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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明沙十里) / 본문 및 해설 / 한용운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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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사십리(明沙十里) - 한용운

 

 

경성역의 기적일성(汽笛一聲), 모든 방면으로 시끄럽고 성가시던 경성을 뒤로 두고 동양에서 유명한 해수욕장인 명사십리(明沙十里)를 향하여 떠나게 된 것은 85일 오전 850분이었다.

 

차중(車中)은 승객의 복잡으로 인하여 주위의 공기가 불결하고 더위도 비교적 더하여 모든 사람은 벌써 우울을 느낀다. 그러나 증염(蒸炎), 열뇨(熱鬧), 번민(煩悶), 고뇌(苦惱) 등등의 도회를 떠나서 만리 창명(滄溟)의 서늘한 맛을 한 주먹으로 움킬 수 있는 천하 명구(名區)의 명사십리로 해수욕을 가는 나로서는, 보일보(步一步) 기차의 속력을 따라서 일선의 정감이 동해에 가득히 실린 무량(無量)하 양미(?)를 통하여 각일각(刻一刻) 접근하여 지므로 그다지 열뇌(熱惱)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면 천산만수(千山萬水)를 격()하여 있는 천애(天涯)의 양미(?)를 취하려는 미래의 공상으로 차중의 현실 즉 열뇌(熱惱)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이른바 일체유심(一切唯心)이다. 만일 그것이 유심(唯心)의 표현이 아니라면 유물(遺物)의 반현(反現)이라고 할는지도 모른다.

 

나는 갈마(葛麻)역에서 명사십리로 갔다. 명사십리는 문자와 같이 가늘고 흰 모래가 소만(小灣)을 연(沿)하여 약 10리를 평포(平鋪)하고, 만내(灣內)에는 참차부제(參差不齊) 한 대여섯의 작은 섬이 점점이 놓여 있어서 풍경이 명미(明媚)하고 조망(眺望)이 극가(極佳)하며 욕장(浴場)은 해안으로부터 약 5,60() 거리, 수심은 대개 균등하여 4척 내외에 불과하고 동해에는 조석(潮汐)의 출입이 거의 없으므로 모든 점으로 보아 해수욕장으로는 이상적이다.

 

해안의 남쪽에는 서양인의 별장 수십 호가 있는데, 해수욕의 절기에는 조선 내에 있는 사람은 물론 동경, 상해, 북경 등지에 있는 사람들까지 와서 피서를 한다 하니 그로만 미루어 보더라 도 명사십리가 얼마나 명구(名區)인 것을 알 수가 있다 허락지 않는 다소의 사정을 불고(不顧)하고 반천리(半千里)의 산하를 일기(一氣)로 답파(踏破)하여 만부 일적(萬夫一的) 단순한 해수욕만을 위하여 온 나로서는 명사십리의 수려한 풍물과 해수욕장의 이상적 천자(天姿)에 만족치 아니할 수 없었다. 목적이 해수욕인지라 오승? 벗고 바다로 들어갔다. 그 상쾌한 것은 말로 형언할 배 아니다. 얼마든지 오래하고 싶었지마는 욕의(浴衣)를 입지 아니한지라 나체로 입욕함은 욕장의 예의상 불가하므로 땀만 대강 씻고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가 돌아보니, 김군은 욕의 기타를 사가지고 돌아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7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보니 일기가 흐리었다.

 

7시경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였으나 계속적으로 오는 것이 대단치 아니하였다. 아침 밥을 먹고 나서 바다에 갈 욕심으로 비가 개이기를 기다렸으나 좀처럼 개이지 않는다.

 

11시경 비가 조금 멈추기에 해수욕하는 데는 비를 맞아도 관계치 않겠다는 생각으로 나섰다. 얼마 아니 가서 비가 쏟아지는 데 할 수 없이 쫓기어 들어왔다. 신문이 왔기에 대강 보고 나니 원산(元山)의 오포(午砲) 소리가 들린다. 시계를 교정하여 가지고 나서니 비가 개이기 시작한다. 맨발에 짚신을 신고 노동모를 쓰고 나섰다. 진 길에 짚신이 불어서 단단하여지매 발이 아프다. 짚신을 벗어 들고 맨발로 가는데 비가 그쳐서 rf이 반은 물이요, 반은 흙이다. 맨발로 밟기에 자연스러운 쾌감을 얻었다. 더구나 명사십리에 들어서서 가늘고 보드라운 모래를 밟기에는 너무도 다정스러워서 맨발이 둘뿐인 것이 부족하였다.

 

해수욕장에 다다르니 마침 여러 사람들이 나와서 목욕을 하는데 남녀노유(男女老幼)가 한데 섞여서 활발하게 수영도 하고 유희도 한다. 혼자 온 것은 나 하나뿐이다. 나는 그들 목욕하는데서 조금 떨어져서 바다에 들어가 실컷 뛰고 놀았다. 여간 상쾌하지 않다. 조금 쉬기 위하여 나와서 모래 위에 앉았다. 이 때에 모든 것은 신청(新晴)의 상징뿐이다.

 

쪽같이 푸른 바다는

잔잔하면서 움직인다.

돌아오는 돛대들은

개인 빛을 배불리 받아서

젖은 돛폭을 쪼이면서

가벼웁게 돌아온다.

걷히는 구름을 따라서

여기저기 나타나는

조그만씩한 바다 하늘은

어찌도 그리 푸르냐.

멀고 가깝고 작고 큰 섬들은

어디로 날아가려느냐.

발적여 디디고 오똑 서서

쫓다 잡을 수가 없고나.

 

얼마 동안 앉았다가 다시 바다로 들어가서 할 줄 모르는 헤엄도 쳐 보고 머리를 물 속에 거꾸로 잠가도 보고 마음 나는대로 활발하게 놀았다. 다시 나와서 몸을 사안(沙岸)에 의지하여 발을 물에 잠그었다.

 

모래를 파서 샘을 만드니

샘 위에는 뫼가 된다.

어여쁜 물결은

소리도 없이 가만히 와서

한 손으로 샘을 메우고

또 한 손으로 뫼를 짓는다.

모래를 모아 뫼를 만드니

뫼 아래에 샘이 된다.

짓궂은 물결은

해죽해죽 웃으면서

한 발로 모를 차고

한 발로 샘을 짓는다.

 

다시 목욕을 하고 나서 맨발로 모래를 갈면서 배회하는데, 석양이 가까워서 저녁 놀은 물들기 시작한다. 산 그림자는 어촌의 작은 집들에 따뜻이 쪼이는데, 바닷물은 푸르러서 돌아오는 돛대를 물들인다. 흰 고기는 누워서 뛰고 갈매는 옆으로 날은다. 목욕은 사람들의 말소리는 높아지고 저녁 연기를 지음친 나무 빛은 옅어진다. 나도 석양을 따라서 돌아왔다.

9일은 우편국에 소관이 있어서 원산에 갔다. 볼 일을 보고 송도원(松濤園)으로 갔다. 천연의 풍물로 말하면 명사십리의 비교가 아니나 해수욕장으로서의 시설은 비교적 상당하다. 해수욕을 잠깐하고 음식점에 가서 점심을 먹고 송림(松林) 사이에서 조금 배회하다가 다시 원산을 경유하여 여사(旅舍)에 돌아와 조금 쉬고 명사십리에 가 또 해수욕을 하였다. 행보(行步)를 한 까닭인지 조금 피로한 듯하여 곧 돌아왔다.

 

10일엔 신문이 오기를 기다려서 보고 나니 11시 반이 되었다. 곧 해수욕장으로 나가서 목욕을하고 사장에 누웠으니 풍일(風日)이 아름답고 바닥 작은 물결이 움직인다. 발을 모래에다 묻었다가 파내고 파내었다가 다시 묻으며, 손가락으로 아무 구상(構想)이나 목적이 없이 함부로 모래를 긋다가 손바닥으로 지워 버리고 다시 긋는다. 그리 하다가 홀연히 명상(冥想)에 들어갔다. 멀리 날아오는 해조(海藻)의 소리는 나를 깨웠다.

 

어여쁜 바다새야

너 어디로 날아오나.

공중의 어느 곳이

너의 길이 아니련만,

길이라 다 못 오리라.

잠든 나를 깨워라.

갈매기 가는 곳에

나도 같이 가고지고.

가다가 못 가거든

달 아래서 자고 가자.

둘의 꿈 깊은 때야

네나 내나 다르리.

 

해수욕장에 범선(帆船)이 하나 띄었다. 그 배 밑에 가서, "이게 무슨 배요?" 선인(船人)들이, "애들 놀잇배요." "그러면 이것이 아무개의 배요?" "아니요, 다른 사람의 배요."

 

나는 배에 올라가서 자세히 물은즉 그 배는 해수욕하는 데 소용되는 배인데, 배에 올라가서 물에 뛰어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 배를 타고 선유(船遊)도 하는 배다. 1개월 95()을 받고 삯을 파는 배로 매일 오전 9시경에 와서 오후 5시에 가는데, 선원은 다섯 사람이라 한다. 95원을 5인에 분배하면 매일 매일 60여 전인데 그 중에서 선세(船貰)를 제하면 대단히 박한 임금이다. 여기에서 그들의 생활난을 볼 수가 있다. 오후 4시경에 여사에 돌아왔다.

 

11일 상오 11시경에 해수욕장으로 나오는데 그 동리 뒤 솔밭 속에 있는 참외막 아래에 서너 사람의 부로(父老)들이 앉아서 바람을 쐬며 이야기들을 한다. 나도 그 자라에 참례하였다. 이 날이 마침 음력으로 칠석(七夕)날이므로 견우성이 장가를 드느니 직녀성이 시집을 가느니 하였다. 나는 칠석에 대한 토속(土俗)을 물었는데 별로 지적하여 말할 것이 없다고 한다.

 

1) 증염(蒸炎) : 더위.

2) 열뇨(熱鬧) :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석 함.

3) 창명(滄溟) : 큰 바다.

4) 명구(名區) : 이름난 지역.

5) 양미(?) : 서늘한 기운.

6) 열뇌(熱惱) : 몹시 심한 고뇌.

7) 평포(平鋪) : 평평하게 펴 놓음.


 요점 정리

 작자 : 한용운

 형식 : 수필

 성격 : 감상적, 기행적

 주제 : 명사십리에서 겪은 것들에 대한 단상

 

 내용 연구

 증염(蒸炎) : 더위.

 열뇨(熱鬧) :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석 함.

 창명(滄溟) : 큰 바다.

 명구(名區) : 이름난 지역.

 양미 : 서늘한 기운.

 열뇌(熱惱) : 몹시 심한 고뇌.

 평포(平鋪) : 평평하게 펴 놓음.

 

 이해와 감상

만해 한용운이 명사십리(明沙十里)에 해수욕을 하러 갔던 이야기로 승려 한용운 선생이 짚신을 신고 명사십리 흰모래밭을 거닐었다는 것을 글로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의 일상적인 심회를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쳤을텐데 다행히도 이런 글이 남아 있어서 만해 한용운 선생의 추보적이고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했던 당시의 해수욕장 등이 풍경이나 놀이 등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 글이다.

 

출발부터 여행의 일정을 시간순서대로 늘어놓은 전형적인 기행문인 이 글은 여행 목적과 출발 당시의 설레이는 심정, 아름다운 명사십리(明沙十里) 주변 정경 묘사, 해수욕장에 들어선 감상, 모래 장난, 뱃놀이하는 범선의 가격, 참외막에서 만난 그 지방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  평이한 문체로 이어진다.

 

출발하는 차안 풍경과 명사십리 정경을 서술하는 서두 부분이 관념적인 한자어와 불교용어로 점철되었다면 뒷부분은 문체가 전혀 달라진다. 특히 글의 가운데 부분은 현재형 어미를 사용함으로써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본문에 삽입한 시들은 한용운의 탁월한 평소의 시편에 비해 다소 의외의 시적 표현들이지만 다소 지루해질지 모르는 기행에 흥취를 더해주는 맛이 있다.

 

하얀 모래 사장에 해당화가 십여리에 걸쳐 피어있다는 명사십리, 지금은 가볼 수 없는 그 땅에 오포소리를 들으며 수영을 하는 남녀노소, 원산에 서양인의 별장이 있고 동경, 상해에서 그곳으로 해수욕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신선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귀한 해수욕 관광 기행문에서 당시에 했을 여성들의 수영, 그리고 승려인 만해의 수영복 등등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면서 단순한 한 편의 글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바로 수필의 묘미라는 것이 이런 점에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심화 자료

 

 명사십리(明沙十里)

 함남 원산시 갈마반도(葛麻半島)의 남동쪽 바닷가에 있는 백사장. 바다 기슭을 따라 흰 모래톱이 10리(4 km)나 이어지고 있어 명사십리라고 한다. 안변의 남대천(南大川)과 동해의 물결에 깎이고 씻긴 화강암의 알갱이들이 쌓여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 일대에는 소나무·잣나무·참나무들이 자라며 특히 해당화가 많다. 명사십리의 돌단부(突端部)는 본디 섬이었는데, 바닷물의 퇴적작용으로 육지와 연결되어 갈마반도를 형성하였다. 원산시와 명사십리 어귀를 잇는 구간에는 현대적인 고층건물이 늘어서고, 부근에는 송도원(松濤園)해수욕장이 있다.

 

 명사십리(明沙十里)

 조선시대의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소설. 중국 명(明)나라를 배경으로 한 고대소설 《보심록(報心錄)》을 번안한 도덕소설로 일명 보심록(報心錄)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작자·연대 미상의 고대소설. 《금양이산(錦襄二山)》이라고도 한다. 명(明)나라를 배경으로 복잡한 구성과 보은(報恩)을 주제로 한 도덕소설이다. 12회의 장회소설(章回小說)로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변경(京) 대동부(大同府)에 사는 승상(丞相) 양자기(楊子期)는 만년에 아들 세충(世忠)을 낳았는데, 고아가 된 친구의 아들 증운효(曾雲孝)와 화익삼(花益三)을 데려다 함께 자식처럼 길러 공부시켰더니 이들 세 사람이 자라서 여러 가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서로 잘 도와서 화목하게 살아간다는 줄거리이다. 이 책에는 ‘총론(總論)’이라 하여 소설의 줄거리를 요약한 가사도 실려 있다.

 


출처 : http://www.wonsan.org/hometown/hometown1_3.htm)

 

 

작가 :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독립운동가승려시인. 본관 청주(淸州). 호 만해(萬海卍海). 속명 유천(裕天). 자 정옥(貞玉). 계명 봉완(奉玩). 충남 홍성 출생.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에 들어갔다가, 1905(광무 9)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 가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융희 2) 전국 사찰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종종무원(圓宗宗務院)을 설립한 후 일본에 가서 신문명을 시찰했다. 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3년 귀국, 불교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해 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 대승불교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6년 서울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唯心)을 발간, 19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黙)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고, 이듬해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일을 맡았다. 31년 조선불교청년회를 조선불교청년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佛敎)를 인수, 이후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사상 고취에 힘썼다. 35년 첫 장편소설 흑풍(黑風)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37년 불교관계 항일단체인 만당사건(卍黨事件)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을 자연(自然)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제도(衆生濟度)를 노래했다. 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大韓民國章)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소설인 박명(薄命)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등이 있다. 73한용운전집(6)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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