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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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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 삶으로부터의 세 이야기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전략>

석공은 손을 눈등에 대로 길손을 자세히 바라본다.

"나를 아시오?"

그는 생각하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도 알 것 같은데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구먼요."

"그럼 저 게장사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어 보시지. 전 세기 90년경에 우리가 어디 있었느냐고. 아마 그 영감님도 돌아가셨겠지만."

"벌써 돌아가셨지요. 이제 겨우 생각나는군. 크눌프가 아닌가? 앉게나. 이거 미안한데!"

크눌프는 앉았다. 빨리 언덕을 올라와서 몹시 숨이 가빴다. 이제 비로소 산밑의 거리가 아름답게 바라보였다. 푸른 강, 붉고 푸른 지붕들, 그 사이로 푸른 나무들이 작은 섬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좋은 데서 일하시는군."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말하였다.

"그렇지, 불평할 수야 없지. 그런데 자넨? 이런 산을 문제 없이 올라오곤 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그런데 자넨 지금 숨이 끊어질 것 같네그려. 자넨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길인가?"

"그러네. 샤이플레 군. 아마 이번이 마지막 같네."

"왜 그런 말을 하나?"

"폐가 아주 나빠졌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고향에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처자도 있고 집도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일세. 이런 말이야 해서 무엇하나. 자네는 벌써부터 알고 있을 것인데. 이제 와서는 별 수 없지. 대단히 나쁜가?"

"글쎄 잘 알 수는 없네. ―아니 벌써부터 알고 있지. 언덕을 내려가는 것같이 매일 조금씩 더해 간단 말이야. 그래서 혼자 있어 가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네."

"어떻게 하든 자유지만, 건 슬픈 일이야."

"그렇지도 않아.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인데. 석공은 안 그럴 줄 아나. 이 사람, 우리는 지금 이렇게 둘이 앉아 있지만, 그렇게 도도할 수는 없는 것일세. 자네는 벌써 이전에도 딴 생각을 가졌었지. 그 때 자네는 철도 자살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옛 얘기를 그만두세."

"그런데 어린이들은 잘 자라나?"

"별고 없네. 야곱이라는 녀석은 벌써 일하고 있다네."

"그래? 세월은 빨라. 자, 좀 더 걸어 볼까?"

"그렇게 바쁠 것이 없지 않나. 참 오래간만일세! 내가 뭐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말하여 주게. 지금은 뭐 가진 것이 없네만. 한 반 마르크는 갖고 있을 것일세."

"자네나 쓰게. 어쨌든 감사하네."

그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가슴이 괴로워서 입을 다물었다. 석공은 그에게 술병을 기울여 마시게 하였다. 그들은 잠시 동안 멀리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물레방아의 물줄기들이 햇빛에 빛나고, 한 대의 마차가 석교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제방 밑에는 흰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잘 쉬었으니, 이제 또 걸어 봐야지."

크눌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석공은 앉아서 생각하고 있더니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봐, 자네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안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불쌍한 사람일세, 크눌프. 알겠나, 나는 뭐 골수 신자는 아니네마는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믿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야. 자네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런 말한다고 노하지는 말게."

크눌프는 웃었다. 그의 눈은 빛났으나 옛날과 같이 악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친밀하게 치며 일어섰다.

"이제 알게 될 걸세 샤이플레. 인자하신 하느님은, 아마 너는 왜 지방 법원판사가 되지 않았지 하고 묻지는 않을 걸세. 아마 어린애 같은 녀석 또 왔구나 하고 말씀하시겠지. 그리고 아이 보는 일 같은 쉬운 일을 맡겨 주실 것일세."

안드레스 샤이플레는 푸르고 흰 무늬의 샤쓰를 입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와는 진지한 얘기가 안돼. 자네가 천국에 가면 신도 농담밖에 않으실 줄 생각하나?"

"아닐세,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진 말게!"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다. 그 때에 석공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몰래 꺼냈던 작은 은전을 그에게 주었다. 크눌프는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그대로 받았다.

크눌프는 정다운 고향의 계곡을 다시 한 번 보고 돌아서서 안드레스 샤이플레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걸음을 재촉해 어느덧 위쪽 숲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주일 후, 차가운 안개 낀 날이 며칠 지나자 날이 맑았다. 늦게 피는 글로켄꽃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 익는 검은 딸기를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런 날이 며칠 지나자, 갑자기 겨울이 닥쳐왔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사흘쯤 날이 풀리더니 곧 큰 눈이 내렸다.

크눌프는 이 동안 죽 돌아다녔다. 고향의 주변을 목적도 없이 걸어다녔고, 숲 속에 숨어서 석공 샤이플레를 가까운 곳에서 두 번이나 보았으나 그 모습을 관찰하였을 뿐이고 다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끝없고 쓸데없는 괴로운 길을 걸으며 질기고 엉킨 가시덩굴같이 복잡한 일생의 착잡한 생각에 점점 더 빠졌으나 거기선 아무 의미도 위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병이 다시금 중태에 빠졌다. 어느 날, 어쨌든 게르베르사우로 내려가서 병원 문을 두드릴까 하는 마음도 먹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혼자 있다가 산 뒤의 마을을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끔 마을에 가서 빵을 사 왔다. 그리고 산에는 고욤 열매가 많았다. 밤에는 나무꾼들의 통나무 집이나 밭에 있는 짚더미 속에서 지냈다. 지금 그는 눈이 퍼붓는 볼프스 산을 넘어 골짜기에 있는 물레방앗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쇠약하고 피로하였으나 그대로 걸어 마치 수일의 여명(餘命)을 최대한 이용하여 모든 숲과 모든 숲길을 온통 걸어다니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들고 피로하였으나 그의 눈과 코는 그대로 생생하였다. 날쌘 사냥개와 같이 잘 보고 냄새를 잘 맡아 이미 하등의 목적도 없었기에 모든 웅덩이며 미풍이며 짐승의 발자취를 찬찬히 살폈다. 그는 이미 의지를 잃고 발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일 동안 줄곧 그랬던 거와 같이 생각만으로는 지금도 다시 인자하신 신 앞에 서서 신과 함께 끝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신과 크눌프는 서로 그의 생애가 무의미하였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두가 이렇게밖에 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 때 일입니다."

하고 크눌프는 되풀이 말하였다.

"제가 열네 살 때 프란치스카한테서 버림을 당했을 때입니다. 그 때라면 저는 아직 무엇이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저는 파괴되고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죽 저는 전연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지요. 아, 뭐라고 할까요. 잘못이 있다면 당신이 저를 열네 살에서 죽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죽었다면 저의 생애는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은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때로 완전히 눈보라 속에 파묻혀 보이질 않았다.

'크눌프' 하고 신은 깨우치듯 말했다.

"그대는 젊었을 때 일을 오덴발트에서 지낸 여름과 레이시데텐에서 지낸 일을 생각해 보라! 그대는 어린 사슴같이 춤추며 아름다운 생이 전신에 약동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대는 노래도 부르고 하모니카도 잘 불어 계집애들의 눈을 황홀케 하지 않았는가? 바우에르즈빌에서 지낸 일요일 날들을 잊었는가? 그리고 그대의 최초의 애인이었던 헨리에트를 잊었는가? 그래도 모든 것이 허사였단 말인가?"

크눌프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청춘 시절의 기뻤던 여러 가지 일들이 먼 봉화를 바라보듯이 희미하고 아름답게 피어오르며 꿈과 포도주같이 강렬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며 이른 봄밤의 바람같이 훈훈하게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환희도 비애도 다 아름다웠다. 그런 나날이 하루라도 없었더라면 나의 생활은 비참하였으리라!

"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시인하면서 피로에 지친 어린애같이 반항적이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거기에 죄나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때의 저같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며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며 지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만 그쳤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 때 벌써 행복 속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저는 잘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그런 좋은 시절이 안 돌아왔습니다. 아니 절대로 없었습니다."

신은 멀리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크눌프는 좀 숨을 쉬려고 발을 멈추었다. 흰 눈 위에 피를 몇 방울 토했다. 그 때에 신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서 대답했다.

"크눌프 말해라. 그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그대가 건망증이 심한 것을 웃을 수밖에 없어. 그대가 한때 댄스홀의 왕으로 지내던 일과, 그대의 헨리에트의 일을 회상하고 나서 그 때는 아름답고 의의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헨리에트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자베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 여자에 관한 것은 일체 잊어버렸는가?"

그러자 크눌프의 눈에는 과거의 한 토막이 먼 한 줄기의 산맥같이 떠올랐다. 그것은 좀전의 추억처럼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눈물 머금고 웃는 아가씨같이 더욱 신비스럽고 친근한 빛을 띠고 있었다.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그 속에 리자베트가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팔에는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 나는 얼마나 악한 놈이었던가!"

그는 다시금 탄식하기 시작했다.

"정말 리자베트가 죽고 나서 나도 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맑은 눈으로 크눌프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만둬! 크눌프, 그대가 리자베트에게 큰 슬픔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쁜 것보다도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그대는 그녀에게 더욱 많이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그녀는 그대를 잠시도 원망한 일은 없었어. 어린애 같은 사람아, 아직도 그대는 그러한 모든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경솔한 방랑자가 된 것은 도처에서 어린애 같은 익살과 웃음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 그래서 도처에서 사랑을 좀 받고 희롱을 좀 받고 감사를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생각하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크눌프는 잠시 명상한 후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제가 아직 젊었던 옛날의 일입니다. 왜 저는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 하고, 또한 옳은 사람이 못 되었을까요? 그 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

눈이 잠시 멎었다. 크눌프는 발을 멈추고 모자와 옷에 쌓인 눈을 털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신이 산란하고 피로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신은 지금 그에게 더욱 가까이 나타났다. 그의 밝은 눈은 더욱 크게 뜨이고 태양과 같이 빛났다.

"자, 이젠 만족하라."

신은 충고하였다.

"이제 탄식한들 무엇 하리오? 모든 것이 좋았고, 올바르게 진행되어 달리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 그렇지 않으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신사가 되고 공장의 주인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 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고 싶단 말인가? 그런 신세가 되더라도 자네는 곧 달아나 숲 속에서 여우 곁에 자거나 새장을 놓거나 도마뱀을 키우는 짓을 할 것이 아닌가?"

크눌프는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피로에 지쳐 몸이 비틀거렸으나,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신의 말에 감사하며 수긍하였다.

"보라!"

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대 속에 있던 내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사랑을 받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分身)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맛보고 겪은 괴로움은 모두 나도 같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크눌프는 대답하며 머리를 정중히 숙였다.

그는 눈 속에 누워 쉬었다. 피로한 수족이 퍽 가벼워졌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눈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좀 잠들려 하였으나, 신의 음성이 그대로 들려 왔다. 그리고 신의 밝은 눈이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이젠 더 한탄할 것이 없는가?"

하고 숨은 신의 음성이 물었다.

"이젠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눌프는 수긍하며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될 대로 되었는가?"

"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수긍하였다.

신의 음성은 점점 희미해지며 때로는 어머니의 음성같이, 때로는 헨리에트의 음성같이, 때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리자베트의 음성같이 들려 왔다.

크눌프는 다시금 눈을 뜨려고 하였으나, 해가 비쳐 곧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양팔에 무겁게 쌓인 눈을 털고 싶었으나, 이제 와서 다른 어떤 의욕보다도 자고 싶은 의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요점 정리

 지은이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박덕환 옮김

 갈래 : 중편 소설. 연작 소설. 서정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2부)

 성격 : 낭만적. 신비적

 배경 : 시간 - 1910년대, 공간 - 고향 게르버자우

 경향 : 순수 문학

 표현 : 아름다운 자연과 그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크놀프의 삶을 시종 일관 산뜻한 문체로 그려 내 서정적, 낭만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문체 : 시적. 서정적

 제재 : 유랑자 크눌프의 인생

 주제 : 인간적 구속을 떠난 자유인의 삶의 의미, 또는 진실한 세계를 향한 방랑의 삶

 구성 : 복합 구성 - 피혁공 로트프스 집에서의 일화를 담은 '이른 봄'과 크눌프가 죽은 뒤 그의 인생을 친구가 회상하는 '크눌프 에 대한 회상', 크눌프 의 죽음을 다룬 '종말'의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연작 소설이다.

 

('크눌프' 3부작 중 '종말')

 

발단 - 고향을 찾아가고 있던 크놀프가 병중임을 알고 마홀트는 자기 집으로 데려온다.

전개1 - 크눌프는 마홀트에게 방랑자의 삶을 살게 된 까닭을 말해준다. 마홀트는 그를 요양소로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전개2 - 고향에 도착한 크눌프는 하인을 따돌리고 숲으로 사라진다.

전개3 - 고향을 둘러보며 크눌프는 지나온 시절을 회상하고,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결말 - 고향 주변을 배회하다가 크눌프는 하느님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며 눈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줄거리 : 첫 번째 이야기 '이른 봄'은 크눌프가 그의 옛 친구 에밀 로트프스라는 피혁공(皮革工)을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크눌프는 그 가정이 겉으로는 평화스럽고 행복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발견하고 다시 방랑(放浪)의 길에 오르게 된다.

 

두 번째 이야기 '크눌프에 대한 회상'은 크눌프가 죽은 뒤 크눌프의 방랑길의 동행이었던 친구가 그를 회상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세 번째 이야기 '종말'은 크눌프의 임종 때의 이야기로서, 신과의 대화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방랑의 삶을 살아 온 크눌프가 신에 의해 위로받으며 눈 내린 숲속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다시 말해서 라틴어 학교의 모범생이었던 크눌프는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짝사랑했던 소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정된 틀을 자유에 대한 속박으로 느끼는 그는, 구름이나 저녁 놀, 새와 나비, 별 등을 사랑하면서 자연과 친화된 삶을 살아간다. 항상 산뜻하고 예의바른 태도로 구속되지 않는 인간 관계를 꾸려 많은 친구를 얻고 가끔씩 그들을 찾아가는 진정한 시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40대의 나이에 폐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해서는 신(神)과의 대화(對話)를 통해 지난날의 생의 의미를 반추하며 눈을 감는다.

 출전 : <크눌프> (1915)



내용 연구

 

<전략>

석공은 손을 눈등에 대로 길손을 자세히 바라본다.

"나를 아시오?"

그는 생각하는 듯이 말을 이었다.

"나도 알 것 같은데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구먼요."

"그럼 저 게장사하는 할아버지에게 물어 보시지. 전 세기 90년경에 우리가 어디 있었느냐고. 아마 그 영감님도 돌아가셨겠지만."

"벌써 돌아가셨지요. 이제 겨우 생각나는군. 크눌프가 아닌가? 앉게나. 이거 미안한데!"

크눌프는 앉았다. 빨리 언덕을 올라와서 몹시 숨이 가빴다. 이제 비로소 산밑의 거리가 아름답게 바라보였다. 푸른 강, 붉고 푸른 지붕들, 그 사이로 푸른 나무들이 작은 섬같이 보이는 것이었다.

"좋은 데서 일하시는군."

그는 숨을 들이마시며 말하였다.

"그렇지, 불평할 수야 없지. 그런데 자넨? 이런 산을 문제 없이 올라오곤 하지 않았나. 안 그런가? 그런데 자넨 지금 숨이 끊어질 것 같네그려. 자넨 고향에 다시 돌아온 길인가?"

"그러네. 샤이플레 군. 아마 이번이 마지막 같네."

"왜 그런 말을 하나?"

"폐가 아주 나빠졌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겠지?"

"고향에 남아서 열심히 일을 하고 처자도 있고 집도 있었더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일세. 이런 말이야 해서 무엇하나. 자네는 벌써부터 알고 있을 것인데. 이제 와서는 별 수 없지. 대단히 나쁜가?"

"글쎄 잘 알 수는 없네. ―아니 벌써부터 알고 있지. 언덕을 내려가는 것같이 매일 조금씩 더해 간단 말이야. 그래서 혼자 있어 가지고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면 훨씬 마음이 편하다네."

"어떻게 하든 자유지만, 건 슬픈 일이야."

"그렇지도 않아. 누구나 한 번은 죽는 것인데. 석공은 안 그럴 줄 아나. 이 사람, 우리는 지금 이렇게 둘이 앉아 있지만, 그렇게 도도할 수는 없는 것일세. 자네는 벌써 이전에도 딴 생각을 가졌었지. 그 때 자네는 철도 자살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 옛 얘기를 그만두세."

"그런데 어린이들은 잘 자라나?"

"별고 없네. 야곱이라는 녀석은 벌써 일하고 있다네."

"그래? 세월은 빨라. 자, 좀 더 걸어 볼까?"

"그렇게 바쁠 것이 없지 않나. 참 오래간만일세! 내가 뭐 도움이 될 것이 있으면 말하여 주게. 지금은 뭐 가진 것이 없네만. 한 반 마르크는 갖고 있을 것일세."

"자네나 쓰게. 어쨌든 감사하네."

그는 더 말하고 싶었으나, 가슴이 괴로워서 입을 다물었다. 석공은 그에게 술병을 기울여 마시게 하였다. 그들은 잠시 동안 멀리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물레방아의 물줄기들이 햇빛에 빛나고, 한 대의 마차가 석교를 건너가는 것이 보였다. 제방 밑에는 흰 해오라기들이 한가로이 날고 있었다.

"잘 쉬었으니, 이제 또 걸어 봐야지."

크눌프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석공은 앉아서 생각하고 있더니 머리를 옆으로 흔들었다.

"이봐, 자네는 그렇게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안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크놀프가 정착된 삶을 살지 않고 방황의 일생을 보낸데 대해 그의 친구, 사이플레가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보여준다.)

그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자네도 불쌍한 사람일세, 크눌프. 알겠나, 나는 뭐 골수 신자는 아니네마는 성경에 있는 것은 그대로 믿네. 자네도 생각해 보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이 그렇게 간단히 되는 것은 아니야. 자네는 남보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그것을 발휘하지 않았단 말이야. 이런 말한다고 노하지는 말게."

크눌프는 웃었다. 그의 눈은 빛났으나 옛날과 같이 악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친구의 어깨를 툭툭 친밀하게 치며 일어섰다.

"이제 알게 될 걸세 샤이플레. 인자하신 하느님은, 아마 너는 왜 지방 법원판사가 되지 않았지 하고 묻지는 않을 걸세(세속적인 성공과 영화가 인생에서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가 아님을 크눌프는 믿고 있다.). 아마 어린애 같은 녀석 또 왔구나 하고 말씀하시겠지. 그리고 아이 보는 일 같은 쉬운 일을 맡겨 주실 것일세."

안드레스 샤이플레는 푸르고 흰 무늬의 샤쓰를 입은 어깨를 으쓱했다.

"자네와는 진지한 얘기가 안돼. 자네가 천국에 가면 신도 농담밖에 않으실 줄 생각하나?"

"아닐세, 말하자면 그럴 수도 있단 말이지, 안 그런가?"

"그렇게 말하진 말게!"

그들은 서로 악수를 나눴다. 그 때에 석공은 바지 호주머니에서 몰래 꺼냈던 작은 은전을 그에게 주었다. 크눌프는 친구의 호의를 무시하지 않으려고 그것을 그대로 받았다.

크눌프는 정다운 고향의 계곡을 다시 한 번 보고 돌아서서 안드레스 샤이플레에게 다시 한 번 머리를 끄덕였다.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걸음을 재촉해 어느덧 위쪽 숲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두 주일 후, 차가운 안개 낀 날이 며칠 지나자 날이 맑았다. 늦게 피는 글로켄꽃과 날씨가 차가워진 후에 익는 검은 딸기를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런 날이 며칠 지나자, 갑자기 겨울이 닥쳐왔다. 차가운 서리가 내리고 사흘쯤 날이 풀리더니 곧 큰 눈이 내렸다.

크눌프는 이 동안 죽 돌아다녔다. 고향의 주변을 목적도 없이 걸어다녔고, 숲 속에 숨어서 석공 샤이플레를 가까운 곳에서 두 번이나 보았으나 그 모습을 관찰하였을 뿐이고 다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에게는 너무도 생각할 것이 많았다. 끝없고 쓸데없는 괴로운 길을 걸으며 질기고 엉킨 가시덩굴같이 복잡한 일생의 착잡한 생각에 점점 더 빠졌으나 거기선 아무 의미도 위안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그 후에 병이 다시금 중태에 빠졌다. 어느 날, 어쨌든 게르베르사우로 내려가서 병원 문을 두드릴까 하는 마음도 먹었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혼자 있다가 산 뒤의 마을을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낯설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자기는 이미 이 곳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끔 마을에 가서 빵을 사 왔다. 그리고 산에는 고욤 열매(고욤 나무의 열매, 열매는 황색으로 한약재로 씀)가 많았다. 밤에는 나무꾼들의 통나무 집이나 밭에 있는 짚더미 속에서 지냈다. 지금 그는 눈이 퍼붓는 볼프스 산을 넘어 골짜기에 있는 물레방앗간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쇠약하고 피로하였으나 그대로 걸어 마치 수일의 여명(餘命)을 최대한 이용하여 모든 숲과 모든 숲길을 온통 걸어다니려고 하는 것 같았다. 병들고 피로하였으나 그의 눈과 코는 그대로 생생하였다. 날쌘 사냥개와 같이 잘 보고 냄새를 잘 맡아 이미 하등의 목적도 없었기에 모든 웅덩이며 미풍이며 짐승의 발자취를 찬찬히 살폈다. 그는 이미 의지를 잃고 발만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수일 동안 줄곧 그랬던 거와 같이 생각만으로는 지금도 다시 인자하신 신 앞에 서서 신과 함께 끝없이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신은 인간을 지배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까닭이었다. 그러나 신과 크눌프는 서로 그의 생애가 무의미하였음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면 지금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모두가 이렇게밖에 되지 않은 것은 웬일인가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그 때 일입니다."

하고 크눌프는 되풀이 말하였다.

"제가 열네 살 때 프란치스카한테서 버림을 당했을 때입니다. 그 때라면 저는 아직 무엇이든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저는 파괴되고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 후로 죽 저는 전연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지요. 아, 뭐라고 할까요. 잘못이 있다면 당신이 저를 열네 살에서 죽이지 않았다는 것뿐입니다. 죽었다면 저의 생애는 익은 사과처럼 아름답고 완전하였을 것입니다."(크눌프는 과가에 한 여인에게 슬픔을 주었다는 사실에 죄의식을 느끼고 그의 삶이 불행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신은 계속 미소를 지었다. 그의 얼굴은 때로 완전히 눈보라 속에 파묻혀 보이질 않았다.

'크눌프' 하고 신은 깨우치듯 말했다.

"그대는 젊었을 때 일을 오덴발트에서 지낸 여름과 레이시데텐에서 지낸 일을 생각해 보라! 그대는 어린 사슴같이 춤추며 아름다운 생이 전신에 약동하는 것을 느끼지 않았는가. 그대는 노래도 부르고 하모니카도 잘 불어 계집애들의 눈을 황홀케 하지 않았는가? 바우에르즈빌에서 지낸 일요일 날들을 잊었는가? 그리고 그대의 최초의 애인이었던 헨리에트를 잊었는가? 그래도 모든 것이 허사였단 말인가?"

크눌프는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청춘 시절의 기뻤던 여러 가지 일들이 먼 봉화를 바라보듯이 희미하고 아름답게 피어오르며 꿈과 포도주같이 강렬하고 달콤하게 느껴지며 이른 봄밤의 바람같이 훈훈하게 불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웠다. 환희도 비애도 다 아름다웠다. 그런 나날이 하루라도 없었더라면 나의 생활은 비참하였으리라!

"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시인하면서 피로에 지친 어린애같이 반항적이고 울고 싶은 심정으로 가득 찼다.

"그 때는 아름다웠습니다. 물론 거기에 죄나 슬픔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스러운 시절이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아마 그 때의 저같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며 매일 밤 사랑을 속삭이며 지낸 사람도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만 그쳤어야 할 것이었습니다. 그 때 벌써 행복 속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저는 잘 기억합니다. 그 이후에는 다시 그런 좋은 시절이 안 돌아왔습니다. 아니 절대로 없었습니다."

신은 멀리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크눌프는 좀 숨을 쉬려고 발을 멈추었다. 흰 눈 위에 피를 몇 방울 토했다. 그 때에 신이 홀연히 다시 나타나서 대답했다.

"크눌프 말해라. 그대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크눌프의 삶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인정과 예의 범절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의미하는 대목이다.). 나는 그대가 건망증(잘 잊어버리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성질, 또는 병적 증세.)이 심한 것을 웃을 수밖에 없어. 그대가 한때 댄스홀의 왕으로 지내던 일과, 그대의 헨리에트의 일을 회상하고 나서 그 때는 아름답고 의의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던가. 헨리에트를 그렇게 생각한다면 리자베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그 여자에 관한 것은 일체 잊어버렸는가?" 그러자 크눌프의 눈에는 과거의 한 토막이 먼 한 줄기의 산맥같이 떠올랐다(신의 말에 의해 크눌프에게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음을 의미한다. '산맥같이'라는 표현을 통해 크눌프의 과거가 평탄하지 않은 삶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좀전의 추억처럼 즐겁고 유쾌한 것은 아니었으나 눈물 머금고 웃는 아가씨같이 더욱 신비스럽고 친근한 빛을 띠고 있었다(크눌프의 인생에서 리자베트가 갖는 의미가 매우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어버렸던 시절이 떠오르면서 그 속에 리자베트가 보였다. 그의 아름다운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고 팔에는 어린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 나는 얼마나 약한 놈이었던가!(두 번째 애인이었던 리자베트와 그녀와의 사이에 생긴 아이를 돌보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하고 인간적 번민에 고뇌하는 부분이다.)" 그는 다시금 탄식하기(한탄하여 한숨을 쉬다.) 시작했다. "정말 리자베트가 죽고 나서 나도 살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 크눌프의 회한

그러나 신은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맑은 눈으로 크눌프의 마음까지 꿰뚫어 보며 말을 계속했다. "그만둬! 크눌프, 그대가 리자베트에게 큰 슬픔을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나쁜 것보다도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그대는 그녀에게 더욱 많이 주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거야(크눌프의 인생이 세속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나쁜 것은 아니었음을 신의 입을 통해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그는 무엇엔가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방랑자였지 결코 악인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를 잠시도 원망한(남이 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불평을 가지고 미워하다.) 일은 없었어. 어린애 같은 사람아, 아직도 그대는 그러한 모든 것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가. 그대가 경솔한(말이나 행동이 조심성 없이 가벼운) 방랑자가 된 것은 도처에서 어린애 같은 익살과 웃음을 가져다 주기 위하여서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가? 그래서 도처에서 사랑을 좀 받고 희롱을 좀 받고 감사를 받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생각하니 참으로 그렇습니다." - 크눌프가 살아 온 인생의 의미

크눌프는 잠시 명상한 후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제가 아직 젊었던 옛날의 일입니다. 왜 저는 그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 하고, 또한 옳은 사람이 못 되었을까요? 그 후에도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인생을 마감할 시점에 와 있는 크눌프가 자신의 삶에서 보다 깊은 의의를 찾을 수 있었더라면 하고 후회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구절이다.)." - 크눌프의 후회

눈이 잠시 멎었다. 크눌프는 발을 멈추고 모자와 옷에 쌓인 눈을 털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신이 산란하고 피로하여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신은 지금 그에게 더욱 가까이 나타났다. 그의 밝은 눈은 더욱 크게 뜨이고 태양과 같이 빛났다. "자, 이젠 만족하라."

신은 충고하였다. - 신의 충고

"이제 탄식한들 무엇하리오? 모든 것이 좋았고, 올바르게 진행되어 달리는 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대는 모르는가(크눌프의 방랑자적 삶 역시 신의 섭리에 따른 것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이다. 진지하게 산 인생은 모두 다 올바르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신사가 되고 공장의 주인이 되어 처자를 거느리고 저녁에 주간 신문을 읽는 신세가 되고 싶단 말인가(이 부분에는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누리는 삶의 방식이 열거되어 있다. 그러나 신이 방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크눌프의 삶이 안정된 틀로부터 벗어난 자유로운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구절이다.)? 그런 신세가 되고 싶단 말인가? 그런 신세가 되더라도 자네는 곧 달아나 숲 속에서 여우 곁에 자거나 세장을 놓거나 도마뱀을 키우는 짓을 할 것이 아닌가(크눌프가 방랑자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였다 해도 결국 그는 자유를 찾아 방랑했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크눌프의 운명이 자연과 하나되어 떠도는 방랑자의 삶이었음을 나타낸다.)? 크눌프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피로에 지처 몸이 비틀거렸으나, 자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었다. 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신의 말에 감사하며 수긍하였다. - 자신의 운명을 수긍하는 크눌프

"보라!"

신은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지금의 그대를 달리 만들 수 없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방랑하였고(정처 없이 떠돌아 다니는 사람. 보헤미안.) 그대는 정주하는(일정한 곳에 머물러 삶) 사람들에게 언제나 자유에로의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었다. 나의 이름으로 그대는 어리석은 일을 하여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대 속에 있던 내 자신이 웃음거리가 되고 또한 사랑을 받은 것에 불과하단 말이다.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그대가 맛보고 겪은 괴로움은 모두 나도 같이 체험하지 않은 것이 없다."(크눌프의 모든 행적이 다 신의 뜻에 포괄되는 것임을 드러낸 구절이다. 달리 말하자면, 신의 섭리는 안 미치는 데가 없어 사회적으로 이방인이었던 크눌프의 인생까지도 신의 뜻에 따른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네, 네, 그렇습니다. 저는 그것을 언제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크눌프는 대답하며 머리를 정중히 숙였다. - 신의 뜻에 따른 크눌프의 인생

그는 눈 속에 누워 쉬었다. 피로한 수족(1.손발 2.손발처럼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 여기서1의 뜻 )이 퍽 가벼워졌다(신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되찾은 크눌프가 인생에 만족하게 되자,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그의 빛나는 눈도 웃음을 띠고 있었다 . "그럼 ,이젠 더 한탄할 것이 없는가?" 하고 숨은 신의 음성이 물었다.

"이젠 아무것도 없습니다.." 크눌프는 수긍하며 부끄러운 듯이 웃었다.

"그럼, 모든 것이 좋은가? 모든 것이 될 대로 되었는가?"

"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됐습니다. 그는 이렇게 수긍하였다. -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크눌프

신의 음성은 점점 희미해지며 때로는 어머니의 음성같이, 때로는 헨리에트의 음성같이, 때로는 아름답고 부드러운 리자베트의 음성같이 들려 왔다. 크눌프는 다시금 눈을 뜨려고 하였으나, 해가 비쳐 곧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양팔에 무겁게 쌓인 눈을 털고 싶었으나,

이제 와서는 다른 어떤 의욕보다도 자고 싶은 의욕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지난 삶에 대해 만족한 후,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는 크눌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크눌프의 죽음

 

이해와 감상

  '크눌프'는 헤세의 다른 작품 "싯다르타", "페터 카멘친트", "데미안" 등의 등장 인물과 비슷하게 진실을 찾아 일생을 떠돌아다닌 한 인물의 평전이다. 크눌프의 인생은 세속적으로 매우 불쌍한 것이었지만, 그의 방랑은 거짓 세계에 대한 반란과 항거였다고 할 수 있다. 크눌프는 마지막 신과의 대화에서 '네, 모든 것이 되어야 할 대로 되었습니다.'고 하며 죽음으로써 위선과 허위에 타협하지 않고 살아 온 자신의 일생에 만족해한다. 신 또한, '그대는 나의 아들이요, 나의 동생이며 나의 분신(分身)'이라고 하여 그의 방랑의 삶이 진실을 향한 구도적 삶이었음을 인정한다. (출처 : 김열규·신동욱 공저 동아출판사 문학)

 

 

이해와 감상1

이 작품은 "이른 봄"(1980), "크눌프에 대한 회상"(1907), "종말"(1914)의 세 편을 함께 묶은 일종의 연작 소설이다. 인생의 구속에서 삶을 동경하는 독일 낭만주의의 전통 속에서 씌어진 작품으로서, 주인공 크눌프의 삶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묻고 있다. 헤세의 다른 작품들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크눌프 역시 철저히 자신의 자유를 누리고자 하는 인물이다. 애정도 우정도 가족의 인간 관계도 모두 그에게는 속박의 상징이어서 이 모든 것을 떠나 자연 속에서,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역으로 시민적인 행복이나 가족의 안온함을 포기한 데서 연유한 것이어서, 주인공이 인생을 마감할 무렵이면 쓸쓸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헤세는 신과의 합일(合一)이라는 설정을 통해 그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심화 자료

낭만주의와 동경

 낭만과 시인들은, 예술 특히 문학이 인간의 가장 심오한 체험을 표출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보고 있었는데, 이 체험이 종교적인 것이든 새로운 인생관이든 민족의 공동체 또는 과거의 힘에 대한 의지이든, 근본에 있어서는 동일하였다. 그들이 각기 다른 개성의 소유자 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공통된 생활 감정이라 할 어떠한 것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귀의 의 감정이며 그 대상은 각기 경우에 따라서 개개인, 공동체, 인생의 정신력, 우주 등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무엇인가를 향해서 귀의를 하려는 원망, 자기 자체에서탈출하여 무한한 것에 돌입하고 싶은 동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낭만주의는 무한한 것을 추구하는데서 발생하는 동경이 기조를 이루고 있다. <크눌프>도 이러한 독일 낭만주의의 경향이 잘 드러나 있다. 크눌프의 자연과의 합일을 도모하는 삶의 궤적은 바로 이런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서정 소설

 서정 소설의 개념은 역설적이다. 소설은 늘 이야기하기와 관련되어 있다. 반면에 서정시는 음악적 혹은 회화적 양식 속에서 감정이나 주체의 표현을 의미한다. 서정 소설은 이 둘의 특징을 결합해서 독자의 주의를 인간과 사건에서 형식적 디자인으로 옮겨 놓는다. 소설의 일상적 풍경은 이미저리(imagery)의 짜임이 되며 인물은 퍼스나(personae) 그 자체로 나타난다. 따라서, 서정 소설은 본질적으로 시적 양식이나 문체가 화려한 산문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이 그처럼 언어를 고양시킬 수 있고 세계와 이미저리를 연결시키는 문장들을 포함할 수 있다. 오히려 서정 소설은 소설의 틀 속에 서사의 인과적이고 시간적인 움직임을 초월하는 독특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소설을 시의 기능에 접근토록 사용하는 혼성적인 양식이다. (출처 : 프리드만, '서정 소설론'에서 )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1877. 7. 2 독일 칼프~1962. 8. 9 스위스 몬타뇰라.

 독일의 소설가·시인으로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서, 그의 주요 주제는 인간의 본질적인 정신을 찾기 위해 문명의 기존 양식들을 벗어나 인간을 다루고 있다. 자기 인식을 호소하고 동양의 신비주의를 찬양했으며, 사후에 영어권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동양에 선교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간절한 부탁으로 마울브론신학대학에 입학했다. 모범생이었지만 적응할 수 없었던 그는 칼프 탑시계 공장에서 견습공으로 있었고 후에는 튀빙겐 서점에서 일했다. 갑갑한 전통학교에 대한 그의 혐오는 지나치게 근면한 학생이 자기 파멸에 이르는 내용의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 Unterm Rad〉(1906)에 잘 나타나 있다. 1904년까지 서점 점원으로 일했고 그해 자유 기고가가 되었으며, 실패에도 불구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작가에 관한 〈페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라는 첫 소설을 발표했다. 예술가의 내면과 외면의 탐구는 〈게르트루트 Gertrud〉(1910)·〈로스할데 Rosshalde〉(1914)에서 계속되었다. 이즈음 인도를 방문했고 후에 석가모니의 초기 생애를 그린 서정 소설 〈싯다르타 Siddhartha〉(1922)에 반영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중립국 스위스에 살면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독일의 전쟁 포로들과 수용자들을 위한 잡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1919년 스위스의 영주권을 얻었고 1923년 그곳 시민이 되어 몬타뇰라에 정착했다.

 인간의 위기에 대한 심오한 감성을 지닌 작가로서, 카를 구스타프 융의 제자 J. B. 랑과 함께 정신분석을 연구했으며 융과도 알게 되었다. 분석의 영향이 〈데미안 Demian〉(1919)에 나타나는데, 이 소설은 고뇌하는 청년의 자기인식 과정을 고찰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곤경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그는 유명해졌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그가 융의 개념인 내향성과 외향성, 집단 무의식, 이상주의 및 상징 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후기 문학 활동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에 몰두했다. 〈황야의 이리 Der Steppenwolf〉(1927)에서는 중년 남자의 유산계급 수용과 정신적인 자기실현 사이의 갈등이 묘사되었다. 〈지와 사랑 Narziss und Goldmund〉(1930)에서는 기존 종교에 만족하는 지적인 금욕주의자와 자기자신의 구원 형태를 추구하는 예술적 관능주의자를 대비시켰다. 그의 최후의 최장편 소설 〈유리알 유희 Das Glasperlenspiel〉(1943)에서는 극도의 재능있는 지식인을 통해 사변적인 삶과 적극적인 삶의 이중성을 탐구했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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