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문학창고

가을의 기도 / 해설 / 김현승

by 송화은율
반응형

가을의 기도 - 김현승


 요점 정리

 

 지은이 : 김현승

 성격 : 종교적, 사색적, 명상적, 기구적

 어조 : 기도조의 어조(가을의 계절감을 사랑과 명상, 기도로써 체험하는 겸허한 목소리. 기도조의 어조, ‘하소서’라는 서술어의 반복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구성

1연 : 조락의 계절 - 내적 성숙을 위한 기도 / 자아의 겸허한 반성 - 겸허함에 대한 기원

2연 : 결실의 계절 -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한 사랑 / 참된 사랑의 의미 - 신에 대한 기원

3연 : 삶의 긍극적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절대 고독의 추구 / 새로운 영혼 세계의 추구 - 고독한 영혼에 대한 기원

 제재 : 가을

 주제 : 진실된 삶을 위한 절대 고독의 추구, 생명에의 외경감과 겸허함 / 절대 고독의 경지를 기원함.

 특징 : 기도 형식의 구절이 3연 전체에 반복됨. 시행의 점층적 증가,‘가을에는/~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반복적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것은 시적 화자가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출전 : <김현승시초>(1957)

 

 

내용 연구

 

가을[내적 충실을 기할 수 있는 시간 / 내적으로 성숙을 갈망하는 시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기원형 어미로 경건한 기도조 / '가을'은 고독한 계절이고, '수확'과 '결실'의 계절이다. 시적 화자는 이런 '가을'을 맞아 자신의 내면도 충실한 결실을 얻기를 원하고 있다.]

낙엽들이 지는 때[조락의 계절로 생명의 유한성을 깨닫고 겸손해지는 시간 / 모든 것이 저무는 가장 겸허해 지는 때 / 생의 종말을 뜻하는 시기]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영혼의 소리(기도) / 참되고 겸손한 마음의 기도 / 김현승은 겸허한 태도를 좋아한다. 기독교의 신 아래서 화자는 겸허할 수밖에 없다. '모국어'란 화자가 가진 본연의 언어라는 뜻이다. 모국어는 운명적이면서도 생래적인 속성을 가진다. 생을 마무리하는 시기에 화자는 신을 향해 자신의 가장 본질적이고 진솔한 언어로 기도하기를 바라고 있다.]로 나를 채우소서.[시적 화자는 본질이 드러나는 순수한 가을을 맞아 내면에 참된 신앙심을 갖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 1연에서 시인은 가을을 겸허한 반성과 기도의 시간으로 받아들인다. '낙엽들이 지는 때'에 나타나 있는 가을의 쓸쓸함, 그것이 인간을 겸허하게 만들어 반성적인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다. '겸허한 모국어'는 기도를 상징한다.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절대자에 대한 시적 화자의 마음]

오직 한 사람[신, 절대자, 참된 사랑의 대상]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가치 있는 이상, 신의 축복, 사랑의 결실 등 - 삶의 깨달음 / 모든 것이 소멸한 후에도 맺게 될 결실을 뜻하며, 의미상으로는 사랑을 뜻한다. 이는 단 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므로 신을 향한 사랑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기름진, 풍요로운, 사색의]

시간[보람되고 알찬 가을의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 2연에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의 자세를 가지려는 소망이 표현되어 있다. '오직 한 사람'은 절대자, 즉 신을 의미하며 '가장 아름다운 열매'는 절대자에 대한 순수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가을을 '이 비옥한 시간'이라 표현한 이유는 절대자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풍성한 열매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가을에는

호올로[고독을 의미] 있게 하소서···. ['절대자'와 시적 화자만이 소통하는 상황을 원하고 있음]

나의 영혼['까마귀'는 시적 화자가 가지고 있는 '나의 영혼'을 비유하는 말],

굽이치는 바다와[고뇌와 수난의 인생길로 봄을 의미하거나 삶에 대한 온갖 욕망과 격정, 청년기의 영혼 / 질풍노도의 시대]

 

백합(百合)의 골짜기[여름을 의미하는 말로 부귀영화, 영광, 환희, 행복으로 가득한 장년기의 영혼 혹은 골짜기라는 험난한 곳을 백합과 동일시하고 있다. 즉 골짜기라는 험난한 이미지를 순결한 백합의 그것으로 만들어 고난의 역경조차 순결한 신앙의 자세로 치환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 일부 비평가들은 이 부분을 순결하고 영적인 세계로 보기도 함. 성서에서 '백합'의 이미지는 순결한 신앙, 신앙인으로 비유된다. '특히 '시편'에서 보면, "저들에 핀 백합"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는 비유가 사용되고 있다.]를 지나,[기쁨과 좌절로 얼룩진 생의 굴곡에서 돌아와 그 모든 것과 결별하고 홀로 남은 화자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다음에 나오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이다.]

 

마른 나뭇가지[순수한 본질만이 남은 세계 /모든 욕망을 떨쳐 버린 노년기의 영혼 ] 위에 다다른 까마귀[인생의 고통과 환희를 모두 감내하고 본래적인 모습으로 돌아와 생을 관조하는 존재로 그러한 존재가 바로 시적인 사유와 몽상을 전개하는 '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세상과 절연된 절대 고독의 경지('까마귀'는 관습적으로는 '불길함'을 상징하지만, 이 작품 속에서는 시련과 혼란을 거쳐 삶의 본질과 대면한 고독한 존재를 의미하며, 나의 영혼의 감정이입이다.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는 화자가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로 '마른 나뭇가지 위'는 화자의 영혼을 홀로 있게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렇게 홀로 있는 까마귀는 화자의 영혼을 상징하는데, 그 자체가 나무 위 열매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원하는 화자의 욕망이 까마귀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여기서 까마귀는 화자의 마른 육체에 하늘로 비상할 영혼이 앉은, 하나가 초월과 구원의 의미를 구상화시킨 상징적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같이.[참된 신앙을 원하는 시적 화자의  비장한 태도로 '까마귀'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싶다고 기도하는 이유는, 이런 고독의 상태가 절대자를 향하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이라 믿기 때문임] - 3연에서 시인은, 외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반대로, 고독의 상태를 염원하고 있다. '호올로 있게 하소서'에서 표현된 것은 절대자 앞에서의 고독을 바라는 소망이다. 인간들과의 사회적 관계 속에서 고독을 경험함으로써 존재론적 고독을 맛볼 수 있고, 그럼으로써 신에게 의지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고독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는 가을은, 자연에 있어서 풍성한 결실의 계절이듯이, 인간에게도 절대자를 만나는 결실의 계절이 된다. 절대적인 고독의 상태가 '까마귀'의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이해와 감상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를 거쳐 최종적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지은이의 첫 시집인 '김현승 시초'에 실려 있는 작품으로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종말을 고하는 가을, 그 종말로 많은 깨달음을 얻는 계절이기도 한 가을을 맞이하여 내적 충실을 갈망하는 기도조의 시로서 지은이이 종교적 기질이 어느 정도 나타나 있다고 하겠다. 3연이 각각 내용을 달리 하면서도 하나의 통일된 주제를 형성하였다.

 

 제1연에서  낙엽들이 지는 때 는 생의 종말을 뜻한다. 그 종말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가식을 다 벗어 던지고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제2연의  오직 한 사람 은 다른 의견도 있지만, 신(神) 또는 예수 그리스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3연에는 이 시의 시상이 집중되어 있다. 굽이치는 바다 는 화자의 인생 행로일 것이다. 희로애락의 삶의 현장, 험난한 세파를 거쳐 그가 새로이 들어선 곳이  백합의 골짜기 이다.  백합 은 성서에서도 순결한 신앙 또는 신앙인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환희의 세계에 다다른 상태가 백합의 골짜기이다. 그는 이곳에 그냥 안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최후의 다다라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자리잡고 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는 시적 화자의 마지막으로 도달한 절대 고독의 경지, 고절한 단독자의 실존 심상으로 화자의 고독한 영혼의 모습이다.

 

 이 시에서 가을은 내면의 충실을 기하는 시기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신과의 만남을 가지는 계기로 다루어져 있다. 시인 자신도 단순한 서정 외에 좀더 깊은 생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작품 개관 : 한국 문학과 외국 문학의 교섭 관계를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제시하였다.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릴케의 ‘가을날’에 비교할 때, 후에 창작된 작품이면서 소재면에서 유사하고,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 등에서 작품 사이의 교섭 여부를 생각할 수 있다. 두 작품을 감상한 후, 상호 교섭 관계를 비교문학적인 관점에서 학습할 수 있도록 한다.

 

지도 방법 :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영향 관계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두 작품은 영향 관계가 있음이 어조와 내용면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두 작품의 영향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영향 관계를 통해 문학은 상호 교섭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도 필요하다.

 

 김현승의 시가 지닌 독자성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릴케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가을의 기도’가 지닌 독자적인 성격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한다. 어떤 점에서  ‘가을의 기도’가 독자성이 있는 지를 작품 내용에 충실하게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지적할 수 있도록 지도한다.

 

 

학습 활동 풀이

1. 두 시에 나타난 유사한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어 말해보자.

이끌어주기 : 두 작품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파악할 수 있는가를 묻는 활동이다. 개인별로 답을 하게 할 수 도 있으나, 여건이 된다면 모둠별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효과적일 것이다. 혼자 할 경우 막연하게 생각하고, 어렵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시답안 :

 

공통점:

1. 어조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시 모두 기원의 어조를 보여 준다.

2. 태도면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시의 시적 화자는 절대자에 대한 겸양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절대자에게 자비를 기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3. 제재면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두 시 모두 ‘가을’을 제재로 하여 형상화하였다.

4. 주제면에서도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두시 모두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접근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

1. 내용면, 주제면에서 차이점을 찾을 수 있다. ‘가을날’은 겨울을 앞둔 현재의 시점에서, 신의 자비를 통해 과실들이 익고 포도주가 익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가난한 자들에게 정착의 삶을 허락해 달라고 기원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원의 대상은 시적 화자라기보다는 현실에 존재하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가을의 기도’는 시적 화자 자신의 소망을 기원하고 있다. 그것은 절대 고독의 경지에 이르기를, 다시 말해 정신적인 성숙을 이룰 수 있게 해 달라는 기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2. 어조면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가을에’는 ‘~을 해 주십시오.’ 라는 어조를 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을 놓으십시오.’ ‘스미게 하십시오.’에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가을의 기도’의 시적화자는  ‘~하게 하소서.’라고 표현함으로써 내적인 충족의 어조를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①에서 본 내용과 주제면에서의 차이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다음 글을 읽고, 아래 제시된 활동을 해 보자.

(1)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여 말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쉽게 답할 수 있는 활동이다. 제시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말로써 표현할 수 있도록 한다.

예시답안 : ‘가을의 기도’의 내용과 시상의 흐름을 소개한 후, 김현승의 시가 릴케의 시에 영향을 받았지만 나름대로의 독자성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일방적인 영향 관계를 부정하는 말이다. 물론 김현승의 시의 세계를 예찬하는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2) ‘가을의 기도’가 ‘가을날’과 유사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문학의 보편성과 고유성의 관점에서 토의해 보자.

 

 이끌어 주기 : 각 민족의 문화는 끊임없이 외부의 문화와 교섭하는 과정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문학 작품 중에는 중국이나 서구의 작품과 유사성을 지니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들 작품들이 외부로부터 받은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작품은 한국 작가에 의해, 한국적인 감수성에 의해 새롭게 창작된 것으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활동의 목표라는 점을 기억하며 토의 토론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시답안 :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와 릴케의 ‘가을날’은 모두 가을이라는 제재에서 인간의 실존 깊숙이 자리 잡은 근원적 ‘고독’을 기도조의 표현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을의 기도’가 ‘가을날’을 일방적으로 모방한 작품이라고 보는 것은 바른 해석과 관점이 아니다. 실존적 고독과 또한 그 속에서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는 것은 보편적인 인간 정서라고 볼 수 있고, 김현승은 이를 훌륭하게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심화 자료

 

 

 가을의 기도’ 평론

 

  일단 시가 태어나게 되면 그 언어들은 그것을 낳은 시인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기 자체의 이미지로 홀로서기를 한다. 그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 바로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이다.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등장하는 ‘백합의 골짜기’도 마찬가지이다. 백합이라고 하면 서구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화병이 아니라 골짜기에 핀 백합꽃이라고 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골짜기에는 진달래나 혹은 할미꽃들만이 피어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서양의 경우라 해도 ‘백합의 골짜기’는 현실 속에서도, 그리고 시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오역에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골짜기의 백한’은 ‘은방울 꽃’(Lisdes Valles)이라는 발자크의 소설 제목을 일본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옮겨놓은 데서 생겨나게 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덕분에 여태껏 동양에서도 서양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사생아로 태어난 ‘골짜기의 백합’은 당당히 홀로서기를 하고, 김현승의 시 ‘가을의 기도’에 와서는 아주 절묘한 시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아마도 그 말이 없었다면 그 자리에는 공자가 보면 크게 탄식했다는 ‘골짜기의 난초’(난향유곡)가 되었거나, 혹은 백합의 경우라 해도 성경에 있는 구절대로 ‘들에 핀 백합’ 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가을의 기도’에서 ‘백합의 골짜기’는 단순한 장식적 은유가 아니라 ‘굽이치는 바다’와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를 잇는 중요한 매개 공간으로, 눈으로 볼 수 없는 ‘영혼’을 가시화하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굽이치는 바다’란 말은 시인 자신의 말대로 ‘겸허한 모국어’에 비추어 보더라도 어법에 잘 맞지 않는 표현이다. 냇물이나 산맥이라면 몰라도 넓고 편편한 바닷물은 굽이친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연극이나 소설의 경우라면 대단원에 해당되는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처럼’은 누가 봐도 진부한 비유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백합의 골짜기’가 끼어들면 거짓말처럼 그 모든 시구들은 갑자기 새롭고 긴장된 이미지로 살아난다. ‘굽이치는 바다와 /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를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다른’이라는 말이 보여주고 있듯이 이 마지막 시행들은 시인의 내면 속에서 변화해 가는 영혼의 모습을 세 단계의 은유적 공간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영혼은 ‘바다→ 골짜기→ 마른 나뭇가지’의 순서로 공간을 옮겨가면서, 그 단계마다 영혼의 모습은 ‘파도’(바다)와 ‘백합’(골짜기)과 ‘까마귀’(마른 나뭇가지)로 변신한다. 넓은 바다는 좁은 골짜기로, 골짜기는 다시 앙상한 나뭇가지로 면에서 선으로 이동하면서 축소되어 간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수평의 바다가 점차 수직화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골짜기가 되고 이윽고 높은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다. 물론 그 공간에 자리한 대상물들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변화해 간다. 바다의 영혼은 파란색 파도로 굽이치고(그렇다. 바다가 골짜기의 백합과 연결되었을 때만이 굽이치는 바다의 시적 일탈성은 허락된다), 골짜기의 영혼은 백합처럼 흰빛으로 조용하게 피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앙상한 나뭇가지에 이르면 바다의 파도들은 날개를 접은 까만 까마귀가 되어 정지된다. 그러니까 영혼의 색채는 청-백-흑으로, 그 움직임은 동-부동-정으로, 그리고 상태는 무생-식물-동물로 변모해 가고 있는 과정을 읽을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그 패러다임 읽기를 통해서 푸른 바다에서는 봄(젊음)의 영혼, 골짜기에서는 하얗게 정화해가는 여름(노장)의 영혼, 그리고 이윽고 마른 나뭇가지에서는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에 있는 영혼의 사계절을 보게 된다. 그리고 움직임도 넓이도 색채도 모두 떨어져 나간 가을의 영혼이지만, 그것이 다다른 곳은 바다와 골짜기보다 훨씬 높은 수직의 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영혼의 위치야말로 ‘홀로 있게 하소서’ 의 마지막 고독에서 얻어질 수 있다.

 

  ‘가을의 기도’는 시와 종교(유일자에 대한 사랑)를 거쳐 최종적인 죽음의 자리에 다다르는 삶의 과정을 성숙과 조락의 가을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을의 기도’에는 봄의 바다와 여름의 백합,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인 마른 나뭇가지 위의 까마귀로 삶의 사계절이 내포되어 있다. 첫연의 낙엽과 마지막 연의 고목 사이에는 백합꽃이 피어있는 골짜기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백합과 까마귀의 절묘한 결합으로 ‘가을의 기도’는 비로소 높은음자리표를 지닌 화음처럼 아름답게 들리는 것이다. 그래서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음성을 너무 닮았다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신데렐라의 유리 구두처럼, ‘골짜기의 백합’처럼 오히려 오역의 경우가 보다 아름다운 시의 이미지를 낳듯이 릴케의 기도를 닮았다 해도 이미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는 홀로 있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영혼의 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출처 : 이어령, ‘다시 읽는 한국시’) 

 


 

반응형

블로그의 정보

국어문학창고

송화은율

활동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