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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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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에 대하여

갓은 농부가 비를 피하는 도구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사람들은 대소 귀천을 막론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 때면 다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비 오지 않을 때도 쓰니, 이는 매우 무의미한 일이다. 어떤 사람은, '우리 나라 사람이 싸우기를 좋아하므로, 기자(箕子)가 우리 나라에 와서 큰 갓과 긴 소매의 옷을 지어 입혀 백성으로 하여금 몸을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싸움을 금지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믿을 수 없는 허황한 말이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옛 고깔의 남겨진 모양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그렇지 않다. 고깔은 꽈리와 같이 생겼으므로 꽈리를 일명 피변초(皮弁草)라고 한다. 지금의 갓은 위는 평평하고 아래 갓양태는 넓은데 어찌 고깔이라 보겠는가? 옛날에 풀로 갓을 만들어 비를 피했던 것일 따름이다.

 

요즈음 갓의 제도는 점점 높고 넓어져, 쓰기에도 아치(雅致)가 없고 균형이 안 맞아 볼품이 없다. 속담에 '갓이 너무 크면 항우(項羽)라도 쭈그러들고, 갓이 파손되면 학자도 당황한다.'고 한다.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일체 금하고 별도로 관건(冠巾)을 만들어 반포하되 등급의 차별을 정해야 한다. 다만 소립(小笠)을 제작하여 말 타는 자와 보행자가 들길을 걸을 때에 머리에 쓰고 비를 피하거나 햇볕을 가리는 도구로 하는 것은 괜찮다. 그 제도는, 모자는 이마를 덮을 수 있으면 되고 꼭대기는 지금의 갓같이 평평하지 않아도 좋으며, 만약 꺾을 수 있으면 꺾어서 전립(氈笠)처럼 뾰족하지 않은 것이 좋다. 다만 갓모의 높이는 조금 낮추고 갓양태는 날카롭지 않게 해야 한다. 베 2자 5푼이면 되고, 갓끈은 넓되 길게 할 필요는 없다. 평양 무열사(武烈祠)의 이여백(李如栢)의 화상을 보면 알 것이니, 이는 그 본보기이다.

갓의 폐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나룻배가 바람을 만나면 배가 기우뚱거리는데, 이 때 조그마한 배안에서 급히 일어나면 갓양태의 끝이 남의 이마를 찌른다. 좁은 상에서 함께 밥을 먹을 때에는 양태 끝이 남의 눈을 다치며,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는 난장이가 갓 쓴 것처럼 민망하다. 이는 사소한 일이지만 들에 가다가 풍우를 만나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고 지투(紙套)는 경직하여, 바람이 그 사이로 들어오면 펄럭이는 소리가 벽력 같은데, 위로 갓이 말려 멋대로 펄럭인다. 양쪽 갓끈을 단단히 동여매면, 갓끈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턱과 귀가 모두 당겨 올라가고 상투와 수염이 빠지려 한다.

유의(油衣)는 치마같이 하여 머리에 써서 손으로 잡는 것인데, 바야흐로 비바람이 불어칠 때는 갓이 펄럭여 일정하지 않으므로 불가불 끈을 풀어 손으로 갓의 좌우를 부축해야 한다. 그러나 빗물이 넓은 소매로 들어오므로 무거워서 들 수가 없다. 또, 말이 자빠지려 할 경우 어떻게 손으로 고삐를 잡겠는가? 이렇게 되면 위의를 잃은 것을 부끄러워할 겨를은커녕 죽고 사는 것이 시각에 달리게 된다.

일찍이 여진(女眞) 사람이 말 타는 것을 보았는데, 급한 비를 만나면 얼른 소매와 옷깃이 있는 유의를 입고 또 폭건(幅巾)같이 부드러운 모자를 쓰고 채찍질하여 달렸다. 그러니 어찌 쾌활하지 않겠는가? 또, 지금의 갓은 제작이 허술하여 갓모자와 갓양태의 사이에 아교가 풀어지면 서로 빠져 버린다. 역관들이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요동 들판을 지나다가 비를 만나 갓양태는 파손되어 달아나고 다만 모자만 쓰고 간다. 중국 사람이야 우리 나라 풍속에 그런 관이 있을 것이라 여기고 보통으로 보나, 같이 간 사람은 다 조소한다. 그렇다고 어디서 갓을 사겠는가? 매양 들판 가운데의 행인들을 보니, 비를 만나도 갓 위에 씌울 것이 없는 사람들은 갓양태가 빠져 나가고 부서질까 염려하여 풀을 뜯어 갓양태 아래에 태를 만들어 가리며, 또는 갓을 벗어 겨드랑이에 끼고 한 손으로는 상투를 쥐고 허겁지겁 달린다. 대개 갓 하나의 값이 3, 4백 냥이 되므로 갓을 생명처럼 보호하여, 그 궁색하고 구차함이 한결같이 극에 달했다.

그리고 초립의 생긴 모양도 지극히 괴이하다. 소년은 물론이고, 아전들이 부모의 상중에 벼슬에 나아가서도 갓을 착용한다. 길흉에 구별이 없으니 이 무슨 예절인가? 또, 빽빽하여 통풍이 안 되므로 바람이 불면 초립끈이 턱을 파고들어 할 수 없이 시원히 초립끈을 풀면 바람에 날려가 마치 종이연 모양으로 멀리 날아올라 간 곳을 모르게 된다. 나이가 좀 든 사람이 초립을 어깨 뒤로 드리우고 다니는 것은 더욱 가증스럽다. 또, 만들기도 어렵고 값도 비싸니 금하게 하는 것이 좋다.

대저 나태한 풍습과 오만한 태도가 모두 갓에서 생기니, 어찌 옛 습속이라 하여 따르고 금하지 않을 수 없겠는가?

요점 정리

연대 : 이조

작자 : 이덕무

성격 : 설명적, 비판적, 예시적

주제 : 갓의 폐단에 대한 비판

내용 연구

아치 : 아담한 풍치

유의 : 비를 막기 위하여 종이나 포목으로 옷을 지어 기름에 절음

역관 : 통역을 맡아 보는 관리

이해와 감상

 

필자는 갓의 폐단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논하고 있는 글로 갓이 지니고 있는 폐단이 여러 가지인데 이러한 폐단이 나타나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갓의 형태로 보았다. 즉 갓은 모두 갓모자가 좁아서 머리를 덮지 못하고 갓양태가 넓어 바람을 많이 타기 때문에 매우 위태로운 모자로 보고 있으며, 원래는 실용적으로 농부가 비를 피하기 위해 만든 것인데 후대에 오면서 권위적인 형태가 되어 갓모자는 좁고 갓양태는 넓게 된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바람을 많이 타게 되어 비실용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글이다.

심화 자료

이덕무 李德懋 [1741~1793]

본관 전주(全州). 자 무관(懋官). 호 형암(炯庵) ·아정(雅亭) ·청장관(靑莊館). 정종(定宗) 별자(別子) 무림군(茂林君)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성호(聖浩)의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얼(庶孼) 출신으로 빈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람강기(博覽强記)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이름을 떨쳤다. 홍대용(洪大容) ·박지원(朴趾源) ·성대중(成大中) 등과 사귀고 박제가(朴齊家) ·유득공(柳得恭) ·이서구(李書九) 등과 함께 《건연집(巾衍集)》이라는 시집을 냈으며 이것이 청나라에까지 전해져서 이른바 사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1778년(정조 2) 중국 여행 기회를 얻어 청나라의 문사들과 교류하고 돌아왔으며, 1779년에 정조(正祖)가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여기에 서얼 출신의 우수한 학자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등용할 때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徐理修) 등과 함께 수위(首位)로 뽑혔다.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규장각에서 《국조보감(國朝寶鑑)》 《대전통편(大典通編)》 《무예도보(武藝圖譜)》 《규장전운(奎章全韻)》 《송사전(宋史筌)》 등 여러 서적의 편찬 교감에 참여하였으며, 많은 시편(詩篇)도 남겼다. 서울 지도인 <성시전도(城市全圖)>를 보고 읊은 백운시(百韻詩)가 정조로부터 ‘아(雅)’라는 평가를 받아 호를 아정(雅亭)이라 새로이 칭하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검서를 겸한 채 외직에도 나가서 사근도찰방(沙斤道察訪),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 등을 거쳤으며 1791년 사옹원주부(司饔院主簿)가 되었다가 《홍문관지(弘文館志)》를 교감한 공로로 적성현감(積城縣監)에 제수되었다.

1793년 병들어 돌아가자, 3년 뒤 그의 재주를 아끼던 정조가 내탕전(內帑錢) 오백 냥을 하사하여 문집 《아정유고(雅亭遺稿)》 8권 4책을 간행하게 하였다. 문자학(文字學)인 소학(小學), 박물학(博物學)인 명물(名物)에 정통하고, 전장(典章) ·풍토(風土) ·금석(金石) ·서화(書畵)에 두루 통달하여, 박학(博學)적 학풍으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북학을 고창하지는 않았으나 명(明)과 청(淸)나라의 학문을 깊이 이해하고 고염무(顧炎武) 이래 청조 고증학의 성과를 수용하여 실질적으로는 북학을 함으로써 후배들의 청조 고증학 연구의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저서로는 이만운(李萬運)의 책을 보완한 역사서 《기년아람(紀年兒覽)》, 사(士)의 윤리와 행실을 밝힌 《사소절(士小節)》, 고금의 시화(詩話)를 수록한 《청비록(淸脾錄)》, 명나라 유민(遺民)의 인물지인 《뇌뢰낙락서(磊磊落落書)》 등 십여 종이 있고, 이들은 《아정유고》 등 문집과 함께 아들 광규(光葵)에 의해 망라되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71권 33책으로 편찬되었다. (자료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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