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객(浪客)의 신년 만필(新年漫筆) / 전문 및 해설 / 신채호
by 송화은율
문예 운동(文藝運動)의 폐해(弊害)
낭만주의, 자연주의, 신낭만주의 등의 구별도 잘 못하는 자가 현대에 가장 유행하는 굉굉(轟轟)한 서방 문예가들의 유명한 소설이나 극본 등을 거의 눈에 대해 보지 못한 완전히 문예의 문외한이, 게다가 십여 년 해외에 앉아 조선 문단의 소식이 격절(隔絶)하야, 무슨 작품이 있는지, 얼마나 낫는지 어떤 것이 환영을 받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조선 현재 문예에 대하야 가부를 말하랴. 다만 3·1 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된 자는 문예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압박이 아모리 심하다 하나 아귀(餓鬼)의 금강산 구경 같은 문예 작품의 독자는 없지 안하며, 경성(京城)의 신문지에 끼여 오는 책사 광고(冊肆廣告)를 보면 다른 서적은 거의 십오 년 전 그때의 한 꼴이나, 시인과 소설 선생의 작물(作物)은 비교적 다수인 듯하다. 그래서 나의 난필(亂筆)이 문예에 대하야 망론(妄論)을 한 마디 하려 하나 아 재료가 없어 남의 말이나 소개하고 모으랴 한다. 일즉 중국 광동(廣東)의 '향도(嚮導)'란 잡지에 그 호가 몇째던지, 작자가 누구이던지를 지금에 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국 신문예에 대한 탄핵의 논문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중국 연래에 제1혁명, 제2혁명, 5·4 혁명, 5·7 운동……등이 모다 학생이 중심이었다. 그러더니 근일(近日)에 와서는 학생 사회가 왜? 이렇게 적막하냐 하면 일반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 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 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여, 문예의 도원(桃源)으로 안락국(安樂國)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의 시나 몇 줄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그 생활비가 넉넉히 될 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아 시가라 소설가는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무한한 염복(艶福)을 누리게 됨으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 같이 체수(逮囚)와 포살(砲殺)의 위험은 업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됨으로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이 적어지며 문예품의 독자가 많을수록 운동가가 없어진다 하였다. 나는 이 글을 읽을 때에 3·1 운동 이후에 沈積(침적)하여진 우리 학생 사회를 연상하였다. 중극은 광대, 침혹한 대륙인 고로 한 가지의 풍조로써 전국을 멍석말이할 수 없는 나라어니와 조선은 청명협장(淸明狹長)한 반도인 고로 한 가지의 운동으로 전 사회를 곡감꼿치 떼이듯 할 수 있는 사회니, 즉 3·1 운동 이후 신시, 신소설의 성행이 다른 운동을 초멸(剿滅)함이 아닌가 하였다.
예술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 중 어떤 것이 좋은가
전술(前述)과 같이 설혹 신시와 신소설이 성행하는 까닭에 사회의 모든 운동이 침적하다 할지라도 만일 순 예술주의자에게 말하면 '빈처(貧妻)의 단속것은 팔아서라도 훌륭한 몇 짝의 신시를 삼이 가(可)하며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자미있는 몇 줄의 신소설을 바꿈이 가하다.' 하리니 그까짓 운동의 침적 여부야 누가 알겠느냐? 하리라. 존화주의(尊華主義)를 위하야 조선이 존재하며 삼강 오륜을 위하야 인민이 존재하며 권선징악을 위하야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 기타 모든 것이 자(自)의 존재할 목적이 업시 타(他)의 무엇을 위하야 존재한 줄로 단정한 누백 년 래(來) 노예 사상에 대한 반감으로는 현 세계에 인도주의의 문예가 예술주의의 문예를 대신하려 함에 불구하고 나는 곧 예술 지상주의로 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술도 고상(高尙)하여야 예술이 될지어늘 환고랑자(紈袴浪子)의 육노(肉奴)가 되랴는 자살귀(自殺鬼)의 강명화(康明花)도 열녀(烈女)되는 문예가 무삼 예술이냐, 누백만(累百萬)의 아귀를 곁에다 두고 일 원 내지 오 원의 소설책이나 팔아 일포(一飽)를 구하려는 문예가들이 무슨 예술가이냐, 금강(金剛)의 경(景)이 아모리 좋을지라도 기아(飢兒)의 눈에는 일시(一是)의 반(飯)만 못 하며 솔거(率居)의 화송(畵松)이 아모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익수자(溺水者)의 눈에는 일편(一片)의 목판(木版)만 못 하며 살도 죽도 못 하게 된 조선 민중의 귀에는 모든 미려한 가극(歌劇)과 소설의 이야기가 백두산 속 미신귀(迷信鬼)인 조 선생(趙先生)의 강신필(降神筆)만 못하리니 일 원이면 일가 인구(一家人口)의 며칠 생활할, 민중의 눈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이 원 삼 원의 고가(高價) 되는 소설을 지어 노코 민중 문예라 호호(呼號)함도 얄미운 짓이어니와 민중 생활과 접촉이 업는 상류 사회 부귀가 남녀의 연애 사정을 그림으로 위주하는 장음 문자는 더욱 문단의 수치이다. 예술주의의 문예라 하면 현 조선을 그리는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인도주의의 문예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문예가 되어야 할 것이니 지금의 민중에 관계가 없이 다만 간접의 해(害)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는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 구주(歐洲) 각국에는 매양 문예의 작물(作物)이 혁명의 선구가 되었다 하니 이는 그 역사와 환경이 다른 까닭이니 조선의 현재에 비할 것이 아니다.<'동아일보', 1925.1.2>
작자 : 신채호(申采浩 1880-1936)
형식 : 중수필
성격 : 논설적, 논증적, 비판적
문체 : 강건체
구성 : 3단 구성, 병렬식 구성
제재 : 조선 신문예 운동
주제 : 조선 신문예 운동의 폐해
특징 : 비분강개의 어조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드러냄. 강건체로 혁명가적인 면모를 보여줌, 확실한 역사관에 바탕을 둔 소신 있는 의견제시가 돋보임.
출전 : <동아일보>(1925)
낭객(허랑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의 신년 만필(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는 일. 또는 그 글. 대체로 글 속에 사물에 대한 필자의 풍자나 비판이 들어 있다)
문예 운동(文藝運動)의 폐해(弊害)
낭만주의, 자연주의, 신낭만주의(1920년대에 국내 문단에 수용된 외국 문예 사조) 등의 구별도 잘 못하는 자가 현대에 가장 유행하는 굉굉(轟轟 : 소리가 몹시 요란함)한 서방 문예가들의 유명한 소설이나 극본 등을 거의 눈에 대해 보지 못한 완전히 문예의 문외한(어떤 일에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으로 신채호 자신을 말함)이, 게다가 십여 년 해외에 앉아 조선 문단의 소식이 격절(隔絶 : 사이가 동떨어져 연락이 안 됨)하야, 무슨 작품이 있는지, 얼마나 낫는지 어떤 것이 환영을 받는지 알지 못하니 어찌 조선 현재 문예에 대하야 가부를 말하랴[낭만주의, 자연주의, - 가부를 말하랴. : (신채호 자신으로서는) 문예 사조도 잘 알지 못하고, 당시 유명한 서양 문학가들의 작품도 읽어 보지 못하여 문학 예술에 전문적 식견도 없고, 조선을 떠나 중국에 망명한 지가 10년이나 되어서 조선의 망명한 지가 10년이나 되어서 조선의 현재 문학 작품이나 그 경향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유행하던 신문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다. 그 점은 이광수를 비롯한 순수 문학이나 예술지상주의 문인들을 비판하는 시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 조선 문학의 식견에 대한 고백
다만 3·1 운동 이래 가장 현저히 발달된 자는 문예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경제 압박이 아모리 심하다 하나 아귀(餓鬼 : 전생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태어난 귀신이라는 말도 있는데, 여기서는 염치 없이 먹을 것을 탐내는 사람을 욕하여 이르는 말)의 금강산 구경 같은 문예 작품의 독자는 없지 안하며[아귀의 금강산 - 없지 안하며, :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경제적 궁핍의 해결보다는 문예적 미를 구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며, 또는 형편이 어려워도 문학 작품을 사서 읽는 광적인 사람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는 속담을 염두에 둔 표현], 경성(京城)의 신문지에 끼여 오는 책사 광고[冊肆 : 서점(書店)廣告]를 보면 다른 서적은 거의 십오 년 전 그때의 한 꼴이나, 시인과 소설 선생의 작물(作物)은 비교적 다수인 듯하다. 그래서 나의 난필(亂筆 : 함부로 어지럽게 쓴 글씨)이 문예에 대하야 망론(妄論 : 망령된 이론이나 말)을 한 마디 하려 하나(자신의 글을 겸손하게 낮추어 이르는 말) 아(我 : 조선을 말함)재료가 없어 남의 말(중국의 문예 평론)이나 소개하고 모으랴 한다. - 조선 문예 운동의 상황 소개
일즉 중국 광동(廣東)의 '향도(嚮導)'란 잡지에 그 호가 몇째던지, 작자가 누구이던지를 지금에 다 기억하지 못하는 중국 신문예에 대한 탄핵의 논문이 났었는데 그 대의를 말하면 '중국 연래에 제1혁명, 제2혁명(청나라가 멸망하고 쑨원을 임시 총통으로 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한 제 1혁명과 위안스키이의 탄압에 반발한 쑨원의 지도 아래 제 2혁명을 일으켰으나 실패, 위안스카이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 이에 반발하여 제 3 혁명이 일어났다.), 5·4 혁명(반제국, 반봉건주의 혁명 운동), 5·7 운동……등이 모다 학생이 중심이었다. 그러더니 근일(近日)에 와서는 학생 사회가 왜? 이렇게 적막하냐(학생 사회에서 사회 참여에 대한 관심이 왜 떨어졌느냐)하면 일반 학생들이 신문예의 마취제(문학이 사람의 의식을 마비시킨다는 말로 이곳 사이트의 이름을 seelotus라고 했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를 먹은 후로 혁명의 칼을 던지고 문예의 붓을 잡으며 희생 유혈의 관념을 버리고 신시, 신소설의 저작에 고심하여[신문예의 마취제를 - 고심하여, : 3·1 운동 이후 일반 학생들은 현실 타파의 혁명 의지를 버리고 문예 저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려 희생하겠다는 생각 대신 신시, 신소설 저작에만 매달리게 되어, 작자는 상기한 경향이 모두 당시의 감상적인 신문예의 책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문예의 도원(桃源 : 무릉도원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현실 도피처를 말함)으로 안락국(安樂國 : 극락 정토(極樂淨土)이지만 현실 도피처의 성격이 강함)을 삼는 까닭이다. 몇 구의 시나 몇 줄의 소설을 지으면 이를 팔아 그 생활비가 넉넉히 될 뿐더러 또한 독자의 환영을 받아 시가라 소설가라 하는 명예의 월계관을 쓰며 연애에 관한 소설을 잘 지으면 어여쁜 여학생이 그 뒤를 따라 무한한 염복(艶福 : 아름다운 여자가 잘 따르는 복)을 누리게 됨으로 혁명이나 다른 운동 같이 체수(逮囚 : 죄가 결정되지 않아 오래 갇혀 있음)와 포살(砲殺 : 체포되어 총살 당함)의 위험은 업고 명예와 안락을 얻으며 연애의 단꿈을 이루게 됨으로 문예의 작자가 많아질수록 혁명당(항일 저항 세력)이 적어지며 문예품의 독자가 많을수록 (항일 저항)운동가가 없어진다 하였다. - 중국 신문예 운동의 폐해 소개
나는 이 글을 읽을 때에 3·1 운동 이후에 沈積(침적 : 가라앉고 쓸쓸함)하여진 우리 학생 사회를 연상하였다(조선 학생 사회나 중국 학생 사회는 마찬가지라는 말). 중국은 광대, 침혹한 대륙인 고로 한 가지의 풍조로써 전국을 멍석말이[① 장례를 치를 형편이 못 되는 시체를 멍석에 말아서 산골짜기에 내다 버리는 일. ② 예전에, 권세 있는 집안에서 사사로이 사람을 멍석에 말아 놓고 뭇매를 가하던 일. 또는 그런 형벌이지만 여기서는 한 가지 사조나 경향으로 전국을 일시에 지배할 수 있다는 말 ]할 수 없는 나라어니와[중국은 광대, - 나라어니와 : 중국은 워낙 넓고 큰 대륙이기 때문에 한 가지 사조나 경향으로 전국을 일시에 다 지배할 수 없는 나라이어니와] 조선은 청명협장(淸明狹長 : 맑고 깨끗하여 좁고 긴의 뜻이나 아주 좁고 유행에 민감하고 파급력이 크다는 의미가 담김)한 반도인 고로 한 가지의 운동으로 전 사회를 곡감꼿치[곶감 꼬치 : 감 꼬치를 먹듯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뽑아] 먹듯.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뽑아] 먹듯 애써 알뜰히 모아 둔 재산을 조금씩 조금씩 헐어 써 없앰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여기서는 땅이 좁은 탓으로 한 가지 운동이 한순간에 한반도 전역을 휩쓸 수 있다는 말] 떼이듯 할 수 있는 사회니, 즉 3·1 운동 이후 신시, 신소설의 성행이 다른 운동을 초멸(剿滅 : 외적이나 도적의 무리를 무찔러 없앰.)함이 아닌가 하였다.[3·1 운동 이후 - 아닌가 하였다. : 3·1 운동 이후 조선의 문사들에게 예술 지상주의적 신시, 신소설 등의 문예 저작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민족 현실을 생각하고 개혁하는 운동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다시 말해서 삼일운동 이후 사회 운동이 퇴조한 것은 사람들이 문학을 현실의 도피처로 삼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으며, '폐허;, '백조' 등의 문예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 신문예의 성행으로 영향을 받는 개혁 운동
예술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 중 어떤 것이 좋은가
전술(前述)과 같이 설혹 신시와 신소설이 성행하는 까닭에 사회의 모든 운동이 침적하다 할지라도 만일 순 예술주의자에게 말하면 '빈처(貧妻)의 단속것(단속곳. 양 가랑이가 넓고 말이 막혀 있는 여자 속옷의 하나)은 팔아서라도 훌륭한 몇 짝의 신시를 삼이(사는 것이) 가(可)하며 강토의 전부를 주고라도 자미있는(재미있는) 몇 줄의 신소설을 바꿈이 가하다(경제적 사정은 어려워도 문예적 미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함).' 하리니 그까짓 운동의 침적 여부(여기서는 사회의 모든 운동, 특히 저항 운동이 잘되고 못되고의 그러함과 그러지 아니함)야 누가 알겠느냐? 하리라. - 순 예술주의자에 의해 성행하는 문예에 대한 문제 제기
중국의 존화주의(尊華主義)를 위하야 조선이 존재하며 삼강 오륜을 위하야 인민이 존재하며 권선징악을 위하야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존화주의를 위하야 -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 : 여기에 열거한 세 가지의 사실은 모두 어떤 주체의 본질이 제대로 중시되지 못하고, 다른 것의 수단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상들이다. 신채호는 이것을 노예 사상의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기타 모든 것이 자(自)의 존재할 목적이 업시 타(他)의 무엇을 위하야 존재한 줄로 단정한 누백 년 래(來) 노예 사상에 대한 반감으로는 현 세계에 인도주의의 문예가 예술주의의 문예를 대신하려 함에 불구하고 나는 곧 예술 지상주의로 찬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술도 고상(高尙)하여야 예술이 될지어늘 환고랑자(紈袴浪子 : 부잣집 한량)의 육노(肉奴)가 되랴는 자살귀(自殺鬼)의 강명화(康明花)도 열녀(烈女)되는 문예가 무삼 예술이냐[환고랑자의 - 무삼 예술이냐 : 부잣집 한량과의 육욕적 노예됨을 이루지 못해 자살한 강명화 같은 인물을 열녀로 작품화하는 그런 문예가 무슨 예술이 된다는 말인가.], 누백만(累百萬)의 아귀를 곁에다 두고 일 원 내지 오 원의 소설책이나 팔아 일포(一飽)를 구하려는 문예가들이 무슨 예술가이냐, 금강(金剛)의 경(景)이 아모리 좋을지라도 기아(飢兒)의 눈에는 일시(一是 :한 숟가락)의 반(飯)만 못 하며 솔거(率居)의 화송(畵松)이 아모리 명작이라 할지라도 익수자(溺水者 : 물에 빠진 사람)의 눈에는 일편(一片)의 목판(木版)만 못 하며(그림의 떡이라는 '화중지병'이라는 말로 현실 생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 살도 죽도 못 하게 된 조선 민중의 귀에는 모든 미려한 가극(歌劇)과 소설의 이야기가 백두산 속 미신귀(迷信鬼)인 조 선생(趙先生)의 강신필(降神筆)만 못하리니 일 원이면 일가 인구(一家人口)의 며칠 생활할, 민중의 눈에 들어갈 수도 없는 이 원 삼 원의 고가(高價) 되는 소설을 지어 노코 민중 문예라 호호(呼號 : 크게 선전함)함도 얄미운 짓이어니와 민중 생활과 접촉이 업는 상류 사회 부귀가 남녀의 연애 사정을 그림으로 위주하는 장음(음란을 부추김) 문자는 더욱 문단의 수치이다.[이 부분은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를 연상시키는데 문학이라는 것은 현실과 관련되어야 한다는 말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문학의 사회적 참여의 책무를 강조한 말임 -
"×선생님!"
건우 할아버지가 별안간 그 그로테스크한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우리 건우란 놈 말을 들으니 선생님은 글을 잘 씬다 카데요? 우리 섬에 대한 글 한분 써 보이소. 멋지기! 재밌실 낌데이. 지발 그 썩어 빠진 글을랑 말고(현실적인 고뇌가 담겨 있지 않는 글. 다시 말해서 농민들을 위한 글을 써야 함을 은연중 말하고 있고, 참여주의적인 문학관이 담겨 있음)]- 예술지상주의나 인도주의에 대한 비판
예술주의의 문예라 하면 현 조선을 그리는 예술이 되어야 할 것이며 인도주의의 문예라 하면 조선을 구하는 문예가 되어야 할 것이니 지금의 민중에 관계가 없이 다만 간접의 해(害)를 끼치는 사회의 모든 운동을 소멸하는 문예는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지금의 민중에 관계가 없이 -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 : 현재의 조선 민중의 현실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히려 간접적으로 해만 끼치는, 그리하여 우리 사회와 민족 현실의 각성을 위한 운동을 소멸시키는 그런 문예는 추구해서는 안 된다.] 구주(歐洲) 각국에는 매양 문예의 작물(作物 : 문학 작품)이 혁명의 선구가 되었다 하니 이는 그 역사와 환경이 다른 까닭이니 조선의 현재에 비할 것이 아니다(이 말은 조선의 실정에 맞는 문학 작품으로 조국 해방에 매진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이육사' 등과 같은 작품이 필요함을 언급하고 있다.) . - 조선의 문예가 나아갈 길
<'동아일보', 1925.1.2>
낭객(浪客) : 허랑하고 실속이 없는 사람
만필(漫筆) : 일정한 형식이나 체계 없이 느끼거나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는 일. 또는 그 글. 대체로 글 속에 사물에 대한 필자의 풍자나 비판이 들어 있다
굉굉(轟轟) : 소리가 몹시 요란함
격절(隔絶) : 사이가 동떨어져 연락이 안 됨
아귀(餓鬼) : 전생에 지은 죄로 아귀도에 태어난 귀신이라는 말도 있는데, 여기서는 염치 없이 먹을 것을 탐내는 사람을 욕하여 이르는 말
책사(冊肆) : 서점(書店)
안락국(安樂國) : 극락 정토(極樂淨土)
염복(艶福) : 아름다운 여자가 잘 따르는 복
체수(逮囚) : 죄가 결정되지 않아 오래 갇혀 있음
곡감꼿치 : 곳감 꼬치
단속것 : 단속곳. 양 가랑이가 넓고 말이 막혀 있는 여자 속옷의 하나
침적(沈寂) : 가라앉고 쓸쓸함
낭만주의, 자연주의, - 가부를 말하랴. : (신채호 자신으로서는) 문예 사조도 잘 알지 못하고, 당시 유명한 서양 문학가들의 작품도 읽어 보지 못하여 문학 예술에 전문적 식견도 없고, 조선을 떠나 중국에 망명한 지가 10년이나 되어서 조선의 망명한 지가 10년이나 되어서 조선의 현재 문학 작품이나 그 경향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 유행하던 신문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담겨 있다. 그 점은 이광수를 비롯한 문인들을 비판하는 시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아귀의 금강산 - 없지 안하며, : 경제 사정이 어려워도 경제적 궁핍의 해결보다는 문예적 미를 구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며
신문예의 마취제를 - 고심하여, : 3·1 운동 이후 일반 학생들은 현실 타파의 혁명 의지를 버리고 문예 저작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나라를 위해 피를 흘려 희생하겠다는 생각 대신 신시, 신소설 저작에만 매달리게 되어, 작자는 상기한 경향이 모두 당시의 감상적인 신문예의 책임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중국은 광대, - 나라어니와 : 중국은 워낙 넓고 큰 대륙이기 때문에 한 가지 사조나 경향으로 전국을 일시에 다 지배할 수 없는 나라이어니와
3·1 운동 이후 - 아닌가 하였다. : 3·1 운동 이후 조선의 문사들에게 예술 지상주의적 신시, 신소설 등의 문예 저작 경향이 지배적이어서 민족 현실을 생각하고 개혁하는 운동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폐허>, <백조> 등의 문예지에 대한 비판이 될 수도 있다.
존화주의를 위하야 - 역사와 소설이 존재하며 : 여기에 열거한 세 가지의 사실은 모두 어떤 주체의 본질이 제대로 중시되지 못하고, 다른 것의 수단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상들이다. 신채호는 이것을 노예 사상의 현상이라 말하고 있다.
환고랑자의 - 무삼 예술이냐 : 부잣집 한량과의 육욕적 노예됨을 이루지 못해 자살한 강명화 같은 인물을 열녀로 작품화하는 그런 문예가 무슨 예술이 된다는 말인가.
일시 : 한 숟가락
장음 : 음란을 부추김
지금의 민중에 관계가 없이 - 우리의 취할 바가 아니다 : 현재의 조선 민중의 현실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오히려 간접적으로 해만 끼치는, 그리하여 우리 사회와 민족 현실의 각성을 위한 운동을 소멸시키는 그런 문예는 추구해서는 안 된다.
이 작품은 중국에 머물며 독립 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작자가 국내 독자들을 위해 쓴 것이다. 이 글에는 국권 상실의 시대에 우리 문예의 의식과 사명이 오로지 일제강점기라는 현실 극복에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여기에 제시된 부분은 문예 운동의 피해를 비판한 부분이다. 작자는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으므로 조선의 현실을 정확히 알지는 못하나, 근래 문예 운동이 성행하는 사실을 안다고 하며 그 문예 운동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한다. 그 비판을 위해 중국의 한 잡지에 실린 중국 문예 운동의 폐해에 대한 글을 인용하는데, 중국의 경우가 우리의 경우와 유사하다는 것이 작자의 주장이다. 결국 문예 운동의 성행이 다른 사회 운동을 소멸시키고 있다는 것이 작자의 판단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채호의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사상이 바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러한 사상은 문예운동이 젊은 청년들을 좀먹고 있다고 본 것은 문예에 대한 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더 큰 애국 사상이 그러한 판단을 하게 했으리라 본다. 나라를 잃은 젊은이들이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애국 운동인데 문예운동이 그런 방향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이 결국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는 사회적 산물이라는 측면에서도 올바른 지적이라고 할 수 있고, 문학도 당면한 현실적 문제에 개입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글이다.
신채화와 같은 생각을 가진 문인으로는 김남주 시인을 들 수 있다. 김남주 시인은 시를 통해, 문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이해와 감상1
이 글에서 신채호는 나라를 잃은 시대 속에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 과제는 노예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한 직접적인 투쟁이 되어야 하며, 학문과 문예와 청년의 운동도 조선의 현재를 살리는 일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으며 이에 반하는 모든 것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본문은 문예 운동의 폐해에 대해서 지적·비판한 부분인데 여기에는 신채호의 사상가적·혁명가적인 면모가 잘 나타나 있다. 우리에게 제일의 실천 과제는 독립 운동이고 문학 예술도 당연히 이러한 민족 현실적 소명에 참여하고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출처 : 김병국 외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만필(漫筆)
원래는 일정한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즉흥적이고, 풍자적으로 가볍게 쓴 글을 일컬음. 1920년대에는 수필에 해당하는 글의 제목으로 '만필(漫筆)', '잡감(雜感)','단편(斷片)', 유사(有思)' 등이 사용되었다.
"낭객의 신년 만필" 목차
1. 도덕과 주의의 표준
2. 이해와 권형(權衡)
3. 병을 따라 약을 쓰라
4. 유산자보다 무산자의 존재를 잊지 마라
5. 신청년도 도로 구청년이 아니냐
6. 통척(痛斥)할 사회의 양대 악마
7. 문예 운동의 폐해(윗글)
8. 예술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 중 어떤 것이 좋은가
신채호 문학의 의의
1. 신채호 문학의 의의는 삶과 죽음의 절대주의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신채호가 문학의 사회적 효용성을 중요시했던 것은 아니었다.
2. 신채호는 양반 계층 출신이면서도 주자학적 이데올로기를 넘어서서, 민족 해방을 위한 진보주의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3. 신채호는 민중의 직접 혁명을 주장하여 식민지적 현실을 적확하게 인식하고 이를 민중적 세계관 속에서 담아 내었다. 그의 혁명적 일원론은 서구 문학에 대한 민족 문학의 항거였고, 문예 반정(反正)이었다.
5 ·4운동 五四運動
중국의 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으로 평가되며, 또한 근대사 ·현대사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로 평가되기도 한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 조항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또한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문학혁명(文學革命:1917) 이후의 신문화운동도 경험하였다. 그리하여 이 5 ·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군벌정부는 즉시 탄압에 나서서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학생들은 스트라이크로써 대항하였는데 톈진[天津]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우한[武漢]에까지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不買)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 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 지식인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조선의 3 ·1운동에 고무되고 러시아 혁명의 영향도 있어 그 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신채호 문학의 의의
신채호가 강조하는 것은 낭가 사상이다. 낭가 사상은 화랑 정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는 신채호가 신라의 통일의 힘을 화랑 사상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벗어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낭가 사상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조선 상고사>의 서문에서 신채호는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이라고 정의한다. '아' 는 남이고 '비아' 란 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역사는 즉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 간의 투쟁의 과정이라는 의미가 된다. 시기에 따라 '비아' 는 계속적으로 달라지는데 여기에서 역사는 주인공인 '아' 의 관점에서 쓰여지게 된다는 것이 민족주의 사관이다.
신채호가 문학에서 강조하였던 것은 식민지의 현실을 담아 내는 '나' 관점에서 문학이 쓰여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당시의 서구 문학 경도에 대한 항거였다. 이를 국수주의나 보수주의로 이해할 것은 아니며, 당시 시대적, 문화적 상황에서 중심을 잡고, 우리 문학을 세워 나가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김병국 외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조선상고사'
해제 :
단군 시대로부터 백제의 멸망과 그 부흥 운동까지가 담겨 있다. 1931년에 <조선일보> 학예란에 연재하였고, 1948년에 종로 서원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다. 본디 이 책은 신채호의 <조선사> 서술의 한 부분이었는데, 연재가 상고사 부분에서 끝났기 때문에 <조선 상고사>라고 불리고 있다. 전 12편으로서 편명은 1편 총론, 2편 수두시대, 3편 3조선 분립 시대, 4편 열국 쟁웅(列國爭雄)시대 대(對)한족 격전 시대, 5편 (1)고구려 전성 시대, (2)고구려의 중쇠(中衰)와 북부여의 멸망 6편 고구려·백제 양국의 충돌, 7편 남방 제국 대(對) 고구려 공수 동맹, 8편 3국 혈전의 시(始), 9편 고구려 대수 전역(對隋戰役), 10편 고구려 대당 전역(對唐戰役),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이다.
'조선사 연구초'
해제 :
1924년 10월 13일부터 1925년 3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을 1929년 조선 도서 주식회사에서 <조선사 연구초>라는 제목으로 간행하였는데, 홍명희(洪命熹)의 서(序)와 정인보(鄭寅普)의 서(署)가 있다. 이 책에 실린 6편의 논문은 주로 한국 고대사에 관한 것으로 그 제목은 '고사상이두문명사해석법(古史上吏讀文名詞解釋法)', '삼국사기중동서양자상환고증(三國史記中東西兩字相換考證)', '삼국지동이열전교정(三國志東夷列傳校正)', '평양패수고(平壤浿水考)', '전후삼한고(前後三韓考)', '조선역사상일천년래제일대사건(朝蘚曆史上一天年來第一大事件)' 등이다
신채호의 민족주의(民族主義) 사학
우리나라 민족주의 사학은 단재 신채호에 의하여 확고히 성립되었다. 그는 애국 계몽 운동 시기에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삼걸전', '최도통전' 등의 구국 위인 전기를 저술하여 애국심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독사신론>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조선 상고 문화사> 등을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성립하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였다. 1923년에는 의열단의 요청에 따라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고 식민지 상태에서 우리 민족을 구할 역사의 주체를 민중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중에 의한 혁명을 항일 운동의 핵심으로 부각시켰다.
참고 문헌
강영주, <한국 역사 소설의 재인식>(창작과 비평사, 1991)
민족문화사 연구소 엮음, <민족문학사 강좌(하)>(창작과 비평사, 1995)
최원식,<한국 근대소설사론.(창작과 비평사, 1986)
이해하기
1. 이 글에서 작가가 당시 우리 문학의 일반적 경향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부분을 찾아보자.
교수·학습 방법 :
조선 현재의 문예가 서구의 사상에 빠져서 민족 현실적 소명을 망각한 채 예술 지상주의로 빠지는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작가가 어떤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지 찾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신채호는 중국의 신문예 운동으로 인한 폐해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우리 상황과 대비시키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비교와 대조의 방법을 사용해 대비시킴과 동시에 우리의 문예 운동의 미래를 중국의 신문예 운동의 결과를 통해 유추하고 있다.
3. '예술주의의 문예와 인도주의의 문예에 어떤 것이 옳은가'에서 작가가 생각하는 당대의 '이상적인 조선의 문예' 가 무엇인지 찾아보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국권 상실이라는 환경하에서 우리 문예의 의식과 사명은 민족 현실적 소명에 참여하고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신채호가 주장하는 당대의 이상적인 문예의 조건이다. 이를 본문에서 학생들이 찾아보도록 하고, 이에 대해 문학의 기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토론할 수 있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당대의 이상적인 문예는 민족적 소명에 참여할 수 있는 것, 즉 조선의 현실을 그리는 것이며, 조선을 구하는 것이지 낭만주의나 유미주의에 침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특히 퇴폐적인 20년대의 감상주의는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망각한 것으로 다른 사회 운동마저 저해하고 있다. 이런 신채호의 생각은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한 것으로 서구 문학의 홍수 속에서 민족 문학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문화를 반영하고 잇는 한 그것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문학을 위한 문학이 되고 기교를 위한 기교가 되었을 때,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
4. 1920년대 우리 문단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서구의 문예 사조들을 조사해 보고, 그 특성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1920년대에 우리 문단에 영향을 미친 서구 문예 사조로는 낭만주의, 자연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시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는 낭만주의가, 소설에는 사실주의, 자연주의가 영향을 미쳤다. 이를 여러 다양한 경로를 바탕으로 학생들이 찾아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낭만주의 :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사조, 고전주의의 규범과 경직성에 반대하여 나타났다. 몰개성적 전통 지향에 반발하여 감정의 권리를 되찾으려고 하여 자유로운 공상의 세계를 동경하였으며, 개성·감정·정서를 중요시하였다. 이성보다는 감성, 형식보다는 내용, 규범보다는 개성과 자유를 존중하였다. 감정 표현론, 천재론을 주장하였으며 상징과 암시를 중시하였다. 대표 작가는 괴테, 실러, 위고, 워즈워스, 코울리지, 키츠, 바이올런 등이다.
사실주의 : 19세기 중반 지나친 이상주의에 빠진 낭만주의를 비판하여 일어난 문예 사조, 낭만주의의 환상적인 태도와 비현실성을 비판하고 객관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그려내려고 하는 문학·미술상의 주의이다. 계몽주의, 근대적 합리주의, 실증주의를 정신적 배경으로 하였다.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한 사실주의는 소설의 창작, 비평론에 영향을 끼쳤다. 대표 작가는 발자크, 스탕달, 디킨즈,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등이다.
상징주의 : 19세기 말에 일어나 20세기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문예 사조. 사실주의에 반대하고 낭만주의를 계승하였다. 상징의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하여, 신비주의, 의지철학, 주관적 관념론 등에 바탕을 두고 탄생하였다. 자아를 구속하는 객관적, 이성적 규범의 통제를 벗어나 꿈과 신비의 세계를 노래하고자 하고 현실을 초월한 본질의 세계에 접근하고자 노력하였다. 대표 작가는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등이다.
자연주의 : 사실주의를 더욱 극단화하여 문학에 실험 과학의 방법을 적용하고자 했던 문예 사조. 즉 인생의 현실을 이상화(理想化)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묘사해야 하는 주의를 이른다. 진화론, 환경 결정론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문에 사조이다. 인간의 삶이 환경에 의해 규정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 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추악한 면을 고발하였다. 대표 작가는 졸라, 하우프트만, 드라이저 등이다.
1. 신채호의 입장에서 다음 시를 평가해 보자.
-이상화, '나의 침실로' 바로 가기
작품 해제 :
1923년 <백조(白潮)> 지에 발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함께 이상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 시는 낭만주의적 수법으로 관능(官能)의 미(美)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백조>의 부류를 이루고 있던 경향이기도 하였다. 분출하는 감정을 솟는 대로 내뿜은 듯한 이 시는 간결성이 모자라고 좀 사설이 많은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결점을 그의 특유한 감성 분출의 매력으로 해소시키고 있다.
작가 소개 :
이상화(李相和, 1901~1943) : 시인. 호는 상화(尙火). 대구 출생. <백조(白潮)> 동인으로, 낭만적 경향에서 출발하여 상징적인 서정시를 주로 냵다. 작품에 '나의 침실로', '태양의 노래' 등이 있다.
교수·학습 방법 :
신채호의 문학관을 정리하고 이에 비교해 볼 때, 낭만주의의 절정판인 잡지 '백조' 에 실린 이 작품이 어떠한 평가를 받을 수 있을지를 평가해 보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바른 문학은 조선 혼이 담긴 조선의 문학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 시에는 조선의 정신은 남아 있지 않다. 소양의 낭만주의 시를 본떠 지은 이 시에 어떠한 조선의 전통과 정신이 남아 있을 것인가. 이는 단지 퇴폐적인 낭만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시는 우리가 바라는 예술이 아니며, 우리나라와 우리 민족을 위하는 예술이 아니다.
2. 신채호는 이 글에서 상업적인 문학 작품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모둠별로 당시의 베스트셀러 문학 작품의 목록을 조사하여 그 내용을 파악한 후, 신채호의 생각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토론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모둠별로 당시(1920년대)에 유행하는 신시와 신소설 작품을 조사하게 하고, 이 작품의 줄거리와 내용을 찾아보도록 한다. 이러한 당시의 유행에 대한 신채호의 주장의 정당성과 부당함에 대해 찬반으로 나누고 나아가 문학의 사회적 역할과 관련해 토론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찬성 :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민족사의 운명을 외면한 당시의 신소설이나 신시의 경향, 즉 무조건 적인 개화 사상을 예찬한 경향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다.
반대 : 당시에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지만, 그래도 문학이 하나의 경향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비판은 부당하다.
신채호(申采浩)
1880(고종 17) ∼ 1936. 조선 말기 ·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 언론인 ·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 무애생(無涯生) · 열혈생(熱血生) · 한놈 · 검심(劍心) · 적심(赤心) · 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 ( 申叔舟 )의 후예로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 ( 正言 )을 지낸 할아버지 성우(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 통감 通鑑 ≫ 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 ( 申箕善 )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 ( 李南珪 )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 · 변영만 ( 卞榮晩 ) · 이장식(李章植) · 유인식 ( 柳寅植 )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 ( 申圭植 )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 · 신백우 ( 申伯雨 )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 ( 張志淵 )의 초청으로 ≪ 황성신문 ≫ 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 황성신문 ≫ 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 ( 梁起鐸 )의 천거로 ≪ 대한매일신보 ≫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 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 대한매일신보 ≫ 에 〈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 · 〈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 · 〈 서호문답 西湖問答 〉 · 〈 영웅과 세계 〉 · 〈 학생계의 특색 〉 · 〈 한국자치제의 약사 〉 · 〈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 · 〈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 · 〈 이십세기 신국민 〉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 독사신론 讀史新論 〉 · 〈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 · 〈 동국거걸최도통전 東國巨傑崔都統傳 〉 · 〈 동국고대선교고 東國古代仙敎考 〉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 천희당시화 天喜堂詩話 〉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 대한협회월보 大韓協會月報 ≫ 와 ≪ 대한협회회보 ≫ 에 〈 대한의 희망 〉 · 〈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 이태리건국삼걸전 伊太利建國三傑傳 ≫ 과 〈 을지문덕전 乙支文德傳 〉 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 가정잡지 家庭雜誌 ≫ 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 독사신론 〉 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 ( 崔南善 )이 발행하던, ≪ 소년 少年 ≫ 제3년 제8권에 〈 국사사론 國史私論 〉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그가 집필한 〈 동국거걸최도통전 〉 과 〈 이순신전 〉 · 〈 을지문덕전 〉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그는 28세 무렵, 양기탁 · 이동녕 ( 李東寧 ) · 이회영 ( 李會榮 ) · 이동휘 ( 李東輝 ) · 안창호 ( 安昌浩 ) · 전덕기 ( 全德基 ) · 이갑 ( 李甲 ) · 이승훈 ( 李昇薰 )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 新民會 )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 國債報償運動 )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 ( 尹致昊 ) · 안창호 · 최광옥 ( 崔光玉 ) · 최남선 · 박중화(朴重華) · 장응진(張膺震)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 ( 靑年學友會 )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 ( 尹世復 ) · 이동휘 ·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 해조신문 海潮新聞 ≫ 의 후신 ≪ 대동공보 大東共報 ≫ 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 ( 勸業會 )에서 기관지 ≪ 권업신문 勸業新聞 ≫ 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 ( 同濟社 )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 ( 文一平 ) · 박은식 ( 朴殷植 ) · 정인보 ( 鄭寅普 ) · 조소앙 ( 趙素昻 ) 등과 박달학원 ( 博達學院 )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尹世茸) ·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 ( 東昌學校 ) 교사로 재직하면서 ≪ 조선사 ≫ 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 · 고구려 ·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 꿈하늘 夢天 〉 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 북경일보 北京日報 ≫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 ( 漢城政府 )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李承晩)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 독립신문 ≫ 에 맞서 ≪ 신대한 新大韓 ≫ 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 · 정한경 ( 鄭翰景 )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 ( 金元鳳 )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 ( 朝鮮革命宣言 )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創造派)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 · 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 동아일보 ≫ · ≪ 조선일보 ≫ 등에 발표되었다. 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무정부주의동방연맹(無政府主義東方聯盟)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 용과 용의 대격전 〉 · 〈 꿈하늘 〉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 · 평등 · 폭력 · 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 대한매일신보 ≫ 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 소년 ≫ 에 〈 국사사론 〉 을 연재했으며, 최영 · 이순신 · 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 조선상고사 朝鮮上古史 ≫ · ≪ 조선상고문화사 朝鮮上古文化史 ≫ · ≪ 조선사연구초 朝鮮史硏究草 ≫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 동아일보 ≫ · ≪ 조선일보 ≫ 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 아(我) ’ 와 ‘ 비아(非我) ’ 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 아 ’ 와 ‘ 비아 ’ 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 ( 漢四郡 )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 전후 삼한설 ’ 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그의 역사학은 우리 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 · 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참고문헌 ≫ 丹齋申采浩全集(丹齋申采浩全集編纂委員會, 乙酉文化社, 1972), 丹齋申采浩先生誕辰100週年紀念論集(丹齋申采浩先生紀念事業會, 1980), 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申一澈, 高麗大學校出版部, 1981), 申采浩의 民族主義思想(崔洪奎, 丹齋申采浩先生紀念事業會, 1983), 申采浩의 社會思想硏究(愼鏞廈, 한길사, 1984), 丹齋史學의 理念(洪以燮, 世界 2-4, 國際文化硏究所, 1960), 丹齋史學의 一面一半島的史觀의 批判과 高句麗舊疆論(洪以燮, 白山學報 3, 1967), 丹齋의 思想-愛國啓蒙思想을 中心으로-(金泳鎬, 나라사랑 3, 1971), 申采浩의 自强論的國史像-淸末嚴復梁啓超의 變法自强論의 西歐受容과 관련하여- (申一澈, 韓國思想 10, 1972), 丹齋申采浩의 古代史認識試考(李萬烈, 韓國史硏究 15, 1977), 申采浩의 無政府主義思想-丹齋申采浩의 歷史思想硏究의 第三部로서-(申一澈, 韓國思想 15, 1977), 丹齋小說에 나타난 郎家思想-丹齋申采浩全集(補遺) 所收 9篇을 대상으로-(李東洵, 어문논총 12, 1978), 丹齋史學에서의 民族主義問題(李基白, 문예진흥 48, 1979), 丹齋史學의 背景(李萬烈, 韓國史學 1,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申采浩의 愛國啓蒙思想(愼鏞廈, 韓國學報 19 · 20, 1980), 丹齋史學의 배경과 구조(李萬烈, 創作과 批評 15-2, 1980), 丹齋申采浩의 民族主義(安秉直, 自由 106, 1981), 丹齋申采浩의 生涯와 思想(李鍾春, 淸州敎育大學論文集 19, 1983), 大韓民國獨立有功人物錄(國家報勳處, 1997).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아시아 근대화 문턱
지금부터 약 130여 년 전 조선이 개항했을 때, 조선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주쳤던 근대 세계는 어떤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역사가 홉스봄(E.Hobsbawm, 1917년~)은 그 시대를‘제국의 시대’라 규정한 바 있는데, 당시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시점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함포를 앞세우고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 제국의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글/김동택
일찌감치 서구의 압력에 시달렸던 중국은 조공국들이 열강의 영향권으로 넘어가자, 조선을 개화시키는 방식으로 서구의 압력을 완화하고자 했다. 조선은 중국의 권유에 따라 조심스럽게 서 일본과 먼저 수교 조약을 체결하고, 이후 서구 여러 나라들과도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조선이 당면했던 과제는 근대가 부여하는 과제, 즉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어떻게 문명 개화를 달성하여 생존을 유지할 수 있을까였다.
다른 여러 나라들처럼, 조선의 지배층들도 이 과제를 둘러싸고 분열되었다.하나의 대안은 전통을 근간으로 서구의 기술을 선택적으로 수용한다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요즘 말로 ‘홀로서기’ 전략이었으며, 다른 하나의 대안은 반문명으로 인식되었던 전통을 부정하고 서구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변법개화(變法改化)’, 요즘 말로 ‘따라잡기’ 전략이었다. 이 두 방식은 시대마다 그 모습을 달리했지만, 기본틀은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그것은 서구의 압력을 통해 근대화를 경험했던 후발국의 딜레마를 조건 지우는 것이었다. 그 딜레마는 한 민족주의 연구자의 “따라하라, 실패할 것이다. 따라하지 마라, 그래도 실패할 것이다.” 라는 암울한 언급에 함축되어 있다.
제3세계나라들의 선발국 ‘따라잡기 전략’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근대 일본, 그리고 현재의 한국처럼 서구 따라잡기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상당한 비용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된다. 반대로 미얀마나 1979년 혁명 이후의 이란, 그리고 북한처럼 ‘홀로서기’ 노선을 걷는 행위는 고립과 지속적 저발전을 초래했다. 일부 서구 나라들을 제외한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러한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야말로, 근대 세계가 갖는 비극적 특성일 것이다.
문명 개화를 향한 근대의 실험기
개항 직후 조선에서는 1882년 개화에 반대하는 임오군란(壬午軍亂), 1884년 한층 빠른 개화를 요구했던 갑신정변(甲申政變)이 발생했다. 두 사건 모두 청의 개입으로 진압되었고, 이후 10년간 조선은 청의 제국주의적 간섭 아래 온건한 개화정책을 추구한다. 미묘한 균형은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甲午改革)의 발생으로 파괴되었다. 전쟁에 패배한 청의 영향력이 퇴조하고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었으며, 범개화파 연합 정권에 의해 갑오개혁이 실시되었다. 일본의 지원을 받은 조선의 개화관료들은 일종의 변법개화를 추구했다.
갑오개혁의 주도세력들이 왕을 배제한 입헌군주제 국가를 추구했던 까닭에, 고종은 아관파천(俄館播遷,1896년)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갑오정권을 붕괴시켰고, 개화파를 대신한 독립협회 세력과 근왕주의자들의 합종 연횡 속에서 대한제국이 성립되었다. 광무황제(고종)는 이어 독립협회를 해산시키고 황제권을 강화시키는 한편, 토지 측량, 교육, 군사 및 도시 계획 등 여러 분야에서 이른바 광무개혁(光武改革)을 추진한다.
독립협회와 황제가 협력과 대립을 통해 근대의 길을 모색했던 19세기 마지막 몇 년은 다양한 정치 사조와 정치 실험이 시도되었던, 한국 근대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떠들썩한 시기, 중요한 근대화의 문턱이었다. 당시의 화두는 ‘문명 개화’였으며 이를 뒷받침한 이론은 ‘사회진화론’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사회과학의 개념들, 예를 들면 입헌군주제나 공화제, 천부인권과 주권, 교육 개혁과 식산흥업 등이 이때 본격적으로 수용되었다.
근대 관념의 차이
그런데 문명 개화 과정에서 국권론과 민권론의 대립이 중요한 논란거리가 되었던 일본과는 달리, 한국에서 민권 혹은 개인에 대한 관심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독립신문』에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단어인 ‘독립’은 국가나 개인의 독립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의미였지만, 개인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수사에 불과했다. 개인의 독립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 아니라 부국강병을 위한 수단이었고, 개인이 교육받고 부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발전을 위한 기능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문명 개화를 뒷받침했던 이론인 사회진화론은 근대 사회를 본질적으로 경쟁의 장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당시『독립신문』의 논설들을 검토해보면, 사회의 단위를 설정하는 데 지금과는 다른 기준들이 작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신체모발이 서로 같고 글을 서로 통용하며 풍속에도 같은 것이 많은지라 … 서로 도와 주며 아무쪼록 …구라파의 침임을 동심으로 막아야 …청국이 구습에 젖어 … 대한 사정이 능히 자수할 만하면 그때는 일본과 합력하야 청국을 억지로라도 개명 식혀 동양형편을 보존하여야 이 세 나라이 자주 독립권들을 지탱하지….” ( 『독립신문』1898년 4월 7일자 논설)라거나 “일본사람들은 황인종 형제의 모든 나라를 권고하고 인도하되 작은 이익을 탐치말며... 서로 보호할 큰 계책을 세워 동양 큰판에 평화함을 유지케 하는 것이 그 하나님께 정하여 주신 직분의 당연한 의무라 하노라.”( 『독립신문』1899년11월9일자논설)하는 논리가 그러하다. 사회진화, 즉 경쟁이 일어나는 경계선은 서양 대 동양이라는 보다 넓은 선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만큼 당시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는 기대 반 경계 반의 모호한 것이었다. 전통적 유생들이나 농민들은 농민항쟁과 의병전쟁을 통해 일본의 개입에 저항하고 있었지만, 민족적 근거를 기반으로 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실제로 당시 많은 지식인들도 일본에 저항하는 농민들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문명적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고 보면, 당시 사람들의 근대 관념은 요즈음 국민 국가를 근거로 파악하는 근대 관념과 거리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일제에 대응하는 두 개의 노선
온갖 논리들이 착종되어 근대를 사고했던 20세기 초반의 한국인들에게 본격적으로 양자택일의 선택을 강요했던 결정적 사건은 러일전쟁(1904년)이었다. 일본을 ‘동양 문명을 지키는 수호자’로 인식하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러일전쟁을 서구 문명에 대한 동양 문명의 투쟁으로 간주하고,일본의 승리를 옹호하였다. 그러나 정작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화 한다. 일본의 논리는 한국은
독자적으로 문명 개화를 할 능력이 없으며, 서구 열강의 침략이 거센 상황에서 한국과 중국이 계속 후진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아시아는 물론 궁극적으로 일본의 생존마저 위태롭게 될 것이니, 한국을 보호국화 하여 발전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정당화했던 ‘백인의 부담’ 이란 논리와 똑같은 논리였다.
이러한 일본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발전 방향이 제시되었다. 하나의 움직임은 일본을 포함한 모든 외세에 대응하여 독립 국가(그것이 국민 국가였는지는 불분명하다)를 건설해야 하며, 따라서 바람직한 근대화 전략으로 ‘홀로서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일본의 침략을 불가피한 것이고, 오히려 그것을 활용하여 사회·경제적 발전을 이루고 실력을 쌓은 다음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따라잡기’가 보다 현실적 대안이라는 것이었다. 두 개의 상이한 노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년~1936년) 선생과 좌옹 윤치호(佐翁 尹致昊, 1865년~1945년) 선생을 들 수 있다. 신채호는 민족주의 사학의 대표이자 무력투쟁을 옹호한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반면 윤치호는 민족개량주의 노선의 주창자이자 타협 노선의 지식인이었다.
(출처 : 문화와 나) http://www.sfoc.org/cni1/cultureni/2003/02/cal_0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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