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간추린 오딧세이 4 / 호메로스

by 송화은율
반응형

그리운 이타카

 

오뒤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이 재워 준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깨어나서 보니 파이아케아의 배는 온데간데없고 올리브 나무 밑에 홀로 누워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은 알키노스 왕이 갤리온 선에 실어 주었던 따뜻한 겉옷이었다. 왕과 시하들로부터 받은 선물은 주위에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테나 여신이 보낸 자옥한 아침 안개 때문에 그는 주위의 지형을 살필 수 없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어디에 와 있는지. 무슨 일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테나 여신이 아침 안개의 장막을 쳐놓은 것은 오뒤세우스를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테나 여시은 자기가 먼저 오뒤세우스를 만나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 것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파이아케아에서 가져온 보무를 하나하나 점검해 보았다. 손잡이가 은으로 된 칼도 뽑아 보았다. 그는 해변을 걸으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 해변으로 아테나 여신이 젊은이로 변장하고 나타났다. 왕이나 귀족들이 입을 수 있는 겉옷 차림에 창까지 한 자루 손에 든 젊은이의 모습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저를 도와 주세요. 여기가 도대체 어딘가요? 이 곳 사람들은 친절한가요?"

젊은이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이 대답했다.

"그런 질문을 하시다니 그대도 어지간히 아둔한 사람이군요? 여기가 어디냐니? 이타카 섬이 아니오? 저 트로이아 전쟁터가지 이름이 알려진 이타카도 모르시오?"

조국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안 오뒤세우스의 가슴 속에 기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조국을 떠나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떠날 때 어린아이였던 젊은이들이 19년 세월이 흐른 뒤에는 어떤 청년들이 되어 있을 것인지. 자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전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타카 왕좌에는 어쩌면 자기 아들이 아닌 엉뚱한 인물이 앉아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그 젊은이에게도 자기 정체를 밝힐 수 없었다. 젊은이로 변장한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어디에서 온 누구냐는 질문을 받자 오뒤세우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크레타 섬 사람이오."

그러자 젊은이로 모습을 한 아테나 여신이 또 물었다.

"아니, 크레타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보물과 함께 이타카에 와 있습니까? 어째서 이타카 에 와 있으면서도 이 곳이 어디이지 모르는 것입니까?"

 

오뒤세우스는 둘러대기 시작했다.

"나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했던 크레타 사람으로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귀국했는데 크레 타왕자 중의 하나가 내 전리품을 빼앗으려 했지요. 그래서 그 왕자와 싸우다가 그만 오아 자를 죽이고 말았어요. 급하게 보물을 챙겨 가지고 포에니키아 장삿배를 타고 도망쳤지요. 그 배의 선장은 나를 퓔로스에다 내려 주기로 약속했는데 엉뚱한 길로 들어섰어요. 그래서 이 섬에 내려 잠을 잤는데, 자고 있을 동안 나만 이렇게 남겨 놓고 떠난 모양이오."

오뒤세우스의 설명에 젊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뒤세우스도 따라 웃다가 자세히 보니 젊은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아름다우면서도 위풍당당한 아테나 여신이 서 있었다.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를 놀렸다.

"꾀많은 오뒤세우스라고들 하더니 과연 잘도 둘러대는구나.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냐?

트로이아에서 그렇게 여러차레 그대를 도와 주었고 알키노스 왕의 궁전에서도 그렇게 여러 번 그대를 도와 주었는데도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냐?

오뒤세우스는 아테나 여신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다가 볼멘 소리를 했다.

"하지만 바다에서 온갖 고초를 당할 때는 저를 도와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 게 여신을 저의 수호 여신이라고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리고 제가 어떻게 제 조국에 돌아 왔다는 말씀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대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포세이돈 신을 노하게 하여 바다에서 그런 고초를 당했다. 포세이돈 시은 내 아버 지 제우스 신의 아우가 아니냐? 내가 어떻게 숙부와 맞서면서까지 그대를 도와 줄 수 있겠 는가? 이제 그대는 그대의 나라로 돌아왔다. 이제 나도 마음대로 그대를 도와 줄 수 잇다. 둘러 보라. 이 땅이 그대의 조국이지 아닌지, 어디 한번 둘러보라."

 

여신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자옥하던 잿빛 구름의 장막이. 해가 솟으면서 아침 안개가 사라지듯이 말끔히 걷혔다. 오뒤세우스는 주위의 낯익은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가 잘 알고 잇는 풍경. 그가 오래 사랑해 온 풍경이었다. 곶 안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항구, 해변에 깎아지른 듯이 솟은 울창한 숲의 산. 활을 쏘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잇는 바다 요정의 동굴. 은빛 올리브 나뭇잎에 가려진 그 동굴의 입구......모두가 낯익었다. 오뒤세우스는 목이 메일 듯한 감격을 주체하지 못해 무릎을 꿇고 까실까실한 조국의 흙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아테나 여신이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돌아왔지만 이 나라 형편은 말이 아니다. 그대의 아내 페넬로페는 슬픔에 잠겨 있 다. 궁전에는 왕비와 결혼하자고 조르는 불한당들이 들끓고 있다. 그대의 아들 텔레마코스 가 있지만 아직 어려서 어머니를 도울 수가 없다. 게다가 텔레마코스는 지금 그대의 소식 을 들으려고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의 궁전에 가있다."

오뒤세우스는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외쳤다.

"여신이시여, 지금부터 저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먼저, 사람들 눈에 뛰기 전에 이 보물을 감추기로 하자. 사람들이 이 보물을 보면 그대의 정체를 궁금하게 여길 것이 아닌가?"

아테나 여신과 오뒤세우스는 파이아케아 섬나라에서 가져온 보물을 동굴로 옮겼다. 여신은 거대한 바위를 움직여 동굴의 입구를 단단히 막았다. 그런 다음 여신은 마법으로 오디세우스의 모습을 바꾸어 주었다. 그가 입은 훌륭한 겉옷은 누더기 숫사슴 가죽 옷으로 바꾸었다. 여신은 이어서 오뒤세우스의 살 같을 주름지게 만들고, 눈빛도 흐릿하게 만들었다. 오뒤세우스의 모습은 영락없이 트로리라의 국보를 훔치러 성 안으로 들어갈 당시의 거지 모습 그대로 였다.

"자/ 이제 섬을 가로질러 그대가 부리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집으로 가라. 그는 그대의 집안에 충성을 바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대는 일단 그 집네 몸을 숨기고 있거라. 그러면 나는 메넬라오스의 궁전으로 가서 텔레마코스를 불러 오겠다."

말이 끝나자마자 아테네 여신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문득 불어온 바람 한 자락이 여신이 있었던 흔적을 대신했다. 오뒤세우스는 내륙으로 통하는 산길로 걸음을 옮겼다.

오뒤세우스가 왕궁의 돼지우리에 이르렀을 때 에우마이오스는 문턱에 쭈그리고 앉아 소가죽으로 신발을 만들고 있었다. 에우마니오스가 기르고 있던 개들이 나그네의 모습을 보고는 금방이라도 공격할 듯이 짖어댔다. 에우마이오스가 에우마이오스가 달려나와 돌을 던져 개들을 쫓았다. 에우마이오스는 거지꼴을 한 오뒤세우스를 친절하게 맞아들여 자기 오두막으로 안내하고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내놓았다. 에우마이오스는 실로 오래간 만에 자기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을 만남 셈이었다. 그래서 그는, 왕이 트로이아 전쟁을 끝내고 귀국하는 길에 실종되었다는 이야기, 불량한 귀족 청년들이 왕의 궁전을 차지하고 왕비에게 결혼을 조르고 있다는 이야기를 두서 없이 했다. 돼지치기는 실종된 자기네 왕을, 지금도 옛날 과 다름없이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오뒤세우스는 노인의 이야기를 끈기있게 다 듣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나도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들은 소문이 있소. 그대의 주인은 살아 있어요. 나는 그가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에우마이오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거지가 듣기 좋도록 말을 꾸며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역시 나그네 거지를 대접하는 뜻에서 오뒤세우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러 주었다. 이윽고 젊은 돼지치기들이 들판에서 놓아 먹이던 돼지 떼를 끌고 우리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때가 되자 에우마이오스는 돼지고기를 구워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오뒤세우스 앞에다 차려 주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 오뒤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로 노인을 기쁘게 해주었다. 두 사람은 잠들 때까지 트로이아 전쟁과 오뒤세우스 이야기는 계속했다.

그 즈음 아테나 여신은 메넬라오스 궁전에 머물고 있는 텔레마코스 곁에 있었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의 안부와 이타카의 형편이 궁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테나 여신은 텔레마코스에게 간곡하게 일렀다.

"너의 어머니도 이제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오래지 않아 귀족 건달들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니 어서 빨리 귀국해라 하지만 올 때와는 다른 뱃길로 가야 한다. 안티노오스의 배가 사모스 섬의 절벽 밑에서 너의 배를 기다리고 있다. 안티노오스는 너를 해치려고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타카에 도착하거든 뱃사람들은 궁전으로 보내도 좋다. 하지만 너는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의 돼지 우리로 가거라. 에우마이오스는 아직까지도 너와 너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섬기는 사람이다."

아름 날 아침 텔레마코스와 그의 친구 피시스트라토스는 메넬라오스와 헬레네에게 작별을 고했다. 헬레네는 손수 만든 비단 옷 한 벌을 텔레마코스에게 안겨 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은, 때가 되면 네 신부에게 입혀라. 그 때가 오기까지는 네 어머니에게 맡겨 두어라. 너에게 기쁜 일만 일어나기를 빌겠다. 이 헬레네가 온 사랑을 기울여 빌겠다."

텔레마코스 일행이 떠날 차비를 하고 있을 동안 그들의 마차는 궁전 문 앞에 서 있었다. 두 마리의 말을 어서 빨리 내닫고 싶어서 안달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독수리 한 마리가 산 위에서 날아 내려왔다. 독수리는 가까운 풀밭에서 놀고 있던 흰 거위 한 마리를 채어, 말의 잔등 위를 스치듯이 날아 공중으로 올라갔다.

피시스트라토스가 하나의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하늘의 독수리를 올려다 보면서 중얼거렸다.

"좋은 징조이기는 합니다만. 전하, 저것은 전하께 좋을 일이 생길 징조입니까. 아니면 저와 텔레마코스에게 좋은 일이 생길 징조 입니다까?"

헬레네가 메넬라오스를 대신해서 대답했다.

"너희 둘에게 좋은 일이 생길 징조다. 잠깐만......오뒤세우스가 오랜 방황 끝에 조국으로 돌아와, 자기 궁전에서 살진 건달들에게 복수한다는 뜻이다."

텔레마코스는 메넬라오스 왕과 헬레네 왕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올리고는 피시스트라토스와 나란히 마차에 올라 고향을 향해 길을 떠났다.

다음 날 두 사람은 퓔로스에 이르렀다. 피시스트라토스는 마차를 항구로 몰아 거기에서 기다리던 배 앞에서 메넬라오스의 궁전에서 받았던 선물과 함께 텔레마코스를 내려 주었다.텔레마코스가 퓔로스의 궁전에 들르지 않았던 것은 궁전에 들르면 네스토르 왕이 틀림없이 며칠 더 묵어 가라고 조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뱃사람을 a아 거기에서 바로 이타카를 향해 돛을 올렸다.

이타카 해변에 이르자 그는 아테나 여신이 가르쳐 준 대로 뱃사람들은 마을로 올려 보내고 자신은 걸어서 돼지치기의 집으로 향했다.

오뒤세우스와 돼지치기가 아침 식사를 짓기 위해 불을 지피고 있을 때였다. 돼지치기의 집으로 오르는 길에 한 젊은이가 나타났다. 개들이 우르르 달려나갔다. 짖어대는 개도 있었고 마당을 가로지르는 텔레마코스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도 있었다. 돼지치기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포도주 그릇이 엎질러졌다. 돼지치기는 젊은이에게 달려갔다. 오뒤세우스가 젊은이 쪽을 바라보았다. 헬레네의 말대로 젊은이의 모습은 자신의 물론이고 아버지 라에르테스와도 너무나 흡사했다. 그는 북받쳐 오르는 감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신이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 페넬로페의 품 속에 있던 아들이었던 것이다. 돼지치기는 오래 떠나 있던 아들은 맞아들이는 것처럼 텔레마코스를 껴안았다. 텔레마코스는 노인의 들은 두드리면 물었다.

"내가 때 맞추어 온 것입니까? 지금이라도 어머니의 결혼을 저지할 수 있겠습니까?"

돼지치기는 텔레마코스의 손을 끌고 자기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거지로 변장한 오뒤세우스

는, 텔레마코스가 문턱을 넘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왕자 텔레마코스는 그데로 앉아 있으라고 손짓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앉아 있어도 좋아요. 넓어서 그대가 일어서지 않아도 불가에 앉을 수 있겠어요."

돼자차가는 검불 한 아름을 안아다 놓고 그 위에 양의 털가죽을 깔아 텔레마코스가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세 사람은 화덕에 둘로앉아 차가운 돼지고기와 보리빵, 나무 그릇에 따른 포도주로 아침 식사를 했다. 식사 중에 왕자 텔레마코스와 돼지치기는 늙은 거지를 장차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 의논했다. 오뒤세우스는 자기 자신의 생각에 골몰해 있는 데다 어찌나 음식을 맛있게 먹었던지 두 사람이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결국 두 사람은 텔레마코스가 그 늙은 거지를 궁전으로 데려가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런 꼴로 궁전에 들어갔다가는 귀족 건달들로부터 욕을 먹거나 모욕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늙은 거지는 돼지 우리에서 지내거 되었다. 왕자는 늙은 거지 몫의 옷과 음식을 보내어 에우마이오스의 짐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거지 문제가 결정되자 텔레마코스는 돼지치기를 궁전으로 보내어 자기가 무사히 먼 여행길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을 알리게 했다.

돼지치기가 오두막을 떠난 직후 개들이 일제히 짖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끙끙거리면서 꼬리를 내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와 숨었다. 눈이 유난히 빛니는 아테나 여신이 문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텔레마코스의 눈에는 아테나 여신이 보이지 않았다. 오뒤세우스와 개들의 눈에만 보였던 것이다. 오뒤세우스가 오두막 밖으로 나가 여신을 맞았다. 여신은 오뒤세우스에게 말했다.

"이제 둘 뿐이니, 아들에게 그대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좋겠다."

여신은 이러면서 늘 들고 다니는 황금 막대기로 오뒤세우스의 머리를 건드렸다. 오뒤세우스는 여느 때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의 누더기 사슴 가죽 옷은 왕이나 입을 수 있는 으리으리한 용포로 변했다. 그는 돌아서서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불가에 앉아 있던 텔레마코스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늙은 거지를 보고는 벌떡 일어나면서 물었다.

"어르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세 잡수신 노인이 아니었습니까? 그러네 어쩌면 이렇게 변하실수 있습니까? 어르신께서는 영생불사하시는 신이신 모양이군요?"

"신이 아니다. 네 아버지가 사람들 눈을 속이려고 거지로 변장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본 모습을 되찾은 것이다."

텔레마코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내 아버지이실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잠깐 뜸을 들였다가 이렇게 말을 이었다.

".......부탁입니다. 내 아버지 오뒤세우스가 아니시거든 공연한 거짓말로 슬픔에 잠겨 있는 우리 모자를 더욱 슬프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거짓이 아니다. 내 말을 믿어라. 내가 바로 오뒤세우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말고 오뒤세우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한 적도 없었다."

텔레마코스는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오뒤세우스는 아들에게 자기가 겪었던 모험 이야기이며, 바다 요정의 동굴에 숨겨 둔 파이아케아 인들로부터 받은 보물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는 궁전에 몰려들어 행패를 부린다는 건달들은 모두 몇 명이고,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 자세하게 물어 보았다.

"백일여덟 명입니다. 저를 배반하고 건달 패에 붙은 제 하인도 하나 있습니다. 놈들은 어머니에게 결혼하자고 조르러 올 때도 꼭 칼을 차고 옵니다. 무예의 수준도 상당합니다. 여느 때는 방패나 갑옷 같은 것으로 무장하지만 어머니에게 결혼을 조를 때는 무장하지 않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놈들을 물리칠 수 있다. 아테나 여신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만 우리와 함께 하시면 무장한 적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두 사람은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텔레마코스는 다음 날 아침에 궁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에게 공격적이고 모욕적인 태도를 취할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건달 패거리들과 공개적인 말썽을 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오뒤세우스가 아들에게 당부했다.

"놈들과의 싸움을 자제하도록 하여라. 네가 궁전으로 올라간 다음 날 내가 거지로 변장하고 올라가겠다. 내가 신호를 보내거든 놈들의 무기는 연회장 벽장에 숨겨 버리도록 하여라."

"놈들이 무기를 저희들 손 닿는 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뭐라고 할까요?"

"고기 구울 때 나는 연기에 노출되면 기름이 낀다고 해라. 그래도 곁에 두려고 하거든,네 어머니의 손님들이 술에 취해서 싸우면 안되기 때문에 안전한 곳에 치워 두어야 한다고 우겨라."

두 사람이 모처럼 소리내어 웃었다.

"또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오뒤세우스가 대답했다.

"연회장 구석자리에 앉은 거지는 거지일 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거라.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나의 정체가 알려지게 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구석자리의 거지

 

텔레마코스는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갔을 때 귀족 건달들이 창던지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날 오전에 벌어질 잔치를 위해 돼지를 잡는 건달들도 있었다.

건달들은 겉으로는 텔레마코스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어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텔레마코스의 변한 모습에 적잖아 놀라는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소년이 줄로만 알고 있던 텔레마코스가 그들에게 위협을 가할 만큼 어엿한 대장부가 되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건달들은 적당한 때가 오면 텔레마코스를 제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죽이려던 안티노오스 일당이 사모스 섬의 절벽 밑에서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텔레마코스는 알고 있었을뿐, 내색은 하지 않았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로부터 아들이 왔다는 사실을 미리 통보받고 있던 어머니 페넬로페는 자기 방에서 아들을 맞았다. 페넬로페는 건달들에 대한 분노와 아들을 맞는 기쁨이 어우러진 복잡한 감정을 눈물로 표현했다. 텔레마코스는 어머니를 위로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자기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아버지는 고향으로 돌아오고 있음에 분명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에게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 아침까지 아버지 오뒤세우스와 함께 있다가 아버지는 돼지치기의 오두막에 남겨 두고 왔다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아버지의 당부를 생각하고 침묵을 지켰다.

한편, 에우마이오스는 텔레마코스의 심부름을 마치고 다시 돼지치기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가 오기 직전에 아테나 여신이 나타나 오뒤세우스의 모습을 늙은 거지로 되돌려 놓았기 때문에 그는 옛 주인을 알아볼 수 없었다. 늙은 거지는 한시바뻐 궁전에 들어가고 싶다면서 우겼다.

"아무것도 없는 산, 풀을 뜯고 있는 동물 구경은 이제 신물이 납니다. 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 좋습니다. 부디 데리고 가 주십시오."

에우마이오스는 돼지 떼는 젊은 돼지치기들에게 맡기고 거지 노인에게 지팡이를 하나 주어 함께 산을 내려갔다.

마을 가까이 왔을 때 두 사람은 궁전의 양치기 멜란티오스를 만났다. 멜란티오스는 건달 중의 누군가가 왕이 되면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 건달 무리에 붙은 양치기였다. 그런 멜란티오스는 오뒤세우스와 텔레마코스에게 변함없이 충성을 바치는 에우마이오스를 식충이, 부랑자라고 놀리면서 오뒤세우스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오뒤세우스는 맨손으로도 멜란티오스를 이길 수 있었지만 정체가 드러날까 봐 꾹 참았다. 두 사람은 앞을 가로막는 멜란티오스를 피해 걸음을 재촉했다. 멜란티오스는 뒤에서 두 사람을 향해 욕지거리를 해댔다.

멜란티오스로부터 모욕을 당한 것말고는 별 다른 일 없이 두 사람은 궁전 앞에 이르렀다.

궁전의 문 옆에는 논밭으로 실려 갈 똥무더기가 있었다. 따뜻한 똥무더기 위에 늙은 개 한 마리가 다리를 뻗고 누워 졸고 있었다. 한때는 알아 주는 사냥개였지만 두 사람이 보았을 당시에는 개벼룩투성이인 비루먹은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늙은 개가 고개를 들고는 지나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었다. 오뒤세우스와 늙은 개의 눈이 마주쳤다. 늙은 개는, 거지 차림을 하고 있었는데도 오뒤세우스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늙은 개는 일어날 힘이 없어서 귀와 꼬리를 흔들었을 뿐이었다. 오뒤세우스는 그 개를 잘 알았다. 그가 검은 배를 몰고 트로이아로 떠날 당시에는 강아지였던 아르고스였다.

오뒤세우스는 손등으로 개의 눈을 쓰다듬으면서 중얼거렸다.

"이렇게 멋진 개가 똥무더기 위에 이렇게 누워 있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때는 알아 주던 사냥개였을텐데..........."

에우마이오스가 말대답을 했다.

"그렇습니다. 한때는 굉장했지요."

한창때는 젊은 사냥꾼들이 이 개를 데리고 나가 사슴 사냥, 들염소 사냥, 토끼 사냥도 했답니다. 하

지만 이 개의 주인이던 오뒤세우스 왕께서 외국에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는 하인들이 이 개를 전혀

보살피지 않았지요. 더구나 궁전이 저렇게 난장판이 된 뒤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지요."

오뒤세우스는 자기가 기르던 그 사냥개 아르고스 옆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는 개 앞에 쪼그리고 앉아 늙은 개의 지친 머리를 자기 무릎으로 바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눈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 수척한 개는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근 19년 동안이나 기다려 오던 주인을 만나는 순간 아르고스는 숨을 거둔 것이었다.

오뒤세우스는 에우마이오스의 뒤를 따라 궁전으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 것인데도 불구하고 연회장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연회장에서는 건달들이 수금 가락에 맞추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나그네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문턱에 앉아, 향나무 문설주에 등을 기댔다.

텔레마코스는 화로 옆에 있는 높은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는 오뒤세우스가 문턱에 낮는 것을 보고는 에우마이오스에게 명하여, 그가 보리빵과 돼지고기 덩어리 가까이에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오뒤세우스는 다가가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먹으면서 그는 건달들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저분한 주머니를 꺼내 들고 지나가면서 건달들 앞에다 그 주머니를 내밀며 동냥해 줄 것을 부탁했다. 빵 껍질이나 뼈 조각을 넣는 귀족 건달도 있었다. 사모스 섬에서 텔레마코스를 기다리던 젊은 귀족 아티노오스는 의자를 하나 들어 오뒤세우스의 어깨를 내리쳤다.

"여기 계시는 이 안티노오스 나으리가 결혼식을 맞기 전에 죽음을 맞게 되기를......"

오뒤세우스가 중얼거렸다. 좌중이 심상치 않게 술렁거렸다. 웃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있게 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들은 나그네를 잘못 대접하면 어떤 일을 당하는지 잘 알았다. 신들이 종종 나그네로 변장해서 사람들을 시험하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잔치 자리에는 하녀들도 있었다. 따라서 연회장에서 있었던 이 작은 일이 왕비 페넬로페의 귀에 들어간 것은 당연했다. 페넬로페는 자기 궁전에서 나그네가 푸대접을 받은 것에 대해 화를 내었다. 더구나 오뒤세우스가 트로이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실종된 뒤로는 이타카를 지나가는 나그네나 여행자는 반드시 불러 지아비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느냐고 물어오던 페넬로페였다. 페넬로페는 하녀를 보내어 에우마이오스에게 그 나그네를 데리고 자기 방으로 오게 했다. 왕비의 부름을 받은 오뒤세우스가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미 연회장에서 한 차례 얻어맞은 사람입니다. 왕비에게 청혼하려는 저 사람들이 모두 돌아 가기 전에는 왕비마마의 방으로는 가지 않겠습니다. 갔다가 저 사람들에게 무슨 변을 또 당하게요?"

에우마이오스의 말을 전해 들은 왕비는 좋을 대로 하라고 했다. 왕비는 조용해지면 연회장으로 내려가 거지 노인을 마나겠노라고 했다.

오뒤세우스는 연회장 문턱에 앉아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평하를 즐기면서 그 때를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하나의 거지가 연회장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새로 들어온 거지는 한동안 궁전 근처를 주름잡던 이로스라는 이름의 덩치가 큰 거지였다. 이로스는 덩치만 컸지 근육도 시원찮고 기백도 시원찮은 거지였다. 이로스는 생전 처음 보는 거지가 문턱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소리쳤다.

"꺼져. 내손으로 끌어내기 전에."

오뒤세우스가 조용히 응수했다.

"문턱이 넓잔아요? 둘이 앉아도 되겠어요."

이 말에 화가 난 이로스가 얼굴이 벌개져 시근덕거리면서 외쳤다.

"여기에 계속해서 앉아 있고 싶거든 일어나서 나와 한판 붙자."

식사를 끝내고 춤판을 벌이려던 귀족 건달들은, 두 거지에게 싸움을 붙여 놓고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 귀족 건달들은 손뼉을 치면서 싸움을 부추겼다. 이기는 거지에게는 남는 음식을 한 보따리 싸주고, 거지 왕이라고 불러 주겠다고 했다. 아무도 거지 왕의 영역에서는 구걸을 못 하게 해주겠다고 말하는 건달도 있었다.

싸움을 피할 수 없겠다고 생각한 오뒤세우스는 윗도리를 벗었다. 오뒤세우스의 팔과 어깨의 근육을 본 이로스는 아무래도 싸워 봐야 얻어맞기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꽁무니를 빼려고 했다. 하지만 귀족 건달들이 둥그렇게 둘러서서 소리를 지르며 등을 떠미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로스가 오뒤세우스의 어깨를 향하여 되지도 않은 주먹을 날렸다. 그러나 오뒤세우스의 주먹은 이로스의 주먹이 날아오기도 전에 정확하게 이로스의 왼쪽 귀밑에 꽂혔다. 이로스는 연회장 바닥에 나가떨어져 코와 입으로 피를 쏟았다. 오뒤세우스는 이로스를 끌어 문 옆의 벽에 등을 기대게 했다. 이로스는 등을 기대고 앉은 채 피를 흘렸다. 귀족 건달들은 배를 잡고 웃으면서 오뒤세오스를 새 <거지 왕>이라고 부르면서 환호했다.

환호하는 귀족 건달들에게 오뒤세우스가 한 마디 했다.

"궁전의 연회장을 이렇게 나장판으로 만들다니 참 한심하십니다. 모두 댁으로 돌아가세요. 이 궁전의 주인이 돌아와 자기 궁전 연회장이 돼지 우리 꼴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좋아할까요?"

오뒤세우스의 말에 화가 난 귀족 건달들 중 에루뤼마코스라는 건달이 걸상을 하나 집어 오뒤세우스를 향해 던졌다. 오뒤세우스가 살짝 몸을 틀자 걸상은 벽 앞에 놓여 있던 찬장에 가서 맞았다. 찬장에 놓여 있던 무수한 포도주 그릇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건달들은 그게 재미있었던지 다시 소리를 질러 환호했다.

실컷 먹고 마신 젊은 건달들이 하나둘씩 저희들 집으로 돌아갔다. 오뒤세우스와 테레마코스는 벽에 걸려 있던 무기를 모조리 모아 지하 창고로 옮기고는 문을 자물쇠로 채웠다. 일이 끝나자 텔레마코스는 궁전 아채에 있는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오뒤세우스는 벽난로 불빛이 비칠뿐 여전히 어두운 연회장 구석자리에서 페넬로페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녀들이 먼저 내려왔다. 하녀들은 저희들끼리 웃고 떠들어대면서 잔치 자리를 치웠다. 하녀들은 거지가 그 때까지도 어두운 구석자리에 있는 것을 알고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하녀 가운데 하나인 멜렌토는 거지를 쫓아내려고 거지의 귀밑에다 횃불을 갖다 대었다. 그러나 바로 그 때 연회장으로 들어오던 페넬로페가 하녀를 꾸짖고는 그 횃불로 연회장 중앙의 난로에 불을 지피고는 그 옆에 의자를 갖다 놓게 했다. 오뒤세우스가 먼저 의자에 앉았다. 하녀들이 물러가자 페넬로페도 희뿌연 양가죽을 깐 자기 의자에 앉았다. 페넬로페가 먼저 그에게 이름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정체를 밝힐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오뒤세우스는 또하나의 이야기를 지어냈다.

"저는 크레타의 왕자입니다만 트로이아 전쟁에는 참전하지 못했습니다. 오뒤세우스 왕께서는 트로이아로 가시는 길에 저희나라에 들르셨지요. 왕께서 저희 궁전에 머무시는 동안 이타카 군사들은 폭풍에 부서진 배를 수리했고요......"

페넬로페는 오래전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꿈에도 그리던 지아비 이야기여서 눈물을 떨구었다. 하지만 당시 페넬로페를 찾아와 오뒤세우스를 이야기하는 나그네들 중에는 가짜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페넬로페는 거지 노인을 시험하기 위해서 물었다.

"오뒤세우스 왕이 어떤 옷을 입으셨던가요? 나는 남편에 관한 이야기에 목말라 있는 사람이 랍니

다."

오뒤세우스는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말투로 왕비의 물음에 대답했다.

"보라색 겹 겉옷을 입고 계셨지요. 어깨에서 겉옷을 여미는 것은 집게가 두 개 달린 브로치 였고요.

브로치는 암사슴을 덮치는 사냥개 모양이었습니다. 겉옷 밑에는 양파 껍질처럼 부드러운 속옷을 입 고 계셨고요."

페넬로페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떠날 당시 오뒤세우스에게 그 속옷과 겉옷을 입혀 준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왕비를 달랬다.

"마마, 울지 마십시오. 그 뒤로 불운이 닥쳐 저 역시 이렇게 방랑하고 있습니다만 오뒤세우스 왕 소식은 그 뒤에도 들었습니다. 제가 들은 소문으로는 뱃사람들은 모두 잃었지만 왕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실 뿐만 아니라 지금 고향으로 돌아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합니다."

페넬로페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헛된 믿음으로 보낸 세월이 너무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거지 노인이 불어넣은 희망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거지 노인이 고맙게 느껴졌던 페넬로페는 왕실의 유모인 에우뤼클레이아를 불러 뜨거운 물로 노인의 발을 씻겨 주라고 명령했다. 거지 노인의 발에는 먼지가 잔뜩 묻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군데군데 물집이 잡혀 있기까지 했다.

에우뤼클레이아가 뜨거운 물이 든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그 늙은 유모는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오뒤세우스는 불에 덴 듯이 물러앉으면서 불빛에 비치지 않도록 고개를 돌렸다. 에우뤼클레이아가 합쭉한 입으로 중얼거리면서 오뒤세우스의 발을 끌었다.

"내 비록 어리석은 늙은이지만 손님의 발을 씻기는 일에는 보람을 느낀답니다. 타향 땅을 떠도는 우리 주인님에게도 이렇게 해 주는 하녀가 있어야 할 텐데요. 나그네께서도 풍채가 좋아서 몸을 깨끗이 씻고 좋은 옷을 입으면 우리 주인님처럼 보이겠네요. 그래서 모습도 비슷하고 ……손하며 발하며 ……"

"제가 왕과 함께 있는 것을 본 사람도 그런 소리를 합디다."

오뒤세우스가 둘러대었다.

중얼거리면서 발을 씻겨 주던 하녀가 무엇에 놀랐는지 흠칫거리면서 물러섰다. 거지 노인의 누더기 자락이 열리는 순간, 무릎에서 시작되어 엉덩이까지 이어지는 길고 하얀 흉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가 소년 시절 사냥에 따라 나섰다가 멧돼지 엄니가 박혀서 난 상처 자국이었다. 오뒤세우스의 유모였던 늙은 하녀가 속삭였다.

"오, 우리 도련님. 오, 주인님 ……"

늙은 하녀 에우뤼클레이아는 오뒤세우스가 변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았다. 하녀는 늙은 사냥개 아르고스 다음으로 오뒤세우스의 정체를 알아본 사람이기도 했다.

에우뤼클레이아는 손에 잡고 있던 오뒤세우스의 발을 첨벙 소리가 나게 대야에 떨어뜨리고는 옆에 앉아 있던 페넬로페에게 주인이 돌아왔다고 소리를 지르려 했다. 그 때 아테나 여신이 페넬로페의 주의를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아테나 여신이 오뒤세우스의 정체가 밝혀지기는 이른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오뒤세우스는 한 손으로는 늙은 유모의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의 귀를 가까이 끌어와서 속삭였다.

"유모, 조용히 하세요. 내가 죽는 것을 바라시오?"

오뒤세우스의 뜻을 이해한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도련님. 조용히 하고 말고요. 돌처럼 가만히 있고말고요."

유모는 이렇게 말하고는 떨리는 손으로 오뒤세우스의 발 씻기를 끝마쳤다.

유모가 발을 씻기고 그 발에다 올리브 기름을 발라 문지른 다음 대야를 들고 나갔을 때에야 페널로페는 거지 노인 쪽에서 시선을 돌리면서 걱정스러워하는 말추로 중얼거렸다.

"오뒤세우스가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나는 저 건달 중 하나를 새 주인으로 섬겨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바라지도 않은 사람을 골라 시집 갈 수 있겠어요?"

오뒤세우스가 엄숙한 말투로 왕비에게 말했다.

"무슨 대회를 여시지요. 거기에서 우승하는 사람에게 시집가시면 되지요."

"페널로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물레가락에 실을 감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물레가락을 떨어뜨리고는 연회장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래요. 오뒤세우스의 활이 아직도 궁전 어딘가에 있어요. 오뒤세우스가 아니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쏠 수 없는 활이지요. 한 개도 아니고, 도끼 열두 자루를 나란히 늘어 놓고는 화살을 쏘아 열두 개의 고리를 다 지나가게 하고는 했는데 정말 굉장한 재주였지요. 그래요. 활쏘기 대회를 열어야 겠어요. 누구든지 내 남편의 활을 구부리고 화살을 쏘아 열두 개의 도끼고리를 모두 지나가게 하면 새 주인으로 모시겠어요.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시집와서 이 날 이때까지 살아온 이 궁전에 이별을 고하겠어요."

"그렇다면 내일 대회를 여세요. 이것은 내 생각입니다만, 우승하는 사람이 나오기 전에 오뒤세우스 왕이 여기에 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페널로페는 한참 거지 노인을 바라보다가 일어나 하녀들이 기다리고 있는 침실로 올라갔다.

 

 

활쏘기 대회

 

오뒤세우스는 궁전 복도에 쌓인 양가죽 더미 위에서 그 날 밤을 보냈다.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 많은 적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인지 밤새 그 생각만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날이 밝으면 무수한 적을 상대로 싸워야 할 사람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아테나 여신은 걱정스러워 그를 잠재웠다.

아친 일찍 잠을 깬 오뒤세우스는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 신에게 도와주시기를 빌고, 도와 주시겠다면 그 조짐을 미리 보여 달라고 애원했다. 그가 기도를 끝마치자마자 마른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들렸다. 가까이에서는 하녀들이 곡식을 갈고 있었다. 궁전으로 몰려들 귀족 건달들에게 먹일 빵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다른 하녀들은 모두 곡식 갈기를 끝내고 들어갔는데 노파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노파는 일하는 속도가 느려 자기에게 맡겨진 일감을 다 해치우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노파의 입에서 무시무시한 말이 튀어나온 것이었다.

"오 제우스 신이시여. 저 천둥 소리는 어느 복 많은 사람을 도우시겠다는 약속의 증거일테지요? 저도 그 복을 좀 나누어 가지게 하소서. 내 주인의 연회장에서 빈둥거리는 젊은 귀족들을 위해 곡식을 가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게 하소서. 그 젊은 건달들 때문에 이 늙은이의 뼈가 빠집니다. 이것으로 만드는 음식이 그 놈들이 이승에서 먹는 마지막 음식이게 하소서."

천둥 소리와 노파의 말에 오뒤세우스는 힘을 얻었다. 오뒤세우스의 가슴에 용기가 샘 솟으면서 팔뚝에도 힘이 올랐다.

오래잖아 하녀들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흙으로 된 연회장 바닥을 비질한 뒤 물을 뿌리는 하녀들이 있는가 하면 걸상에다 보라색 깔개를 까는 하녀. 식탁을 닦는 하녀. 하녀의 우두머리인 에우뤼노메의 꼼꼼한 감독 아래 포도주 잔을 닦는 하녀도 있었다. 물을 길러 다니는 하녀들의 발걸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빨라져 갔다.

돼지 우리에서 그 날 잔치에 쓰일 돼지를 몰고 온 돼지치기가 오랜 친구 사이나 되는 것처럼 오뒤세우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우고 있을 때 염소치기 멜란티오스 역시 그 날 잔치에 쓰일 염소 떼를 몰고 들어오다가 오뒤세우스에게 건방지게 한 마디 했다. "거지 양반. 아직도 여기 있었소? 내가 도와주기 전에 얼른 꺼지는 게 좋을 텐데?"

이어서 소치기 필렉티오스 역시 그 날 잔치에 쓰일 소를 몰고 들어왔다. 그는 거지 노인이 귀족 건달들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몹시 분개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오뒤세우스에게 달려가 그의 팔을 잡으면서 인사말을 했다.

"노인장, 내 환영 인사 받으세요. 어제는 고약한 대접을 받았다고 하나 곧 사정이 바뀔 것이오. 그대 같은 분에게도 볕들 날이 올 것이고, 내가 키운 소를 잡아먹는 저 귀족 건달들에게도 내리막 길이 있을 것이도."

이어서 귀족 건달드링 시끄러운 거위 떼처럼 무리를 지어 아침 식사가 차려질 궁전의 연회장으로 향했다. 좋아하는 사냥개 몇 마리를 이끌고 사냥창을 든 텔레마코스도 지나갔다.

텔레마코스는 오뒤세우스에게, 그 날만은 연회장 문턱에서 앉지 말고 당당하게 연회장 안에 자리를 잡으라고 했다. 그는 하녀들에게도 당부하여 오뒤세우스도 당당한 손님인 만큼 여느 손님과 같은 분량의 음식을 차려 주게 했다. 귀족 건달 중의 하나인 크테시포스가 이런 말을 했다.

 

"암, 여느 손님과 똑같이 주어야 하고말고, 하지만 나는 거기에다 이걸 보태주고 싶은데 ……"

그는 이렇게 말하고는 있는 힘을 다해 소 발 하나를 오뒤세우스에게 던졌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몸을 옆으로 기울여 날아오는 소 발을 피했다. 소 발은 그가 등지고 있던 벽에 맞았다.

텔레마코스가 크테시포스에게 거칠게 항의했다. 그는 거지 노인이 비록 귀족들과는 의견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왕비의 새로운 신랑으로 뽑히기까지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텔레마코스가 항의한 것과 때를 같이 해서,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든 듯한 이상한 분위기가 연회장에 감돌았다. 귀족 건달 중에는 까닭도 모르는 채 깔깔 웃는 건달도 있었고, 질질 짜는 건달도 있었다. 울다가 웃다가 하는 건달도 있었다. 분위기가 그 모양이 된 까닭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아테나 여신이 생각한 바가 있어서 분위기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귀족 건달 중에 이따금씩 예언자처럼 이상한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른 귀족 건달들을 향해 이런 말을 했다. "가엾은 사람들아, 내 눈에는 그대들에게 내리는 어둠의 장막이 보인다. 그대들 뺨이 눈물로 젖은 게 보인다. 통곡 소리가 귀가 아프게 들린다. 벽과 바닥은 피범벅이 되었다. 궁전 앞마당에서 그대들의 영혼이 저승길로 내려가려고 서둘고 있구나. 하늘에서는 태양이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건달들은 그 말에 큰 소리로 웃고는, 궁전이 그렇게 어둡거든 마을로 내려가 보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예언자 같은 사람이 말을 이었다. "........암 내려가고 말고.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그대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그대들 동아리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 그는 이 말을 남기고는 연회장을 나가 버렸다. 건달들은 여전히 웃으면서도 팔꿈치로 서로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면서 표정을 살폈다. 그러다 다시 텔레마코스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텔레마코스에게 시비를 거는 것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텔레마코스는 입을 꾹 다문채 아버지 오뒤세우스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페넬로페가 오뒤세우스의 거대한 뿔활과 화살이 가득 든 화살통을 들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페넬로페 뒤로는 도끼 상자를 든 하녀들이 따라 들어왔다. 페넬로페는 지붕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앞에 자리잡고, 도전적인 눈으로 건달들을 내려다보며 선언했다. "귀족여러분, 여러분이 이렇듯 우기시니, 나도 여러분 중 한분과 결혼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나는 여러분 중의 한분을 뽑되, 시합을 통해서 뽑으려고 합니다. 여러분중 어느분이든 이 활에다 시위를 메우고 화살을 쏴, 한줄로 서있는 도끼 열두개의 고리를 무사히 지나가게 하는 분이 있으면 그분을 나의 새 지아비로 삼겠습니다." 테레마코스가 제일 먼저 앞으로 나서면서 첫 화살을 쏘는 권리는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만일에 내가 성공하면, 아무도 내 어머니이신 왕비님을 이 궁전에서 차지할 수 없게 됩니다." 왕자 텔레마코스는 겉옷 자락을 여미어 허리에 쿡 찌르고, 삽을 가져오게 해서 흙바닥에다 길고 좁다랗게 고랑을 팠다. 과녁을 세우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랑의 한 끝이 아버지 오뒤세우스 자리앞에 이르게 했다. 고랑이 만들어지자 이번에는 그 고랑을 따라 도끼를 세웠다. 그는 정확하게 한줄로 늘어섰는지 이따금씩 점검하면서 도끼를 세우고는 흙을 메우고 단단히 다졌다. 과녁이 한줄로 서자 텔레마코스는 활과 화살을 들고, 바닥보다는 비교적 높은 문턱으로 올라갔다. 화살을 쏘려면 먼저 활시위를 활에다 걸어야 했다. 그는 세 차례나 활시위를 활에다 걸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네 번째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힘을 썼다. 어쩌면 활을 굽혀 시위를 메울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지 노인이 한손을 움직임으로써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텔레마코스는 활을 내려놓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석하게도 아버지의 힘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하는구나." 이어서 하나씩 차례로 나섰다. 그러나 나서는 족족 실패였다. 열 사람인가 열두 사람인가가 실패하고 물러섰을 때였다. 안티노오스가 나서서 화로에 나무를 더 많이 가져다 넣게 하고는 기름항아리를 그 위에 올리게 했다. 뜨거운 기름으로 활을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사실 활을 쓰지 않고 둔 지가 하도 오래되어 탄력이 없기는 했다. 안티노오스는 활을 불에 쬐고 거기에다 뜨거운 기름을 바르고는 다시 휘어 보았지만 그 활을 굽히지는 못했다. 연회장에서 이 광경을 지켜 보고 있던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와 소치기는 똑같은 광경이 되풀이 되는 것이 지겨워 거지 노인 곁을 지나 궁전 안마당으로 나갔다. 오뒤세우스가 가만히 일어나 두 사람을 따라 나갔다. 안마당에 이르자 오뒤세우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두 사람에게 물었다. "만일에 그대들의 주인 오뒤세우스가 돌아온담녀 오뒤세우스를 편들겠소, 아니면 저 건달들의 편을 들겠소?" "오뒤세우스 왕의 편을 들지요." 두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에우마이오스는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신들이 도우셔서 왕께서 오셨으면...너무 늦지 않게, 때맞추어 오셨으면....."오뒤세우스가 누더기를 걷고 다리의 흉터를 보여 주면서 물었다."이 흉터를 알아보겠는가?" 그 흉터를 바라보는 순간 돼지치기와 소치기의 숨이 멎었다. 한동안 흉터를 내려다보고 있던 두 사람은 기쁨의 울음을 터뜨리면서 오뒤세우스에게 달려들어 친형제 껴안 듯이 껴안았다.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두 사람의 손을 떨어내고는 물러서라고 했다.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그렇게 얼싸 안고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잘 들어라. 이제 나는 연회장으로 들어간다. 에우마이오스, 그대는 나를 따라와서 내 곁에서 기다려라. 내 차례가 되면 그대가 활과 화살을 가져와 내 손에 들려다오. 말들이 많을 것이다만 못들은 척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 그리고 필렉티오스, 그대는 지금 궁전 안뜰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라. 그런 다음에 내 곁에 와서 기다리도록 하라." 오뒤세우스는 다시 왁자지껄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차례를 맞은 건달이 여전히 그 큰 활을 구부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두 번째로 차례를 맞아 문턱 가까이에 온 안티노오스는 시합을 다음날로 연기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활 구부리기 시합을 하기 전에 활의 신 아폴론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그 때였다. 문턱 가까이 있던 거지 노인이 자기도 힘과 기술을 시험할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했다. 젊은 건달들은 배를 잡고 웃었다. 건달 중에는 이렇게 말하는 건달도 있었다. "꿈도 크다. 저 영감은 여기에서 너무 잘 먹고 너무 많이 마셔서 머리가 어떻게 된 것임에 분명하다. 배에 태워 에케토스 왕에게 보내버리는게 좋겠어. 에케토스 왕은 사람 고기를 즐겨 먹는다니까... 저 영감을 쫓을 방법이 그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기둥앞에 서 있던 페넬로페가 목청을 높였다. 침착하면서도 냉정한 목소리였다. 페넬로페는 거지 노인도 다른 귀족과 마찬가지로 연회에 초대된 사람인 만큼, 그가 원한다면 똑같은 기회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감이 성공하면, 왕비께서는 영감과 결혼할 건가요?" 건달중 한 사람이 물었다. 좌중은 다시 웃음판이 되었다. 페넬로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노인이 그것을 기대하고 기회를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만일에 성공하면 나는 저 노인에게 '새 옷과 좋은 칼, 좋은 창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저 노인이 어디로 가시든 편히 가실수 있도록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 말을 받아 텔레마코스가 말했다. "저 노인이 성공하신다면, 그리고 원하신다면, 여기에 있는 아버지의 활을 드릴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이 활의 상속자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 페넬로페가 그럴 수는 없다고 하자 텔레마코스는 어머니에게 매정하게 말했다.

"어머니는 어머니 방으로 돌아가셔서 하녀들과 함께 실이나 감고 베나 짜십시오. 그것이 여성의 일입니다. 무기와 관련된 일은 남자들의 일인 만큼 남자들에게 맡겨 두시고요."

페넬로페는 놀라움을 가누지 못했다. 아들이 한번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페넬로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년 티를 벗지 않은 것 같던 아들이 집주인이나 된 것처럼 말하는 데 충격을 받고 말았다. 페넬로페는 하녀들을 데리고 조용히 자기 방으로 올라갔다.

연회장에서 에우마이오스는 활을 집어 오뒤세우스 앞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건달들이 활을 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활을 그 자리에 놓을 듯한 몸짓을 했다 텔레마코스가 에우마이오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건달들의 소리보다 훨씬 우렁찼다.

 

"에우마이오스, 활을 갖다 드려라! 그대는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 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대의 주인이니 마땅히 내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것은 아니냐!"

 

에우마이오스는 그 말에 용기를 되찾고 연회장을 가로질러 활과 화살통을 오뒤세우스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오뒤세우스가 그의 귀에 대고 무슨 말인가를 속삭였다. 그는 왕실의 늙은 유모 에우뤼클레이아에게 달려가 여자들 방의 문은 모두 잠그라는 말을 전하고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왔다. 그 동안 필렉티오스는 안뜰 문을 잠그고, 배에서 쓰는 밧줄로 단단히 동여매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연회장으로 돌아와, 에우마이오스 곁에 자리를 잡았다.

건달들은 거지 노인 오뒤세우스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러나 오뒤세우스는 들은 척도 않고 활을 이리저리 살펴보면서 상태를 확인했다. 산양의 뿔로 만든 그 활에는 벌레가 슨 흔적이 하나도 없었다. 활의 상태에 만족한 오뒤세우스는 활의 한쪽 끝을 발치에다 대고 구부리고는 흡사 음유시인이 수금의 줄을 매는 듯한 부드러운 동작으로 시위를 메웠다. 당혹한 나머지 수근거리는 소리가 연회장 이곳 저곳에서 들려 왔다. 그가 활시위를 퉁겨 보았다. 제비가 짝을 찾을 때 내는 것과 비슷한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는 미리 옆에다 끌어다 놓은 화살통에서 화살 한 개를 꺼내어 시위에 걸고는 의자에 앉은 채로 천천히 활을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깍지손을 놓았다. 화살은 날아가 도끼 열두 자루의 고리를 빠져 나갔다.

그제서야 그가 텔레마코스에게 소리쳤다.

"텔레마코스 왕자, 이만하면 이 늙은 거지가 그대 부친 활의 명예를 더럽힌 것은 아니지 요? 하지만 왕의 연회장에서 잔치를 계속하자면 몇 사람 사냥하고 나서 계속해야 하지 않 겠소?"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걸상에서 일어났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어깨가 그렇듯이 그의 어깨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텔레마코스가 연회장을 가로질러 가서 오뒤세우스 곁에 섰다. 텔레마코스는 사냥창을 들고 있었다.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