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 전문 / 현경준
by 송화은율탁류 / 현경준
너무나 오랫동안을 외계의 사물과 무리로 차단되었던 그에게 있어서 갑자기 변경된 환경의 모든 것은 어느 것이든지 경이로서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없었고 극도로 피곤된 그의 신경에 충격을 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꿈같은 한 달 동안!
그러나 사실 그는 가끔 그것이 정말 꿈이나 아닌가 하여 자기의 주위를 다시 한번 굽어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걷누를 수 없는 흥분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여기 가도 저기 가도 조금도 거짓 없는 동리 사람들의 환영과 위안은 진정으로 그를 기쁘게 하였다.
그는 저로서도 그것을 깨달을 만큼 걸을 때면 아랫다리가 허전허전하여 공중에 뜬 것 같고 어깨가 으쓱거려서 어디 가 앉아도 한시를 진정할 수가 없었다.
온세상이 마치 자기 한몸을 위하여 날이 밝고 어두워지는 것 같았다. 그 바람에 그는 사바(娑婆)에 나온 직후면 누구든지 다 그러한 것과 같이 씩씩한 기상을 보이며 그러나 어디라고 박아서 지정할 수 없는 침착성을 띠지 못한 그 얼떨결한 모양으로 한시라도 바삐 외계의 정세에 저 자신을 몰들리려고 초조하였다.
마치 이면 서투른 광부가 경쟁자를 옆에 두고 얼른 나타나지 않는 광맥을 찾으려고 애쓰듯이 그렇게 초조하였다. 만은 얼마 안 가서 그는 너무나 상상 이상으로 변하여진 정세에 말할 수 없는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동시에 이때까지의 긴장이 풀리자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하여지며 피로에 떨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매일 밥 먹을 사이도 없이 떠돌아다니던 발길을 그만 갑자기 멈추어 버리고 집에서 혼자 우두커니 걷잡을 수 없는 명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그 모양을 보고 그의 아버지는 은근히 근심스러웠다. 또 무슨 일을 저지를 생각을 하는 것 같아 인제는 좀 철이 들어서 장가갈 생각도 하고 집안일을 보살펴서 늙은 어버이를 마음놓게 할 생각도 하여 주었으면 좋으련만 꿈꾸는 듯한 눈으로 멀거니 먼산을 바라보며 그 무슨 생각엔지 잠겨 있는 아들의 그 모양은 기필코 또 딴생각을 먹는 것 같았다.
그는 기박한 제 신세에 새삼스럽게 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나 나나 하나밖에 없는 자식. 그들 늙은 부부에게는 세상없는 희망의 언덕이었고 노년에 의지할 막대였건만 자식은 부모의 그 맘을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알아주지 않으니 이것도 역시 시대의 탓이라고나 할는지?
"야 명식아."
숫돌에다가 낫을 갈고 있던 아버지는 아들의 눈치를 흘끔흘끔 엿보며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마침내 큰 결심이나 한 듯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예?"
아들은 잠에서 놀라 깬 듯 벌떡 일어나 앉으며 아버지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불러는 놓았으나 아버지는 아들의 시선과 마주치자 갑자기 무엇이라고 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 듯.
그래서 그는 얼마간 머뭇거리다가,
"이 자식아, 무얼 그리 정신빠진 놈처럼 우두커니 생각하구 있니? 나가서 시원히 바람이나 쏘이려무나."
하고 저로서도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부드럽게 말하였다.
아들은 말없이 씩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금 흰구름이 오락가락하는 먼하늘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멋쩍은 듯이 두어 번 입맛을 쩍쩍 다시고는 뜰 앞을 내다보았다.
뜰 앞 토담 밑에서는 호박잎 그늘에 싸여 거물거물 졸고 있던 닭들이 소리개가 떴는지 갑자기 목대를 빼들고 꼬꼬댁거리며 나뭇가리 밑으로 기어들어갔다.
해는 푸낫밭을 가리키며 찌는 듯이 내리쪼였다.
이윽고 어머니가 점심으로 차려 주는 깔깔한 식은 조밥을 두어 숟가락 뜨는 체하고 명식이는 앞마을 방축 둑으로 나갔다.
방축 둑에는 한가한 노인들이 모여서 알지도 못하는 세상 이야기에 꽃을 피우며 있었고 한쪽에서는 젊은 패들이 장기를 두느라고 뚝떡거리며 떠들고 있었다.
노인들은 명식이를 보자 반가이 맞으며,
"명식이냐! 어서 이리 올라오너라."
하면서 한쪽 편 거적자리를 내주었다.
"아녜요, 괜찮어요."
명식이는 맨땅에 그대로 앉으며 손등으로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씻었다.
구장은 가장 친절한 듯,
"어떠냐? 요새는 별루 신곤한 데는 없느냐?"
하고 은근하게 물었다.
"예 아무 일 없습니다."
"어쨌든 음식에 주의해라."
"고맙습니다."
"그런데 내일 저녁이 향약(鄕約) 총횐데 명식이 너두 오겠느냐?"
한 다음 구장은 명식의 눈치를 주목하였다.
그러나 명식의 표정은 의연하였다.
"어디서 합니까?"
"약장〔鄕約長〕어른 댁 마당에서 할 것 같다."
"향약장은 누굽니까?"
"향약국집 김주사 어른이다."
"김주사요?"
명식이는 고개를 약간 갸우뚱하고 생각하는 양을 하였다.
"어째 무슨 일이 있느냐?"
"아니오…… 그럼 가보지요."
하고 그는 넌지시 대답하였다.
"그럼 꼭 오너라. 와서 향약이라는 게 어떤 겐지 구경두 하구 그어간 동네 형편도 좀 알아야 한다."
하며 구장은 만족한 듯이 구레나룻을 훔쳐다렸다.
이튿날 저녁 명식이는 그다지 마음이 쏠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구장의 말과 같이 그 동안 변동된 동네 사정도 알 겸, 그리고 향약이라는 것도 어떤 것인지 알아볼 겸, 또한 하찮은 일로 하여 그들에게 주목을 받고 미움을 사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기에 그만 서슴지 않고 김유사네게로 내려갔다.
김유사네 넓은 마당에는 정각 전부터 벌써 상하촌 약원(約員)들이 가득 모여서 와글거리고 있었다.
명식이가 마당 안에 들어서자 장내의 시선은 일제히 그에게로 쏠렸다. 그것은 아무 의심도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뒤에 온 사람을 쳐다보는 시선이건만 명식이는 이상하게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서 고개를 숙이고 한편 구석에 가 조용히 앉았다.
그를 보고 아래편 구석에 앉았던 기유는 슬그머니 자리를 일어서 그의 곁에 와 빙긋이 웃으며 앉았다.
"기유냐?"
"응."
"온 지 오래냐?"
"아니, 나도 방금 왔다."
이구석 저구석에서 제각기 패를 지어 가지고 잡담들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주재소 주임과 면장 나으리가 왔다. 장내는 갑자기 물을 끼얹은 듯이 정숙하여졌다. 그 기회를 타서 약장은 엄숙한 태도로 일어나더니 '에헴' 하고 건가래를 한번 뗀 후 개회선언을 하였다. 그리고는 마루 아래를 내려다보며 눈짓하였다.
그러자 맨 앞줄에 앉았던 유덕이가 일어서더니 명식의 쪽을 돌아다보고 뜻모를 어색한 웃음을 부자연하게 싱글 웃고는 무슨 책인지 뒤적거리며 경과보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명식이는 너무나 뜻하지 아니한 일에 기유를 돌아다보니 기유는 명식의 속을 알아챈 듯 벌씬 웃었다.
"그런데 유덕이가 뭐냐?"
"간사(幹事)란다."
"간사?"
하고 반문하는 명식의 표정은 마치 그 어떤 마술에나 걸려서 얼이 빠진 것 같았다.
그 모양을 보고 기유는 목소리를 낮추어서 곁사람들 못 듣게 귓속말로 소곤거렸다.
"그뿐인 줄 아니? 그 위에 청년훈련회 간사에다가 자력갱생회 회원까지 겸해 가지구 그야말로 진실한 모범 청년이란다."
명식이는 비로소 모든 것을 알았다. 자기를 만나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만나기만 하면 슬슬 피하는 유덕의 수상스럽던 그 모양을…….
그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무 말도 못 하였다.
향약회의는 판으로 찍어 낸 듯이 풍기개량이니 숙청이니…… 자력갱생이니…… 그리고 사회봉사니 무어니 한 것을 결의한 다음…… 그도 약원 전체의 토의에서 결의된 것이 아니라 몇 사람 임원의 무조건적 찬동에 의하여 결의한 다음 자정이 가까워서야 헤어졌다.
명식이는 공연히 저로서도 알 수 없는 흥분에 씨근거리면서 집으로 올라가다가 방축 밑에서 누가 부르는 듯하여 깜짝 놀라 섰다.
"명식 씨."
"누구요?"
"저예요."
"앗."
명식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른 후 어쩔 줄을 몰랐다. 상대편도 불러는 놓았으나 머리를 숙이고 옷고름만 쥐어뜯을 뿐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명식이는 몇 번을 벼른 후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가다듬어 가지고 나직하게 그러나 힘을 주어서 불렀다.
"금옥 씨."
그 소리에 금옥이는 갸웃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았다.
명식의 가슴속은 야릇한 충동에 파문을 지으며 바르르 떨었다.
"옥중에 있을 때 보내 주신 편지는 감복게 사하두 회답을 못 해드려서."
그러나 금옥이는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더한층 머리를 숙였다.
거기에 방축 넘어서 발자취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여 둘은 얼른 버들방강 속에 몸을 감추었다. 숨소리를 죽여 가며 내다보니 어두운 밤이었지만 뚜벅뚜벅 지나가는 것은 틀림없는 유덕이었다.
금옥이는 명식의 뒤에 바싹 붙어 서서 그야말로 죽은 듯이 발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덕의 발자취 소리가 멀리 사라지자 그제야 그는 저 자신을 돌아보고 반발된 듯이 두어 걸음 물러섰다.
명식이는 멀리 사라지는 발자취 소리에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불의에 금옥의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금옥 씨 그 동안 별 탈은 있었습니까?"
"저보담두 명식 씨께서……."
하고 무엇을 말하려던 그는 갑자기 부끄럼이 솟는지 그만 말을 맺지 못하고 모로 돌아서 버렸다.
탐스러운 긴 머리채가 축 늘어진 그의 뒷모양을 바라보는 명식의 입가에는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미소가 빙긋이 떠올랐다.
둘은 가로넘어진 버드나무에 가지런히 걸어앉아 순서 없는 이야기를 평범하게 주고받으며 좀처럼 서로 털어놓지 못하는 불타는 심중의 안타까움에 조바심만 하고 있었다.
명식이는 떠듬떠듬 이야기하며 금옥의 그림자를 뇌리에 그려 보았다.
사 년이란 세월이 흘러간 그 동안에 모든 것이 일변하여 버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금옥이까지 이렇게 변할 줄은 참으로 몰랐던 것이다. 그때는 한갓 순진한 소녀에서 지나지 못하던 그가 지금은 훌륭한 여성의 지향을 품기는 한 처녀로서 명식이를 뇌쇄시킬 듯한 자태를 갖추어 가지고 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는가?
더구나 명식의 마음을 놀래어 준 것은 그 어떤 의식에 눈뜬 듯한 그의 말이었다.
"명식 씨 저의 오라버니의 행동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불의의 말에 명식이는 깜짝 놀란 듯,
"유덕이요?"
"예."
금옥이는 호기심이 가득 찬 눈으로 명식이를 똑바로 보았다.
명식이는 대답이 구구하였다.
"왜 말씀을 못 하세요? 녜? 명식 씨는 저의 오라버니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연달아 추급하는 바람에 명식이는 참말 옹색하였다. 대답하기도 괴롭고 안 하기도 괴롭고 그렇다고 속에 없는 말은 더욱 못 할 것이고…… 그는 얼른 말머리를 돌렸다.
"나보다두 유덕이에 대해서는 그의 누이동생으로서의 금옥 씨의 의견을 들려 주는 것이 어떨까요? 저는 아직 나온 지가 얼마 안 돼서 동리 정세두 잘 모르기 때문에 개인에게 관한 비평은 당분간 삼가렵니다."
"그렇지만 저의 오라버니는 과거에 명식 씨와는 가장 친한 사이였고 그리고 고생까지 같이 한 사이가 아니야요?"
"글쎄요, 과거에는 친한 사이였지만 지금은 서로 갈린 지가 오라서 말하기 어려운데요…… 더구나 유덕에게 관한 것은 오늘 저녁에야 비로소 처음 알었습니다."
금옥이는 한참 동안 어둠을 노려보며 무엇인지 생각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가 그만 결심한 듯 명식이를 쳐다보았다.
"정말 저는 오라버니 속을 모르겠어요. 지난봄에 거기서 나온 후로부터는 아주 딴사람이 돼가지고 향약이나 청년회 일만 열심히 보며 야학 같은 것은 전부 없애 버리게 한답니다. 제가 혹시 집에서 이전에 감추어 두었던 책 같은 것을 보기만 하면 죄다 빼앗어 버리고 그리구 조금만 문 밖에 나가두 눈을 밝히며 야단이랍니다."
너무도 거짓말 같은 말에 명식이는 금옥이를 도리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옥 씨 그게 정말입니까? 설마 저를 놀리려구 하는 말이야 아니겠지요."
금옥이는 한참 동안 명식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놀리려구요? 그렇다면 저인들 여북 좋겠어요?"
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한숨지었다.
명식이는 자기가 없는 그 동안에 생긴 여러 가지 이야기를 금옥이에게 낱낱이 듣고 너무나 놀라운 변동에 대하여 반신반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금옥이와 갈라진 명식이는 집에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뜻밖에도 유덕이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덕이는 명식이를 보자 약간 얼굴을 붉히며 생글하고 어설프게 웃었다. 그 모양을 보니 명식이는 몹시 불쾌하였으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대하였다.
"유덕이냐?"
"응, 어디 갔다 이렇게 늦게 오냐?"
"좀 다른 데 들러 오느라고."
둘은 으스레한 등잔불을 마주 대해 부자연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명식이는 머뭇거리는 유덕의 표정에서 그가 무엇을 말하려다가도 그만 마는 것을 엿보았지만, 그대로 시침을 뚝 따고 앉아서 애꿎은 담배만 풀석풀석 태우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방금 방축둑에서 만나고 온 금옥의 얼굴 윤곽을 눈앞에 그려 보며 그의 열정에 넘치는 말을 고요히 생각하여 보았다.
유덕이는 몇 번을 주뭇거리며 상대편의 눈치만 살피다가 마침내 무겁게 입을 떼었다.
"너는 물론 나를 의심할 거다. 다만 사실 그 동안에 이 마을은 몹시 변했다."
명식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쏘는 듯이 유덕이를 바라보았다.
"나두 처음 나왔을 때는 너무나 변해진 정세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 이틀 지나 감을 따라 곰곰이 정세를 살피며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을 이전대루 해서는 안 되겠더라."
"그래서 향약 간사가 자력갱생회원이 됐느냐?"
바늘 끝보다도 더 날카로운 명식의 말에 유덕이는 얼굴이 화끈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멈추지는 않았다.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아직 정세를 잘 모르는 소리다."
"뭐? 정세?"
"응 그렇다. 그 동안 정세는 이전과는 아주 딴판이다. 이전 우리들의 그때와 정말 소양지판이다."
"그런데 어쨌단 말이냐?"
하고 반문하는 바람에 유덕이는 말문이 막혔다.
명식이는 재차 추급하였다.
"그래 정세가 변했으니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아냐, 너더러 어쩌란 말은 아니다. 그저 내 의견을 말할 뿐이다."
하고 유덕이는 조금 창백하여진 얼굴을 반듯이 들었다.
"그럼 어디 말해 봐라."
"별루 말할 것두 없다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금 ××이라든지 ×××××라든지 하는 것을 우리는 그 ××을 아니 패권을 우리들의 손에 잡어야 한다."
순간! 명식이는 ……(원문 3행 탈락)……
"흥, 훌륭한 일꾼이군. 그래서 그 ××을 잡으려구……."
하고 그는 야학 이야기를 하려다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 달라던 금옥의 부탁하던 말이 생각나서 그만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켜 버렸다.
유덕이는 명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더 말을 못 하였다.
그가 돌아간 다음 명식이는 밤새도록 자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여러 가지 흥분에 들볶이었다.
정세가 변하였다고?
××을 잡기 위함이라고?
그는 아직도 뒤떨어져서 나오지 못하고 어두운 그 속에서 마을의 환영을 머릿속에서만 그려 보며 나올 그날을 천추같이 고대하고 있는 그 녀석들을 생각하여 보았다.
둘을 본다면 그 얼마나 놀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원문 6행 탈락)…… 생각과 같아서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엑!"
그는 부지중에 이를 악물고 공간을 노려보았다.
이튿날 아침 명식이는 해가 뜨기를 기다려서 조반도 먹지 않고 건너 마을 병민이를 찾아갔다. 마침 병민이는 조반을 막 먹고 놀러 나가려던 차에 명식이가 마당 안에 들어서는 것을 보고 마루 위에 그대로 멎어 서며 반갑게 그러나 의심스러워하는 표정으로 맞았다.
만은 마당 위 끝에서 무엇인지 손질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는 대번에 의심을 품고 수상하게 노려보다가 그만 일손을 멈추고 아들의 앞을 가로차고 나섰다.
"이 사람 자네 무슨 일루 이렇게 아침부터 찾어당기는가?"
명식이는 불의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 듯 멍하니 쳐다만 보았다.
그 모양을 보고 병민의 아버지는 목쉰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사람 어째 왔는가? 또 내 자식을 꼬여 내자는 수작인가? 자네 같은 사람은 오잖어두 일없네, 어서 가게. 고얀 사람 같으니라구."
명식이는 분하다기보다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병민이는 마루에서 너무나 지나친 아버지의 행동을 보다가는 하여 항변하였다.
"아버지 무얼 그러십니까? 괜히 일없이 놀러 온 사람을 보구."
"무얼 어째?"
하고 그의 아버지는 독이 오른 눈으로 아들을 노려보다가,
"에끼 개자식."
하며 한쪽 손에 쥐었던 장죽을 집어던졌다.
명식이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대로 돌쳐서서 오던 길을 힘없이 뚜벅뚜벅 걸었다. 그는 그대로 어디든지 쉬지 않고 끝없이 헤매어 가다가 조용한 데만 있으 ……(원문 탈락)…… 소리쳐 ……(원문 탈락)……
아니 그보다도 험한 바위 꼭대기에 올라가서 앞을 향하여 거꾸로 휭 떨어져 이내 머리를 돌 위에다가 가루가루토록 메다쳐 버리고 싶었다.
마을 사람들의 환영과 위안은 나온 며칠간뿐이었지 날이 감을 따라 그들의 태도는 점점 냉정하여 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태도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의 빛까지 나타났던 것이다.
그리고 더구나 만나기만 하면 전향을 권고하던 구장은 설교 대신 뒤에 앉으면 역선전에 혀끝이 모조리 떨어질 지경이었다.
명식이는 이전에 같이 손을 잡고 일하던 동무들이며 그리고 자기보다 먼저 나온 동무들을 차례차례 방문하여 보았다. 누구 하나 진정으로 반기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마치 가시로 찌르기나 하는 듯이 그의 얼굴만 보면 싫어하는 빛을 보였다. 심한 것은 노골적으로 미간까지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대개가 다 ××이나 ××××××나, 그리고 ×××××에 관계가 있었다. 그 덕택에 마을 어귀에는 ×××××라고 쓴 흰 말패가 버젓하게 꽂혀서 마을 색채를 표시하여 주고 있었다.
명식이는 완전히 주위와 떨어져서 고립에 들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 후부터는 볼일이 없이는 절대로 동리 출입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전날 마음이 얼마간 남아 있었던지 그렇지 않으면 명식이도 자기네의 길에다가 끌어넣으려고 하여서였던지 유덕이가 가끔 찾아오고는 하였다.
그러나 이렇다 하고 속 털어논 말은 좀처럼 서로 주고받지 못하였다. 명식이는 그가 찾아올 때마다 그의 행동이 수상스러웠고 찾아오는 그 이유가 알고 싶어서 궁금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우연한 기회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모든 정세가 변하여졌으니 정세의 추이에 순응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고?
그리고 ×××에 들고 ××××에 힘쓰라고?
그날 밤 그는 너무도 마음이 울적하여 넓은 뜰에나 나가서 거닐어 보려고 문 앞에 나서려는데 뜻하지 아니한 기유가 찾아왔다.
"기유냐?"
"응, 어디 가는 길이냐?"
"뭐 일없다. 집에 들어가 놀자."
하고 명식이는 앞을 서서 마루에 올라섰다.
둘은 마루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앉았다 하며 이말 저말 객담에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명식이는 기유의 태도에서 아무리 하여도 눈치가 다른 그 무엇을 엿보았다.
이전에는 그렇게 않던 것이 이번에 나와 보니 어쩐 일인지 자기에게 호감을 가지는 것 같고 유덕의 말만 나오면 입을 삐쭉거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만은 그는 겉으로는 아무 눈치도 보이지 않고 그저 평범하게 대하여 주었다.
기유는 그날 밤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어느 마디에 이끌려 나왔던지 또 유덕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었다.
"구장의 말을 들으니까 유덕이는 면사무소 서기루 들어간다더구나."
"정말이냐?"
"응, 어김없이 속히 들어가게 될 것 같다고 하더라."
명식이는 잠자코 누워서 하늘의 별들을 쳐다보았다.
그 이튿날 저녁 명식이는 오래간만에 마슬돌이를 갔다가 돌아와서 대문을 걷어 닫으려는데 문 뒤에서 나지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내다보니 거기에는 금옥이가 와 있었다.
"아, 금옥 씨."
하고 소리치는 것을 손으로 제지한 후 금옥이는 아무 말 없이 앞을 서서 걸어갔다. 남의 눈에 띌까 보아 길에는 들지 못하고 풀밭에 이슬을 차며 둑성이 밑까지 간 후 언제 보아 두었던지 금옥이는 꽤 넓적한 돌에 걸어앉으며 한쪽을 내주었다.
명식이는 마치 도깨비에게나 홀린 듯이 어리벙벙하여 하며 권하는 대로 그의 곁에 걸어앉았다.
그리고는 둘이 다 말없이 얼마 동안을 지났다.
그러다가 금옥이는 뜻모를 웃음을 생긋 웃고는,
"놀라셨지요?"
"무얼요?"
"너무 갑자기 이래서요."
"아니 뭐 놀랄 건 없지만, 그런데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저의 오라버니가 면서기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글쎄요, 확정한 소식은 못 들었지만 뜬소문은 들었어요. 그런데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랍니다."
"그래 그 일루 나를 보려구 하셨어요."
"아니 그 일두 있지만 그 밖에 다른 일이 있어요."
한 다음 그는 조금 생각하는 양을 보이다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야기는 동리에 관한 이야기, 노인들의 탄압에 관한 이야기, 그 밖에도 그들이 현재 체험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연달아 꼬리를 물고 벌어져 나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아직도 나오지 못한 동무들 이야기로, 그리고 유덕이며 기타 모든 변절한 동무들 이야기로 옮겨졌다.
금옥이는 자기의 친오빠였건만 유덕에게 대한 비판을 통렬하게 하였다.
명식이는 그의 열을 띤 말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곰곰이 둘을 대조하여 놓고 생각하여 보았다.
아무 의식도 없고 훈련도 교양도 받지 못한 누이동생에게 비하여 소위 과거에는 어떻다고 자타가 다 인정하던 그의 오라비는 과연 어떻다 할까.
금옥이는 처녀의 숫기는 조금도 띄우지 않고 사나이처럼 흥분되어 이야기하였다.
"우리는 지금 몇몇 동무들끼리 겨우 모여서 이전에 배운 언문이나마 복습하구 있답니다. 그렇지만 원체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구 그리구 너무두 구애가 많어서 마음대루 자주 모이지두 못합니다."
명식이는 감격에 넘쳐서 그저 금옥의 얼굴만 바라볼 뿐.
"우리는 모여만 앉으면 늘 명식 씨의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명식 씨는 아직 나오신 지가 얼마 안 돼서 몸두 피곤해하실 것 같고 그리구 아직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몰라서 망설이구 있는 중입니다. 만약 명식 씨만 괜찮으시다면 우리는 내일부터라두……."
"고맙습니다. 나는 오늘 밤에야 비로소 이전과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됐습니다."
사실 그는 끓어오르는 정열에 마음껏 뛰놀고 싶었던 것이다.
금옥이는 만족한 듯이 빙긋이 웃고는 갑자기 긴장된 표정으로 명식이를 쳐다보았다.
"그럼 내일 점심때쯤 해서 큰물둑에서 기다리세요."
"옛?"
"그러면 누가 올 겁니다."
"누굽니까?"
"그건 저두 잘 모르겠어요 하여간 내일 보시면 아실 테니까요."
하고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던져 주었다.
명식이도 그 이상은 더 추급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전기에 부딪친 것처럼 짜르르한 촉감을 여자의 손아귀에서 느꼈던 것이다.
이튿날 그는 아침부터 진정을 못 하고 점심때를 기다리기에 초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조반 후 얼마 동안을 집에서 누웠다 앉았다 뒹굴며 조바심으로 약속의 시간을 기다리다가 끝내 참지 못하여 점심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그만 냇가로 나가 보았다.
만은 누가 있을 리는 없었다.
가끔 동네 사람들이 오르내리며 지나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얼핏 보아도 전부가 다 자기의 기대에는 어그러지는 사람들뿐이었다. 그는 달아오르는 제 마음을 눅잦히려고 물둑에 앉아서 수면을 내다보았다.
쏜살같이 쪽쪽 빠져 가는 제비들이 가끔 가슴으로 물을 차고는 의젓이 공중에 떠 있는 잠자리들을 놀래 놓으면서 재주스럽게 버들가지를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장마가 지난 뒤라 검붉은 탁류가 사물을 치며 흘러내려가는 물 위에는 온갖 잡것들이 잠겼다 떴다 들볶이며 떠내려가고 있었다.
명식이는 둑에서 우두커니 내려다보다가 문득 유덕의 얼굴을 눈앞에 그려 보았다.
××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의 얼굴을 그려 보았다.
그 밖에도 여럿의 얼굴을 차례차례 그려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수면을 내려다보니 그 모든 얼굴의 환영들은 흙물 위에서 떴다 잠겼다 들볶이며 앞에로 앞에로 흘러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는 보다가 못하여 그만 벌떡 일어서며 수면을 향하여 가래침을 퇴 뱉었다. ……(원문 3행 탈락)……
그때 등뒤에서 발자취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돌아다보니 거기에는 어느 틈에 왔는지 허리춤에다 낫자루를 가로꽂은 기유가 와서 빙그레 웃고 있었다. 명식이는 깜짝 놀란 듯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기유는 그 모양에 다시 한번 씩 웃고는,
"너 예서 혼자 뭘 하니?"
하며 옆에 와서 털썩 들어앉았다.
"기유냐? 하긴 뭘 해? 그저 심심하니 바람이나 쏘이고 있지."
하고 명식이는 공연히 울렁거리는 가슴 간신히 진정시키며 태연한 듯이 말하였다.
"그런데 혼자서 무얼 가지구 중얼거리느냐?"
명식이는 무안한 듯 계집애처럼 얼굴을 붉혔다.
"아냐, 심심하니 노래를 불러 봤어."
"노래?"
하고 한참 동안 명식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기유는,
"이 녀석아, 그런 노래가 어디 있느냐? 하하…… 어디 다시 한번 불러 봐라. 좀 들어 보자꾸나."
하며 그의 어깨를 탁 쳤다.
"망할자식."
하고 기유는 어설프게 웃으며 외면하였다.
건너편 산마루에서는 소먹이 목동들의 한가스러운 육자배기가 건들건들하게 들려 왔다. 둘은 얼마 동안을 멍하니 앉아서 귀를 기울이다가 기유 편에서 먼저 수작을 걸었다.
"너 요즘 어째서 방축둑에 놀러 안 댕기느냐?"
"방축둑에?"
"이제 방축둑은 재미가 없니?"
"글쎄."
"글쎄라니? 방축둑에는 유덕이두 늘 나오더구나."
하고 기유는 그의 말을 외울 때면 노 그리하였지만 특히 오늘은 더한층 그의 이름에다가 힘을 주어서 말하였다. 그리고는 명식의 표정을 엿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명식의 표정은 움직였다.
"유덕이가 나오는데 어쨌단 말이냐?"
"어쨌다니? 같이 고생하던 동무가 아니냐?"
"동무?"
명식이는 코웃음쳤다.
기유는 웃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서 수면을 내려다보다가 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네 말마따나 정말로 미운 ××들이지."
명식이는 반발된 듯이 얼굴을 돌렸다.
기유도 돌렸다.
둘의 시선은 한곳에 서로 부딪쳤다. 말할 수 없는 긴장된 순간이었다.
"명식아!"
그러나 명식이는 대답을 못 하였다. 그저 쏘는 듯한 눈으로 상대편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명식아!"
하고 기유는 재차 불렀다.
그래도 명식이는 대답을 못 하였다.
"우리들은 결코…… 나는 벌써부터 네 맘을 알구 만나려 했지만……."
둘의 손은 어느 틈엔지 서로 단단히 잡혀졌다.
그리고는 말할 수 없는 감격에 응결된 듯한 표정으로 어느 때까지든지 입을 열지 못하고 상대편의 얼굴만 뚫어지게 마주 쳐다볼 뿐.
해는 어느덧 점심때가 넘어서 무르녹은 버들 그늘 사이로는 기울어지기 시작한 오후의 햇볕이 비스듬이 새어들고 바람도 없는데 물 위에는 버들잎 피리가 한잎 두잎 흐느적거리며 떨어져서 흘러가고 있었다.
출전:조선중앙일보(193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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