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김수근(1931 - 1986)
by 송화은율건축가 김수근(1931 - 1986)
김수근은 1960년 이후 경제 성장에 따른 건설붐이 일어남에 따라 외국에서 서구 건축을 직접 배우고 귀국한 건축가들과 국내의 건축가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들은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를 형성하는데 파괴된 건축의 정체성과 도시 질서를 서구 근대 건축의 개념으로 창조하려 하였다.
김수근은 1960년대에 한국 건축이 가지는 공간과 조형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자신의 독창적인 건축 언어와 건축 철학을 가지게 된다. 그가 본 한국건축은 인본주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다. 여기서 인본주의란 말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것은 서구 모더니즘이 주는 합리적이고 계획된 것과는 다른 차원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한국의 건축은 사용자나 거주자를 기준으로, 그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적절한 공간의 크기와 휴먼 스케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비단 평면적인 넓이나 길이만의 문제가 아니고, 건물을 바라보거나 거리를 이동하는 것과 같은 모든 건축적 체험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의 실존성과 장소성이 매우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또한 한국 건축은 의도된 작위성에 의해 그 속에 있는 인간을 억압하지 않고, 오히려 공간 내에서 다양한 해프닝과 놀이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기능적인 것과는 다른 창조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다.
김수근은 이것을 ‘사이’, ‘멋’이란 바로 이 여유로움, 즉 넉넉함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런 ‘멋’이 한국의 전통 건축에서 대청이나 누마루, 그리고 사랑방이 가지는 공간적 특징에서 잘 나타난다고 보았다. 이곳은 각 단위 공간들을 매개하는 여유로운 공간이고 또한 다양한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보고, 자신의 건축에 이런 요소들을 적용한다. 그리고 공간과 형태 구성에 있어서 인간적 척도를 매우 중요한 요소를 받아들여, 그의 건축의 중심 과제로 삼는다. 건축 조형에 있어서 그를 계속해서 지배했던 이미지는 강한 선적인 요소였다.
김수근은 유년 시절 북촌의 한옥이 그에게 준 강한 선으로 분절된 선적 이미지에 집착한다. 이것은 그의 조형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1969년부터 김수근이 가장 관심을 기울인 문제가 ‘인간이 필요로 하는 생활공간을 계획하고 설계하는 건축이 어떻게 하면 자연 환경의 균형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나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연과 기계와 인간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상이다. ‘건축 행위가 적극적으로 어떤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으로 말미암아 어떤 부정적 결과가 야기’되는가, 이런 ‘부정적 측면도 아울러 고려’한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요구조건만이 아니라 자연의 필요 조건도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건축 사상을 그는 ‘네거티비즘’이라고 표현했다.
네거티비즘이 시사하는 공간 개념들은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생활 공간의 한계성에 관한 것으로, 둘째는 공간의 이용을 계획하고, 공간을 설계하는데 관계되는 윤리 문제에 관한 것으로, 그리고 셋째는 공간 설계에 있어서 공간의 기능과 양식 또는 형태에 관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 1980년, '네거티비즘'에서
네거티비즘의 공간 개념들
(1) 생활 공간의 한계성 : 소모되지 않은 자원이 무제한 공급 될 수 없다.
(가) 적정 공간 : 필요 이상의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된다.
(나) 자연 공간 : 이용 한계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2) 공간 이용의 윤리 문제: 남에게 미치는 해를 고려한다.
(가) 통합 공간 : 제한된 공간의 안과 밖이 다 같이 좋은 목적을 위해 이 용이 될 수 있는 공간
(나) 공유 공간 : 이용 공간을 줄이고, 공유 공간을 최대한 늘인다.
(3) 공간의 기능과 형태 : 기능주의의 한계와 차기능적 요소를 의식한다.
(가) 기분 공간 : 어떤 고정된 기능에 얽매이지 않는 공간
(나) 자궁 공간 : 구조적 가변성을 갖고 있는 공간.
네거티비즘적 사고는 결코 새로운 것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어 온 한 가지 유형의 사고 방식을 당면하고 있는 환경 문제와 관련시켜 봄으로써 건축 행위를 더욱 더 책임감 있는 행위가 될 수 있게 하자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김수근은 제안의 뜻을 밝히고 있다.
건축가 김수근이 남긴 주옥같은 건축 작품들은 건축가의 독특한 작품 세계와 한국 건축 특유의 정감을 담고 있다.
이들은 거칠고 황량한 우리의 도시에 건축의 고귀한 가치를 일깨워주고 있으며, 이제 한국 건축의 새로운 이념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건축가로서뿐만 아니라 건축을 중심으로 다양한 예술 장르를 통합하려 한 한국의 대표적 문화 운동가로 평가받고 있다.
http://www.infocon.co.kr/man/kimsu/index1.htm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공간’의 큰 별
미국의 타임紙에서한국의 가장 경탄할 만한 훌륭한 건축가’라고 평하기도 했던 건축가 김수근은건축은 예술’이라는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연 대가이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로 평가되는 김수근은, 경기중 2학년 때 영어 회화를 가르쳤던 미군 병사의 영향으로 건축에 눈을 뜨게 된다.
그 뒤, 일본말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읽고,明暗을 알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거금을 주고 산 라이카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수학 공부에 몰입했다.
그때부터 건축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요소로서의 예술 전반과 인문학에 대한 폭 넓은 이해가 싹텄던 것이다. 그리고, 6‧25전쟁이 일어난 이듬해 4월 그는 공부를 위해 서울대 건축과 2학년을 중퇴하고 돌연 일본으로 밀항, 도쿄(東京)예대 건축과와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60년 일본인 아내 야지마 미치코(矢島道子)와 함께 귀국한 그는 남산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서 1등으로 당선, 단번에 주목 받는 건축가로 떠올랐다. 그 이듬해에는 주식회사 공간 연구소의 전신인 김수근 건축 연구소를 창설했다.
그 후, 워커힐 힐탑바(61년), 부여 박물관(67년), 오사카(大阪) 엑스포 한국관(70년), 건축 사무소 공간 사옥(71년),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77년) 등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김수근을 말할 때 원서동에 있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검은 2층 건물 공간(空簡) 사옥을 빼놓을 수 없다. 그 건물은 공간 연구소의 120명 직원뿐만 아니라 숱한 대학생, 장안의 문화, 예술 인사들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큰 사랑방 구실을 해냈던 것이다. 또한, 그는 계속되는 적자에도 불구하고 건축, 환경 전문 월간지 공간을 펴냈고, 77년에는 소극장을 개관하여 전위극, 무용, 전통, 연희 등 각종 공연을 연간 500여회씩 치뤄 내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물놀이패 김덕수, 춤꾼 공옥진 등도 그가 소극장 ‘공간 사랑’을 통해 발굴해 낸 인물들이다.
여기에서 ‘건축은 언어가 아니라 시멘트, 목재, 돌, 철재, 강철, 알루미늄, 세라믹, 유리를 사용해서 짓는 詩이며 건축가 중에 시, 소설 모르는 놈은 별 볼일 없다’고 단언한 그의 종합예술가다운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집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고 한다.
“나의 집은 자궁(子宮)입니다. 내 집은 자궁이고 자궁의 집은 어머니이며 어머니의 집은 가옥이며 집의 집은 환경입니다. 집을 주택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환경입니다. 환경이 철학적으로는 공간이 되겠는데, 공간은 집의 집의 집입니다…….”
그는 한국 전통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흠모하고 우러러보았다.
일제에 의해 단절되었던 우리 전통의 흐름을 서구 건축 문화와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70년대에 이르러 한국 건축이 가지는 공간과 조형의 본질적인 멋인 인본주의적, 자연주의적 건축 언어를 만들어 내었다.
대학 교수, 국전 심사위원, 공간연구소 대표이사, 국민대 조형대 학장, 올림픽위원회 문화 위원, 한국은행 총재고문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게 활동했던 그의 꿈은, 도자기, 회화, 건축, 조각 등 한국의 미를 가르치고, 연구하는 아카데미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꿈은 그의 너무 이른 죽음으로 생전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국 현대 건축의 효시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수근은 1986년 6월 서울대학 병원에서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다. 한국 건축계에 큰 별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 하우 news 6월호 200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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