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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양단수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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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산 양단수를

 

지리산의 두 갈래 흐르는 물을 옛날에 듣기만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복숭아꽃이 떠내려가는 맑은 물에 산 그림자까지 잠겨 있구나.

아이야, 무릉도원이 어디냐? 나는 여기인가 하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조식(曺植)

연대 : 조선 명종 때

갈래 : 평시조, 연시조 전 10수

성격 : 강호 한정가(閑情歌), 자연과 인정의 노래

표현 : 문답법. 영탄법, 자연의 아름다움을 시각적으로 표현

구성 :

초장(기) : 말로만 들은 두류산 양단수

중장(승) : 실제로 본 두류산 양단수 승경

종장(전,결) : 무릉을 실감케 하는 선경

제재 : 두류산

주제 : 지리산 양단수의 승경(勝景)을 찬미(讚美)함. 절경에 대한 감탄. 자연에의 귀의(歸依)

출전 : 해동가요(海東歌謠)

내용 연구

두류산(頭流山) : 지리산의 별칭

양단수(兩端水) : 두 갈래로 갈라진 물줄기. 물 이름

녜 듯고 : 옛날에 듣고

산영(山影)조차 : 산 그림자까지

잠겻셰라 : 잠겼구나. 잠겨 있구나

무릉(武陵) : 무릉도원의 준말로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 나오는 이상향

마지막 종장은 영탄조로 이어지던 시상이 종장의 문답법에 의해 변화미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시상의 전개는 주제를 강하게 표출하는 효과도 있다. 그리고 '아이야'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해와 감상

 

이 작품은 지리산의 승경(勝景)을 선경(仙境)에 비유하여 찬미하면서, 자연 속에 은거하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종장의 '무릉'은 '무릉도원'을 뜻하는 말로, 낙원을 가리킨다.

 

지은이가 중국의 죽림 칠현(竹林七賢)을 본받은 산림학파(山林學派)의 한 사람으로, 수차에 걸친 관직에의 부름을 물리치고 지리산의 덕소동(德小洞)에 살며 산천재(山天齋)라 당호(堂號)를 짓고 사색과 연구에 전념하였다.

 

초장에서 지리산 양단수를 정적(靜的) 조화에 감흥하고, 중장에서 맑은 물에 잠겨 있는 산영(山影)을 동적(動的) 조화에서 노래했으며, 종장에서 이 동이정(動而靜)의 승경(勝景)이 바로 무릉도원임을 확인한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산 속에 들어가 학문 수업에만 전념한 지은이는, 이 곳 지리산 양단수를 무릉도원에 비유하고 있다. 무릉도원은 동양인들이 동경하는 이상향이다. 또한, 자연 귀의(自然歸依)를 할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 즉 선경(仙境)인 것이다. 지은이는 그 곳을 지리산에서 찾고, 그 속에서 마음껏 즐긴 것이다.

심화 자료

조식(曺植)

 

1501(연산군 7)∼1572(선조 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南冥). 생원 안습(安習)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승문원판교 언형(彦亨)이며, 어머니는 인주(仁州)이씨로 삼가현 지역의 유력한 사족이던 충순위 이국(李菊)의 딸이다.

 

1501년 경상도 삼가현(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의 토골(兎洞)에서 태어나 4∼7세 사이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왔으며, 이후 아버지의 벼슬살이를 좇아서 의흥(義興)·단천(端川)에 가기도 했으나 20대 중반까지 주로 서울에 거주하였다.

 

서울의 처음 거주지는 연화방으로 추정되는데 여기서 이웃에 살던 이윤경(李潤慶, 후일의 판서벼슬을 지냄)·준경(浚慶, 후일 영의정이 됨)형제와 절친하게 지냈으며, 이로 미루어 황효헌(黃孝獻)·이연경(李延慶)에게서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성운(成運)과 평생을 같이하는 교우관계를 맺었고, 부근의 청풍계(淸風溪)에 숨어살던 성수침(成守琛) 형제에 종유하였으며, 기묘사화로 조광조(趙光祖)가 죽임을 당한 일과 숙부 언경(彦卿)이 귀양가는 현실을 크게 탄식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武溪洞)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는데, 22세 때 생원·진사시의 초시와 문과의 초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 실패했으며, 26세 때 부친상을 당해 고향 삼가로 돌아가 3년 상을 마친 뒤, 한때 의령의 도굴산(斤堀山)에서 독서하다가 30세 되던 해 어머니를 모시고 김해 탄동(炭洞)에 있는 처가로 거처를 옮겼다.

 

장인인 충순위 조수(曺琇, 본관 南坪)가 김해일대에서 부자로 소문났던 만큼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독서에 힘쓰며 특히 31세 때 서울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宋麟壽)로부터 선물받은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성운·이원(李源)·신계성(申季誠)·이희안(李希顔) 등과 더불어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적 기반을 확립하였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연구와 덕성함양에 전념하였다.

 

학자로서의 명망이 높아지자 1538년(중종 33) 경상도관찰사 이언적(李彦迪)과 대사간 이림(李霖)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45세가 되던 1545년(명종 1)의 을사사화로 이림·송인수·성우(成遇)·곽순(郭珣) 등 가까운 지인들이 화를 입게 되자 세상을 탄식하고 더욱 숨을 뜻을 굳혔으며, 마침 모친상을 당함에 삼가로 돌아가 시묘(侍墓)하였고, 상복을 벗은 후에는 김해생활을 청산, 고향인 토골에 계복당(鷄伏堂)·뇌룡사(雷龍舍)를 짓고 문인들과 함께 도학을 강론하였다.

 

이 시기 노진(盧所)·강익(姜翼)·김희삼(金希參) 등이 종유하였으며, 오건(吳健)·문익성(文益成)·이광우(李光友)가 처음으로 문하에 출입하였다.

 

1553년 조정에서 내린 사도시주부의 관직을 사양했을 때 이황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와 벼슬에 나가기를 권유하면서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기를 원하였고, 이후 서너 차례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듬해인 55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자전(慈殿)께서 생각이 깊다하나 궁중의 한 과부요, 전하는 어린 나이로 선왕의 한 아들일 뿐이니, 천백 가지의 재앙을 어찌 다 감당하며 억만갈래 민심을 어찌하여 수습하렵니까?”하는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를 올려 척신정치의 폐단과 비리를 통절히 비판하면서 임금이 크게 분발하여 명신(明新)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다.

 

임금으로 하여금 국가 위기의 심각성을 깨우치도록 심금을 울리기 위해 격한 표현을 썼지만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대비(文定大妃)를 과부라 한 것 때문에 죄를 입을 뻔했으나 대신과 언관의 구원으로 무사했으며, 당대 사림의 훈척공격에 모범을 보인 것이라 하여 조야에 명성을 크게 드러내게 되고 후세까지 길이 칭송되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정인홍(鄭仁弘)·하응도(河應圖)·하항(河沆)·박제현(朴齊賢) 등 후일 그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수업받기 시작하였다.

 

61세 때인 1561년 삼가의 토골에서 진주 덕산(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의 사륜동(絲綸洞)으로 거처를 다시 옮기고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강학하자, 진주·산청·함양·거창 등의 인근지역은 물론 서울의 선비들까지 그를 좇아 몰려들었는데, 바로 그들이 정탁(鄭琢)·김효원(金孝元)·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裵)·이정(李楨)·김면(金沔)·조원(趙瑗) 등이었고, 정구(鄭逑)·최황(崔滉)·곽재우(郭再祐)·성여신(成汝信) 등은 이들보다 조금 늦게 문하로 들어왔다.

 

문정대비가 죽고 윤원형이 실각하여 척신정치가 막을 내리던 1566년(명종 21), 정치쇄신과 민심수습의 일환으로 성운·이항(李恒) 등과 함께 유일(遺逸)로 징소되어 상서원판관의 벼슬을 받자, 66세의 나이로 상경하여 사은숙배 후 임금을 면대하고 물음에 응했는데 명종의 성의와 대신의 경륜이 부족함을 알고 곧 사직, 하향하였다.

 

이듬해 선조가 즉위한 이후 새로운 정치를 보필할 어진 인물을 구한다는 차원에서 여러 차례 징소되고, 1569년(선조 2)에는 정4품인 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의 벼슬까지 내려졌으나 조정이 헛된 자리로만 대우함을 알고 늙고 병들었음을 구실로 끝내 응하지 않으면서, 그러나 때로는 당시의 폐단 열 가지를 논하는 소를 올리되 민생구제가 급선무인데도 조정의 논의에 성리설만 무성할 뿐 실혜(實惠)가 없음을 경계하였다.

 

특히 68세 때인 1568년에 올린 『무진봉사 戊辰封事』에서는 유명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펴 서리의 작폐를 근절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는 등 나라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선조 초에 일어난 진주지역의 음부옥(淫婦獄)에 관련되어 이정과 절교하고 뒤이어 그 문인들이 주동하였던 음부집안의 훼가출향(毁家黜鄕)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기대승(奇大升) 등 일부 관료로부터 비방을 받아 곤경에 처하기도 했는데 조정에 나와 있던 그 문인 오건·정탁 등의 변호로 무사할 수 있었으며, 오히려 흉년이라 하여 임금이 음식물을 내려주고 72세로 별세하기 직전 의원을 보내오는 우대를 받았지만, 이정의 편에 서서 음부옥에 관한 그의 처신을 비난했던 이황의 편지가 후일 알려지면서 그 문인들 사이의 갈등을 깊게 하고, 끝내 정인홍(鄭仁弘)에 의한 이언적·이황 배척을 불러오게 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의 학문은 처음 과거공부에 주력하며 좌류문(左柳文, 春秋左傳과 唐代 문장가 柳宗元의 文體)을 주로 익혔으나 25세 되던 해에 ≪성리대전 性理大全≫을 읽다가 원나라 유학자인 허형(許衡)의 글에서 “이윤(伊尹)의 뜻과 안연(顔淵)의 학문을 체득하여 벼슬에 나가면 큰 일을 하고 재야에서는 지조를 지킨다.”는 글귀에 접하여 크게 깨우쳐 이제까지 속된 학문에 빠졌던 것을 후회하고 비로소 성리학으로 나아가 6경 4서와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글을 탐독하게 되었으며, 특히 ≪심경≫을 중시하여 마음을 잃지 않게 하는 약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역시 다른 성리학자와 마찬가지로 경의(敬義)를 배움의 바탕이라 하였는데, 마음이 밝은 것을 ‘경(敬)’이라 하고 밖으로 과단성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하였다(평소 차고 다니는 칼에 內明者敬 外斷者義라고 새겨 넣었음).

 

이러한 그의 주장은 바로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여 수양하는 기본으로 삼고 ‘의’로써 외부생활 즉, 하학(下學)·인사(人事)를 처리하여 나간다는 의리철학 또는 생활철학을 표방한 것이었다.

 

북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수양론의 이념으로 정립된 ‘경’(보통 居敬·主敬으로 표현됨)을 받아들이면서도, ‘경’을 직접 드러내며 실천하는 ‘의’를 함께 중시하는 데서 퇴계 이황과 차이를 보인다.

 

퇴계가 ‘경’의 본원을 찾고자 궁리(즉 居敬窮理)에 치중하여 사단칠정이기심성설(四端七情利己心性說)의 상학(上學)을 즐겨 논하고 문인들과도 논변을 벌이며 이에 관한 문자를 적지 않게 남겼다면, 그는 정주(程朱)에 의해 상학은 이미 소상하게 밝혀진 만큼 다시 이를 가지고 중언부언할 이유가 없고 오직 이를 지키면서 하학 즉, 일상생활을 통해 의리로서 실천하여 드러내게 하는 것이 학자의 본분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독서할 때마다 선유(先儒)의 글 중에 몸에 긴요한 내용이 있으면 이를 채록하여 편찬한 ≪학기유편 學記類編≫이나 존양(存養)·성찰(省察)·극치(克治)의 과정을 통해 생사를 걸고 수양에 몰두하는 내용을 적은 ≪신명사도 神明舍圖≫ 이외에는 상학에 관한 별다른 글을 남기지 않았으며, 나아가 기대승과 이기심성설 논쟁을 벌인 퇴계에게 편지하여, 손으로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도도 모르면서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여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도둑질하는 행위를 그만두게 하라고 한 데서 보듯이 심성논변 자체를 현실성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 하여 비판하고 경계하였다.

 

퇴계가 시사(時事)를 거의 언급하지 않고 언급하는 경우에도 ≪성학십도≫에서처럼 군덕의 성취에 필요한 도덕적 내용으로 시종하였던 데 비해, 단성현감 사직소에서 보듯 그가 훈척정치를 정면으로 비판 공격한 것은 현실과 실천을 강조하는 그 학문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학문이란 모름지기 반궁실천(反躬實踐)하고 지경실행(持敬實行)하는 것이어야 하며 현실에서는 일반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실제적인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학문의 두 번째 특징이라고 할 성리학을 중시하면서도 천문·지리·의학·복서(卜筮)·병학(兵學) 등의 이른 바 잡학(雜學)에 관심을 갖고 여기에 능통하였던 점도 이런 학문들이 인사, 즉 현실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학문적 특징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서도 일관되었다. 일상생활과 관련된 ‘하학’적인 측면에 치중하였으며 강학(講學)을 하기보다는 방법을 제시해주고 학습자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는 심득(心得)을 중시하였다.

 

따라서 심신수련의 수단으로 노장(老莊)적 방법을 담고 있는 참동계(參同契)를 즐겨 읽고 조용히 앉아 깊이 사색하는 태도를 보인 것은 퇴계에 의해 이미 지적되었듯이 도교나 선학(禪學), 양명학적 특징을 다분히 나타내는 요소였다.

 

그의 인물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에는 다소 고답적이며 세상사람에 대해 오만하였다고 말해지기도 하지만 “중년 이후 몸을 깨끗이 가지고 결의를 지키며 예법으로 몸을 단속해서 행실이 뛰어났다.”고 한 실록의 기사나 “사람됨이 우뚝 솟아 속세를 벗어났고 희고 맑은 성품이 세상 밖에 있을 정도로 높고 멀다.(亭亭物表 皎皎霞外)”라고 한 퇴계의 평가, 그리고 그 문인인 정구가 “선생은 천지의 순수한 덕과 하악(河嶽)의 맑은 정기를 타고났고, 재주는 일세에 높고 기개는 천고를 덮으며, 지혜는 족히 천하의 변화를 통하고 용맹은 능히 삼군의 우두머리를 앗을 수 있으며, 태산벽립(泰山壁立)의 기상과 봉황이 높이 나는 이상을 갖고 있다.”고 한 말로 보건대 평생을 벼슬하지 않고 처사로 살아가면서도 단순히 학문에만 침잠하여 절의를 지키는 일절지사(一節之士)에 그치지 않고 천길 낭떠러지에 홀로 우뚝 솟은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서 세상을 근심하고 민생을 구하기 위하여 현실에 직접 뛰어들어 불의에 과감히 맞서는 재야의 비판자였다고 하겠다.

 

정인홍·최영경·정구로 대표되는 그의 문인들은 선조·광해군 때까지만 하여도 퇴계 문인들과 대등할 정도의 학파를 이루어 영남우도 지역에 널리 분포하고 중앙정계에서도 집권세력인 북인(北人)의 주축을 이루었는데, 대개 이들 남명학파는 다음과 같은 특색을 갖는다.

 

첫째 이들은 대부분 기절을 숭상하며 처사적인 학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벼슬에 나오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행적이 그대로 제자들에게 이어진 것이다.

 

둘째 영남좌도의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영남우도의 학풍을 대표하였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진주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문풍을 일으킨 지역문화의 기수들이었다.

 

셋째 국가의 위기 앞에 대부분이 몸소 앞장 서 싸움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조직, 활동하는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던 그들은, 국가의 위란 앞에 수수방관하지 않고 학자의 신분으로 직접 몸을 던진 참여정신이 철저한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 후 정인홍이 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함으로써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일대에 잔존하는 데 그쳤다.

 

그의 사후 바로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 7)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가 전한다. 1615년 문정(文貞)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宣祖實錄, 國朝人物志, 燃藜室記述, 淸選考, 南冥集, 寒岡集, 南冥集解題(최석기, 경상대 남명학연구소), 南冥 曺植과 南冥學派(李樹健, 영남대 민족문화논총 2·3합집, 1982), 南冥의 反躬體驗과 持敬居義사상의 연구(崔丞灝, 한국의 철학 11, 1983), 南冥 曺植의 학문과 出仕觀(金允濟, 韓國史論 24, 1991), 16세기 유학사상의 전개와 南冥의 學問(李相弼, 南冥學硏究 3, 1993), 南冥 曺植의 學記圖와 道學체계(琴章泰, 조선전기의 유학사상, 1997), 宣祖初 晉州 淫婦獄과 그 波紋(鄭萬祚, 국민대 한국학논총 22, 1999),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申炳周, 一志社, 2000). 글/ 鄭萬祚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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