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故鄕) - 설정식
by 송화은율고향(故鄕) - 설정식
싸리 울타리에 나즉히 핀
박꽃에 옮겨나는 박호의 그림자
이윽고 숨어들고
희미한 달그림자에 어른거리던 박쥐의 긴 나래
뽕밭 너머로 사라질 때
할아버지여 지금도
마당에 내려앉아
고요히 모깃불을 피우시나이까
늦은 병아리 장독대에 삐악거리고
이른 마실 떠나는 소몰이꾼이
또랑길을 재촉할 때
곤히 잠들은 조카의 머리맡에
돌아앉아
할머니여 오늘 아침에도
이빠진 얼게로 조용히
하이얀 머리를 빗으시나이까.
<신동아, 1932. 10>
고향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계신 곳이다. 싸리 울타리가 있고, 지붕에는 박꽃이 피고, 저녁이면 박쥐들이 뽕밭 위를 날아다니는 곳. 또 병아리가 삐약거리며 몰려다니고, 소몰이꾼들이 있고, 어린 조카가 사는 곳. 그러한 고향은 시인보다 60년 나중에 사는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그와 같은 고향을 지키는 분들인 할아버지는 늘 `마당에 내려앉아 모깃불을 피우'고 계실 것이며, 할머니는 언제나 `이 빠진 얼개로 조용히 하이얀 머리를 빗'고 계실 것이다. 그것은 멈춘 상징의 영원한 그림이다. 시인의 뇌리에 각인된 그분들의 모습은 영원히 그의 마음의 고향을 이룰 것이다.
시인은 머릿속에서 고향을 그리고 있다. 그러니 그는 지금 고향을 떠나 있는 것이다. 마음 속에 고향, 곧 돌아갈 땅을 가진 사람은 넉넉하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익숙하게 바라본 지형과 풍물은 어머니의 품속과 같다. 때로 작은 동네가 고향일 수도 있고 더 넓은 지역이 고향일 수도 있고 하나의 나라가 다 고향이 될 수도 있다. 그 넓이와 형체의 유무에 구속되지 않고, 마음의 고향, 정신의 고향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해설: 이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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