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 / 라마르틴
by 송화은율호수 / 라마르틴
이렇게 늘 새로운 기슭으로 밀리며
영원한 밤 속에 실려 가 돌아오지 못하고
우리, 단 하루라도 넓은 세월의 바다 위에
닻을 내릴 수 없는 것일까.
오오 호수여, 세월은 한 해도 지나지 않았는데
그녀가 다시 보아야 할 이 정다운 물가에
보라, 그녀가 전에 앉아 있던 이 돌 위에
나 홀로 앉아 있노라!
그때 너는 바위 밑에서 흐느꼈고
바위에 부딪쳐 갈라지면서
물거품을 뿜어대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발에.
그 날 저녁의 일을 그대 기억하고 있는가.
우리가 말 없이 배를 저을 때, 오직 들리는 것은
이 지상에서 오직 조화 있게 물결을 가르는
우리의 노 젓는 소리뿐이었다.
갑자기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먼 둔덕 기슭으로부터 올려왔나니
물결은 갑자기 고요해지고, 그윽한 소리는
내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오 시간이여, 운행을 멈추고,
너, 행복한 시절이여, 흐름을 멈추라!
우리네 일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들의
덧없는 기쁨이나마 맛보게 하라.
수많은 불행한 이들이 너를 기다리나니
시간이여, 그들을 위해 빨리 가거라.
그들의 불행도 시간과 함께 앗아가고
행복한 사람들일랑 잊어 버려 다오."
이 잠시 동안의 유예를 바람도 쓸 데 없는 일
시간은 나를 비껴 자꾸만 달아나고,
나는 밤을 향해 "천천히 새어라" 말했으나
새벽은 급히 와 밤을 쫓는다.
"사랑할지라, 사랑할지라! 덧없는 시간이니
이 짧은 시간을 어서 즐겨야지.
사람에겐 항구가 없고, 시간에 기슭이 없나니
시간은 흐르고 우리는 사라지네!"
시샘 많은 시간이여, 사랑 겨운 이 순간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 주는 이 도취의 순간도
저 불행의 날처럼 우리들로부터 지체 없이
멀리 날려가 버리고야 말 것인가?
뭐, 도취의 흔적조차 남겨 둘 수 없다고?
뭐, 영원히 가 버려? 뭐라고! 사라졌다고?
도취를 주었던 이 시간, 또 앗아간 이 시간이
다시는 돌려 받을 수 없단 말인가.
영원, 허무, 과거 또한 어두운 심연이여,
너희가 삼킨 날들을 어찌하려 하는가?
말하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지상의 도취를
언제면 우리에게 돌려주려나?
오, 호수, 말없는 바위, 동굴, 검은 숲이여!
때에 따라 변치 않고 다시 젊어지는 그대들이여,
이 밤을 간직하라, 아름다운 자연이여,
이 추억만이라도 간직해 다오!
아름다운 호수여, 그대의 휴식, 혹은 풍랑 속에서
또한 그대의 미소짓는 언덕의 모습에서
검은 전나무나 또한 바위 위에 뾰족 솟은
이 거친 바위 속에서든 간에!
살랑살랑 부는 산들바람 속에서
메아리치는 호숫가의 그 노래 속에서
그대 수면을 부드러운 빛에서 희게 물들인
은빛 이마의 별 속에서든지!
흐느끼는 바람, 한숨짓는 갈대
호수의 향긋하고 가벼운 향기
듣고 보고 숨쉬는 모든 것이 속삭이려니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느니라!"
이해와 감상
시인은 1819년 엑스레 방 온천장에 가서 '검은 머리와 아름다운 눈을 지닌' 여성 쥴리 샤를르 부인을 알게 된다. 그는 부인에게 깊은 애정을 품게 되어 다음 해에 파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나 부인은 폐병이 심해져 끝내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이 일로 청춘의 사랑과 정열의 대상을 잃은 라마르틴은 홀로 고독을 달래기 위하여 1819년 봄 부르고뉴 지방의 인적 없는 산 속에 자리한 숙부 라마르틴 신부의 사택을 찾았다. 그 사택을 에워싼 숲 속에서 쓴 작품이 바로 이 '호수'란 시이다. 그리고 시인은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와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인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한 프랑스 낭만파의 전형적인 시인에 속한다.
심화 자료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e)
1790. 10. 21 프랑스 마콩~1869. 2. 28 파리.
프랑스의 시인·정치가로 〈명상시집 Meditations poetiques〉(1820)에 실린 서정시를 통하여 프랑스 낭만파 문학운동의 핵심인물들 중 하나로 자리를 굳혔다.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 공포정치 시대라고 하는 프랑스 혁명의 절정기에 투옥되었지만,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는 신세는 면했다. 그는 벨레에 있는 대학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이 대학은 그당시 프랑스에서 탄압을 받고 있던 예수회 교단이 운영하고 있었다. 라마르틴은 군인이나 외교관이 되고 싶어했지만, 충실한 왕당파인 그의 부모는 프랑스의 새로운 통치자로 등장한 나폴레옹을 왕위 찬탈자로 간주하고, 아들이 그에게 봉사하는 것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라마르틴은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다가, 1814년 부르봉 왕정이 복귀하자 루이 18세의 호위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듬해 나폴레옹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백일천하'를 이루자, 라마르틴은 스위스로 이주했다. 나폴레옹이 워털루에서 패배하고 2번째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진 뒤, 라마르틴은 군인이라는 직업을 포기했다.
문학에 매력을 느낀 그는 몇 편의 운문 비극과 비가들을 썼다. 이 무렵에는 이미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온천지 엑스레뱅으로 요양하러 갔다. 그는 1816년 10월에 이곳의 부르제 호반에서 재기발랄하지만 중병에 걸린 쥘리 샤를이라는 여인을 만났다. 이보다 몇 년 전인 1812년초에 라마르틴은 앙토니엘라라는 젊은 여공과 깊은 사랑에 빠졌었는데, 1815년에 그는 앙토니엘라가 죽은 것을 알게 되었었다. 후에 그는 '그라치엘라'라는 제목의 산문 '일화집'에 앙토니엘라를 그라치엘라로 바꾸어 등장시키게 된다. 그는 다시 샤를에게 열정적인 애정을 느끼게 되었고, 샤를은 파리에 아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그가 일자리를 얻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1817년 12월에 샤를이 죽은 뒤, 이미 〈호수 Le Lac〉 등 많은 시들을 샤를에게 헌정했던 라마르틴은 그녀의 영전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Le Crucifix〉를 비롯한 여러 시들을 바쳤다.
1820년에 라마르틴은 처칠 집안과 인척관계가 있는 영국 여인 마리아 앤 버치와 결혼했다. 같은 해 그는 첫 시집인 〈명상시집>을 출판했고, 나폴리 주재 프랑스 대사관 서기관이 되어 마침내 외교관의 꿈을 이루었다. 〈명상시집〉은 새로운 낭만적 색조와 감정의 진실함 때문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집은 프랑스 시에 새로운 음악성을 부여했으며, 주제는 친밀하면서도 종교적이었다. 어휘에는 지난 세기의 빛바랜 수사학이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문장의 울림과 운율의 힘,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은 싱싱함을 잃은 18세기의 시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 책이 너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라마르틴은 2년 뒤 〈새로운 명상시집 Nouvelles meditations poetiques〉과 〈소크라테스의 죽음 Mort de Socrates〉에서 이 책을 확충하려고 했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서는 형이상학에 대한 그의 열정이 처음으로 뚜렷이 드러났다. 1825년에 출판된 〈해럴드의 마지막 순례의 노래 Le Dernier Chant du pelerinage d'Harold〉는 그가 영국의 시인 바이런 경에게 느꼈던 매력을 보여주었다. 라마르틴은 1829년에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이듬해 2권의 〈시적·종교적 조화 Harmonies poetiques et religieuses〉를 발표했다. 이 책들은 이신론적이고 때로는 그리스도교적(예를 들면 〈그리스도 찬가 L'Hymne au Christ〉)인 열정에 가득 찬 일종의 할렐루야 성가였다.
같은 해(1830), 7월혁명 이후 루이 필리프가 입헌 군주로 왕위에 오르자, 라마르틴은 외교관을 그만두고 정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7월 왕정에 봉사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사회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는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2번 실패한 뒤 1833년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시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고, 1821년부터 '영혼의 서사시'로 구상했던 〈환상 Les Visions〉 을 쓰고자 했다. 이 시는 여인의 사랑을 선택했기 때문에 타락한 천사가 천국에서 쫓겨나, 영혼의 회귀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그가 '여자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된다는 상징적 주제를 갖고 있었다. 라마르틴은 이 방대한 모험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먼저 써서 1836년에 〈조슬랭 Jocelyn〉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이것은 사제로 일생을 보내려던 한 젊은이가 혁명으로 수도원에서 쫓겨난 뒤 젊은 소녀와 사랑에 빠지지만, 죽어가는 주교를 보고 수도회를 상기한 뒤 사랑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종'인 교구 신부가 되어 같은 인간을 위해 봉사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는 이야기이다. 1838년에 라마르틴은 이 방대한 형이상학적 서사시의 첫 부분을 〈천사의 전락 La Chute d'un ange〉이라는 적절한 제목으로 발표했다. 1832~33년에 그는 레바논과 시리아 및 성지 팔레스타인을 여행했다. 그 무렵에는 1820년에 되찾으려고 애썼던 가톨릭 신앙을 이미 결정적으로 잃어버리고 있었다. 1832년 12월 7일에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외동딸 쥘리아가 죽은 것은 그에게 더 큰 타격을 주었다. 1821년에 로마에서 태어난 아들은 어릴 때 죽었다.
1839년에 〈시적 명상 Recueillements poetiques〉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출판한 뒤, 라마르틴은 좀더 활동적인 정치가가 되기 위해 문학활동을 중단하였다. 그는 스스로 '프롤레타리아의 문제'라고 부른 사회문제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쟁점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놓여 있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개탄했다. 그는 트러스트(기업합동)와 그들이 정부에 행사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규탄했고, 1838년과 1846년에 2차례의 담화문을 통하여 거기에 반대했다. 그는 노동계급의 혁명이 일어날 것은 필연적이라고 주장하였고, 1847년 7월에는 '경멸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당국에 장담하는 등 그 시기를 앞당기기를 주저치 않았다. 같은 해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와 혁명 이후에 온건 우파인 지롱드당이 걸어온 역사를 다룬 〈지롱드 당사 Histoire des Girondins〉를 출판하여 좌익정당들로부터 대단한 인기를 모았다.
1848년 2월 24일에 혁명이 일어난 뒤 파리에서는 제2공화정이 선포되었고, 라마르틴은 사실상 임시정부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경악했던 유산계급은 겉으로는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이는 척했지만, 노동계급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기를 소유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었다. 1848년 4월에 라마르틴은 10개 지역에서 국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우익정당들이 대표하는 부르주아 계급은 질서, 좀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질서라고 생각하는 것을 확립할 수 있는 군대가 재건되는 동안, 라마르틴이 프롤레타리아를 달랠 수 있는 능란한 조종자가 되리라고 생각하여 그를 선출했다. 그러나 이미 스스로 선언했듯이 라마르틴이 정말로 노동계급의 대변자라는 것을 알고, 부르주아 계급은 격분했다. 1848년 6월 24일에 그는 공직에서 추방되었고 혁명은 무산되었다.
실의에 빠진 라마르틴은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었다. 그는 1850년에 60세가 되었고, 엄청난 빚을 짊어지고 있었다. 그 빚은 그가 개인적으로 사치와 낭비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라마르틴 가문의 유일한 남자로서 혼자 유산을 물려받은 것을 보상하기 위해 누이들에게 돈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20년 동안 그는 잇따라 책을 출판하면서 파산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시기에 그가 출판한 책으로는 쥘리 샤를에 대한 사랑을 주인공과 무대를 바꾸어 이야기한 〈라파엘 Raphael〉, 현실과 상상의 요소가 뒤섞인 〈비밀 Les Confidences〉· 〈새로운 비밀 Nouvelles Confidences〉(〈그라치엘라〉는 이 작품의 일부임)· 〈주느비에브 Genevieve〉· 〈앙토니엘라〉 및 역사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정치적 회상록 Memoires politiques〉, 그가 〈포도나무와 저택 La Vigne et la maison〉 및 〈사막 Le Desert〉 같은 시를 발표한 잡지 〈쿠르 파밀리에 드 리테라튀르 Cours familiers de litterature〉(1856~68/69), 지금도 독보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몇 권의 역사책, 예를 들면 〈제헌 의회의 역사 Histoire des Constituants〉· 〈왕정 복고시대의 역사 Histoire de la Restauration〉· 〈러시아 역사 Histoire de la Russie〉· 〈터키 역사 Histoire de la Turquie〉 등이 있다. 그는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의 잊혀진 채 세상을 떠났다. H. Guillemin 글 | 金碩禧 옮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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