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현
by 송화은율저작권 보호를 위해서 일부의 글만 교육용으로 올립니다.
그리고 일부 자료는 주로 전집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작가론 또는
작품론으로 출처가 부정확합니다.
金 炳 傑
남정현 작품집에 수록된 작가의 연보에 의하면 남정현은 1933년 충남 서산읍(瑞山邑)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3학년 때 자칭 신령(神靈)이라는 어떤 노인의 꾐에 빠져 가출, 그와 함께 유랑 걸식하다가 한만 국경(韓滿國境) 근처에서 순경에게 붙들려 고아원에 수용된 일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니면 작가 자신이 꾸며 만든 유머러스한 이야기인지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남정현은 어릴 적부터 남다른 감수성과 비상한 공상력을 지녔던 것만은 틀림없는 일인 것 같다. 8·15해방이 되자, 그는 선열(先烈)들의 고귀한 피를 회생시킬 요량으로 ‘민족 대부활 전문학교(民族大復活專門學校)’를 설립할 구상에 들떴었다고 하는데, 이런 엉뚱스런 생각은 본질적이며 보편적인 이상과 이념에 집착하고 그것의 실현을 한없이 꿈꾸며 추구하는 남정현의 비범한 공상력의 편린을 드러내 보인다.
현실과 자신이 설정한 세계관, 즉 이념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그 좁힐 수 없는 거리의 지평선을 향해 남정현은 처음부터 부정하며 도전하는 작가로 등장했다. 1965년 《현대문학》3월호에 발표한 단편〈분지(糞池)〉가 본인도 모르게 북한의 잡지에 게재되자, 남정현은 반공법에 저촉되어 입건 구속되었다가 67년 서울 고등 법원에서 선고 유예 판결을 받았고, 또 74년 4월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가 8월 23일 긴급조치 해제로 석방되는 등, 파란 만장의 작가 생활을 겪어 왔다.
이렇듯 사연과 곡절이 많은 생활은 물론 작가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 보아지지만, 그러나 깊이 따져 볼 때 그것은 한국적인 상황이 강요한 데서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적인 상황, 그렇다 이 상황 때문에 남정현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 세상에 나왔다. 그의 말을 따르면 그는 어느 쪽다리 밑에서 앵앵 울고 있는 기아(棄兒)였는데, 지금의 부모가 데려다 길러 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물론 어디까지나 소설적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국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쪽다리 밑에서의 출생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나의 출생설(出生說)〉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람을 한국 사람이 되지 않게 방해하는 물결, 이러한 시점에서 가장 고귀한 인간 정신의 영토를 관리하고 있는 작가의 책임은 스스로가 자명해진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오늘도 썩은 냄새를 풍기며 오물이 흐르는 어느 허술한 다리 밑에서 앵앵 울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문학은 애초부터 내가 듣기에도 민망스러울이만큼 앵앵 우는 소리만을 지르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누나가 확인한 내 생명의 근원지인 그 다리 밑, 나도 이제 그 다리 밑의 침울하고 욕된 자리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와 아무렇게라도 한번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싶은 생각뿐인 것이다.
―〈나의 출생설〉
그리하여 남정현은‘한번 소리 높이 만세를 부르고 싶은 생각’에서 오늘도 문학을 계속한다. 그의 작품이 정치적·사회적인 근본 모순을 끊임없이 파헤치는 까닭은 바로‘만세 소리’를 위한 시대적 사명 때문이다. 남정현은 시대의 중압에 의하여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가장 가혹한 학대를 받아 온 우리 세대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당대 정치의 무서운 힘에 의하여 끊임없이 태질을 당하며 감시를 받고 있는 작가의 불행은, 자유 정신에 입각하지 않는 문학이란 일종의 정신적 유희이며, 허위 의식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명제에서 판단할 때, 한 개인의 그것을 넘어서 우리 모두의 불행을 대변하는 성질을 가진다.
남정현의 소설이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에 값어치하는가, 혹은 그것이 문학만이 가지는 어떤 일정한 업적을 이룩했는가, 그는 도식주의의 올가미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는 작가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그간 한국 문단에서 거래된 시비나 비난을 일단 유보하고, 어쨌든 그가 문학 작업 때문에 받은 고통과 부자유의 우리 문학의 보행이 식민지 시대에 있어서처럼 지금도 문학 외적인 힘의 파급 작용으로 평형을 잡지 못한 매우 불안스런 상태에 놓여 있다는 증거가 된다. 남정현이 만일 남들처럼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사회와 현실에 맞서 끓어오르는 뜨거운 그의 의식의 유출을 적정선(適正線)에서 억제했던들, 시대에 거역하는 이단 분자로 낙인이 찍히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가정이야말로 문학을 타락케 하는 적당주의의 발상이며 위기를 모면하려는 간교로운 인간들이 자기 합리화를 꾀하기 위해 내세우는 구실이다. 남정현 문학의 시련은 그런 시련이 있음으로 해서 역으로 우리 문학의 건전성과 양심의 명맥을 지켜 주는 하나의 표본이 된다.
창작 행위는 작가의 순교적인 정신과 정열을 요청한다. 어느 시대에 있어서든 값진 문학은 순탄치 못한 상황의 곡절 속에서 태어났고 형극을 이겨낸 각고의 의지력을 꽃피웠던 것이다. 문학은 어려운 여건 속에 놓일수록 골격이 굵어지는 패러독스를 가진다. 이와는 달리 만일에 문학이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거나 혹은 상황의 압박 때문에 작가들이 정신적 위축에 빠져, 자아 의식이라고 하는 내면적 울타리 속에서 의식의 흐름과 같은 하찮은 글장난을 일삼거나 한다면 후세에 문학사가들은 우리들의 못난 꼴을 힐난할 것이 틀림없고 우리가 남긴 문학적 유산을, 기백을 잃은 약체 문화라고 기록할 것이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의병 운동과 같은 민족의 진통스런 현장을 전혀 반영하지 않았던 개화기 시대의 신소설류(新小說類)라든가 일제 식민지하의 민족 허무주의적인 문학 등을 매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비문학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남정현의 소설은 문화 현상의 여성화 내지 퇴영화를 촉진하는 정치의 힘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꿋꿋이 맞서는 견고성을 가지고 있다.
남정현의 대표작은〈허 허 (許虛)선생I·II〉와 〈옛날 이야기〉가 될 것이다. ‘허 허’라는 이름에서부터 우리는 이 연속 작품이 풍자 문학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허 허(虛虛)’의 뜻도 있고 너무 어처구니없는 것을 보았을 때 사람들이 ‘허허’하고 웃게 되는 그 웃음의 뜻도 가진다. 환상적인 수법으로 서술된 이 연속 소설은 그러나 밑뿌리를 비현실적인 환상의 세계에 박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치적 사회 현황을 완곡한 풍자와 알레고리로 형상화하고 있다. 현실적인 것을 비현실적인 차원으로 돌려 놓지 않을 수 없는 작가 의식에 예각에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이 무엇인가를 뼈에 사무치도록 느끼게 된다. 〈허 허 선생〉의 연속편은 이 시대의 구조적 허망을 들춰낸다. 작가는 우리의 주체가 아닌 것을 주체로 환산하는 사고의 전도법과 물신적(物神的) 현실주의의 기고 만장을 완곡하면서도 짜릿하게 찌른다. ‘허 허 선생’의 행각과 그의 집은 표피적이며 전시적인 분식의 응축이다. 〈허 허 선샌 I·II〉에서 한편 작가는 외세의 오랜 풍파 작용에 시달려 민족적 정신의 결실을 맺지 못한 우리의 통속적 의식 구조와 그 구조를 발판으로 해서 치솟는 권력의 상승 기류를 자기의 현실로 받아들여 슬퍼하고 아파한다. 요컨대 〈허 허 선샌I·II〉는 허영·물욕·권세만을 앞세우며 우쭐대는 인간, 그러면서도 결국 원리적인 면에서 속물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풍자한 것이다.
남정현은 초기의 작품, 가령 생경한 언어와 잘 소화되지 못한 문체와 이상(李箱)류의 자학적인 소설 양식 등으로 해서 결코 성공작이라 말할 수 없는 〈경고 구역(警告區域)〉〈인간 플래카드〉등에서조차 인산이 자기가 놓여 있는 상황을 명석히 의식하고, 그 상황이 현재 품고 있거나 혹은 품을 위험성이 다분히 있는 비인간적 또는 인간을 굴욕시키는 사회적 사상(事象)을 예의 주시하면서 그것을 서슴없이 개시(開示)한다. 이러한 작가 정신과 개시 작업은 60년대 중반기에서 70년대 초엽에 걸쳐 발표된〈부주전상서(父主前上書)〉〈방기 (放氣)소리〉〈코리어 기행(紀行)〉〈허 허 선생〉시리즈 등에서 한층 고조되며, 마치 어떤 절대적인 거대한 힘과 홀로 대결하는 자의 용기를 방불케 한다. 아마 한국 소설가 중에서 남정현만큼 끈질기게 상황악(狀況惡)의 근원에 도전한 작가가 없을 것이다. 현실적 문제에 힘을 기울이는 작가들의 대부분도 주변 상황에 유착할 뿐 남정현처럼 근본 문제를 파고드는 일이 없다.
〈허 허 선생 I〉은 이 사회의 구조적 허망과 모순의 근간에 밀착하여 그것을 파헤쳐 보인다. ‘허 허 선생’의 집은 자전과 공전을 동시에 진행하는 지구의 동작처럼 스스로 몸이 돌면서 움직이는 전혀 우리의 상식을 초월한 그로테스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집이 아니라 어떤 이름 모를 괴물의 사령실과 같은 기이한 형자(形姿)을 이룬다. 그 집은 대지(垈地)만 국산일 뿐 온통 수려한 외국품으로 구축되어 있고, 내부의 오색 찬란한 장식품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것은 선생이 군수로 재직했던 일제 시대에 무슨 부상(副賞)으로 일황(日皇)에게서 직접 받은 회중용 금시계인데, 그것은 왕년의 영화를 말해 주듯 아직도 녹슬지 않고 정정히 그 윤기를 빛낸다. 찾아오는 손님마다 집의 형태와 내부 구조의 기이함과 호화 찬란함에 경탄하여 마지않지만. 그러나‘허 허 선생’의 아들‘석’은 지층( 地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노상 땅 위에서 회전하는 자기 집의 자세에 전율을 느낀다. 금시라도 그것이 그를 압살할 것만 같다. 그뿐만 아니라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개들을 기르는 아버지 몸에서 친근한 부친의 냄새가 아니라 개 냄새가 나는 데는‘석’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버지‘허 허 선생’의 생애가 시대의 구령(口令)에 그렇게도 착착 잘 들어맞는 데 신비감을 느끼는‘석’은 그러나 시대의 양심, 민족의 양심, 인간의 양심과는 동떨어진 그 아버지의 존재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 그를 말살하려는 생각이 간절하다. 그러나 결국‘석’은 아버지의 폭력에 눌려 그만 울음을 터뜨리며 용서를 빌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남정현은 우리의 그릇된 현실의 중핵(中核)을 허구화하여 비판하며 매질하고 풍자하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저항 작가이다.
〈허 허 선생 II〉도 호방 뇌락한 풍자성을 분출한다. 재계와 정계에서 당당한 실력자로 군림하는‘허 허 선생’을 그의 장남‘허 만(許滿)’이 가차없이 비판한다. 아버지는 어느 모로 보나 그의 넋이나 피, 알맹이가 한국 사람인 것 같지 않다. 그는 일제(日製)가 아니면 미제(美製)인물이다. 어쩌면 일본과 서양을 요리조리 뜯어맞춘 전혀 소속 불명의 허허(虛虛)한 인종일는지도 모른다. 일제 때는 충실한 황국 신민이었고 지금은 양식(洋式)에 홀딱 물들어 말끝마다‘한국놈’을 연발하는 부친의 그 어이없는 의식 구조와 빈번히 충돌하다 보면‘허만’은 아버지가 사람이 아니라 허상 같고 허깨비 같고 괴뢰 같아 무섭기만 하다. 그런데 무서운 대상은 아버지뿐 아니라 그에게 온갖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제공하여 빙빙 그를 감싸고 돌아가는 이 기이한 현실이다. 부친은 기자 회견 때 질문 내용이 한국인의 장단점에 이르자‘한국인라는 말할 것도 없이 이미 오래 전에 일본 사람들이 잘 지적해 준 대로 그 성직이 팽이와 같은지라 그저 죽지 않을 정도로 실컷 두들겨 패야만 겨우 제 구실을 하려고 슬슬 몸을 움직여 보는 족속들인즉, 자기는 앞으로 늘 그런 점에 유의하여 정사(政事)에 임하겠노라’고 강조하는 위인이다. 부친과 부친을 감싸고 도는 현실의 허구성과 부조리에 항상 팽팽히 맞서 온‘허 만’은 자식된 입장에서 부친에 대한 자랑거리가 있으면 한마디 털어 놓아 달라는 기자의 부탁에‘발길질입니다’라고 자신있게 표명한다. 얼마나 멋들어지고 매서운 풍자인가. 사실‘허 허 선생’의 발길질은 일본 군국주의의 도장(道場)에서 탁마된 신기(神技)에 가까운 동작이다. 아버지의 인간됨을 연구해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나타나지 못하도록 노력하겠다고 실토한‘허 만’은 그 순간 부친의 그 신기로운 발길질에 채어 그만 층계를 떼굴떼굴 굴러떨어진다.
〈방기 소리〉역시 격조 높은 풍자 소설이다. 여기서 격조 높다는 말은 문제의 세련도를 두고 하는 이야기만은 아니고, 우리 소설에서 그런 유례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풍자의 과녁에 대한 접근법이 절묘하기 때문에서 하는 말이다. 이 작품은 일관된 스토리가 없다. 여러 갈래의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삽입되어 하나의 작품을 형성한다. 그 이야기들은 서로가 직접 아무런 연관이 없으면서도 그 이야기들이 마침내 닿고자 하는 최종 목표는 동일성을 가진다. 그 이야기들은 바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답답한 분위기, 우리들의 삶의 정직함과 그 현상을 여지없이 짓밟는 세도의 괴도(怪刀), 자기의 모순과 부조리를 정당화하는 우리 시대에 절대적 권위, 이 모든 것의 진원(震源)을 통박하고자 하는 데 귀일한다. 통작하고자 하지만 그 통박이 직선적이며 감정적인 발성이 아니라 매우 우스꽝스럽고 우회적이고 은유의 형태를 끼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이 작품에서 쾌적한 예술의 카타르시스를 얻게 된다. 〈방기 소리〉에서 서술되는 여러 가지의 이야기, 가령 소담한 말 속에서만 묻혀 사는 좀스런 인간들조차 할말이 없어 뒤로 뻗대기만 하는 예사롭지 못한 조짐이라든가, 화성에서 구름을 잡아 타고 내려온 화적패들이 도둑질을 않겠다고 선언문을 발표하는 불길한 징후라든가, 옛날 어떤 양반의 천덕스럽고 무엄하고 개차반이며 욕량(慾量)이 무한정한 남근(男根)이 한 나라의 용왕(龍王)으로 둔갑한 기담이며, 혹은 야담가들이 정작 중요한 대목에 와서 말을 잇지 못하고 오줌을 싼다거나 곯아떨어진다거나 지랄병이 발작한다거나 하는 등의 의학적인 이변, 이 모든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기실 우리들의 현실과 깊게 관계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방기 소리〉와는 달리〈코리어 기행〉은 거칠다 할 정도로 직선적인 풍자로 엮어진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민주 시민으로서의 가장 초보적인 자유인 언론·집회·결사의, 그리고 기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자유를 달라고 아비규환을 외치던 코리어,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와 배금사상만이 창궐하고 세계에서 여인의 몸값이 제일 싸기로 소문났던 코리어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 최대의 산유국(産油國)으로 돌변하는 기적을 얻는다. 궁핍과 치욕으로 점철된 역사의 구정물은 말끔히 사라지고 사람들은 사랑과 믿음, 간섭하는 권력이 없는 절대 자유를 누리며, 대통령에서부터 말단 사무직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직이 지원제로 된 유토피아를 즐긴다. 이 역설적인 이야기는 소설적 사건으로 치더라도 너무 황당무계하게 꾸며져 있지만 우리 현실의 가치 전도에 대한 반어(反語)로서 그 나름의 의미를 획득한다.
남정현의 소설에 등장하는 중요 인물들은 거개가 병신스런 존재인데, 가령〈너는 뭐냐〉의 '관수', <경고 구역(警告嘔逆)〉의‘종수’,〈부주전상서〉의‘용달’〈천지현황(天地玄黃)〉의‘덕수’,〈사회봉(司會棒)〉의 ‘원규’,〈옛날 이야기〉의‘나’등이 그 예에 속한다. 이렇게 병신스런 인물들이 등장하는 까닭은 우리의 사회 생태학적 측면이 그 첫째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될 수 있는 대로 양심이 없는 것이 양심인지도 모르겠습니다’하고〈부주전상서〉의‘용달’이 말했듯이, 그런 사회적 풍토의 질환에 감염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얼간이로 통용되고 시민 상실적(市民喪失的)인 존재로 전락하여 궁핍을 감내해야 한다. 둘째 이유는 풍자의 대상물을 매도하는데 있어서 무엇보다 우자(愚者)의 넋두리가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되기 때문에 작가가 얼간이의 구실을 하는 인물을 일부러 골라 그의 소설에 등장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우리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를〈옛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허 허 선생〉은 무슨 당의 중진인데 그는 걸핏하면 일황에게 충성을 바쳤던 시절의 이야기를 자랑하며 거드름피우는 위인이다. 그런데 그가 꽃다발에 둘러싸인 높은 단상에 올라서서 근엄한 자세로 만장의 박수를 받으며 독립 유공자를 표창하는 장면이 지금 TV의 화면에 가득히 담긴다. 그 화면을 구경하고 있던 그의 아들‘나’는 그 순간 쫓던 자와 쫓기던 자의 관계가 저래도 괜찮을까 하고 몸에 소름이 끼친다. 그러자 책상도 웃고 걸상도 웃고 하늘도 웃고 땅도 웃는 소리가 그의 귀청을 때린다. 그의 부친이 삼라만상의 웃음소리에 깔려 숨도 못 쉬고 사지를 허위적거린다고 생각한다. 그는 부친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헐레벌떡 부친의 사무실로 차를 몬다. 건재하고 있는 부친의 앞에서 그가‘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하고 얼빠진 소리를 하자, 부친은 병신 자식을 둔 것을 한탄하며 그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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