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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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작가 : 황순원(1915∼2000)

 갈래 : 단편 소설, 전후 소설

 경향 : 리얼리즘[사실주의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재현하려고 하는 창작 태도. 19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일어난 예술 사조로, 현실을 존중하고, 주관에 의한 개변·장식을 배제한 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그 개성적 특질을 있는 그대로 그려 내려고 하는 경향 또는 양식이다.], 실존주의[19세기의 합리주의적 관념론이나 실증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철학. 19세기의 키에르케고르와 니체, 20세기 독일의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프랑스의 마르셀과 사르트르 등이 대표자이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사실적, 실존적, 휴머니즘적, 심리적

 배경 : 6·25 전쟁 중, 어느 깊은 산 속

 제재 : 낙오자들의 삶

 주제 : 극한 상황 속에서 발휘되는 삶의 의지, 전쟁의 비극과 삶에의 욕구,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의 삶의 방식,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다양한 삶의 방식

 구성 : 시간의 역전적 구성

발단 : 산속을 헤매는 부상당한 주 대위와 함께 무작정 걷고 있는 현 중위와 김 일등병

전개 : 현 중위의 꿈(현 중위와 주 대위의 무언의 갈등)

위기 : 살기 위해 현 중위가 혼자 떠나버리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주 대위와 김 일등병은 현 중위의 시체를 발견

절정 : 개 짖는 소리를 따라 걷도록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걸음을 재촉하며 총을 겨눔

결말 : 드디어 인가(人家)를 찾아낸 김 일등병과 주 대위의 죽음

 특징 : 우화적인 삽화를 통해 전쟁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극한적 상황 속에서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삶의 단면을 제시하고 있다. 간결한 문체로 감각적 인상을 제시하고 있다.

 등장인물 :

주 대위 : 전투에서 허벅지 관통상을 당해 부하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지만 막상 자기 때문에 남은 사람마저 위험에 빠뜨릴 것 같아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 개 짖는 소리를 듣게 되고, 김 일등병을 초가집까지 가게 한 후 죽음을 맞이하지만 삶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간형

현 중위 : 현실적인 인간으로 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질적인 가능성을 향해 움직이는 인물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

김 일등병 : 부상당한 주 대위를 업고 길을 헤매다 지쳐 삶의 의욕을 상실하지만 주 대위의 마지막 명령으로 살 길을 찾는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를 지니고 있는 인물

 줄거리 : 주 대위, 김 일등병, 현 중위 이 세 사람은 전쟁 중에 낙오하여 인적이 없는 깊은 산 속에서 며칠째 헤매고 있다. 주 대위는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어, 다른 두 사람이 교대로 업고 무작정 남으로 향하고 있다. 현 중위는 무언(無言)중에 주 대위에게 스스로 알아서 자살하여 다른 사람의 짐을 덜어 달라고 압박하지만 주 대위는 이를 모른 체한다.

저녁때, 현 중위는 혼자 떠나고 둘이 남게 되자 김 일등병이 주 대위를 업고 길을 떠나지만 혼자 업고 걷는 길이라 거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현 중위의 일을 떠올린다. 주 대위는 서너 달 전 부산에서 만났던 한 여인을 떠올린다.

그러다가 능선 낭떠러지에서 죽은 현 중위의 시체를 발견하고 둘은 기운을 잃는다. 그러다가 멀리서 들리는 대포 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희망을 갖게 된다. 주 대위는 의욕을 상실한 김 일등병을 위협하다시피 하여 초가집 근처까지 찾아오지만 자신은 죽고 만다.

 출전 : <너와 나만의 시간>(1964년)




벌써 이틀째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골목진 산봉우리와 계곡의 연속이었다. [현실적 상황의 어려움을 말하는 것으로 앞으로 갈 길이 전도요원(前道遼遠)하다는 말로 앞으로 갈 길이 아득히 멀다는 것을 말함]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움직이고 있는 것이라곤 없는 성싶었다. 바람도 없었다.

주 대위의 몸은 양쪽에서 부축을 받고도 자꾸만 아래로 늘어지기 시작했다.

마냥 그것은 두 사람의 어깨에 매달려 끌려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허벅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있는 것이다. 요행 동맥과 신경은 건드리지 않아 우선 압박대로 지혈을 시켜놓고 간신히 적의 포위망을 빠져나왔던 것인데, 오늘 아침부터는 그것이 부패작용이라도 일으켰는지 마구 저리고 쑤셔댔다. 설상가상[雪上加霜 : 눈 위에 서리가 덮인다는 뜻으로, 난처한 일이나 불행한 일이 잇따라 일어남을 이르는 말로 유사한 말로 전호후랑(前虎後狼 : 앞문에서 호랑이를 막고 있으려니까 뒷문으로 이리가 들어온다는 뜻으로, 재앙이 끊일 사이 없이 닥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도 있음]

어디까지 가면 된다는 한정된 길도 아니었다. 그저 무턱대고 남쪽으로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었다. 부상자에게 있어 일정한 거리감이 가져다주는 영향력이란 대단하다는 걸 주 대위는 알고 있었다.

어떤 전투에서 한 병사가 하복부에 관통상을 입고도 그 구멍 뚫린 하복부에다 제 옷섶을 틀어막아 가며, 반 시간 남아 걸려야 하는 진지까지 돌아와서야 고꾸라진 일이 있었다. 그런 치명상을 입고도 그 병사가 진지까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어디까지만 가면 진지가 된다는, 일정한 목적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정해진 목적지가 지금 자기네에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주 대위는 자기를 부축하고 걷는 현 중위와 김 일등병에게 자기는 더 걸을 수가 없으니 여기 남겨놓고 먼저들 가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혼자 처진다는 것은 그대로 죽음을 의미했다.

김 일등병이 업자고 했을 때도 주 대위는 잠자코 업히었다.

올해 일등병은 열아홉 살밖에 안됐으나 농촌 출신이라, 업고 걷는 거리도 상당했다.

현 중위가 대번해서 업을 차례가 되었다.

그는 업기 전에 슬쩍 주 대위의 허리께를 바라봤다. 거기에는 권총이 매달려있었다. 그들 세 사람은 이미 배낭이며 철모며 총이며 웃저고리를 벗어버린 지 오래였다. 남은 무기라곤 주 대위의 허리에 찬 권총뿐이었다.

주 대위는 현 중위의 눈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이 갔다. 그리고 그의 심중을 헤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없게 됐을 때부터 이미 자기의 몸뚱어리는 두 사람에게 거추장스러운 짐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차마 상사인 자기를 그냥 내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이쪽이 그걸 알아차리고 권총으로 자결할 것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업기 전 주 대위의 권총을 바라보는 현 중위의 심리는 주 대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자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 대위는 현 중위의 시선을 모른 체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군복바지와 군화마저 벗어버리고 그의 등에 업혔다.

현 중위는 김 일등병만큼 못했으나, 그래도 같은 학도병 출신인 주 대위보다는 체구도 크고 힘도 세어 꽤 잘 업어냈다.

이러한 그들이 이틀 동안에 먹은 거라곤 더덕과 칡뿌리, 그리고 어쩌다 찾아낸 샘물로 겨우 갈증을 면한 것밖엔 없었다. 게다가 첫여름 햇볕은 불길이었다.

업은 사람의 얼굴에서는 찝찔한 땀줄기가 마구 눈과 입으로 기어들었다. 그렇건만 손으로 훔쳐내지도 못하고, 그저 눈을 꾹꾹 감아 땀을 몰아내거나 입을 푸푸거리며 고개를 흔들어 떨구어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점차로 업은 사람의 걷는 거리가 줄어들고, 교대가 잦아갔다. 주 대위는 자기의 가슴과 업은 사람의 등이 젖은 셔츠를 결해 서로 미끈거리는 상쾌하지 못한 촉감에서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을 느꼈다.

주 대위를 다시 바꿔 업은 현 중위는 땀을 철철 흘리며 걷는 동안, 벌써 몇 번짼가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 다시금 나타났다.

그는 그젯밤 적의 꽹과리와 날라리 소리를 듣기 전 잠 속에서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누렇게 뜬 하늘 한복판에 황달 든 태양이 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누렇게 뜬 불모의 황야가 하늘과 맞닿은 데까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한가운데 그는 땀을 철철 흘리며 서있었다. 풀썩거리는 누런 흙이 걷어올린 정강이 한 중턱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는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양쪽 정강이에는 그가 마음 속으로 아껴오는 것이 있었다. 입대하기 전날 사랑하는 사람이 그의 걷어올린 다리를 보고 정강이 털이 길어 우습다면서 장난스럽게 양쪽 정강이 털 중에 제일 긴 것이 자기 것이니 잘 간직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지금 누렇게 뜬 흙먼지 속에 잠겨버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만 마음을 쓸 수는 없었다.

바로 눈앞에 풀썩거리는 흙바닥에 개미 구멍이 하나 나있었다.

그는 누구에게 명령받은 것도 아니면서 이 개미 구멍을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개미 구멍으로는 언제부터인지 흙빛과 같은 누런 개미떼가 연달아 기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거기 같은 빛깔을 한 커다란 왕개미 한 마리가 구멍 입구에 서서 조고만 개미들이 나오는 족족 주둥이로 목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삽시간에 개미의 시체가 가득 쌓였다. 그러나 그것은 개미의 시체가 아니고, 그대로 누렇게 뜬 흙으로 화해버리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한없이 넓은 불모의 황야도 이렇게 하나하나 목을 잘리운 개미떼의 시체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누렇게 뜬 하늘에는 황달 든 태양이 타고 있고, 그 밑에 그는 오도가도 못하고 개미 구멍을 지키고 서있어야만 했다.

현 중위는 자기 등을 짓누르고 있는 주 대위의 중량을 자꾸만 느꼈다. 이 달갑지 않은 중량을 제거해버리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주 대위 자신이 어서 삶에 대한 미련을 단념해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세 사람이 이름도 모르는 산중에서 몰죽음을 당하는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목이 탔다.

한 닷새 전, 오래간 만에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그는 생각했다.

그 속에는 이런 구절이 씌어있었다. <제 입술 꽃은 언제까지나 시들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제게 마련해준 지난날의 즐거운 기억이 쉴 새없이 거기 물을 주고 있으니깐요>

언제인가 그는 긴 입맞춤 끝에 그네의 귀에다 속삭인 일이 있었다. 그대의 입술은 외이파리 꽃이 아니고 수없이 많은 이파리를 지닌 여러 겹꽃이요, 아무리 파헤쳐도 끝이 없소, 라고.

그리고 그 편지 속에는 여지껏과 다른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씨'자를 붙여서 호칭해오던 것이 당신이란 말로 변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 두 사람의 사이가 더 결합됐음을 뜻했다.

그는 편지를 읽고 새삼스럽게 정강이를 내려다보며, 자기에게 부어져있는 한 사람의 여인의 웃음 머금은 맑은 눈길을 느꼈다.

지금도 그는 주 대위를 업고 홧홧 달아오는 입안이 갈증을 지난날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남겨준 촉감으로 축여가며, 자기에게 부어진 그네의 웃음 머금은 맑은 눈길을 되살렸다. 그 눈길을 따라 걷는 동안, 그의 땀에 젖은 눈도 적이 맑게 빛나는 것이었다.

어느 능선굽이에 이르렀다.

김 일등병이 대번해서[순번을 교대해서] 업을 차례였다.

지형 상으로 보아 앞에 가로놓인 계곡을 내려가 앞산으로 질러 올라가면 잠깐이요, 그렇지 않으면 꾸불꾸불 굽이진 능선을 상당히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곳이었다.

현 중위는 계곡을 내려가 곧장 가자고 했다. 누구든지 그렇게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단 몇 걸음의 단축이나마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있는 것이었다[전쟁 중 낙오되어 부상자와 굶주림 등의 극한적 상황에서 살 길을 모색해야 하는 처지].

김 일등병의 의견은 그러나 그렇지가 않았다. 계곡을 내려갔다가 나무숲 속에서 방향이라도 잃게 되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길만 더 더디게 되기 쉽다는 것이다[진지하게 현 상황을 분석하고 조금 늦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려는 김 일등병의 성격을 드러냄].

얼른 결정이 지어지지 않고 있을 때 주 대위가 한 마디 했다.

"현 중위, 김 일병의 말대루 하지."[계급적 우월 의식이 남아 있음]

퍼뜩 현 중위의 눈이 주 대위의 허리에 매달려 있는 권총으로 갔다[주대위가 알아서 자결해 주기를 바라는 현 중위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음]. 그러는 그의 눈앞에는 또다시 꿈의 장면이 나타났다[현 중위의 꿈에 나오는 태양과 황야가 상징하는 바는 황달 든 태양, 불모의 황야는 모두 인물들이 처해 있는 거칠고 암담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한결같이 누렇게 뜬 하늘에는 황달[담즙이 원활하게 흐르지 못하여 온몸과 눈 따위가 누렇게 되는 병] 든 태양이 타고 있고, 그 밑으로 한없이 넓게 깔려 있는 불모의 황야. 그 한가운데 그는 땀을 철철 흘리며 서 있었다[전쟁으로 인한 생사의 극한 상황을 누렇게 병든 색의 이미지로 설정하여 황폐하고 거친 느낌을 표현하고 있다]. 바로 앞에 누렇게 뜬 메마른 흙바닥에 개미 구멍이 있어, 누런빛을 한 조고만 개미 떼[어려운 상황에 처한 세 인물의 처지와 비슷함 /거대한 권력들에 의해 펼쳐지는 전쟁 상황 속에서 왜소한 존재로 피해를 당하는 인간의 모습]가 연달아 기어 나오고, 그것을 구멍 입구에 같은 빛깔의 왕개미[왜소한 인간들을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거대 권력이나 지배자를 상징]가 대기하고 서서 자꾸만 목을 잘라 내고 있는 것이다[현 중위에게 나타난 꿈의 장면에서 개미와 왕개미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가? 개미는 관습과 관념에 사로잡혀 새로운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 또는 거대 권력들이 펼치는 전쟁 상황 속에서 한없이 왜소한 존재로 피해를 당하고 있는 개인들의 모습을 상징한다. 왕개미는 이런 개미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고 있는 거대 권력, 지배자 등을 상징한다.]. 마치 그것은 왕개미가 기계적으로 주둥이를 놀리고 있는데 거기 꼭 맞는 속도로 작은 개미 떼들이 기어 나와 목을 들이미는 것과도 같았다. 그리고 목 잘린 개미 떼들은 그대로 누렇게 뜬 흙으로 화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거기 따라 점점 흙이 높아지면서 그의 정강이 털이 거의 묻히게 돼 있었다[위기감, 긴장감, 절박성, 절망감 등이 담겨 있고 작품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은 우화 속의 개미 떼의 그것과 흡사하다. 누군가에 의해 정당한 이유도 없이 무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은 전쟁이라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 죽어가야 하는 작품 속 인물들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는 삽화적 우화를 통해 이 같은 전쟁의 비극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삽화는 인물들이 처한 상황이나 심리 상태, 작품의 주제 등을 효과적으로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작품의 분위기를 새롭게 환기시키는 효과도 거두고 있다.].

초조할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곳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인물의 심리 상태]

그러다가 문득 그는 개미 구멍 한옆에 따로 뚫려져 있는 샛구멍[현 중위가 주 대위를 버리고 가는 복선에 해당]을 하나 발견했다. 이것만은 꿈속에서는 전혀 없었던, 지금 그 자신이 의식적으로 뚫어 놓은 구멍이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개미 떼들은 그냥 본래의 구멍으로만 나오면서 목을 무수히 잘리우고 있는 것이었다. [개미는 본능적으로 열을 지어갈 뿐 그 대열의 끝이 죽음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새로운 탈출구를 마련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상황에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죽음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 놓인 현대인의 자화상과도 같다. 또한 현 중위가 부상당한 주 대위를 부축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 개미의 시체가 변한 흙 속에 자신도 묻혀버리는 절망적인 결과만 낳으리라는 불안한 심리도 담고 있다. 따라서, 현 중위는 의식적으로 탈출구를 뚫어 놓지만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고 현 중위의 위기 의식을 더욱 고조시켜 혼자서 도망가는 행동을 낳게 한다. 개미 이야기는 전쟁과 낙오병이라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과 현 중위의 심리를 상징적·압축적·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 중위는 주 대위를 업지도 않은 몸이건만 전신에 비지땀을 흘렸다.

해거름[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는 일. 또는 그런 때] 때 세 사람은 구렁이 한 마리를 잡아 구워서 나눠 먹었다.[삶의 욕구를 상징함]

다 먹고 난 현 중위가 뒤라도 마려운 듯이 자리를 떴다.

그런 지 좀만에 주 대위가 김 일등병에게 말했다.

“자네두 여길 떠나게.”

김 일등병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주 대위를 쳐다봤다.

“현 중윈 갔어. 기다리다 못해.”

“기다리다 못해 가다뇨”

“내가 자살하길 기다리다 못해 떠났어."

사실 현 중위는 돌아오지 않았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시선을 마주 바라보기를 피하면서,

“자네두 어서 여길 떠나게.''[주 대위는 자신의 상황을 누구보다도 더 잘 파악하고 있고, 혼자 떠난 현 중위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김 일등병에게 살 길을 권유하고 있다. 주 대위의 차분한 어조에서 전쟁의 비극적인 상황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며 주 대위의 인간적인 면모도 보이고 있다. 동시에, 정말로 김 일등병이 떠나길 바라고 한 말로 이해할 수도 있고, 김 일등병을 떠보기 위해 한 말로 이해할 수도 있다.]

김 일등병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서산에 비낀 붉은 놀을 한 번 바라보고는 말없이 주 대위에게 등을 돌려 댔다[주 대위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적인 김 일등병의 면모].

혼자 업고 걷는 길이라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지가 않았다. 조금 가서는 쉬고 조금 가서는 쉬고 했다.

밤이 되자 두 사람은 아무 데고 드러누웠다.

짐스럽다고 맨 먼저 버리고 온 배낭 속에 들었을 건빵이 눈앞에 어른거렸으나 실상 그들은 이미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들은 현 중위의 일을 생각했다. 지금 어디쯤 갔을까. 김 일등병은 자기네를 버리고 간 그가 원망스러웠다. 한편 주 대위는 한시바삐 그가 아군 진지를 찾아 구원병이라도 보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이었다. 물론 두 사람은 서로 입 밖에 내어서는 말하지 않았다.

김 일등병이 잠든 뒤에도 주 대위는 눈을 붙이지 못했다. 이제 와선 상처의 아픔도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일단 잠들었다가는 영 깨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그 여자의 생각을 머리에 떠올리게 됐는지는 모른다.

서너 달 전, 그가 어느 고지 탈환 작전에 공훈을 세웠다 하여 며칠 동안의 특별 휴가를 받았을 때, 부산에 갔던 길에 하룻밤 몸을 산 일이 있는 여자였다.[부산에서 만났던 여자의 이야기가 지금 주 대위에게 어떠한 의미를 갖느냐 하면 현 중위와 김 일등병의 짐이 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통해 주 대위는 타인을 위한 희생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강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다.]

 



이 여자의 말이 1. 4 후퇴 무렵 서울 어떤 술집에 있었을 땐데 어느 날 어스름녘 외국인 세 녀석에게 쫓겨 들어오는 한 소녀를 뒷문으로 빠져나가게 한 후, 대신 그 일을 당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도 구별 못하는 새, 그만 정신을 잃었다가 들창이 희끄무레 밝아올 녘에야 깨어났노라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소녀를 오늘 거리에서 만났는데, 이쪽이 미처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을 소녀 편에서 먼저 반기더라는 것이다. 자기와 같은 여자를 아무 거리낌없이 대해주는 것이 여간 고맙지가 않더라고 했다. 더구나 무어든 도와주고 싶다는 말에는 송구스럽기까지 하더라는 것이다.

주 대위는 이 일종 미담 같은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네의 심중을 한번 꼬집어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그럼 그 송구스럽고 고마운 맛을 다시 보기 위해선 앞으루 또 그런 경을 당하면 들창이 희끄무레 밝아올 때까지 정신을 잃을 수 있단 말이지?

그네는 어둠 속에서 담배를 붙여 물더니, 글쎄요 그런 일이란 하려구 해서 되는 건 아녜요, 그때 난 나두 모르게 그 소녈 대신한 것두 그거예요, 혹시 다음에 같은 경우를 당한다구 해두 내가 어떻게 할는 지는 나 자신두 몰라요,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할 거구, 경우에 따라서는 또 그렇게 하지 않을 거구.

주 대위의 머리에 이 여자와 주고받은 마지막 대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자기도 거듭하는 격전 속에서 이 여자의 말과 같은 행동을 해왔던 것이다.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예기치 않았던 행동을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는 새로운 생각 하나가 스치고 지나갔다.

지난날 자기가 그 여자에게 비꼬임조로, 다시 그런 경우를 당하면 또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하겠느냐고 했을 때의 자기 마음 한구석에서는 앞으로 그네가 같은 경우를 당하면 다시금 누군가를 위해서 대신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 생각 속에는 그네가 그런 경우에는 으레 그래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은근히 깃들어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지금 죽음을 앞두고 어느 능선 어둠 속에 누워있는 주 대위에게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그네에게 그것을 바랄 아무런 권한도 자기에게는 부여돼있지 않다는 걸 느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여태까지 자기가 싸움터에서 겪은 온갖 상황에 대해서도 제삼자인 누가 있어, 그건 응당 그랬어야만 한다고 감히 주장해서는 안되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문득 누구에게랄 것 없이 한번 대들어 따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한없이 두꺼운 어둠뿐이었다.

이윽고 그도 잠 속에 빠져들어 가고 말았다.

날이 밝자 또 걸었다. 어제보다도 쉬는 도수가 잦아 갔다.

김 일등병도 군복 바지와 군화마저 벗어 버렸다. 맨발로 산길을 걷기가 힘든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신발이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내배었다. 그렇다고 돌부리 아닌 고운 땅만 골라 밟을 수만도 없었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인가 아닌 산봉우리와 계곡의 움직임 없는 굴곡뿐이요, 귀에는 그처럼 갈망하고 있는 아군의 폿소리 대신 한없이 먼 데까지 퍼져 나간 고즈넉함과 김 일등병의 몰아쉬는 거칠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래도 주 대위는 온 신경을 귀로 모으고 있었다. 어떤 색다른 소리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번은 주 대위가 저리 가 물을 마시고 가자고 했다. 김 일등병은 어디 물이 있는가 싶었다. 그러나 주 대위가 말하는 데로 가 보니, 바위틈에서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은 것이 겨우 십릿길도 못 되었다. 그 동안 두 사람은 산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 날로 먹었을 뿐이었다.

김 일등병의 무릎은 굽어지고 허리는 앞으로 숙여져 거의 기는 시늉이었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허리가 앞으로 숙여지는 각도에 따라 그만큼 자기의 생에 대한 희망도 꺾여 들어감을 느껴야만 했다.

저녁 때쯤 어느 능선을 돌아가느라니까 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펄럭 하고 날아올랐다. [현 중위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음 통상 까마귀는 전쟁의 냉혹성을 상징함]깎은 듯한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발길을 돌리며 김 일등병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까마귀 두세 마리가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쪼고 있었다.

사람의 시체였다. 그리고 첫눈에 그것은 현 중위의 시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젯저녁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났을 때와 똑같이 위는 셔츠 바람이요, 아래는 군복 바지에 군화를 신고 있었다.

까마귀란 놈이 시체 얼굴에 붙어서 무엇인가 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쪽을 보고는 날아갈 기미를 보이다가도 그저 까욱까욱 몇 번 울 뿐, 다시 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시체 얼굴에는 이미 눈알은 없어져 떼꾼하니[아무 것도 없이 텅빈 채로] 검은 구멍이 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와 아무데나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현 중위의 시체를 보자 마지막 남았던 기운마저 빠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잠시 후에 김 일등병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일어나 허청거리며 벼랑 쪽으로 가더니 돌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현 중위의 시신이라도 지켜주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으로 남을 배려하는 성격이 드러남] 그 때마다 까마귀가 펄럭 하고 시체를 떠나는 것이었으나, 곧 못마땅한 듯이 까욱까욱 하며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다.[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까마귀의 모습]

김 일등병은 도로 와 쓰러지듯이 드러누워 버렸다.

옆에 누워 있는 주 대위를 돌아다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번듯이 누워 있었다.

김 일등병은 전에 치열한 싸움터에서는 오히려 잊게 마련이었던 죽음이란 것을 몸 가까이 느꼈다. 내일쯤은 까마귀가 자기네의 눈알도 파먹으리라. 그러자 그는 옆에 누워 있는 주 대위가 먼저 죽어 까마귀에게 눈알을 파먹히우는 걸 보느니보다는 차라리 자기 편이 먼저 죽어 모든 것을 모르고 지나기를 바랐다.

그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 기운조차 지금 그에겐 없었다.

저도 모르게 혼곤히 잠 속에 끌려 들어갔던 김 일등병은 주 대위가 무어라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하늘에 별이 총총 나 있었다.

"저 소릴 좀 듣게."

주 대위가 누운 채 쇠진한 목안의 소리로,

“폿소릴세.”

김 일등병은 정신이 번쩍 들어 상반신을 일으키며 귀를 기울였다.[기대감으로 일어남] 과연 먼 우렛소리 같은 포성[삶의 희망, 구원의 손길]이 은은히 들려 오는 것이다.

"어느 편 폽니까"?

"아군의 포야. 백 오십오 밀리의……."

주 대위의 감별이면 틀림없는 것이다. 그래 얼마나 먼 거리냐고 물으려는데 주 대위 편에서,

"그렇지만 너무 멀어. 사십 리는 실히 되겠어."[아군의 폿소리임을 알게 되자 잠시나마 기대감을 가졌던 주 대위와 김 일등병은, 그러나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큰 좌절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다면 아무리 아군의 포라 해도 소용이 없다.

김 일등병은 도로 자리에 누워 버렸다.[실망감의 표현]

주 대위는 지금 자기는 각각으로 죽어 가고 있다고 느꼈다. 이상스레 맑은 정신으로 그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그는 드디어 지금까지 피해 오던 어떤 상념[권총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며, 이는 자신의 자결로 인해 김일병을 구하겠다는 희생을 의미함]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것은 권총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죽을 자기가 진작 자결을 했던들 모든 문제는 해결됐을 게 아닌가. 첫째 현 중위가 밤길을 서두르다가 벼랑에 떨어져 죽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아무튼 이제라도 자결을 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아무리 지친 김 일등병이라 하더라도 혼잣몸이니 어떻게든 아군 진지까지 도달할 가망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는 김 일등병을 향해,

“폿소리 나는 방향은 동남쪽이다. 바로 우리가 누워 있는 발쪽 벼랑을 왼쪽으로 돌아 내려가면 된다!”

있는 힘을 다해 명령조로 말했다. 그리고 무거운 손을 움직여 허리에서 권총을 슬그머니 빼었다.

그 때, 바로 그 때 주 대위의 귀에 은은한 폿소리 사이로 또 다른 하나의 소리가 들려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도 의심스러운 듯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저 소리가 무슨 소리지"?

김 일등병이 고개만을 들고 잠시 귀를 기울이듯 하더니,

"무슨 소리 말입니까"?

"지금은 안 들리는군."

거기에 그쳤던 소리가 바람을 탄 듯이 다시 들려 왔다.

"저 소리 말야. 이 머리 쪽에서 들려 오는`……."

그래도 김 일등병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개 짖는 소리 같애.[한 가닥 삶의 희망을 의미하고, 작중 분위기를 전환시키고, 앞에 나온 '포성'과 같은 의미임]"

개 짖는 소리[삶의 욕구에 대한 희망의 소리]라는 말에 김 일등병은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 머리 쪽으로 무릎걸음을 쳐 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결말 부분에 나타나는 주 대위의 행위와 개 짖는 소리가 암시하는 것은 인가가 가까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리가 실제로 들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한 몸부림 때문에 주 대위가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개 짖는 소리는 주 대위로 하여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되살리게 만든다. 김 일등병 역시 처음에는 개 짖는 소리를 못 듣고, 권총을 들이밀며 힘든 길을 재촉하는 주 대위를 원망하지만, 나중에는 그 역시 개 짖는 소리를 듣고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된다.]

"그 등성이를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김 일등병의 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누웠던 자리로 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도 받고 싶었다.[주 대위는 무엇보다도 김 일등병에게 인가가 가까이 있어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싶어했고, 그리고 살 가망이 없는 자기도 최후까지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싶었던 것이다. 자책 - 결단 - 기대 - 의지로 심리 변화가 있음.]

김 일등병이 드러누우며 혼잣소리로,

"내일쯤은 까마귀 떼가 더 많이 몰려들겠지. 눈알이 붙어 있는 것두 오늘밤뿐야.[삶의 희망과 의지를 상실한 김 일등병의 심리를 표현한 것]"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권총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어둠 속에 주 대위가 권총을 이리 겨눈 채 목 속에 잠긴 음성치고는 또렷하게,

"날 업어!"[자신에게만 들려온 개 짖는 소리를 향하여 김 일등병을 안내하리라는 주 대위의 마지막 의지가 단호한 목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하는 것이다.

김 일등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면서도 하라는 대로 일어나 등을 돌려대는 수밖에 없었다.[물에 빠진 놈 건져 주니 봇짐 내라는 식이군]

"자, 걸어라!"

김 일등병은 자기 오른쪽 귀 뒤에 권총 끝이 와 닿음을 느꼈다.[삶을 포기한 채 탈진하여 쓰러지려 하는 김 일등병을 일으켜 세우는 마지막 방법이었으므로.]

등성이를 넘어 컴컴한 나무숲으로 들어섰다.

"좀 서!"

업힌 주 대위가 잠시 귀를 기울이고 나서,

"왼쪽으로 가!"

좀 후에 그는 다시,

"잠깐만."

그리고는,

"앞으루!"

이렇게,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앞으로 하는 주 대위의 말대로 죽을 힘을 다해 걸음을 옮겨 놓은 동안에도 김 일등병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혹시 주 대위가 죽음을 앞두고 허깨비 소리를 듣고 그러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하필 자기네 두 사람은 마지막에 이러다가 죽을 필요는 무언가. 어젯저녁부터 혼자 업고 오느라고 갖은 고역을 다 겪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원망이 주 대위를 향해 거듭 복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쪽 귀 뒤에 감촉되는 권총 끝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권총이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옮겨 놓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산밑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루!"

"그대로 똑바루!"[김 일등병을 위협하면서 걸음을 옮기게 하는 행위로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지치고 절망한 김 일등병에게 삶의 의지를 주고자 하는 주 대위의 인간적인 마음이 담겨져 있다]

그제야 김 일등병의 귀에도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점점 개 짖는 소리로 확실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한 거리에서인지는 짐작이 안 되었다.

목에서는 단내가 나고, 간신히 옮겨 놓는 걸음은 한껏 깊은 데로 무한정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렇건만 쉬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 뒤에 와 닿은 권총 끝이 더 세게 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다. 어떻게 걸음을 떼어놓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저쪽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초가집 같은 검은 그림자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리고 거기서 짖고 있는 개의 모양이 몽롱해진 눈에 어렴풋이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과 동시에 귀 뒤에 와 밀고 있던 권총 끝이 별안간 물러나면서 업힌 주 대위의 몸뚱이가 무겁게 탁 내려앉음을 느꼈다[주 대위의 죽음을 말함]. <'황순원 전집 4' 1958>



 이 작품은 전쟁에서 낙오와 부상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세 명의 병사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행동,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세 병사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삶을 향한 본능적 욕구라는 것이다.

 '너와 만의 시간'은 극한 상황 속에서는 상관과 부하라는 사회적 위계와 질서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간임을 의미한다. 생사를 넘나들며 인물들이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극한 상황은 '너'와 '나'라는 실존적 개체만이 존재하는 시간, 즉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현 중위는 자신의 삶을 위해 혼자 떠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김 일등병은 끝까지 주 대위를 버리지 않는다. 주 대위는 자신이 그들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삶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주 대위가 마지막에 듣는 개 짖는 소리나 대포 소리 등은 실제의 소리라기보다는 소리는 김 일등병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끝까지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 의지의 표현에 가깝고, 주 대위가 들은 그 소리는 김 일등병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소리로서, 생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힘이 된다. 이 작품은 생존에의 의지, 인간에 대한 믿음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황순원(黃順元 1915-2000)

 황순원의 작품 경향은 초기 작품 경향은 '41년 [인문평론]에 발표한 <별>, <그늘> 등에서 현실적 삶의 모습보다는 주로 동화적인 낙원이나 유년기의 순진한 세계를 담은 환상적이고 심리적 경향의 단편을 발표. 경희대 교수 재직하면서 <목넘이 마을의 개>, <독 짖는 늙은이>, <과부> 등 단편과, <인간 접목> 등 장편 발표했고, 후기 작품 경향은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남긴 비극적 상황과 비인간화 경향을 폭로했다. 그의 작품 경향은 크게 보면 아름다운 문체에서 빚어지는 아늑하고 서정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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