] 궁현[鞏縣]

주요작품 :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 ·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

 

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 거쳐 쓰촨성[四川省]의 청두[成都]에 정착하여 시외의 완화계(浣花溪)에다 초당을 세웠다. 이것이 곧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일시적으로는 지방 군벌의 내란 때문에 동쓰촨[東四川]의 쯔저우[梓州] ·랑저우[잗州]로 피난을 한 일도 있었으나, 전후 수년 동안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다. 이 무렵에 청두의 절도사 엄무(嚴武)의 막료(幕僚)로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관직을 지냈으므로 이로 인해 두공부(杜工部)라고 불리게 되었다. 54세 때, 귀향할 뜻을 품고 청두를 떠나 양쯔강[揚子江]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東端)의 쿠이저우[夔州]의 협곡에 이르러, 여기서 2년 동안 체류하다가 다시 협곡에서 나와, 이후 2년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방랑을 계속하였는데,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59세를 일기로 병사하였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두보의 시작 환경

 

두보는 진나라의 유명한 학자 두예의 후손이며, 초당 때 시인 두심언의 손이다. 7세에 이미 뛰어난 시재(詩才)를 보이기 시작하였고, 14·5세 때는 명사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다병(多病)한데다 가난하였고, 전란으로 말미암은 방랑 생활로 40세에 이미 머리가 세고 눈이 어두울 정도였다. 그의 사람됨은 성실하였고, 젊은 시절부터 정치 ·사회에 대한 관심도 많았다. 특히 안녹산의 난 이후의 전란기의 작품에는 사회 현실이 반영되어 있으며, 우국(憂國)의 지극한 충정(忠情)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가정에 있어서는 선량한 남편이요, 자애로운 아버지였으며, 아우와 누이에 대한 우애도 도타왔다. 이렇듯 다정다감(多情多感)한 천품(天稟)에다 뛰어난 시재(詩才)를 지닌 그는 불후의 명작을 많이 남기었다. (자료 출처 - 최장수저- 지학사간)

두보의 작풍(作風)

 

오늘날 전하는 두보의 시는 약 1,450여 편이다. 초나라의 굴원과 진나라의 도연명, 당나라의 이백, 두보를 아울러 중국의 사대 시인이라 이른다. 또, 당대 삼대 시인으로 이백과 두보, 그리고 백거이를 든다. 범속(凡俗)을 싫어하는 이백을 낭만주의 절정에 오른 시선(詩仙)이라고 한다면, 두보는 현실에 굳게 뿌리를 박은 사실주의(寫實主義)의 개조(開祖)라고 말할 수 있다. 두보의 시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는 성실성을 엿볼 수 있다. 국가의 운명을 우려함이 이 시인의 마음을 떠난 적이 없었다. 전란에 시달리는 민중(民衆)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알고, 사회 부정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인간에 대한 한결같은 애정과 성의를 나타내었다. 만년(晩年)에는 자신의 생애에 대한 자각으로 인해 절망(絶望)과 우수(憂愁)에 잠기게 되었다. 두보의 시는 돈후(敦厚)·인자(仁慈)하고, 유교적이며, 평민적이다. 항시 시사(時事)를 통곡했고, 우국(憂國)적이었으며, 시어(詩語) 하나하나에 각고면려(刻苦勉勵)하여 작품을 썼다. 그는 냉철한 사실주의(寫實主義)자요, 위대한 인도주의(人道主義)자인 동시에 열렬한 충군(忠君)애민(愛民)의 애국자(愛國者)였다. (자료 출처 - 최장수저- 지학사간)

두보의 시풍

 

두보의 시는 현재 약 1450여 편이 전하는 데, 이를 개관해 볼 때, 그 내용면에서는 가장 평민적(平民的)이며 인간적(人間的)이라는 말로 평할 수 있고, 그 표현면에서는 사실적(寫實的)이라는 말로 대표할 수 있으며, 나라의 운명과 백성의 고통을 항상 자신의 고통으로 여긴 충군(忠君)·애민(愛民)의 애국자(愛國者)요,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였으며, 당시의 사회 부정(不正)을 개탄, 통박(痛駁)하였으며, 대개의 시에서 인간적 고뇌를 읽을 수 있으며, 시어 하나하나를 깎고 다듬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백을 천상(天上)적인 시인이라 한다면 두보는 가장 지상적·인간적 시인이라 할 수 있다. (자료 출처 - 오태현·변재호·유준기공저 고전문학- 동아출판사간)

그의 시를 성립시킨 것은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이었으며, 성실이 낳은 우수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제재를 많이 따서, 널리 인간의 사실, 인간의 심리, 자연의 사실 가운데서 그 때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는데, 표현에는 심혈을 기울였다. 장편의 고체시(古體詩)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하였으므로 시로 표현된 역사라는 뜻으로 시사(詩史)라 불린다.

단시정형(短詩定型)의 금체(今體)는 특히 율체(律體)에 뛰어나 엄격한 형식에다 복잡한 감정을 세밀하게 노래하여 이 시형의 완성자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그에 앞선 육조(六朝) ·초당(初唐)의 시가 정신을 잃은 장식에 불과하고, 또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대하여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회복하여, 그것을 더욱 성숙된 기교로 표현함으로써 중국 시의 역사에 한 시기를 이루었고, 그 이후 시의 전형(典型)으로 조술(祖述)되어 왔다. 최초로 그를 숭배했던 이는 중당기(中唐期)의 한유(韓愈) ·백거이(白居易) 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의 확정은 북송(北宋)의 왕안석(王安石) ·소식(蘇軾) 등에게 칭송됨으로써 이루어졌으며,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인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대표작으로 《북정(北征)》 《추흥(秋興)》 《삼리삼별(三吏三別)》 《병거행(兵車行)》 《여인행(麗人行)》 등이 있다. 그 밖에 북송(北宋) 왕수(王洙)의 《두공부집(杜工部集)》 20권과 1,400여 편의 시, 그리고 소수의 산문이 전해진다. 주석서(註釋書) 중에서는 송의 곽지달(郭知達)의 《구가집주(九家集註)》는 훈고(訓뭍)에 뛰어났으며, 청(淸)의 전겸익(錢謙益)의 《두시전주(杜詩箋注)》는 사실(史實)에 상세하며, 구조오(仇兆鰲)의 《두시상주(杜詩詳註)》는 집대성으로서 편리하다.

그의 시 작품과 시풍이 한국에 미친 영향은 크다. 고려시대에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이 크게 영향을 받았고, 중국인 채몽필(蔡夢弼)의 저작인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황학(黃鶴) 보주(補註)의 《두공부시보유(杜工部詩補遺)》 등이 복간(複刊)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의 작품이 특히 높이 평가되었는데, 《찬주분류두시(纂註分類杜詩)》가 5차례나 간행되었고, 성종(成宗) 때는 유윤겸(柳允謙) 등이 왕명을 받아 그의 시를 한글로 번역한 전역서(全譯書) 《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杜詩諺解)》를 간행하였으며, 또 이식(李植)의 저서 《찬주두시택풍당비해(纂註杜詩澤風堂批解)》 26권은 두시(杜詩)가 한국에 들어온 이후 유일한 전서(專書)이다. 현대의 것으로는 이병주(李丙疇)의 《두시언해비주(杜詩諺解批註)》(1958), 양상경(梁相卿)의 《두시선(杜詩選)》(1973) 등이 알려져 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두보와 이백의 시 비교

구분

두보(杜甫)- 시성(詩聖)

이백(李白)-시선(詩仙)

사상(思想)

유교적(儒敎的)

도교적(道敎的)

 

평민적(平民的), 시사적(時事的)

애국애족적(愛國愛族的)

귀족적(貴族的), 탈속(脫俗)

국사(國事)에는 무관심(無關心)

성격

인자(仁慈), 돈후(敦厚),

검소(儉素)

낭만(浪漫), 호방(豪放),

사치(奢侈), 표일(飄逸)

시풍

인생파

유미파

현실적 사실주의

가공적 낭만주의

우수 어리고, 인생무상을 노래

즉흥적이고, 낙천적(樂天的)임

갈고 다듬는 각고의 시로 율시에 뛰어남

단숨에 쓰는 즉흥시로 절구에 뛰어남

두보의 사상

 

시대와 생활을 한 인간의 사상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절정으로 치솟아 오르던 당나라가 안녹산의 반란을 계기로 급전 낙하하는 전환기에서 두보는 사회적으로 통치 계급의 부채와 무능으로 인한 전란의 비참과 역적의 포악으로 빚어진 난세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수난을 목도했고, 개인적으로 자신이 바로 가난을 뼈저리게 맛보았던 것 이다.

이에 천성이 선하고 성실한 휴머니스트인 두보는 그러한 암흑, 부조리, 악덕, 고난을 성실한 리얼리즘과 인간애가 넘치는 휴머니즘의 문학으로 승화하여 결정지었던 것이다.

 

두보늬 사상적 바탕은 유가의 인애이다. 두보는 스스로 유가임을 자처했다. 비록 현실 사회에 실망하여 스스로 부유(腐儒 :생각이 낡고 완고하여 쓸모없는 선비)라 하기도 했으나, 그는 평생을 두고 임금을 보좌하여 백성을 안락하게 해 줄 수 있는 정치 참여를 갈망했다. 이는 바로 수기 치인(修己治人)과 충군 애민의 유가 정신이었다. 두보는 동시에 절용(節用) 애민에 투철하여 위정 계급의 부패,무능,안일,낭비와 역적들의 포악,무질서,난동을 격렬하게 미워했으며, 동시에 무절제한 변경 확대 정책에 의한 국민 생활의 경제적 파탄과 생명과 가정의 위협을 고발했다. 두보의 인애사상은 철저한 평화와 '민위방본(民爲邦本)'과 '민위귀(民爲貴)'의 사상이기도 했다. 특히, 불의를 규탄하고 사회악을 고발하는 데 과감했던 두보는 우가의 소극적인 '명철보신(明哲保身)'이나 '궁즉독선기신(窮즉獨善其身)'하고자 움츠려들지 않고 끝까지 그의 휴머니즘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가 좌습유(左拾遺)로 있으면서 방관을 옹호하다가 숙종로부터 쫓겨난 사실도 그가 신념의 사나이임을 충분히 증명함이다. 같은 난세를 산 왕 유는 한적한 시를 산뜻하게 쓰며 조용히 살았다. 그러나 두보는 끝내 현실의 비참에서 눈을 돌리지 않고, 사랑의 피눈물로써 사실주의적 휴머니즘의 시를 썼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시성이라 부른다.

두보는 성실한 인도주의자였다. 나의 고생을 초월하여 모든 동표의 고생을 구제하기를 제일의적으로 염원했다. 착하고 약하고 죄없는 모든 사람의 아픔과 고난을 내것 이상으로 아프고 쓰리게 동경하고 고민했다. 거러나, 반면에 악한 강권자, 고식한 위정자 들을 격렬히 미워했다. 창자에 사무치도록 악을 미워한 두보였다. 비록 늙어서는 '나라 걱정에 눈물을 흘리고 외로이 옷이나 수건을 적시나 (向來憂國漏 寂寞酒布衣)' <알선왕묘> 젊어서는 말 타고 사냥도 했고, 또 역적에 잡혔다가 도망쳐 봉상으로 가서 숙종을 알현하기도 했다. 두보의 애국 애민은 실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사상의 성실성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성실성은, 그의 시를 형식적으로도 대성시킨 정신과 노력의 연장이며, 선의의 결정이라 하겠다. (출처 - 張其槿 -두보(중국고전한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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