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 / 본문 일부 및 해설 / 이강백
by 송화은율파수꾼 / 이강백
등장 인물
해설자
파수꾼 가
파수꾼 나(노인)
파수꾼 다(소년)
[해설자] (관객들에게 무대와 등장 인물들을 설명한다) 이곳은 황야입니다. 이리떼의 내습을 알리는 망루가 세워져 있죠. 드높이 솟은 이 망루는 하늘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하늘은 연극의 진행에 따라 황혼, 초생달이 뜬 밤, 그리고 아침으로 변할 겁니다. 저기 위를 바라보십시오. 파수꾼이 앉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하늘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시커먼 그림자로만 보입니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파수꾼이었습니다. 나의 늙으신 아버지께서도 어린 시절에 저 유명한 파수꾼의 이야기를 들으셨다 합니다. 물론 할아버지에게서 들으셨던 거죠. 이제와선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전설적 인물이 된 것이지요. 또 다른 파수꾼들, 우리와 같은 시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망루 아래에서 양철북을 칠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떼를 발견했다 외치면, 그들은 양철북을 두드릴 겁니다. 그 소린 황야에서 울려 퍼져서 우리가 살고 있는 마을에 전달되고, 그럼 주민들은 이리떼의 내습에 대항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듯이 이리떼는 무척 교활하죠. 그들의 습격이 탄로 난 걸 알아채면 일단 뒤로 물러납니다. 그리고선 다음 기회를 노리는 거죠. 이러한 반복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망루 위의 파수꾼이 갑자기 외친다)
[가] 이리떼다, 이리떼! 이리떼가 몰려온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진다. 이리떼가 나타난 방향을 가리킨다. 망루 아래 파수꾼들은 양철북을 두드린다. 외침과 북소리 계속. 불안이 점점 고조된다. 해설자는 달아난다. 노인 파수꾼 나의 북 치는 모습은 늠름하다. 소년 파수꾼 다는 두려움에 질려서 헛치기만 하다가 견디지 못하고 납작 엎드려 버린다.)
[가]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다] (아직도 겁에 질려서) 이리떼라구요?
[나] 걱정 마라. 이젠 물러갔단다.
[다] 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는데요?
[나] 너는 낮은 곳에 있다. 그러니까 보지 못하는 거야. 하지만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아주 높은 곳엘 있지 않니? 그는 멀리까지 바라본다. 너하곤 위치가 다르다는 걸 알아야지.
[가] 이리떼다, 이리떼! 이리떼가 몰려온다!
(소년 파수꾼 다는 당황해서 다시 엎드리고, 파수꾼 나는 양철북을 두드린다.)
[가]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다] --- 정말 물러갔어요?
[나] 그렇다. 안심하고 일어나렴.
[다] 그래도, 저어, 아직 몇 마리 남아 있는 건 아닐까요? 그랬다가 엉겁결에 달려들어 꽉 물 수도 있겠구요.
[나] 파수꾼의 눈은 정확하단다. 단 한 마리의 이리도 그 눈을 피해 숨을 순 없지.
[다] 아, 저는 그걸 생각 못했어요. 죄송해요. 파수꾼의 눈을 의심했던 건 아닙니다. 다만 이리라는게 그렇죠, 이리를 믿어선 안 된다고 배웠거든요. 이리는 엉큼하고, 사납고, 그 날카로운 이빨에 물리면은---
[나] 이리가 그렇게도 무섭니?
[다] 네.
[나] 그럼 왜 파수꾼이 될 생각은 했지?
[다] 이렇게까지 무서움을 탈 줄은 몰랐거든요. 저 자신도 부끄러워요. 파수꾼이 되는 연습을 할 때엔 이렇진 않았습니다. 제법 용감했죠. 특히 칭찬을 받은 건 제 눈이었어요. 까마득하게 멀리 떨어진 것도 척척 알아냈거든요. 마을 사람들도 감탄했어요. '최고의 눈이다. 넌 파수꾼이 되기 위해 태어났다.' 그래서요, 저는 여기에 오길 지원했던 거예요. 그러나 여기 와보니 사정이 다르군요. 저는 한번도 망루 위엘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한가지 여쭙겠는데요, 왜 저 망루 위의 파수꾼은 교대하질 않죠?
[나] 저분은 말이다, 지금까지 실수를 하지 않았단다. 단 한번도 이리떼를 놓친 적이 없었어.
[다] 굉장하네요.
[나] 아무렴. 넌 어때 그렇게 할 자신이 있니?
[다] 자신 있어요--- 허지만요, 한 두 번쯤은 실수도 있을 거예요.
[나] 그럼 큰일난다. 이리떼의 습격을 놓쳐 봐라. 마을의 가축과 사람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넌 아예 섣불리 망루 위에 올라 갈 생각도 마라. 얘야, 저 높은 곳보다 이 아래는 할 일이 많단다. 양철북도 쳐야 하구, 여기저기 놓아둔 이리 덫들도 살펴야 하구--- . 방금 전 습격 때 저쪽에서 탁 치이는 소리가 났었다. 너, 나하고 덫 보러 가지 않을래?
[다] 전 여기 있고 싶어요.
[나] 이리가 걸렸으면 좋겠는데--- 그럼 다녀오마.
(파수꾼 나 퇴장. 오랜 침묵. 다는 망루 위를 쳐다보기도 하고 키발을 딛고 사방을 살피기도 한다. 금방 이리가 덤빌 것 같아서 그는 안절부절 못 한다. 마침내 두 팔로 얼굴을 감싸고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다. 파수꾼 나가 들어온다. 무겁게 생긴 강철제 덫을 어깨에 둘러매고 와서 내려놓는다.
[나] 또 헛쳤다. 교활한 짐승도 다 있지. 나뭇가지를 대신 끼워 놓고 몸은 달아났지 뭐냐. 얘야, 이 덫 좀 함께 벌리자.
(두 파수꾼은 덫 입을 함께 벌린다. 이빨들이 달린 덫이 벌어지며 파수꾼들에게 위압을 준다)
[다] 무섭게 생겼어요.
[나] 나뭇가지 때문에 이빨이 상했어. 날카롭게 쇠줄로 쓸어야겠다. (쇠줄을 꺼내 덫 이빨을 간다. 금속성의 듣기 싫은 소리가 난다.) 가끔가다 이리가 치어 줘야 재미있는데, 통 그래주질 않는단다. 치었는가 가보면 또 헛 치었구, 이리는 정말 교활해. 황야에 수천 개의 덫을 놓았지만 용케도 걸려들질 않어. (덫니에 날이 섰는지 엄지손가락을 대본다.) 자, 됐다. 이리야, 이번엔 제발 철컥 걸려 다오. 제자리에 가져다 놓구 오마.
[다] 내일 아침에 가세요.
[나] 내일 아침에?
[다] 그래요. 지금은 어둡잖아요?
[나] 어둡기는--- 아직 훤해.
[다] 가시면 안돼요. 여긴 아직 훤하지만 덫 놓을 덤불 속은 어두울지 몰라요. 그 속에 이리가 숨어 있다 덤벼들면 어떻게 해요? 저 같으면 내일 아침까진 꼼짝도 안하겠어요.
[나] 넌 참 겁두 많다.
[가] 이리떼다, 이리떼! 이리떼가 몰려온다.
(소년 파수꾼 다는 엎드리고, 노인 파수꾼 나는 양철북을 두드린다.)
[가]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나] 넌 또 엎드렸구나.
[다] 이리떼, 다 갔어요?
[나] 양철북이라도 좀 쳐보질 그랬니? 네가 함께 쳐주면, 나 혼자서 이렇게까진 고달프지 않겠는데---
[다] 아, 저는 쓸모 없는 사람 같아요.
(잠시 침묵, 파수꾼 나는 상심하는 소년의 얼굴을 다정하게 어루만진다.)
[나] 그래도 난 네가 좋다.
[다] 제가 좋아요?
[나] 응.
[다] 겁만 내는데두요?
[나] 그래도 좋은 걸. 난, 너 오기 전엔 쓸쓸했었다. 위를 보렴. 저 망루 위의 파수꾼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어 말벗도 안됐다. 그래 난 하루 종일 홀로 있는 거나 다름없었지. 양철북도 요란하게 두들기고, 수천 개의 덫을 둘러보러 다녔다만 혼자인 건 어쩔 수 없더라. 얘야, 외롭다는 것 그게 뭔지 아니?
[다] 몰라요.
[나] 젊었을 땐 나도 몰랐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황야에 바람이 분다든가 깊은 밤 달이 떴을 때, 외롭더라. 그래서 난 마을 촌장님에게 편지를 내었었지. 파수꾼을 한 명 더 보내 달라구 말이다. 마침 지원자가 있다더구나. 바로 너였다.
[다] 용감한 사람이 오길 바라셨죠?
[나] 아니.
[다] 저처럼 겁쟁이를 기다리신 거예요?
[나] 아니.
[다] 그럼---
[나] 누구였으면 하고 미리 정해 두지 않았단다. 그랬다가 만일 틀린 사람이라도 오게 되면 난 덜 기쁘지 않겠니? 그런데 첫눈에 너를 보자 한껏 기뻤다. 그 순간 나는 정한 거란다, 바로 네가 왔으면 하고. 내 뜻은 이루어졌다. 넌 그때 휘파람을 불며 왔었지?
[다] 네.
[나] 내 귀가 즐겁더라.
[다] 고마워요.
[나] 오히려 고마운 건 나다.
(황혼이 점점 짙어진다. 해설자, 슬그머니 등장. 마분지로 만든 초생달을 하늘에 걸어 놓고 퇴장. 두 파수꾼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앉아 있다.)
<중략>
[가]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운반인] 하마터면요, 이리에게 죽을 뻔 했습니다요. 껍질을 다시 써서 물리지 않았죠.
[나] 마을은 어떤가? 난 양철북을 치면서도 걱정이 돼. 주민들은 잘 방비하고 있을까? 별일은 없겠지?
[운반인] 이리 막는 거야 잘 하고 있죠, 뭐. 하지만 약방 영감 왜 그 말라깽이네 약방 영감 말이예요, 그 영감이 지붕 위에서 떨어져 두 다리를 몽땅 부러트렸지 뭐요. 그 영감, 재수 옴 붙었지. 글쎄, 새벽녘에 잠이 깰까말까 하는데 양철북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더래요. 그러자 거리에서 사람들이 외치기를 '으악! 이리떼가 몰려온다.' 영감 넋 나갔죠. 지붕 위로 피신 가는데요. 몸은 떨리구, 뒤에선 금방 이리가 물 것 같겠다, 엉금엉금 기어올라가다 뚝 떨어진 거죠.
[나] 그런 말 하는 게 아냐.
[운반인] 그렇죠, 뭐. 지붕 위에서 떨어진 영감이 한 둘이어야지요. 양철북 소리 들려오구 '이리떼다!' 하니까,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아이 이야길 제가 했던가요?
[나] 그만 두게.
[운반인] 그렇죠, 뭐. 우물 속에 빠져 죽은 아이가 어디 한 둘이어야죠. 수두룩하니까 별로 우습지도 않아요. 자기 집에 불을 지른 남자 이야기는 어때요? 담배를 피우려구 성냥을 그었는데 들려 오는 양철북 소리! 그 남자 엽총 들고 뛰어나가 신나게 공포 쏜 건 좋았죠. 허나 집에 돌아와 보니 불---
[나] 그만 두래도!
[운반인] 그렇죠, 뭐. 집 불태운 남자가 어디 한 둘인가요? 북소리 들려오구 '이리떼가 몰려온다' 하니까---
[나] (역정을 내며) 제발 그만 둬!
[운반인] 왜 그래요? 하긴 그렇죠, 뭐.
[나] 뭐가 그렇다는 거야?
[운반인] (시무룩하게) 아무 것도 아녜요.
[나] 남의 불행을 재미있어 하면 안되네.
[운반인] 그게 어디 남의 불행인가요? 나도 그 속에 살고 있으니까 내 불행이죠 뭐. 짐 다 내려놨으니 이만 돌아가겠어요.
[다] 저녁 식사하고 가세요.
[운반인] 밤 되기 전에 가 봐야겠어.
[다] 곧 밤이 돼요. 식사 하시구 자고 가세요.
[운반인] 여긴 재미없는 걸. 양철북 소리 들려 올 때 '이리떼가 온다!' 외치면---
[나] 자네가 외치구 다니나?
[운반인] 그렇죠, 뭐. '이리떼다' 하고 외치는 사람이 한 둘이어야죠. 모두들 외치는데요. 지난주 화요일 밤, 북소리 들려 와서 '이리떼다' 외치구 골목을 막 돌아서는데, 웬 여자가 내 어깨에 매달립디다. 열 여섯이나 일곱쯤 될까요, 두려워서 바들바들 떠는 게 꽤 예쁘더군요. 말 들어보나마나 어디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달라는 거죠. 마침 골목 끝에 대피용 지하실이 있어서--- (웃는다)
[나] 그래 어떻게 했나?
[운반인] 처음엔 껴안아 줄려구만 그랬어요. 허지만 나도 사낸데 어디 그래요? 마침 지하실엔 단 둘 뿐이었겠다, 그 앨 바닥에 눕히고 재밀 좀 봤죠.
[나] (치미는 분노를 꾹 참으며) 어서 가게.
[운반인] 안녕히 계십시오, 파수꾼님.
[나] (다를 가리키며) 다음에 올 땐 이 애 물건을 가져와. 밤에 덮고 잘 담요가 없어.
[운반인] 언제 가져올까요?
[나] 내일 아침 당장 가지고 와.
[운반인] 알았어요. 내일 아침 또 오죠. (다에게) 잘 있우. 랄랄랄
라라라---
(해설자, 빈 수레를 끌고 퇴장)
작자 : 이강백(李康白)
형식 : 희곡
성격 : 교훈적, 상징적. 우화적, 현실 풍자적[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체제 유지를 위한 안보 논리에 대한 통렬한 풍자를 우화적으로 보여줌]
제재 : 파수꾼의 위선
구성
주제 : 진실을 향한 열망, 진실이 통용되기 어려운 비극적 사회
인물 : 촌장 :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 왜곡도 서슴지 않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권력자를 상징함
파수꾼가, 나 : 독재 권력의 지배질서를 합리화하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하수인, 또는 권력의 나팔수라 할 수 있음.
파수꾼 다 : 처음에는 독재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지배자의 회유에 굴복하고 마는 나약한 지식인을 상징함.
마을 사람들 : 독재 권력과 하수인에게 기만당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매한 민중을 상징
줄거리
이리 떼의 습격을 미리 알리기 위해 세 명의 파수꾼이 망루에서 들판을 지키도록 되어 있다. 새로 파견된 파수꾼 '다'는 이리 떼가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리 떼가 나타났다.'고 외치는 파수꾼들을 이상스럽게 생각한다. 소년은 이리 떼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마을의 촌장이 나타나 소년을 설득한다. 촌장은 사실은 이리 떼가 없지만, 이리 떼가 나타난다는 거짓 정보도 때로는 '마을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가치 있는 일이라고 소년에게 말한다. 소년은 거듭 따지지만 촌장을 설득하지 못하고, 점차 소년조차 거짓말에 동조하게 한다. 소년은 다시금 제자리에서 이리 떼가 나타났다는 신호인 양철북을 두드리는 일을 하게 된다.
특징 : '양치기 소년과 이리'라는 우화 형식을 빌려 당대의 정치 상황을 풍자하고 권력의 위선과 허위를 폭로한 작품이다.
연극사적 의미 : 이 작품은 권위주의에 의해 통치되던 197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우화적인 기법을 활용하여 당대 권력의 위선적인 실체를 건드려 보고자한 매우 의욕적인 시도를 보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팽팽한 갈등을 전제로 하는 극 양식의 원리에서 보면 그 갈등의 축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우화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화적인 장치가 가지는 연극적 의미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극을 통한 발견 : 극은 인간의 삶을 무대라는 객관화된 공간 위에서 연출해 관객에게 보여 주는 양식이다. 극의 이러한 보여주기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작품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극중 사실의 발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발견으로까지 이어진다. 관객들은 작품을 지켜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는 과연 올바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작품의 후반부에서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보고에 앞장서는 소년 파수꾼을 보면서 연민과 동시에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를 통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출전 : <현대문학>(1973)
1. 이 부분은 대규모의 군중 장면으로 처리해야 할 대목이다. 이를 효과적으로 무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끌어 주기 : 희곡은 무대 상연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희곡은 서술자가 사건 진행에 개입하여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없으며,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현재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에 극의 전개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을 무대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희곡에서는 이러한 제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무대 밖의 상황을 등장인물의 ‘보고’를 통해, 혹은 무대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예시답안 :
희곡은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에 망루에 쳐들어 온 마을 사람들과 같은 대규모의 군중 장면은 보여 줄 수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객석에 앉아 극을 관람하는 다수의 관객들의 역할을 극중 인물인 ‘마을 사람들’로 대치함으로써 이러한 제약성을 극복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 변화는 ‘파수꾼 나’와 ‘촌장’이 관객들을 ‘마을 사람들’인 것처럼 취급하며 천연덕스럽게 대화함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파수꾼 다, 쓰러질 것 같은 걸음으로 망루를 향해 걸어간다. 나가 근심스럽게 쫓아간다.)
[나] 얘야, 괜찮겠니?
[다] --- 네.
[나]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구나. 넌 이리떼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떠는 겁쟁이인데. 망루 위에 올라가서 엎드리면 안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널 보러 오지 않았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 이 기회에 말이다. 넌 너 자신이 파수꾼이라는 걸 힘껏 자랑해야 한다. 알았지, 응?
[촌장] 그만 올라가게 하십시오.
(파수꾼 다는 망루 위에 올라간다. 긴 침묵. 마침내 부르짖는다)
[다] 이리떼다, 이리떼! 이리떼가 몰려온다! [이리떼다, - 떼가 몰려 온다 : 있지도 않은 이리떼를 이용하여 마을을 예전처럼 통치하려는 촌장의 말에 파수꾼 다가 설득당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부분이다. 진실보다는 절대 권력의 회유와 속임수에 속는 그 하수인들의 몽매함을 나타내고 있다.]
(파수꾼 가의 손이 번쩍 들려지며 그도 외친다. 파수꾼 나는 신이 나서 양철북을 두드린다. 북소리, 한동안 계속된다.)
[가] 북소리 중지! 이리떼는 물러갔다.
[촌장] 주민 여러분! 이것으로 진상은 밝혀졌습니다. 흰 구름은 없으며 이리떼뿐입니다. 이 망루는 영구히 유지되어야 하겠지요. 양철북도 계속 쳐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음 이리의 습격 때 까진 잠시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그 틈을 이용하여 돌아가십시오. 가시거든 마을 광장에 다시 모이시기 바랍니다. 수다쟁이 운반인의 처벌을 논의합시다[유언비어(流言蜚語 : 민중 속에서 발생하여 전달되는 근거 없는 소문으로 유언비어는 커뮤니케이션의 회로가 자유롭지 못하고, 또 일방적 커뮤니케이션만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생겨난다. 당시 1970년대는 언론이 제 구실을 못해서 유언비어 형식으로 진짜 정보가 떠돌아 다녔다. 여기서 운반인은 유언비어 유포죄의 처벌을 받겠지만, 사실 진실은 이처럼 왜곡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 어서 돌아가십시오. 이리떼가 여러분을 물어뜯으러 옵니다.
(망루 위에서 파수꾼 다가 내려온다.)
[나] 난 네가 이렇게 용감해질 줄은 몰랐구나.
[촌장] 고맙다. 정말 잘해 주었다.
[나] 아냐, 난 몰랐던 건 아니었어. 넌 나에게 용감한 사람이 되마구 약속하질 않았니? 난 그때 이미 알아 본 거야, 넌 꼭 훌륭한 파수꾼이 될 거라구.
[촌장] 얘, 나 좀 보자. (한갓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너한테는 안됐다만, 넌 이곳에서 일생을 지내야 한다. [넌 이곳에서 - 지내야 한다 : 여태컷 소년에게 애원조의 저자세를 보이던 촌장이 이번에는 단호하게 명령한다. 소년은 이미 거짓말을 했다는 약점이 있으므로 이제는 촌장의 명령을 함부로 거역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진실 왜곡에 동조한 소년의 약점을 빌미로 단호한 명령을 내리는 지배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있다.]
[다] --- 네?
[촌장] 마을엔 오지 말아라.
[다] (침묵)
(바람 부는 소리가 거칠게 들려 온다)
[촌장] 난 저 사람들이 싫어. 내 마음은 너와 함께 딸기 따기에 가 있다. 넌 내 추억이야. 너에게는 내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 있다. [내 마음은 - 것이 있다 : 인간의 원초적인 고향, 또는 이상향에 대한 촌장의 그리움을 말하고 있는 부분으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민중을 현혹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이)
[촌장] --- 하지만, 여긴 너무 쓸쓸해.
(사이)
[촌장] --- 미안하다.
(사이)
[촌장] 그럼, 잘 있거라.
[나] 가시려구요, 촌장님?
[촌장]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 제가 저만큼 바래다 드리지요. 덫도 좀 살펴 볼 겸 해서요. (함께 걸어가며) 그런데 말입니다, 양철북을 치던 내 모습이 멋있지 않던가요?
(촌장과 파수꾼 나, 퇴장한다. 바람소리만이 더욱 거칠어진다. 잠시 후, 망루 위의 파수꾼이 '이리떼다' 외친다. 파수꾼 다는 조용히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파수꾼 다는 - 두드리기 시작한다 : 소년 파수꾼이 양철북을 두드리는 결말 부분은 문제 의식을 가졌던 소년조차도 지배자의 논리에 점차 순응해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1. 이 작품에 사용된 우화 기법과 관련하여 다음 활동을 해보자.
(1) 이 작품은 ‘양치기 소년과 이리'라는 우화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 차이점을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이 활동은 학생들에게 문학 작품과 문학 활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설정하였다. 학생들은 흔히 문학 작품이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창조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보듯이, 기존의 이야기를 모방하거나 이야기 구조를 변형하여 새롭게 꾸미는 것으로도 창작활동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모든 작품이 고유한 가치를 지닌 문학 작품으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적인 가치를 지닌 문학작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변용 과정에서 창의성을 발휘하고, 이야기 안에 작자의 참신한 해석과 의미 부여가 있어야한다. 이와 관련하여 학생들의 이해를 돕는 지도가 필요하다.
`양치기 소년과 이리' 우화는 학생들에게 친숙한 것이므로, 두 작품을 대상으로 진실 왜곡 주체, 왜곡동기, 그로 인한 피해 등을 비교해 보도록 한 다음, 두 작품의 차이점과 변형된 구조에 대해 말해 보도록 한다.
예시 답안 :
‘파수꾼과’ ‘양치기 소년과 이리’는 진실의 왜곡과 그로 인한 결과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세부족인 내용을 비교해 보면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먼저, 진실을 왜곡하는 주체가 ‘양치기 소년과 이리’에서는 ‘소년’이지만, ‘파수꾼’에서는 소년이 아니라 ‘촌장’이다. ‘파수꾼’에서는 ‘소년’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라는 점에서도 원작과는 거리가 있다.
또한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혔지만, ‘촌장’의 거짓말은 겉으로 드러나는 피해가 없다는 점이 다르다. 현상적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고, 촌장의 말대로 마을의 질서를 유지시켜 온 원동력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촌장의 거짓말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심심풀이로 거짓말을 했던 ‘양치기 소년’의 경우와는 다르다. 결과 면에서도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자신의 피해로 이어졌지만, ‘촌장’의 거짓말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이 피해자가 된다. 거짓말로 인한 피해가 ‘양치기 소년’의 경우에 비해 더 크고 진실을 은폐하고 호도한다는 점에서 더 문제가 많다고 볼 수 있다.
(2) 이 작품은 권위주의 시대인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대의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작자가 우화적인 장치를 사용한 이유와 그 효과에 대해 말해보자.
이끌어 주기 : 우화(寓話)는 동물이나 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고 풍자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방법 면에서 본다면 직접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간적접으로 말하는 것이며, 우회적인 말하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팽팽한 갈등을 전제로 하는 극양식의 원리에서 보면 그 갈등의 축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화적인 장치를 사용한 까닭이 무엇인지, 우화 형식을 빌어 말함으로써 얻게 된 효과는 무엇인지 말해 보도록 한다.
예시 답안 :
이 작품은 권위주의에 의해 통치되던 1970년대하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이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1970년대 체제 유지를 위해 거짓말을 일삼던 당시의 안보 정책과 지배 권력에 관한 것이다. 철책 저 너머에는 흰 구름만 있을 뿐 이리 떼라고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떼가 나타났다고 외쳐 국민들을 위협하고 국민들의 불안감을 조장하여 독재 권력을 유지하던 억압적 권력에 대한 풍자인 것이다.
이 작품이 당시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고발하지 않고 우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억압적인 시대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이 시기는 일제 시대와 같이 이중적인 검열 제도가 횡행하던 시기로, 권력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되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우화적인 기법을 활용하여 당대 권력의 위선적인 실체를 건드려 보고자 한 매우 의욕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인물을 간의 첨예한 갈등과 투쟁으로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켜 나가는 일반적인 형태의 극 양식에 비해 극적인 효과가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우화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우화적인 장치가 가지는 연극적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3) 이솝 우화에는 오늘날에도 활용할 수 있는 많은 우화들이 있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변용한다면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모둠별로 토론해 보고 정리된 내용을 발표해 보자.
이끌어 주기 : 이 활동은 1-(1)번 활동과 연관된 것이다. 앞의 활동이 원작과 원작을 변형한 작품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국한된 활동이라면, 이 활동은 원작의 이야기 구조를 변형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 보는 창작 활동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이야기의 모방이나 변형도 새로운 문학창작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도록 하고, 창작 활동에 대한 자신감을 기를 수 있도록 지도한다. 다만 이러한 활동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이야기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이야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이야기의 변용 과정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지시키도록 한다.
이 활동은 다음과 같은 활동 단계에 따라 해 보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① ‘개미’와 ‘베짱이’의 습성을 정리해 본다.
② ‘개미’와 ‘베짱이’의 습성을 적용하기에 적절한 현대의 인간형을 찾아본다.
③ 현대판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통해 무엇을 말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④ ‘개미와 베짱이’의 이야기 구조를 어떻게 변형할 것인가를 구상한다.
⑤ 앞의 활동 결과를 정리하여 직접 글로 써 본다.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는 근면을 강조한 우화이다. 원작에서 개미는 앞날에 대비해 성실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성격이고, 베짱이는 의무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성격이다. 이들은 현대 사회의 직업과 관련하여 개미를 농업에 종사하는 농부에, 베짱이를 문화 산업에 종사하는 대중 음악가에 대응시킬 수 있다. 그럴 경우, 개미는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우직한 농부로, 베짱이는 시류에 편승해 성공을 거두는 대중 음악가로 설정할 수 있다. 전통적인 농업이 몰락해 가고, 문화 산업이 번성하는 시대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개미는 농업의 쇠퇴에 따라 몰락하는 인간으로, 베짱이는 대중문화의 확산에 따라 출세하는 인간으로 그려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농업 정책의 부재로 인해 희생되는 농민 현실과 상업주의에 물든 대중 음악계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아 낼 수 있다. 예시 답안은 이러한 설정을 기초로 하여 쓰여 진 것이다.
예시답안 :
베짱이와 개미 이야기
평온한 곤충 나라의 한 마을에 아주 순박하고 착한 농부 개미와 노래 부르고 춤추기 좋아하는 멋쟁이 베짱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개미는 농사짓는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우직하게 땅을 지키며 살았고, 베짱이는 노래 부르고 춤추기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매일매일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러 그 공연 수입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수입도 일정하지 않고 남이 알아주지도 않는 거리 공연이었지만, 베짱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만족감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개미는 달랐습니다.
개미는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365일 내내 논과 밭, 하우스 농사에 자신의 모든 시간을 바치며, 편할 날 없이 고되게 일하며 살았습니다.
뿌린 만큼 거둘 수 있다는 땅에 대한 믿음이 강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개미는 가을에 풍요로운 곡식을 거두게 되리 하는 생각에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기타만 치며 놀고 있던 베짱이를 찾아가 자랑을 했답니다.
"베짱아, 난 이번 추곡 수매가 끝나고 나면 부자가 될 것 같아. 올해도 대충이 들 것 같거든‥‥‥. 그러나저러나 베짱아, 너는 매일 그렇게 기타만 치고 빈둥거리다가 추운 겨울이 오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니?"
개미는 자랑을 넘어서 거의 비웃음에 가까운 조소와 멸시로 베짱이의 삶의 방식을 비아냥거렸답니다.
"개미, 니가 풍작을 거두에 되었다면 축하해 주어야겠구나‥‥‥."
베짱이는 끌어 오르는 분노를 누르며 개미의 비웃음을 참아 내고 개미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그래 추운 겨울이 되면 누가 더 잘 살게 될지 두고 보자!"
몇 달 후 추곡 수매가 시작되었지요.
하지만 이번 추곡 수매는 농사짓는 영농 개미들에겐 충격의 그것이었습니다.
기상 여건이 좋아 생산량이 폭증하는 바람에 곡물 과다 공급으로 수매가가 형편없이 책정되었기 때문입니다.
곤충나라의 형편없는 영농 정책으로 영농 개미들이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외국에서 밀려들어 오는 막강한 경쟁력을 가진 값싼 농산물들이, 허덕이던 영농 개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지요.
여름에 땀 흘려 수고한 노동의 대가에 비하여 제대로 된 보상은커녕 비료 값, 농약 값, 기계 사용료, 대출금 등등 이것저것 다 떼이고 난 개미는 엄청난 빚만 떠안고 파산을 하게 되었답니다.
국가 시책만 믿고 장밋빛 꿈을 꾼 개미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게 된 것이지요.
그로 인해 개미는 허수한 날 술만 마시고 세상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해대며 하루하루를 사는 타락한 인생으로 전락하게 되었지요.
그러다 추운 겨울이 왔습니다.
그 추운 겨울의 어느 날, 개미는 결국 이 세상을 원망하며 깡소주를 마시고 길거리에서 자다 동사하고 말았답니다.
어때요, 슬프죠?
베짱이는 어떻게 됐냐구요?
베짱이는 개미에게서 비웃음과 멸시를 받았고 그 날 이후 더 열심히 기타치고 노래를 불러 피나는 노력 끝에 음반을 내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이 음반이 히트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되었지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간 베짱이의 의지가 빛을 발한 것이지요.
베짱이는 개미의 장례식 날, 리무진에 수십 명의 보디가드를 대동하고 나타났지요.
너무도 멋지고 당당하게 말입니다.
베짱이는 최고급 양복에 반짝거리는 악어가죽 구두를 신고, 금으로 장식된 검은 가죽 장갑을 낀 손에 흰 꽃 한 송이를 들고 개미의 관으로 다가와 꽃을 던져 넣으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쯔쯔쯧‥‥, 자네의 겨울은 여전히 춥겠군‥‥‥.”
2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을 분석해보고, 당대의 시대 상황과 관련하여 설명해보자.
이끌어주기 : 이 작품에서 사건은 ‘진실의 은폐-은폐된 진실의 폭로-진실의 은폐’ 의 과정에 따라 전개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등장인물들이 보여 주는 행동 양식을 인물의 성격에 비추어 판단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 양식이 나타나게 된 원인을 당대 권위주의적인 시대 상황과 결부지어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촌장 :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진실 왜곡마저도 서슴지 않는, 교활하고 위선적인 권력자를 상징한다
파수꾼 가,나 : 독재 권력의 지배 질서를 합리화하고 이에 정당성을 부여해 주는 하수인, 또는 권력의 나팔수라고 할 수 있다.
파수꾼 다 : 처음에는 독재 권력에 저항하여 진실을 추구하지만, 결국은 지배자의 회유에 굴복하고 마는 나약한 지식인이다.
마을사람들 : 독재 권력과 하수인에게 기만당하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우매한 민중을 상징한다
3 이 작품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나 깨달음을 내용으로, 파수꾼 ‘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보자
이끌어주기 : 희곡에서 사건 전개의 중요한 매듭은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발견’에 있다. 이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들은 망루 너머 은폐된 세계의 실상을 소년 파수꾼의 눈을 통하여 발견하게 된다. 그곳은 이리떼는 없고, 흰 구름만이 존재하는 평화로운 세계이며,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은 촌장과 늙은 파수꾼들에 의해 기만당해 온 것이다
극은 인간의 삶을 무대라는 객관화된 공간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거나, 미처 깨닫지 못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하는 양식이다. 따라서 관객들의 발견은 극중 사실의 발견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현실에 대한 발견으로까지 이어진다. 또한 작품 후반부에서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 보고에 앞장서는 소년 파수꾼을 보면서 연민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이 활동은 학생들의 희곡 작품을 감상하고, 감상 결과를 내면화하기 위해 설정한 것이다. 희곡은,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상징적인 사건과 이에 반응하는 인물의 행동을 통해 인간의 본질과 삶에 대한 이치를 터득하게 하는 유용한 양식이다. 학생들이 작품의 내용을 자신에게 비추어 보고, 그것이 자신에게 던지는 의미를 파악해 봄으로써 인간과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먼저 감상한 결과를 정리하여 말하도록 한 다음, 이러한 내용을 ‘파수꾼 다’ 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써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파수꾼 ‘다’ 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접하고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당신이 평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 이전에도 많은 파수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의 임무에 대해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고, 단지 주어진 일만 기계적으로 되풀이할 뿐이었지요. 임무에 대한 과장된 사명감에 취해 그들은 분명히 눈앞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고, 평생토록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리떼의 습격을 경고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달랐습니다. 당신은 진실의 소중함을 거의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리는 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지요. 당신은 정말 용감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흥분된 심정으로 당신을 지켜 보았는지 모를 겁니다.
하지만 결국 교활한 총장의 덫에 걸려 당신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고, 당신은 개인적으로도 평생을 그 외로운 곳에 있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에게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권력의 나팔수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아, 진정한 지혜를 겸비하지 못한 용기란 얼마나 허망한 것입니까!
권력이 그토록 교활하고 치밀한 것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은 너무 순진했고,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진실을 말하기 위해 용기를 발휘한 최초의 선택을 지지하며, 그로 인해 당신이 처하게 된 상황에 진심으로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러한 양심을 가진 당신의 권력의 나팔수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해서는 격심한 분노와 절망감을 동시에 느낄 수밖에 없군요.
나는 당신이 평생토록 그곳에서 북을 두드리면서 결코 행복하거나 자신의 일에 어떤 보람을 느끼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당신을 위한 나의 기원입니다. 당신의 양심이 잠들어 버리지 않기를....
당신에게 할 말이 많았는데 상처만 주게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요. 건강하십시오. 그럼, 이만. 0000년 0월 0일
은폐된 사건 진행의 가시화
은폐된 사건 진행이 가시화된 현대적 방법의 하나로 전화 통화를 들 수 있다. 이 방법은 시간적 동시성이 가능하지만 동시에 공간적 거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이 전화 통화는 무대 안의 상황을 무대 밖으로 전달해 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다른 방식과는 다른 특징을 지닌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전화 통화는 불완전한 의사 소통인 만큼, 이 간극에서 오는 무대 안과 밖의 적절한 단절이 오히려 극적인 긴장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밖에 TV 뉴스 시청이나 라디오 방송 청취 등도 오늘날 많이 쓰이고 있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인데, 이 방법은 무대 밖과 안의 의사 소통이 차단된 상태에서 외부의 정보만 전달받을 수 있다는 공통성을 지닌다. (중략)
이렇게 전달받은 무대 밖의 사건에 대한 정보는 반드시 무대 안의 사건에 영향을 미쳐서 무엇인가의 극적 진전을 가져와야만 한다. 그리고 대개 그러한 정보 획득은 중요한 ‘발견’의 기능을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다음의 장면을 보자.
다 : 이리는 정말 없는 거죠?
나 : 오호라, 넌 이리가 무서워서 병난 거구나. 요 겁쟁이. 우리 양철북을 두드리자. 그걸 힘 껏 두드리고 있노라면 이리떼가 덜 무서워질 거야.
다 : 양철북을 쳐요?
나 : 그래, 치는 법을 가르쳐 주마.
다 : 소용없어요, 그건. 사실을 말씀드리죠. 오늘 새벽 눈을 뜨고 있던 건 저뿐이었어요. 모 두들 잠을 잤구요. 그 틈을 노려 이리떼가 습격해 오면 어쩌나 하구 전 두려웠어요. 그 래서요, 저는 망루 위에 올라갔던 거예요. 그 높은 곳에서 저는 이 황야의 전부를 바라 보았죠. 아무데도 이리는 없더군요. 보이는 거라고는 저 멀리 하늘가에 흰 구름뿐이었 어요. 그걸 향해 망루의 위의 파수꾼은 ‘이리떼다!’ 외쳤습니다. 세 번이나요, 세 번. 저 는 망루 위에서 그걸 제 눈으로 보았어요. 이리떼라곤 없어요. 흰 구름뿐이에요.
나 : 얘야, 난 네 맘을 안다. 넌 망루 위엘 올라가고 싶었겠지? 이리가 무서웠구. 더구나 어 린 너에겐 이 쓸쓸한 곳이 맞질 않는다. 그래서 넌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다 : 저는 정말 망루 위에 올라갔었어요.
망루 너머에는 이리떼는 없고 흰 구름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발견. 신임 파수꾼인 ‘다’에 의해 이러한 사실(진실)이 무대 공간으로 전달되지만, 기존의 체제 유지 세력에 의해 철저히 무시되고 은폐된다. 이러한 진실과 허위에 대한 경계는 단지 망루 위에만 설정되어 있을 뿐이고, 아무도 여기에 접근할 수 없다. 극히 일부의 파수꾼만을 제외하고는 관객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망루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작품에서의 극적 긴장의 출발이 된다. 이렇듯 무대 안과 밖의 부분적인 연결에 의하여 관객은 긴장을 갖고 은폐된 사건 진행의 가시화를 기대하게 되고, 새로운 사건 진행에 자연스레 동참을 수가 있게 된다. 이렇게 극의 본질적인 제한에 따라 불가피하게 무대 안과 밖의 구별이 설정된 것이지만, 역으로 이러한 설정이 다시 극의 ‘극적’인 효과를 높여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것이다. (출처 : 양승국, '희곡의 이해 ')
1. 이 작품에서 소년 파수꾼이 조용히 양철북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바를 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파수꾼'에서 소년 파수꾼은 촌장의 통치 방법의 허실을 파악하고 그것을 폭로하여 바로잡고자 했던 문제적 인물이었다. 이 인물이 그 실상을 알고도 양철북을 그야말로 조용히 두드린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임무를 망각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양철북을 두드리는 소년 파수꾼의 의미를 분석하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소년 파수꾼은 이리 떼의 출현을 이유로 마을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촌장의 통치 방법의 문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개선하기는커녕 그 질서에 순응하고 다시 양철북을 두드려 촌장의 통치 질서를 따르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권력의 회유와 속임수에 넘어가고 만 피지배층의 비겁함과 몽매함을 보여 준다.
2. 이 작품이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풍자하는 부분을 찾아, 그 의미를 발표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풍자란 정치적 현실과 세상 풍조, 기타 일반적으로 인간 생활의 결함·악폐·불합리·우열·허위 등에 가해지는 기지 넘치는 비판적 또는 조소적(嘲笑的)인 발언을 뜻한다. 풍자란 그 비판 대상이 대체로 권위있는 것이며 그 위치를 낮춤으로써 비꼬고 비아냥거릴 수 있게 된다. 이 작품이 우화적 방법으로 쓰여졌다는 사실과 1973년도에 발표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관련된 표현들을 쉽게 연관시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예시 학생 활동 :
·교과서 289쪽 촌장의 대사 "애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얘야, 넌 이렇게 모든 걸 헛되게 하고 싶진 않겠지?"
·의미 : 촌장은 마을 질서를 위해 허상의 이리 떼를 만들었고, 사회가 질서를 필요로 할 때마다 이리 떼가 출현했다고 허위 경고를 통해 사회의 다른 문제들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 내용들은 1970년대 박정희 군사 정부가 북한과의 휴전 대치 상황이라는 안보논리로 이것을 과대하게 포장하고 악용하여 나라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던 점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3. 이 작품에서 소년 파수꾼과 촌장 사이의 갈등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지 토론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극 양식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갈등 대결을 통해서 사건이 진행된다. 교과서 수록 부분은 작품의 중후반부로서, 촌장과 소년 파수꾼의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되었다가 한쪽으로 기울면서 사건이 종료되는 구성이다. 따라서 이들의 갈등을 파악하는 것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두 인물 사이의 대화 내용을 분석해 보고 서로 간의 입장이 다른 점을 정리하여 그들의 갈등 원인을 찾아보도록 지도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소년 파수꾼은 이리 떼는 없고 흰구름 뿐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자 한다. 촌장은 그 사실은 인정하지만 지금 당장 폭로하게 된다면 자신이 마을 주민들에게 변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이 마을에서 첫 살인이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회유한다. 소년 파수꾼은 이때 사실 폭로와 촌장의 목숨을 구하는 문제 사이에서 갈등하는데, 촌장이 유혹하는 대로 사실 폭로를 하루 미루고 촌장의 목숨을 먼저 구하기로 결정하여, 결국 촌장의 계략에 넘어가고 만다.
확장하기
1.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비슷한 인물을 주변에서 찾아보고, 그 인물을 비판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이 작품에서 비판할 만한 인물은 두 유형이다. 첫째, 촌장은 가상의 적을 만들어 내부의 단결을 꾀하는 통치 수단을 가진 인물이다. 둘째, 소년 파수꾼은 문제 의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바로 실천하지 못하고 상대방의 인정에 호소하는 발언에 넘어가서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그러한 인물들을 주변뿐만 아니라 문학 작품,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양식에서 찾아보도록 하자.
예시 학생 활동 :
·촌장과 같은 인물 : '동물 농장'의 나폴레옹. 그는 그 사회에서 중요한 풍자 만들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원인을 그의 정적(政敵) 스노우볼의 소행으로 덮어씌우고 관심을 풍자 만들기에서 스노우볼 붙잡기로 전환시킨다.
·소년 파수꾼과 같은 인물 : 현대의 소시민들은 사회적 부조리를 직접 목도하면서 나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면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2. 글을 읽고, 다음 활동을 해 보자.
나폴레옹은 일주일에 한 번씩 이른바 '자발적 시위'라는 것을 열도록 명령했는데, 동물 농장의 투쟁과 승리를 축하하는 것이 그 시위의 목적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동물들은 일하다 말고 군대식 대형을 지어 농장 구내를 행진했다. 돼지들이 대형을 이끌고 다음에 말, 그 다음에 암소, 암소들 뒤로는 양들, 양 다음에 암탉, 거위, 오리 등이 섰다. 대형의 좌우 측면에는 개들이 따라붙고, 나폴레옹의 나팔수인 검은 수탉이 선두에 서서 행진했다. 클러버와 복서는 발굽과 뿔이 그려진 녹색 깃발을 양쪽에서 받쳐 들고 행진했는데 그 깃발에는 '나폴레옹 동무 만세!'라고 씌어 있었다. 행진이 끝나면 나폴레옹을 기리는 시들이 낭송되고 이어 최근 식량 생산이 얼마나 늘었는가를 숫자로 밝히는 스퀄러의 연설이 있고, 이따금 총포가 발사 뒤따랐다. '자발적 시위' 가장 헌신적인 것은 양들이었다. 이 행사가 시간 낭비이고 행사를 위해 동물들이 추위에 떨며 한참씩 서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하고 누군가 불평하면(돼지와 개들이 없는 자리에서는 이런 불평을 하는 동물들이 몇 있었다.) 양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큰소리로 외쳐 대어 불평을 잠재웠다. 그러나 대체로 동물들은 그 축하 행사들을 즐겼다. 동물들은 그 행사들을 치르면서 어쨌거나 자기들이 농장의 진정한 주인이고 그들의 모든 노동도 자기네 이익을 위한 것임을 상기하고 그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조지 오웰, '동물 농장' 중)
조지 오웰, '동물 농장'
작품 해제 -> 지도서(하) 395쪽 더 찾을 거리 참조
작가 소개 :
조지 오웰(Georage Orwell, 1903~1950) : 영국의 소설가, 본명은 에릭 오더 브라이어(Eric Arthur Blair). 스탈린주의를 비판하였으며, 현대 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을 풍자하였다. 작품에 '동물 농장', '1974년' 등이 있다.
교수·학습 방법 :
우화는 동식물을 의인화하여 인간 생활을 풍자함으로써 도덕적 교훈을 주고자하는 이야기이다. 그 이야기 방식 자체가 무엇인가 비판할 대상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비유적인 표현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음 질문들은 '동물 농장' 작품 속에 나타난 보조 관념의 원관념을 찾는 문제로서 그 의미를 한국 사회에 적용하여 모순점을 찾도록 한다. 시대적 이해와 '동물 농장' 전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문제이다.
(1) 1970년대의 한국 사회를 참고하여, '자발적 시위'의 모순을 설명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동물 농장에서 자발적 시위란 통치 권력에 대한 옹호와 아부성 발언들로 가득 차 있는 '비자발적' 시위를 뜻한다. 그들은 생산량의 수치라는 속임수와 요란한 행사로 마치 모든 일이 잘되어 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다. 1970년대에 이러한 역할을 했던 곳은 정부와 관련된 기관뿐만 아니라 언론사도 중요한 몫을 했다. 방송 보도를 통해서 밝은 면만 부각시키다보면 어두운 면은 가려지게 되고, 요란한 구호 소리가 판을 치게 되면 억눌리고 소외된 목소리는 그 힘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2)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에 담긴 뜻을 생각해 보고, 이러한 표현의 모순을 설명해 보자.
예시 학생 활동 :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라는 구호는 수퇘지 나폴레옹이 자신의 집권의 타당성을 확보하고자 네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이 사람처럼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동물보다 좋다는 의미로 만들었다. 어떤 사상(事象)을 극단적으로 양분하여, 어느 한쪽만을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전개하는 흑백 논리는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할 사고방식이다. 특히 그러한 구호가 어떤 특수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라면 그 이면에 담겨진 숨은 의미를 알지 못하고 겉으로만 드러난 의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이 소설에서 반란을 선동하는 돼지 메이저 영감은 공산주의의 시조라 불리는 마르크스를 뜻하며 나폴레옹은 스탈린을 스노우볼은 스탈린에게 쫓겨난 트로츠키를 빗댄 것이었다. 소설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얼마동안 동물들의 계급 차별이 없는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동물주의(즉 공산주의)의 이상이 실현되어 가는 듯 보인다. 하지만 곧 돼지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나 나폴레옹이 정권을 잡게 되고 그의 통치로 인해 농장에는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이 생겨난다. 지배 계급인 돼지들이 인간의 모든 악습을 흉내내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고 있다.
이 작품은 '양치기 소년과 이리'라는 우화를 차용하여 1970년대의 정치 상황을 풍자한 작품이다. 그러나 진실을 왜곡하는 주체는 각각 '소년'과 '촌장'으로 서로 다르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이 사람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입혔지만, '촌장'의 거짓말은 오히려 마을의 질서를 유지시켜 온 원동력이었다. 현상적으로 보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촌장의 거짓말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마을 사람들을 끊임없는 긴장으로 몰아넣었고, 촌장은 자신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이 숨겨진 진실이고, 진실의 왜곡으로 인한 결과이다.
이 작품은 권위주의에 의해 통치되던 1970년대라는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이 작품은 우화적인 기법을 활용하여 당대 권력의 위선적인 실체를 건드려 보고자 한 매우 의욕적인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는 팽팽한 갈등을 전제로 하는 극 양식의 원리에서 보면 그 갈등의 측면이 미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대의 정치 상황을 고려한다면, 관객들은 우화라는 상징적 장치를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우화적인 장치가 갖는 연극적인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는 소년이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 보고에 앞장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처럼 거짓의 길을 선택한 소년 파수꾼의 처지에 연민과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시대적 상황이 어떤 것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한계전외 4인 공저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1970년대 '체제 유지를 위한 안보 정책'을 향한 통렬한 풍자이다. 들판 저 너머에는 흰구름만 있을 뿐 이리 떼라고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리 떼가 나타난다'라는 공포 속에서 평화를 유지한다는 아이러니의 상황이 계속된다. 그러던 중 한 파수꾼에 의해 알려진 진실은,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가상의 적이 필요하다는 촌장의 설득으로 철저하게 무시된다.
이렇듯 진실은 외면되고 청년 파수꾼도 굴레의 테두리에서 봉사하게 된다. 독자는 처음에는 파수꾼에게 연민을 느끼며 그 역시 희생자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는다. 그러나 결국 파수꾼의 나약함을 목격하고는 진실을 끝까지 밝히지 못하는 모습에 분노마저 치솟는 것이다. 그리고는 진실의 의미와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에서의 용기의 중요성을 함께 깨닫게 된다.
권력의 위선적 실체를 건드려 보려는 작자의 의욕적 시도로서의 이런 우화적인 방법은 그 갈등의 축이 미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자그마한 진실의 파헤침에 독자들은 조심스럽게 쾌재를 부른다. 사실 당시의 열악한 사회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모습은 큰 몸짓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리와 소년에 대한 우화(寓話)는 누구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소년은 거짓 소문을 퍼뜨려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골탕먹인다. 마을 사람들은 정작 이리가 나타났을 때에는 소년의 말을 듣지 않아 큰 피해를 입는다. 이 작품은 우화를 빌려 진실의 왜곡이 가져올 수 있는 엄청난 재앙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이 작품의 결말에서는 소년이 촌장의 설득을 받아들여 스스로 거짓 보고에 앞장 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처럼 거짓의 길을 선택한 소년 파수꾼의 처지에 연민과 분노를 느끼고, 진실을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 진실을 용기 있게 외치는 고통보다는 지배자의 달콤한 유혹을 선택하는 소년의 모습이 극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우화적 기법은 겉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나 내용을 상징적으로 함축해 준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 숨겨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어야 올바른 감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해와 감상2
마을의 질서와 방위를 위한 방편책으로 존재하지도 않는 이리 떼를 가상으로 설정, 이리 떼의 습격에 대비하여 망루를 세우고 수시로 경보 신호를 울려서 마을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것이 주된 내용인 이 희곡은 국가 안보에 대한 문제를 우회적으로 비난하고 국가와 정부에 대해 불신을 일으키며 세대와 세대 간의 반목과 갈등을 조장할 우려가 있다고 해서 공연 윤리 심사에서 반려된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은 1973년 <현대문학>에 발표되고 1975년 <현대 극회>가 연극인 회관에서 공연한 작품이다. 일제 강점기 못지 않게 검열이 횡행하던 그 시절에 연극 속에서 몸부림친 현실은 제도적 폭압에 짓밟히는 연약한 개개인 삶 그 자체였다. 이강백은 그 점에 착안해서 현실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하기보다는 그러한 체제 이면에 숨겨져 있는 권력의 위선과 모순을 폭로하고자 했다. 또 그러한 제도적인 면 뒤의 인간적인 보편성까지 파악하고자 하는 철학적인 시도가 이어진다.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이강백( 李康白 : 1947 - )
극작가 1971년 동아일보 신춘 문예에 '다섯'이 당선되어 등단함. 극단'가교(架橋)'의 일원으로 현대 사회의 모순을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희곡을 많이 씀. 저서로는 <파수꾼> <보석과 여인> <알> <우리들의 세상> <쥬라기의 사람들> <북어 대가리> 등
우화(寓話)의 의미와 변용
우화란 동식물을 인격화하여 인간적인 상황이나 인간의 행동이 묘사된다. 도덕적인 교훈이 담겨 있으며, 그 분위기가 아이러니(반어적)하거나 현실적이며 때때로 풍자적이기도 하다. 동식물에 관습적이고 전형적인 인간의 성격이 투영되어 나타난다. 우화의 주제는 일상생활의 상식적인 도덕적 교훈이다. 주로 미래의 가상적인 커다란 이익을 기대하여 현재의 작은 이익을 포기하는 어리석음, 약한 자가 강한 자처럼 행동하려다가 낭패를 보는 어리석음 등 주로 무모함을 극화시키거나 반어적으로 표현한다.
조지 오웰, '동물 농장'
작품해제 :
인간 존스 농장의 동물들이 돼지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켜, 인간들의 착취가 없는 '모든 동물이 평등'한 이상 사회(理想社會)를 건설하고자 한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돼지만이 특권을 누리게 되고, 특히 수뇌들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나폴레옹이 스노우볼을 추방하고 난 다음부터 나폴레옹의 독재 체재가 더욱 강화되어 반란 전보다 더 심한 착취를 당하게 되며, 동물들의 의식까지도 지배하는 전체주의적 공포 사회가 형성되어 인간들과의 상거래도 부활되고 만다.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이고,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는 명언을 입증해 보이면서, 스탈린주의를 비판한 최초의 문학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오웰은 이 소설을 통해 혁명이 성공을 거둔 후에는 어떻게 변질되는가, 권력자들과 정치가들이 어떤 식으로 국민들을 속이고 억압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파수꾼과 시대적 관계
'파수꾼'은 우화적인 상황을 통하여 당대의 권력의 위선적인 실체를 건드려 보고자 한 매우 의욕적인 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화적인 시도란 거대한 힘들의 충돌을 전제로 하는 극 양식의 원리에서 보면 그 갈등의 축이 미약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관객들이 그러한 우화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발견하면서 마음속으로만 조심스럽게 쾌재를 부를 수밖에 없었던 당대의 정치적인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우화적인 장치들이 갖는 연극적 의미를 결코 과소평가(過小評價)할 수 없을 것이다. [출처 : 서연호 외, <한국 대표 희곡 강론>(현대문학, 1993)]
우리 연극을 재미있게 보는 방법
- 극작가의 눈으로 본 극작가들 -
이강백(극작가)
희곡은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에는 시의 기법이 있고 소설에는 소설을 쓰는 어떤 기법이 있듯이 희곡에도 극작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이 어떤 희곡 세계를 갖고 있으며 어떤 기법으로 희곡을 만들어 나가는지에 함께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나라 희곡계를 대표하는 작가들인 최인훈, 이근삼, 오태석, 이현화 장정일, 윤조병, 박조열 제씨의 세계에 이름을 붙여 보면 이렇습니다.최인훈은 설화의 세계이고, 이근삼은 풍자의 세계, 오태석은 이미지의 세계, 이현화는 도착의 세계, 장정일은 페러디의 세계, 윤조병은 사실의 세계, 박조열은 우화의 세계…. 이 일곱 극작가들이 어떻게 자기 세계를 구축해 가는지 여러분과 함께 파헤쳐 보고자 합니다.
최인훈 하면 소설뿐 아니라 대한민국 연극과 희곡사에 커다란 획을 그으신 분입니다. 그의 장편소설 「광장」은 문학청년이나 소녀 시절에 반드시 읽어 보셨을 줄 믿습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최근에 나온 자전적 소설 「화두」, 희곡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어이」, 「낙랑 둥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 등을 접하면서, 저는 이 분이 소설을 쓰다가 왜 희곡에 손을 댔을까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날 소설가 최인훈이 연극계에 발을 들여놓더니, 우리들 토박이 희곡 작가들을 앞질러 적잖은 관객들을 모아 가는 걸 보면서, 왜 그런지 그 이유를 따져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젓 조사를 해 보았더니, 지금은 없어진 계간지 「문학」에 1966년에 최인훈의 제법 흥미있는 작품이 실려 있는 걸 걸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문학」은 아주 신망있는 문학 전문지였습니다. 그 잡지에 최인훈은 「놀부전」이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오늘의 입장에서 「흥부전」을 새로 본 최인훈
최인훈의 눈으로는 「흥부전」을 아무리 읽어 봐도 흥부가 아이를 많이 낳은 것 외에는 잘한 것이 하나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흥부전을 쓴 사람도 부부가 눈만 마주쳐도, 옷깃만 스쳐도 애를 낳았다고 했겠습니까. 숫자로도 스물여덟이나 아홉밖에는 더는 못 세고 마는데, 아마 50이나 60명쯤은 낳았을 겁니다.
그런데 흥부가 한 것은 뭐냐 하면 제비집에서 발을 헛디뎌서 떨어진 멍청한 제비를 살린 거죠. 물론 뱀이 올라오는 통에 놀라서 그랬다지만, 다른 제비들은 멀쩡한데 왜 그 멍청한 제비 한 마리만 떨어졌을까. 마음씨 착한 흥부는 그 멍청한 제비를 주워다가 다리를 붙들어 매줍니다. 깁스를 해서 날려보냈더니 남양군도라는 곳으로 갑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태국이나 버마에 해당되겠죠. 거기서 박을 기른다는 소리도 좀 희한한 소리지만, 그걸 물고 여기까지 온다는 둥 최인훈 선생의 입장에서는 생각하면 할수록 믿어지지 않을 소리만 잔뜩 씌어져 있어요. 박을 탔더니 거기서 밥도 나오고 무슨 돈도 나오고, 나중에는 첩도 나왔다.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흥부전을 읽어보니까, 도저히 믿지 못할 소리만 잔뜩 씌어져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놀부를 오늘의 눈으로 본다면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근면하고, 욕심이 많고, 목표가 뚜렷한 인간형인 걸 발견한 거죠. "나는 부자가 되고 말 거야!"라는 강력한 목표를 내건 인간상이었습니다. 아주 교훈적인 것은 게으른 자기 동생 뺨을 자기 부인으로 하여금 때리게 만든 겁니다. 그것도 놀부 마누라가 시동생 사람되라고 때렸지, 밥주걱 부러지라고 때렸겠습니까. 최인훈 선생은 이렇듯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나라의 설화를 새롭게 보았습니다. 이런 재해석 과정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흥부가 한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을 소리고, 놀부가 한 행동은 아주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긍정적으로 봤던 흥부를, 아주 부정적으로 보면서 놀부전을 다시 쓴 거죠. 최인훈 선생님 역시 소설가이다 보니까 번역투가 아닌 판소리의 '아니리 조'를 빌어 놀부전을 썼습니다. 소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얼쑤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춤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4.4조, 7.5조 할 것 없이 우리말의 고유한 운이 탁탁 맞아 들어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얼쑤를 연발하면서 소설을 읽게 되는 거죠. 마침 연출가 손진책이 「문학」지에 실린 소설을 읽다가, 소설로 읽고 말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느끼고서 모노 드라마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손진책 씨가 놀부전을 가지고 코리아나 극장에서 모노 드라마로 올렸습니다. 놀부전을 공연했을 때 최인훈 선생님을 모시고 왔는데, 최인훈 선생이 "나는 소설로 썼는데 직접 관객을 만나 보니까 소설가가 못 느끼는 어떤 것을 맛보게 된다"는 소감을 피력하셨습니다. 소설가에게는 익명의 독자들만 존재하기 때문에, 그 반응을 직접적으로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연극으로 만들어져, 무대에서 공연되고 있는 자기 작품과 관객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커뮤니케이션에 최인훈 선생이 반해 버린 거죠.
그래서 최인훈이 두 번째로 쓴 희곡 작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사들로 씌어진 훌륭한 희곡이 되었습니다. 최인훈은 모든 희곡의 소재를 우리 나라 설화에서부터 가지고 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의 소재는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입니다. 그 설화를 사실(事實)이라는 안경을 쓰고 들여다본 거죠. 그랬더니 이상한 일이 참 많이 일어났습니다.
임금의 서너 살바기 딸이 개미한테 물려 울음을 터뜨리자, 그 울음을 억지로 막아 보려고 "너 울면 바보 온달한테 시집 보낼 거야." 하고 윽박지르자 속아 넘어가 울음을 뚝 그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팔 청춘 16살이 넘은 처녀가 이제 그만한 일로 울 리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바보 온달한테 귀한 딸을 시집보낼 왕이 있을까요. 이것도 이상하였을 뿐더러, 심지어 신라군에게 연전연승하시던 일당 백, 무적의 온달 장군이 아차산에서 신라군에게 어떻게 살해를 당했을까 등이 의문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보니까, 평강공주가 왕실에서부터 나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왕자들과 권력 게임을 하다가 밀린 데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정치적인 이유가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거죠. 남자들은 서로 권력 게임을 하다 보면 정의냐 불의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주고 받고 하는 속에서 정의라는 것은 찾아볼 수 없게 마련입니다. 강직한 평강공주의 눈에는 그게 참 더러운 게임으로 비친 겁니다. 그래서 그걸 오빠들에게 지적하죠. 그런데 오빠들은 왕위 계승권이 없는 여자애가 짖어대니까 보기 싫지요. 그런 속에서 "너 궁 밖에 좀 나가 있어라." 해서 내보낸 것으로 해석한 거죠.
실제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보면 평강공주가 궁 밖으로 나오기 전에는 바보 온달을 몰라요. 대사가 평강공주로 하여금 난을 피해 있도록 궁 밖에 있는 절로 데리고 나오는 도중, 숲 속의 바보 온달네 집에 우연히 물을 마시러 들렀다가 곰을 때려잡고 들어오는 온달을 만납니다. 그 순간 평강공주는 저 백지 상태의, 아직 거기에 아무 것도 씌어져 있지 않은 재료를 하나 본 거지요. '아! 저 재료에 나의 지혜와 지식을 불어넣고, 이데올로기를 불어 넣자. 백지 상태의 온달을 용감무쌍한 장군으로 만들어 놓으면 내 역할을 대신해 권력 투쟁에서 용감히 싸워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요. 그런 이유에서 바보 온달을 택한 겁니다. 평강공주와 결혼한 바보 온달은 어엿한 장군이 되지요. 서울의 아차산은 신라로부터 빼앗은 남쪽 땅으로 바보 온달이 죽어서 묻힌 곳입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그 때 바보 온달이 백전백승하는 걸로 나와 있습니다. 한강 이북까지 침범한 신라군을 무찔러서 내모는데, 어떻게 바보 온달이 패잔병들한테 죽었을까 이해가 안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이라는 안경을 쓰고 그 설화를 보면 달라집니다. 바보 온달이 백전백승하면 제일 싫어할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당연히 권력 게임에서 평강공주한테 밀리고 있는 왕자들일 것입니다. 그래서 왕자들은 음모를 꾸밉니다. 암살자를 고구려 병사들 속에 넣어서, 온달의 등 뒤에서 화살을 쏘게 만든 겁니다. 그래서 이 암살자에 의해서 죽게 됨으로써 얘기가 바보 온달 설화보다도 더 의미가 생기고 확실해져요. 최인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에서는 온달 장군이 암살당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면 관객들은 콧날이 시큰해지는 걸 억지로 참으면서 관극을 하고, 혼자서 읽을 때는 혼자서 펑펑 울어요.
평강공주의 꿈속에 죽은 바보 온달이 나타납니다.
'이제 이렇게 죽어서야 비로소 그 예전에 곰 때려잡고 여우 잡으러 다녔던 자유를 누립니다. 죽은 다음에야 알았지만 공주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습니다. 그 하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일자 무식쟁이에다 숲 속에서 곰이나 잡았던 나 바보 온달이 이제는 벼슬아치로 변하고, 궁전에 들어가서 정치적인 음모와 권력잡기 게임에 휘말리느라 제대로 사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했던 나는 답답했습니다. 죽어서야 비로소 당신을 예전과 똑같이 얽매이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참다운 죽음이었습니다. 그걸 꿈꾼 거죠. 그리고 조금 있다가 바보 온달이 전사했다라는 통지가 평강공주에게 날아듭니다.
최인훈이 사용했던 극작술, 즉 설화의 세계는 전부 뒤틀리고 변형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실 같은 부분들이 환상으로 바뀌어져 있는 것을, 최인훈은 사실이란 안경을 쓰고 봅니다. 그런 재해석을 통해 우리나라 설화가 갖고 있는 높은 가치를 발견한 거죠.
1978년에 쓴 「달아 달아 밝은 달아」는 심청전을 새로 본 겁니다. 가령 인당수에 빠졌다가 연꽃으로 떠오른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본 거죠. 바다에서 연꽃이 피어날 리도 없고, 연꽃을 타고 갈 리도 없죠. 최인훈식 해석으로는 심청이 중국 산동에 있는 창녀촌으로 팔려갔다가 거기에서 신라 사람을 만난 것으로 설정됩니다. 그러다가 불쌍히 여긴 조선족 청년이 심청을 구해 줍니다. 그런데 최인훈은 그대로 잘 살게 놔두지 않고, 도중에 중국 해적을 만나 붙잡혀 가게 합니다. 그래서 늙도록 해적을 위해서 성적인 노리개가 되어줄 뿐 아니라, 빨래 시중도 들다가 예순이 넘어 노동력을 상실해서야 해적이 필요없다고 버립니다. 그후 갖은 고생 끝에 바닷가로 늙은 심청이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늙은 창녀는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심청이의 옛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런데 막상 이 희곡이 연극으로 무대에 오르자 관객 사이에서 우 하는 함성이 터졌습니다. 아무리 사실이란 안경도 좋지만, 우리 민족 고유의 환타지만큼은 빼앗아가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효 이데올로기 하에 아름답게 꾸며진 심청의 이미지를 훼손당하고 싶지 않았던 거죠. 왕비가 되고, 용궁에서 죽은 어머니도 만나고,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날 때 심청이 다시 살아나고…. 잔인한 이야기일수록 아름답게 표현하는 한국인의 정서상 창녀촌에 팔렸다가 칠십 노파가 된 심청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죠. 그 뒤부터 최인훈은 우리 설화를 희곡으로 만드는 작업을 중지합니다.
이미지 만들기의 귀재 오태석
오태석의 극작술은 이를 테면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하는 구전가요 식입니다. 오태석 연극을 보면 원숭이하고 사과는 아무 관계 없이 엉뚱한데, 잘 보면 공통점 하나가 있어요. 뭐냐면 빨갛다.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이렇게 이미지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해 갑니다. 서사 구조랄까 나레이티브, 즉 이야기 줄거리를 쫓아 가면서 연극을 보면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지 말고 이미지로 보시기 바랍니다.
가시와 비가시의 대화, 장정일
장정일은 만나 보면 참 예의 바른 사람이고 커피를 마셔도 후루룩 소리를 절대 내지 않는 사람이에요. 목소리가 사근사근하고 높지 않아요. 그런데 글은 어찌나 에로틱하게 쓰는지 심지어는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죽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아버지가 죽은 날 자기는 축제였다'는 등의 지독한 말을 '일기'라고 발표하니까 굉장히 괴상한 사람으로 비칩니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를 읽으면서, 사람한테 그렇게 못된 짓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나 보면 얼마나 조용하고 깍듯이 예의를 지키는지 사람을 다시 보게 되요. 제 마음 속에서 대단한 천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만나본 천재 중의 한 명이지요. 장정일은 시집 「햄버거에 관한 명상」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시인이자 소설가지만, 극작가로서도 기가 막힌 작품을 쓴 게 있습니다.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실내극」이라는 희곡으로 당선했는데, 저는 이 작품을 대한민국 희곡 가운데 다섯 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장정일 문학 전집 속에 희곡집이 있는데 거기에 첫 번째로 실려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 노크 소리가 딱딱 들리지요. 안에 있던 어머니가 "들어와." 하니까 아들이 들어옵니다. 뭔가를 훔쳐서 절도범으로 감옥살이를 하고 오는 거에요. 아들은 어머니한테 묻습니다. "아니, 내가 그렇게 많이 훔쳐다 놓고 갔는데, 그 돈을 다 썼어요?" "또 벌어 와야 된다"고 어머니가 말합니다. 아들에게는 애인도 있었습니다. "걔가 니가 감옥에 가자 며칠 있다 슬그머니 가더라." 참으로 가슴 뭉클한 삽화죠.
이윽고 아들은 뭔가를 훔쳐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면 어김없이 형사가 잡으러 옵니다. 감옥에 갔다가 만기로 형을 마치고 나오고, 또 훔치러 갔다가 훔쳐다 놓고 잡혀갑니다. 그렇게 왔다갔다 할 때마다 시간이 가는데, 나갔던 사람이 금방 오는데도 그 찰나에 시간은 가는 거에요. 5년, 10년, 15년…. 그런데 장정일의 기가 막힌 점은 다음과 같은 데 있습니다. 가시적 공간이라는 무대가 있고, 비가시적 공간인 감옥이 우리 관객의 머리 속에 보입니다. 우리는 흔히 집은 편안하고 행복하고 안정된 곳이라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연극 속에서 아들이 감옥에 갈 때마다 얼마나 쓸쓸하고 외롭고 힘들고 지옥 같을까 마음 아파 하지요. 그런데 천만에요. 극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들의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이게 역전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감옥에 가면 오히려 잡아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가장 안정적이고 공짜로 먹여주기까지 하니 훔칠 일이 없어지니까요. 반대로 가난한 집으로 돌아오면 끊임없이 뭔가를 훔칠 궁리를 해야 하고, 막상 훔쳐서 가난과 굶주림을 면하고 나면 누군가 잡으러 올까봐 불안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집이라는 공간과 감옥이라는 공간이 완전히 역전되는 셈입니다. 이게 바로 장정일의 천재적 발상입니다.
장정일의 「실내극」에 나오는 장면 하나를 소개하지요. 한번은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도둑질을 하러 나섭니다. 그래서 훔쳐 오지요. 훔치는 과정에서 지문을 남기고 일부러 주민등록증까지 남겼는데, 막상 형사들은 들이닥치지 않습니다. 형사들이 잡으러 오지 않으니까 모자는 불안해집니다. 빨리 잡아갈수록 덜 불안하니까, 온갖 지문을 남기고 했는데 예상 밖으로 추적의 발걸음이 더디었던 거죠. 그러다가 형사가 들이닥치니까 어머니와 아들은 뛸 듯이 기뻐하며 만세를 부릅니다. 그런데 "드디어 왔다!" 하는 순간, 찾아온 형사는 아들을 잡아가지 않고, 돌연 그 자리에서 어머니를 쏴서 죽여 버리죠.
이렇게 되니, 아들만 잡혀가고 어머니가 쓸쓸하게 아들을 기다리던 집이라는 구조가 그만 깨지게 되지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집으로 돌아와서, "하늘에 계시는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고 기도하지요. 어머니가 형사한테 사살당하고 혼자 쓸쓸하게 돌아와서 기도를 하는데, 기가 막힌 패러디에요. 그 흔한 주기도문을 패러디해서 이렇게 외는 겁니다. 똑같은 기도문인데도 얼마나 패러디를 잘 했는지 모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어머니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어머니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집에서 살면 도둑질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고, 얼마나 많이 잡혀가야 되고, 얼마나 많이 불안해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그렇다는 거죠. 교회의 목사가 말할 때보다 이 기도문이 훨씬 더 절실하고 기가 막혀요. 신을 지독하게 모독하면서도 그 속에서 인간에 대한 슬픔, 고독을 은연중에 표출해 보여주고 있지요. 가시적 공간과 비가시적 공간을 활용할 뿐만 아니라, 모든 의미의 패러디를 통해, 즉 감옥이 얼마나 행복한 곳이며 거기에는 누가 잡아가지도 않는 곳이라고 설파하죠. 하지만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네 삶이 얼마나 불안한 곳이며 가식에 차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장군의 발톱」의 작가 박조열
우화와 알레고리의 극작가는 박조열입니다. 그의 잘 알려진 대표작은 「오장군의 발톱」이지요. 오장군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골뜨기 먹쇠바우와 동격인 법 없이도 사는 총각이 있는데, 전쟁이 나서 동군과 서군이 싸워요. 그래서 징집을 당하지요. 자기한테 영장이 온 것이 아니라, 이웃 마을에 사는 오장군이라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총각한테 가야 될 징집영장을 우체부가 잘못 배달하는 바람에 군인이 되었지요.
극중의 전쟁에서 적군이 갑자기 비밀리에 군대를 더 증강시켜서 아군을 기습하려고 하지요. 그러자 아군은 오장군으로 하여금 일부러 적의 포로가 되게 해서 거짓 정보를 주게 됩니다. "우리 편도 당신들 못지 않게 엄청나게 군대를 증강해 놨다."라고요. 그런데 오장군이 너무 순박한 나머지 "이게 거짓정보야."라고 말해주고 맙니다.
"이건 진짜야." 진짜처럼 알고 가서 포로가 됐는데, 온갖 혹독하게 고문을 해도 똑같은 말만 하니까, 적군으로서는 상대방도 군비를 증강한 줄 알지요. 그래서 기습 공격하려 했던 작전도 변경하게 되지요. 그러다가 며칠 후 상대편이 오장군을 일부러 포로로 보내서 교란작전을 세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오장군을 죽이게 됩니다.
농군 오장군이 소를 몰며 밭갈이 할 때 소하고 얼마나 친구같이 다정하게 지내고, 색시를 얼마나 끔찍하게 사랑하는지, 관객들은 마치 동화의 세계 같은 기분을 맛봅니다. 이 동화의 세계 같은 곳에, 우화의 세계 같은 곳에 느닷없이 엄청난 비극이 닥치죠. 그러니까 남북 분단이라는 시스템 속에 있으면 그와 같은 비극은 수없이 일어나고 반복된다는 것을 작가는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 비극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있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지요.
우리 모두는 마치 우화의 세계처럼 소하고 총각하고 노는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에 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죠. 일부러 잔인하고 끔찍한 비극을 보여 주는데, 가장 아름답고 우화적인 세계 속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 때 그것이 남 아닌 자신의 비극으로 인식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박조열은 그 우화의 세계를 알레고리, 즉 우의의 세계를 통해 표현합니다. 현실을 바로 다룬 게 아니라, 어떤 우의적인 세상에는 이런 원칙이 있는데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다고 말해 줍니다. 이북이든 이남이든 거기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한 비극의 덫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겁니다.
박조열은 원산 출신으로 원산에서 교편을 잡다가 6·25 때 단신으로 이남으로 내려온 사람입니다. 분단이라는 것을 가장 절실히 체험하신 분답게 희곡에 있어서도 분단 문제를 심도있게 다룹니다. 알레고리로써 아무도 피할 수 없는 분단 문제 해결이라는 십자가를 보여주고 있는 민족작가지요.
풍자에 능한 이근삼
이근삼 선생은 풍자에 능한 분입니다. 「공룡의 발자취를 찾아서」가 최근 서울시립극단 공연으로 선을 보였지요. 이분은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에 유학가 계셨을 때 영어로 「끝없는 실마리」, 「다리 밑에서」 등 두 편의 희곡을 쓰셨습니다. 당시 이것을 읽은 미국인들이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미국에 남아서 희곡을 계속 쓰면 아더 밀러에 버금가는 작가가 될 거라며 붙잡았다는데 뿌리치고 오신 분입니다.
그의 출세작인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인데, 이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자 한국 희곡계는 그 물줄기가 달라졌습니다. 그 내용인즉 이렇습니다. 4·19 직후에 장기 집권하는 왕이 있었습니다. 국민들은 하나같이 신물을 내는데, 대왕만이 그 사실을 유일하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대왕에게 나이 사십이 넘은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나이가 든다는 것을 대왕은 인정을 안했습니다. 아들이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정도의 성인이 되었다고 하면, 왕권을 넘겨줘야 하기 때문에 늘 어린애처럼 생각할 뿐만 아니라 늘 기저귀를 차고 다니게 했습니다. 마흔 살 먹은 사람이 기저귀를 차고 등장을 하니, 관객들은 얼마나 자지러졌겠습니까.
그 당시는 사실주의 연극들만이 무대에 올려질 때입니다. 사실주의만이 유일한 예술의 형식이라들 믿고 있을 때, 마흔 살 먹은 배우가 기저귀를 차고 무대에 나온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습니다. 또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에서는 사실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저승사자가 나와서 이제 대왕이 죽을 때가 됐다고 말해 줍니다. 그러자 대왕은 저승사자더러 "나 대신 죽겠다는 사람을 찾아서 데려오면 안 죽게 해줄 수 있느냐?" 묻죠. 저승사자의 그러겠다는 대답에 대왕은 너무 뛸 듯이 기뻐합니다. 자기가 부탁을 하면 누구든지 들어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더러 "나 대신 죽어줄 수 있느냐." 했다가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을 뿐 아니라, 누구를 붙들고 부탁해도 아무도 안 들어줍니다.
그러자 대왕은 저승사자 앞에서 죽기를 거부하는데, 그 이유인즉 대신 죽을 사람을 못 구해서 죽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리 죽음을 못 구해 안 죽겠다고 거부하는 게 얼마나 억지이고 우스운지 모릅니다. 마치 자유당 말기에서 4·19에 이르는 이기붕 부통령, 이승만은 대통령의 구린내나는 관계를 연상시키는 정치적 풍자극이죠.
저는 여기에서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이 연극이 4·19 전에 공연되었더라면 아마 핵폭탄이 터진 듯 했을 거라는 점입니다. 마치 이승만 정권을 타도하자는 외침처럼. 물론 공연 허가도 안 나왔겠지요. 이게 늘 문제가 됩니다. 광주민중항쟁 때에는 광주에 벌어진 엄청난 일을 소재로 해서 연극을 할 수 있었던가요? 불가능이죠. 지금은 어떻습니까. 망월동 묘지를 국립묘지로 승격시키겠다는 마당에 임철우의 「봄날」도 있고 황지우의 「5월의 신부」도 무대에 올려졌지만, 이제 억압의 장치가 다 풀려버린 후에야 풍자를 해봐야 크게 시효가 있을 리 없습니다. 특히 공연예술에 있어서 풍자극이란 이미 시효가 끝난 후에 공연하게 된다라는 결점이 있고, 또 하나는 그것을 보는 사람과 보지 않는 사람을 완전히 흑백논리로 편을 가르게 되요. 무대 위에 올라온 대왕을 조소하면서 까르르 웃으면서 보고 풍자를 해놓았으니까, 관객들은 너무나 그를 엉망진창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을수록 기쁘고 쾌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관객들에게 '이승만 정권은 썩은 정권이었고, 당신들은 정말 피해만 봤을 뿐이야. 당신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는 아주 무관한 피해자였을 뿐'이라는 면죄부를 주고 마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 5공, 6공치하에서 살면서 이웃들이 어려움에 살 때에 모른 체한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독재에 함께 공모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죠.
무대와 객석의 벽을 허문 이현화
다음은 이현화의 작품 세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현화는 도착(倒錯)의 세계입니다. 저로서는 「넋」 등 여러 작품이 있지만, 그의 대표작은 「카텐자」라고 봅니다. '카텐자'는 음악 용어로 '급격하게'라는 뜻입니다. 제1막의 막이 오르면 무대 위에서 성삼문을 마구 고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두로 지지는 등 세조가 친국(親鞫)을 합니다. "니 죄를 니가 알렸다!" 하고 진혹한 고문이 이어집니다.
제2막에서는 고문 기구들은 무대 위에 그대로 놓아준 채 포졸들이 관객 속으로 내려오더니 불문곡직 여자 관객 하나를 잡아갑니다. 그런 다음 성삼문을 앉혔던 그 의자에 앉혀 묶은 다음, 또 살이 타도록 지지면서 고문에 나섭니다. 트릭이기는 하지만, 인두로 지지고 까무러치면 찬물을 끼얹는 등 목불인견의 상황이 연출됩니다. 여자가 아픔의 비명을 지르는데, 주로 에로틱한 목소리를 내는 등으로 이상한 기분에 젖어들게 만듭니다. 성도착적으로 보이게 하면서 "니가 니 죄를 알렸다!" 하는 소리가 반복되는데, 나중에는 여주인공을 마땅히 구할 수 없어서 연출가의 여동생을 캐스팅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습니다.
강력한 후레쉬 불빛을 쉴 새 없이 비추는 등 온갖 고문을 해대니까 "예, 제가 단종 복위의 획책했습니다."라고 죄를 고백하면서, 극이 끝납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연극일까요. 이현화의 작품이 있기 전까지는 무대 따로 객석 따로였습니다. 객석에서는 그저 무대에서 벌어지는 극을 볼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현화는 무대와 객석을 터버렸습니다. 물론 배우를 한 명 심어 놓기는 했지만, 관객을 하나 잡아다가 데려다놓은 것 역시 배우와 관객을 터버린 것입니다. 더 놀라운 건 오백 년 전에 단종 복위를 기도하다가 참형을 당한 시대와 지금의 시대를 합쳐 버렸고, 그 사건을 동일하게 만든 것입니다. 「카텐자」를 보면서 그 연극적 방법에 대해서 얼마나 놀라운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넋」의 제1막이 열리면 바로 6·25입니다. 아주 늙은 부부가 군 사령관을 찾아가 만나게 됩니다. 부부는 자기 외아들이 결혼을 못한 채 징집을 당해서 군문에 있는데, 5대 독자인 아들에게 사흘만 외박을 시켜 주기를 부탁합니다. 느티나무 아래 있는 색시를 가리키면서, "씨를 받아야겠으니 사흘간만 허락해 달라."는 거였죠. 사령관은 마침내 허락을 하고, 두 젊은이가 여관에서 사흘을 보내는 게 제1막입니다.
제2막에서는 임진왜란으로 무대가 옮겨져 배우들이 일제히 갑옷을 입고 나옵니다. 왜군이 막 쳐들어 왔는데, 이 노부부와 며느리는 임진왜란 때 애를 배게 됩니다.
제3막은 고구려로 무대가 옮겨집니다. 이번에는 여진족이 쳐들어 옵니다. 해산할 즈음인데, 시아버지가 여진족을 막다가 자신은 죽고 며느리는 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고고성을 울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법입니다. 이렇듯 연극적 방법에 대해서 끊임없이 실험을 한 작가가 이현화입니다.
이상으로 한국의 대표적인 희곡작가 몇 사람의 세계를 함께 탐험했습니다. 작가의 세계를 깊이 이해하고 관극에 임하는 가운데, 좀더 재미있고 심도있게 연극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일회성의 관극으로 그치지 말고, 이들 희곡작가들이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 나가는지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여줄 때 한국의 희곡문학과 연극은 한 단계 힘차게 도약할 것이라 믿습니다. (출처 : http://www.kcaf.or.kr/lecture/munhak/2000/leekangbak-content.htm)
우화<fable>(寓話)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설화(說話). 그 의도하는 바는 이야기를 빌려 인간의 약점을 풍자하고 처세의 길을 암시하려는 데에 있다. 이를테면 이야기를 육체로 하고 도덕을 정신으로 하는 설화이다. 그러나 주인공이 일상 친근할 수 있는 한 마리의 새앙쥐이며 역시 한 마리의 까마귀이기 때문에 그들이 연출하는 기지와 유머에는 도덕적인 딱딱한 맛은 가셔지고 독자들을 흥미 속으로 이끌어 도의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옛날부터 동물을 이용하여 인간사회를 풍자하는 방법은 적지 않지만 그런 경우 주인공인 동물들은 인간의 능력과 줄을 긋고 절대로 자기 본래의 영역을 넘지 못하는 데 비해 우화의 주인공들은 인간의 모든 기능을 구비한 인격으로서 자유스럽게 지껄이며 행동하는 것이 상례이다. 여기에 우화의 기교상 특색이 있는 것이다. 우화 작가로서 유명한 사람은 《이솝 이야기》의 작가로 알려진 이솝인데, 그야말로 시대적으로나 또는 작품의 우수성으로나 동물우화의 제1인자이다. 물론 그의 모든 작품이 독창(獨創)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소재를 널리 그리스 이외의 곳에서까지 구한 것은 작품 속에 나타나는 동물의 종류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들 소재에 혼(魂:도덕관)을 불어넣어 훌륭한 문학작품으로 다듬어내었다. 그의 우화들은 간결하고 소박한 문체(文體) 속에서도 인간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간직하고 있으며 교묘하게 인생기미(人生機微)를 찌르면서 일상생활에 도덕적 기조(基調)를 제공하고 있다. 그의 우화는 그리스에서 유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파에도르스의 라틴어역(譯)으로 로마시대에도 읽혔고, 학교의 교과서로도 쓰였다. 근세에 와서는 많은 우화작가가 나타났지만 프랑스의 라 퐁텐을 우선 들 수 있다. 17세기에는 왕족들의 호화판 사치생활과는 딴판으로 백성은 곤궁에 빠지고, 좋은 점보다는 결점이 많았으며 사자처럼 무서운 군주(君主) 밑에 원숭이 같은 궁정관리(宮廷官吏)가 많았던, 이를테면 이런 심한 대조 속에서 화려한 인간 모습들을 전개한 시대였는데, 그런 속에서 라 퐁텐은 세련된 기지와 유머로 풍자의 붓을 날렸다. (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실어증 시대의 알레고리 언어 박홍원
사회현실에 관심, 유신시대 지식인 고뇌표출- 잔잔한 목소리 속에 강한 메시지 담아
백수인(조선대 국어교육·교수)
박홍원은 1979년 제3시집 "나무龍의 웅얼임"(시문학사)을 내놓았다. 제2시집 "옥돌호랑이"(형설출판사, 1973) 이후 6년만의 일이다. 이 시집은 6년간의 작품 31편을 1부에, 그의 기존 시집 두 권에서 각각 13편씩을 골라 2,3부에 싣고 있어 그 시점에서의 시적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제3시집에서 그의 시적 관심은 초기와는 약간 다르게 변모되고 있음이 눈에 띈다. 그것은 바로 사회 상황에 대한 관심과 문명 비판적 경향이 드러나 있는 점이다. 문학평론가 박철희는 이 시집의 시들이 "쉽게 읽히면서 뇌리에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단순한 자기 탐닉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을 지닌 세계임을 증언"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조용한 변화는 유신 시대 초기에 나온 제2시집의 '옥돌 호랑이', '양심의 근대화' 등 일련의 작품에서 조짐이 이미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는 서정적 목소리를 변성시키지는 않는 범위에서 예술성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월출산 숲속의 방울새 소리가
아직도 새벽이면 귓속에서 구르고
초여름 산의 미소가 가슴에 서려
지금도 신새벽이면 내 눈을 띄우는데,
심각한 몸짓말의 바위들도 다 두고
이목구비 다 잘리고 개울물에 씻기고
썩을 대로 썩다 남은 동백나무 등걸,
그 지지리도 못난 등걸 하나 업어 온 게
용으로 태어나서 입을 열었다.
(중략)
어떤 기대 속에 요놈을 끌어다가
용호상박 되뇌며 맞붙여 놓았다.
청룡의 분노에서
백호의 용맹에서
오랜 동안 잃었던 시인의 말 찾아질까?
한 번 맞붙여 놓아 보았다.
천동 지동 치리····조마조마하며
문 꼭꼭 닫아 걸고 맞붙여 놓았다.
그러나 세상엔 아무 일도 없었다.
천왕봉의 영물스런 돌이나 가져올 걸 ····
세상은 말이 없이 해가 뜨고 달이 떴다. 용맹의 긴 수염 거세된 호랑이
정의의 혀끝도 굳어버린 나무용.
요놈들을 아예 내 쫓아 버릴까 하는데,
문득 나무용이 웅얼이었다.
"현대의 용호는 입다문 군자야."
"현대의 군자는 이목구비가 없어야 해."
-박홍원의 '나무龍의 웅얼임' 중에서
이 시는 무생물인 '동백나무 등걸'을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로 활유화하고, 이를 다시 의인화하는 과정을 거쳐서 그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알레고리화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은 역사주의적 시각에서 문학 외적 문맥을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극에 달하던 시대라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감안하지 않고는 이 시의 진의를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방울새 소리'의 자유와 '심각한 몸짓말'을 하는 바위, 그리고 여기에 대비되는 '정의의 혀끝도 굳어버린 나무용'의 사회적 의미를 살펴야 한다. 그리고 '문 꼭꼭 닫아 걸고 맞붙여' 놓은 '용호상박'으로나마 카타르시스하려는 화자의 심경과 나무용의 발화로 드러나는 패러독스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이토록 그는 여러 가지 시적 장치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 온 '지지리도 못난' 지식인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고, 언론이 죽고 자유가 죽은 독재 시대에서의 지식인의 고뇌를 작품을 통해 토로하고 있다.
'나무용'은 유신 시대 언론의 알레고리라는 점에서 유신 초기에 쓴 '옥돌 호랑이'의 시적 발상, 시적 의도와 궤를 같이 한다. 어쩌면 옥돌호랑이의 속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옥돌 호랑이'는 박정희의 유신 헌법이 공포된 후 국민이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빼앗아 버린 시대 상황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표출한 것이다. "내 옥돌 호랑이는 아가리만 벌린 채 / 혀가 굳고 소리가 거세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 어찌된 일인가고 눈 여겨 보니 / 이 놈은 또 선택의 자유를 빼앗겼는지 / 고개가 한 쪽에 고정된 채 하품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옥돌 호랑이'와 이 작품은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하나는 무생물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시인의 시대적 고뇌를 알레고리화한 점이고, 둘은 화자의 '서재'라는 폐쇄 공간을 설정한 점이다. 그러나 시의 말미를 '옥돌호랑이'는 '연암'이라는 인유를 내세워 선비 정신에 대한 의지를 다지고 있고, '나무용의 웅얼임'은 패러독스로 마무리하고 있는 점에서 각각의 특성을 보여 준다. 시집의 표제를 "옥돌호랑이"와 "나무용의 웅얼임"으로 붙인 것은 시인 자신이 이러한 비판적 의도에 힘을 싣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시는 전반적으로 흥분하지 않는 잔잔한 목소리 속에 강하고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는 초기부터 견지해 온 개성적 특성인 서정주의를 바탕으로 한 미학적 장치의 다양화를 통해 시적 완성을 추구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극작가로 알려진 신봉승이 일찍이 문학평론 추천완료작인 '현대와 시와 인식'(현대문학, 1960.11)에서 박홍원의 시 '수난이후'를 들어 "현대를 바로 인식한 진정한 현대시의 갈길"이라고 평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시적 특성을 갈파한 것이다. (출처 : 조대문화 50년 발자취 문학 14-② 693호 98년 5월 25일)
노암촘스키의 불량국가
국가 이익이란 명분이 미국의 범죄적 행위를 덮어주고 있다고 촘스키는 보았다. 국제적 범죄에 사용되는 무기들은 ‘불량 국가들’에서 나온 것 보다 미국의 무기상들에서 나온 것들이 훨씬 더 많다. 심지어 마약과의 전쟁도 대 거래상들인 현지의 군벌이나 지주는 제외하고 생계 때문에 불가피한 힘없는 재배 농민들을 상대로 주로 전개되고 있다. 그 지역의 지배 집단들이 미국 자본가들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거대 기업의 속성은 중앙집권적 통제인데, 그 속에서 인간은 대안 없는 종속을 강요받고 거부할 권리를 실질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 자본주의가 국가 자본주의라고 지적하면서 이것을 볼쉐비즘과 비교한다. 멕시코에서 행해졌던 IMF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세계화’가 대안 없는 무자비한 과정이라고 간주하는 그는 심지어 미국에서 실제 작동되고 있는 정치적 구조도 국민들을 위험한 적 혹은 미혹에 빠진 아이들로 간주하고 있다며 분개한다.
이 책이 홉슨의 ‘제국주의론’을 연상시키는 것은 둘 다 당대의 세계 최강 국가 내부에서 제기된 반성이고 비판의 각도가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집산주의에 대해 가볍게 언급하는 점도 둘 다 유사하다. 단지 홉슨이 전문가 이상이었다는 점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를 인정해야한다는 촘스키는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상주의자이다. 국가자본이 모든 저항들을 헛된 줄 알면서하는 헛수고로 만들려하지만, 그래도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그의 모습이 인간적이다.(출처: http://203.237.96.253/index.htm) (서평자 : : 전지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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