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설 (鏡說)
by 송화은율경설 (鏡說)
어떤 거사(居士)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 같았다. 그러나 그 거사는 아침 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한 거울을 좋아하겠지만,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잘 생긴 사람은 적고 못 생긴 사람은 많습니다. 만일 한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깨뜨려 버리고야 말 것이니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데, 그대는 어찌 이를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하니,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백운소설)
요점 정리
작자 : 이규보
역자 : 장덕순
갈래 : 고대 수필
성격 : 관조적, 교훈적, 철학적
문체 : 대화체, 번역체
표현 : 문답법
제재 : 거울
주제 : 사물의 심층을 이해하는 통찰력. 처세훈적 의식과 현실에 대한 풍자, 삶에 대한 관조적 자세
구성 : 2단 구성
문(問) : 나그네의 물음. 흐리고 때가 묻은 거울을 보는 까닭이 무엇인가
답(答) : 거사의 대답. 현상적 모습보다는 본성 자체가 중요하다.
특징 : 먼지가 낀 거울을 보며 얼굴을 가다듬는 특이한 한 거사의 이야기를 통해 삶과 처세에 관한 개성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글이다. 다시 말해서 대화 형식을 통해 주제를 표출하고,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출전 : 백운(白雲)소설
내용 연구
어떤 거사(居士 : 속인으로 불교의 법명을 가진 남자로 일종의 수필적 자아, 현실주의적 태도, 작가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는 존재, 작가의 허구적 대리인)가 거울 하나를 갖고 있었는데 먼지가 끼어서 흐릿한 것이 마치 구름에 가리운 달빛 같았다. 그러나 그 거사는 아침 저녁으로 이 거울을 들여다보며 얼굴을 가다듬곤 하였다.
한 나그네(거사와는 대비되는 인습적 고정 관념을 지닌 사람)가 거사를 보고 이렇게 물었다.
"거울이란 얼굴을 비추어 보는 물건이든지, 아니면 군자(덕행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가 거울을 보고 그 맑은 것을 취하는 것[명경지수(明鏡止水)]으로 알고 있는데[거울이란 얼굴을 ~ 알고 있는데, : 거울은 반성의 기능을 갖거나 아니면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기품을 즐기는 기능을 갖는데, 거울의 기능을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나그네의 관점이 투영된 표현이다.], 지금 거사의 거울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고 때가 묻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항상 그 거울에 얼굴을 비춰 보고 있으니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 나그네의 물음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얼굴이 잘생기고 예쁜 사람은 맑고 아른아른한(잔 무늬나 흰 그림자 같은 것이 물결지어 자꾸 움직이는) 거울을 좋아하겠지만[얼굴이 ∼ 좋아하겠지만 : 일종의 '자기도취'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본질이다. 나르시시즘(narcissism)], 얼굴이 못생겨서 추한 사람은 오히려 맑은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세속적인 사람들은 사물의 외관을 중시한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장점은 드러나고 단점은 감추고자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 그러나 잘 생긴 사람은 적고 못 생긴 사람은 많습니다. 만일 한번 보기만 하면 반드시 깨뜨려 버리고야 말 것이니 먼지에 흐려진 그대로 두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잘생긴 사람은 ∼ 나을 것입니다 : 거사가 흐린 거울을 택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결점을 가진 사람이 더 많으므로 지나친 결벽과 청명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 결점을 이해해 주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이규보는 무신 정권하의 정치적 혼란기에 이러한 태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겉뿐이지 거울의 맑은 바탕은 속에 그냥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 그냥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사물의 외관은 각기 다른 모습이나, 그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 '거울'은 인간의 본성을 비유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도 거울처럼 본디 깨끗하고 맑은 것이라는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니 잘생기고 예쁜 사람을 만난 뒤에 닦고 갈아도 늦지 않습니다. 아! 옛날에 거울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함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는 것(인간의 결점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열린 마음으로 역설적 발상)인데, 그대는 어찌 이를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거사가 '흐린 거울'을 취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오히려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인데 지나치게 결벽한 태도만으로 일관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처세훈이 담겨 있는 표현. 인간의 결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열린 마음을 상징하는 진술이다. )하니, - 거사의 답변
나그네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상대방 즉 거사의 논리에 대한 수용)
거사 : 속인으로 불교의 법명을 가진 남자로 일종의 수필적 자아
군자 : 덕행이나 학식이 높은 사람.
아른아른한 : 잔 무늬나 흰 그림자 같은 것이 물결지어 자꾸 움직이는.
거울이란 얼굴을 ~ 알고 있는데, : 거울은 반성의 기능을 갖거나 아니면 명경지수(明鏡止水)같은 기품을 즐기는 기능을 갖는데, 거울의 기능을 고정적으로 생각하는 나그네의 관점이 투영된 표현이다.
얼굴이 ∼ 좋아하겠지만 : 일종의 '자기도취'현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간 행위의 본질이다.
거울을 싫어할 것입니다 : 세속적인 사람들은 사물의 외관을 중시한다는 의미를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잘생긴 사람은 ∼ 나을 것입니다 : 거사가 흐린 거울을 택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결점을 가진 사람이 더 많으므로 지나친 결벽과 청명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그 결점을 이해해 주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참고로, 이규보는 무신 정권하의 정치적 혼란기에 이러한 태도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먼지로 흐리게 된 것은 - 그냥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사물의 외관은 각기 다른 모습이나, 그 본질은 같은 것이라는 의미. '거울'은 인간의 본성을 비유한 것으로, 인간의 본성도 거울처럼 본디 깨끗하고 맑은 것이라는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 옛날에~ 어찌 이를 이상스럽게 생각합니까? : 거사가 '흐린 거울'을 취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오히려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인데 지나치게 결벽한 태도만으로 일관하기 어렵다는 뜻으로 처세훈이 담겨 있는 표현. 인간의 결점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열린 마음을 상징하는 진술이다.
주요 소재의 의미
거울 : 작중 화자(거사)가 반려로 삼고자 하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화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 또는 화자를 알아 인정해 주는 어떤 대상일 수도 있다. 또한 거울의 의미에서 너무 맑고 결백해서 상대방의 흠이나 결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 관계에 대한 비판 의식도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전체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거울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누구나 사람의 본성은 맑고 깨끗하지만, 세상의 먼지와 티끌이 끼어 그 본성이 흐려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나그네 : 세속적, 인습적 고정관념을 가진 인물
이해와 감상
이 수필에는 맑은 거울과 흐린 거울, 잘생긴 사람과 못생긴 사람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이규보는 잘생긴 사람이 맑은 거울을 보는 것을 군자(君子)와 성인(聖人)의 이상적인 세계에 비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는 못생긴 사람과 흐린 거울이 더 많다.
거사는 흐린 거울을 보는 것이 오히려 평범한 삶의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맑은 거울을 보다가 실망하여 깨뜨려 버리는 것보다는, 흐린 거울을 보는 편을 택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거사는 대단히 주체적이고 현실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스스로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는 애써 주장하고 실천하는 이규보의 호방하고 개성적인 세계관이 이 짧은 수필 속에 숨어 있으며, 항상 사물과 인생의 본질과 그 내면의 깊이를 깨달으며 살 것을 가르쳐 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울러 이 수필은 조그마한 사물을 빌려 역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를 통하여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와 교훈을 배우게 되며, 작자가 거울을 통해 현실의 여러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 일반적으로 맑은 것을 취하기보다는 오히려 흐린 것을 취하려 한다는 생각은 엉뚱해 보인다. 그러나 못난 사람이 낳은 세상에서, 못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맑은 거울은 용납되지 못함을 예로 들면서, '옛 사람들은 거울의 맑음을 본받기 위해 자신을 거울에 비추었지만, 나는 더러워진 모습을 보기 위해 거울을 본다.'고 말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처세훈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부수적으로 현실에 대한 풍자적 의미까지 띠고 있는 교훈적 수필로 삶의 심층을 새롭게 해석하는 작자의 원숙한 솜씨를 드러내 준다. '거울'이라는 사물을 취해 삶의 자세를 해설하는 이규보의 '경설'은 한문 문체의 한 양식으로서 세상사에 대해 보다 개성적인 시각이 존재함을 깨닫게 해준다.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처세훈(處世訓)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나, 이와 함께 현실에 대한 풍자적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먼저, 처세훈적 의미로 파악해 보면 거울의 본성은 깨끗하고 맑은 것이나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는 현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거울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인간에 있어서도 본성 자체가 흐린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거사가 흐린 거울을 택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오히려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상례인데 지나치게 결벽하고 청명한 태도만으로 일관하기 어려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절하지 않은 인간 간계와 허물까지도 수용하는 처세의 필요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또 이규보가 살던 시대가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어렵던 시대임에 비추어 볼 때, 흠과 티끌을 탓하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해서는 살아가는 지혜에 이를 수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규보가 자기 자신의 글 쓰는 행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흐린 세태에 결벽의 정신으로 대결하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풍자적 시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이해와 감상2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설(說). 작자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권21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먼지가 끼어 흐린 거울을 가지고 보는 거사(居士)에게 객이 그 까닭을 물었다.
거사는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꺼린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다. 만일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을 깨뜨릴 것이니, 차라리 먼지 끼어 희미한 것이 더 낫다. 먼지로 흐려진 것은 거울의 표면뿐이지 본래의 맑음이 흐려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잘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그때 맑게 닦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거울을 대하는 사람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대함은 그 희미한 것을 취하고자 함이다.”라고 답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설의 양식이 추구하는 바 참신한 시각과 설득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사물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배척되는가를 말하며,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의 작가 나름의 처세훈을 말해주고 있다. ≪참고문헌≫ 東國李相國集.(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경설'에서 '거울'의 의미
'경설'이란 수필은 작자의 주관적 처세관을 밝힌 것이다.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서술하지 않고 그것을 다시 객관화된 하나의 이야기 구조 속에 용해하여 일종의 우화적 기법으로 제시한 것이다. 따라서, 작품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비유적 의미와 상징성을 띠고 있어 그 해석이 어떤 사실의 기술처럼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고 상당한 애매성을 수반한다.
이 수필에서 거울은 '흐린 거울'과 '맑은 거울'로 구분하여 제시되는데, 그것은 각각 거울을 이용하는 사람의 '못 생긴 얼굴'과 '잘 생긴 얼굴'에 대응되어 있다. 그리고 작중 화자(작자 자신)는 '못생긴 얼굴'의 주인공으로 '흐린 거울'을 애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거울은 작자가 반려로 삼고자 하는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작자가 나아가고자 하는 세계, 또는 작자를 알아 인정해 주는 어떤 대상일 수도 있다. 너무 말고 결백해서 상대방의 흠이나 결함을 용서하지 못하는 인간 관계에 대한 비판도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전체 이야기의 맥락과 상관없이 거울은 인간의 본성과 영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누구나 사람의 본성은 맑고 깨끗하지만, 세상의 먼지와 티끌이 끼어 그 본성이 흐려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경설'에서의 '說'의 의미 '
'설(說)' 은 이치에 따라 사물을 해석하고, 시비를 밝히면서 자기 의견을 설명하는 형식의 한문체를 설이라고 한다. 한문 문체의 한 종류로 사물의 이치를 풀이하고(解),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펴는(述) 것이나, 논(論)보다는 약간 옅고 평이하며 상세하게 해설해 이해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주역〉의 '설괘(說卦)'에서 유래하였으며 다분히 비유에 의해 설득하는 방법을 쓰고 있으므로, 성화(說話)의 흥미를 지니기도 한다. 당(唐)나라 한유(韓愈)의 '사설(師說)', '잡설(雜說)' 등이 유명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이규보의 '경설(鏡說)', 이곡(李穀)의 '시사설(市肆說)' 등이 유명하다. 조선 시대의 '훈자오설' 등이 있다.
'경설(鏡設)'의 비유적 의미
이 작품에 나오는 거사(居士), 거울, 나그네는 각각 비유적 의미와 층위를 가진다. 거사는 작자 자신의 주관을 대리적으로 표상하는 일종의 수필적 자아이고, 거울은 인간과 세계의 본성과 관련된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즉 현상으로서의 세계를 상징한다. 또 나그네는 세속적, 인습적 고정 관념을 대표하는 자리에 서 있다.
'경설'의 주제 의식
이 작품은 일차적으로 처세훈(處世訓)적 의식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에 부수하여 현실에 대한 풍자적 의미까지도 내포하고 있다. 처세훈적 의미로 파악해 보면 거울의 본성은 깨끗하고 맑은 것이나 먼지가 끼면 흐려진다는 현상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거울의 본성이 그러하듯이 인간에 있어서도 본성 자태가 흐린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통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거사가 흐린 거울을 택한다는 의미는 세상에는 오히려 흠과 티끌이 있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 상례인데 지나치게 결벽하고 청명한 태도만으로 일관하기 어려움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박절하지 않은 인간 관계와 허물까지도 수용하는 처세의 필요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하겠다. 이는 또 이규보가 살던 시대가 내우외환으로 어렵던 시대임에 비추어 볼 때 흠과 티끌을 탓하여 서로가 서로를 용납하지 못해서는 살아가는 지혜에 이를 수 없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규보가 자기 자신의 글 쓰는 행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 것으로 흐린 세태에 결벽의 정신으로 대결하면 파국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풍자적 시각으로 드러낸 것이다.
수필로서의 '경설'의 특징
소설의 서술자와 작가, 시의 시적 자아와 시인은 원칙적으로 도일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나 수필의 자아는 수필을 쓰는 사람 바로 그 자신이다. 수필의 작가는 자신의 목소리로 독자와 대화하며 자신의 인격, 인생관, 세계관 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경설' 에서는 작자가 자신의 목소리로 독자와 대화하고 있지 않다. '거사'라는 허구적 대리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이 '거사'의 말을 작가의 말로 이해해야 한다.
나르시시즘(narcissism)
자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자기애(自己愛)로 성도착(性倒錯)의 하나로 자기 육체에서 성적 흥분을 느끼는 현상을 말한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반해 물에 빠져 죽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나르키소스와 연관해 독일의 정신과 의사 P. 네케가 만든 용어이다. S.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정신분석 개념으로 확립하여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 향해진 상태, 즉 자기 자신이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상태로 규정했다. 그는 또 나르시시즘을 나와 남을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에 리비도가 자기 자신에게만 쏠려 있는 1차적 나르시시즘과 유아기가 지나면서 리비도의 대상이 나 아닌 남에게로 향하지만 어떤 문제에 부딪혀 남을 사랑할 수 없게 됨으로써 다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상태로 돌아오는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했다. 이 용어는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병적 나르시시즘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나르키소스(Narkissos)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강의 신 케피소스와 요정 레이리오페의 아들인 미소년으로 그의 어머니는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의 모습만 보지 않는다면 오래 살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요정 에코 또는 애인 아메이니아스의 사랑을 거절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사고 만다. 결국 샘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사랑에 빠져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망하다가 죽는다. 그가 죽은 자리에 꽃이 피었는데, 그의 이름을 따서 나르키소스(수선화)라고 불렀다고 한다. 다른 설로는 나르키소스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사랑하는 쌍둥이 여동생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위로를 얻으려고 그 샘물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다고도 한다.
이 이야기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는 것은 불길한 일이며,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고대 그리스 미신에서 유래한 듯하다. 정신의학, 특히 정신분석학에서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는 환자가 지나치게 자신의 신체에 관심을 가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거울
빛의 반사를 이용하여 물체의 형상을 비추어보는 물건. 평면유리 한 면에 수은을 발라 만든다. 거울〔鏡〕의 발명은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초의 거울은 석경(石鏡)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거울을 ‘색경’(석경의 음전)이라고 부를 만큼 석경은 오랫동안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거울은 서기전 6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경(銅鏡)이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삼국시대·고려시대 및 조선시대까지도 사용되었다. 때로는 은으로 만든 은경이 나타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둥근 모양으로 한가운데 꼭지가 있고, 한쪽 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드문 예로, 양면 거울이 있고, 지름이 한 자 가량인 대형이 있는 반면에 한 치에 지나지 않는 휴대용도 있다. 큰 거울은 경가(鏡架)에 걸어놓고 사용하였는데 국립중앙박물관에 진열된 고려시대의 경가를 보면 앉아서 사용하기에 편리하도록 45°쯤 기울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서서 보기에 편한 등신대의 경가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초기의 거울은 모두가 지금과 같이 선명하게 비추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때가 묻어도 잘 닦아지지 않는 결점이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관아에 거울제조기술자인 경장(鏡匠)을 두어 거울을 만들게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시전에서 거울을 판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나라에 현재와 같은 거울이 제작된 것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공장이 설립되어 유리가 양산됨으로써 얼굴을 비추는 면경(面鏡)이 널리 보급되었으며, 경대 및 체경도 아울러 대중화하였다.
〔거울의 용도〕
한편, 거울의 용도는 사람의 용모를 비추어보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그 사용례가 매우 다양하였다. 옛날 무당들이 사용하던 세 가지 무구(巫具)는 칼·방울·거울로, 무당은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집을 나간 사람이나 잃어버린 물건의 행방을 점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용례를 근거로 고대의 거울이 무당의 장식품이자 주구(呪具)였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창근이 가지고 온 고경(古鏡)에 새겨진 글자를 해석하여 용기를 얻어 고려 건국을 결심하였고, 조선 태조 이성계는 거울이 깨지는 꿈을 꾸고서 길몽이라는 해석에 자신감을 얻어 조선을 건국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한, 경상북도 포항시 송라면 내연산 기슭에 위치한 보경사(寶鏡寺)는 신라 선덕여왕 때에 창건된 사찰인데, 창건 당시에 8면경을 내연산 아래 용당호에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거울이 신기(神器)이었거나 통치자의 상징물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옛날에 만들어진 석경·은경·동경·백동경을 보면 대부분 한쪽 면만 비추어보도록 되어 있으며, 다른 면에는 여러 가지 무늬나 글씨가 조각되어 있다. 인물·누각·신선·산·나무·꽃·새·물고기 등의 조각이 있는데, 이는 거울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것이라기보다 신기로서 또는 통치자의 상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신라의 진평왕 때 설녀는 아버지의 병역을 대신하여 전장에 나간 가실과 거울을 쪼개어 반쪽씩 가진 다음, 모양이 달라져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때, 거울을 맞추어봄으로써 가실임을 확인한 뒤 혼인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한편, 이몽룡은 춘향과 이별할 때 금낭 속의 명경을 꺼내주며, “대장부의 평생 마음 명경빛과 같은지라, 몇 해가 지나도록 변하지 아니할 것이니, 깊이 간직하고 내 생각이 날제마다 날 본 듯이 열어보라.”고 말하고 있다. 이밖에, 부부가 이혼하거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질 경우 거울이 깨졌다(破鏡)고 말하는 관습이 있다.
이상과 같이 거울의 다양한 사용 사례는 거울이 신기 혹은 주구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고대에는 거울의 제조가 쉽지 않고 고가이었으므로 고귀한 신분의 유물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생겨난 예일 것이다. 또한, 이 때문에 우리 나라에 거울과 관련된 여러 속신이 생겨났다.
즉, ‘거울을 깨뜨리면 집안이 화를 당한다.’, ‘깨진 거울을 보면 얼굴에 흠이 생긴다.’, ‘깨진 거울을 보면 재수없다.’, ‘정월 초하루 아침에 거울을 깨뜨리면 일년 내내 우환이 떠나지 않는다.’, ‘꿈에 다른 사람을 거울에 비추면 흉하다.’, ‘꿈에 거울을 받으면 아들 낳는다.’, ‘꿈에 거울을 들어서 서로 비추면 먼 곳에서 기별을 듣는다.’ 등이 있다.
‘밤에 거울 보면 소박맞는다.’, ‘새벽에 거울 보면 해롭다.’, ‘산모는 해산 후 아흐레 동안 거울을 보지 않는다.’, ‘어린애에게 거울을 보이면 해롭다.’, ‘음식을 먹으면서 거울을 보지 않는다.’, ‘밤에 거울 보면 쉬 늙는다.’하였고, 환자의 방에 거울을 걸지 않는데 그 이유는 영혼이 달아나 죽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조선시대 1월 7일이 되면 왕이 동인승(銅人勝 : 둥글고 자루가 달렸으며 뒷면에 신선을 새김.)을 규장각 벼슬아치들에게 하사하였다고 하며, 여염에서는 섣달그믐날 부엌의 조왕신이 일러주는 방향을 따라서 거울을 가지고 문밖으로 나가 거리의 첫번 말을 듣고 새해의 길흉을 점쳤다고 한다.
한편, 거울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긴요한 생활용구이었다. 군자의 맑은 마음을 깨끗한 거울에 견준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규합총서≫에 의하면 여러 가지 용도의 거울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천리경(千里鏡)·임화경(臨怜鏡 : 한쪽 면에 무늬를 조각한 거울)·서광경(曙光鏡 : 밤에 등잔을 비추면 그 빛이 몇 리 밖을 비추며, 겨울에 그 빛을 쬐면 온몸이 따뜻하기가 태양을 낀 듯하다 하며, 여섯 자짜리 대형도 있었다고 함.)·현미경·취화경(取火鏡 : 태양을 향하여 불을 얻음.)·취수경(取水鏡 : 달을 향하여 물을 얻음.)·다물경(多物鏡 : 온갖 것이 많아 보임.)이 소개되어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閨閤叢書, 東國歲時記, 멋 5,000년(全完吉, 敎文社, 1980), 韓國化粧文化史(全完吉, 悅話堂, 1987).
이규보의 수필 세계
이규보는 한시의 대가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한편 '돌과의 문답', '슬견설', '게으름뱅이의 역설' 등과 같은 많은 수필을 발표하여 수필가로서도 문학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한문으로 씌어 있지만 그의 수필은 격조가 높고 심오한 철학과 인생의 경륜을 담고 있다. 특히, 이규보 자신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과 뛰어난 문학적 통찰력이 수필 작품에 형상화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그의 수필에는 사물과 현상에 접근하는 개성적인 방식이 돋보인다. 그의 한문 수필들은 대체로 길이는 짧지만, 그 속에는 날카로운 통찰력이 있으며, 훌륭한 비유적 표현이 구사되어 있다.
이규보(李奎報)
1168(의종 22)∼1241(고종 28). 고려 후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황려(黃驪 : 지금의 경기도 여주). 초명은 인저(仁泗),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만년에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해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윤수(允綏)의 아들이다.
9세 때부터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재가 뛰어났다. 14세 때 사학(私學)의 하나인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 : 여름철에 절을 빌려 행한 과거시험준비를 위한 학습)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사로부터 기재(奇才)라 불렸다. 이때 그는 장차 문한직(文翰職)에 벼슬해서 문명을 날리기를 바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은 과시의 글(科擧之文) 등을 멸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사마시(司馬試)에 연속 낙방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16세부터 4, 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과 기맥이 상통해 그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들 가운데서 오세재(吳世才)를 가장 존경해 그 인간성에 깊은 공감과 동정을 느끼곤 하였다.
1189년(명종 19)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사마시에 네 번째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이듬해 지공거(知貢擧) 임유(任濡), 동지공거(同知貢擧) 이지명(李知命)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서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관직을 받지 못하자, 25세 때 개경의 천마산(天磨山)에 들어가 시문을 지으며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 세상의 번거로움이 없는 허무자연의 樂土)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였다.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 시기에 지은 것이었다. 26세(1193 : 명종 23)에 개경에 돌아와 빈궁에 몹시 시달리면서 수년 동안의 무관자(無官者)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한편 왕정(王廷)에서의 부패와 무능, 관리들의 방탕함과 관기의 문란, 민의 피폐, 그리고 10여 년 동안의 남부지방의 농민폭동 등은 그의 사회·국가의식을 크게 촉발시켰다. 이때 지은 것이 바로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 이었다. 또한 혜문(惠文)·총수좌 (聰首座)·전이지(全履之)·박환고(朴還古)·윤세유(尹世儒) 등과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였다.
1197년(명종 27)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의 요직자들에게 관직을 구하는 편지를 썼다. 거기에서는 그 동안 진출이 막혔던 문사들이 적지 않게 등용된 반면, 자신은 어릴 때부터 문학에 조예를 쌓아왔음에도 30세까지 불우하게 있음을 통탄하고 일개 지방관리로라도 취관시켜줄 것을 진정하였다. 이 갈망은 32세 때 최충헌의 초청시회(招請詩會)에서 그를 국가적인 대공로자로서 칭송하는 시를 짓고 나서 비로소 이루어졌다.
이에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에 부임하였다. 그러나 봉록 액수가 적으며 행정잡무가 번거롭고, 상관·부하는 태만하였으며 동료들의 중상을 받는 등 그 생활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결국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면직되었다. 처음에는 자조(自嘲)를 하다가 다음은 체념하고 결국 타율적으로 규제받는 것을 숙명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1202년(신종 5) 동경(東京 : 경주)과 청도 운문산(雲門山) 일대의 농민폭동진압군의 수제원(修製員)으로 자원종군하였다. 현지에서 각종 재초제문(齋醮祭文)과 격문(檄文), 그리고 상관에의 건의문 등을 썼다. 1년 3개월 만에 귀경했을 때, 상(賞)이 내려질 것을 기대했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문필의 기능과 중요성에 대해 깊이 회의하였다.
1207년(희종 3) 이인로(李仁老)·이공로(李公老)·이윤보(李允甫)·김양경(金良鏡)·김군수(金君綬) 등과 겨루었던 〈모정기 茅亭記〉가 최충헌을 만족시켜 직한림(直翰林)에 권보(權補)되었다. 그리하여 문필을 통한 양명과 관위 상의 현달이 함께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다시 자신을 갖기 시작하였다.
1215년(고종 2) 드디어 우정언(종8품) 지제고(知制誥)로서 참관(參官)이 되었다. 이때부터 출세에 있어서 동료 문사들과 보조를 같이 하면서, 쾌적한 문관생활을 만끽하였다. 금의(琴儀)를 두수(頭首)로 하여 유승단(兪升旦)·이인로·진화(陳捷)·유충기(劉食基)·민광균(閔光鈞), 그리고 김양경 등과 문풍(文風)의 성황을 구가하였다.
1217년(고종 4) 2월 우사간이 되었으나, 가을에 최충헌의 한 논단(論壇)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하는 부하의 무고로 받아 정직당하고, 3개월 뒤에는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 이듬해 집무상 과오를 범한 것으로 단정, 좌사간마저 면직되었다.
이러한 돌변사태는 그때까지 전통적인 왕조적 규범에 의해 직무를 수행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태도를 관리의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그에게 큰 충격과 교훈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관념이 최충헌의 권력 앞에서 무의미한 것이 되고 파탄되어버리자 또다시 자신의 사고(思考)와 태도를 바꾸어 보신(保身)에 특별히 마음을 두게 되었다.
1219년(고종 6) 최이(崔怡)의 각별한 후견 덕분으로 중벌은 면하게 되어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로 부임하였다. 만 1년간의 재임 중, 박봉인데다 직장환경은 열악하고, 민의 생활모습은 추하고 참혹해 불쾌감을 일으키는 등 이곳으로부터 일각이라도 빨리 달아나고 싶어하였다. 중앙에서의 풍족하고 쾌적하던 문관생활이 그립기만 하였다. 그는 경륜가(經綸家)가 못됨을 자처한 셈이다.
다음해 최충헌이 죽자 최이에 의해 귀경하게 되면서, 최이에의 절대적 공순관계(絶對的恭順關係)에 들어서게 되었다. 일체의 주견 없이 다만 문필기예의 소유자로서 최씨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충실히 집행하는 것만이 택할 길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뒤 만 10년간은 최씨 정권의 흥륭기이기도 하거니와 그가 고관으로서 확고한 기반을 다진 기간이었다.
보문각대제지제고(寶文閣待制知制誥)·태복소경(太僕少卿)·장작감(將作監)·한림학사시강학사(翰林學士侍講學士)·국자좨주(國子祭酒) 등을 거치면서, 1228년(고종 15) 중산대부 판위위사(中散大夫判衛尉事)에 이르렀고 동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1230년 한 사건에 휘말려 문죄되어 위도(蝟島)에 유적되었다.
그는 이때까지 권력에 심신을 다 맡겨왔던 터였는데 자기를 배제하는 엄연한 별개의 힘으로 존재하는 사실에 새롭게 놀랐다. 보신을 잘못하는 자신이 부덕한 사람으로 통감되었다.
8개월 만에 위도에서 풀려나와 이 해 9월부터 산관(散官)으로 있으면서 몽고에 대한 국서의 작성을 전담하였다. 국서는 최씨의 정권보전책으로 강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고, 그는 이 정책에 적극 참여한 셈이다.
65세 때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고종 24) 수태보 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郎平章事)·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그는 문관으로서의 전생애가 훌륭하게 완결되었음을 자인하고 승리감에 잠긴다. 이로써 자손들은 그의 음덕으로 장차 사회적 위치가 높아질 것이며, 관운에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71세 이후 하천단(河千旦)·이수(李需) 및 승통(僧統) 수기(守其) 등과 사귀었고, 최씨의 문객인 김창(金敞)·이인식(李仁植)·박훤 (朴暄)과도 교제가 잦았다. 만년에 몸의 허약함과 반록(半祿)의 두절 등에 불편을 느꼈으나, 이 점은 최이의 특별한 가호를 받았다. 또한, 몽고의 침략에 대해 괴로워했으나 결국 불평 이상의 것이 못되었다.
병으로 누워있는 그에게 감격적이었던 것은 최이에 의해 그의 문집이 발간되었던 일이었다. 문필로서 양명하고 관리로서 현달하고 그의 문집이 후세에 오래도록 전해질 수 있게 되었으니 그의 생애의 기본목적은 달성이 된 셈이었다. 최이에게 바쳐진 그의 시들이 최이의 은의에 대해 충심에서 감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이권에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문한(文翰)의 관직자이며, 양심적이나 소심한 사람이었다. 학식은 풍부하였으나 작품들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타낸 자기표현이 아니라 그때 그때 의식에 떠오르는 바가 그대로 표출되었다. 그는 본질상 입신출세주의자이며 보신주의자였다. 그렇게 된 근본이유는 가문을 올려세우고, 고유의 문명을 크게 떨치고자 하는 명예심에서였다. 그는 최씨정권하 일반 문한직 관리층의 한 전형이었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시호는 문순(文順)이다.
≪참고문헌≫ 西河集, 破閑集, 補閑集, 東國李相國集, 東文選, 錦南集, 梅湖集, 英雄敍事詩-東明王-(張德順, 人文科學 5, 1960), 高麗中期의 民族敍事詩(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7, 1963), 李奎報의 東明王篇詩(朴菖熙, 歷史敎育 11·12 合輯, 1969).(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일즉사(夏日卽事)
고려 후기에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한시. 초여름의 정경을 노래한 작품이다. 칠언절구 2수로, ≪동국이상국집≫ 권2에 수록되어 있다.
두 수 가운데 특히 둘째 수가 유명하여, ≪동문선≫ 권20에는 ‘하일(夏日)’이라는 제목으로 둘째 수만 실려 있다.
“홑적삼에 삿자리 깔고 바람드는 마루에 누웠다가/꾀꼬리 두세 소리에 잠을 깨었네/빽빽한 잎이 꽃을 가리어 봄 뒤에도 남았고/엷은 구름에 햇살이 새어나와 빗속에도 밝구려
(輕衫小孀臥風邏 夢斷啼鶯三兩聲 密葉返花春後在 薄雲漏日雨中明).
(경삼소상와풍나 몽단제앵삼량성 밀엽반화춘후재 박운누일우중명).”
이규보의 문장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거니와, 이규보 자신도 그의 글 〈논시중미지약언 論詩中微旨略言〉에서 의기론(意氣論)을 개진하고 시의 함축미를 강조하고 있지만, 이 〈하일즉사〉는 신경(新警)과 기발(奇拔)을 좋아하는 이규보 시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서거정(徐居正)이 ≪동인시화 東人詩話≫에서 이 작품에 대하여 “청신환묘하고, 한가하고 아득한 맛이 있다(淸新幻妙, 閑遠有味).”고 하였고, 허균(許筠)은 ≪성수시화 惺馬詩話≫에서 “읽으면 마음이 상쾌해진다(讀之爽然).”고 평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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