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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회요(遣懷謠)​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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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회요(遣懷謠)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밧긔 여남은 일이야 분별(分別)할 줄 이시랴

 

내 일 망녕된 줄 내라 하여 모랄 손가

이 마음 어리기도 님 위한 탓이로세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추성(秋城) 진호루(鎭胡樓) 밧긔 울어 예는 저 시내야

무음 호리라 주야(晝夜)에 흐르는다

님 향한 내 뜻을 조차 그칠 뉘를 모르나다

 

뫼흔 길고 길고 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 울고 가느니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부터 알아마는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不孝)인가 여기노라.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로다.

그 밖의 다른 일이야 생각하거나 근심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의 일이 잘못된 것인 줄 나라고 하여 모르겠는가?

이 마음 어리석은 것도 모두가 임(임금)을 위한 탓이로구나.

아무개도 아무리 헐뜯더라도 임께서 헤아려 주십시오.

 

경원성 진호루 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냇물아!

무엇하러 밤낮으로 그칠 줄 모르고 흐르는가?

임 향한 내 뜻을 따라 그칠 줄을 모르는가?

 

산은 끝없이 길게길게 이어져 있고, 물은 멀리 굽이굽이 이어져 있구나.

부모님 그리운 뜻은 많기도 많다.

어디서 처량한 외기러기는 울어울어 나의 마음을 구슬프게 하는가?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았지마는

임금 향한 뜻은 하늘이 만드셨으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것이 불효인가 하노라.

요점 정리

지은이 : 윤선도(尹善道)

갈래 : 연시조

성격 : 우국가, (견회 - 마음을 달램의 의미로 견회요는 시름을 달랜다는 노래)

표현 : 반복법

배경 : 조선 후기. 작자가 30세 때 권신 이이첨(李爾瞻)의 횡포를 상소하였다가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임

특징 : 시어(詩語)의 반복을 통해 의미와 운율을 동시에 강조했고, 작가의 강직한 삶의 태도가 잘 드러남.

제재 : 유배지에서의 정회(情懷)

주제 : 연군(戀君 : 임금을 그리워함), 자연과 더불어 수양하는 은둔생활, 억울한 심정의 고백, 임금에의 그리움, 사친(思親) 및 충효(忠孝) 등이 각 수의 주제

구성 : 연시조 5수

제 1 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신념에 맞도록 살아가겠다는 강직한 삶.

제 2 수는 자신의 행위가 임금을 위한 일이었으며, 임금의 현명한 판단을 갈구한다는 결백한 마음의 호소

제 3 수는 작자가 귀양 와 있는 곳의 시냇물을 작자의 마음에 비유하고 임금을 향한 변함없는 충성의 마음

제 4 수는 산·물·외기러기에 작자의 모습을 투영하여 어버이를 그리는 정을 나타냄.

제 5 수는 어버이를 그리는 효와 임금을 섬기는 충은 일치한다는 깨달음

출전 : 고산 유고(孤山遺稿)

내용 연구

 

슬프나 즐거오나 옳다 하나 외다 하나(그르다고 하나)

내 몸의 해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자신이 해야 할 일만 열심히 할 뿐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내 몸의 해올 일'은 나라와 임금을 위한 우국충정을 뜻한다.)

그 밧긔 여남은(다른. 남은) 일이야 분별(分別)할 줄 이시랴

 

내 일 망녕된 줄 내라 하여(나라고 해서) 모랄 손가(내가 한 일들이 분수에 넘치는 것임을 나라고 모르겠는가마는)

이 마음 어리기도(어리석은 것도) 님 위한 탓이로세(이를 감행한 어리석음은 임금을 위한 것이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내 일'은 권신 이이첨의 횡포를 고발하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아뫼 아무리 일러도 임이 혜여 보소서

 

추성(秋城 : 함경북도 경원(慶源)의 별칭) 진호루(鎭胡樓)[시적 화자가 슬픈 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는 공간] 밧긔(밖에) 울어 예는(흘러가는) 저 시내[감정이입의 대상으로 임금에 대한 쉼없는 충성심을 다짐]야

무음 호리라(무엇을 하려고) 주야(晝夜)에 흐르는다

님 향한 내 뜻을 조차(임금을 향한 내 마음을 좇아 / 따라서) 그칠 뉘(때)를 모르나다(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흐르는 시냇물이, 임금을 향한 자신의 충정을 본받아 그칠 줄을 모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임금을 걱정하고 연모하는 화자의 마음이 변함 없이 영원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산)흔 길고 길고 물('산'과 '물'은 어버이와 시적 화자 사이에 놓인 장애물)은 멀고 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 많고 하고 하고(초장과 중장은 먼 함경도 땅으로 귀양가는 화자의 심정이 나타난 부분이다. 초장에서는 대구법과 반복법으로 그 길의 고달픈 여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중장에서는 반복법으로써 부모를 걱정하는 효심을 표현한다.)

어디서 외기러기(감정이입 대상)는 울고 울고 가느니(작가는 부모에게 효를 다하기를 원하지만, 그는 부모의 곁을 떠나 먼 북방으로 귀양을 가는 처지에 놓여 있다. 이와 같은 현실로 인해 효를 실천할 수 없게 된 화자가 느끼는 고독감과 서글픔을 한 마리 기러기의 쓸쓸한 모습에 이입하여 표현한 부분이다.)

 

어버이 그릴 줄을 처엄부터 알아마는

님군 향한 뜻도 하날이 삼겨시니(만드셨으니)(초장과 중장은 직언을 하다가 오히려 모함을 당해 귀양을 가게 되면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줄을 어찌 몰랐을까마는, 임금을 걱정하는 마음은 하늘이 만든 것이니, 직언을 하고자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자신의 행동이 충정에서 나온 것임을 말하는 표현이다.)

진실로 님군을 잊으면 긔 불효(不孝)인가 여기노라.(부모 걱정을 안 한 것이 불효가 아니라 임금의 은혜를 잊고 편안히 살고자 하는 것이 더 큰 불효라는 표현이다. 충을 위하여 효를 희생한 것이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표현이다.)

 

이해와 감상

 

고산(孤山)은 치열한 당쟁으로 평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다. 그의 시조 작품은 정철의 가사와 함께 조선 시가 문학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문집으로 '고산 유고(孤山遺稿)'가 있다.

'견회요' 5수 중 첫째 연은 특히 고산의 가치관을 여실히 보여 주는 부분으로 평가되고 있다. 남이야 어떻게 말하든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강직한 성격,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정의감, 이것은 올바르고 굳센 가치관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내가 할 일만 하면 그뿐, 뒤에 귀양을 가건 죽음을 당하건 알 바 없다는 고산의 도도하고 강직한 태도는 혼탁(混濁)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하겠다.

한편, 넷째 연에서는 고산의 인간적인 면을 엿볼 수 있는데, 유배지에서 고향에 두고 온 어버이를 그리는 정이 애절하게 나타나 있다.

이해와 감상1

 

1616년(광해군 8)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시조. 5수의 연시조로 ≪고산유고≫에 전한다. 당시의 권신이던 이이첨(李爾瞻) 등의 죄를 규탄하는 병진소(丙辰疏)를 올렸다가 도리어 함경도 경원(慶源)으로 유배되어 30세 때에 지은 작품이다.

제1수는 작자에게 돌아오는 대가가 슬프거나 즐겁거나, 남들의 말이 옳다고 하거나 그르다고 하거나간에 자신의 신념에 맞도록 자신의 일을 갈고 닦을 뿐이지 그밖의 결과 여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불타는 내용이다.

제2수는 병진소의 결과로 유배오게 되었으니 임금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그리하여 자신의 행위를 망녕되다고 한다.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일을 하였으니 자기 마음을 어리석다고 일단 수긍한다. 그러나 그것은 임금을 위한 일이며,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임금이 현명한 판단을 내려달라고 하는 내용이다.

제3수는 작자가 귀양 와 있는 추성(楸城) 진호루(鎭胡樓) 밖에 흐르는 시냇물을 제재로 한 것이다. 이 시냇물은 울면서 흐르며, 게다가 밤낮으로 그치지도 않는다. 이처럼 끝없이 체읍(涕泣 :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욺.)하는 시냇물이야말로 임(임금)을 향하여 쉬지 않고 울며 지내는 작자의 마음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다.

제4수에서는 길고 긴 산, 멀리멀리 흘러가는 물, 울고 가는 외기러기에 작자의 모습을 투영함으로써 어버이를 그리는 정을 살뜰히 드러내고 있다.

제5수는 효를 충과 동일시하면서, 어버이를 그리는 효는 임금을 섬기는 충이라는 대의 앞에서는 부정될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군신관계는 부자관계보다 선행한다는 유학도로서의 전형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이와 같이, 이들 작품에는 한결같이 젊은 시절의 작자의 모습과 패기가 선명히 나타나 있으며, 임금을 향한 충절과 어버이를 생각하는 효성이 유학도의 의연한 감성으로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참고문헌≫ 尹孤山硏究(李在秀, 學友社, 1955), 孤山尹仙道硏究(文永午, 太學社, 1983).(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견회요의 비장미(悲壯美 : 미적 범주의 하나. 슬픈 감정과 함께 일어나는 아름다움을 이른다)

셋째 수에서 '현실적인 것'이 밤낮으로 울면서 흐르는 시냇물을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상적인 것'은 임금님을 향한 충성심이 강렬하다는 것이다. 피상적으로 보면 전자와 후자 사이에 대립적인 요소가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전자는 근원적으로 현실 부정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왜냐 하면, 현실에서의 부조화를 그대로 반영한 '울어 예는' 시냇물은 임 향한 내 뜻과 합일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수에서 '현실적인 것'이 어버이에 대한 효심을 발휘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라면, '이상적인 것'은 어버이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다해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은 추구될 수 없고 슬픔과 고독감만 가중될 뿐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느끼는 이런 양면성을 이 부분은 잘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에서는 '현실적인 것'과 '이상적인 것'이 영원히 상충되고 모순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하나의 비장미를 형성시켰다고 하겠다.

 

시조의 종류

① 평시조(平時調) : 초·중·종장이 각 15자 내외, 총 45자 내외의 단형시조(短型時調)이다. ② 엇시조(時調) : 평시조보다 초·중장 가운데 어느 한 장이 자수(字數)가 무제한으로 길어지고 종장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는 중형시조(中型時調)를 말한다.

③ 사설시조(辭說時調) : 평시조보다 초·중장이 제한 없이 길고 종장도 어느 정도 길어진 시조. 사슬시조라고도 하는 장형시조(長型時調)로 평민들의 생각을 담은 가장 적절한 시조라고 볼 수 있다.

④ 연시조(連時調) : 한 제목 밑에 여러 수의 평시조를 엮어나간 시조. 맹사성(孟思誠)의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이황(李滉)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등이 이에 속한다.

⑤ 양장시조(兩章時調) : 초장과 종장만으로 된 시조. 이은상이 시도했으나 요즈음에는 이런 시형으로 짓는 이는 거의 없다.

⑥ 단장시조(單章時調) : 평시조를 더욱 압축하여 초·중장을 제쳐놓고 종장만으로 시조의 맛을 내게 하려는 시조의 변형이다. 이는 단순한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⑦ 동시조(童時調) : 어린이의 생각이나 느낌, 또는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된 시조. 근래에 와서 시도되고 있으며 이는 날로 쓰이는 율이 높아가고 있다.

 

윤선도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던 남인 가문에 태어나서 집권 세력인 서인 일파에 강력하게 맞서 왕권 강화를 주장하다가,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으로 화려한 은거 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그의 탁월한 문학적 역량은 이러한 생활 속에서 표출되었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참고문헌≫ 孤山遺稿, 記言, 孤山硏究(李在秀, 學文社, 1955), 松江과 孤山의 詩境(崔珍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3, 1958), 高麗末·李朝初의 漁父歌(李佑成, 成均館大學校論文集 9, 1964), 尹孤山論(鄭炳昱, 月刊文學 9, 1969), 尹善道의 自然觀(尹星根, 文化批評 7·8, 197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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