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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이 유수하니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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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이 유수하니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운수가 있으니, (화려했던 고려의 궁터인) 만월대도, 이제는 시든 가을 풀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로구나.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이젠 목동의 피리 소리에나 담겨 불려지고 있으니

석양에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작자 자신)로 하여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구나.

요점 정리

작자 : 원천석

연대 : 고려말~조선초

종류 : 평시조

성격 : 회고적, 비유적, 상징적, 감상적

구성 : 초장(쓸쓸함) 중장(무상함) 종장(고려 왕조 멸망에서 느끼는 감회)

제재 : 고려 왕조

주제 : 회고의 정, 망국의 한과 인생무상, 고려 왕조 회고. 고려 멸망을 슬퍼함

표현 : 은유법, 영탄법, 중의법

내용 연구

 

흥하고 망하는 것이 다 운수가 있으니[운수에 달려 있으니 / 하늘의 뜻에 달렸으니], (화려했던 고려의 궁터인) 만월대[개성 북방 송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터]도, 이제는 시든 가을 풀만이 우거져 있을 뿐이로구나..(황폐해져 있음을 비유한 말로 고려 멸망을 시각적으로 표현 / 맥수지탄)

 

오백 년 고려의 왕업이 이젠 목동의피리 소리[목동의 피리소리로 고려 멸망의 허무감을 청각적으로 표현한 말.]에나 담겨 불려지고 있으니[남아 있으니, 깃들여 있으니]

 

석양[해가 지는 하강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고려 왕조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드러냄과 동시에 쓸쓸한 정서를 부각함]에 이 곳을 지나는 나그네(작자 자신)로 하여금 슬픔을 이기지 못하게 하는구나.[눈물을 이기지 못하게 하도다. 눈물을 이기지 못하겠노라. / 고려의 폐망을 안타까워하는 자기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여 마치 제3자로 존재하는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객관화하고 절제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

 

초중장은 서경적이요, 종장은 시정적으로 고려의 멸망을 노래하고 있으며 잡초가 우거진 옛 궁전 터를 바라보며 지은 고려 유신(遺臣)의 회고가(懷古歌)로, 인세(人世)의 무상함을 개탄한 애절한 정한(情恨)이 담겨 있는 시조이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작자가 옛 도읍지였던 개성의 궁궐터를 돌아보면서, 지난 날을 회고하고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회고가(懷古歌)'로서, 대부분의 회고가의 전개 방법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즉, 나라의 멸망을 읊은 뒤에, 여기에서 느끼게 되는 슬픔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시상이 전개되어 있으며, 그 어조(語調) 또한 여성적이고 소극적이다.

초장에서의 '만월대'는 고려 왕조를, '추초'는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상징하였다. 그리고 초장에서의 시각적인 현실과 중장에서의 청각적인 연상을 대조하였다. 종장에서는 자신을 '객(客)'으로 표현하여 주관적 심회를 객관화시킨 묘미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초.중장은 서경적, 종장은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초기에 원천석(元天錫)이 지은 시조. 1수로 진본(珍本) ≪청구영언 靑丘永言≫에 수록되어 있다.

작자는 고려 말엽 정치의 어지러움을 보고 원주 치악산에 은거하였는데, 군적(軍籍)에 등록되므로 부득이 과거에 나아가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다시 향리에 돌아가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면서 시국을 개탄하였고, 조선조 태종이 그에게 배운 일이 있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시조는 2수가 전하는데 그 중 1수가 회고를 읊은 것이다. “興亡(흥망)이 有數(유수)하니 滿月臺(만월대)도 秋草(추초)ㅣ로다/五百年(오백년) 王業(왕업)이 牧笛(목적)에 부쳐시니/夕陽(석양)에 지나勘 客(객)이 눈물 계워 하노라.” 이 작품은 길재(吉再)의 “오백년 도읍지를 ……”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고려의 도읍지를 돌아보며 피리소리라는 애상적인 가락을 통해 자신의 비감한 정감을 잘 표현하였다.≪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海東名臣錄, 燃藜室記述.(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원천석

 

1330(충숙왕 17)∼? 고려 말 조선 초의 은사(隱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이며, 아버지는 종부시령(宗簿寺令) 윤적(允迪)이다.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다.

어릴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해 진사가 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에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다.

일찍이 방원(芳遠 : 太宗)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적이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 속으로 피해버렸다. 왕은 계석(溪石)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 준 후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基川 : 지금의 豊基) 현감으로 임명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太宗臺)라 했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覺林寺) 곁에 있다.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음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시조로는 망한 고려 왕조를 회고한 것으로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하노라.”라는 회고시 1수가 전해온다. 시문들은 뒤에 ≪운곡시사 耘谷詩史≫라는 문집으로 모아져 전해온다. 그 문집에 실린 시 중에는 고려의 쇠망을 애석하게 여기는 몇 편의 시문이 있다.

대표적인 시의 제목을 보면, 우리 나라 2현(賢)을 기리는 시문 중에 최영(崔瑩)을 기린 〈전총재육도도통사최영 前摠宰六道都統使崔瑩〉과 우왕·창왕을 중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해 폐위시켜 서인을 만든 사실에 대해 읊은 〈왕부자이위신돈자손폐위서인 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位庶人〉이 있다.

여기서 그는 만일 왕씨의 혈통으로 참과 거짓이 문제된다면 왜 일찍부터 분간하지 않았느냐고 힐문하면서 저 하늘의 감계(鑑戒)가 밝게 비추리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 만년에 야사 6권을 저술하고 “이 책을 가묘에 감추어두고 잘 지키도록 하라.”고 자손들에게 유언하였다. 그러나 증손대에 이르러 국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라버렸다고 한다. 강원도 횡성의 칠봉서원(七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朝鮮金石總覽, 顯宗實錄, 肅宗實錄, 記言, 耘谷行錄, 燃藜室記述, 大東奇聞, 耘谷詩史(高麗名賢集 5 所收, 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0), 名詩全書(李丙斗譯, 文獻編纂出版部, 1959), 韓國의 歷史像(李佑成, 創作과 批評社, 1982).(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춘망

 

두보의 오언율시인 춘망과 내용이 비슷한 점이 있다.

 

 

나라가 망하니 산과 강물만 있고

성 안의 봄에는 풀과 나무만 깊어 있구나. (1-2행 전란으로 인한 폐허)

시절을 애상히 여기니 꽃까지 눈물을 흘리게 하고

(처자와)이별하였음을 슬퍼하니 새조차 마음을 놀라게 한다.(3-4행 전란으로 인한 상심)

전쟁이 석 달을 이었으니

집의 소식은 만금보다 값지도다. (5-6행 가족에 대한 그리움)

흰머리를 긁으니 또 짧아져서

다해도 비녀를 이지지 못할 것 같구나. (7-8행 쇠약한 육신에 대한 탄식)

요점 정리

 

지은이 : 두보

갈래 : 오언율시

연대 : 두보가 46세(757년)덕 2년에 지음

표현 : 선경후정, 대구법, 과장법

제재 : 전란의 상심

주제 : 전란의 비애

출전 : 두공부시언해 초간본 권10

 

만월대

 

 

 

경기도 개성시 송악산(松嶽山)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 919년(태조 2) 정월에 태조가 송악산 남쪽 기슭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창건한 이래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까지 고려왕의 주된 거처였다.

동서 445m, 남북 150m 정도의 대지에 위치한 왕궁터의 가운데에는 정사를 처리하는 정전(正殿)인 회경전(會慶殿)이 위치하였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건덕전(乾德殿)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나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는 회경전을 정전이라 하였고, ≪고려사≫(희종 2년 4월조)의 기사 중에서도 회경전을 정전이라고 하였으므로 회경전을 정전으로 보는 것이 옳으나, 그 기능에서는 회경전과 건덕전이 서로 비슷하였던 듯하다.

회경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규모이며 전면에 4개의 계단을 만들었고 좌우에는 동행각(東行閣)·서행각(西行閣)이 있었다.

회경전의 북쪽에는 고려 왕실의 보물을 보관하는 장화전(長和殿)과 비상시에 대신들과 정사를 논의하던 원덕전(元德殿)이 있었고, 서북쪽에는 천자의 조서를 받들고 사신을 접대하던 건덕전, 희빈들이 거처하던 침전인 만령전(萬齡殿)이 있었다.

회경전과 건덕전 사이에는 사신 등이 바치는 물품을 받아들이던 장령전(長齡殿)과, 뒤에 집현전(集賢殿)으로 개칭된 연영전(延英殿)이 있었으며, 회경전의 바로 서쪽에는 왕의 침전이, 동쪽에는 세자가 거처하던 좌춘궁(左春宮)이 있었다.

또, 황성에는 13개의 성문과 15개의 궁문이 있었다고 하며 성문 중에는 동문인 광화문(廣化門)이, 궁문으로는 왕궁의 정남문인 승평문(昇平門)과 신봉문(神鳳門)·창합문(嗽闔門)·의봉문(儀鳳門)이 유명하였다.

승평문은 정전인 회경전으로 연결되는데 이 문을 들어서면 신봉문이 있었고 그 동쪽에 세자궁으로 들어가는 춘덕문(春德門)이, 서쪽에 왕의 침전으로 들어가는 태초문(太初門)이 있었다.

신봉문 안에는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던 창합문이 있었고, 그 안에 다시 회경전의 전문(殿門, 會慶門)이 있었다. 건덕전 앞에는 건덕전문·흥례문(興禮門)·의봉문이 있었으며, 의봉문 밖에 구정(毬庭 : 격구 경기를 하던 큰마당)이 있었다고 한다. 흥례문 역시 왕이 천자의 조서를 받들기도 하였던 곳이다.

중앙의 회경전터에서 동벽까지 135m, 서벽까지 230m, 승평문까지 250m 정도이며, 궁궐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넓지 않은 공간에 많은 건물을 계단식으로 배치하였고, 문과 문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한, 동물머리모양의 돌조각과 많은 기와조각·도기·철제장식·철창·철침 등이 수습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新增東國輿地勝覽, 高麗古都徵(韓在濂), 高麗圖經(徐兢), 高麗時代史(金庠基, 서울大學校出版部, 1985), 北韓文化財實態와 現況(文化財管理局, 1985).(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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