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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客(유객) - 어떤 나그네​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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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客(유객) - 어떤 나그네

나그네 청평사에서 有客淸平寺(유객청평사)

봄 산 경치 즐기나니. 春山任意遊(춘산임의유)

새 울음에 탑 하나 고요하고 鳥啼孤塔靜(조제고탑정)

지는 꽃잎 흐르는 개울물. 花落小溪流(화락소계류)

맛있는 나물은 때를 알아 돋아나고 佳菜知時秀(가채지시수)

지나는 비에 버섯은 더욱 향기로워. 香菌過雨柔(향균과우유)

시 흥얼대며 신선골 들어서니 行吟入仙洞(행음입선동)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근심 걱정. 消我百年憂(소아백년우)

어떤 나그네 청명사에 찾아들어

봄의 산기운 마음껏 즐기나니

새들은 지저귀는데 탑은 홀로 다소곳하고

꽃잎 떨어져 시냇물 위로 흘러가네

맛 좋은 산나물 때를 맞추어 돋아나고

향 좋은 버섯 비 지난 뒤라 더욱 부드럽네

발걸음 맞춰 읊조리며 신선골 들어가

내 백 년 근심 다 털어 낼까 하노라.

 

청평사의 나그네,

봄 산에 마음대로 놂이라.

외로운 탑은 고요한데 산새만 지저귀고,

작은 시냇물에 꽃잎이 떨어져 흐르네.

아름다운 나물은 때를 아는 듯 돋아나고

향기로운 버섯은 비를 맞아 부드럽노라.

길 가며 읊조리며 신선의 계곡에 들어서니,

나의 백년 근심이 녹아지도다.

요점 정리

지은이 : 김시습

갈래 : 오언율시[한 구가 다섯 글자로 된 율시(한시의 한 체. 여덟 구로 이루어지며, ‘오언 율시’와 ‘칠언 율시’가 있음.)./ 운은 유, 류, 수임]

성격 : 탈속적, 전원적, 낭만적, 풍류적

구성 : 선경후정

기 - 봄에 즐기는 청평사의 정치

승 - 맑고 조용한 자연의 아름다움

전 - 활기찬 자연의 생명력

결 -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정화시키는 속세의 근심

주제 :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 속에서의 정화 / 근심을 잊고 춘경을 만끽함

특징 : 선경후정의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시선의 이동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며 다양한 감각적 표현을 사용해서 자연 친화 사상을 바탕으로 화자의 정서를 노래함.

내용 연구

유객 : 어떤 나그네 '유'는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의 뜻

나그네[화자를 객관화함 / 작가인 김시습으로 얽매임 없는 자연인] 청평사[공간적 배경]에서 봄[시간적 배경 / 계절적 배경] 산 경치 즐기나니.[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모습]

새 울음[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고요함을 강조]에 탑 하나 고요하고

지는 꽃잎 흐르는 개울물[시각적 이미지].

맛있는[미각적 이미지] 나물은 때를 알아 돋아나고

지나는 비에 버섯은 더욱 향기로워[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자연의 생동감을 강화함].

시 흥얼대며 신선골[속세의 근심 걱정을 정화시키는 이상향 / 화자가 지향하는 무릉도원과 같은 선경] 들어서니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근심 걱정[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봄의 흥취를 즐김].

花落小溪流 화락소계류 佳採智時秀 가채지시수 : 도치된 형태임

이해와 감상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던 그는 당대의 현실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 작품도 어떤 나그네가 청평사에 찾아들어 봄산의 기운을 마음껏 즐기고, 자연 속에서 속세의 근심을 털어내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다양한 감각을 사용하여 봄 산에서 느끼는 흥취를 노래하고 있다. 이 시에서 화자 김시습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삶보다는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살고자 하였다. 이 시에는 이런 그의 가치관이 잘 드러나 있는데, 마지막 구에서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속세의 근심을 잊고자 하는 모습과 자연과 혼연일체가 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심화 자료

김시습 (1435-1493)

조선 전기의 학자로 본관 강릉(江陵). 자 열경(悅卿). 호 매월당(梅月堂)·동봉(東峰)·청한자(淸寒子)·벽산(碧山). 법호 설잠(雪岑). 시호 청간(淸簡).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서울 성균관 부근에 있던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동 ·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다.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를 읊었다 하며, 5세 때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에게 불려가 총애를 듬뿍 받았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가정적 역경 속에서 훈련원 도정(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으나 그의 앞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이어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 동으로 금강산과 오대산, 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간을 방랑하면서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 등을 정리하여 그 후지(後志)를 썼다.

1463년(세조 9)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 일을 보았으나 1465년(세조 11) 다시 경주 남산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입산하였다. 2년 후 효령대군의 청으로 잠깐 원각사(圓覺寺) 낙성회에 참가한 일이 있으나 누차 세조의 소명(召命)을 받고도 거절, 금오산실에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었고, 《산거백영(山居百詠)》(1468)을 썼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성동(城東)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거백영 후지》(1476)를 썼다. 1481년(성종 12)에 환속(還俗),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1483년 다시 서울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나섰다가 충남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에서 죽었다.

그는 끝까지 절개를 지켰고, 유 ·불(儒佛) 정신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과 탁월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1782년(정조 6) 이조판서에 추증, 영월(寧越)의 육신사(六臣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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