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쌈을 보고서
by 송화은율돌쌈을 보고서
홍성민 지음
양홍렬 번역
작년에 안찰사(按察使)로서 영남(嶺南)을 순회하던 중 경주에 당도했을 때의 일이다. 때는 정월 보름, 밤이 되자 거리가 떠들썩한 게 마치 무슨 전투라도 벌어진 듯 하더니 그 왁자지 껄한 소리는 새벽이 되어도 그칠 줄을 몰랐다.
사람을 붙들고 물어보았더니 그의 대답인즉 그 고을에 예부터 '돌쌈<石戰>'이라는 것이 있어 왔단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고을 사람들은 언제나 정월 보름이면 좌우로 편대를 갈 라 서로 각축전을 벌이는데 비가 쏟아지듯 싸락눈이 퍼붓듯 서로 돌팔매질을 하여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그달 내내 싸우다가 이기면 그 해 운수가 좋고, 지면 나쁘기 때문에 싸울 때 는 오직 싸움에만 몰두하여 그칠 줄을 모른다고 한다. 그것은 그 1년의 길흉이라는 것이 그 들 마음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싸움이 일단 시작되면 돌멩이는 손에 쥐어지고 손에 쥐어진 것은 돌멩이 뿐이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숨을 몰아쉬고 땀을 뻘뻘 홀리면서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가로 치닫고 앞으로 돌진하고 마치 미치광이처럼 날뛴다. 던질 때는 반드시 남보다 먼저 던지고 싸움도 혹시 남 뒤질세라 자식이 아비에게, 아우가 형에게, 척속(戚屬)이 척속에게, 이웃이 이웃에게 마구 돌 팔매질을 퍼붓는다. 이미 너와 나로, 원수로 갈린 이상 반드시 상대와 맞서고 상대를 이겨서 내가 장해지고 내가 올라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르고, 살갗이 찢 기어 살이 드러나고, 머리를 싸매고, 발이 갈라지고, 기가 죽고, 털이 빠지고 하여 구렁텅에 쭈구리고 앉아 깊이 숨도 못쉬게 만들어 놓아야만 비로소 내 마음이 시원하여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내가 이겼다. 상대는 도망쳤다. 이제 나는 금년의 길운을 차지하여 우환도 없을 것이고 질병도 없을 것이다."
하고 좋아한다. 싸움이 끝나고 난 후에는 아비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자식이 말하기를,
"내가 감히 우리 아버지에게 돌팔매질한 것이 아니라 싸움 그 자체에다 돌멩이를 던졌을 뿐이다."
한다. 아우로서 형에게 돌팔매질 했던 자도, 척속으로서 돌팔매질했던 자도, 또 이웃끼리 그랬던 자들도 모두 이구동성으로 오직 싸움에 돌멩이질을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 니라 돌팔매질을 당한 부형 쪽에서도 말하기를,
"저가 감히 내게 돌팔매질을 한 것이 아니라 싸움이었을 뿐이다. 나도 일찌기 우리 아버 지에게, 우리 형에게 돌멩이질을 하였었다."
라고 말하고, 그 주장은 척속도 이웃끼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유는 다름 아닌 습속이 몸에 배어 있고 그 풍속이 흘러 전해온 지도 오래되어 그것이 오히려 당연한 것처럼 그들에겐 여 겨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윤리(倫理)가 말살되고 풍교(風敎)에 손상을 주어도 그것이 이상 히
여겨지질 않는 것이다.
아! 1년 동안의 길흉이래야 그게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고 또 길흉 그 자체도 사실 그 리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이해(利害)라는 그 한 생각이 속에서 맹동하고 있고 잘못된 습속이 마음에 고질화되어 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형에게, 척속들 사이에, 또 는 이웃끼리 서로 원수가 되어 돌팔매질을 하면서 내가 자식이요, 아우요, 척속이요, 이웃 이라는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급기야 정월이 다 가고 싸움도 끝이 나면 지난 날 돌멩이질을 했던 그들이 이제 다시 부자가 되고, 형제가 되고, 척속이 되고, 이웃이 되어 언 제 그 일이 있었더냐는 듯이 윤리가 밝아지고 서로 화기에 넘쳐 이제는 또 지난날 저가 바 로 내게 돌을 던지던 자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것이다.
그 돌쌈이 있게 된 것은 유래가 있다. 신라의 도읍이 바다와 가까이 있어 섬 오랑캐들이 자주 침범하기 때문에 미리 돌팔매질이라도 익혀 음우(陰雨)에 대비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번 그 유전(流傳)이 잘못되자 길흉이라는 엉뚱한 개념이 거기에 붙어 천백년을 지나는 동 안 윤리에 손상을 주어가면서까지 자신도 모르게 그 일을 되풀이해 왔던 것이다.
보라 ! 이해라는 그것이 한번 마음속에서 들색이면 '부자·형제·척속 그리고 이웃이 일 시에 원수가 되고, 반대로 마음속으로부터 한번 이해에 관한 생각을 지워버리면 지난날의 원수였던 자가 이제 다시 부자·형제·척속·이웃으로 돌아와 그 정분이 다시금 멀쩡해지는 것을‥‥이 얼마나 이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얽어매고 있으며 또 습속이라는 것이 경우 에 따라서는 얼마나 사람들을 그릇되게 만들고 있는 것인가.
아! 이해, 우리가 이해라는 그 생각만 아니라면 부자·형제·척속·이웃 이 모두에 아마 윤리가 다시 밝아지고 사리에도 서로 어긋남이 없을 것 아닌가. 따라서 이 역시 세속 인심 을 깨우치고 풍화(風化)를 바로잡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감히 이렇게 말을 만들어보는 것이다.
<석전(石戰)> : 이 석전은 우리나라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민속으로, 서울에서는 18세기 <경도잡기(京都雜記)>에 실려있는 바 만리현(萬里峴)에서 마포패(麻浦牌)와 청파동패(靑坡 洞牌)가 이 석전을 벌려, 마포패가 이기면 삼남이 풍년들고, 청파동패가 이기면 관북이 풍년 든다고 생각되어 있었고, 이 때 사람도 많이 상했다. 이것은 정월 보름의 민속으로 지방에 따라서는 쥐불놀이로 대행되기도 하였다. 이 원류는 농경사회에서 물의 관개와 관련있는 헤 게모니 싸움이었고, 이긴 쪽이 형, 진 쪽이 아우가 되어 그 해의 권리를 양보하는 것이 관례 였다.
홍성민(洪聖民) : 1536(중종31) - 1594(선조27). 자는 시가(時可), 호는 졸옹(拙翁), 시호는 문정 (文貞), 본관은 남양(南陽). 1564년(명종19) 명경시에 급제하고 1575년(선조8) 사은사로 명 나라에 가 종계변무(宗系辨誣)에 대하여 재가를 받았으며, 예조판서, 대사헌을 역임하고, 광 국공신(光國功臣) 2등에 책봉 익성군(益城君)이라는 봉호를 받았다.
이 글은 <졸옹집(拙翁集)> 권6 잡저에 수록되어 있으며, 원제는 [석전설(石戰說)]이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수원교양강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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