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에 대하여
by 송화은율
데미안에 대하여
독일 문학이라고 하면, 곧 괴테나 헤르만 헤세를 연상할 만큼 그들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작가들이다. 더욱이 현대 문학을 말할 때면 헤세를 두고서는 달리 얘기할 수가 없다. 그것은 그의 작가적 생리가 깊이 동양철학에 바탕을 두고 그 심층에 인간의 생명을 구도하려는 데서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때문이기도 하고 또는 그의 문학적 생애가 나찌 독일의 비판자로서 감수해야 했던 추방·망명 그리고 반전논자로서 현대 문명의 몰락을 직시한 예언자로서 어쩔 수 없이 고독과 방황을 감수한 시대의 유랑인이기 때문이며 그의 작품이 풍겨주는 서정성의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소년시절의 동경, 청춘시절의 꿈과 방황, 넘실거리는 구름을 바라보며 도시에의 환멸, 문명사회를 달래어 자연으로 돌아가는 방랑아 페터(《페터 카멘친트》의 주인공)의 낭만 같은 것 -그런 것이 난해하고 재미나는 줄거리가 없는 독일 작품이라 하여 비교적 소외당하고 있는 이 땅에서 헤세만이 예외로 널리 번역, 소개되고 읽혀지는 까닭이기도 하다.
헤세의 문학은, 그러나 반드시 구름과 꿈이 단김 작품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계보를 전·후기로 구별하면 전기의 작품이 앞에서 말한 서정적 애상이 넘치는 작품들이다. 대체로 그 대표작을 들어보면 《페터 카멘친트》(1904), 《차륜 밑에서》(1906), 《게르트루트》(1910), 그리고 《크놀프》(1915)로서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후기의 작품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벌써 1차 대전을 겪은 유럽은 그를 꿈의 작가로서 마냥 안락의자에 앉혀 두지 않았다. 그는 자아 탐구와 더불어 현대 문명의 준엄한 비판자가 되었다. 즉 자아성찰을 통한 《싯다르타》(1922) 현대 문명을 비판하고 유럽을 탄핵한 《황야의 이리》(1927), 그리고 두 영혼의 벗이 정신과 감각의 세계를 방황하다가 결국 어머니인 고향으로 돌아오는, 비교적 승화된 세계를 그린 《나르치스와 골드문트》(1930), 만년의 대작 《유리알 유희》(1943)가 서구적 정신과 도양적 정신을 승화시켜 새로운 정신문화를 구상한 이상소설이라 하겠다. 이 작품은 한결같이 문명 비판과 정신의 실향, 영혼의 방황, 문명의 몰락이 그 바탕이 되어 있다.
《데미안》은 이 두 작품 세계의 분기점을 이루는 문제작이다. 헤세는 이른바 초기의 작풍에서 후기로 전환하는데 《데미안》의 다리를 건너간 것이다. 누구도 《데미안》을 읽고 얼핏 그것이 헤세의 작품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의 초기 작품만을 읽은 독자에게 있어서). 그만큼 《데미안》은 헤세의 인간과 문학에 획점을 던진 것이다. 그 까닭인지 발표 당시 1년간은 에밀 징클라르 작 《데미안, 어느 소년 시절의 이야기》라고 익명을 썼다. 그 후 이것이 헤세의 작품임이 알려지자 구판부터 개제하여 《데미안, 에밀 징클라르의 소년시절의 이야기》라고 했다.
《데미안》은 이른바 과도기적 작품으로서 그 구성이 뚜렷하다. 1∼2장에서는 그의 초기 작품과 같이 소년시절의 이야기를 소박하고 감상적인 수법으로 그려 놓아 먼 훗날의 인생의 흐름을 함축성 있게 암시한 것이 퍽 인상적이라 하겠다.
헤세는 이 무렵 아들의 병으로 인하여 정신분석에 정통한 의사와 친하게 지냈다. 그 인연으로 헤세는 정신분석에 흥미를 얻어 그것이 《데미안》에 도입되었다. 3장에서 비롯하여 독심술의 꿈의 해석이 수시로 인용되고 신비로운 환상적 여운이 전편에 흐르고 있었다.
소년 징클라르는 밝은 세계에서 성장했다. 양친의 신앙과 지성이 조화된 분위기 속에 살면서 점차 또 하나의 세계, 어두운 세계에 눈을 뜬다. 뒷골목의 어두움, 시궁창의 살풍경-그는 금지된 구역에 눈을 주는 본능을 의식한다. 그리하여 강자 본능적이고 환락적인 인간에게 얼결에 동화되고 엉뚱한 거짓말을 하여 수난하고, 두 세계의 갈등으로 뒷골목에서 술을 마신다. 그럴 때마다 그는 데미안을 생각한다. 데미안은 두 세계, 즉 카인의 세계와 아벨의 세계를 똑같이 알면서도 그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않는 자아의 세계를 혼자 걸어가고 있다. 데미안은 그를 교도하려 한다. 그러나 언제나 깊은 자아성찰을 요구할 따름이다. / 송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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