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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에서 본 운명관의 한 모습 / '역마(驛馬)'를 중심으로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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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에서 본 운명관의 한 모습 - '역마(驛馬)'를 중심으로

 본문

 한국인의 심상 구조(心象構造)의 원형(原型)을 밝힌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학문적 과제에 틀림없다. 다만 그 일단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하나로 김동리(金東里)의 '역마(驛馬)'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은 단편이며 1948년 '백민(白民)'지에 실린 것이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 하동과 구례, 쌍계사라는 절로 이르는 세 갈래 길목의 화개(花開) 장터가 배경으로 되고 시대는 지금부터 3, 40년 전쯤으로 된다. 이 작품에서, 화개 장터라는 배경 자체가 짙은 운명의 냄새를 피우고 있다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장이 서지 않는 날일지라도 인근 고을 사람들에게 그 곳이 그렇게 언제나 그리운 것은 장터 위에서 화갯골로 뻗쳐 앉은 주막마다 유달리 맑고 시원한 막걸리와 펄펄 살아 뛰는 물고기 회를 먹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주막 앞에 늘어선 능수버들 가지 사이사이로 사철 흘러 나오는 그 한(恨) 많고, 멋들은 진양조 단가 육자박이들이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여기다 가끔 전라도 지방에서 꾸며 나오는 남사당 여사당 협률(協律) 창극 신파 광대들이 마지막 연습 겸 첫 공연으로 여기서 반드시 재주와 신명을 떨고야 경상도로 넘어 간다는 한갓 관습과 준례가 이 화개 장터의 이름을 더욱 높이고 그립게 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인용에서 보듯이 전근대적인 한국인의 심정(心情)의 자리가 어떤 그리운 것. 한(恨)을 머금고 있는 진양조와 광대들, 그리고 광대라는 예(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신명(神明)이라는 단어에 걸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장터란 전근대적 사회에 있어서는 하나의 연극적 공간의 의미를 띤다. '장 보러 간다(看市場)'는 한국어가 상업성과 무관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들 광대에 의해 한국적 예의 가닥이 이어져 왔다고 할 때, 그 예란 무엇인가. 아마도 생명의 촉각화(觸覺化)일 것이며, 대체로 그것은 맹목적 혹은 맹목(盲目)으로 보인다. 도덕과 윤리에 짓눌리고 쫓긴 이 예의 의식은 시간이 지나가고 보면 가장 확실한 삶의 감각화임을 우리는 발견한다. 그것은 한을 동반한 가락으로 되고, 그 한의 처리가 신명을 떤다는 것으로 표현된다. 이들 예인(藝人) 혹은 광대가 신분적으로 천민(賤民)에 속한다는 것은 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측면이다. 무당의 경우를 보면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떤 장애라든가 세습적인 것이며, 광대의 경우도 천생 타고나는 것으로 되어 있는 측면도 많다. 이들 특수한 감각적 소유자가 하층 사회에서 민중 의식에 젖줄을 대고 있다는 것은 한국 예의 이해에 불가결한 이해점으로 보인다. 이러한 여러 복합적 의미 관련이 특수하고도 보편적인 모습으로 화개 장터에 걸려 있는 것이다.

 

 이 장터에 옥화(玉花)라는 주막집 여인이 있다. 그녀에게는 역마살(驛馬煞)을 풀기 위해 쌍계사라는 절에 가 있는 아들 성기가 있다. 다음 인용에서 이들 주인공의 운명적 계보를 엿볼 수가 있다.

 

 설흔 여섯 해 전에 꼭 하룻밤 놀다 갔다는 젊은 남사당의 진양조 가락에 반하야 옥화를 배게 된 할머니나, 구름같이 떠돌아다니는 중과 인연을 맺어서 성기를 가지게 된 옥화나 다같이 화개 장터 주막집에 태어났던 그들로서는 별로 누구를 원망할 턱도 없는 어미 딸이었다. 성기에게 역마살이 든 것은 어머니가 중서방을 정한 탓이요, 어머니가 중서방을 정한 것은 할머니가 남사당에게 반했던 때문이라면 성기의 역마운도 결국 할머니가 장본인이라 이에 할머니는 성기에게 중질을 시켜서 살을 떼우려고도 서둘러 보았던 것이고 중질에서 못 푼 살을 이번에는 옥화가 그에게 책 장사를 시켜 마저 풀어 보려고도 했던 것이다. 성기로서도 불경보다는 분명히 이야기 책에 끌리는 눈치요, 중질보다는 차라리 장사나 해 보고 싶다는 소청이기도 하여, 그러나 옥화는 꼭 화개장만 보이기로 다짐까지 받은 뒤, 그에게 책전을 내어 주기로 했던 것이었다.

 

 역마살이란 당사주(唐四柱)에서의 시천역(時天驛)에 해당된다. 운명적으로(팔자소관) 이 살(煞)이 끼면 집에 머물 수 없이 한평생을 방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그리움의 세속적 논리라 규정된다. 옥화의 아버지가 그랬고, 남편이 그랬고, 이제 그 아들도 이 역마살이 끼어 있다. 이 살을 풀기 위한 방도로 쌍계사 절에 아들 성기를 어릴  때부터 중질을 시킨다. 그런데 그 아들은 자라면서 불교엔 관심이 없고 장사질이나 하고 싶어한다. 옥화도 할 수 없이 장날에만, 그것도 꼭 화개 장터에서만 책 장사를 시킨다. 그것도 성기가 택한 이야기 책 장사다.

 

 어느 날 옥화네 주막에 채 장수 영감과 계연이라는 과년한 딸이 머문다. 아들 성기가 장날 내려와 계연과 사랑에 빠진다. 바야흐로 두 사람이 결혼하고 살림을 이루고 정착하면 소위 역마살이 풀릴 수가 있을 때, 그 계연이가 성기의 어머니의 친동생, 즉 성기의 이모임이 확인된다.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절망한 성기는 심한 열병으로 뼈만 남도록 생사를 해매게 된다. 오래 앓은 후 겨우 목숨을 건진 성기는 그 어머니에게 다음처럼 말한다.

 

 "어머니, 나 엿판 하나만 마춰주."

 "……"

 

 옥화는 갑자기 무엇으로 얻어맞은 듯이 성기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지다시 한 보름이 지나……유달리 맑게 개인 화개 장터 가름길 우에서 성기는 그 어머니와 하직을 하고 있었다. 갈아입은 옥양목 고의적삼에 명주 수건까지 머리에 동여매고 난 성기는 새로 맞춘 새하얀 나무 엿판을 질빵해서 느직하게 엉덩이 즈음에다 걸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의 주막이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 갈 무렵하여서는, 육자박이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가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구조상 거의 단편으로 완벽성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주제를 감당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결국 역마살로서의 팔자(八字) 소관으로 주어진 운명적인 사실에서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역마살을 따르고 만다는 것, 그리고 그 운명에 순종할 때 콧노래까지 나오는 생명 의식을 되찾는다는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다음처럼 간단히 지적할 수도 있다. 즉, 한갓 광대나 주막집 하층민 나부랭이들의 생태이지 그것이 한국인의 운명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이런 지적에 대한 문학측의 대답은 예(藝)의 의미에로 되돌아간다.

 

 우선 이 작품에 쌍계사라는 절이 관여되어 있다는 점과 장터라는 두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 그리고 장사꾼이나 광대들이 또한 배경으로 놓여 있다. 이런 것들은 사대부나 뿌리박은 농민들에 있어 그들의 감정 처리를 하는 하나의 장치로서의 의미 관련을 내포한다. 한 사회에는 정치적 질서, 경제적 질서 등등이 생활의 기반으로 놓여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 섬세한 생(生)의 감각적 의미 혹은 촉각을 압살한다. 사르트르 투로 보아 인간에겐 상상적 의식의 주체의 능력이 실천적 의식의 주체, 사유적 의식의 주체와 동등하게 놓여 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장치가 곧 예(藝)라 할 수 있다. 화개 장터라는 연극적 공간에 불교와 장 보러 오는 보통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들의 정점(頂點)에 광대의 신명을 떨치는 예가 놓인다면 이 기호 체계는 종교도 아니고, 삶의 한 방식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예인 것이다. 물을 것도 없이 당사주란 한갓 미신이며 곡두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협박하는 장치가 발명, 수용된 것은 엄연한 실재이다. 정치적·경제적 질서, 소위 정상적 유가(儒家)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광기로서의 인간 정신의 질병이 필요했고, 이로 인해 소위 유가류(儒家流)의 정상(正常)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 균형을 취하는 하나의 장치가 요청되었을 것이다. 그런 심상 구조의 체계가 실재한다면 문학이 그 실재를 결코 외면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유일신(唯一神)이나 범신(汎神), 혹은 무신관(無神觀)과는 관계 없는 일에 속한다.

 요점 정리

 

 작자 : 김윤식(金允植)

 갈래 : 실천 비평, 분석 비평, 원형 비평

 표현 : 작품 내에서 논리적 근거를 들어 주장을 설득력 있게 전개함.

 주제 : '역마`에 나타난 한국인의 운명 순응 자세

 의의 : 널리 사용되지 않는 원형 비평의 방법을 적용하여 작품을 분석하고 이를 보편적인 원리로 일반화함.

 출전 : <사목> (1975)

 내용 연구

 한국인의 심상 구조의 원형을 밝힌다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학문적 과제에 틀림없다. 다만 그 일단을 작품을 통해 엿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 하나로 김동리의 '역마`를 들 수 있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 하동과 구례, 쌍계사라는 절로 이르는 세 갈래 길목의 화개 장터가 배경으로 되고 시대는 지금부터 3, 40년 전쯤으로 된다. 이 작품에서, 화개 장터라는 배경 자체가 짙은 운명의 냄새를 피우고 있다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 '역마`의 배경에 깔린 운명적 성향

 

 이 작품은 구조상 거의 단편으로 완벽성을 이루고 있다. 무엇보다도 언어가 주제를 감당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결국 역마살로서의 팔자 소관으로 주어진 운명적인 사실에서 주인공과 그 주변 사람들이 그것을 극복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역마살을 따르고 만다는 것, 그리고 그 운명에 순종할 때 콧노래까지 나오는 생명 의식을 되찾는다는 이 작품을 두고 사람들은 다음처럼 간단히 지적할 수도 있다. 즉, 한갓 광대나 주막집 하층민 나부랭이들의 생태이지 그것이 한국인의 운명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라고. - '역마`의 운명적 성향을 부정하는 견해

 

 우선 이 작품에 쌍계사라는 절이 관여되어 있다는 점과 장터라는 두 배경을 염두에 두어야 하리라.l 그리고 장사꾼이나 광대들이 또한 배경으로 놓여 있다. 이런 것들은 사대부나 뿌리박은 농민들에 있어 그들의 감정 처리를 하는 하나의 장치로서의 의미 관련을 내포한다. 한 사회에는 정치적 질서, 경제적 질서 등등이 생활의 기반으로 놓여 있다. 그것은 많은 경우에 있어 섬세한 생의 감각적 의미 혹은 촉각을 압살한다. 사르트로 투로 보아 인간에겐 상상적 의식이 주체의 능력이 실천적 의식의 주체, 사유적 의식의 주체와 동등하게 놓여 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장치가 곧 예(藝)라 할 수 있다. 화개 장터라는 연극적 공간에 불교와 장 보러 오는 보통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부분들의 정점에 광대의 신명을 떨치는 예가 놓인다면 이 기호 체계는 종교도 나이고, 삶의 한 방식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예인 것이다. 물을 것도 없이 당사주란 한갓 미신이며 곡두에 불과하겠지만, 그런 협박하는 장치가 발명, 수용된 것은 엄연한 실재이다. 정치적·그런 경제적 질서, 소위 정상적 유가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광기로서의 인간 정신의 질병이 필요했고, 이러 인해 소위 유가류의 정상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그 균형을 취하는 하나의 장치가 요청되었을 것이다. - '역마`에 나타난 한국인의 운명 순응 자세와 예(藝)의 관계

 

(하략)

 심상 구조 : 마음에 맺혀지는 느낌, 분위기, 생각 등의 기본 꼴

 원형(原型) : 기본이 되는 모형

 역마살 : 당사주의 한 가지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돌아 다니게 되어 있는 팔자.

 예(藝) : 재주·기예·예능

 신명 : 흥겨운 신과 멋.

 당사주 : 중국에서 유래한, 그림으로 사주를 보는 방법. 혹은 그 책

 곡두 : 시각의 착각으로, 실제로 눈앞에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보이거나 가웃없이 사라져 보이는 현상. 환영(幻影).

 한국인의 ~ 과제에 틀림없다. : 이것이 어려운 과제인 이유는 심상구조의 원형이 실재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음을 증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 우선 주목된다. : 장터란, 그리움과 한을 머금고 있는 예인들이 신명을 푸는 공간이기 때문에 '역마`의 운명관을 엿보는 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 있음이 주목된다. : 주제를 문학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다. 결국 작품의 구조와 표현에서 '역마`가 뛰어난 작품이라는 설명이다.

 즉, 한갓 ~ 있단 말인가라고. : 운명에의 순응을 통해 생명 의식을 되찾게 된다는 것은 몇몇 하층민의 개별적인 생태일 뿐, 전체 한국인의 운명관과 관련지을 만한 보편성은 없다는 견해이다. 즉, 글쓴이와는 상반된 견해를 예로 든 것이다.

 정치적 ~ 요청되었을 것이다. : 엄격하고 전체적인 유교 원리를 정치·경제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서민들의 항거가 견제도었고, 이를 긍정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예인들의 기예를 이용하였다. 울분을 삭이는 서민층과 질서 유지를 원하는 지배층 사이에서 예인들의 기예는 완충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전근대적인 한국인의 - 있음을 알 수 있다 : 작품 속에 반영된 운명관을 추출하기 위한 예비 작업으로서 장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이다.

 '장보러 간다'는 결코 - 우연이 아니다 : '장 보러 간다'는 말에는 반드시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서 시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예인(藝人)들의 공연을 보고 신명을 풀기 위해서 가기 때문에 '보러 간다'라는 말이 쓰였다는 뜻. 예술적 공간과 상업적 공간의 상동성을 말한다.

 도덕과 윤리에 - 중요한 측면이다 : 도덕이나 윤리라는 이름 아래 예(藝)의 정신은 천시 받았고, 그러한 서민들과 하층민들의 한이 이 신명으로 표출되었다는 뜻이다. 예인들이 하층민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대변한다.

 이해와 감상

 이 글은 '역마를 중심으로'라는 부제(副題)가 말해 주듯이 김동리의 '역마'를 대상으로 한 작품론(作品論)이다. 따라서, 비평 대상을 기준으로 분류하면 실천 비평에 속한며, 비평 방법에 따라 나누면 원형 비평에 속한다.

 

 화개 장터 주막집 주인인 옥화(玉花)의 아버지는 떠돌이 남사당패였고 남편은 떠돌이 중이었다. 그런데 옥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들인 성기마저도 떠돌이 엿장수가 되고 만다. 옥화는 이것을 '역마살'이라는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이 글에서 지은이는 이 역마살(驛馬煞)이 '그리움'을 표현하는 한국인의 원형적(原型的) 심상이라고 해석한다. '역마'에는 이것이 옥화를 중심으로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세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데, 이들은 이러한 운명을 거부하기보다는 순응함으로써 비로소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 평론에서 필자는 역마살이 '그리움`을 표현하는 한국인의 원형적 심상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역마`에는 옥화를 중심으로 하여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운명적인 역마살이 세 번 반복 나타난다. 이들은 역마살의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거기에 순응하며 삶으로써 생명 의식 내지는 삶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의 비평의 방법은 원형 비평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교과서에는 중간 부분 한 대목을 실었다.

 심화 자료

 김윤식(金允植, 1936 ~ )

 국문학자, 문학 평론가. 경남 김해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문학사 방법 서설`(1962), '역사의 비평`(1962)으로 등단, 현재 서울대 교수 경향 한국 근·현대 문학의 비평 분야에서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작품 <한국 근대 문예 비평사 연구>, <안국근대 문학 사상사>, <한국 현대 문학사론>, <이광수와 그의 시대> 등이 있다.

 '역마'의 줄거리

  젊은 시절 잠시 화개장터를 들러간 체장수 영감이 호리호리한 소녀와 함께 저녁놀에 은어가 번득이는 여름철 석양 무렵 옥화네를 찾는다. 이때 옥화의 어머니는 죽고 총각 아들 하나와 옥화가 단둘이 살면서 술집을 하고 있다. 영감은 옥화에게 인사를 청한다. 소녀에 대해 묻는 옥화에게 영감은 딸이라고 한다. 그는 화갯골로 들어갔다가 화동쪽으로 가볼 생가깅라면서 갈 때 데리고 가겠으니 딸을 맡아달라고 한다. 옥화의 아들 성기는 노인의 딸 계연을 보고 화색이 돈다. 여자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성기가 계연에게 관심을 보이자 옥화 역시 즐거운 얼굴이 된다. 이튿날 성기가 책전에 있으려니까 계연이 점심을 들고 나타난다. 다음날에도 옥화는 계연에게 성기의 시중을 들게 한다. 옥화는 영감이 나오는 대로 계연을 아주 양딸로 정해둘 생각을 한다. 성기가 칠불암에 책값은 수금하러 간다고 하자 옥화는 나물도 캘겸 계연을 데리고 가라고 한다. 성기는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산길을 택해 가다가 계연의 둥그스름한 어깨와 목덜미를 껴안고 입술을 포갠다. 화갯골로 들어간지 보름이 넘어도 영감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느날 옥화는 계연의 머리를 빗어주다가 왼쪽 귓바퀴 위의 조그만 사마귀를 발견한다. 이튿날 그녀는 악양에 볼일이 있다면서 아침 일찍 떠난다. 옥화가 없는 집에서 술손님들의 치다꺼리를 하던 계연은 성기에게 혼이 난다. 옥화는 악양 명도에게 갔다 소나기에 젖어 돌아온 뒤부터 성기와 계연의 사이를 경계한다. 성기는 그것이 싫어서 절에서 눌러 있던 참이었다. 절에서 내려온 성기는 이웃주막의 놈팡이 하나와 참외를 먹고 있는 계연을 보고 화를 낸다. 이튿날 아침 계연을 찾으려는 듯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성기는 절로 올라간다. 그가 절로 올라간 날 저녁 때 영감이 돌아온다. 다음날 떠나려는 것을 옥화가 하루 더 쉬어서 가라고 만류한다. 다음날 성기가 절에서 내려왔을 때 체 장수 영감과 계연은 떠날 준비를 한다. 이제 떠난다는 말에 성기는 충격을 받는다. 옥화는 계연의 조그만 보따리에다 돈이 든 꽃주머니를 정표로 넣어준다. 옥화는 영감에게 살기 여의치 않거든 여기 와서 함께 살자고 한다. 계연이 절규를 남기고 간 뒤 성기는 자리에 누워 회춘을 단념한 상태가 된다. 옥화는 마음이나 알라고 일의 전말을 이야기한다. 이 말에 힘을 얻고 자리에서 일어난 성기는 엿판 하나를 구해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정처없이 떠난다.

 '역마`의 운명론

 '역마`는 역마살이 낀 한 가족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옥화라는 여인의 주위에 있는 아버지, 남편, 아들은 역마살의 운명을 타고났다. 우리는 대개 역마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작자 김동리는 이러한 생각을 역전시키고 있다. 역마살을 타고난 사람은 그 운명대로 떠돌며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는 것이 김동리의 생각이다. 김동리는 이른바 '제 3 휴머니즘`을 내세운 작가이다. 운명에 걸맞게 살아가도록 그대로 두는 것, 이것이 그가 새롭게 발견한 사람의 진실이었다. 그것은 인생의 의미를 근대적 개성의 확대, 부의 확대 등에서 찾는 서구의 휴머니즘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다. 역마살을 타고난 성기가 집을 떠나면서 오히려 흥겨울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대로 사랑가려는 주체적인 의식이 발동했기 때문이다.

 '역마'의 배경과 역마살과의 관계

 장터란 역마살이 낀 장돌뱅이들의 집결지로서, 그들의 삶을 영위해 가는 장소이다. 이 작품의 공간적 배경인 화개 장터 역시 그러한 곳이다. 옥화는 이 장터에서 주막을 하며 장돌뱅이들의 근거지를 제공하고 있기에 그의 아들 성기의 역마살과 관련을 맺고 있다(성기의 역마살은 외조부 및 부로부터의 내림이기도 하지만). 그리고 화개 장터 북쪽에는 쌍계사가 있는데, 옥화는 성기를 그 곳에 보내 역마살을 풀려고 애쓴다. 이같이 배경에 절을 배치한 것도 주제 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해 주는 장치인 셈이다.

 '역마'의 배경 설정이 갖는 의미

 '역마'의 배경은 화개 장터이다. 화개 장터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 지역으로 온갖 장사치들이 빈번하게 왕래하는 교통의 요충지이자 떠돌이 인생들이 스쳐지나가는 정거장이다. 따라서 화개 장터의 사람들이란 설사 그곳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붙박이이기보다는 떠돌이이기 십상이다. 그들 간의 인간적 관계 역시 항구적이기보다는 임시적, 일시적일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정은 '역마'의 주요 인물들에게서 그대로 확인된다. 성기가 역마살이 끼어 떠돌아다니고 싶어하는 점이나, 체장수 영감과 계연이 스쳐지나가듯 왔다가 가는 것, 체장수 영감이 옥화의 아버지이고 계연은 이복 동생이라는 사실 등 그 모두가, 역마살 낀 인물들의 불안정한 삶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역마'는 그 배경을 화개 장터로 설정함으로써 주제의 개연성을 강화하고 있다.

 '역마'에 나타난 인간의 운명

 이 작품의 등장 인물들은 모두 무엇인가 그리움을 안고 그것이 한이 되어 살고 있는데, 무엇인가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이 곧 역마살이다. 이 소설의 인물은 모두 역마살이 끼어 있다. 이들은 역마살을 극복하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 방법이란 바로 문화적 장치인 셈인데, 그것은 작품 속에서 불교(성기를 쌍계사로 보냄)와 결혼(계연과의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계연이 옥화의 이복 동생임이 판명되어 역마살의 극복은 실패하고 만다.

 성기는 집을 떠나면서도 육자배기 가락의 흥겨움이 나올 수 있었을까?

이 작품에서 특이한 점은, 결말 부분에서 엿장수가 된 성기가 육자배기 가락으로 제법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 길을 떠나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이모였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면서, 어머니가 있는 고향을 떠나는 마당에 육자배기 가락의 흥겨움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김동리 문학의 핵심인 '삶의 구경적 형식에 대한 탐구'라는 창작 방법상의 비밀 때문에 가능하다. 일반적인 사회 통념으로는 방랑자의 삶은 고달프고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김동리 문학에서는 운명이 그러하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도 행복일 것이라고 감히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김동리 특유의 '제3 휴머니즘론'을 가능하게 한다. 그는 인류사에 존재하는 휴머니즘의 형태, 즉 르네상스의 인간 발견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인간 해방보다 더 중요한 휴머니즘 형태가 있다고 주장했던 바, 그가 말하는 제3휴머니즘론이란 모든 인간에게는 저마다의 운명이 있고, 그 운명에 따라 살아갈 때 독자적인 행복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3휴머니즘론은 김동리로 하여금 근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부정하고, 토속적인 것에서 우리 민족의 심성과 운명을 읽어 내면서 운명에 맞게 사는 것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즉 운명론자와 반근대주의자가 될 수 있었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우리 민족의 운명에 대한 나름의 모색, 그것은 작가 김동리가 해방 직후에 강력하게 좌익에 반대할 수 있었던 사상적 무기였던 셈이다. (출처 : 김윤식 교수의 소설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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