펄벅의 '대지'에 대하여
by 송화은율소설 '대지'(펄벅) 해설과 평가
동서양이 하나로 이어지는 세계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여사는 "저의 창작력을 형성한 것은 미국 소설이 아니라 중국 소설입니다. 소설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전달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것도 중국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여사는 <중국의 소설>이라는 제목으로 한 차례 강연을 하기까지 했다. 1931년에서 1932년에 일본 침략군은 만주로부터 다시 중국 북부를 장악한 다음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주떠(朱德)와 마오쩌둥(毛澤東)이 편성한 공산군과 대결하기에 바쁠 때를 틈타서 샹하이를 점령하고는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갈 기세를 보였다. 그래서 난징에 있는 미국영사는 미국인 부녀자들이 피난할 것을 명했다. 여사는 양녀만 데리고 뻬이징으로 갔다. 그곳에서 2간 머물면서 오전에는 집에서 창작을, 오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대작 《수호지》의 영역을 계속했다. 1930년에 뻬이징에는 왕자오밍이란 군벌이 난징 정부와 대립하는 친일적인 정부를 수립했다. 관리의 부패가 극심하고 민중의 불평이 점차 높아져 국민당 정부가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여사는 1932년 여름에 영주할 계획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미국은 경제 대공황에 휩쓸려 있었으나 여사는 가는 곳마다 도처에서 미국이 낳은 대여류작가로 환영을 받았다.
이 해에 여사는 《젊은 혁명가(The Young Revolutionist)》와 《아들을》을 출판했다. 《대지》는 늙은 왕룽이 세 아들에게 땅을 팔지 말라고 유언하는 장면으로 끝냈는데, 《아들들》은 왕룽이 죽은 뒤 그 세 아들의 생애를 그리고 있다. 부유하고 방탄한 왕 따, 인색하고 축재에 여념이 없는 상인 왕얼(王仁), 그리고 군벌의 두목이 된 왕싼(王三)-일명 왕후(王虎)-의 이야기지만 왕후 장군이 그 중심 인물이다. 따라서 군벌할거와 혁명군의 출현이 시대적 배경으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여사가 잘 아는 소재이기도 하다.
"나는 군벌을 잘 알고 있었다. 다년간 그들의 정권 하에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신식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군벌을 무시했다. 그러나 서민들은 그들의 비적들로부터 자기들을 보호해 주는 한, 군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군벌 두목들은 고집이 세고 익살스러우며,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었다. 우리 이웃 구역의 군벌 두목은 그가 모르고 있는 게 셋 있기로 유명했다. 즉, 자기가 가진 병력이 얼만지 몰랐고, 자기가 가진 돈의 액수, 그리고 첩의 수가 얼마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1935년에 여사는 드디어 벅 씨와 이혼을 하고 다음해 존 데이 출판사 사장 리처드 월시 씨와 재혼했다. 그리고 이 해에 《분열된 일가》가 출판되어, 중국의 대륙을 배경으로 한 3대에 걸친 세계적 거작이며, 1938년도 영예로운 세계 최고 문학상을 수상하게 되는 《대지》 3부작의 완성을 보았다.
《분열된 일가》는 그 제목처럼 분열된 왕씨 일가의 이야기로서, 이 소설에서는 왕룽의 손자이며, 《아들들》의 중심 인물인 왕후 장군의 외아들인 왕유안(王元)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아들들》에 이미 나타난 바 있는 그는 아버지 같은 군인 기질의 성격이 아니고 이상주의적 인텔리형이다. 그는 꽝뚱(廣東)의 사관학교에 가서 훈련을 받았으나 그곳에서 훈련받은 군인들이 장차 혁명군이 되어 북으로 진격하여 군벌들과 싸우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혁명의 대의에는 공명하지만 자식된 도리로서 군벌인 아버지에게 총뿌리를 겨눌수 없어 그 사관학교를 박차고 나온다. 그러나 아버지를 위해서 일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는 아버지의 제 2 부인이 살고 있는 샹하이에 가서 부유한 그 부인 집에 한동안 머물면서 혁명당에 가입한다. 그후 그는 도미 유학의 길을 떠난다. 그는 미국에서 6년간 유학하고 돌아와서 처음엔 국민당 정권을 위해 일하다가 그 부패상에 환멸을 느껴 서부로 간다. 그러나 그후 아버지 왕후의 임종이 다가오고 있는 토막집으로 돌아온다. 그 토막집은 그의 조부, 왕룽이 살던 집이기도 하다.
이 《분열된 일가》에 관해서 비평가 도로시 캔필드는 이렇게 썼다.
"아무도 모방할 수 없는 확실하고 차분한 필치로, 이 대여류작가는 《대지》와 《아들들》에서 우리 모두가 한동안 같이 살아 온 중국의 한 가족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간다…… 그것은 풍성하고 온전하며 인물들이 생동하는 소설이며, 한 개인의 영혼의 성장 발전을 그린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뜻밖에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통지룰 받았을 때에 여사는 "아, 그건 내가 아니라 드라이저에게 주어졌어야 했는데!"라고 소리쳤다. 그만큼 자신의 업적에 겸허한 여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드라이저와 비교할 때 여사의 작품들이 더 이상주의적 경향을 띠었기 때문에 스웨던의 한림원은 그 상의 설정 취지에 따라 그것을 여사에게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사가 말한 것은 당시의 미국 자연주의의 거장 드라이저를 존경하고 있었다는 방증이 되기도 한다. 드라이저 또한 여사 자신처럼 작품의 스케일이 크고 또 다작이었음을 상기할 때 수긍이 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여사는 또 당시에 생존하고 있던 1930년도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 작가 싱클레어루이스를 존경했으며 소설 예술에 대한 서구적 긍지는 그로부터 일깨워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 여사는 사숙한 작가들은 모두 19세기 영국의 대가들이며, 여사가 피아노 연주를 즐긴 작곡가도 베토벤, 슈베르트 등 낭만파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펄 벅 여사는 <동양과 서양>이라는 수필에서 동양은 정신적이고, 서양은 물질적이라는 일반론에 반대했다. 동양은 서양보다 더 정신적이지도 덜 정신적이지도 않으며, 또 서양은 동양보다 더 물질적이지도 덜 물질적이지도 않다고 말하고 나서, 그러나 동양과 서양에는 가치관에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동양인은 서양인보다 인생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동양인은 서양인보다도 인생을 즐기는 데 더 큰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양인처럼 물욕과 소유욕이 강하지 않으며, 아까운 인생을 일과 돈벌이하는 데만 바치는 것을 어리석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담배 한 대와 차 한잔에 마음의 평화를 즐기고 가족과 단란하게 지내는 것을 낙으로 삼는다. 그들은 가족 단위이며, 가족 모두가 행복하지 않으면 어떤 개인도 행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노인은 그 가족 안에서 웃어른 대접을 받고, 어린 손자 손녀들은 철없는 아이들인만큼 사회생활에 적합하도록 가정교육을 받는다. 그리하여 모두 행복해져야 인생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 여사는 동양인의 그러한 생활철학을 서양인이 본 받을 만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사는 또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행복에 대한 강조는 동양이 서양에게 줄 수 있는 최대의 선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서양인은 인간적인 행복을 도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동양인은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기 위해 서양인들로부터 병든 몸을 고치고 힘든 노고를 덜며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는 과학기술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동서양이 상부상조하면 보다 더 살기 좋은 세계를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자는 여사의 동양관이 《대지》 3부작의 제3부인 《분열된 일가》에서 매우 잘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에서 말한 이 책의 주인공 왕유안은 미국에서 하숙생활을 할 때 그의 미국인 지도교수의 딸 메리와 친해진다. 메리는 왕유안에게 연정을 품게 된 후부터 중국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하여 중국에 대한 인상이 좋아졌다. 그녀는 왕유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나라에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같이 보여요. 어버이와 아들, 친구와 친구,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몰라요. 매사에 생각이 깊고 단순하고 표현도 잘하고 있어요. 당신의 나라 사람들이 폭력과 전쟁을 증오하는 것을 나는 존경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의 좋은 면만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라는 것을 왕유안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에는 메리의 말과는 반대되는 사례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메리가 중국의 일면을 말한 것은 확실했다. 메리는 또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겐 미국인과 미국의 생활이 퍽 조잡하게 보일 거예요. 미국은 역사가 짧고 세련되지 못했거든요."
이 말 역시 미국의 일면임이 확실했다. 그의 하숙집 여주인은 시끄럽게 소리지르고 화를 잘 냈다. 그는 미국의 큰 도시 빈민굴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의 눈으로 보았었다. 왕유안은 여주인에게 겸손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적어도 이 집에서는 우리나라 가정 같은 평화와 예절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중국이 반드시 메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상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것이 그후에 하나씩 그녀의 눈에 비치게 된다. 꽝뚱 출신의 두 중국인 학생이 야비하게 떠들어 대는 중국인 농부의 부부로 분장하여 한 토막 소극을 벌여 놓았던 것이며, 또 얼마 후엔 미국신문에 중국의 혁명군이 중국의 어떤 도시에 거주하는 백인 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 폭행, 살인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던 것이다.
이렇듯 펄벅은, 동양의 장점만을 제시한다면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왕유안이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는 배에는 역시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가는 다른 중국인 남녀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은 한자리에 모여서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동포들끼리 식탁에 모여 앉아 서로 인텔리다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펄벅은 여기서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보는 중국을 논하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극화시킴으로써 여사 자신의 중국관 내지 동양관을 흥미롭게 보여주고 있다. 그 젊은 중국인들도 여사 자신처럼 태평양을 사이에 둔 양대륙에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 생애를 마음대로 보낼 수 있는 현대에 처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지, 안 그래?"
그들은 왕유안의 말을 듣고 서로 쳐다보면서 흥분한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한 젊은 여자가 예쁜 발을 내밀어 보이면서 소리쳤다.
"날 좀 봐요, 내가 만약 우리 어머니 시댁에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자연스런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겠어요?"
모두 어린애들처럼 웃으면서 이러쿵저러쿵 농담을 했다. 그러나 젊은 여성들의 웃음 가운데는 그저 우스운 것보다는 더 깊은 의미가 있었다. 한 사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국민 전체가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이야, 공자(孔子) 이래로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그러자 한 젊은이가 명랑하고도 열정적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공자를 타도하라!"
"옳소!"하고 모두 응답하면서 그 구호를 같이 외쳤다. 그리고 힘차게 말했다. "우리가 증오하는 재래의 풍습과 함께 공자도 타도해야 돼! 공자와 그가 가르친 효도(孝道)를 내리밟아서 납작하게 만들어야 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나올 때도 있었지만 또 어떤 때는 더 진지하게 어떻게 하면 그들의 국가를 위해서 최대의 봉사를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의논하고 계획하기도 했다. 이 젊은 남녀들 가운데 국가를 위해 일해 보겠다는 결의와 열망을 갖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는 국가라든가, 애국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그들은 중국인의 결점과 장점을 진지하게 토론하고 그것을 외국인의 것과 비교하기도 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서양 사람들은 발명의 재능이 뛰어났어. 그리고 정력적인 몸을 갖고 있지. 또 목적을 향해 돌진하는 의지력이 강하다고 할 수 있어."
그러자 한 청년이 물었다.
"그럼 우리 국민의 장점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한 젊은이가 생각 끝에 말했다.
"우리 중국인은 인내력이 강하지. 이해가 많고, 오래도록 참고 견디는 힘이 있어."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아까 예쁜 발을 내밀어 보였던 여자가 발끈하며 말했다.
"이것 봐요. 내가 오래 참고 견딘다는 것은 우리의 장점이 아니라 결점이에요! 나는 내가 하기 싫은 일을 참아 가며 할 생각은 없어요. 무엇이고 참지 않겠어요. 나는 우리 나라의 모든 여성들에게 인내하는 버릇을 버리라고 가르칠래요. 나는 미국 여성들이, 싫은 것을 참고 견디어 나가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그들이 그처럼 융성한 것도 그런 성격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어요."
그들 중에서 입이 가벼운 한 사나이가 맞장구를 치며 같은 남자들에게 소리쳤다.
"그래, 그래! 그 나라에서는 남자가 더 참기를 잘해. 우리는 그런 걸 본 받아야 해!"
모두 소리내어 웃었다. 젊은 사람들은 웃기를 잘 한다. 그때 입이 가벼운 사나이는 그 도도한 기세를 보여 준 예쁜 여자를 넌지시 바라보았다.
위의 대화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펄벅은 동양인의 특성과 그들의 장단점을 다각도로 관찰하고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동양인은 서양인에게서 배울 점이 있고, 서양인 역시 동양인에게서 본받을 점이 있는 것이며, 그 어느 쪽도 무조건 좋거나 나쁜 것은 없다. 동양인은 그들 자신의 발전과 복지를 위하여 서양의 진보된 과학기술은 물론이고 서구의 자유사상을 도입, 봉건사상과 대치시켜 그들의 사회생활과 일상생활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중국인의 경우 아편이나 전족, 또 그런 것과 유사한 악습은 하루 빨리 버러져야 하며, 민주정치, 남녀평등의 길로 줄달음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야인에게도 그들 자신의 좋은 전통이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서양 것은 무엇이나 좋다는 듯이 무조건 그것과 대치시키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펄 벅은 생각한다. 예컨대, 위에 인용한 소설 장면에서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은 나머지 자기 나라의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전적으로 배척하고 있는 중국 청년은 이 소설 장면의 극적 효과를 내는 데는 기여하고 있지만 여사가 천박하게 생각하고 있는 동양인의 유형이다.
펄 벅 여사는 물론 중국 배경의 작품만은 쓴 것은 아니다. 한국, 인도, 일본 등 동양 여러 나라들을 소재로 한 작품도 여럿 썼고, 태평양 양쪽 대륙에 걸쳐 쓴 작품도 있으며. 미국 배경의 작품은 더욱 많다. 특히 미국으로 아주 돌아간 뒤로는 미국 배경의 작품을 연거푸 냈는데 그 작품들이 많이 읽히는 것이 작품 자체의 가치 때문인지 아니면 펄 벅의 이름 때문인지 가늠해 보기 위하여 여사는 한동안 자신의 이름을 감추고 존 시지라는 남자 이름으로 몇 권의 책을 냈다. 그러나 그렇게 나온 작품 역시 대호평을 받았다. 캔자스주의 개척자 이야기를 쓴 《도시인》같은 작품은 "이 소설의 작가는 그의 반생을 캔자스주에서 보냈음이 틀림없다."는 평을 받을 만큼 극히 사실주의적으로 그렸던 것이다. 사실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여사가 후반생을 대부분 보낸 집은 펜실베이니아주 퍼커시에 있었다. 이것으로도 여사의 천부적인 작가 재질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여사는 역자에게 여사의 전 작품이 두 분류로 나누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수채화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유화적인 것이라고 했다. 수채화적인 것이란 한 개인을 중심으로 그린 것으로서 비교적 가벼운 터치의 보편적인 이야기며, 《어머니》,《여인의 전당》,《북경에서 온 편지》,《모란꽃》,《정오》,《새해》 등이 그 예이고, 유화적인 것이란 역사적 파노라마인 묵직묵직한 장편들로서 《대지》3부작, 《서태후》, 한국의 근대사를 다룬《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도시인》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동서양 세계를 무대로 하고 수채화·유화적인 작품 80편을 남긴 여사는 세계에 드문 대여류작가임에 틀림없다.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작품 속에 나타난 사상은 휴머니스틱한 사랑이었다.
그러한 사랑은 《한국에서 온 두 처녀》속의 한 아가씨가 한 말을 빌어 본다면 <세계적인 사랑>이었던 것이다. 여사가 오래 전에 동양인에 대한 미국인의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뉴욕에 동서협회를 창립했고, 또 후년에는 여사의 사재를 던져 미아(美亞) 혼혈고아복지사업을 펴 우리 나라에도 그 지부를 운영케 한 것 등은 여사의 휴머니즘을 행동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여사가 지은 <에센스>라는 시가 있는데, 그 속에서 여사는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든 작품의 에센스는, 원근을 막론하고 이 지상엔 사랑이 없으면 공포가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대지의 아들들을 노래한 목가
"나는 원래 가정적인 성품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나의 시대는 내 재능--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과 더불어 나를 작가로 만들었으며, 나로 하여금 내 가정과 내 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여러 국민들의 삶 속 깊이 살게 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 여류작가이며, 우리 나라에서도 여러 번 내왕한 펄 벅(Pearl S, Buck) 여사의 자전적 장편 에세이 《나의 몇 세계(My Several World)》서두에 나오는 말이다.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 힐즈보로에서 태어난 펄 벅은 생후 3개월만에 장로교 선교사인 양친의 품에 안겨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 양쯔강 강변의 전강(鎭江)이라는 소도시에서 자랐다.
펄의 가족은 다른 백인들처럼 백인촌에서 살지 않고 중국인들 주민가 한가운데서 살았다. 어린 펄은 주로 중국인 유모 손에 자랐기 때문에 영어보다도 중국어를 먼저 배웠고, 남빛의 중국 여자옷을 입고 중국인 소학교에 다녔다. 뿐만 아니라 공선생(孔先生)이라는 중국인 노학자로부터 중국어와 한문을 배웠다. 그렇게 중국인과 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1900년에 산뚱성(山東省)·싼시성(山西省) 일대에서 의화단 사건이 일어나 폭도들이 백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할 때에야 비로소 그녀는 자기가 중국인과 다른 외국인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그녀의 가족은 이웃 중국인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
펄이 상상의 세계에 눈뜨게 된 것은 유년기에 탐독한 문학작품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디킨즈 전집을 거듭해서 읽었다고 한다. 한편, 유모가 들려 주는 중국소설 이야기도 그녀에게 상상의 날개를 펴게 해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늘 동서양 인물들 속에서 고독을 달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한편 어머니로부터 초등교육 전과목을, 특히 작문을 개인지도 받은 것은 상하이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미션계 미국인 여학생 기숙사였다. 중국어를 영어 못지 않게 잘하고, 여러 모로 미국인보다 중국인에 더 가까웠던 그녀는 학우들과 어울리지 못해 1년도 못 가서 학교를 중퇴하고 말았다. 17세 되던 해에 유럽과 영국을 거쳐 이듬해 미국에 돌아가 버지니아주 랜돌프 메이콘 여자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3학년 때에는 과대표로 뽑혔고 4학년 때에는 대학의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졸곧 수상하여 필명을 날렸다. 1914년 대학을 졸업한 후 1년간 모교에서 조교로 머물러 있다가 중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병상에 누운 어머니를 2년간이나 간호했다. 어머니가 회복된 후 1917년에 펄은 역시 중국에서 일하는 농업기술자이며 선교사인 존 로싱 벅 씨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안후이성(安徽省)의 한 소도시에 가 살았다. 양친은 벅씨가 여사의 남편이 될 만큼 지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러나 여사가 그와 결혼한 것은 자신의 고독을 달래기 위하여, 그리고 혼기가 되었는데도 다른 남편감이 나타나지 않은 까닭이었다. 과연 그 결혼의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들은 대화가 잘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여사는 행복한 가정생활의 꿈을 버리고 다른 일에 정신을 쏟기 시작했다. 집을 아름답게 꾸민다든가 독서를 한다든가, 특히 중국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든가. 또 미국인 의사의 간호원으로 따라다니면서 농가의 환자들을 돌보아 주고 군벌 싸움의 부상자들을 간호해 주었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대지》3부작을 비롯하여 《어머니(The Mother)》등 중국 농민 생활을 그린 작품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21년 남편을 따라 난징(南京)으로 이주한 여사는 곧 여아를 출산했고, 이때부터 거의 10년간 난징대학, 동남대학, 중앙대학 등에서 영문학을 강의하였다.
그 당시 여사의 클라스에는 한국인 학생들도 있었다. 그들을 회상하며 여사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의 클라스에는 한국인 학생들도 있었는데, 나는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깊은 증오의 근원을 그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젊은 한국인 남녀 학생들은 자기 나라에 대한 일본인의 통치를 참을 수 없어 조국을 떠나, 만주나 중국본토 혹은 러시아로 가서 자녀들을 키우기로 한 한국인들의 자녀였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항일정신을 이어받았으며, 그것이 오늘의 한국을 가져오게 한 직접적 원인이 된 것이다."
1925년 1년간의 휴가를 얻어 남편과 함께 미국에 돌아간 여사는 이사카시의 코넬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기로 하였다. 재학중에 그 대학의 에세이 콘테스트에서 <중국과 동양>이란 역사의 논문이 최우수작으로 뽑혔고, 이밖에도 여사가 쓴 두 단편이 《아시아 매거진》지에 채택되었다. 그 상금과 고료는 모자라던 학비와 쪼들린 생활비에 큰 보탬이 되었다.
코넬 대학에는 중국인 유학생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그들의 대부분이 고독하고 미국인과는 격리되다시피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를 본 여사는 그것은 중국인과 미국인의 상호 이해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 손해라는 신념 하에 이사카시의 부인회를 찾아가서 중국인 학생을 초청하도록 권했으나 미국 부인들은 좀처럼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사는 이때를 회상하여 "그 부인들은 그들의 자녀가 동양인 자녀들과 평화로운 가운데 어울리지 못한다면 장차 전장에서라도 어울리게 되고야 말 것임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라고 자서전에서 말하고 있다. 여사는 미국인이, 동양인에 대한 이해가 좀더 깊었더라면 한국전쟁의 비극은 초래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여사가 그들의 딸 캐롤이 정신박약이라는 진단을 받고 큰 충격을 받은 것도 이 시절이었다. 의사는 그 아이가 아무리 자라도 정상적이 되지는 못할 것이며 따라서 일생 동안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고 했다. 영원한 비애를 어머니에게 안겨 준 그 딸은 또한 경제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모성은 강하다. 앉아서 한탄하는 대신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후년에 중국에 관한 여사의 에세이는 속속《애틀랜틱》지, 《포럼》지 등에 실리게 되었다. 여사는 《자라지도 않는 아이》라는 책을 써서 이에 관련된 생생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석사학위를 받고 남편과 함께 중국에 돌아오는 배 위에서 여사는 1년간 중단되었던 《동풍서풍(East Wind West Wind)》이라는 장편을 끝냈다. 그것은 신구 양사상의 딜레마에 빠진 중국인 지식층 남녀를 그린 것이었다. 이어서 또 하나의 장편을 탈고했는데, 그 원고는 1927년 봄 북벌군이 난징에 침입했을 때 소실되었다고 한다.
1927년에 뻬이징(北京) 소재의 군벌정권은 제국주의의 주구라는 비난을 받았고, 남쪽의 혁명가들과 민중들의 노여움을 샀다. 드디어 쑨원(孫文)의 유지를 이어받았다는 장제스( 介石)가 이끄는 북벌군이 중국 본토를 석권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와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이면 공작 역시 확대일로에 있었다. 다음해 봄날 난징을 점령한 혁명군은 중국에 대한 압제와 착취를 일삼는 백인들의 대학살을 감행했다. 모든 백인들과 그들의 집은 방화, 약탈, 무차별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여사의 가족은 1900년 의화단 사건에 이어 두 번째로 친한 중국인의 도움에 의해 간신히 죽음의 위기를 모면했다. 그들은 일본으로 피난을 가서 그해 여름과 가을을 나가사끼(長崎)에서 보냈다. 그동안 여사의 아버지는 한국을 방문하고 있었다.
1927년에 난징의 군벌정치를 타도한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는 공산당을 몰아내고 서방 국가들과 제휴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 결과 피난갔던 백인들은 모두 돌아올 수 있었다. 여사의 가족도 샹하이를거쳐 그들의 집에 돌아왔다.
이보다 앞서 《동풍서풍》은 그 원고를 미국의 어떤 출판사에 보냈으나 중국에 대핮 미국인의 무관심을 이유로 채택되지 않은 채 여러 해를 묵히다가 마침내 뉴욕의 존 데이 출판사가 그것을 출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힘입은 여사는 소설을 계속 쓰기로 결심했다. 그 길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그 딸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되었던 것이다.
이제 약탈된 집을 정리한 여사는 가사를 돌보고 신병으로 누운 아버지를 간호하며 야간에는 대학의 강의를 맡았다. 이때부터 "과연 천재의 작품이다", "중국 농민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가 단조로울 것이라고 상상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크게 놀랄 것이다" 등의 서평을 받게 된 《대지(The Good Earth)》의 준비를 시작하였다.(처음에는 제목을 《왕 릉(Wang Lung)》으로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어느날 아침 나는 다락방을 치우고 커다란 중국식 책상 앞에 앉았다. 창밖에 낙타등처럼 생긴 산이 바라다보였다. 그곳에서 나는 그후 매일 아침 청소를 마치고 나면 타이프로 《대지》의 원고를 쳤다. 내가 쓰려는 스토리는 오래 전부터 내 머릿속에 뚜렷이 형성되어 있었다. 실상 그것은 내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서 확실하고도 빠르게 형성되었다. 나의 정력은 내가 깊이 사랑하고 찬양하는 중국의 농민과 일반 대중을 보며 느꼈던 노여움으로 해서 용솟음치고 있었다. 내 소설의 배경으로는 화뻬이(華北)의 시골을 택했고, 작품에 나오는 남쪽의 부유한 대도시는 바로 난징이다. 그러므로 나의 소재는 나에게 익숙한 것들이었고, 등장인물도 내가 나 자신처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내 생애의, 그리고 이 시기의 역사에 있어서의 중국 농민들과 그들의 놀라운 힘, 선량하고 익살스러우며 민첩하고 슬기로운 기질, 냉소와 소박성, 타고난 채치, 자연스러운 생활습성을 나는 익히 알고 있었다. 중국 인구의 85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 농민은 너무나 우수한 백성들이며 그들이 무식한 까닭에 의사 발표를 못한다는 것은 인류의 손해라고 생각되었다. 중국에서 여러 해 있는 동안, 나는 짐승보다도 무거울 정도의 짐을 등에 져서 육체적인 고통 때문에 비틀어진 농부의 여읜 얼굴을 볼 때마다 이보다 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적은 없다."
《대지》의 간단한 줄거리--가난한 농부에게 시작하여 부유한 지주가 되고, 자기가 경작하는 토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왕 룽(王龍), 그러나 그의 토지에는 홍수와 한발과 기근과 혁명이 밀어닥친다. 이에 따르는 삶의 변전, 그의 아내 오란(阿蘭)은 인내심이 강하고 헌신적이며 애처로울 만큼 자기 희생적인 여성의 본보기이다. 첩으로 맞아들인 연영(蓮英)에 미친 왕룽은 그 첩에게 주기 위하여 그에게 큰 재산을 안겨 준 이 조강지처 오란으로부터 그녀 몫으로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진주마저 빼앗아 버린다. 그녀가 흘리는 두 줄기의 눈물……맏아들 왕따(王大)가 연영과 사랑하는 사이임을 발견하고 노한 왕룽은 그를 집에서 내쫓아 남쪽으로 유학을 시킨다. 그러나 오란이 중병으로 누웠을 때 왕룽은 그를 소환하여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오란이 안심하고 눈을 감게 해 준다. 성내의 집을 아들에게 맡기고 옛 토막집으로 돌아간 왕룽은 그의 천치딸을 정성껏 돌보아온 18세의 하녀 이화(梨花)에게 자신도 시중들게 하면서 방안 한구석에 놓아둔 향목관을 바라보며 만년을 보내다가, 임종이 가까웠을 때 두 큰 아들들에게 "너희들이 땅을 파는 날에는 마지막이다"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다.
《대지》가 나올 무렵 세계의 열강은 중국에서 이권을 다투고 국내에서는 농민들이 압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대지를 믿고 사는 농민의 모습은 인간답게 살아 나가려는 사람들의 운명의 드라마로서 국경과 시대를 초월하여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즈음 여사는 창작과 병행하여 향후 만 4년이 걸린 방대한 중국의 고전소설 《수호지》의 영역에 부심하고 있었다. 《All Men are Brothers(,사해동포)》라는 제목을 붙인 그 번역은 썩 잘된 것이며 여사의 큰 업적의 하나로 치고 있다.
1831년에 일본 침략군은 만주를 점령했다. 그리고 양쯔강에 일찍이 없었던 홍수가 난 이해에 여사의 아버지는 피서지에서 객사했다. 이에 앞서 여사의 아버지는 이해에 존 데이 사에 의해 출판된 《대지》를 훑어보고는, 딸에게 언제 그런 것을 쓸 시간이 있었느냐고 물었을 뿐 그것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그는 중국 유학자들처럼 소설이란 무가치한 것이며 점잖은 사람이 읽을 것이 못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지》는 미국에서 그해에만 200만 부 가까이 팔렸으며, 30여 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 전반기의 세계 최고 베스트 셀러로 기록되었다.
여사는 《대지》가 그렇게 굉장한 성공을 거둔 주요한 원인은 그것이 풍기는 이국정취 탓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인물들 때문이라고 했다. 여사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상 이 소설에서 중국 특유의 것을 싫어한 독자가 많았다. 그들이 좋아한 것은 그 속에 그려진 인물들이다. 그 인물들은 자신과 그들의 주변 사람들과 흡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이 작품의 스토리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재미있는 소설처럼 스토리가 웬만큼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국 특유의 것--이를테면 비참한 기근이며, 비적 이야기며, 여성을 다루는 중국인의 대담성에 대해서 항의하는 독자들도 많이 있었다. 나는 독자들로부터 불쾌감과 노여움과 항의의 소리를 담은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장로교 선교사위원들로부터 받은 편지 중에는 중국인의 생활을 여사가 본대로 그린 것을 찬양하는 이도 있었으나 그것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왜 하필이면 여사가 중국인의 결혼과 섹스에 대한 풍습을 드러내어 죄짓는 생활, 고난의 생활 따위의 자연주의적 묘사를 했는가 하는 항의였다. "왜 당신의 재능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하고 따지는 것들이었다. 물론 여사는 그런 비평을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겼다. 왕룽 같은 농민이 예수를 알 턱이 없는 것이다.
장로교 선교사와의 불화는 여사가 1932년에 행한 한 연설과 잡지기사가 불씨가 되어 마침내 여사는 지니고 있던 선교사의 자격마저 내놓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사는 <모든 종교는 다 좋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았다. 여사는 어느날 하녀가 양말을 깁다 말고 우는 것을 보고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어떤 선교사가 그녀에게 "너의 양친은 예수를 안 믿었으므로 지금 지옥 불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녀 자신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죽어서 천당에 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저승에서 부모님을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기에 서러워서 운다는 것이었다. 여사는 하녀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 여사 자신의 양친이 아닌 다른 선교사임을 알고 안심했으나, 그 하녀와 같이 울면서 그럴 것 없이 우리도 기독교를 믿지 말고 다 같이 지옥에 가면 될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이 에피소드 역시 여사의 전기에 여사 자신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 여사의 마지막 대작이 방대한 《성서 이야기》인 것으로 보아 여사는 기독교적 사랑을 믿었으나 편협한 기독교 선교사의 노선엔 찬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대지》를 쓴 여사의 간결한 문체에 대해서는 성경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여사는 그것은 성경체가 아니라 중국어체라고 주장했다. 중국인의 이야기를 쓰는 만큼 여사의 문체가 중국어 스타일의 영어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여사가 《대지》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지》는 그 해에 미국내 최고상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38년 받은 노벨 문삭상은 그녀의 <중국 농민생활의 풍부하고 진실로 서사시적인 묘사> 《대지》와 그 속편인 《아들들(Sons)》(1932년)과 《분열된 일가》(1935), 즉 《대지》 3부작과 《어머니》(1934) 그리고 선교사인 양친을 그린 《싸우는 천사》(1936)와 《어머니의 초상》(1936)의 두 훌륭한 전기작품 등 그 때까지 출판된 여사의 거의 전 작품에 대해서 주어진 것이다.
여사가 귀국 후에 재혼한 리처드 윌시 씨와의 사이엔 소생이 없었으며, 전남편 벅 씨와의 사이에 난 정신박약의 딸 캐롤 이외에 여사에게는 친자식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여사는 항상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1969년 7월 여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일을 할 수 있는 동안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나에겐 양자녀가 아홉이나 있고, 손자손녀가 열둘이나 된다. 그들은 모두 내 집 가까이 살고, 또 내 집에는 지금 학교에 다니는 한국인 소녀 넷이 나와 같이 살고 있다. 내 집은 부산하고, 내 생활 역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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