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太陽)을 향하여 / 본문 일부 및 해설 / 차범석
by 송화은율태양(太陽)을 향하여 / 차범석
(전략)
경수는 돌처럼 앉아 있다.
경운 : 오빠 ! 너무하세요.
경수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가신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
경재 : (울음 섞인 소리로) 남이야 죽건 말건 형 혼자만 잘 살면 제일이야 ? 비겁해. (하며 벽에다 얼굴을 대고 운다.)
어머니 : 경수야! 이제 내 곁을 떠나서는 안 돼. 너마저 가버리면 우린 못 산다.
경운 : 오빠, (눈물을 삼키며) 그 동안 집에서 일어난 일 모르시니까 그러시겠지만……, (사이) 경애 언니가……죽었어요.
경수 : 뭐……, 경애가 ?
경운 : 두 주일이 지났어요……. 오빠가 집을 나가던 날…….
경수 : (속삭이듯) 그게 정말이냐 ?
경운 : 건넌방에 들어가 보세요. 참말보다 더 큰 사실이 있어요.
경수가 급히 신을 벗고 들어가려 하자, 최 노인은 막는다.
최노인 : 안 된다. 너는 내 아들도, 경애의 오래비도 아니다. 들어가서는 안 돼. 어서 나가거라.
경수 : 아버지 !
최노인 : 너는 네 하고 싶은 대로만 하라니까. 우리 집하고는 아랑곳없으니, 네 마음대로 부산이고 군산이고 어서 가. 가라니까.
어머니 : 경수야. 제발 떠나지 마라. 아버지께선 너를 미워하신 건 아니야 ! 경애가 영화 배우되는 걸 찬성은 안 했지만서도, 혹시나 하고 바랐던 부모 앞에서 저런 죽을 당한 데다가……, 또 너까지 보름 동안이나 소식이 없이(흐느낀다.)……그런데 어쩌면, 너는 아버지 생각은 안 하고서…….
경수 : 어머니 ! 저는 지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지만……, 살아 보겠다는 욕심이 있으니까 떠나는 것뿐이어요. 새 출발하기 위해서죠.
경운 : 오빠는 안 가셔도 돼요. 이 집에서도 새 출발할 수 있게 되었어요.
경수 : 뭐라고 ?
경재 : 그 편지 어디 있지요 ?
어머니 : 아까 춘자가 가지고 나갔잖아 ?
경재 : 참 그렇지. 춘자 누나가 형에게 알리겠다고…….
경수 : (의아해하며) 춘자가 어떻게 여길…….
어머니 : 말도 말아라. 너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알 만한 곳은 다 더듬어 다녔지만……, 춘자까지 나서서……. 에그……, 그걸 모르고, 너는 또 이렇게 떠나가다니 그게 될 말이냐 ? 응 ? 너도 사람의 자식이면 체면이 있어야지.
훈계도 푸념도 아닌 어머니의 말에 경수의 표정이 서글프게 풀려 간다. 춘자에 대한 애정이 다시 고개를 쳐들려는 전조이기도 하다.
경운 : 오빠 ! 이제 아시겠지요, 네 ? 오빠가 가지고 싶어하던 것을 이제 다 가지게 되었는데, 또 어딜 가시겠단 말이어요. 아버지께서는 경애 언니가 죽었을 때도 오빠 이름을 더 크게 부르셨어요. 오빠를 찾으셨어요.
어머니 : 암 그렇고, 말고!
경재 : 형! 형마저 가시게 되면, 우린 일 년 내 해도 안 비치는 이 곳에서 곰팡이처럼 살다가 죽어요.
경수는 눈물이 그칠 새 없이 흘러내리는 얼굴을 들고,여러 사람을 돌아보더니, 아버지에게 시선을 멈춘다.
경수 : (조용히) 아버지 ! 용세하세요. 저는 .......
최노인은 모든 것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을 살살 젓는다. 그 이상 말하지 말라는 표시다. 그러나 울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 : (기쁨을 못 이기며) 네가 사과하면 만사는 되는 거야.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 우리 식구가 하나 줄었지만 ....
(중략)
춘 자 : 제발 제게만은 그런 소리 말아 주세요. 제가 좀더 의지가 강했던들, 경수 씨를 이렇게 타락의 길로 몰아 넣지는 않았을 거예요. 결코 제 마음이 변한 건 아니어요. 앞으로 그 두 배, 세 배의 속죄를 하게 해 주세요. 저에게 남은 일은 그것뿐이예요. (하며 마룻바닥에 손을 짚으며 느껴 운다.)
모두들 감동되어, 아무 말이 없다.
경 운 : 오빠 ! 춘자 언니의 마음을 받아 줘야 해요. 그보다 더한 호의가 또 어디 있겠어요 ?
어머니 : 그렇고말고....... 춘자가 우리 식구가 되어 주기를 우린 진작부터 바라고 있었단다....... 네가 전쟁터에 있을 때부터 말이다. 그러니.......
경 운 : 오빠 !
경 수 : 어떻든 오늘은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까 돌아가요. 내일 만나서 자세한 얘기를 할테니까....... 응 ? 춘자.......
2. 경 재 : 그럼, 춘자 누나도 우리와 함께 있겠단 말이군요, 네 ? 햇볕이 흔한 집에서 말이어요.
경 수 : (빙그레 웃으며) 그래.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 다시 한 번 살아 보자. 경재야 !
어머니 : (좋아서) 경수야 !
최 노인 : (기쁨과 괴로움이 뒤범벅이 되어)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춘자는 어서 집에 가 봐야지. 어른들이 기다리실 텐데....... 경재야, 정류장까지 바래다 줘라.......
경 수 : 제가 가겠어요 ! (하며 나간다.)
춘 자 : 그럼, 안녕히들 계세요 !
3. 두 사람이 대문을 향해 나가자 경운, 경재도 따라 나선다. 대문 밖에서 서로 작별하는 인사 말이 드려 온다. 두 사람만 남게 되자 한층 쓸쓸해 보인다. 최 노인은 길게 한숨을 몰아쉬며 어머니와 시선을 마주친다.
어머니 : (조용히) 경애는 갔지만, 두 사람이 살아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우.
최 노인 : (눈을 감고서) 이사를 하려면 짐이많을 거야....... 오십 년간 살아 온걸 ! 거리의 소음이 멀어지고 애상적인 음악이 흘러 나온다.
-막-
작자 : 차범석(車凡錫 1924- )
형식 : 희곡. 상황극. 희비극
경향 : 사실주의적
구성 : 장막극(4막. 4단 구성)
주제 : 문명 속에서 전통적인 가정이 겪는 경제적, 정신적 갈등
출전 : <환상 여행>(1975)
내용 : 전환기를 맞이한 일가가 경제적, 심리적 고통과 파멸의 위기를 극복한다.
구성 :
발단 : 장사가 안 되어 곤경에 빠진 최 노인과 상이군인이 되어 제대한 경수
전개 : 춘자의 변심. 이웃의 빌딩으로 인해 집을 팔아야 할 처지에 놓임
절정 : 집을 팔자는 경수와 팔 수 없다는 아버지의 갈등
대단원 : 집을 팔기로 한 결심과 경수의 취직을 계기로 가족이 화합하게 됨
표현 : 심리적 갈등 중시, 일상어의 압축적 구사, 밀도 있는 심리 묘사와 치밀한 사건 전개
줄거리
종로에서 근 50년이나 재래식 혼구 대여업을 하는 최 노인 일가는 신식 혼인이 유행하게 되자 장사가 잘 안 된다. 그런데다 경애는 영화 배우가 되겠다고 말썽이고, 군대에 간 경수는 부상을 당하여 의수(義手)를 하고 돌아온다. 경애의 일과 세금 문제로 집안이 더욱 곤란해지는 가운데 경수와 약혼했던 춘자는 경수를 멀리한다. 한편 이웃에 5층 빌딩이 들어서자 최 노인네 집은 햇빛도 안 들고, 가게 문을 닫았는데도 세금은 계속 나오며, 경수는 가출하고, 경애는 결국 자살하고 만다. 파멸 직전에 이른 가계는 경운의 박봉으로 겨우 이어 간다. 그런데 가출했던 경수가 돌아와 취직을 하게 되고, 춘자도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오랫동안 집을 팔지 않겠다고 고집하던 최 노인도 집을 팔 작정을 하고 이사 갈 새 집을 보아 두었다. 마침내 파멸의 위기에 처했던 최 노인 일가에 화합의 서광이 비치게 된다.
해바라기처럼 태양을 향해 다시 한번 살아 보자 : 다시 한 번 희망을 가지고 살아 가자는 밝은 목소리를 나타낸다.
이 작품은 전환기(轉換期)를 맞이한 일가(一家)가 경제적, 심리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과 갈등으로 인해 거의 파멸 직전에 이르렀으나, 그러한 역경을 극복하여 다시 화합하고 재생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서 일종의 희비극(喜悲劇)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면에서 인물의 심리적 갈등이 날카롭게 그려져 있고, 현대적 일상어를 압축성 있게 구사하고 있어, 사실주의의 면모를 보인다. 원래 새 세대의 출발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불모지(不毛地)'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가, 새 세대의 출발을 긍정적으로 보는 '태양을 향하여'으로 개작되었다.
이 글은 희곡의 한 대목이다. 희곡은 서사와 마찬가지로 사건을 전달하지만 작자가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등장 인물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서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이다. 따라서, 작품의 수용자는 대화와 행동을 통해 표현되는 사건에 대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가면서 이해해야 한다.
이 작품은 전후 사회의 신?구 갈등을 사실주의 수법으로 표현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내었다. 인물의 심리적 갈등이 날카롭게 그려져 있고, 현대적인 일상어를 함축성 있게 구사하여 보여 주었다. 전환기를 맞이한 일가(一家)가 겪게 되는 경제적·심리적 고통과 파멸의 위기를 한국 가정, 또는 가족의 논리로 극복하는 희곡으로, 이러한 화합과 재활에 이르기까지를 치밀하게 묘사한 희비극(喜悲劇)의 하나이다.
차범석(車凡錫 ; 1924~ )
극작가, 연출가. 1955년 <조선 일보> 신춘 문예에 희곡 '밀주(密酒)'가 입선하여 문단에 나섰다. 그의 작품의 특징은 평범한 인물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차분하게 펼쳐 나간다는 점이다. 대표작으로는 '귀향' , '성난 기계' , '산불' , '장미의 성(城)' 등이 있다.
'태양을 향하여'에서의 배경의 역할
이 작품은 신구 세대의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의 심리적 양상이 작품 전개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연극에서 배우는 희곡에 나타난 인물들의 심리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따라 명연기를 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희곡에서는 대화뿐만 아니라, 배경과 상황의 설명이 정확해야 한다.
차범석(車凡錫)의 작품 세계
차범석은 리얼리즘을 기초로 하여 변천하는 현실을 작품에 그대로 반영한다는 자세로 작품 창작에 임하는 작가이다. 즉, 사회와 현실의 소리를 드라마로 재현시켜 대중들에게 들려 주는 것이 그의 기본 태도이다.
이러한 사회와 현실의 소리는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만이 아니고, 오늘에 연결된 과거의 것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포연(砲煙)이 휩쓸고 간 폐허라든가, 그 위에서의 처절한 삶의 애환과 뜨거운 인간애야말로 그의 작품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 항구나 섬사람들, 가난한 선비의 고달픈 삶으로부터, 6 25의 상흔, 문명화에 따른 인간성 상실과 소외 , 애욕(愛慾)의 갈등, 정치의 허위성과 그 비리의 고발,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 및 그에 따른 전통적인 건의 몰락 등은 이러한 주제 의식에 의한 것이다.
등장 인물과 갈등 구조
50년 동안 같은 집에서 살며 구식 혼구 대여업으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집이나 직업을 바꿀 수 없다고 고집하는 최 노인은 전통적인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이에 비해 부상당한 몸으로 제대한 장남 경수, 영화 배우 지망생인 장녀 경애, 대학에 진학하려는 차남 경재, 출판사 식자공으로 가정을 돕는 차녀 경운 등은 전후(戰後) 시대를 살아가는 새로운 인물들이다.
이들은 삶을 추구하는 방법에 있어서 과거에 집착하는 전통을 고수하려는 최 노인과는 확연히 다른 면을 보여 준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시대의 조류에 밀려 전통이 붕괴되는 것 또한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상은 “불모지(不毛地)”와 공통되는 내용이다. 작가 차범석은 “불모지”의 내용이 지나치게 암울하고 우울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극의 결말을 희망적인 메시지로 바꾸어 “태양을 향하여”로 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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