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김지하 시인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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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본성명, 김영일· 金英一, 1941- 필명 김형·金灐)

 

· 1941년 전남 목포 생, 1959년 서울대 미학과 입학, 1966년 졸업

· 1964년 대일 굴욕 외교 반대투쟁에 가담. 첫 투옥

· 이후 1980년 출옥 때까지 투옥, 재투옥을 거듭하여 장장 8여년 동안 영어(囹圄)의 세월을 보 냄. ( <오적> 필화사건 등 )

· 1963년 첫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한 이후, <황톳길> 계열의 초기 민중 서정시와 권력층의 부정부패를 판소리 가락에 실어 통렬하게 비판한 특유의 장시(長詩) <오적(五賊)> 계열의 시들, <빈 산>, <밤나라> 등의 빼어난 70년대의 서정시들, 그리고 80년대의 ‘생명’에의 외경(畏敬)과 그 실천적 일치를 꿈꾸는 아름답고 도저한 ‘생명’의 시편들을 만들어 냈다.

· 1975년에는 ‘로터스(LOTUS) 특별상’을 수상.

· 첫시집 [황토(黃土)](1970), [타는 목마름으로](1982), [애린]1․2(1986), [이 가문 날에 비구 름](1988), [별밭을 우러르며](1989), 대설(大說) [남(南](1982, 1984, 1985) 등의 시집과 ‘생명사 상’을 설파한 산문선집 [생명](1992) 등이 있다.

---  시 <오적(五賊)>, <타는 목마름으로>

▲ 1960년대 80년대 시사(詩史)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

 

󰏐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절규 [양심선언]

 

“내가 요구하고 내가 쟁취하려고 싸우는 것은 철저한 민주주의, 철저한 말의 자유 -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 ·············· 민주주의는 백성을 사랑하는 위정자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피와 시민의 칼을 두려워하는 권력을 바란다. ” [양심선언] 중에서

 

이 글은 정부가 그를 공산주의자로 매도했을 때 이에 맞서 그가 직접 쓴 글이다. 이처럼 그는 독재 권력을 철저히 부정하고 그에 맞서 싸우며 민중의 혼을 담고 있는 시를 창작했다.

 

󰏐 김지하 평론 <자살(自殺)이냐 풍자(諷刺)냐>(1970)

 

····· 김수영 시의 한계 극복을 자기 시의 과제로 설정한 그에 의하면 김수영의 시는,

 

인정하는 바

인정하지 않는 바

자기 자신 희생하여 넋의 생활력이 회복되길 희망한 하나의 강력한 부정의 정신.

→ 즉, 참된 시민성의 개화(開花)를 열망한 뜨거운 진보(進步)에의 열망(熱望)

→ 풍자(諷刺) 선택은 옳고 인정함

그러나, 시적 폭력(暴力) 표현 방법으로 그 방향을 ‘민중(民衆)’에게만 집중하고 ‘특수집단’의 악덕(惡德)에는 무관심

 

- 김지하 시의 의의 : 김수영의 시대적 한계를 극복한 70년대의 시인 ( 김수영은 시인으로서의 비애(悲哀)는 있었으나, 비애의 최고 형태인 한(恨)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함. )

 

▲ 김수영 시와 김지하 시 비교(김수영 시에 대한 극복의 예)

 

󰆲 김수영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대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 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

한번 정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 14 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 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一월 때문에 //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 자유라는 이상을 버릴 수 없으면서, 싸우지도 못하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소시민이 되어 버 리고 만 자신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정말로 분노해야 할 것에는 침묵해 버리는 자신을 비 웃으면서 5연에서는 자조적으로 돌아선다. 7연은 분노가 쓰디쓴 자기 연민으로 표현되어 있다.

 

󰆳 김지하 < 모래내 > 전문(全文)

 

목숨

이리 긴 것을

가도 가도 끝없는 것을 내 몰라

흘러 흘러서

예까지 왔나 에헤라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

 

한없이 머릿속으로 얼굴들이 흐르네

막막한 귓속으로 애 울음소리 가득차 흘러 내 애기

핏속으로 넋속으로 눈물 속으로 퍼지다가

문득 가위 소리에 놀라

몸을 떠는 모래내

철길에 누워 //

한번은 끊어버리랴

이리 긴 목숨 끊어 에헤라 기어이 끊어

어허 내 못한다 모래내

차디찬 하늘 //

 

흘러와 다시는 내 못 가누나 어허

내 못 돌아가 에헤라

별빛 시린 교외선

철길에 누워

철길에 누워. //

 

* 화자의 독백을 통해 70년대 민중의 한을 창조

 

󰏐 [새로읽는 그작품] 김지하 첫시집 `황토'....안찬수

 

## 비극적 서정성 가득한 `저항의 노래'...3공 민주화운동 그려 ##.

 

김지하씨의 시집 [황토]가 금서로 묶였던 80년대초 문학도였던 시인 안찬수(33)씨가 그 시절, 그 시집을 되돌아봤다. <편집자>.

 

열일곱 살의 문학도였던 나에게 시인 김지하라는 이름은 처음 낯선 금기로 다가왔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1980년 늦가을 나는 학교 문예반의 일원으로 교지를 편집하고 있었는데, 3학년 선배가 교지에 투고한 [60년대 시의 현실 극복](양정 43호)이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다. 그 글에는 시인 김지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몇 분 선생님들과의 논의 끝에 그 부분은 끝내 삭제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한 사람의 시인과 한 편의 시가 사람들에게 던져주는 두려움과 함께 어떤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함도 느꼈다. 두려움과 함께 신성함을 주는 것, 그것은 금기였다. [지하]라는 이름, 언더그라운드! 내 마음속에는 그 이름이 각인되었다. 그것은 제도 밖의 어떤 것이었으며 시에 대한 반시였다.

 

모든 금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나는 5백원짜리가 되고 만 삼중당 문고본부터 차차 두 분 누님이 사 모은 책과 외사촌형이 우리집에 피신차 왔다가 남기고 간 책들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 가운데 비매품이라는 화인이 찍혀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누군가가 그어놓은 선 밖의 세계를 보는 긴장감을 주었다. 그렇게 10월 유신의 주입식 교육으로 굳어져 있던 내 의식에도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리라.

 

시인 김지하라는 이름과 마침내 [접신]하게 된 것은 1982년 대학교 초년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황토]라는 시집으로는 아니었다. 몇편의 서정시와 담시 [오적] [비어] 그리고 [양심선언] [옥중메모] 등을 함께 엮어놓은 해적 복사판의 책을 통해서였다. 저자도 김지하가 아니라그의 본명인 김영일로 명기되어 있었던 책이었다. 그리고 그해 여름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간행됐지만 이 책도 곧 금서가 되고 말았다.

 

김지하라는 이름은 여전히 금기였으며 비매품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대와 불화하고야 마는 시정신의 뜨거운 상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을 저항정신으로 살아내며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그와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는 제5공화국 치하에 살고 있던 우리들 대학생의 가슴엔 꺼지지 않는 불씨였다.

 

비극적 서정성으로 가득찬 시집 [황토]를 오늘 다시금 읽는다. [녹두꽃]이나 [서울길] [수유리 일기]같은 시를 울부짖음에 가까운 목소리로노래 부르던 장면들이 떠오른다.

 

[빈손 가득히 움켜쥔/햇살에 살아/벽에도 쇠창살에도/노을로 붉게 살아/타네/불타네/깊은 밤 넋 속의 깊고/깊은 상처에 살아](녹두꽃에서).

 

이 죽음과 절망과 고통의 언어는 한 시대의 거울이다. 그 거울을 자꾸들여다 보게 되는 것은 닫힌 시대에 대한 시적 응전을 생각하기 위해서다. 악몽과 강신과 행동의 시, 그리고 사랑의 언어를 생각하기 위해서다. 또한 밥과 똥과 틈과 생명의 세계로 나아갔던 한 시정신의 원형을생각하기 위해서다. <시인>

 

󰏐 [대담]日작가 오에 - 시인 김지하 씨…"일본 거듭나야"

 

방한중인 일본 노벨문학상수상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는 한국 크리스챤 아카데미가 주최하고 [동아일보]사가 후원한 「해방50년과 패전50년」 심포지엄(2,3일․서울 아카데미하우스)에 주제발표자로 참석한 뒤 3일 밤 같은 장소에서 시인 김지하씨와 대담을 가졌다. 두 사람은 불행했던 한일 양국의 역사에서 시작, 인간과 문학의 근원적인 문제와 동서양사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밤늦도록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눴다.

 

김지하〓오에선생, 오랜만입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90년 8월 NHK특집프로 「세계는 히로시마를 기억하는가」에서였습니다. 그러니까 5년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오에 겐자부로〓그렇습니다.

 

김〓먼저 노벨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오에〓고맙습니다.

 

김〓노벨상을 수상하시면서 「나의 수상이 아시아문학의 발언권을 높여주고 아시아 문학발전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하신 말씀이 퍽 감명깊었습니다. 그렇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5년전의 만남에서 나는 그 프로의 주제부터 신랄히 공격했던 기억이 납니다. 왜 일본인들은 남경대학살 강제징용 정신대 투옥 고문등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은 언급하지 않고 히로시마 원폭투하로 자 신들이 입은 피해만 얘기하는가 하고 비판했던 기억이 납니다. 일본내부에서 과거의 죄를 청산 하는 운동을 먼저 전개하지 않고 왜 히로시마 얘기를 하느냐고 했었지요. 특히 오에선생에게는 「대작가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하고 공격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과 작가가 만나 좀더 멋있고 신비한 얘기를 나눠야하는데 한일양국의 과거이야기부터 너무 거칠게 나눴지요.

 

오에〓당시 대단히 격렬한 얘기들을 많이 나눴습니다. 나는 단순해서 그때「아, 이건 옳은 얘기구 나」라고 생각해 머리를 숙였습니다. 당시 김선생의 비판내용은 그대로 일본에서 방영됐습니 다. 당신의 지적은 옳았습니다. 일본인이 한국인에게 히로시마를 기억하느냐고 물을 권리는 없 습니다. 그때 당신의 지적은 나에게 아주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내가 노벨상을 받을 때 어느 분의 덕택이냐는 질문을 받고서 오카 료헤이와 아베고보등 전후 일본작가들의 도움도 컸지만 5년전 나를 꾸짖었던 김선생의 도움이 큰힘이 됐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일본의 작가로서가 아 니라 아시아의 작가로서 노벨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김〓내가 당시 말하려던 것은 히로시마 비극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핵을 써 서 종전하려한 미국의 국방정책도 달갑지 않지만 일본 민초(民草)들의 머리위에 원폭이 떨어질 때까지 일본 민중들이 잘못한 면도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었습니다. 히로시 마에 앞서 일본 내부의 죄와 죄의식 도덕문제를 제기하는 운동을 강하게 일으켜야 한다는 이 야기였습니다. 해방50년 패전50년을 맞아 몇가지 문제들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후 일본 에서는 민주주의가 많이 창달돼왔지만 아직까지 보수우익세력은 軍國主義 皇道主義를 청산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양심적인 인사들의 과거청산주장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한국은 전쟁후 박정희식의 개발독재로 여러가지 형태의 저항운동을 전개해오다 이즈음에야 민주화가 되고 언 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습니다. 전통보존에는 실패했고 민심은 사납습니다. 이제부터 좌표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일본 무라야마총리는 최근 일본이 한반도분단에 책임이 있다고 했다가 보수파의원의 공격을 받자 다시 이를 번복했습니다. 이같은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에〓일본의 근원적인 죄악은 근대화과정에서 찾아야 합니다. 명치유신 이후 일본은 근대화를 위 해 지난 1백30년동안 경제력 군사력 이데올로기에 매달려 왔습니다. 일본은 한국 중국 필리핀 등 아시아를 희생시키고 근대화를 해왔습니다. 일본은 패전에서 새로 태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패전후 新生을 위해 한국인에게 사죄하고 과거죄과를 청산해야 하는데 그 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전후 50년동안 사회당에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무 라야마 사회당당수도 의원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총리가 되고부터 많이 바뀌어 실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라야마총리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지는 않고 있습니다. 21세기의 밝은 미 래를 위해 일본은 新生이 필요합니다. 당신이 주창한 아시아의 생명공동체가 21세기에는 실현 되기를 바랍니다.

 

김〓오에선생이 日王의 賞을 거부한 것을 보고 일본국민의 양심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의 근 대화는 「천황제」와 같은 수직적 사회구조에서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는 데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같은 근대화는 태평천국운동이나 동학운동을 통해 반제반봉건과 민중중심주의 로 나가려 했던 당시의 중국 한국 등과 큰 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오에선생은 노벨상 수상연설에서 「애매한 일본인」이라는 용어를 쓰셨습니다. 이것은 일본 사 회구조와 일본인 내부의 양극분열을 뜻한다고 봅니다. 이것을 나는 선생의 작품「사육」「기묘 한 일」「개인적 체험」등에서 봅니다. 이 작품들을 위시해서 선생의 문학은 「實存的 主體」 와 「他人과의 共生」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에〓그렇습니다. 「주체성」과 「공생」은 내 문학을 일관한 테마입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대 일본제국의 천황이라는 일종의 신적 존재 아래서 참된 주체를 확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의 미에서 문학이란 공생과 주체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 개인적으로는 불구자 아 들이 태어난 이후 30년간 그와 어떤 형태의 공생을 할까 생각하며 문학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제 작곡가로서 자아 실현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와 나를 통해 「공생과 주체성」문제를 붙 들고 늘어진 것은 어쩌면 좁은 생각이었습니다. 이젠 큰 생각을 해보고 싶군요. 그래서 김선생 과 만나려했던 것입니다.

김〓오에선생과 나는 지금 개인과 개인으로서 만나고 있다기 보다는 2차대전 종전 50주년을 맞아 동북아의 새로운 미래를 논해 보려는 양국의 작가와 시인으로서 만나고 있습니다. 지금 동북아 는 역내 교역 급증등 큰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반면 환경파괴,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등의 문제도 겪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 근대 휴머니즘이 상정한「理性的 人間觀」과 관련되어 있습 니다. 「이성적 인간관」은 신으로부터는 독립했으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 등에 의해 존재분열 을 겪어왔지요. 이에 대한 출구의 하나로 인간 속에 신령한 우주가 들어있다는 東學 佛敎 陽明 學등 동양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지난 시대의 박정희 독재정권은 우리에게 진정한 인간의 삶과 가 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들어왔습니다. 이제 文民정부가 들어서 이러한 고민이 깊이와 넓이를 가질 시기를 맞았습니다. 현재 내 문학은 「내가 어떻게 물 풀 우주와 교감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민의 해결책은 근대적 인간관을 극복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 니다.

 

오에선생의 문학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선생은 라블레적 인간관에 집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중세의 왜소한 인간관을 극복하고 인간을 거대한 세계적 육체를 가진 존재로 파악하는 인 간관 말이지요.

 

오에〓라블레는 인간의 육체 회복에 대해 생각했지요. 인간의 육체 속에 근본이 있고 우주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이성보다 육체가 갖는 지혜를 더 중시했습니다. 라블레의 그로테스크 리 얼리즘은 민중의 웃음의 원리라고 합니다. 나는 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서구화의 영 향은 역시 근대 휴머니즘입니다. 데카르트, 융, 뉴턴, 아인슈타인에 이르는 과학적 계몽주의 영 향을 받고 그런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合理主義는 유럽 안에서도 비판받고 있습니 다. 김선생이 동북아에만 둘레를 치려 하는데는 의문이 갑니다.

 

김〓서구 문화의 속에 있는 스피노자같은 예언자적인 흐름은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주류는 몽테 스키외 이후의 계몽사상가들 입니다. 특히 이들은 시간관과 결합해서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며 미래에 목적의 왕국인 유토피아가 있어서 모든 문명이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은 것은 빈곤의 탈출등 많이 있지만 인간성의 상실과 자연파괴와 같은 부정 적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내가 구태여 동북아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내장돼 있는 영성적 인 靈肉一體의 우주관이 서양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華嚴經의 광대한 세계관을 서양에서는 발 견할 수 없습니다. 라블레의 육체 발견은 다분히 해부학적(분열적)이거나 생태학적(통합적)인 간인데 이것이 아니라 영적 그물망 체계로서의 인간육체 발견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동 학의 인간관에서 우리는 이것을 발견합니다.

 

문명의 대세가 아시아로 이동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문명이 내부의 보편성으로부터 발화하지 않고 순전히 경제적인 이유에 서 있다면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선생의 작품 「개인적 체험」에서 버드가 아들과의 공생 가능성을 찾음으로써 인류 보편적인 재생 가능성 을 찾는 것 같은데요. 공생이 다만 나와 타자 사이의 「拘束的 共生」에 그칠 때는 문제가 있 다고 봅니다. 자아의 변화와 함께 아들과의 공생이 자연스럽게 되고 생명의 실존적 가치도 발 견한 것 같습니다. 이점이 중요할텐데요.

 

오에〓당신은 하나의 우주를 완성시키고 있는 느낌입니다. 나와는 매우 다르군요. 나는 세계를 구 축한다는 것보다는 자신의 세계를 확산함으로써 자신을 無化시켜 왔습니다. 나라는 작은 마을 안에 우주가 없는가 고민하던 중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이 아시아에 다가오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계의 온마을에다 중심이 있을 뿐입니다. 동학 역시 마찬가집니 다. 유럽인들도 그럴것입니다. 김선생은 동학이라는 커다란 기댈 바위를 갖고 있습니다. 일본인 은 그렇지 못합니다. 일본인은 이러한 바위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저의 작업도 바위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김〓오에선생과 나는 몇가지 기본 관점에서 차이가 있는 것 같으나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일치하 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오에〓일본에 오셔서 다시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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