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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 본문 일부 및 해설 / 전창근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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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 /  전창근

 본문

 

(전략)

 

 S# 34. 편전(便殿) 복도  

이완용과 송병준이 문 앞으로 와서 환관을 보고,

이완용 : 폐하 안에 계시냐?

환관 : 옥체 미령하셔서 일체 알현(謁見)을 물리치고 계시오.

송병준 : 국가 존망에 관한 일에도 그렇게 하시겠다더냐!

환관 : 대감! 국가가 이 지경이 되고도, 또 달리 무슨 국가 존망이 있으시오?

이완용의 얼굴이 샐쭉해지며 노기가 서린다. 송병준, 환관을 제치고 들어가려 하는데, 환관은 두 팔을 벌려 이들의 걸음을 막는다. 이완용,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서,

이완용 : 네 이놈! 썩 비키지 못할까? (하고 호령한다.)

환관 : 대감, 아무리 국운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부자(父子)의 천륜이 있고, 군신(君臣)의 의가 있겠거늘, 이건 너무 하지 않소! (하자, 송병준은 환관의 멱살을 잡아 제치며, 문을 열고 들어간다.)  

 

S# 35. 편전

이완용과 송병준은 들어와 국궁(鞠躬)한다. 벌써 흥분하고 계신 황제는, 이들을 본 체도 안 하신다.

송병준은 몹시 걱정이 되면서도 강압적인 어조로,

송병준 : 폐하! 이번 해아 밀사 사건은 정치상 중대한 문제이온즉, 일본은 가만 있지 않을 줄 아옵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종사의 위기가 이에서 더할 바 없사옵는데, 가위 조석에 그 운명이 달렸다 하겠습니다.

(황제는 말없이 옅은 한숨을 쉬신다. 이에 송병준, 품고 온 저의(底意)를 실토할 계제(階제)를 얻은 듯)

송병준 : 폐하! 지금 이 시각에라도 이토가 폐하께 해아 밀사 사건의 책임을 물어 오고,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가 대한문을 향하여 포문을 열게 되오면 어찌 하시렵니까?

(황제의 용안에 경련이 일어난다. 한참 안절부절 못해 하신다. 초조한 감정을 적이 억누르면서)

황제 : 자네 병준이, 사람됨이 저런 줄 미리 알았더면, 벌써 높은 벼슬을 주었을 걸 그랬지. 그랬더라면 국가의 운명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걸.

(하고 빈정대신다. 송병준은 콧등이 벌룩거린다. 이완용은 은근한 태도로)

이완용 : 신이 생각하옵건댄, 이번 사단(事端)에 있어 취하실 방책은 두 가지가 있사옵는데, 첫째는 폐하께옵서 친히 동경으로 거동하셔서 일본 천황께 사과하시옵고, 들째로는 폐하께옵서 세자에게 양위(讓位)하시는 두 가지 방책이 있을 뿐입니다.

황제 : 너희들이 대한 제국의 신하더냐? 외적이 들어 와서, 싸우다 힘이 다하면 성을 베개로 피 뿌리는 충신은 못 될지언정, 그래, 왜인(倭人)의 교사(敎唆)를 받아 짐을 이토록 협박하여 황제의 자리에서 내쫓으려 하니, 어찌 만고의 역적이 되려 하느냐?

물러가! 물러가라!

(울부짖으시며 몸부림치신다. 두 역신은 말없이 서있을 뿐, 황제는 이를 부드득 갈아붙이신다.) (F.O)

- 신하의 충절 없음을 한탄하는 황제

 

S#37. 분서(焚書)

일본 관헌이 산더미같이 쌓인 책과 신문 등을 불사르고 있다. 이 책 중에는 혁명사, 독립사, 위인전 등이 있다.

안중근의 소리

왜놈들은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알까봐 두려워하고, 외국의 혁명사, 독립사를 보고 국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질 것을 겁내어, 이런 종류의 책이란 책은 죄다 불살랐다. 허지만, 단군 성조로부터 내려온 핏줄기와 반만 년 지켜 온 한민족의 민족 정기는, 놈들이 질러 놓은 불길보다도 몇 천, 몇 만 배 더 크고 뜨거울 것이다. 너희들은 숭고한 민족의 불길들이다. 알겠느냐?

 

S#38. 형장(刑場)

십자형으로 된 형틀에 한국의 의인 지사들이 묶여 있다.

학살되는 것이다.

안중근의 소리

그리고 놈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우리의 스승을, 우리의 동지들을 학살하고 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 바친 고귀한 목숨은 만 사람의 피를 끓게 할 것이니, 이것만은 왜놈의 기관총도 대포도 막지 못한다. O.L

- 애국심에 불타는 안중근

 

S#39. 삼흥 학교(밤)

교실이라고 해도 두 발을 이은 한식 방이다. 남폿불이 까물거린다. 안중근은 지금 십여 명 학생을 앞에 놓고 이야기에 열이 올랐다.

안중근 : 그것은, 정의를 위해 일어난 사람의 눈에는 무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허나 머잖아, 우리 나라는 왜놈의 손으로 망할 것이다.

하고는 목이 메어, 안중근은 얼굴을 돌린다.

학생들의 눈에 눈물이 핑 돈다.

안중근, 다시 얼굴을 돌리며,

안중근 : 그러면 넘어진 나라를 누가 다시 세울 것이랴? 온 세계에 아무도 없다. 오직 우리 이천만 민족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의 형님이 계시고, 너희가 있고, 이 안중근이 있다. 부디 뼈에 새겨 명심해 다오. 오늘로 우리 삼흥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한 말이 너희들에게는 또한 마지막 말이 될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터지려는 울음을 감씹는 학생들. 실내는 무덤 속같이 고요하다. O.L

- 안중근의 비장한 결심

 

S# 40. 어머니 방(밤)

촛불이, 창 틈으로 새어드는 바람에 하늘하늘 떨고

있다.

안중근은 어머니 앞에 꿇어앉았다.

옆으로 동생 안공근, 안정근이 다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한동안 보고 나서, 손을 끌여당겨 만져 본다. 어머니는 그 손을 놓고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는다.

안중근은 일어났다가 절한다.  

 

S# 41. 안중근의 방(밤)

안중근이 아내와 마주 앉아 있다.

옆에는 괴나리 보따리가 놓여 있고, 이들의 아들 옥남은 잠들었다.

부부는 자는 아들을 들여다본다.

아내는 안중근의 얼굴을 자주 보건만, 안중근은 제 생각에만 깊다. (O.L)

 

S#42. 강변(江邊)

이른 아침이다.

강은 얼어붙어서 거울같이 미끄럽다.

그 위로 안중근이 걸어간다.

걷다가 멈추어 서며,

안중근 : 나는 가오.

아내 : 네

옥남을 업은 아내는 그 말뿐, 가는 남편을 눈물로 보낸다.

그러나 안중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져 가고만 있다.

서리찬 바람만이 불어 올 뿐이다.F.O

- 거사를 위하여 집을 떠나는 안중근

 

(하략)

 

 요점 정리

 작자 : 전창근(全昌槿)

 형식 : 시나리오, 비극, 역사극, 실록, 전기극

 배경 : 구한말. 서울 및 하얼빈

 주제 :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순국정신, 견위치명

 인물 : 안중근, 학생들, 안중근 가족들, 고종 황제, 매국노들, 일본인들

 출전 : 연간 시나리오선집(1960)

 구성 :
발단 : 을사오조약 체결
상승 : 해아밀사사건, 고종 황제의 폐위, 안중근 의사의 거사 준비 과정
정점 : 안중근의사의 거사
하강 : 재판
결말 : 안중근 의사의 최후 

 내용 연구

 

 편전 : 임금이 평상시에 거처하는 궁전.

 환관 : 내시. 내관

 폐하 : 황제나 황후를 높여서 일컫는 말.

 옥체 : 남을 높이어 그의 몸을 이르는 말. 보체

 미령 : 병으로 말미암아 몸이 편안하지 못함.

 알현 : 지체가 높은 분을 찾아 뵘. 상알(上謁), 현알(見謁)

 지경 : 어떤 처지나 형편

 존망(存亡) : 존속과 멸망

 대감 : 조선 때, 정이품 이상의 벼슬아치를 높여 일컫는 말.

 국운 : 국가의 운명

 천륜 : 부모, 형제 사이의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국궁 : 존경하는 뜻으로 몸을 굽힘.

 종사 : 종묘와 사직의 준말.

 가위 : 가히 이르자면

 저의 :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속으로 작정한 뜻. 본의

 계제 : 계단과 사닥다리. 여기서는 일이 잘 되어 가거나 어떤 일을 행할 수 있게 된 알맞은 형편이나 좋은 기회.

 포문 : 대포의 탄환이 나가는 구멍.

 용안 : 임금의 얼굴

 사단 : 사건의 단서. 일어난 사건이나 사고

 양위 : 임금의 자리를 물려줌

 교사 : 남을 꾀거나 부추겨서 나쁜 짓을 하게 함.

 짐 : 임금이 자기를 일컫는 말.

 만고 :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오랜 세월.

 역적 : 자기 나라나 임금에게 반역하는 자

 옥체 미령하셔서 일체 알현을 물리치고 계시오 : 폐하께서 병환으로 말미암아 편안하지 못하시므로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는 뜻으로, 매국노들이 황제와 면담하는 것을 미리 막겠다는 환관의 충정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국가가 이 지경이 되고도, - 존망이 있으시오? : 대감들의 소행으로 국운이 다하였는데 무슨 염치로 국가의 존망 운운하느랴라는 말로, 환관이 오히려 대감을 꾸짖는 정면 도전으로서 민족 전체의 뜻을 대변함.

 사람됨이 저런 줄 미리 알았더면 - 벼슬을 주었을걸 : 역신에 대한 환멸에서 오는 역설적인 표현

 외적이 들어와서 싸우다 힘이 다하면 성을 베개로 피 뿌리는 충신은 못될지언정.; 국가를 위하여 대적하여 싸우다가 힘이 다하더라도 항복하지 않고 성을 사수하는 충신이 될지언정, 충절을 지키지 못하고 변절한 역신들에 대한 한탄

 분서 : 책을 불살라 버림

 관헌 : 관청의 관리

 의식 : 깨어 있는 상태에서 자기 자신이나 사물에 대하여 인식하는 작용. 사회적·역사적으로 형성되는 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감정이나 견해나 사상.

 숭고 : 숭엄하고 고상한.

 성조 : 성스러운 조상

 정기 : 바른 의기. 바른 기풍

 형장 : 사형을 집행하는 곳

 형틀 : 죄인을 심문할 때에 앉히던 형구

 의인 : 의로운 사람

 지사(志士)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사람

 학살 : 참혹하게 죽임

 동지(同志) : 목적이나 뜻이 서로 같음. 또는 그런 사람

 감씹는 : 억지로 참는

 괴나리 : 괴나리 봇짐의 준말. 걸어서 길을 갈 때에 짊어지는 조그마한 봇짐

 보따리 : 물건을 보자기에 싼 뭉치.

 놈들이 질러 놓은 불길 : 일본이 한민족의 국가나 민족에 대한 의식이 높아질 것을 두려워하여 역사책과 위인전 등의 민족 정신을 일깨우는 책들을 태우는 것과 같은 우리 민족에 가하는 문화 말살 정책을 뜻한다.

 숭고한 민족의 불길 : 뜻이 높고 존엄한, 민족을 지키고 독립을 이루려는 정열.

 한 사람이 민족을 위해 바친 - 왜놈의 기관총도 대포도 막지 못한다. :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한 사람의 정의롭고 거룩한 희생은 많은 사람의 가슴 속에 독립을 위해 쟁취하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을 불러 일으킬 것이니, 이렇게 일어난 독립 정신은 일본의 어떠한 탄압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닌다.

 기관총도 대포도 : 어떠한 탄압도(대유법)

 정의를 위해 일어난 사람의 눈에는 무서울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사필귀정(事必歸正)과 같이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확신이 엿보인다.

 오늘 내가 한 말이 너희들에게는 또한 마지막 말이 될 것이다 : 다시는 너희들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영원한 이별을 암시한다. 즉, 안중근이 거사를 위해 떠나야 된다는 의미이다.

 안중근은 뒤도 안 돌아보고 멀어져 가고 있다 :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별인데도 사사로운 정에 연연해하지 않고 거국적인 일을 위하여 떠나는 애국지사의 풍모가 엿보인다.

 

 이해와 감상

 1959년에 영화화된 창작 시나리오로서, 구한말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안중근(安重根)의사 사건을 담고 있다. 따라서, 역사극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을사조약의 체결로부터 안중근 의사의 거사, 재판, 최후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여기에 수록된 부분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위해 출발하는 장면이다. 모두 142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나리오는 한말의 기우는 국운을 배경으로 안중근 의사의 숭고하고 위대한 애국 애족의 정신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그리고 있다. 작품은 전체적으로 극적인 사건의 전개를 위해 장면 전환을 많이 시도하고 있다. 특히, 안중근의 소리를 화면 밖에서 들려 오는 소리로 처리한 기법은 극적인 분위기를 한결 돋구어 준다. 여기에 수록된 부분은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위해 출발하는 장면이다.

 

 심화 자료

 전창근(1907-1973)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 1940년  발표하고, 이어 '자유 만세'. '단종 애사'. '아, 백범 김구 선생' 등의 시나리오가 있다.

 안중근(安重根/1879~1910.3.26)

독립운동가. 본관 순흥(順興). 아명 안응칠(安應七). 황해도 해주(海州) 출생. 한학(漢學)을 수학했으나 오히려 무술에 더 열중하였다. 1895년 아버지를 따라 가톨릭교에 입교하여 신식 학문에 접하고 가톨릭 신부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1904년 홀로 평양에 나와 석탄상(商)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三興)학교(후에 오학교(五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 인재 양성에 힘쓰다가 국운(國運)이 극도로 기울자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수 없다고 판단, 1907년 연해주(沿海州)로 망명하여 의병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듬해 전제덕(全齊德)의 휘하에서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겸 특파독립대장(特派獨立大將) 및 아령지구(俄領地區)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嚴仁變)과 함께 1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日軍)과 격전을 벌였으나 실패, 노에프스키[烟秋]에서 망명투사들이 발간하는 《대동공보(大同公報)》의 탐방원(探訪員)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료들에게 충군애국(忠君愛國) 사상을 고취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죽음으로써 구국투쟁을 벌일 것을 손가락을 끊어 맹세, 그 해 10월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러시아 재무상(財務相)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사살하기로 결심하고, 동지 우덕순(禹德淳)과 상의하여 승낙을 얻고 동지 조도선(曺道先)과 통역 유동하(柳東河)와 함께 이강(李岡)의 후원을 받아 행동에 나섰다. 1909년 10월 26일 일본인으로 가장, 하얼빈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森泰二郞], 만철이사(滿鐵理事)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太郞] 등에게 중상을 입히고 현장에서 러시아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곧 일본 관헌에게 넘겨져 뤼순[旅順]의 일본 감옥에 수감되었고 이듬해 2월,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형이 집행되었다. 글씨에도뛰어나 많은 유필(遺筆)이 있으며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였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이완용(李完用/1858~1926)

한말의 정치가. 본관 우봉(牛峰). 자 경덕(敬德). 호 일당(一堂). 1882년(고종 19)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주서(注書)·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검교(檢校)·수찬(修撰)·동학교수(東學敎授)·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였다. 81년 육영공원(育英公院)에 들어가 영어를 배운 뒤 응교(應敎), 세자시강원 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87년 주차미국참사관(駐箚美國參事官)으로 도미(渡美), 이듬해 5월 귀국한 후 이조참의(吏曹參議) 겸 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외무참의(外務參議)를 역임하였다. 그 해 12월 미국 주차대리 공사가 되어 다시 도미했다가 80년 귀국하여 대사성(大司成)·교환서총판(交換署總辦)을 역임하였다. 95년 학부대신(學部大臣)·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이 되었다. 96년(건양 1) 아관파천(俄館播遷) 때 친러파로서 외부대신·농상공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1년 궁내부 특진관(宮內部特進官)으로 있다가 친일파로 바뀌어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같은 해 11월 을사조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5적신(乙巳五賦臣)의 한 사람으로 지탄을 받았다.

 

이 해 12월에 의정대신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다음 통감(統監)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추천으로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헤이그밀사사건 후 일본의 지시대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讓位)할 것을 강요, 순종을 즉위시키는 등 매국행위를 하다가 1909년 이재명(李在明)으로부터 자격(刺擊)을 받았으나 상처만 입었다. 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全權委員)이 되어 일본과 한일병합조약을 체결, 그 공으로 일본 정부에 의해 백작(伯爵)이 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거쳐 11년 조선귀족원 회원을 역임, 20년 후작(侯爵)에 올라 죽을 때까지 일본에 충성을 다했다. 글씨에 뛰어났다. 편저에 《황후폐하 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송병준(宋秉畯/1858~1925)

조선 후기 친일정치가·민족반역자. 본관 은진(恩津). 함남 장진(長津) 출생. 서울에 와서 민영환(閔泳煥)의 식객(食客)으로 있다가 무과(武科)에 급제, 수문장(守門將)·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部都事)·감찰(監察) 등을 역임하였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간신히 피신하였고, 본시 수구파(守舊派)에 속했으므로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킨 김옥균(金玉均)을 살해하려고 일본에 건너갔으나 도리어 설득당하여 그의 동지가 되었다. 86년 귀국하여서는 김옥균과 통모한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민영환의 주선으로 출옥, 흥해군수(興海郡守)·양지현감(陽智縣監) 등을 역임하다가 정부가 체포령을 내리자 다시 일본으로 피신했다.

 

노다헤이지로[野田平治郞]라는 이름으로 개명, 야마구치현[山口縣] 오기[萩]에서 잠업(蠶業)에 종사하다가 1904년(광무 8)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통역으로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완전히 친일파로 돌아서고 일본의 주구(走狗) 노릇을 하기 시작했는데, 귀국 즉시 윤시병(尹始炳)과 함께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고 다시 이용구(李容九)와 함께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나라를 일본에 넘겨 주기 위한 전초작업을 시작하였다. 헤이그 밀사사건 후에는 황제 양위운동(皇帝讓位運動)을 벌여 친일활동에 앞장섰고, 1907년 이완용(李完用) 내각이 들어서자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내부대신을 역임, 국권피탈을 위한 상주문(上奏文)·청원서를 제출하는 매국행위를 했다. 그 후 다시 일본에 건너가 국권피탈을 위한 매국외교를 하여 전국민의 지탄을 받았다. 국권피탈 후 일본정부로부터 자작(子爵)을 수여받았고 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朝鮮總督府中樞院顧問)이 되었으며 20년 다시 백작(伯爵)에 올랐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고종(高宗/1852~1919)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초휘(初諱) 재황(載晃). 아명(兒名) 명복(命福). 초자(初字) 명부(明夫). 자 성림(聖臨). 호 주연(珠淵).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 비(妃)는 여성부원군(驪城府院君) 치록(致祿)의 딸 민씨(閔氏).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趙大妃)의 전교(傳敎)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大政)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戚臣)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朋黨門閥)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備邊司)의 폐지 및 삼군부(三軍府)의 설치, 한강 양화진(楊花津)의 포대(砲臺)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京都守備)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身布徵收),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重修)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惡貨)인 당백전(當百錢)의 주조(鑄造)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勞役)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丙寅洋擾), 신미양요(辛未洋擾)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73년(고종 10) 11월, 민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민비와 그 일족인 민승호(閔升鎬)·민겸호(閔謙鎬)·민태호(閔台鎬)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민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75년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사대당(事大黨)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81년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 개화·수구(守舊)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景祐宮)·계동궁(桂洞宮) 등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天津條約]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金弘集)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洪範十四條)>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遼東領有]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는 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刺客)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민비(閔妃)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兪吉濬)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種痘)·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徒刑廢止)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있자 김홍집·정병하(鄭秉夏)·어윤중(魚允中)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慶運宮: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光武)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顧問政治)를 위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홍만식(洪萬植)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代行政治)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李儁)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讓位)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太皇帝)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國運)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金谷)의 홍릉(洪陵)이고, 저서에 《주연집(珠淵集)》이 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환관(宦官)

거세(去勢)된 남자로서 궁중에서 벼슬을 하거나 유력자 밑에서 사역되던 자. 시인(寺人)·엄관(官:奄人)·정신(淨身)·내수(內竪)·중관(中官)·혼시(寺)·환시(宦寺)·환자(宦者)·황문(黃門) 등의 이름이 있으며, 한국에서는 별칭으로 내시(內侍)라 하였고, 영어에서는 그리스어(語)에서 연유하였다는 ‘eunuch’가 해당된다. 환관은 고대의 서(西)아시아 여러 나라와 그리스·로마·인도·이슬람교(敎) 국가들에서도 있었으나, 특히 중국의 환관이 가장 유명하며, 한국에도 고려 때 중국의 환관제도를 들여와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기원】

환관은 고대의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는 일찍이 그 존재가 알려져, BC 6세기경의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환관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이라 해서 이용하였다고 하였으며, 그리스인들은 환관을 만들어 소(小)아시아의 고도(古都) 에페소스와 리디아의 수도 사르데스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팔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에서도 거의 같은 무렵인 춘추시대(春秋時代)에 환관이 군주를 죽이고 정치적으로 권세를 휘두른 예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은(殷)나라의 갑골문자(甲骨文字)를 보면 이미 BC 1300년경의 무정왕(武丁王) 때에 포로로 잡은 서쪽의 만족(蠻族)인 강인(羌人)을 환관으로 삼아도 되는가 하고 신에게 점을 쳤다는 사료(史料)가 있어, 중국 환관의 역사는 BC 1300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환관의 생태】

환관은 일반적으로 양근(陽根) 및 음낭(陰囊)이 제거된 남자인데, 때로는 음낭만을 제거한 자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모두 그 때문에 육체적 변화가 일어나 남성적인 특징이 퇴화해서 중성화하고, 여성적인 동작이 현저하여진다. 또한 음성이 변하고 수염도 빠지며, 젊었을 때에는 비만체(肥滿體)가 많으나 신체에 탄력이 없고, 중년(中年)을 지나면 갑자기 살이 빠지기도 한다. 성격도 감정의 기복(起伏)이 심하여 사소한 일에 감격하고, 또 갑자기 성질을 부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정직하고 자비심도 많다고 하지만, 반대로 물욕이 강하여 축재(蓄財)에 열중한다. 육체적 결함을 의식하여 항상 열등감을 지녀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약점을 지적받기라도 하면 심한 모욕을 느껴, 때로는 떼를 지어 달려들기도 한다. 강자(强者)에는 영합적(迎合的)이고, 군주(君主)를 측근에서 받들면서 여러 기밀(機密)에 접하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정치를 혼란시키기도 하였다.

 

【중국】

중국에서 환관이 연유한 이유에 대해 중국인은 질투심이 대단해서 남녀관계의 혐의를 벗어나기 위해 중성의 환관을 쓰게 되었다는 설(說)도 있으나, 그보다는 중국의 지배자와 같이 많은 여자를 거느려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의 조직을 가졌던 후궁(後宮)에서는 그 질서와 순결 및 비밀 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성의 환관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춘추시대에 제(齊)나라 환공(桓公)의 신하 수조(竪勺)는 스스로 거세해서 환관이 되어 환공의 후궁들을 관리할 것을 자원해서 환공의 신임을 받았고,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때에는 환관 발제(勃)가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또한, 뒤에 진(秦)의 중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한 상앙(商)이 진나라에 중용(重用)된 것은 환관 경감(景監)이 밀어준 덕분이었다.

 

진나라 2세 황제 시대에 이르러서는 승상(丞相) 이사(李斯)와 암투를 벌여 이를 죽이고 황제를 살해한 조고(趙高)와 같이 막강한 세력을 지닌 환관도 출현하였다. 이들 환관 가운데 수조와 같이 스스로 환관이 되는 것을 자궁(自宮), 또는 사백(私白)이라 하는데, 이러한 예는 드물고, 진(秦) 및 한(漢)나라 때에는 거의 5형(刑)의 하나인 궁형(宮刑:割勢)에 처한 죄인을 환관으로 삼았다. 한나라의 무제(武帝)는 많은 신하를 가차없이 형벌에 처한 것으로 이름이 났는데, 그 가운데에는 많은 명사(名士)가 궁형에 처해져 환관이 되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 천(司馬遷)도 궁형을 받았는데, 그는 후에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까지 올라 황제의 측근에서 유능한 비서역을 수행하였다. 그 이후 환관 가운데에는 중서령이 되어 정권을 장악해서 정치를 혼란에 빠뜨리는 자가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환관의 폐해가 가장 심하였던 시대는 후한(後漢)과 당(唐)·명(明)나라 때이다.

 

후한 때에는 많은 황제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어머니인 태후(太后)가 섭정(攝政)이 되었는데, 여자가 직접 남성의 대신과 면접하는 일을 피해서 정령(政令)의 전달을 환관이 맡았기 때문에 그 세력은 크게 뻗쳤다. 특히 환제(桓帝) 때에는 환관인 선초(單超) 등이 외척인 양기(梁冀) 등을 제거한 뒤 이들의 세력은 천하에 떨쳐 후한 말의 영제(靈帝)는 환관의 최고위직에 있던 장양(張讓)과 조충(趙忠)을 향해서 ‘장상시(張常侍)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趙常侍)는 나의 어머니’라고 입버릇처럼 하였다고 한다. 수(隋)나라에 이르러 환관으로 충당하기 위해 시행하던 궁형의 죄인은 궁형이 폐지됨에 따라 환관의 공급원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어 수·당시대부터는 환관을 지원자로 충당하는 것이 원칙이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형수의 죄를 감해서 환관을 삼았으며, 스촨[四川]·광둥[廣東]·광시[廣西] 등 변경의 만민(蠻民)을 잡아 환관을 삼거나, 외국으로부터의 진공자(進貢者)도 환관으로 받아들였다. 당나라 현종(玄宗) 때에 중용된 고력사(高力士)는 광둥 남부의 만료족(蠻族) 출신이었고, 안녹산(安祿山)의 총애를 받았던 이저아(李兒)는 거란인(契丹人)이었다. 이와 같이 현종 때부터 점차 권세를 지니게 된 환관은 대신의 임면, 황제의 폐립(廢立)을 마음대로 하였다. 당시에는 환관을 ‘정책국로(定策國老)’, 즉 시험을 시행하는 국가의 원로라 하고, 황제를 ‘문생천자(門生天子)’, 즉 그 시험관에 의해 급락(及落)이 판정된 수험생과 같은 천자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당나라 때 환관의 전횡(專橫)은 대단한 것이었다. 송(宋)·원(元)시대에는 환관의 전횡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그럼에도 동관(童貫)·양사성(梁師成) 등의 환관이 국정(國政)을 좌우하였다. 원나라에 이르러서는 고려·여진(女眞)·안남(安南:베트남) 출신의 환관이 많았으며, 순제(順帝) 때 고려 출신의 박아불화(朴阿不花)는 후궁에서 권세를 휘둘렀는데, 그는 고려 본국에서도 계양군(桂陽君)에 봉작(封爵)되었다. 명(明)나라에 이르러, 태조는 환관의 정치 개입을 엄금하였으나, 영락제(永樂帝) 이후에는 이 금령도 문란해져 왕진(王振)·왕직(汪直)·유근(劉瑾)·위충현(魏忠賢) 등 전횡적인 환관이 나왔다. 이 가운데 왕진은 금·은을 채운 창고가 60동이 넘었다고 하며, 위충현은 황제에 뒤지지 않는 호사를 부렸고, ‘황제만세’를 본떠서 스스로를 ‘9천세’라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중국 궁중의 환관은, 많을 때에는 1만 3,000, 적을 때라도 3,000명은 있었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10만 명을 넘을 때도 있었다고 한다. 명나라의 영종(英宗) 때에는 구이저우[貴州]에 사는 왜소한 묘족(苗族) 1,500여 명을 뽑아 환관을 삼았다고 하며, 1621년 환관 3,000명을 모집하였을 때는 응모자가 2만이 넘어 4,500명으로 늘여서 뽑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중국에서는 장래의 부귀를 바라고 아버지가 자식을 거세하거나, 중년이 되어 스스로 거세한 자도 있었다. 정부에서 이들을 채용할 때에는 신체검사를 해서 거세의 상태를 조사하고 다시 나이·성질·언어·용모 등을 검사해서 결정하였다. 채용하게 되면 안팎의 전갈, 위락(慰樂)을 위한 연예, 후궁의 불사(佛事), 그리고 요리·이발·세탁·물긷기·청소·경비 등 궁중 안의 모든 일이 맡겨지며, 이 가운데에서 권력을 쥐게 되는 환관이 나타났다. 환관 가운데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은 종이를 발명하였다고 하며, 명나라의 정화(鄭和)와 같이 남해(南海)에서 크게 국위(國威)를 떨친 예도 있는데, 이는 환관 전체에서 보면 극히 적다. 청(淸)나라에 이르러 환관의 폐해는 적었으나, 서태후(西太后)가 정권을 흔들었을 때에는 안득해(安得海)·이연영(李蓮英) 등이 권세를 부렸다. 그러나 1912년 청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의 환관도 자취를 감추었다.

 

【기타】

중국의 환관제도는 동양에서 고려·안남 등에도 영향을 끼쳤으나, 일본에는 파급되지 않았다. 서(西)아시아에서는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에서 성행되었고, 이집트에서도 클레오파트라 시대의 근위대장(近衛隊長) 포티누스도 환관이었다. 이어 그리스·로마로 전하여진 환관의 풍습은 동(東)로마제국에서 성행하여 테오도시우스 1세(346?∼395) 이후 동로마제국을 세운 아르카디우스황제 때의 에우트로피우스, 테오도시우스 2세 때의 크리사피우스 등이 환관으로 권세를 떨쳤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섬기며 이탈리아에 진격해서 동고트 왕국을 멸망시킨 나르세스는 특히 유명한 환관이었다. 일부다처를 인정한 이슬람교(敎) 나라들에서는 후궁을 관리하기 위해 많은 환관을 필요로 하였으며, 오스만 투르크제국에서는 백인 및 흑인의 환관을 구하여 아프리카의 흑인이 이에 충당되었다. 또한, 인도의 무굴제국에서도 많은 환관이 있었고, 16∼17세기에 일어난 페르시아의 사파비왕조에서는 환관의 세력이 강하였다고 한다. 한편, 그리스도교가 유포된 후의 유럽에서는 환관이 점차 줄어들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합창대에서 노래를 시키기 위해 아이들을 거세하였으나, 교황 레오 13세의 금령에 따라 소멸되었다.

 

【한국】

한국에서는 거세자를 엄인(人) 또는 화자(火者:고자)라고 하였는데, 신라시대에 이미 환수(宦)란 기록이 보여 신라에서도 환관을 둔 것으로 보인다. 고려에서는 처음에 왕 가까이에서 숙위(宿衛)와 근시(近侍)를 하던 내시(內侍)라는 직책에 재예(才藝)와 용모가 뛰어난 세족자제(世族子弟) 또는 시문(詩文)·경문(經文)에 능한 문신(文臣)을 임명하였으나, 의종 이후 점차 환관을 임명하였다. 의종 때에 내시가 된 환관 정성(鄭誠)과 백선연(白善淵)은 왕의 총애를 받아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초기의 환관은 그 득세(得勢)와 폐를 막기 위해 액정국(掖庭局)의 잡무와 남반(南班)과 같은 한품(限品:7품 이상 오르지 못함)의 직에 서용(敍用)하고 정직(正職)에는 임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환관 수명을 그의 친정인 원나라의 세조(世祖)에게 바친 이후로는 환관의 진공(進貢) 요구가 빈번하였다. 따라서 그전에는 거세를 수술에 의하지 않고 흔히 갓난아이 때 개가 물게 하는 극히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하였으나, 원나라와의 관계 이후 그 수요량이 증가하자 수술방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원나라에 들어간 환관들은 대개 그곳 황실의 총애를 받아 원나라의 사신(使臣)으로 본국에 오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려로부터 군(君)에 봉작(封爵)되고 가족까지도 혜택을 입게 되자 모두 이를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형은 아우를 거세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환관이 되는 것을 출세의 첩경으로 여겼다.

 

그러나 원나라에 들어간 환관 가운데는 본국을 중상하고 악질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자도 있었는데, 충선왕 때의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방신우(方臣祐)·이대순(李大順), 충혜왕 때의 고용진(高龍晋) 등이 가장 심하였다. 특히 백안독고사는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참소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충선왕을 토번(吐蕃)에 귀양을 보내게 하였다. 국내에서도 환관의 관청인 내시부(內侍府)를 두어 환관이 궁중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자, 이들이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잡아 정치에 개입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등 정치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때에는 내시직을 맡았던 환관은 100명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도 내시부에 환관을 두고 대전(大殿)·왕비전·세자궁·빈궁(嬪宮) 등에서 감선(監膳)·사명(使命) 및 잡무 등을 맡게 하였는데, 그 수는 240명에 이르고, 그 중 59명이 종2품의 상선(尙膳)을 비롯해 종9품의 상원(尙苑)에 이르기까지 관계(官階)를 가졌었는데 관제상 일반관직과 구별하고 엄히 규제하여 고려와 같은 큰 폐단은 없었다.

 

그러나 왕·왕비 등의 측근에 있음을 기화로 경제적 이권(利權)을 챙겼으며,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궁중의 공기를 크게 좌우하는 일도 있었다. 조선정부는 환관의 가계(家系) 단절에 배려하여 수양자법(收養子法)에는 동성(同姓)에 한하여 양자를 삼도록 되어 있었으나 환관에게는 이성(異姓)의 양자를 택할 수도 있게 하였으며, 환관도 처첩(妻妾)을 거느리는 경우가 있었다. 환관제도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지금의 서울 효자동(孝子洞)의 명칭은 원래 환관인 화자가 많이 산다 해서 화자동이라 하다가 후에 이 음과 비슷한 효자동으로 고쳤다고 한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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