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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興(춘흥)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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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興(춘흥)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草芽多小生 초아다소생

봄비 가늘어 방울지지 않더니

밤되니 작은 소리 들리네

눈 녹아 남쪽 시냇물이 불어나니,

풀 싹은 얼마나 돋아 났을까

요점 정리

지은이 : 정몽주

시형 : 5언 절구

배경 : 맹춘(초춘)

운자 : 성, 생

주제 : 봄의 흥취, 봄에 대한 기대감

이해와 감상

 

춘흥에서 두드러진 청각적 이미지가 두드러진 구는 승구이고, 작자의 상상 부분에 해당하는 구는 결구로 봄비를 소재로 하여 새싹돋는 이른 봄의 흥취를 읊은 것임

심화 자료

5언 절구

 

기승전결의 구성으로 짜여 있으며, 2,4구에 엄격히 압운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1구에도 압운한다. 평측법이 엄격하게 지켜지지만, 우리나라 사람은 중국음을 잘 모르므로, 운서를 통하지 않고는 평측을 알 수 없다.

정몽주(1337-1392)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로 본관 연일(延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초명 몽란(夢蘭)·몽룡(夢龍). 시호 문충(文忠). 영천(永川) 출생.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藝文檢閱)·수찬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女眞族)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으며,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예조정랑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를 역임하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彦陽)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 ·전법판서 ·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방원(芳遠:太宗)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으나, 그는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學堂)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大明律)》을 참작, 《신율(新律)》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근체시

 

중국의 고체시(古體詩)에 맞서는 개념의 시체(詩體)로 금체시(今體詩)라고도 한다. 음절의 억양에 따른 배열법이나 대구(對句) 등 구성법에 일정한 규칙이 있는 시체이다. 오언(五言:1구가 5자)과 칠언(七言:1구가 7자)의 절구(絶句)와 율시(律詩)의 2종이 있으며, 당(唐)나라 때 근체시가 확립되었고 제(齊)·양(梁)나라 때에 일어난 ‘사성(四聲)·팔병설(八病說)’로 대표되는 중국어 음운의 특징에 대한 자각이 근체시의 성립을 촉구하였다. 종래에는 다만 무의식적으로 청각의 아름다움에 호소할 뿐이었던 것이, 일정한 규칙을 지향하게 되었다.

절구는 사구(四句)로 되어 있다. 오언사구의 체는 육조(六朝)의 민가(民歌)에서 발생하였다. 처음에는 비속(卑俗)한 편이었으나 육조 말(3∼6세기)에는 내용과 체제가 정비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칠언은 오언의 체가 정리된 뒤에 일어나 초당(初唐:7세기) 말경에 자리를 잡는다. 절구는 단시형(短詩形)이기 때문에 찰나적 감정을 응축시키는 데 적절하며 군더더기가 없는 표현으로 오랫동안 여운을 남긴다.

율시는 팔구(八句)인데, 2구를 1연으로 하고 4연으로 되어 있다. 중간 2연은 대구(對句)를 쓰는 규칙이다. 평측(平仄)의 배열법은 절구와 같다. 이미 제 ·양시대부터 팔구의 오언시는 자주 만들어졌고 초당 때 율시로서 자리를 굳혔다. 칠언은 발생이 늦었고 또 오언에 비해 격이 떨어지는 비속한 가락이 좀체로 가시지 않았는데, 초당 말기에 시인의 본격적인 작품이 나타나 급격하게 발달하였다. 오언과 칠언이 다같이 응수(應酬)의 시로서 발달하였는데, 여기에 내면적인 깊이를 가하여 일층 고급문학으로 완성시킨 사람은 두보(杜甫)였다. 율시는 절구와 같이 찰나적 감정을 응집적으로 노래하나 중간의 대구의 묘미, 치밀한 구성미 등으로 보다 복잡한 맛을 지닌다.

율시와 같은 시체에 배율(排律)이라는 것이 있다. 율시의 중간 대구의 부분이 늘어난 것인데, 장률(長律)이라고도 한다. 의례적 응수에 맞는 중후한 시체이다. 오언이 정격(正格)이며, 칠언은 수도 적고 통상 시체의 분류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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