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추린 오딧세이 2 / 호메로스
by 송화은율죽은 자들의 나라
일행은 배불리 먹고는 늘어지게 자고, 또 배불리 먹고는 늘어지게 자기만 했다. 세월은 자꾸만 흘러갔다. 뱃사람들은 물론, 오뒤세우스 자신도 몇 날 며칠이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다. 키르케가 살고 있는 마법의 섬에서는 시간이 여느 세계의 시간과는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흐른 시간이 자그마치 일 년이었다. 뱃사람들이 섬으로 올라올 때 꽃잎을 활짝 열고 있던 꽃들이 졌다가 다시 피었을 즈음, 부하 중 한 사람이 오뒤세우스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 장군, 우리가 어차피 이 성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면 우리의 고향 이 타가를 생각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그 날 밤. 부하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동안 오뒤세우스는 혼자 잠자리에서 일어나 키르케를 찾아갔다. 빗으로 긴 머리카락을 빗고 있던 키르케는 오뒤세우스의 말을 듣고는 이렇게 응수했다.
"다고 싶으시다면 가셔야지요. 하지만 고향에 이르기까지 장군은 머나먼 뱃길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시기 전에 먼저 뱃길에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아셔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면 누가 그것을 알고 있소?"
오뒤세우스가 물었다. 키르케는 여전히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서 대답했다.
"먼저, 죽은 사람들의 나라, 저승 왕 하데스 신과 그 아내 페르세포네가 다스리는 나라로 가셔야 합니다. 거기에서 테바이 출신인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을 만나셔야 합 니다. 테이레시아스만이 장군이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뒤세우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니,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죽은 자들의 나라로 갔다가 살아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키르케는 어느 쪽으로 어떻게 가고, 어떻게 해야 그 땅에 이를 수 있는지 가르쳐 주었다. 키르케는 제사에 쓰일 검은 숫양 한 마리와 암양 한 마리까지 오뒤세우스에게 주었다.
다음 날 오뒤세우스는 부하들을 불러모아. 해변으로 끌어올려 두었던 배를 다시 바다에 띄게 했다. 한 사람만 빼고 뱃사람들 모두가 해변으로 나와 배를 띄우는 일을 했다. 이 일에서 빠진 뱃사람은 나이가 가장 어린 엘페노르였다. 전날 술에 취해 있던 엘페노르는 오뒤세우스의 명령이 떨어졌을 때만 해도 배의 갑판 위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출항 명령이 떨어지면서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엘페노르는 잠결에 갑판에서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목이 부러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
나머지 뱃사람들은 고향인 섬나라 이타카로 향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오뒤세우스로부터, 고향으로 향하기 전에 먼저 다녀와야 할 무서운 곳이 있다는 말을 듣지 그들은 배에서 뛰어 내려 울부짖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슬픔에 잠긴 채 배를 얕은 물에다 띄우고는 동굴 속에 숨겨 두었던 무기와 키르케로부터 받은 숫양과 암양도 배에다 실었다. 이윽고 오뒤세우스의 배는 돛을 올렸다. 키르케가 보낸 바람이 오뒤세우스 일행이 탄 배의 돛을 부풀렸다.
몇날 며칠 내내 배는 환한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흐르는 깊고 깊은 강 오케아노스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영원히 안개 속에 감겨 있는 나라, 햇빛은 볼 수도 없는 나라. 페르세포네의 나무인 백양나무와 버드나무에 덮인 음산한 나라가 나타났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해변에다 배를 대고는 오케아노스의 강변을 따라 저승의 두 강이 서로 만나는 곳까지 걸어 올라갔다. 그 곳에서 그들은 구덩이를 하나 파고, 키르케가 준 꿀과 우유와 포도주를 붓고는 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향해 기도했다. 이어서 오뒤세우스는 키르케가 시킨 대로 숫양과 암양을 죽여 제물로 바치고는 그 피를 구덩이에 쏟아 부었다.
곧 창백한 혼령들이 몰려와 그 피를 마시려고 했다. 오래 전에 죽은 앳된 새색시들의 혼령도 있었고 젊은이들의 혼령도 있었다. 고생고생하다 죽은 노인의 혼령도 있었고,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의 혼령도 있었다. 그림자 창을 손에 든 병사들 혼령의 몸에는 싸움터에서 얻은 상처가 그 당시와 똑같은 모양으로 나 있었다. 오뒤세우스는 두려움을 참고 부하들에게 양고기를 썰어 덩어리를 만들고 이것을 불살라 저승 왕 하데스 신과 페르세포네에게 바치게 했다. 부하들이 제사를 지내고 있을 동안 오뒤세우스는 칼을 빼어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구덩이를 지켰다. 테이레시아스가 오기 전에는 어떤 혼령도 구덩이의 피를 맛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제일 먼저 온 혼령은 젊은 뱃사람 엘페노르였다. 엘페노르는 자기 시체를 불에 태워 주지 않으면 다른 혼령들과 섞을 수 없다면서 오뒤세우스에게 한시바삐 자기의 시체를 불에 태워 달라고 애원했다.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섬에 도착하는 대로 시체를 불태워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어서 오뒤세우스 자신의 어머니 혼령이 다가왔다. 오뒤세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느로이아의 싸움터에 있을 동안 세상을 떠났던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슬픔을 억누를 수 없었지만, 어머니의 혼령도 핏구덩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마침내 눈먼 예언자의 혼령이 나타나 오뒤세우스에게 제물의 피를 마시게 해달라고 말했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칼을 칼집에다 꽂고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피를 마시고 힘을 차린 테이레시아스는 우렁찬 예언자의 목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아직까지도 그대에게 화가 나 있다. 이는 그대가 포세이돈 신의 아들을 장님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의 뱃길은 아주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와 그대 부하들은 무사히 고향의 해변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러나 조건이 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항해하는 도중에 그대들은 트리나키아 섬에 이르게 된다. 이 섬에는 넓고 기름진 풀밭에서 풀을 뜯는 태양의 신 휘페리온의 소 떼가 있을 것 이다. 그 소에 손을 대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고향으로 가는 뱃길이 순탄할 것이다. 그렇 지 않으면 그대의 뱃사람들은 재난을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대만은 재난을 피해 남의 나라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의 집에는 무서운 불화와 슬픔 이 그대를 기다리고 있다. 거만한 인간들이 그대의 집에서 그대의 양식을 축내면서 그대 의 아내에게 결혼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대의 아내 페넬로페는 그대가 죽은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들의 뜻이라면 어쩌겠습니까?"
오뒤세우스의 말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게, 어떻게 하면 어머니의 혼령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테이레시아스가 대답했다.
“핏구덩이로 와서 피 맛을 보게 하라. 그러면 원하는 혼령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예언자의 혼령은 곧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어머니 혼령이 다가왔다. 오뒤세우스는 그제서야 어머니의 혼령에게 구덩이의 피를 맛보게 해주었다. 오뒤세우스와 어머니 혼령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두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의 혼령은 아들에게 죽은 자들의 땅으로 온 까닭을 물은 다음, 자기는 아들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자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 죽은 자들의 땅으로 왔노라고 말했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뒤세우스는 두 팔을 내밀어 세 차례나 어머니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혼령은 흡사 그림자처럼, 꿈속에서 만나는 사람처럼 번번이 오뒤세우스에게서 빠져나가 버리고는 했다. 오래지 않아 어머니의 혼령이 있던 자리에는 빈 공간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 혼령이 떠난 것이었다.
다른 혼령들이 차례로 다가왔다. 그 중에는 검은 함대를 몰고 트로이아로 진격했던 그리스 연합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혼령도 들어 있었다. 아가멤논의 혼령은 피를 맛보고는 자기가 어떻게 세상을 떠나 죽은 자들의 나라에 와 있는지 설명해 주었다.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아내의 애인 손에 죽었다고 했다. 아가멤논 일행은 환영잔치인 줄 알고 그 자리에 나갔다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던 것이었다. 아가멤논이 자리를 떠나자, 아이아스의 혼령이 왔고, 이어서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한 장군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장군 아킬레우스의 혼령이 왔다. 아킬레우스는, 태양이 비치지 않아 창백한 아스포델로스를 제외하면 어떤 꽃도 피지 못하는 그 슬프고도 음산한 죽은 자들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산 사람들 세상의 가난한 농부의 노예가 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그 말끝에 아킬레우스는 산 사람들 나라에 사는 친구들과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오뒤세우스는 알고 있는 대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킬레우스는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음산한 그림자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오뒤세우스와 부하들의 눈앞으로 무수한 혼령들이 지나갔다. 왕을 상징하는 황금빛 지팡이를 든 미노스 왕도 지나갔다. 사냥꾼 오리온도 생전에 자기 손으로 죽인 짐승들의 혼령과 함께 음습한 아스포델로스 벌판을 헤매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갈증의 고통에 시달리는 탄탈로스의 혼령도 그들 앞에 나타났다. 탄탈로스는 턱까지 차 오르는 흙탕물 속에 잠겨 있으면서도 늘 갈증에 시달렸다. 그가 물을 마시려고 고개를 숙이면 물이 발치 아래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이었다. 웅덩이 위로 늘어진 배나 석류를 따려고 손을 내밀 때면 바람이 불어와 가지를 흔들어 구름 높이까지 거두어 가 버리기도 했다. 시쉬포스의 혼령도 보였다. 시쉬포스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진흙이 구름처럼 솟아오르고 있었다. 시쉬포스는 가슴이 터질 듯한 고통을 참으면서 산꼭대기로 바위를 굴려 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시쉬포스가 꼭대기까지 굴려 올리는 순간 바위는 다시 산기슭으로 굴러 내려와 버리고는 했다. 시쉬포스는 그 싸움을 영원히 되풀이해야 했다.
혼령의 무리가 점점 늘어나면서 그들이 지르는 비명 소리, 신음 소리로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죽은 사람의 혼령이라는 혼령은 다 몰려드는 것 같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산 사람들 가슴에 깃 드는 공포도 그만큼 견디기 어려워져 갔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뒤로하고 빠른 걸음으로 백양나무 숲을 향했다. 백양나무 숲은 그들이 들어섰던 죽은 자들의 나라로 들어온 문이었다.
그들은 닻을 올리고, 그 슬픈 해변으로부터 배를 몰고 나왔다. 어둠의 나라에서 햇빛의 나라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서풍을 이용해서 키르케의 섬으로 되돌아왔다.
목숨을 건 항해
마녀 키르케의 섬으로 돌아와 오뒤세우스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엘페노르의 시체를 태우고 무덤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오뒤세우스는 무덤 위에다, 평소에 엘페노르가 젓던 노를 꽂아 무덤의 표지로 삼았다. 이어서 성대한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 날 밤, 오뒤세우스 일행이 여전히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는 것을 안 키르케는 오뒤세우스에게 뱃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장애물을 넘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키르케가 말한 장애물이란 바로 사이렌, 떠다니는 바위산, 그리고 스퀼라와 카립디스였다.
오뒤세우스는 키르케의 말을 귀담아듣고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겼다.
새벽이 되자 오뒤세우스 일행은 키르케와 이별했다. 키르케는 해변을 서성거리다 숲 속으로 들어갔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배에 올라 다시 한 번 미지의 난 바다로 나갔다.
처음에는 마녀 키르케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인 순풍 덕분에 쉽게 항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다 한가운데 이르자 그 순풍이 멎었다. 순풍이 멎은 뒤부터는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바다 위로 꽃이 만발한 풀밭 같은 섬 하나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 때, 그 섬에서 들릴락말락한 여자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노래가 어찌나 아름다운지 흡사 듣는 사람들을 명주실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뒤세우스는 키르케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 노랫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풀밭의 꽃들 사이에 앉아 지나가는 뱃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사이렌 무리였다. 언뜻 보면 사이렌 무리가 노래를 부르는 곳은 꽃밭이지만 그 풀밭의 꽃과 키 큰 풀 사이에는, 그 노랫소리에 홀려 목숨을 잃은 뱃사람들의 뼈가 널려 있었다. 사이렌의 노래는 지나가는 뱃사람들의 혼을 빼는 노래인 것이었다.
바람이 자고 있어서 뱃사람들은 노를 저어야 했는데 오뒤세우스는 문득 노 젓는 손길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그는 키르케에게서 받은 커다란 밀랍 한 덩어리를 꺼내어 이것을 잘게 잘라 뱃사람들에게 주고는 모두들 그것으로 귀를 막게 했다. 그래야 사이렌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오뒤세우스 자신은 저 사이렌 무리의 노래를 듣고 싶다는 유혹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자기 몸을 아주 굵은 밧줄로 돛대에다 묶게 했다. 그리고는 부하들에게 자기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아무리 호령하더라도, 사이렌의 섬을 다 지나기 전에는 절대로 풀어 주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하게 일러두었다. 부하들은 오뒤세우스의 명령대로 그의 몸을 돛대에 꽁꽁 묶고는 노 젓는 자리로 돌아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배가 섬 옆을 지나고 있을 때 뱃사람들 눈에는 아름다운 처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뒤세우스의 귀에는 모래톱에 부딪쳐 찰랑거리는 물소리 너머로 그들의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오뒤세우스여, 그대 그리스 연합군의 꽃이여.
가까이 오세요.
그대의 지친 배를 쉬게 하고 우리의 노래를 들으세요.
우리들 노랫소리는 벌집 속의 꿀만큼이나 달답니다.
우리는 세상일을 다 알고 있지요.
트로이아 전쟁 전에 있었던 일도 알고,
장차 탐스러운 이 땅에서 일어날 일도 다 알고 있답니다.
오뒤세우스의 가슴속에서는 사이렌 무리가 시키는 대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불길처럼 일었다. 그는 부하들에게 어서 빨리 풀어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뱃사람들은 밀랍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뱃사람들은 죽으라고 노만 저었다. 배는 빠른 속도로 섬을 지났다. 섬이 배의 고물 뒤로 사라지면서 사이렌 무리의 노랫소리도 잦아들었다.
그제서야 뱃사람들은 귀에서 밀랍덩어리를 뽑아내고 선장인 오뒤세우스를 돛대에서 풀어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사이렌 무리가 그리웠던지, 온 세상을 다 잃은 사람처럼 울었다.
이로써 키르케가 말한 바다에서의 첫 번째 재난은 피한 셈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두 번째 재난이 닥쳤다. 하늘로 치솟는 물보라 속에서 꼭대기가 구름에 닿을 듯한 거대한 검은 바위산 두 개가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이다. 두 개의 바위산 사이로 산골의 강물 줄기 같은 좁은 뱃길이 나 있었다. 왼쪽 바위산 기슭에는 거품을 뿜어 올리는 무시무시한 소용돌이가 있었다. 바로 그 밑에서 바다의 괴물 카립디스가 하루에 세 차례씩 바닷물을 빨아들였다가 뿜어내고 있는 것이었다. 카립디스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가 무사히 빠져 나온 배는 한 척도 없었다.
오른쪽 바위산 중턱에는 또 하나의 괴물이 살고 있었다. 그 바위산 중턱의 굴속에 사는 괴물의 이름은 스퀼라였다. 이 스퀼라는 머리가 여섯 개인 괴물이었다. 스킬라의 가늘고 긴 여섯 개의 목에는 비늘이 덮여 있었다. 각각의 아가리 안에는 세 줄의 날카로운 이빨이 나있었다. 아가리 앞에는 각각 열두 개의 긴 더듬이가 있고 더듬이 끝에는 갈고리 같은 것이 있었는데, 스퀼라는 바로 이 갈고리로 먹이를 잡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스퀼라의 먹이는 큰 물고기나 돌고래가 대부분이었다. 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역시 스퀼라의 먹이가 되는 것은 물론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이 모든 것을 키르케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또한 파도가 일렁거릴 때마다 불쑥불쑥 드러나는 오른쪽 바위산과 왼쪽 바위산의 뾰족뾰족한 밑동의 암초는 여느 암초처럼 바다 밑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제멋대로 움직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밑동의 암초들은 사실, 배든 바닷새든 그 사이로 지나가면 한 쌍의 심벌즈처럼 부딪쳐 그 사이에 든 것을 갈아 버리고는 했다. 이 두 암초가 맞부딪친 자리에 남는 것은 나무 부스러기, 사람의 시체, 피에 젖은 깃털 같은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신들 사이에서 그 두 바위산은 <떠다니는 바위산>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지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스퀼라와 카립디스 뿐이었다. 그 두 바위산 사이의 뱃길로 자나가려는 배나 뱃사람은, 잡히기만 하면 배를 통째로 삼켜 버리는 카립디스의 밥이 되거나 한꺼번에 몇 사람씩 붙잡아 삼켜 버리는 스퀼라의 밥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감춘 채 오뒤세우스는 키잡이에게 배를 오른쪽 바위산에 가까이 붙이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는지 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뱃사람들은 바위산 사이로 배를 몰아넣고는 가능한 한 스퀼라의 바위산 쪽에 가깝게 붙인 채 지나가려고 했다. 무서운 소리와 함께 소용돌이치면서 배를 통째로 삼키려는 저 카립디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좁은 뱃길을 건너고 있을 때 갑자기 바위산 중턱에 있는 굴에서 스퀼라의 대가리 여섯 개가 나와 눈 깜짝할 사이에 노잡이 뱃사람 여섯을 물고 가 버리는 것이었다.
노 잡이들은 몸부림치면서 동료 뱃사람들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다가 순식간에 어둔운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비명 소리는 곧 파도 소리에 파묻혔다.
오뒤세우스는 남아 있는 뱃사람들에게 소리쳤다.
"너를 저어라! 신들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남아 있던 뱃사람들은 노 앞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처음으로 노를 저어 보는 사람들처럼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좁은 뱃길로 몰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노를 저어 그들은 동료 여섯 명을 잃은 채 바위산 사이의 뱃길을 지나 난바다로 나왔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푸른 섬이 하나 보였다. 섬에 접근하지 않았는데도 양 떼가 우는 소리, 소 떼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지친 뱃사람들이 쉴 곳으로는 그 섬보다 나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뱃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노를 저으라고 명령했다. 태양신의 가축을 잡아 먹어서는 안 된다던 장님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경고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 때 에우륄로코스가 오뒤세우스에게 정면으로 대들었다. 그는 지친 뱃사람들이 섬에 상륙해서 넉넉하게 자고 먹어야 다음 뱃길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뱃사람들은 에우륄로코스 편이 되어, 자기네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고 외쳤다. 오뒤세우스도 더 이상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그는 뱃사람들에게 태양의 신 휘페리온의 가축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맹세부터 하게 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해안 후미진 곳으로 배를 몰아넣고는 해변으로 올라가, 키르케가 마련해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는 지치고 지친 나머지 스퀼라에게 희생된 동료들의 죽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해변에 곯아떨어졌다.
그 날 밤 구름을 지배하는 제우스 신이 그 섬에다 폭풍을 보냈다. 구름이 하늘과 바다로 번지자 무지막지한 서풍이 파도를 일으켜 해변을 덮쳤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파도가 몰아쳐 오는 해변에서 배를 끌어내어 부드러운 풀밭으로 끌어올렸다. 그 부드러운 풀밭은 태양신의 가축을 돌보는 요정들이 춤을 추는 무도회장이었다. 오뒤세우스 일행은 일단 배를 거기까지 끌어올려 놓고는 파도가 잠잠해지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폭풍은 근 한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키르케로부터 얻어온 식량은 곧 바닥이 났다. 뱃사람들은 그런 날씨에 잡을 수 있는 물고기나 바닷새 같은 것으로 근근히 목숨을 이어 나갔다. 견디다 못한 오뒤세우스는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기도해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신전을 찾아 섬의 내륙으로 들어갔다. 기도를 마친 오뒤세우스는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참이어서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오뒤세우스가 잠에서 깨었을 때까지도 폭풍은 여전했다. 그는 배와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요정들의 무도회장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였다. 그는 너무나 놀랐다. 불어오는 바람에 고기 굽는 냄새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어째서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느냐고 꾸짖자 에우륄로코스가 말했다.
“우리가 기댈 것이라고는 신들의 자비밖에는 없습니다. 만일 여기에 소가 없었다면 우리 는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굶어 죽는 것이 무엇입니까? 죽는 방법 중에서 가장 고약한 것 이 굶어 죽는 것입니다.”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 구워 놓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소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잡은 소 몇 마리의 고기를 구워 엿새 동안 배부르게 먹었다.
엿새째 되는 날 폭풍이 멎었다. 바람이 자면서 태양도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들은 얕은 물로 배를 밀어넣고 돛을 올렸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기 직전에 이르렀던 그들의 형편을 태양신이 헤아려 소 몇 마리 잡아먹은 것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양신의 섬이 보이지 않을 만큼 난바다로 나갔을 때였다. 비구름이 뭉게뭉게 하늘로 오르면서 삽시간에 하늘을 가려 버렸다. 바다는 여전히 푸른 빛인데 하늘은 검은 빛으로 변했다. 이어서 무시무시한 돌풍이 배를 덮쳤다. 돛이 찢어지고 돛대가 부러져 나갔다. 돛대는 부러져 내리면서 키잡이의 머리를 때리고는 갑판 위로 떨어졌다. 키잡이는 숨이 끊어진 채 바다로 떨어졌다. 시커먼 비구름의 한가운데서 나온 창날 같은 벼락이 배를 때렸다. 배는 유황 냄새를 풍기면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은 갑판 위에서 바다로 떨어져 허우적 거렸다.
한동안 뱃사람들의 머리는 물새들처럼 파도 위를 오르내렸다. 그러다 하나씩하나씩 가라앉아갔다. 남은 것은 밧줄에 매달린 오뒤세우스뿐이었다. 배가 난파하는 순간 그는 돛대에 걸린 밧줄에 매달렸던 것이다. 폭풍은 시작될 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돛대는 하염없이 바다 위를 떠 갔다. 뱃사람들을 모두 잃고 혼자만 남은 오뒤세우스는 아흐레 동안이나 바다 위를 떠 다녔다.
열흘째 되는 날 밤 오뒤세우스는 물결에 밀려 어느 섬의 해변에 닿았다. 산 사람이라기보다는 죽은 사람에 가까웠다. 물새들이 우는 새벽녘에야 오뒤세우스는 그 섬의 여주인인 요정 칼립소의 눈에 띄었다. 오뒤세우스는 물결에 밀려온 해초처럼 해변에 쓰러져 있었다.
텔레마코스, 아버지를 찾아나서다
오뒤세우스는 7년간이나 칼립소의 섬에서 머물렀다. 칼립소의 섬은 배들이 지나가는 뱃길에서 멀리 벗어난 곳에 있는 섬이었다. 그래서 남들의 눈에 띌 가능성이 없었다. 오뒤세우스 혼자서 배를 지을 수도 없었다. 설사 배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노잡이들이 있을리 만무했다. 칼립소는 오뒤세우스에게 여간 자상하고 친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칼립소도 오뒤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만는 도우려 하지 않았다. 칼립소는 오뒤세우스가 언제까지나 연인으로 자기 옆에 머물러 주었으면 하고 속으로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뒤세우스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 고국 이타카의 바위산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자기 집 굴뚝 위로 오르는 연기 자락을 보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세월이 7년이나 흐른 것이었다.
그 동안 이타카에 남아 있던 오뒤세우스 아내 페넬로페와 검은 배들이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에는 어린 아기였던 아들 텔레마코스는 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가는데도 불구하고 오뒤세우스의 소식은 들려 오지 않았고, 이타카 사람들은 오뒤세우스가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시작했다. 슬픔에 잠겨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오뒤세우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오뒤세우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살아 있었다. 이집트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왕으로서 함께 나라를 다스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이타카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전쟁터에 나간 아들을 대신해서 이타카를 다스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늙고 병들어 나라를 다스릴 수 없었던 아버지 라에르테스는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거기에다 오뒤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나이가 너무 어려 이타카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오뒤세우스가 검은 배들을 몰고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 청소년에 지나지 않던 이타카의 귀족 젊은이들이 이쯤에는 이미 시건방진 귀족 건달들로 자라나 있었다. 시건방진 귀족 건달들은 오뒤세우스의 궁전에서 저희들 멋대로 굴었다. 그들은 텔레마코스가 왕위를 계승할 왕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페넬로페와의 결혼에만 성공하면 페넬로페를 통하여 왕위에 올라 왕국을 손아귀에 넣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탐욕스러운 사기꾼들처럼 궁전에서도 온갖 부정한 짓을 다 저질렀다. 그들은 오뒤세우스의 가축을 잡아먹고 오뒤세우스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왕비 페넬로페가 저희들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혼해 주지 않으면 궁전을 떠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궁전에서 그들을 쫓아 낼 수 있는 사람이 이타카에는 하나도 없었다.
건달들의 행패를 견디다 못한 페넬로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귀족 건달들에게, 베를 짜서 시아버지 라에르테스의 수의, 즉 라에르테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마지막으로 입혀 줄 옷 한 벌을 다 짓게 되면 그들 중 하나를 선택해서 결혼하겠노라고 약속했다. 페넬로페는 낮 동안에는 베틀에 앉아서 베를 짜고, 밤이 되어 건달들이 궁전이나 별채에서 잘 때면 하루 종일 짠 베를 도로 풀었다. 따라서 계속 그럴 수만 있다면 시아버지의 수의는 완성될 수 없었다.
페넬로페는 이런 방법으로 한동안은 건달들을 따돌리 수 있었다. 그러나 페넬로페에게 원한을 품은 한 노예가 왕비를 배반하고 왕비의 비밀을 건달들에게 누설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 때부터 왕비 페넬로페는 수의 지을 베를 계속해서 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되고 난 뒤에도 페넬로페는 이런 저런 핑계로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을 미루는 데 온 힘을 다 쏟았다. 하지만 건달들의 요구는 나날이 거세어지고 거칠어져 갔다.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 눈이 유난히 밝은 신이 있었다. 바로 지혜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 여신이었다. 평소에 오뒤세우스를 좋아하던 아테나 여신은 저 높은 올림포스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다가 이타카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아테나 여신은 오뒤세우스를 대신해서 신들에게 하소연했다.
"지금 오뒤세우스는 요정 칼립소의 섬에 있는데 붙잡혀 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신세입니 다. 오뒤세우스를 사랑하는 칼립소는 오뒤세우스의 사랑을 얻고 싶어합니다만 그가 사 랑하는 것은 조국과 백성들입니다. 그런데도 칼립소는 자꾸만 오뒤세우스가 자기 조국과 백성들을 잊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런 사이 오뒤세우스의 궁전에서는 건달들이 그 의 재산을 축내고 그의 아내를 도둑질하려고 합니다. 나는 이타카로 내려가 텔레마코스를 설득해 보려고 합니다. 헤르메스 신께 부탁드립니다. 칼립소에게 가시어 신들의 뜻을 좀 전해 주세요. 오뒤세우스를 잃는 일이 칼립소에게는 견딜 수없이 슬픈 일이기는 하겠지만, 이제 오뒤세우스를 떠나보내 제 갈 길로 가게 해주는 것이 바로 신들의 뜻이라고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제외한 모든 신들이 아테나 여신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포세이돈의 동의를 받아낼 수 없었던 것은 이 바다의 신이 마침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러 오디오피아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테나 여신은 별똥별처럼 빠른 속도로 이타카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람들 사이에 섞이기 쉽도록 오뒤세우스의 친구 멘테스로 변장한 뒤 오뒤세우스의 궁전으로 들어갔다.
궁전 앞 현관에는 무수한 젊은이들이 황소 가죽을 깔고 앉아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데리고 온 하인들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자기 집 현관인데도 불구하고 텔레마코스는 그 자리 하나 차지하지 못하고 거기에서 떨어진 곳에 홀로 서 있다가 나그네를 보고는 안으로 안내했다. 그 나그네가 바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라는 것을 텔레마코스가 알았을 리 만무 했다.
이윽고 귀족 건달들이 저녁 식사가 준비된 식탁으로 몰려들었다. 텔레마코스는 나그네를 식탁 옆에 있는 또 하나의 조그만 식탁으로 따로 불러 조용히 저녁을 먹을 수 있게 해주었다.
이윽고 하인들이 음식을 날라와 식탁에 차리자 텔레마코스는 귀족 건달들 귀에 들리지 않게 나지막한 소리로 이런 말을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줄 알고 아버지의 궁전에서 저렇게들 못되게 군답니다. 사실은 저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까 봐 두렵습니다. 그것은 그렇고, 존함은 무엇이며, 이타카에는 어 떤 일로 오셨습니까?"
그러자 멘테스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나는 오뒤세우스 왕의 오랜 친구 멘테스라고 하오. 구리를 사로 퀴프로스로 가는 길인데 오뒤세오스 왕이 틀림없이 돌아와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들렀소이다. 트로이아 전쟁 때 무사 했고, 트로이아에서 고향으로 떠났으니 마땅히 돌아와 있을 줄 알았지요……."
텔레마코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텔레마코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음에 분명했다. 아테나 여신은 텔레마코스의 얼굴에서 그것을 확인하고 나서 덧붙였다.
"이타카 사람들을 모아, 저 건달들이 얼마나 무례하게 구는지 가르쳐 주도록 하시오. 그리 고 배를 한 척 짓게 하고 다 지어지거든 그대가 손수 바다로 나가 오뒤세우스 장군에 대 한 새로운 소식과 정보를 모아들이시오."
아테나 여신은 이런 말을 남기고는 올림포스 산으로 돌아갔다. 텔레마코스는 난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용기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젊은 왕자는 백성들을 불러모으고는 왕자답게 자기 생각을 털어 놓았다.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은 텔레마코스를 동정하고 그가 처해 있는 입장을 이해하고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힘있는 건달들에게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그 날 밤 아테나 여시이 다시 한 번 아버지의 친구 멘테스로 변장하고 텔레마코스 앞에 나타났다. 여기에서 용기를 얻은 텔레마코스는 노 스무 개짜리 갤리온 선을 지으라고 명령하고는, 건달들에게는 공개적으로 자기는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러 네스토르 왕과 메넬라오스 왕을 찾아간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어머니 페넬로페에게는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텔레마코스가 뱃길에 먹을 양식과 포도주를 준비해 준 사람은 텔레마코스의 유모이자 아버지 오뒤세우스의 유모였던 에우뤼클레이아였다. 에우뤼클레이아는 왕실의 곳간 열쇠를 관리하는 왕비의 심복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밤 아테나 여신은 포도주 빛 바다 위로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바람을 보냈다. 텔레마코스 일행은 그 바람에 돛을 부풀리고 이타카를 떠났다.
한편, 텔레마코스의 당도한 행동에 한편으로는 겁을 집어먹고 한편으로는 당황한 건달들은 텔레마코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건달들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안티노오스가 나섰다.
"나에게 배 한 척과 뱃사람 스무 명만 주시오. 이타카와 시모스 섬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 다가 텔레마코스가 귀국할 때 덜미를 잡아, 텔레마코스의 뱃길 여행을 아주 끝장내 버리 겠소."
다음날 정오에 텔레마코스 일행이 탄 배는 네스토르 왕이 다스리는 퓔로스의 모래톱에 이르렀다. 늙은 네스토르 왕은 텔레마코스를 따뜻하게 영접했지만 텔레마코스가 알고 있는 이상의 소식은 전해줄 수가 없었다. 그 다음 날 텔레마코스는 다시 길을 떠났다. 네스토르 왕은 왕궁의 전차 한 대를 내어 주고는, 트로이아 전쟁당시 자기의 전차를 몰았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를 붙여 주었다. 이틀 동안 전차를 타고 달린 그들은 해질 무렵 스파르타의 가파른 산길로 접어 들었다. 텔레마코스와 피시스트라토스는 메넬라오스의 궁전밖에 있는 별채에서 밤을 보냈다.
텔레마코스가 찾아간 것은, 메넬라오스 왕과 비의 헬레네가 스파르타에 도착한 직후였다. 그들도 트로이아를 떠난 이래 길고 오랜 뱃길 여행에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텔레마코스 일행이 들어간 것은 메넬라오스가 고향에 돌아온 것을 자축하여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그는 텔레마코스 일행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 손님이 충분히 먹고 마시기도 전에 그런 것을 묻는 것이 실례였기 때문이었다. 메넬라오스는 하인들에게 따뜻한 물과 깨끗한 옷을 준비하게 했다. 이윽고 두 사람이 따뜻한 물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자기 식탁으로 불러 함께 잔치를 즐기게 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자기 방에 있던, 뺨이 고운 미녀 헬레네가 들어왔다. 여전히 아름다웠다. 헬레네 뒤로는 황금 물레가락과 실톳대를 든 하녀 둘이 따라 들어왔다. 물레가락과 실톳대에는 짙은 보라색 양털실이 걸려 있었다. 왕의 발치에 앉아 실을 감던 헬레네의 눈길이 화로 위를 지나 텔레마코스의 얼굴 위에서 멎었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물었다.
"세상에…… 저기 저 손님들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오셨는지 묻지 않으셨군요?"
"아직 묻지 않았소. 먼길 여행에 너무 지친 것 같아서 하룻밤 더 쉬게 한 뒤에 내일 아침에 물을 생각이었지요."
메넬라오스 왕이 대답했다. 헬레네가 두 나그네를 보고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 두 분 중 한 분은 내일 아침까지 기다리지 않고도 알 것 같네요. 두 분 중 젊은 분은 우리의 옛 친구 오뒤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일 거예요. 보세요. 저렇게 닮았는데도 모르시겠어요?"
조금 전과는 달리 텔레마코스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던 메넬라오스가 소리쳤다.
"이제 알겠다. 정말 닮았구나.세상에, 웃어야 할지, 부둥켜안고 울어야 할지‥‥‥."
처음 만난 사람들과 사귀는 데 익숙하지 않은 텔레마코스는 소녀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는 수줍음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피시스트라토스가 텔레마코스를 대신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뒤세우스 왕의 아들이 맞습니다. 아버지의 소식을 들으려고 이렇게 왔습니다. 저는 길동무로 함께 온 네스토르 왕의 아들 피시스트라토스이고요."
모두가 한데 어울려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붙잡고 울기도 했다. 헬레네는 텔레마코스에게, 오뒤세우스가 거지로 변장하고 트로이아의 보물을 훔치러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메넬라오스는 오뒤세우스가 목마를 만들 때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바로 그 목마 덕분에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다음 날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에게 이타카가 건달들의 횡포로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아버지 오뒤세우스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메넬라오스가 대답했다.
"네가 묻는 것에 대해 몇 가지 얘기는 들려 줄 수 있다. 참으로 희한한 이야기라서 네가 믿을지 모르겠다만 이것이 진실이라는 것은 신들이 보증할 것이다. 트로이아를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길을 잃고 온갖 나라를 다 돌아다녔다. 퀴프로스에도 갔고 이집트에도 갔고 포에니키아에도 갔다. 심지어는 아프리카 북부의 리뷔아라는 나라에도 들렀다. 일 년 전에는 폭풍에 떠밀려 파로스 항구까지 간 적도 있다. 나일 강 어귀에서는 불과 하루 뱃길이다. 양식이 떨어져 거의 굶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 섬에는 <바다의 노인>이라고 불리는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이 사시더구나. 그녀는 우리의 형편이 딱한 것을 알고는, 어느 날 내가 혼자 바닷가를 걷고 있을 때 나에게 오셨더구나. 고국으로 배를 몰고 가자면 바람이 있어야 하고, 바람을 얻자면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무슨 수로 신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그 때 그걸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께서는 '신들의 도움을 받는 방법은 우리 아버지만 아십니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하세요. 매일 정오가 되면 아버지께서는 바다에서 해변으로 나오셔서 물개들에 둘러싸인 채 낮잠을 주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버지를 사로잡으셔야 합니다. 어렵고 어려운 일이지요. 아버지는 그대의 손에 사로잡히시는 순간 그대의 손길에서 벗어나려고 온갖 것으로 다 둔갑하실 테니까요. 무엇으로 둔갑하든 놓치지 말고 꽉 잡고 있으면 아버지는 본 모습으로 돌아가 그대가 묻는 것에 순순히 대답하실 것입니다'라고 하시더구나.
프로테우스 신의 따님께서는 나와 내 부하 셋이 숨어 있을 만한 모래밭의 조그만 구덩이까지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들어가자 물개 가죽으로 덮어 숨겨 주시더구나.
정오가 되자 바다의 노인 프로테우스 신께서 물개 무리와 함께 바다에서 나오시더니. 파도가 무늬를 그려 둔 모래밭에 누워 잠을 청하시더구나. 신께서 잠이 드는 순간 우리는 그분을 덮쳐 있는 힘을 다해 꽉 붙잡았다. 그분은 처음에는 사자로 둔갑하시더니. 이어서 멧돼지, 표범, 구렁이, 흐르는 물, 커다란 꽃나무로 둔갑하더라. 우리가 꽉 붙잡고 놓지 않자. 마침내 본 모습을 되찾고는 나에게. 도대체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더라. 나는 고향으로 가는 배의 돛을 부풀릴 바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일 강 어귀로 나가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면 순풍을 타고 무사히 고향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내친 김에 내 친구들과 친척들 일까지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나의 형 아가멤논은 자기 궁전에서 살해되었다고 대답하시더라. 이 일은 너도 들어서 잘 알고 있을 게다. 그분은 마지막으로 오뒤세우스의 안부를 일러 주었다. 오뒤세우스는 먼 바다의 외로운 섬에 사는 요정 칼립소에게 붙잡혀 있다고 하시더라. 칼립소가 오뒤세우스를 사랑해서 도무지 놓아주지 않는다는 거야. 오뒤세우스가 그 섬에 산 지가 벌써 7년째라는구나. 오뒤세우스는 자기의 조국, 자기의 백성들 품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외딴 섬이라 지나는 배가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더라‥‥‥."
메넬라오스가 긴 이야기를 마치고 나자. 텔레마코스가 물었다.
"어떻게 하면 그 섬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방법이 없구나. 하지만 신들이 아직까지도 살려 놓고 있는 것을 보면 너의 아버지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뱃사람들은 모두 죽었지만 너의 아버지 혼자 살아 있는 것이 그 증거 아니겠느냐? 그러니 언젠가는 돌아오시지 않겠느냐?"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의 이런 대답에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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