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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론 / 김승옥의 문학세계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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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옥론

 

1 한국소설사에 있어서 귀향의 의미

 

한국소설사에 있어서 귀향의 의미란 무엇인가. 이 물음이 갖는 중요성은 귀향모티프로 짜여진 몇 작품만 열거해보아도 그 의미가 드러날 터이다. 근대소설을 대표하는 <만세전>(염상섭, 1923) <과도기>(한설야, 1929) <홍수>(이기영, 1931) <고향>(이기영, 1933)등이 모두 귀향 모티브프로 구성되어 있거니와, 해방 이후도 역시 사정은 다르지 않다. <잔등>(허준, 1946) <해방의 아들>(염상섭, 1947) <무진기행>(김승옥, 1964) <삼포가는 길>(황석영, 1973) <노을>(김원일, 1977) <징소리>(문순태, 1977)등 현대소설사에 우뚝 솟은 작품들이 바로 이 귀향모티프를 근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예컨대 귀향모티프란 우리 소설을 지금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가장 주요한 인자로 작용한다 하겠다.

 

그럼 그 구체적 요인이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떠나왔던 고향을 다시 찾는 행위의 상징적인 의미 때문일 터인데, 그 상징적 의미는 한 개인에 있어 고향이 갖는 본래적 속성에 연유한다. 한 개인에 있어 고향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고향이란 마르크스가 서사시의 시대를 인류의 유년기라고 불렀듯 끊임없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곳일 것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닐 터이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그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런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왜냐하면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꽂은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루카치, 소설의 이론

 

이러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귀향이란 이토록 분명하게 모든 것이 조화되는 세계에 현재의 삶을 반추하는 것에 다름아닐 터인데, 여기에 이르면 한 개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개인과 전체, 존재와 당위가 현격하게 엇갈려 있는 현실에 대한 자기인식을 보이게 된다. 즉 문제적 개인으로 화하는 것이다. 루카치가 말한 대로 소설의 진행은 문제적 개인이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라 한다면, 귀향모티프란 부르조아 시대의 서사시를 그려내는 데 가장 적합한 형식적 요건이 되는 셈이다. 요컨데 귀향모티프 자체에 이미 개인과 대상의 총체성과의 변증법적 연관을 지향하는 소설의 내적 형식이 담보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근대적 의미의 소설 전통이 일천한 우리 문학사에서 귀향모티프를 갖추고 잇는 작품만이 유독 지속적으로 문제적인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이로써 귀향모티프가 우리 소설사에서 문제적일 수 있었던 이유의 일단은 드러난 셈이거니와, 여기에 한국의 역사진행과정을 덧붙이면 그 의미는 보다 분명해진다. 한국의 근현대사가 근대적인 민족경제를 자생적으로 형성하지 못한 채 식민지반봉건사회, 한국전쟁, 신식민지국가 독점자본주의라는 파행적인 구조로 점철되어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제모순(諸矛盾)이 각 개인에게 가장 직접적인 계기로 강제했던 것은 바로 고향상실이다. 토지조사사업을 시발로 전개되는 역사전개의 파행성은 각 개인을 고향에서 끊임없이 내몰았으며 그로 인해 우리 민족의 각 성원은 임노동자, 도시빈민층으로 전락하였으며 심지어는 만주, 일본 등지에서 조국땅만을 바라보며 유랑생활을 해야 했다. 또한 구조적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 한 현실변혁은 있을 수 없다는 역사인식에의 불철저는 과도한 교육열로 현상되었던 바, 결국 고향에서 밀려나 도시 소시민층으로 편입되거나 룸펜으로 전전긍긍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것이 우리의 역사적 상황이었다. 어느 계층도 고향살이란 역사적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이처럼 우리 역사에서 고향상실이란 우리 역사의 전체적인 모습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형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고향 상실의 객관적 형상화는 곧 당대의 전형적 상황의 재현과 동질적인 의미를 지녔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필연성과 개인적 운명이 동일적으로 결합된 고향상실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귀향이란 작가가 그 의미만 올바르게 조망한다면 가장 적절하게 당대의 총체성을 감싸안을 수 있는 내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귀향모티프의 소설이 우리 소설의 현실주의적 전통에 항상 맨 앞에 위치했던 것은 바로 귀향 자체가 갖는 현실성역사성을 반증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상에서 우리 소설사에서 귀향이 갖는 문제성과 그 의미는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거니와, 귀향모티프를 문제삼을 때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작가의 세계관, 보다 넓게는 당대의 시대사적정신사적 맥락에 따라 작품이 현격한 질적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고향상실과 그 고향으로의 돌아감이란 당대의 구체적 역사와 맞물려 있는 것이어서, 귀향의 내면풍경 속에는 자연스럽게 당대를 파악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필연적으로 개입되게 마련이다. 예를 들자면 <만세전>의 경우 1920년대 초반의 우리 현실에 대한 핍진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귀향 주체의 운명과 그 현실과의 관련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유보하는 작가의 가치 중립적인 태도로 현저히 현실성을 상실하고 자연주의적인 변모만을 보일 뿐이다. 이는 염상섭 개인의 가치 중립적인 태도와 연관된 것이며, 동시에 끝내 역사적 주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민족자본가 또는 소시민층의 공통된 운명의 반영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는 <과도기> <홍수> <고향> 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작품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사회주의운동에 몸담고자 했던 작가나 운동가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발견해낼 수 있다. 이들 작품들의 귀향 주체는 모두가 사회주의의 이론체계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던 바, 그러나 그들의 논리가 만주(<과도기>)나 일본(<홍수> <고향>)에서 만들어진 극히 일반적인 이론구조일 뿐 당대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과학적인 검증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시사해준다. 따라서 이들 작품이 구체적 현실성을 담아내지 못한 채 있을 수는 있는 일이나 전형적이지는 못한 논리만의 세계 또는 추상성을 기술하는데 그치고 마는 것은 이러한 제사실의 반영인 것이다.

 

2 <무진기행>의 귀향 풍경

 

우리는 본고가 밝히고자 하는 김승옥의 문학세계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꽤 먼 길을 돌아온 셈인데, 이는 다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귀향모티프에서 작가의 세계관을 가장 응축된 형태로 찾아낼 수 있다는 점. 둘째는 귀향 모티프가 우리 현실주의적 전통에 가장 굳건한 토대가 되어왔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염두에 둔 것이다.

 

김승옥의 문학세계와 소설사적 위치를 밝히는 데 있어 <무진기행>만큼 핵심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란 드물다. 귀향모티프 소설 전반이 보여주고 있는 강한 현실지향성에 비추어볼 때 <무진기행>의 현실주의적 전통에서의 일탈은 그의 또는 60년대 소설의 고유한 형상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며, 그러한 결과에 이르게 된 세계관적 면모가 이 작품에 고스란히 내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무진기행>이 그의 문학적 도정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는 이 작품이 그의 문학세계를 해명하는데 가장 중요한 고리임을 시사해준다. 김승옥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 갈래로 변별된다. 초기의 자기세계의 확립을 끊임없이 탐색하는 소설과 후기의 상황의 힘에 눌려 자아를 상실한 인간의 모습을 풍속의 차원에서 그려낸 소설이 그것이다. 이 두 갈래는 외양을 달리하지만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변증법적 관계 속에서 위치 짓지 못하고 대립적인 관계 속에서 파악하려는 일관되게 착오된 인식에 그 근원을 둔 쌍생아이다. <무진기행>은 그의 작품중 유일하게 두 세계를 모두 한 저울에 올려 놓고 저울질하고 있는 바, 그의 문학적 변모과정과 그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김승옥의 문학세계를 밝히는 데 <무진기행>이 바로 그 해명의 열쇠임은 드러난 셈이다. 이제 문제의 범위를 좁힐 단계에 이르렀다. 왜 유독 김승옥 또는 60년대의 귀향만이 현실주의적인 전통에서 벗어나 있으며, 그러한 결과를 가능케한 세계관적 시대사적 면모는 과연 어떠한 것인가.

이제 이 문제를 염두에 두고 <무진기행>을 살펴보도록 하자.

 

<무진기행>의 귀향 주체인 ()회생 제약 회사의 전무님이 되기를 앞두고 긴장을 풀어버릴 수 있는, 아니 풀어버릴 수밖에 없는고향인 무진으로 푹 쉬기 위해서 귀향을 감행한다. ‘빽이 좋고 돈이 많은 과부를 만나 바야흐로 해방후 무진 중학 출신 중에선’ ‘제일 출세한 인물이다. 말하자면 <무진기행>출세한 촌놈의 귀향 풍경인데, 이러한 귀향은 아주 미묘한 사회사적 의미를 머금게 된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근대화 또는 공업화가 지니는 이중성에 기인한다. 이 이중성이란 한편으로는 외관상의 고도성장을 의미하며, 또다른 한편으로는 농촌도시외국자본주의로의 부의 이동을 의미한다. ‘출세한 촌놈이 사회적 기반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공업화정책과 더불어 친일지주세력이 재벌기업으로 자본의 성격을 변화시키면서 비로소 그 계기가 마련되는 만큼 그들의 존재기반이란 가히 역설적이다. 이전엔 자기 삶의 기반이었고 지금은 부모형제의 삶의 기반인 의 경제적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자리에 자신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귀향엔 죄의식이 개입되기 마련인데, 이런 역설을 성공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우리는 이청준의 <눈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진기행>에서 출세한 촌놈의 귀향이란 이러한 사회적 의미도 죄의식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단지 관념 속에서 그리고 있는 어느 아늑한 장소일 뿐이어둡던 나의 청년이 있는 고향을 찾는 행위일 뿐이다. 이런 무진에서 발견하는 것이란 급속한 공업화의 추진으로 인한 무진의 황폐화도, ‘를 바라보는 지긋한 어머니의 눈길도 아니다. 다만 골방 안에서의 공상과 불면을 쫒아 보려고 행하던 수음(手淫)’이며, 차라리 발광을 꿈꾸던 어둡던 나의 청춘을 보아낼 뿐이다. 그러나 그 절망과 광기에는 실체가 없으며, 그렇기에 더욱더 치열했던 것이었다. ‘는 이런 과거의 의 모습을 보이는 하선생바다로 뻗은 긴 방죽을 걸으며, 개구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급기야 하선생과 관계를 맺는다. 이런 하선생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사랑을 고백하고자 한다. 그러나 서둘러 상경할 것을 요구하는 전보를 받고 서울로 돌아오고야 마는 것이 <무진기행>에서 보이는 귀향 풍경의 전모이다. 그런데 이 잠시 머물고 올라와야만 하는 귀향이 다음과 같은 결론으로 마감된다는 것은 주의를 요한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과거의 치기어린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생활인으로서 살아가겠다는 의지의 밝힘인데, 이 생활인으로서의 출발의지가 과거의 삶에 대한 지양극복이 아니라 그 삶 자체를 내던져버리는 곳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자기세계를 확립하기 위해 편도선이 붓도록 독한 담배를 곱씹으며 수음으로 불면증을 쫒아야 했던 과거의 삶이란 바로 김승옥의 초기 작품 세계(<생명연습> <환상수첩>)인 바, 김승옥은 이제 그 세계를 버리고 근대화된 세계의 일상 속으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무진기행>은 그 변신과정을 스스로 내보이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변신의 논리이다. 김승옥이 파악하는 사회인으로 또는 생활인으로 들어서는 길이란 다름 아닌 자기세계를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아야 하는 사회에 입사(initiation)'하기란 불가능하며, 따라서 각 개인은 그 입사를 위해 통과제의처럼 개인의 자발성, 주체성, 창의성, 실천 등을 양기해야 한다.

 

바로 이 변신의 논리에 김승옥의 전후반기 문학세계를 꿰뚫고 있는 인식론적세계론적 기초가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개인과 사회, 존재와 당위에 대한 비변증법적 인식이다. 한 개인은 자체에 독립성과 법칙성을 지니고 움직이는 사회상의 반영을 통해 그 인식론적 틀을 형성하며, 그 인식론적 틀에 기초해 사회적 실천을 행함으로써 또다른 모습의 사회를 만들어 낸다. 이 개인과 사회의 변증법적 관계를 통해 역사는 추동되며, 개인과 사회는 어느 시기, 장소에서든 서로에게 작용하는 구체적 요소이다. 그러나 김승옥에 있어서는 개인과 사회란 변증법적 연관관계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립적이다. 사회의 어떤 요인도 작용하고 있지 않는 곳에서 개인의 의식이 형성되며(초기의 작품), 사회에 들어서서는 개인이란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장식물로 폐기 처분되는(후기작품)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기초 위에선 김승옥의 작품세계가 사회의 작용을 받지 않는 세계에선 개인의 의식이 과도하게 나타나고, 사회의 작용이 절대적인 경우 개성의 상실로 발현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것이다.

 

, 밀실과 광장의 조화로운 통일이란 결국 각 개인들의 사회적 실천의 결집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밀실과 광장을 오가다 자살하고 마는 <광장>과 동일한 인식태도이다. 결국 뱃전의 갈매기를 보고 자살하는 이명준이나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라는 팻말을 보고 심한 부끄러움을느끼는 는 동질적인 모습이다. 다만 이명준은 분단이라는 질곡에, ‘는 근대화(공업화)라는 다른 문제로 신음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양자는 모두가 주어진 상황을 극복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 인식하는 것에는 같은 양상을 보이는데, 이는 전적으로 사회와 개인의 심오한 연관관계를, 그 속에서 개인의 실천(주체성)이 가지는 적극적인 역할을 인식하지 못한 데 기인한다. 이러한 주체성 부재의 미학은 김승옥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60년대 문학 전체의 문제이며, 여기에 <무진기행>의 문제성이 있다.

 

3 ‘자기세계의 확립과 그 의미----전기 작품의 경우

 

김승옥만큼 적은 양의 작품을 가지고 한 시대(60년대)를 대표하는 경우란 드물다. 김승옥은 데뷔소설인 <생명연습>에서 광주항쟁으로 15회만에 자진 중단한 <먼지의 방>에 이르기까지 겨우 27편 정도의 소설을 썼을 뿐이다. 그런 김승옥이 현대소설을 거론하는 자리에는 언제나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한편으론 경이로운 일이다.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터이다.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에 대한 발견이 있다거나, ‘감수성의 혁명이 이루어진다거나 또는 감각적인 문체의 확립 등은 이제까지 김승옥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고, 또 틀림없이 김승옥이 우리 소설사에 고유하게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것은 바로 1960년대적 삶을 가장 일목요연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1960년대 삶이란 무엇인가.

 

419혁명 516 군사 쿠테타가 일련의 사건으로 앞머리에 놓이고 급속하게 추진된 산업화(공업화)가 삶의 양태를 일시적으로 바꿔버린 시기가 바로 1960년대이다. 419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모처럼 회복한 민족정신과 현실극복의지는 바로 잇따라 일어난 516에 의해서 철퇴를 맞고 변모해가는 사회구조에 자기 모습도 갖추지 못한 채 끼여들기에 급급했던 때가 1960년대인 것이다. 이 소용돌이가 지나쳐가고서야 사람들은 부익부 빈익빈이라는 인식틀로 뒤틀린 사회구조를 보게 되었고,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전태일의 죽음을 보고서야 1970년대를 준비할 수 있었다. 김승옥은 이 혼란 속에서 예외적 개인으로 떨어져 나와 그 1960년대 삶을 형상화한 것이다.

 

그럼 김승옥이 비로소 마련한 60년대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60년대 문학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근거는 김승옥의 문학이 전후세대문학을 넘어섰다는 점에 있다. 습기에 배인 곰팡내 나는 방에서 인생낙오자들이 스스로 내던져진 자로 규정지으며 자학하는 것이 전후세대의 문학이라면, 과연 김승옥이 넘어선 세계는 어떤 양상일까. 이러한 문학사적 물음 속에 김승옥의 초기 작품들이 놓여 있으며, 이것은 또한 전후세대를 딛고 일어선 세대 전체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 개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첫 20년의 기간을 고스란히 동질(同質)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이며 ‘419로 그들이 받은 교육을 구현시킬수 있었던 세대의 동세대인인 김현이 다음과 같이 그의 문학을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55년대 작가(전후세대작가를 말함---인용자)들이 만든 주인공들의 가장 큰 특성 중의 하나는 그들이 대부분 자신의 상황을 무의식적으로 수락해 버린다는 것이다. 상황의 절대적인 압력을 그들은 선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런 인물들은 그 의식의 수동성을 극명히 하기 위해 병을 앓거나, 군대를 갔거나, 돈이 없거나……하는 류의 상황설정을 배당 받는다. 반면에 65년대 작가(앞서 이야기한 60년대 작가와 동일한 의미임---인용자)에 이르면서 소설의 주인공들은 섬세한 변모를 감수한다. 55년대 작가들의 무의식적이며 수동적인 주인공들의 의식이 점차 깨어나기 시작하고, 자기 환경과 상황의 의미를 캐어내려는 시도를 시작하게 된다. 이 말은 65년대 작가들의 주인공들이 승리한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의 조건, 마찬가지의 상황 속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65년대 작가들의 주인공들은 그 상황을 뚜렷이 인식함으로써 그 상황을 극복해내는 것이다. (김현, <구원의 문학과 개인주의>)

 

김현이 힘주어 강조하는 것은 마찬가지의 조건, 마찬가지의 상황 속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 상황을 뚜렷이 인식함으로써 그 상황을 극복해낸다는 사실이다.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419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폭풍노도처럼 일어난 아세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드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구정권을 일시에 무너뜨린 419정신의 문학적 수용양상을 밝히는 일이기도 하다.

 

60년대 작가들의 의식의 문을 대담하게 두드렸다고 김현이 말한 <생명연습>을 비롯해 김승옥의 초기 작품세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기세계의 확립이다. 김승옥이 모색한 자기세계란 무엇인가. 김승옥이 파악한 자기세계란 한마디로 말하면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없는 윤리 감각 등에 묻혀사는 삶을 거부하고 자기 고유의 삶의 논리를 찾아 헤매는 것을 말한다. 말하자면 기존의 것에 대한 대타의식으로 형성된 것이며, 그리하여 거부의 몸짓은 강렬하지만 실체는 없다. 그래서 자기세계를 마련하려는 주인공들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 자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 유니폼만 믿고 으시대거나 또는 신성일과 엄앵란닮은 꼴에서 미의 기준을 설정하는 속물들에게 강한 혐오감을 드러내지만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그렇다고 그의 주인공들이 뚜렷한 자기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세계의 확립이란 작가 자신에게서 극기(克己)’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생명연습>에서는 삶의 물신화유형화를 강제하는 상황의 압력과 그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자신을 넘어선, 작가가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인물군들이 등장하고 있어 주목된다. 김승옥이 모색하는 자기세계의 구체적 실상이자 동시에 김현이 말한 바에 따르면 상황을 뚜렷이 인식함으로써 그 상황을 극복한 주인공의 구체적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기를 해낸 인물이란 실상 보잘것이 없다.

밤중이면 몰래 혼자 수음을 하는 선교사, 유학을 가기 위해 잔인하리만큼 투명한 계산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범한 한교수, 자기 자신의 혼이 담긴 직선을 그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오화백, 죽은 아버지를 찾아 불륜을 거듭하는 어머니를 이해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보이는 누이등이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자기세계를 가진 인간들이다. 김승옥에 있어서도 역시 전후세대작가들과 마찬가지로 밝고 활기차게 사는 주인공들이란 서식할 자리가 없도록 이그러지고 찌그러진 인간들만이 살고 있다. 다만 한가지 변별되는 점이 있다면 전후세대문학이 외적 상황의 절대적인 압력에 눌려 무의지적 인간상에 머물렀다면, 김승옥은 비록 현상적인 일면이지만 그 상황을 비판하고 자기세계를 구축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 김현은 섬세한 변모라 불렀거니와, 바로 419혁명이 가져다주었던 힘일 터이다. 그러나 여기서 419혁명이 가져다준 세계가 기껏해야 역사적 방향성 또는 민족현실과 전혀 연관이 없는 자기세계의 확립 정도에 멈춘다는 사실은 주의를 요한다. 이것은 419혁명을 담당했던 419세대의 내면풍경을 살피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럼 김승옥 스스로가 규정짓고 있는 자기세계란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자기세계라면 분명히 남의 세계와는 다른 것으로 마치 함락시킬 수 없는 성곽과도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 성곽에서, 대기(大氣)는 연초록빛에 함뿍 물들어 아른대고 그 사이로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이 있으리라고 나는 상상을 불러일으켜 보는 것이지만 웬일인지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자기세계를 가졌다고 하는 이들은 모두가 그 성곽에서도 특히 지하실을 차지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내게는 모두 그들이 가진 귀한 재산처럼 생각된다.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는 과정이 한마디로 얼마나 기막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번득이는 철편(鐵片)이 있고 눈 뜰 수 없는 현깃증이 있고 끈덕진 살의가 있고 그리고 마음을 쥐어짜는 회오(悔悟)와 사랑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봄바람처럼 모호한 표현이 아니냐고 할 것이나 나로서는 그 이상 자세히는 모르겠다. ---<생명연습>

 

나로서는 그 이상 자세히는 모르남의 세계와 다른 것이 바로 김승옥이 모색하는 자기세계인 것이다. 이렇듯 자기세계가 실체가 없는 것이기에 그 세계를 좇는 김승옥 주인공들의 삶의 양태는 그토록 결렬하고 파장이 긴 것이다. 오로지 남과 다른 자기세계를 창출하기 위해 조리에 맞지 않는 감정의 기교’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만으로 뭉쳐진 연기력을 보여야 하며, 바닷가에서 자살을 해야 하는 것이다. (<환상수첩>). 그 격렬함과 그로 인한 고통으로 인해 그들은 튼튼한 백치 자식을 낳기를 염원하거나(<환상수첩>), ‘우리의 이 모든 괴로움 속에서 태어난 네 자식은 우리가 그것을 겪었다는 이유로써 구원받아야 한다고 기원하지만 (<누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은 이루어질 리가 없다. 역사 또는 외적 상황의 발전이란 각 개인의 역사에의 동참의 지나 사회적 실천이 없이는 이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세계를 확립하려는 모든 방황을 김승옥 자신은 환상적 기준’(<환상수첩>)이라 불렀거니와, 이는 ()의 부재로 표상되는 가치체계의 부재 속에서 온갖 방황 끝에 김승옥이 마련한 새로운 질서체계라 할 것이다. 또 그것은 무기력한 우울증에서 우리 문학을 꺼내준 419혁명의 문학적 표정이다. 419혁명이 김승옥에 있어서 구체적 민족현실의 인식에까지 나아가는 계기가 되지 못했다는 것은 김승옥의 문제이자 또한 419세대 전체의 한계이기도 하다. 김승옥과 동세대인 박태순은 419의 체험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그날 너무도 피곤하여 바깥에 나가지 않고 잠만 잤다. 우리가 잠에서 깨어 났을 적에는 확실히 이 세계는 뒤바뀌어 있었다……우리가 힘들며 끌어올렸던 그 무질서의 위대한 형식이 역사 속에 미아처럼 다만 한 순간의 고립에 불과하고 말았음을 깨달았을 때는 어느덧 저 기성 제복을 걸쳐 입고 있음을 보았다. (박태준, <무너진 주장>, 월간중앙,1968.8)

 

419란 혁명의 주체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채 돌발적으로 일어난 옆으로부터의 혁명에 불과 할 뿐이며, 그 주체세력인 학생들도 역사적 현실인식이나 이념적 정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들은 그 행위의 이념적 공백을 메꾸기 위해 기성정치인들이 불러들여 강연을 들어야했으며 (<산무시대 이야기>), 516이 일어나자 유식한 놈들은 된소리 안된 소리 씨부렁대가며 그걸(419 정신을 말함---인용자)로 밥벌이 방편을 삼아’(박태순, 신생, 민음사, 1986, p.269) 속속 그들이 거부했던 사회구조 속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따라서 419혁명의 흔적이 기껏해야 정향성 없는 자기세계의 확립으로 김승옥에게 내면화됨은 당연한 사실이며, 오히려 상동적인 관계일 뿐이다.

 

이로써 김승옥의 초기 문학세계의 구체적인 양상과 의미는 어느 정도 드러난 셈이다. 김승옥은 그의 일관된 창작방법의 원리로 작용하는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확립으로 전후세대의 문학을 뛰어넘었거니와, 그것으로 그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원리이자 창작상의 원리인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확립은 그의 소설의 본질적인 한계를 이루기도 한다. 소설이란 한 개인의 운명과 그 개인을 둘러싼 복잡한 제현실 즉 총체성이 통일적으로 결합할 때 미적 근거가 발생한다. 따라서 소설의 위대함이란 그 시대를 올바르게 반영재현함으로써 현실의 객관적 발전의 과정을 형상화된 인식으로 독자에게 제시, 그 독자로 하여금 널려 있는 현실 속에서 그 본질을 인식하게끔 했을 때에 비로소 성립한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김승옥 소설의 성과는 극히 제한적이다. 그가 모색한 남과 다른’ ‘자기세계란 여러 혼재한 삶 속에서 일관되게 작용하고 있는 본질적 일면만을 지나치게 확대시킴으로써 오히려 더욱 분산시킬 뿐이다. 새로운 것, 기발한 것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역사의 진행을 필연성의 과정으로 파악하지 않고 우연적인 것의 연속으로 묘사하기에 이른다. 결국 그의 소설은 현실에서 벗어난 극도의 추상성과 주관성에 뒤덮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전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대립적 인식에 연유한다.

 

사회는 개인 의식을 형성시키는 구체적 계기로서, 개인은 사회발전의 추동력으로써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그러나 김승옥에게는 사회는 남과 같은개인을 강제할 뿐이며, 개인은 그런 사회의 압력을 거부할 때만 자기세계를 가질 수 있다고 파악된다. 이토록 사회란, 역사란, 현실이란 거부의 대상이기에 그의 초기소설엔 이런 삶의 구체적 요인들이 들어설 여지가 없었으며, 오로지 관념만으로 자기세계를 만들어가는 인간들만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이 매개되지 않는 관념이란 구체적 현실에 맞부딪혔을 때 여지없이 무너지기 마련인데 김승옥도 그런 전기를 맞는다. 그가 현실의 한복판에 섰을 때(구체적으로 그가 대학을 졸업한 시기)인데, 이때를 기점으로 그의 문학세계는 변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변모의 계기는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또는 구체적 현실세계를 올바르게 보아낸 자리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며, 현실세계의 절대적인 압력에 눌려 자기세계를 포기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따라서 후기의 문학세계 역시 그 외양을 달리하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세계관적 기초에 놓여 있다.

 

4 ‘자기세계상실의 문학적 표정----후기작품의 경우

 

앞에서 우리는 김승옥 초기 문학세계의 중심원리를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확립으로 설정한바 있거니와, 그의 이러한 문학적 양상은 <무진기행>을 축으로 새롭게 변모한다. 이 변모의 내적 계기란 무엇인가. <무진기행>이 씌어진 1965년은 그의 개인사적으로는 초기 문학세계의 토양이 되었던 문리대를 졸업하고 크리스챤 아카데미에 입사하여 대화1호와 2호를 편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말하자면 생활인이 된 것이며, 사회라는 거대한 수레바퀴 속에 그를 꿰어맞춘 시시인 것이다.

 

그야말로 어쩌다가의 연속이었다. 그는 자가가, 지난 날 우연 속에 자신을 맡겨버린 것이 갑자기 역겨워졌다. ‘거지같은 자식이었다하고 그는 자신을 욕했다.

-----<차나 한 잔>

 

현실생활이란 냉엄한 것이다. 그 냉엄한 현실 속에 남과 다른’ ‘자기세계란 용납될 수 없는 것이고, 그 세계를 만들기 위한 감정의 기교란 이제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 파악했던 김승옥에게 있어서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부정이란 곧 그가 그토록 경멸해마지 않았던 사회규범으로의 편입을 의미할 뿐이다. 이제까지 김승옥의 삶의 원리이자 창작의 원리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며, 따라서 김승옥의 생활인으로의 변모는 그의 문학세계 전반을 뒤바꿔놓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결국 김승옥이 계속 창작을 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삶의 원리와 창작방법이 요구되어졌던 바, 그 모색점이 바로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이 작품은 구청 병사계 직원인 와 대학원생 과 아내의 시체를 판 돈으로 낭비행각을 벌이는 서른대여섯 살짜리 사내우연히만나서 지내게 되는 하루저녁의 생활기를 담은 것이다. 이 세 인물유형은 각기 다른 양태의 삶을 살고 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그들의 중심을 잡아줄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세 인물을 통해서 김승옥은 새로운 삶의 원리와 창작방법을 마련하고자 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영보 빌딩 안에 있는 변소문의 손잡이 조금 밑에는 약 이 센티미터 가량의 손톱자국이 있습니다.’

하하하하하고 그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건 김형이 만들어 놓은 자국이겠지요?’

나는 무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아세요?’하고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으니까요.’

그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별로 기분 좋은 기억은 못되더군요. 역시 우리는 그냥 바라보고 발견하고 비밀히 간직해 두는 편이 좋겠어요.’

-----<서울 1964년 겨울>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에 대한 발견으로 남과 다른’ ‘자기세계를 대신하려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으로 한계에 부딪힌 자신의 문학세계를 열어가기란 불가능하다. ‘남과 다른’ ‘자기세계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에 대한 발견이란 모습은 다르나 결국 동일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남과 다른’ ‘자기세계가 현실과 내적 연관을 맺지 못한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세계인식이라면, 결국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의 발견도 결국 동일한 인식태도일 뿐이다 총체적 인식으로부터 고립된 세부적인 대상에 대한 관심은 바로 객관적 필연성이라는 심오한 문제를 그냥 지나치며 그것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는 주관적 자의적 파악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사소한 것이 사소하지 않음의 발견역시 이전의 남과 다른’ ‘자기세계를 여지없이 난파시킨 생활인으로서의 논리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결국 남과 다른’ ‘자기세계가 갖는 한계의 극복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변증법적 인식과 그로부터 파생되는 개인의 주체성, 현실의 객관적 인식으로만 가능한 것인데 김승옥은 그 세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급기야 김승옥 자신도 이 방법을 포기하기에 이르며 결국 그는 삶의 원리도 창작방법도 마련하지 못한 채 의미없는 작품 활동을 계속할 뿐이다. 다음의 대목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김형, 우리는 분명해 스물다섯 살짜리죠?’

난 분명히 그렇습니다.’

나도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고개를 한번 기웃했다.

두려워집니다.’

뭐가요?’ 내가 물었다.

그 뭔가가, 그러니까……그가 한숨 같은 음성으로 말했다.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

 

젊은 나이에 너무도 일찍 자기세계를 잃어버린 작가의 위기적 징후감이 끈끈히 배어 있는 대목이다. 결국 김승옥은 남과 다른’ ‘자기세계를 대신할 삶의 원리이자 창작방법을 모색하지 못한 채 현격한 작가 정신의 후퇴를 보인다. 간간이 여성화자를 등장시켜 옥죄어오는 존재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야행(夜行)>(1969), 어린이화자를 통해 물신화된 세계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염소는 힘이 세다>(1969)등이 그의 작가로서의 급속한 몰락을 일단 멈추게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이다.

 

김승옥이 마지막으로 매달린 곳은 통속소설이다. 작가의 마지막 단계에 통속소설이 놓인다는 것은 그의 세계관적 한계를 극명히 보여준다. 이 말이 단지 그가 주간지 등의 연재를 통해 대중에 영합했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것은 그의 소설이 더 이상 자기세계의 확립에 대한 모든 노력을 포기하는 자리에 그의 통속소설이 놓이고 있다는 점에 잇다. 그의 통속소설은 이 소설을 쓴 작가가 김승옥인가 하고 의심스러우리만치 아무런 자기세계가 없는 통속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이 시대가 답답하여 견딜 수 없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나는 죽으려 한다.’는 유서를 작품 저변에 깔고 60년적 삶의 풍속도를 묘사한 <60년대식>(1968)만이 김승옥다운 면모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바람둥이 정혼자에게 이전 여자를 사랑했었냐고 외치는 <보통여자>(1969)나 성희(性戱)로 일관되어 있는 <강변부인>(1977)에 오면 그 작가적 황폐함은 극에 달하고 있다. 김승옥의 이러한 작가적 결말은 이제까지 우리가 계속 논의했던 대로 개인과 사회를 대립적으로 인식하는 데서 기인한 역사적구체적 현실의 부재와 주체성에 대한 불확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바, <60년대식>의 주인공의 다음과 같은 독백은 그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금까지 겨우 이틀 동안 그는 그의 일상생활의 궤도에서 외출해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단 이틀 동안에 그가 이십팔 년간 축적해온 그의 모든 능력은 시험되었으며 형편없는 점수를 받았다. 그는 그가 염려하고 있던 대상의 중심에는커녕 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채 엉뚱한 변두리에서만 빙빙 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 역사는 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셔터를 굳게 내려놓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나름으로 완성돼 버린 역사를 책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이다.

 

5 ‘자기세계의 소설사적 의미와 한계

 

김승옥은 참으로 많은 미덕을 갖추고 있는 작가이다.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만을 문제삼을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가 김승옥이다. 419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그 무기력증을 단숨에 뛰어넘은 것도 또한 김승옥이다. 그러나 김승옥은 바로 그 자리에 멈추어 버렸다. 그 이후에도 물론 제1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서울의 달빛0>(1977) 그리고 광주항쟁으로 중단된 <먼지의 방>(1980)에까지 창작은 계속되지만, 그것은 아마도 김승옥 작품세계의 한 여운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의 문학은 419516으로 이어지는 회오리가 가라앉을 즈음 중단된 채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이 글은 바로 그러한 문제의식 하에서 씌어졌다.

 

김승옥이 그의 삶의 원리이자 창작방법으로 힘겹게 확보한 것은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확립이었다. 이 원리는 기성의 모든 틀을 거부하겠다는 강렬한 의지이자 419체험을 매개로 형성된 것이기에 그토록 단호하고 독선적일 수 있었다. 이 원리로 그는 전후세대문학을 넘었거니와, 또한 이 원리로 인해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었다. 419이후의 그 급속하게 변화했던 세계를 그 독선적인 원리로는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무진기행>이후에도 갖은 재기의 노력을 보이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세계가 남과 다른’ ‘자기세계의 확립이라는 인식틀을 결코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승옥의 이러한 도정은 끊임없이 역사에의 동참의지와 객관적 인식이 왜 그토록 소중한가를 반증해주는 산 증거이다. 419가 미완의 혁명으로 즉 완수해야 할 혁명으로 우리 삶의 방향을 지시하듯, 김승옥의 문학적 실패는 우리 문학의 갈 길을 선명하게 제시해주는 산 표지(標識)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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