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 세르반데스(Cervantes Saavedra Mig-uel de)
by 송화은율돈키호테 / 세르반데스(Cervantes Saavedra Mig-uel de)
제1장
라 만차의 이름 높은 기사, 돈키호테의 성격과 생활 방식
얼마 전, 라 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 마을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다, ― 한 점잖은 양반이 살았는데, 그는 창꽃이에다 창을 꽂아 두고, 낡은 방패와 여윈 말과 사냥개를 으레 갖추고 있는 신사 중의 하나였다. 그가 늘 먹는 음식은 양고기보다는 쇠고기가 더 많이 들어간 찜, 저녁엔 잘게 썬 고기 요리, 토요일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달걀, 금요일엔 제비콩, 일요일엔 특별요리로서 비둘기 새끼 등이었는데, 그는 이처럼 먹는 일에 수입의 4 분의 3을 소비했다. 그 나머지는 휴일에 입기 위해 좋은 감으로 만든 저고리와 벨벳 바지와 실내화, 그리고 보통 때 입는 최고급 홈스펀 옷에 들어갔다. 그의 집안에는 마흔이 좀 넘은 가정부와 스물이 채 못 된 조카딸과 그의 말에 안장을 얹기도 하고 낫을 휘두르기도 하는, 거리에서나 밭에서나 두루 쓸 수 있는 하인 하나가 있었다.
이 신사는 쉰이 가까운 사람으로 몸은 탄탄하나 훌쭉하고, 얼굴은 빼빼 말랐는데,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고 사냥을 대단히 좋아했다. 사람들 말을 들으면 그의 성씨는 '끼하다'라고 하기도 하며 '께사다'라고도 한다.(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우리 이야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우리는 단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 치라도 진실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이제 독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양반이 아무 할 일이 없을 때에는― 한해의 대부분이 할 일이 없었지만 ― 기사 수련에 관한 책을 탐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런 책을 어찌나 애독하고 즐겼는지 사냥하는 것을 잊을 정도였고 더더구나 토지를 관리하는 일까지 잊을 지경이었다. 기사담에 대한 열중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그런 책을 사기 위하여 많은 경작지를 팔아 치웠고, 구할 수 있는 한 자꾸만 집에다 책을 사들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이름 높은 펠리씨아노 데 실바의 작품들을 가장 높이 쳤다. 그의 화려한 문체와 복잡 미묘한 문장은 정말 주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대가 나의 이성을 대하는 이성 아닌 이성이 내 이성을 약하게 만들었으므로, 나는 그대의 미모를 이성으로써 원망하나이다.' 한것이라든지, '별들과 더불어 그대의 신성(神性)을 신성하게 지켜 주시는 높은 하늘은 그대의 위대성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명예를 받을 만하게 하시도다.' 하는 식으로 씌어진 애정에 대한 발언이나 결투 신청의 발언을 읽을 때에 그는 그지없이 감복하곤 했다.
이러한 문구들은 이 가련한 기사 양반의 머리를 어리벙벙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그걸 이해하고 풀어 보느라고 며칠씩이나 밤잠을 못 자기도 했다. 하기야 그걸 가르쳐 달라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을 무덤으로부터 깨워 일으켰대도, 그 역시 그걸 풀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는 기사 동 밸리아니스가 주고 받은 상처가 미심쩍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를 치료한 의사들이 아무리 재주가 있다고 하여도 그의 얼굴과 몸뚱이는 온통 상처와 흉터투성이였을 거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 끝없는 모험담의 속편을 계속하겠노란 약속과 함께 책을 끝맺음한 그 저자를 가상히 여기었고, 또한 때때로 자기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저자를 대신해서 약속된 속편을 쓸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의심 할 바 없이 그는 그 일을 해 냈을 것이고 아마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좀더 중요하고 좀더 골똘한 생각이 그를 막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는 시겐사 대학 졸업생이고 학자인 마을의 신부와 더불어 영국의 팔메린과 고올의 아마디스 그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 기사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마을 이발사인 니콜라스 씨는 세상에 태양의 기사와 견줄자는 없다고 말하고 만약 있다면 고올의 아마디스의 동생인 갈라오르 기사뿐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갈라오르는 대단히 임기 웅변을 잘 하고 용맹에 있어서도 전혀 형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또한 형처럼 으스댄다든가 괜히 눈물을 찔끔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책 속에다 몸을 푹 파묻고 밤에는 황혼 때부터 동틀 무렵까지 낮에는 동틀 무렵으로부터 어두울 때가지 책을 읽어 냈다. 그래서 잠은 부족하고 독서는 과다하여 그의 뇌는 말라 버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읽은 온갖 마술·언쟁·전투·도전·부상·구애·연애·고민, 기타 황당스런 것들로 그의 정신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읽은 황당 무게한 애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실제 세상의 역사도 그런 이야기보다 더 진실된 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중략)
그는 씨드 루이디아쓰가 대단히 훌륭한 기사임에 틀림없지만 사납고 무서운 거인 두 놈을 한 칼에 두 동강을 낸 '불타는 칼의 기사'에게는 비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헤라클레스가 거인 안타이오스를 팔로 목을 졸라 죽일 때 사용한 수법을 가지고서 론쎄스 바예스에서 마술에 걸린 롤랑을 죽인 베르나르도 델 까르삐오는 좀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인 모르간테를 아주 칭찬햇다. 모르간테는 하나같이 오만 불손한 거인 족속에 속하였지만 그 혼자만은 정중하고 예절이 밝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몬탈반의 레이날드를 제일 칭찬하였는데. 특히 그가 성으로부터 뛰쳐나가 만나는 자마다의 재물을 약탈하고 바다 건너 이교도의 나라에서 순금으로 된 마호메트의 상을 훔쳐 오는 장면을 읽었을 때 최고의 찬사를 퍼부었다. 그러나 배반자 갈라온을 한 번 발길로 냅다 차 줄 수만 있다면 그의 가정부뿐만 아니라 조카딸까지 내줘도 좋을 성싶었다.
그런데 그의 이성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그는 온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도 가져 보지 못한 기이한 공상에 빠졌다. 그는 자기의 명성을 떨치고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서 편력 기사가 되어 모험을 찾아서 말 타고 갑옷 입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그가 읽은 기사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르고 모든 잘못된 것을 고치며 온갖 위험을 당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불후의 명성과 영광을 얻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용감한 무술 솜씨 덕분에 자기는 적어도 트레비존드의 황제쯤은 떼논 당상이라 상상하고 그런 달콤한 공상에서 오는 그 기묘한 쾌감에 도취되어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서둘렀다.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수백 년 동안 까맣게 잊혀져 구석에 쳐박혀 녹이 슬고 곰팡이가 난 조상들이 쓰던 갑옷을 닦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닦고 수선을 하고 보니 커다란 결함이 한 가지 나타났다. 즉 투구는 일종의 반가리개같이 오려 가지고 이 결함을 교묘히 시정했다. 그렇게 만든 가리개를 투구에 갖다 맞추니까 완전한 투구 모양이 잡혔다. 그러나 그게 칼날의 위험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한가 보려고 그가 칼을 뽑아들고 두 번을 내려쳤더니 웬걸 일주일이나 걸려서 만든 그것이 첫 번 공격에 단박 결딴이 나는 별로 기쁨을 못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에다 쇳조각을 좀 붙여 가지고 얼굴가리개를 다시 만들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시험을 해 보고 싶지 않아서 그 물건을 아주 잘 만든 투구로 인정하고 사용키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으로 그는 자기의 말을 살피러 갔는데 그 말은 바싹 말라서 발굽은 온통 갈라지고 가죽과 뼈밖에 없었다던 고넬라의 말보다도 결점이 더 많았지만 그의 눈엔 알렉산더 대왕의
부케팔로스나 씨드의 바비에까보다도 우수한 준마로 보였다. 그는 자기 말에게 '무슨 이름을 붙일까' 하고 생각하는 데 꼬박 4일을 소비했다.
그는 자기처럼 유명한 편력 기사의 말인 동시에 또 본래 이를 데 없는 그 준마에게 유명한 이름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말이 주인이 편력 기사가 되기 전에는 어떤 말이었고 또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나타낼수 있는 이름을 찾아 내려고 애썼다. 주인이 본직을 바꿨으니 말도 그가 시작하려는 새로운 생활과 사명에 알맞은 장엄하고도 당당한 이름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공상 속에서 여러 번이나 지었다가는 삭제하고 버리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지은 끝에 드디어 그를 '로씨난떼'라 부르기도 결정하였다. 그 이름은 참말 훌륭하고 쩡쩡 울리는 것 같았고 또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기 전에 평범한 말이었을 때와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게 이처럼 흡족한 이름을 지어 주고 나서 그는 자기 이름을 짓기로 결심하고 여드레 동안이나 그걸 생각했다. 드디어 그는 자기를 '돈키호테'라 부르기도 결심했다.
그 때문에 위에서 이미 말 한 바이지만 이 정확한 실기(實記)의 장본인 본명은 분명 '끼하다'였음이 틀림없고,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께사다'는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용감한 '아다디스'가 맨숭맨숭한 자기 이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름을 더 유명하게 하느라고 자기가 출생한 지 방의 이름을 덧붙여서 '고올의 아마디스'라 자칭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도 제이름에다가 지방 덧붙여서'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 자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가문과 지방을 정확하게 알릴 뿐 아니라, 지방 이름에서 자기 성을 따왔으니 향토를 명예롭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갑옷도 말끔하게 되었고 투구도 완전하게 되었고 말의 이름도 지어졌고, 자기 명칭도 결정했으니 남은 것은 단 한가지― 열렬히 사랑을 바칠 귀부인을 하나 구하는 일 뿐이다.
귀부인이 없는 편력 기사는 잎이나 열매가 없는 나무와도 같고 영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은 것이다 그는 거듭거듭 혼자서 뇌까리기를,
"만일 내 죄값으로 또는 행운으로 편력기사들이 보통 겪는 것처럼 이 근처에서 어떠한 거인을 만나서 한 칼에 그 놈을 낙마시키다든지, 배꼽까지 두 쪽으로 갈라 놓는다든지 여하튼 그 놈에게 이겨서 항복을 받는다면 그 놈을 내 사랑스런 귀부인에게 선물로 보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한 말씨로 '귀부인이시여, 저는 말린드라니아 섬의 왕인 까라꿀리암브로이온데, 사람의 말로써는 이루 다 찬양할 수 없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 기사님에게 단 한 번 싸움에 지고 귀부인 면전에 가서 뵈오라는 분부를 받았사옵니다. 귀부인께서 이 몸을 마음에 드시는 대로 처분하소서.' 하고 말을 하게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오, 이 말을 생각해 냈을 때, 우리 기사님은 얼마나 기뻐하였던고! 게다가 그의 귀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의 무쌍한 기쁨!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경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즉 그의 이웃 마을에는 그가 한때 사랑을 품었던 매우 예쁘게 생긴 농가집 처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가 사랑한다는 걸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알돈싸 로렌쏘'였는데, 그는 이 여자를 꿈에도 잊지 못할 귀부인으로 삼는 것이 적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의 본명과는 과히 거리가 멀지 않으면서도 공주와 귀부인의 신분을 암시할 수 있는 이름을 모색한 끝에 그 여자를 '둘씨네아 델 또보소'라 부르기로 결심하였다. 본디 그 여자는 엘 또보소에서 출생하였는데 그녀 이름은 이미 결정한 자기 이름과 기타 자기 소유물에 붙인 이름들과 꼭 마찬가지로 음악적이요 이국적이요. 의미 심장한 듯이 들렸다.
제4장
돈 키호테가 이제 드디어 정식 기사가 되어 말의 배때기까지 터질 듯한 기쁨으로 싱글벙글 마음도 가볍게 매우 만족스러운 심정으로 주막을 나선 것은 이미 먼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꼭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 될 필요한 물건들 그 중에서도 노자와 속옷 등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의를 준 주막 주인의 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일단 집으로 돌아가 모든 준비를 갖추고 또 종자도 한 사람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자기 집 이웃에 사는 가난하고 자식 많은 농부가 기사의 방패를 들리기에 꼭 알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로시난떼의 머리를 고향 마을 쪽으로 돌렸다. 말은 제 집으로 가는 줄을 알게 되자. 기쁜 듯 발굽이 땅에 닿지 않을 만큼 달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를 달렸을 때 오른쪽 숲 속에서 누구인가 한탄하면서 호소하는 듯한 슬픈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 소리를 듣자 그는 입을 열었다.
"이토록 빨리 내 천직의 책무를 다하여 내가 품은 대망의 성과를 거둘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도록 해 주시다니, 고마워라, 거룩해라, 하늘이 주신 은혜여! 저 우는 소리는 분명 나의 비호와 원조를 구하는 학대받는 부녀의 목소리임에 틀림없다."
이렇게 말하고 말고삐를 돌려 울음소리가 들려 온 듯한 쪽으로 로시난떼를 몰아 나갔다. 그리고 숲 속으로 몇 걸음 들어가니 한 참나무 그루에 암말 한 필이 매여 있고, 또 한 그루의 참나무에는 열다섯 살이 겨우 될까말까한 소년이 상반신을 벗은 채 묶여 있었다. 그 소년이 울고 있었던 것이다. 몸집이 단단하게 생긴 농부가 가죽끈으로 마구 소년을 매질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한 번 때릴 때마다 잔소리와 설교를 아울러 퍼붓고 있었다.
"혀는 쉬게 하고 눈은 쳐들어!:
이렇게 농부가 소리치면 그 때마다 소년은 대답한다.
"이제 다신 안 그러겠어요, 주인님, 이젠 절대로 안 그런대두요, 앞으로는 꼭 양을 돌보겠다고 그러잖아요."
돈 키호테는 이 광경을 바라보고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여봐라, 거기 있는 무례한 무사, 스스로 몸을 지키지도 못하는 연약한 자를 못살게 굴다니, 보기 흉한 거동이라도. 말에 올라 창을 들어라! (암말이 매여 있는 참나무에 한 자루의 창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그대의 거동이 얼마나 비겁한 자에게 합당한 행동인가를 잘 가르쳐주마!"
농부는 자기에게 덮치듯 머리 위에서 창을 꼬느는, 갑주 제구도 무시무시한 그의 모습을 보고 사색이 되면서 공손한 말투로 대답했다.
"무사님, 이렇게 혼을 내주고 있는 녀석은 제가 데리고 있는 하인인데, 이 근처에서 제가 소유하고 있는 양떼의 감시를 시켜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평편없는 멍청이라 양을 매일 한 마리씩 잃어버리고 맙니다요. 그래서 제가 이 녀석의 실수를, 아니 그보다도 이 녀석의 능청스러움을 나무랐더니, 이 녀석이 한다는 소리가. 밀려 있는 급료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말하자면 제가 인색해서 그런다는 게 아니겠습니가요. 하느님이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요, 정말이지, 이 녀석은 새빨간 거짓말을 지껄이고 있는 것입니다요."
"뭐라구? 내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구나, 이 촌놈 같으니라구."
하고 돈 키호테는 말했다.
"하늘을 비추시는 태양도 굽어보신다. 나는 이 창으로 네놈을 꿰뚫어 놓을 테다. 이제 잔소리 말고 이 애에게 당장 이 자리에서 급료를 지불하라. 싫다면 우리를 다스리시는 신을 두고, 이 자리에서 네놈을 무찔러 저승으로 보내고 말테다. 당장 이 아이를 풀어 줘라!"
농부는 머리를 숙이고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소년의 결박을 풀어 주었다. 돈 키호테가 소년에게 대체 이 주인에게서 받을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자 한 달에 7레알씩 쳐서 아홉 달 분이 밀려 있다고 대답했다. 돈 키호테는 계산해 보고 63레알이 된다는 것을 알고는 만일 이런 일로 하여 목숨을 잃기가 싫거든 지금 당장 토해 내라고 농부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소심한 농부는 자기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입장으로 보나, 여태까지 자기가 행해 온 하느님에 대한 언약으로 보나 (기실 이 사나이는 여지껏 무엇 하나 맹세한 것이 없지만), '맹세코 그런 금액은 아닙니다' 하고 대답했다. 이 소년에게 준 신 세 켤레와 병을 앓았을 때 두 번 정맥에서 피를 뺀 비용 1레알을 거기서 제하고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과연 그것은 일리 있는 이야기다."
하고 돈 키호테는 말했다.
"그러나 신과 치료비는 그대가 죄 없는 이 아이에게 가한 매질과 상쇄하도록하라. 소년이 그대가 준 구두의 가죽을 찢은 대신 그대는 소년의 생살가죽을 찢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또 저애가 병이 들었을 때 이발사가 저 애에게서 피를 뽑았다고 했는데, 그대는 병도 걸리지 않은 이 아이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으니, 이렇게 따지면 저 애는 그대에게 동전 한 푼의 빚도 없는 셈이다."
(중략)
우리의 용사 돈 키호테는 이런 식으로 무도와 비리를 바로잡았던 것이다.(김현창 옮김)
제8장
용감한 돈키호테가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무시무시한 풍차와의 모험에서 거둔 성공과 그 밖의 즐거운 추억을 자아내게 하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얼마 후 두 사람은 들판에 340개의 풍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돈 키호테는 그것을 보자 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운명은 바야흐로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자, 산초여, 저쪽을 보아라. 서른 아니 그보다 훨씬 많은 흉악한 거인들이 버티고 서 있다. 나는 저놈들과 싸워 다 죽인 후에 거기서 얻은 전리품으로 일약 거부가 된단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의의 전투, 이 지구상에 널려 있는 악의 씨를 근절시키는 것만이 하느님에 대한 위대한 봉사인 것이다."
"아니, 거인들이 어디에 있어요?" 하고 산초가 물었다.
"아, 저쪽에 긴 팔을 가진 놈들 말이다. 어떤 놈들은 팔길이가 거의 20리나 뻗쳐 있구나."
"나리, 저 거인처럼 보이는 것들은 말입죠, 실상은 풍차들이에요. 그리고 저 팔처럼 보이는 것이 바람의 힘에 움직여서 맷돌을 돌게 하는 날개입죠."
"정말 너는 모험이라는 것을 도시 겪어 보지 못한 모양이로구나. 저놈들은 틀림없는 거인들이야. 겁이 나거든 여기 가만히 있거라. 여기를 물러나서 내가 저놈들하고 치열한 싸움을 하는 동안 너는 기도나 하며 엎드려 있으란 말이야."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돈 키호테는 로시난테에게 박차를 가했다. 지금 공격하려는 것은 거인들이 아니고 다만 풍차라고 악을 쓰는 산초의 말을 아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들이 거인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종자 산초의 말을 귀담아듣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까이 가서도 그것이 정말 무엇인가를 확인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는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이 비겁하고 형편없는 놈들아, 오직 기사 한 명이 너희들을 대적하려고 하니, 아예 도망갈 생각은 말아라."
이 때 마침 바람이 불어서 풍차 날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 키호테는 이것을 보자 다시 소리를 질렀다.
"네놈들이 부리아레오보다 더 많은 팔을 움직인다 할지라도 나한테 크게 경을 칠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자기가 사모하는 임 둘시네아에게 이 난관을 돌파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사 하고 두 손 모아 비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방패로 몸을 가리고 창은 가슴받이에 달린 철고리에 꽂은 채 로시난테에게 박차를 가하면서 맨 앞에 있는 풍차로 덤벼들었다. 창으로 날개를 치니 세찬 바람이 불어 와서 그것을 돌리는 통에 창은 그만 산산조각이 나 버리고 동시에 말과 기수는 몽땅 휩쓸려 하늘 위로 올라갔다가 땅으로 떨어져 들판을 떼굴떼굴 굴렀다. 산초 판사가 당나귀를 전속력으로 몰아 주인을 구하려고 달려가 보니 돈 키호테는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만큼 그는 말과 함께 호되게 얻어터진 것이었다.
"아이구, 맙소사. 그래 소인이 나리보고 좀 똑똑히 살피시고 일을 저지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머리에 풍차 날개를 달고 다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저건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는 풍차예요. 풍차."
이렇게 떠드는 산초의 말에 돈 키호테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네 이놈, 산초야! 입 좀 다물지 못할까? 다른 일과 달라서 병가(兵家)의 일은 실로 귀신도 측량키 어려울 만큼 변화무쌍한 거야. 내 짐작에는, 아니 짐작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내 방과 책들을 훔쳐 간 현자(賢者) 프레스톤이 거인들을 풍차로 둔갑시켜 내가 그놈들을 이길 영광을 빼앗아 간 거야. 그놈이 나를 원수로 여기는 품이 보통 이 정도야. 그러나 결국은 그놈의 사악한 계책도 나의 정의의 칼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말걸."
"아이구, 그저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산초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를 일으켜 등뼈가 반쯤 부러진 듯한 로시난테 위에 올려 태웠다. 그리고 이번에 겪은 모험을 이야기하면서 라피세 산길을 올라갔다.
이런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낙타를 탄 두 명의 성 베네딕트 수도사들이 나타났다. 그 낙타들은 이쪽에서 타고 가는 두 노새들과 크기가 엇비슷했다. 그들은 먼지와 햇빛을 가리는 안경을 썼고 또 양산을 받치고 있었다. 그 뒤에는 마차 한 대와 네댓 명의 말 탄 사나이들과 노새를 끌면서 걸어오는 두 명의 하인이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마차에는 세빌랴로 가는 바스크야의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녀는 고급 관리로서 인도로 부임하러 가는 남편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비록 방향은 같았지만 앞서 말한 두 명의 수도사들은 이 부인과는 같은 일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그들을 보자 산초에게 대뜸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잘못 판단하지 않았다면 이것이야말로 일찍이 보지 못한 가장 큰 모험이 될 게 분명하다. 왜냐 하면, 저기 저 시꺼멓게 생긴 자들은 저 마차에 어느 공주님을 납치해 가는 마술사들일 거야, 아마, 아니야, 틀림없이 그래. 내 있는 힘을 다하여 이 나쁜 놈들을 혼구멍을 내 주어야지."
'허, 이렇게 되면 풍차에 달려들었을 때보다 더 사정이 악화되겠는걸.' 산초는 기가 막히다는 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리, 소인의 말씀 좀 들으십시오. 저 사람들은 성 베네딕트 수도사들이고, 마차는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 것일 거예요. 무엇을 하든지 똑똑히 보고 하시라는 소인의 말씀에 좀 귀를 기울여 주십쇼. 괜히 귀신한테 홀리지 마시고……."
"산초, 아까도 네게 말했지만 너는 정말 모험의 진의를 잘 모르고 있어. 내가 말한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거야."
돈 키호테는 이렇게 대꾸하면서 앞으로 나아가 수도사들이 오고 있는 길 가운데에 말을 세웠다. 자기의 말소리가 들리겠다고 생각되는 지점까지 그들이 가까이 왔을 때 그는 이렇게 큰 소리로 외쳤다.
"악마같이 무도한 무리들아! 어서 빨리 그 마차에 강제로 뺏어가는 귀하신 공주마마들을 썩 풀어 놓지 못할까. 만약에 내 말을 안 들으면 네놈들의 나쁜 짓에 대한 정당한 벌로써 당장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
수도사들은 말고삐를 늦추었다. 돈 키호테의 말하는 품이라든지 또 그의 모습에 그저 대경실색할 따름이었다.
"기사님, 우리들은 악마도 아니고 무도한 자들도 아닙니다. 그저 길을 지나는 성 베네딕트 수도사들일 따름이옵니다. 더욱이 우리는 이 마차에 납치당한 공주님들이 타고 오는지 어떤지도 모르고 있사옵니다."
하고 수도사들은 대답하였다.
돈 키호테는 발끈 성을 내었다.
"이 앙큼한 거짓말쟁이들 같으니! 내가 네놈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런 사탕발림 수작 같은 것은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로시난테에게 박차를 가하면서 창을 아래로 겨눈 채 첫 번째 수도사에게 달려들었다. 그 기세가 어찌나 사납고 맹렬했던지 수도사가 노새에게 뛰어내리지 않았다면 아마 땅바닥에 곤두박혔을 것이고, 또 떨어져서 죽지 않았다 하더라도 최소한 크게 부상을 당했을 것이다. 다른 수도사는 동료가 그렇게 당하는 것을 보더니 자기가 타고 있는 기운 좋은 노새에다가 발길질을 하면서 들판을, 그야말로 바람보다도 더 가볍게 달아나는 것이었다.
산초 판사는 땅에 떨어진 수도사를 보자 자기 당나귀에서 잽싸게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들어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이 때 그 수도사의 두 하인이 다가와서 왜 옷을 벗기느냐고 물었다. 산초가 대답하기를, 자기 주인 돈 키호테가 이긴 싸움의 전리품으로서 이 옷은 합법적으로 자기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하인들은 희롱도 모르고 또한 전리품이니 전투니 하는 말의 의미도 이해 못 하는지라, 돈 키호테가 저쪽에서 마차에 타고 있는 여인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산초에게 달려들어 땅 위에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수염을 다 뽑고 가루가 되도록 발길질을 해서 그만 땅바닥에 까무라쳐서 뻗게 만들었다. 그리곤 재빨리, 겁에 질려 아직도 사색이 되어 덜덜 떨고 있는 수도사를 말에 태웠다. 그는 일단 말에 올라타자 저만큼 떨어져서, 이 소란이 어떻게 끝날까 관망하면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동료한테로 급히 말을 몰았다. 그들은 이미 시작된 사건의 결말을 알아볼 생각도 않고 마치 등뒤에 악마가 붙기라도 한 것처럼 골백번 성호를 그으면서 길을 재촉하여 나아갔다. 돈 키호테는 앞서 말한 것처럼 마차 안의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부인, 이제야 아름다우신 부인께서는 자유로운 몸이 되셨소이다. 저 흉악한 도둑놈들은 이 단단한 팔에 그만 사지를 뻗고 말았기 때문이외다. 부인을 구해 드린 이 사람의 이름을 알고자 하실까 보아 먼저 말씀드리오만, 저는 돈키호테 데 라 만차로서 모험을 찾아 헤매는 편력 기사이며, 일찍이 그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 아가씨를 섬기고 있는 몸이외다. 제게서 받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으려고 하신다면 다른 것은 필요없고 엘 토보소에 계신 저의 아가씨를 찾아가셔서 제 대신 인사를 드리고, 제가 부인을 구해 주었다는 말씀을 전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돈 키호테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그 때 마차를 호위하고 가던 성미가 열화 같은 바스크 태생의 종자 하나가, 마차의 앞을 막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엘 토보소로 돌아가야 된다는 수작을 듣고 그에게 다가와서 창을 힘주어 잡고는 엉터리 카스틸랴 말에다가 형편없는 바스크말을 뒤섞어서 대뜸 욕지거리를 해댔다.
"이 빌어먹을 기사놈아, 만약 앞을 비켜 주지 않으면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두고 말하지만 여기 계신 이 바스크나기가 네놈을 죽여 버리고 말 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돈 키호테는 아주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하였다.
"네놈이 기사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기사였다면 내가 미련하고 오만 불손한 네놈을 그냥 두고 보았겠느냐? 이 가련한 인생아!" <후략>(장선영 옮김)
요점 정리
작자 : 세르반데스(Cervantes Saavedra Mig-uel de) / 이상섭 옮김, 김창현 옮김, 장선영 옮김
갈래 : 장편 소설. 풍자 소설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희극적, 상징적, 풍자적
배경 : 시간(17세기). 공간(스페인)
문체 : 간결체
제재 : 돈키호테의 모험
구성 : 시간적
발단 : 돈키호테의 허세와 기사담 탐독
전개 : 전설의 기사 아마디스를 추종. 출정 준비, 라 만차의 돈키호테로 개명, 이웃집 처녀를 사랑의 대상으로 선정
절정 : 시종 산초 판자와 함께 모험의 길을 나서서 실수를 거듭함
결말 : 다시 시골의 홀아비 신세가 되어 임종
주제 : 돈키호테의 흥미진진한 모험담, 이상주의자가 존재하기 힘든 현실의 비정함 고발
특징 : 기사도를 주제로 한 풍자 문학, 인물 묘사와 사건의 역동적, 심리적 진행
표현 : 독창적이고, 기발한 사건 전개와 실감나는 장면 묘사 등으로 독자의 흥미를 돋음.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성격 대립이 분명함
의의 : 세계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의 효시(嚆矢), 기사도 소설을 풍자한 패러디
줄거리 : 라 만차에 살고 있는 늙은 향사(시골 선비나 유지)가 그 당시 유행하던 기사도 이야기를 밤새워 읽고 난 뒤, 몸소 편력의 기사가 되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사람들을 돕고자 돈키호테라고 자칭하고 여행을 떠나 곳곳에서 희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는 이야기로 되어 있다. 작자는 서문과 제2부의 마지막에서 이 소설은 <기사도 소설의 권세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썼다>고 밝히고 있는데, 확실히 돈키호테 혼자서 떠나는 첫 번째 편력을 묘사한 최초의 6장은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라는 느낌이 짙다. 그러나 근처에 사는 농부를 산초 판사로 명명하여 종자(從者)로 삼고, 이웃 시골처녀를 사모하는 여인 둘시네로 정한 다음 떠나는 두 번째 편력부터는 대조적인 성격을 지닌 주인 돈키호테와 종자 산초 판사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여 단순한 패러디 이상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며, 제2부에서는 극히 전위적인 근대소설의 모습까지 보여주게 된다. 어디까지나 자기 이상에 충실하려는 돈키호테와 오감으로 확인되는 것만 믿으려는 우직한 산초 판사는 세르반테스가 이 작품에서 창조한 두 사람의 전형적 인물로, '돈키호테'의 재미는 두 사람이 되풀이하며 벌이는 대조적인 행동의 묘미에서 비롯된 것이 많다. 그러나 작중의 두 사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성격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여행 중에 서로 영향을 받아, 돈키호테가 차츰 현실적 세계로 접근하는 반면 산초판사는 도리어 돈키호테적인 세계관을 동경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인물의 창조나 성격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에서 이 소설은 근대소설의 효시(嚆矢)로 일컬어진다.
다시 요약을 하면, 라 만차의 어느 마을에 사는 알론소 키하노라는 50세 된 노신사가, 밤낮 기사도 이야기에 몰두에 있다가 정신 이상을 일으켜 스스로 기사도 이야기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돈 키호테라고 고치고,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고, 학대받는 자들을 돕기 위해 편력의 길에 나선다.
산초 판사라는 농부를 종자로 거느린 돈 키호테는 모든 것을 기사도 이야기식으로 해석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 한다. 그러나 산초는 주인과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지만 주인에게 충실한 종자다. 이리하여 돈 키호테는 풍차를 거인으로 생각하고, 양떼를 교전 중인 군대로 생각하며, 포도주가 든 가죽 주머니를 상대로 격투를 벌인다. 그러다가 돈키호테는, 그를 고향으로 데려오려고 헌신적으로 노력하던 신부와 이발사의 계책에 의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한 달 후 돈 키호테는 다시 편력의 길에 나선다. 이 내용은 후편에 담겨 있다.
- 돈 키호테 Don Quixote -
제1부(남자 607명, 여자 52명)
한가로운 시골 귀족인 주인공은 기사 소설을 닥치는 대로 읽으면서 자신이 편력기사라는 환상을 갖게된다. 그리하여 그는 돈 키호테라는 이름과 함께 중세 무기와 복장을 하고 상상 속의 여인 둘시네아의 사랑도 얻고 기사의 숭고한 이상을 실천하기 위하여 길을 떠난다. 그는 라만차의 들판을 가로질러 어느 성에 도착하지만, 사실 그것은 주막이었고 그곳에서 그는 주인과 하녀들의 조소를 받으며 편력기사가 되는 의식을 치른다. 그는 길을 가다가 만난 상인들에게 둘시네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사실을 말하도록 강요하다가 몰매를 맞고 길가에 쓰러진다. 마침 같은 마을에 사는 농부가 그를 알아보고 집으로 데려다 둔다.
기사 소설 때문에 돈 키호테에게 광기가 생겼다고 믿은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의 서재에 있는 책들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그러나 돈 키호테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는 순진한 농부 산초 판사를 설득하여 종자로 삼고 아무도 모르게 두 번째 모험을 떠난다. 거인과 맞부닥뜨려 그와 싸움을 벌이지만 그것은 풍차였다. 몇 가지 모험 이야기를 써가다가 아이디어의 고갈로 작가는 글쓰기를 중단한다. 그러나 그는 톨레도 시장에서 아랍어로 씌어진 <라만차의 돈 키호테 이야기>를 발견하고는 그 작품을 스페인어로 번역하면서 돈 키호테의 모험 이야기를 계속한다. 양떼들을 적군이라고 착각하고 벌인 모험에서부터 둘시네아를 위하여 산속에서 고행하게 되는 모험, 포도주 부대를 거인이라고 착각하여 벌이게 되는 모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결국 고향의 신부와 이발사는 그를 유인하여 다시 고향집으로 데리고 간다.
제1장 라 만차의 이름 높은 귀족 돈 키호테의 성격과 생활방식에 대하여
제2장 현능(衒能)한 돈 키호테가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는 이야기
제3장 돈 키호테가 기사 의식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제4장 주막집을 떠난 후 우리 기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이야기
제5장 우리의 기사가 계속 재난을 겪는 이야기
제6장 신부와 이발사가 영재(英才) 돈 키호테의 서재에서 행한 멋지고 어마어마한 검열에 관한 이야기
제7장 우리의 용맹스런 기사 돈 키호테 데 라만차가 두 번째로 집을 나서는 이야기
제8장 용감한 돈 키호陋?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무시무시한 풍차와이 모험에서 거둔 성공과 그밖의 즐거운 추억을 자아내게 하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9장 사나운 바스크인과 용감한 돈 키호테와의 사이에 벌어졌던 무서운 싸움에 종말을 짓는 이야기
제10장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간에 나눈 재미난 대화에 관한 이야기
제11장 돈 키호테가 산양치기들과 어울린 이야기
제12장 양치기 중의 하나가 그의 친구들과 돈 키호테에게 한 이야기
제13장 다른 사건들과 더불어 양치기 처녀 마르셀라에 대한 일화를 끝내는 이야기
제14장 죽은 양치기가 남긴 절망 어린 유시(遺詩)와 그 외 예기치 않았던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제15장 돈 키호테가 흉악한 양구아스 말꾼들을 만나 곤경을 치르는 언짢은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16장 성이라고 단정한 주막집에서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이야기
제17장 용감한 돈 키호테가 성으로 착각한 주막집에서 종자 산초 판사와 함께 갖가지 고초를 겪는 이야기
제18장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주고받은 이야기와 그밖의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여러 가지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19장 산초가 자기 상전과 나눈 재미있는 대화와 시체의 모험, 그밖의 특기할 만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20장 이 세상의 어느 유명한 기사라 해도 겪어 보지 못했을, 라 만차의 용감한 기사 돈 키호테가 겪은 전대미문의 희한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21장 우리 무적의 기사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간과 더불어 격렬한 모험을 통하여 맘브리노 투구를 얻은 이야기
제22장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억지로 끌려가던 많은 불행한 사람들을 돈 키호테가 놓아 주는 이야기
제23장 유명한 돈 키호테가 모레나 산악 지대에서 당한, 이 책 속에서 가장 신기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24장 모레나 산악 지대에서의 계속되는 모험 이야기
제25장 모레나 산악 지대에서 라 만차의 기사가 겪은 이상한 일들과 펠테네브로스의 고행을 흉내내는 이야기
제26장 돈 키호테가 모레나 산악 지대에서 임을 그리는 표시를 행동으로 실천하느라고 여러 가지 야릇한 행동을 하는 이야기
제27장 이 위대한 책에서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과 더불어 신부와 이발사가 그 계획을 어떻게 실행하였는가에 대한 이야기
제28장 모레나 산악 지대에서 신부와 이발사가 겪은 새롭고 즐거운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29장 연심에 빠진 우리 기사님이 자진해서 실행하고 있는 지독한 고행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 취해진 재미난 속임수와 수단에 관한 이야기
제30장 여러 가지 재미나고 유쾌한 일들과, 미녀 도로테아가 재치를 보여주는 이야기
제31장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가 나눈 재미난 대화와 그밖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32장 돈 키호테 일행이 주막집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일어난 이야기
제33장 무분별한 호기심이 빚어낸 이야기
제34장 무분별한 호기심이 빚어낸 이야기의 계속
제35장 돈 키호테가 포도주가 담겨진 가죽 부대와 벌인 무지무지하게 치열한 전투와 호기심 많은 무분별한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의 결말
제36장 주막집에서 일어난 또 다른 신기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37장 이름 높은 미코미코나 공주의 이야기와 우스꽝스런 모험이 계속되는 이야기
제38장 돈 키호테가 문무론(文武論)을 주제로 행한 기묘한 연설에 관한 이야기
제39장 포로 사나이가 들려 준 자기의 생애와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제40장 계속해서 포롤 사나이의 과거지사를 듣는 이야기
제41장 포로 사나이가 계속 자기의 과거지사를 털어놓는 이야기
제42장 주막집에서 새로 일어난 사건과 그밖의 여러 가지 들어 볼 만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43장 젊은 노새꾼의 재미난 사연과 그밖의 주막집에서 일어난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
제44장 주막집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계속되는 이야기
제45장 맘브리노의 투구와 안장에 대한 의혹이 풀려짐과 동시에 기타 여러 가지 모험의 진상에 대한 이야기
제46장 순경들의 눈부신 모험과 우리 돈 키호테 기사님의 일대 무용에 관한 이야기
제47장 기이한 방법으로 마법에 걸린 돈 키호테오 기타 놀라운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48장 교구 참사원이 그의 천재성을 과시하는 여러 가지 일들과 기사도 책에 대하여 일가견을 펴는 이야기
제49장 산초 판사가 자기 주인 돈 키호테와 나눈 재미있는 대화에 관한 이야기
제50장 돈 키호테와 교구 참사원이 벌인 재치있는 논쟁과 그밖의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51장 염소치기가 돈 키호테를 데리고 가는 사람들에게 들려 준 이야기
제52장 돈 키호테와 염소치기간에 벌어진 싸움과, 자신의 땀의 댓가로 기쁜 결과를 얻어낸 고행자들과의 신기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후편
- 돈 키호테 Don Quixote -
제2부
제2부의 서문에서 그는, <돈 키호테>의 성공을 틈타서 나온 위작에서 자신을 늙고 시기심 많은 외팔이라고 비방한 데 대하여 고상한 유머로 응수한다. 같은 동네에 사는 산손 카라스코가 그이 광기를 고치기 위하여 그에게 길을 떠나도록 부추긴다. 카라스코는 기사로 위장하여 돈 키호테와 마주친다. 저자가 '술의 기사', '거울의 기사'라고 부르는 카라스코는 돈 키호테와 결투를 벌이고 일부러 패한다. 그러나 '백월의 기사'로 위장한 카라스코는 두 번째 결투에서 돈 키호테를 보기 좋게 무찌르고는 그에게 고향에 돌아가 1년 동안 편력기사의 모험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고향에 돌아온 돈 키호테는 병석에 눕게 되고, 이성을 회복한 후 기독교인으로 생을 마감한다.
제1장 신부와 이발사가 돈 키호테와 그의 병에 관하여 하는 이야기
제2장 산초 판사가 돈 키호테의 조카딸과 가정부를 상대로 한 굉장한 다툼과 그밖의 재미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3장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 그리고 학사간에 오고간 우스꽝스러운 토론에 관한 이야기
제4장 삼손 카라스코의 의문을 속 시원히 풀어 주는 산초 판사의 대답과, 그밖의 알 만하고 이야기할 만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5장 산초 판사와 그의 아내 테레사 판사간에 주고받은 재치있고 재미난 대화와 그밖의 유쾌한 추억이 될 만한 이야기
제6장 돈 키호테와 그의 조카딸과 가정부간에 벌어진 일에 관한 이야기. 이 이야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대목 중의 하나임.
제7장 여러 가지 유명한 사건들과 더불어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
제8장 돈 키호테가 자기의 사랑하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를 만나러 가는 도중에서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
제9장 둘시네아를 마술에 걸려고 짜낸 판사의 계교와 그밖의 진짜이면서도 아주 우스꽝스런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10장 용감한 돈 키호테가 죽음의 회합(會合)의 수레, 또는 마차와 만나 벌이는 기이한 모혐에 관한 이야기
제11장 용감한 돈 키호테와 용맹스러운 숲의 기사 사이에 일어난 기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12장 두 종가가 나눈 똑똑하고 신기하고 부드러운 대화와 더불어 숲의 기사의 모험을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
제13장 숲의 기사의 모험이 계속되는 이야기
제14장 거울의 기사와 그의 종자의 정체에 관한 이야기
제15장 돈 키호테와 라 만차의 어느 점잖은 신사와의 사이에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
제16장 돈 키호테의 전대미문의 용기가 최고 절정에 도달하는 이야기와 더불어 행복하게 끝난 사자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17장 녹색 외투 기사의 성, 즉 그의 집에서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일과 그밖의 기이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18장 사랑에 빠진 양치기의 모험과 그밖의 진짜로 재미나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19장 부자 카마초의 결혼식과 더불어 가난한 바실리오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20장 카마초의 결혾식과 그밖의 여러 가지 즐거운 사건들에 대하여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
제21장 라 만차의 중심에 있는 몬테시노스 동굴에서의 위대한 모험이 용감무쌍한 돈 키호테 라 만차에게 지고의 영광을 가져다 준 이야기
제22장 용감무쌍한 돈 키호테가 몬테시노스의 깊은 동굴에서 보았다는 놀라운 사실들이 곧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서 돈 키호테가 한 모험이 가짜라고 할 정도의 이야기
제23장 이 위대한 실록의 진정한 이해를 위하여 필요한 천만 가지 시시한 잡동사니 이야기
제24장 당나귀의 모험과 꼭두각시 놀이꾼으 익살과 그밖의 점치는 원숭이의 알아줄 만한 일에 대한 이야기
제25장 꼭두각시 놀이꾼의 재미나는 모험과 그밖의 진짜로 재미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26장 페드로 선생과 원숭이의 정체가 무엇이며, 아울러 돈 키호테가 당나귀 울음 모험에서 자기가 바라고 생각한 대로 일이 안 됨으로써 실패한 이야기
제27장 독자가 주의 깊이 읽으면 알 수 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28장 마술에 걸린 나룻배에서의 유명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29장 돈 키호테와 아름다운 여자 사냥꾼 사이에 일어난 이야기
제30장 여러 가지 대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31장 돈 키호테가 그의 비난자에게 한 반박과 그밖의 심각하면서도 재미나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32장 공작 부인과 시녀들과 산초 판사 사이에 벌어진 재미있는 대화에 관한 이야기
제33장 이 책에서 가장 유명한 모험 중의 하나로서 그 짝을 찾아볼 수 없는 둘시네아 델 토보소가 마법에서 풀려났다는 소식을 듣는 이야기
제34장 여러 가지 경탄할 만한 사건과 더불어 둘시네아의 마법을 풀어주는 방법에 관해 돈 키호테가 받은 소식이 계속되는 이야기
제35장 산초 판사가 아내 테레사 판사에게 보낸 편지와 더불어 트리팔디 백작 부인, 일명 고난의 시녀의 불가사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36장 고난의 시녀가 겪는 훌륭한 모험에 대하여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
제37장 고난의 시녀가 자기의 불행을 한탄하는 이야기
제38장 트리팔디 백작 부인이 그녀의 엄청나고 기억할 만한 과거지사를 계속해서 털어놓는 이야기
제39장 이 모험과 이 기억할 만한 실록에 관련되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40장 클라빌레뇨의 도착과 함께 이 긴 모험이 끝장나는 이야기
제41장 산초가 섬의 총독으로 부임하기 전에 돈 키호테가 그에게 해준 충고와 그밖을 중요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42장 돈 키호테가 산초 판사에게 계속해서 하는 충고에 대한 이야기
제43장 산초 판사가 총독의 임지로 간 이야기와 또한 성안에서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기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44장 위대한 산초 판사가 어떻게 섬에 부임했으며, 또 어떻게 정사를 펴기 시작했느냐에 대한 이야기
제45장 상사병에 걸린 알티시도라가 구애를 하는 동안 돈 키호테가 방울과 고양이들에게 무섭게 놀란 이야기
제46장 총독 직무에 있어서 산초 판사가 취한 행동에 대하여 계속해서 하는 이야기
제47장 돈 키호테와 공작 부인의 시녀인 도냐 로드리게스에게 일어난 일과 그밖의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기억할 만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48장 산초 판사가 섬을 순시할 때 생긴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49장 시녀를 때리고 돈 키호테를 꼬집고 할퀸 마법사 형리들이 누구였는가를 밝히고, 동시에 산초 판사의 처 테레서 판사에게 편지를 갖고 간 시동이 겪는 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50장 산초 판사의 총독 정치의 계속과 그밖의 재미난 여러 가지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51장 고난의 시녀, 일명 로드리게스의 제2의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52장 산초 판사의 총독 노릇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
제53장 다만 이 실록에만 관계 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54장 도중에서 산초에게 일어난 일과 더없이 재미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55장 시녀 로드리게스의 딸의 명예를 위해 돈 키호테 데 라 만차가 하인 토실로스와 벌인 전대미문의 대결투에 관한 이야기
제56장 돈 키호테가 공작과 작별하는 장면과 부인의 시녀인 영리한 알티시도라와의 사이에 일어난 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57장 돈 키호테에게 정신없이 밀어닥친 수많은 모험들에 관한 이야기
제58장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모험이라고 할만한 기상천외의 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59장 돈 키호테가 바르셀로나에 가는 도중에 일어난 이야기
제60장 돈 키호테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을 때 일어난 일과 그밖의 재치보다 진실성이 더 깃들어 있는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61장 마법의 머리에 얽힌 모험과 그밖의 빼놓을 수 없는 유치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
제62장 갈레라선을 방문했을 때 산초 판사가 당한 재난과 아름다운 모로 소년의 기이한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63장 이때까지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모험 중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준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64장 백월 기사의 정체가 밝혀지고, 아울러 돈 그레고리오의 구출과 그밖의 여러 가지 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65장 독자는 읽고 청자(聽者)는 들어야 할 사실에 관한 이야기
제66장 약속한 일년이 지나는 동안 목가적인 전원 생활을 하겠다는 돈 키호테의 결심과 그밖의 진짜로 재미나고 유익한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67장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소름끼치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
제68장 이 실록 전과정에 있어서 돈 키호테에게 일어난 가장 희귀하고 기이한 사건에 관한 이야기
제69장 제68장에 이어 이 실록의 확실성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제70장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 판사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일어난 일에 관한 이야기
제71장 돈 키호테와 산초가 그들의 마을에 도착하는 이야기
제72장 돈 키호테가 마을에 들어설 때 일어난 징조들과 그밖의 이 위대한 실록을 장식하고 확증하는 사건들에 관한 이야기
제73장 돈 키호테가 병이 들어 유서를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이야기
<교과서 수록 부분은 돈 키호테가 현실주의자 산초 판사를 종으로 삼은 후 길을 떠나 풍차와 싸움을 벌이는 유명한 장면이다.>
인물 :
돈 키호테 : 이 소설의 주인공. 라 만차 지방의 귀족. 기사도 소설을 탐독한 뒤 스스로 기사라 일컬으며 무술 편력의 길에 나선다.
산초 : 돈 키호테와 같은 마을에 사는 고지식한 농부로서 돈 키호테가 섬의 영주를 시켜 준다는 말에 돈 키호테의 충직한 종자가 된다.
둘시네아 : 델 토보소 마을에 사는 농부의 딸. 돈키호테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애인.
페로 페레스 신부 : 돈 키호테의 친구로서 돈 키호테를 정신 이상에서 구하려고 애쓴다.
니콜라스 : 라 만차 마을의 이발사. 역시 돈 키호테의 친구.
카르데니오 : 안달루시아의 젊은 기사. 주인이자 친구였던 돈 페르난도의 배신으로 약혼자를 잃고 미쳐 버린다.
루스신다 : 카르데니오의 약혼녀.
돈 페르난도 : 안달루시아의 리카르도 공작의 아들. 방탕아로 많은 여자를 울린다.
도로테아 : 돈 페르난도에게 버림받았던 여자. 신부와 이발사를 도와 돈키호테를 구하는 재치 있는 여자.
내용 연구
제1장
라 만차의 이름 높은 기사, 돈키호테의 성격과 생활 방식
얼마 전, 라 만차 지방의 어느 마을에 ― 마을 이름은 말하고 싶지 않다, ― 한 점잖은 양반이 살았는데, 그는 창꽃이에다 창을 꽂아 두고, 낡은 방패와 여윈 말과 사냥개를 으레 갖추고 있는 신사 중의 하나였다. 그가 늘 먹는 음식은 양고기보다는 쇠고기가 더 많이 들어간 찜, 저녁엔 잘게 썬 고기 요리, 토요일엔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와 달걀, 금요일엔 제비콩, 일요일엔 특별요리로서 비둘기 새끼 등이었는데, 그는 이처럼 먹는 일에 수입의 4 분의 3을 소비했다. 그 나머지는 휴일에 입기 위해 좋은 감으로 만든 저고리와 벨벳 바지와 실내화, 그리고 보통 때 입는 최고급 홈스펀 옷에 들어갔다. 그의 집안에는 마흔이 좀 넘은 가정부와 스물이 채 못 된 조카딸과 그의 말에 안장을 얹기도 하고 낫을 휘두르기도 하는, 거리에서나 밭에서나 두루 쓸 수 있는 하인 하나가 있었다.
이 신사는 쉰이 가까운 사람으로 몸은 탄탄하나 훌쭉하고, 얼굴은 빼빼 말랐는데, 아침에 일찌감치 일어나고 사냥을 대단히 좋아했다. 사람들 말을 들으면 그의 성씨는 '끼하다'라고 하기도 하며 '께사다'라고도 한다.(이 점에 대해서는 저자들 사이에 약간의 의견 대립이 있다).
그러나 그런 건 우리 이야기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우리는 단지 이야기를 하면서 한 치라도 진실에서 벗어나지만 않으면 된다.
이제 독자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이 양반이 아무 할 일이 없을 때에는 한해의 대부분이 할 일이 없었지만(돈키호테에 대한 서술자의 냉소적인 태도를 드러낸다.)기사 수련에 관한 책을 탐독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그런 책을 어찌나 애독하고 즐겼는지 사냥하는 것을 잊을 정도였고 더더구나 토지를 관리하는 일까지 잊을 지경이었다. 기사담에 대한 열중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는 그런 책을 사기 위하여 많은 경작지를 팔아 치웠고, 구할 수 있는 한 자꾸만 집에다 책을 사들었다. 그는 그 중에서도 이름 높은 펠리시아노 데 실바(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기사도 소설 작가)의 작품들을 가장 높이 쳤다. 그의 화려한 문체와 복잡 미묘한 문장은 정말 주옥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대가 나의 이성을 대하는 이성 아닌 이성이 내 이성을 약하게 만들었으므로, 나는 그대의 미모를 이성으로써 원망하나이다.' 한것이라든지, '별들과 더불어 그대의 신성(神性)을 신성하게 지켜 주시는 높은 하늘은 그대의 위대성이 마땅히 받아야 할 명예를 받을 만하게 하시도다.' 하는 식으로 씌어진 애정에 대한 발언이나 결투 신청의 발언을 읽을 때에 그는 그지없이 감복하곤 했다.
이러한 문구들은 이 가련한 기사 양반의 머리를 어리벙벙하게 했다. 그래서 그는 그걸 이해하고 풀어 보느라고 며칠씩이나 밤잠을 못 자기도 했다. 하기야 그걸 가르쳐 달라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을 무덤으로부터 깨워 일으켰대도, 그 역시 그걸 풀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그는 기사 동 밸리아니스가 주고 받은 상처가 미심쩍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를 치료한 의사들이 아무리 재주가 있다고 하여도 그의 얼굴과 몸뚱이는 온통 상처와 흉터투성이였을 거니까 말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 끝없는 모험담의 속편을 계속하겠노란 약속과 함께 책을 끝맺음한 그 저자('돈벨리아니스'의 저자 헤로니모 페르난데스. 모두 4권의 '돈벨리아니스' 중 2권까지 돈 벨리아니스가 입은 상처는 백한 번에 이르고 있다.)를 가상히 여기었고, 또한 때때로 자기 자신이 직접 붓을 들어 저자를 대신해서 약속된 속편을 쓸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의심 할 바 없이 그는 그 일을 해 냈을 것이고 아마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른다. 단지, 좀더 중요하고 좀더 골똘한 생각이 그를 막지만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는 시겐사 대학 졸업생이고 학자인 마을의 신부와 더불어 영국의 팔메린과 고올의 아마디스 그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더 훌륭한 기사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마을 이발사인 니콜라스 씨는 세상에 태양의 기사와 견줄자는 없다고 말하고 만약 있다면 고올의 아마디스의 동생인 갈라오르 기사뿐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런고 하면 갈라오르는 대단히 임기 웅변을 잘 하고 용맹에 있어서도 전혀 형에게 뒤떨어지지 않고, 또한 형처럼 으스댄다든가 괜히 눈물을 찔끔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책 속에다 몸을 푹 파묻고 밤에는 황혼 때부터 동틀 무렵까지 낮에는 동틀 무렵으로부터 어두울 때가지 책을 읽어 냈다(하루의 대부분을 독서로 소일함). 그래서 잠은 부족하고 독서는 과다하여 그의 뇌는 말라 버리고 올바른 판단력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책에서 읽은 온갖 마술·언쟁·전투·도전·부상·구애·연애·고민, 기타 황당스런 것들로 그의 정신을 가득 채웠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가 읽은 황당 무게한 애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고 실제 세상의 역사도 그런 이야기보다 더 진실된 건 아니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 믿게 되었다 : 돈키호테가 기사담에 실린 허구와 실제의 현실을 분별하는 기준을 잃고, 어리석은 유랑의 길을 떠나게 되는 이유가 드러난다)
(중략)
그는 씨드 루이디아쓰가 대단히 훌륭한 기사임에 틀림없지만 사납고 무서운 거인 두 놈을 한 칼에 두 동강을 낸 '불타는 칼의 기사'에게는 비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헤라클레스가 거인 안타이오스를 팔로 목을 졸라 죽일 때 사용한 수법을 가지고서 론쎄스 바예스에서 마술에 걸린 롤랑을 죽인 베르나르도 델 까르삐오는 좀더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거인 모르간테를 아주 칭찬햇다. 모르간테는 하나같이 오만 불손한 거인 족속에 속하였지만 그 혼자만은 정중하고 예절이 밝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도 몬탈반의 레이날드를 제일 칭찬하였는데. 특히 그가 성으로부터 뛰쳐나가 만나는 자마다의 재물을 약탈하고 바다 건너 이교도의 나라에서 순금으로 된 마호메트의 상을 훔쳐 오는 장면을 읽었을 때 최고의 찬사를 퍼부었다. 그러나 배반자 갈라온을 한 번 발길로 냅다 차 줄 수만 있다면 그의 가정부뿐만 아니라 조카딸까지 내줘도 좋을 성싶었다.
그런데 그의 이성이 완전히 망가졌을 때 그는 온 세상에 어떤 미치광이도 가져 보지 못한 기이한 공상에 빠졌다. 그는 자기의 명성을 떨치고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서 편력 기사(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경험을 하는 중세 유럽의 기사)가 되어 모험을 찾아서 말 타고 갑옷 입고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그가 읽은 기사들의 행동을 그대로 따르고 모든 잘못된 것을 고치며 온갖 위험을 당하고 그것을 극복함으로써 불후의 명성과 영광을 얻는 것이 옳고 합당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용감한 무술 솜씨 덕분에 자기는 적어도 트레비존드(흑해 연안에 있던 나라)의 황제쯤은 떼논 당상이라 상상하고 그런 달콤한 공상에서 오는 그 기묘한 쾌감에 도취되어 욕망을 행동으로 옮기고자 서둘렀다.
그가 맨 먼저 한 일은 수백 년 동안 까맣게 잊혀져 구석에 쳐박혀 녹이 슬고 곰팡이가 난 조상들이 쓰던 갑옷을 닦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닦고 수선을 하고 보니 커다란 결함이 한 가지 나타났다. 즉 투구는 일종의 반가리개같이 오려 가지고 이 결함을 교묘히 시정했다. 그렇게 만든 가리개를 투구에 갖다 맞추니까 완전한 투구 모양이 잡혔다. 그러나 그게 칼날의 위험을 견디어 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한가 보려고 그가 칼을 뽑아들고 두 번을 내려쳤더니 웬걸 일주일이나 걸려서 만든 그것이 첫 번 공격에 단박 결딴이 나는 별로 기쁨을 못 느꼈다. 그래서 그는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안에다 쇳조각을 좀 붙여 가지고 얼굴가리개를 다시 만들었다. 그러고는 두 번 다시 시험을 해 보고 싶지 않아서 그 물건을 아주 잘 만든 투구로 인정하고 사용키로 결정하였다.
그 다음으로 그는 자기의 말을 살피러 갔는데 그 말은 바싹 말라서 발굽은 온통 갈라지고 가죽과 뼈밖에 없었다던 고넬라(스페인의 귀족들이 데리고 있던 일종의 어릿광대. 그의 말이 몹시 여위었던 데서 나온 이야기)의 말보다도 결점이 더 많았지만 그의 눈엔 알렉산더 대왕의 부케팔로스나 시드(중세 스페인의 명장)의 바비에까보다도 우수한 준마로 보였다. 그는 자기 말에게 '무슨 이름을 붙일까' 하고 생각하는 데 꼬박 4일을 소비했다.
그는 자기처럼 유명한 편력 기사의 말인 동시에 또 본래 이를 데 없는 그 준마에게 유명한 이름이 없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말이 주인이 편력 기사가 되기 전에는 어떤 말이었고 또 지금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나타낼수 있는 이름을 찾아 내려고 애썼다. 주인이 본직을 바꿨으니 말도 그가 시작하려는 새로운 생활과 사명에 알맞은 장엄하고도 당당한 이름으로 개명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공상 속에서 여러 번이나 지었다가는 삭제하고 버리고 고치고 지우고 다시 지은 끝에 드디어 그를 '로씨난떼'라 부르기도 결정하였다. 그 이름은 참말 훌륭하고 쩡쩡 울리는 것 같았고 또 세상에서 제일 가는 지금의 위치에 이르기 전에 평범한 말이었을 때와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게 이처럼 흡족한 이름을 지어 주고 나서 그는 자기 이름을 짓기로 결심하고 여드레 동안이나 그걸 생각했다. 드디어 그는 자기를 '돈키호테'라 부르기도 결심했다.
그 때문에 위에서 이미 말 한 바이지만 이 정확한 실기(實記)의 장본인 본명은 분명 '끼하다'였음이 틀림없고,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께사다'는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용감한 '아다디스'가 맨숭맨숭한 자기 이름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름을 더 유명하게 하느라고 자기가 출생한 지 방의 이름을 덧붙여서 '고올의 아마디스'라 자칭했던 사실을 기억하고 그도 제이름에다가 지방 덧붙여서' 라 만차의 돈키호테'라 자칭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가문과 지방을 정확하게 알릴 뿐 아니라, 지방 이름에서 자기 성을 따왔으니 향토를 명예롭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제 갑옷도 말끔하게 되었고 투구도 완전하게 되었고 말의 이름도 지어졌고, 자기 명칭도 결정했으니 남은 것은 단 한가지― 열렬히 사랑을 바칠 귀부인을 하나 구하는 일 뿐이다. 귀부인이 없는 편력 기사는 잎이나 열매가 없는 나무와도 같고 영혼이 없는 육체와도 같은 것이다.(중세의 기사담은 공주를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고 용감하게 싸워 승리를 쟁취하는 이야기이다. 귀부인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전혀 싸움에 나설 명분조차 없는 것이다.)그는 거듭거듭 혼자서 뇌까리기를,
"만일 내 죄값으로 또는 행운으로 편력기사들이 보통 겪는 것처럼 이 근처에서 어떠한 거인을 만나서 한 칼에 그 놈을 낙마시키다든지, 배꼽까지 두 쪽으로 갈라 놓는다든지 여하튼 그 놈에게 이겨서 항복을 받는다면 그 놈을 내 사랑스런 귀부인에게 선물로 보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공손한 말씨로 '귀부인이시여, 저는 말린드라니아 섬(악당의 섬)의 왕인 까라꿀리암브로이온데, 사람의 말로써는 이루 다 찬양할 수 없는' 라 만차의 돈키호테' 기사님에게 단 한 번 싸움에 지고 귀부인 면전에 가서 뵈오라는 분부를 받았사옵니다. 귀부인께서 이 몸을 마음에 드시는 대로 처분하소서.' 하고 말을 하게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오, 이 말을 생각해 냈을 때, 우리 기사님은 얼마나 기뻐하였던고! 게다가 그의 귀부인이라 부를 수 있는 여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의 무쌍한 기쁨!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경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즉 그의 이웃 마을에는 그가 한때 사랑을 품었던 매우 예쁘게 생긴 농가집 처녀가 있었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가 사랑한다는 걸 알지도 못했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여자의 이름은 '알돈싸 로렌쏘'였는데, 그는 이 여자를 꿈에도 잊지 못할 귀부인으로 삼는 것이 적합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고는 그 여자의 본명과는 과히 거리가 멀지 않으면서도 공주와 귀부인의 신분을 암시할 수 있는 이름을 모색한 끝에 그 여자를 '둘씨네아 델 또보소'라 부르기로 결심하였다. 본디 그 여자는 엘 또보소에서 출생하였는데 그녀 이름은 이미 결정한 자기 이름과 기타 자기 소유물에 붙인 이름들과 꼭 마찬가지로 음악적이요 이국적이요. 의미 심장한 듯이 들렸다.
무시무시하며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풍차의 모험에서 용감한 돈키호테가 거둔 더없는 성과와 기억할 만한 그 밖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
주인과 종자(돈키호테와 산초)는 이런 말을 주고 받으며 길을 가다가 들판에 30, 40개나 우뚝우뚝 서있는 풍차를 발견하였다. 이것을 보자 돈키호테는 종자에게 말했다.
“행운의 신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사건을 마련해주는구나(자신의 운명은 기사로서 사악한 무리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므로, 악한들과 마주친다는 사실을 운이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돈키호테의 무모한 생각을 보여준다). 산초여, 저것 좀 보아라. 그 증거로 서른이 훨씬 넘는 괘씸한 거인들(30-40개의 풍차들)이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느냐. 나는 저놈들과 싸워서 몰살을 시킨 뒤 그것에서 얻은 전리품으로 거부가 되어야겠다. 이 싸움은 정의의 싸움으로(현실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여 파악한다는 점에서 돈키호테의 모험이 지닌 이상주의적 특질을 잘 드러내 준다), 이런 사악한 씨를 이 지구상에서 뽑아 없애는 것은 신에 대한 커다란 봉사이기도 한 것이다.”- 풍차를 발견한 돈키호테와 산초
“거인이라뇨?”
하고 산초 빤사가 묻는다.
“바로 저기에 있는 게 그놈들이 아니고 뭐냐?”
하고 주인은 대답했다.
“저놈들 말이다. 놈들 중에서 2레구아(1레구아는 5.727m)나 되는 긴 팔(풍차의 날개)을 가진 놈도 있지 않느냐?”
“잠깐만 나리.”
산초가 대답했다.
“저기 보이는 것은 거인이 아닙니다요. 풍차(빠르게 변해 가는 현실을 상징)란 말입니다요(돈키호테의 이상주의적 관점과는 대비되는 현실적인 산초의 관점을 보여주는 대목). 팔이라고 하시는 것은 날개인데, 바람의 힘으로 돌아서 맷돌을 움직입죠.”- 풍차를 놓고 벌이는 산초와 돈키호테의 공방
“옳지, 알겠다.”(돈키호테는 산초가 자신의 모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함)
하고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너는 정말 이런 모험은 도통 모르는 모양이구나. 저것은 틀림없는 거인들이야. 만약 겁이 나거든 여기 멀리 떨어져서 내가 저놈들을 상대로 하는 치열하고 일찍이 보지 못한 싸움(돈키호테가 풍차와 벌일 싸움)을 기도나 드리면서 구경하고 있거라.”
이렇게 말한 돈키호테는 산초 빤사가 아무리 풍차라고 설명을 하야도 들은 척도 않고 로시난테에 박차를 가했다. 아무튼 그는 놈들이 거인이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종자 산초 빤사의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까이 가서도 상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볼 생각도 않고 오히려 소리 높이 외쳤다.(돈키호테의 심경이나 성격은 고집스럽고, 성급하고,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차있다. 무엇보다도 현실을 무시하고 분별 없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는 직선적인 행동형의 인간임이 드러남)
“도망치지 말아라, 이 비겁하고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들과 대적할 사람은 오직
일기(一騎)의 기사(한 명의 말 탄 기사)뿐이로다.”- 풍차에 대한 공격 준비를 갖추는 돈키호테
<이 부분은 돈키호테가 2차 편력에 나서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모험담이다. 돈키호테는 30, 40개의 풍차를 ‘서른이 훨씬 넘는 괘씸한 거인들’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풍차와의 싸움을 결의한다. 산초 빤사가 그것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미 결심을 굳힌 돈키호테는 산초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풍차와 대적할 준비를 갖춘다. ‘풍차’는 이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 중의 하나로서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차에 대한 착각은 돈키호테가 구시대적 이념에 사로 잡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성찰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가 이미 지나간 시대의 기사도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
이 때 바람이 불어와 풍차의 커다란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돈키호테는 이것을 보자 또 소리쳤다. "비록 네놈들이 저 거인 브리아레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 하늘과 땅의 아들로 50개의 머리와 100개의 팔을 가졌다고 함)보다 많은 팔을 움직인다 할지라도 나하고 한 판 겨루지 않으면 안 될 줄 알아라.(돈키호테가 공상 기사 소설을 많이 읽은 나머지 라만차 농업 지대의 풍차를 신화의 거인으로 착각하여 이르는 말) ! " 이렇게 외치면서 사모하는 둘씨네아에게 "이런 위기에 처한 나를 보호하소서." 하고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러면서 방패로 몸을 가리고 창을 옆구리에 끼고 로시난테의 네 굽이 달릴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돌격해 들어가서, 바로 정면에 있는 맨 처음의 풍차를 향해 창을 냅다 찔렀다. -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돈키호테
그가 일격을 가하자, 세찬 바람을 받아 무서운 힘으로 돌아가는 날개를 찌른 창은 박살이 나고 동시에 사람과 말도 휩쓸려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떨어지면서 들판을 데굴데굴 굴러갔다.(희극적으로 묘사) 산초 빤사가 당나귀를 급히 몰아 그 곳으로 달려가 보니 주인은 이미 꼼짝 달싹도 못하는 형편이었다. 사실 그가 로시난테와 함께 받은 타격은 엄청난 것이었다(작품 전체에서 풍차에 대한 돈키호테의 돌진과 패배가 의미하는 것은 기사도 정신이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을 의미). - 싸움에 패하고 부상당한 돈키호테
"맙소사 ! " 하고 산초 빤사는 말했다. "글쎄, 똑똑히 살피시고 일을 저지르시라고 제가 그토록 말했는데도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저건 풍차입니다요, 머릿속에서 저 풍차와 같은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모를 까닭이 없는데? "
"닥쳐라, 산초 ! "
하고 돈키로테가 대답했다.
"싸움이라는 것은 언제나 변화무쌍한 것이란 말이다. 내 짐작컨대, 아니 짐작이 아니라 사실이지만, 나의 서재와 내 책을 몽땅 훔쳐간 저 현인 프레스똔(돈키호테가 자기의 책을 훔쳐갔다고 의심하는 인물로, 자신의 적수로 생각하고 있음)이란 놈이 내가 저놈들을 정복하는 명예를 이미 가로채려는 속셈으로 거인들을 풍차로 둔갑시킨 것이다. 그놈이 내게 품은 적의는 보통 이 정도란 말이다. 그러나 결국은 그놈의 사악한 술법도 나의 정의의 칼 앞에는 맥을 못 추게 되고야 말걸."
"아이구, 그저 마음대로 생각하십쇼."
산초는 이렇게 대답하고 그를 부축해 일으켜서 다시 로시난테 위에 올려 놓았다. 로시난테는 등뼈가 반쯤 부러져 있었다.(자신이 벌인 싸움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돈키호테)
두 사람은 지금의 모험을 이야기하면서 라피세의 좁다란 산길로 접어들었다. 돈키호테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이곳은 사람의 왕래가 매우 심한 곳인 만큼 수많은 모험을 만날 수가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고, 돈키호테는 창이 없어진 것이 생각할수록 분하고 아쉬웠다. 그래서 종자에게 말했다.
"디에고 빼레스 데 바르가스라는 스페인의 기사는 싸움 도중에 칼이 부러졌다. 그는 곧 참나무의 든든한 가지를 꺾어 들고 눈부신 활약을 한 끝에 그날 엄청난 수효의 무어 인을 때려눕혔지. 그래서 마추까<성왕 페르난도 3세의 치세 때 빼레스의 포위전에서 디에고 뻬레스 데 바르가스가 '마추카(때려 눕히다)'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은 사실이며, 디에고 로돌리게스 데 아르메라의 역사책에서도 씌었고, 로망스로도 노래 불렸었다.>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그 사나이는 물론 자손들까지 그 후부터 바르가스이 마추까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참나무와 떡갈나무에서 그런 가지를 꺾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걸 가지고 눈부신 활약을 하여 네가 그 구경을 한 다음 '참 좋은 구경을 했다, 정말 훌륭한 주인을 모셨구나," 하고 스스로 행복하게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 말야."(자아 도취적인 성격이 강함)
"그것도 하나님의 뜻에 달렸습죠."
하고 산초가 말했다. - 부러진 창을 아쉬워하고 그것을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계기로 삼으며 자위(自慰)하는 돈키호테
<이 지문은 돈키호테와 풍차의 싸움에 대한 것이다. 돈키호테와 풍차의 싸움은 당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돈키호테의 패배도 당연한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는 돈키호테의 패배와 그의 낙마(落馬) 장면이 상당히 희극적으로 묘사되었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바라던 세계가 정말 실현된 듯이 행동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은 사람이다. 즉, 관념이 현실이 된 듯이 행동한다. 따라서, 그는 풍차의 본질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인으로 간주하고 싶은 자신의 상상의 욕구를 충족 시키려한다. 돈키호테 비해 산초 빤사는 단지 상식적인 인간에 불과하며, 돈키호테의 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패배를 자위하며 또 다른 모험의 길을 떠난다.
"하기야 저는 나리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믿고 있습죠. 그건 그렇고 허리를 좀 똑바로 펴십쇼. 한쪽으로 기울어져 계십니다요. 아마 아까 굴러떨어졌을 때 몹시 다치신 모양입니다요."
"아마 그런 모양이다."
하고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그러나 나는 아프다는 말은 한 마디도 안 한다. 도대체 편력 기사란 어떤 상처를 받더라고, 이를테면 상처에서 창자가 비어져 나온다고 하더라도 아프니, 괴로우니, 하고 말해선 안 되거든."
"그렇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요."
이렇게 산초가 대답했다.
"그러나 아프면 아프다고 말씀해 주시는 편이 저로서는 고맙겠는뎁쇼. 편력(遍歷 : 이리저리 돌아다님) 기사의 종자니까 저도 아프다는 소릴 하지 않아야 하겠지만요, 정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는 조금만 아파도 아프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요,(산초는 현실적 성격임)"
돈키호테는 이 단순한 종자를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언제 어느 때고 아프면 아프다, 괴로우면 괴롭다고 말해도 좋다고 타일렀다. 지금까지 읽은 기사도 법도 중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 기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햐 할 일에 대한 산초와 돈키호테의 시각 차이
이 때 산초는 점심을 드실 때라고 주인에게 일러 주었다. 이에 대한 주인의 대답은, 나는 별 생각이 없다. 그러나 너는 먹고 싶을 때 먹도록 하라는 것이었다(소설을 연극으로 처리하면 대화에 해당). 허락을 받은 산초는 곧 당나귀 위에서 되도록 몸을 편하게 하고 등에 걸머진 전대에서 먹을 것을 꺼내 들고 주인 뒤를 천천히 따라가면서 쭈걱쭈걱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말라가의 양조장 주인도 군침을 삼킬 만큼 술부대의 술을 사뭇 맛이 있는 듯이 조금씩 마셨다. 이렇게 몇 차례나 조금씩 술을 마시며 가다 보니 주인이 그에게 한 약속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고, 또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든지 간에, 모험을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그에게는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즐겁게까지 생각되었다. - 술과 음식에 빠져 모험도 즐거운 것으로 생각하는 산초
그들은 이 날 숲 속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돈키호테는 창으로 쓸 수 있는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부러진 창에서 창 날을 빼어 나뭇가지에 잡아맸다.
그 날 밤, 돈키호테는 사모하는 공주 둘씨네아를 생각하느라고 온 밤을 끈 눈으로 새웠다. 이것은 많은 기사들이 사모하는 연인의 추억을 가슴에 품고 숲속이나 황야에서 며칠밤이라고 뜬 눈으로 새운다는, 그가 지금까지 많은 책에서 읽은 내용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 돌씨네아 공주와의 추억에 빠진 돈키호테
그러나 산초 빤사는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우거지 음식으로만 채워지던 그의 뱃속이 그날은 사뭇 훌륭한 음식들로 가득 채워졌던 까닭에 아주 기분 좋게 잠이 들었던 것이다. 만일 주인이 흔들어 깨우지 않았더라면 그의 얼굴 위에 내리쬐는 햇볕도, 새로운 하루를 노래하는 새들의 즐거운 노래 소리도 그의 잠을 깨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술부대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 어젯밤보다 술이 적어진 것을 발견하고 그의 마음은 서글퍼졌다. 앞으로 여간해선 이 부족을 보충하기가 어렵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한 편 돈키호테는 아침 식사를 하려 들지 않았다. 그것은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감미로운 추억으로 배를 충족시키고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들이 목적한 리파세의 계곡을 향하는 길로 되돌아갔다. - 여행을 시작하는 두 일행
<이 부분을 통해 돈키호테와 산초의 가치관의 차이를 명백히 볼 수 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의견 대림은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해야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한다. 돈키호테의 행동은 기사의 도리가 기준이 되지만 산초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돈키호테는 아픈 것을 아프다고 하지 않고 참지만, 산초는 그런 돈키호테를 이해하지 못한다. 산초가 삶의 행복을 음식과 술에서 찾고 만족해하는 반면에, 돈키호테에게는 사모하는 연인 둘씨네아 공주와의 추억이 그의 유일한 낙이자 행복이다. 그가 빠졌던 중세의 로맨스, 즉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남성 기사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한다는 내용은 돈키호테에게 삶의 행동 지침이 된다. 돈키호테는 행복한 추억에 대한 공상의 여운을 지우지 못하고 아침밥도 거른 채 또 다른 모험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작품개관 :
이 작품은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쓰여진 장편 풍자 소설이다. 작품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궁극적인 목표가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는 데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작품의 독특한 주제의식을 작품이 쓰여진 시대적 배경이나 작자의 의도와 연결 지어 파악하면서, 이 작품이 후대의 독자들에게 어떤 의의를 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내용연구 :
대립적인 인간상 :
이 소설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정신적 물질,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돈 키호테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높고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이에 비해 산초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중시한다.
'풍차'의 상징적 의미 :
'풍차는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 중의 하나로,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을 상징한다. 따라서 풍차에 대한 착각은 돈 키호테가 구시대적인 이념에 사로잡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성찰도 갖고 있지 못함을 암시하면, 동시에 그가 지나간 시대의 기사도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지도방법
작품 속의 여러 요소들이 주제를 형성하는데 어떻게 관련되는지 파악한다. :
문학 작품 속에 담긴 이야기는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반영한다. 따라서 이 소설을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짐작해, 당시의 상황을 가상 체험하여 직접 글로 표현해 보면서 다양한 삶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작자의 창작 동기를 고려하도록 한다. :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름의 가치관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된다. 소설 속에 나오는 여러 계층의 인물 군상들과 그 행동을 통해 그들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느끼고, 그것을 말로 표현해 보도록 한다.
당대의 독자가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하도록 한다. :
작품의 주제는 그 작품이 생산되고 수용되는 맥락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이 작품이 쓰여지고 읽혀진 당대의 독자들의 반응에 따라 이 작품이 갖는 의미를 재구성해 볼 수 있도록 한다.
학습활동 풀이
1. 이 소설의 주제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서 다음 활동을 해 보자.
(1) 돈 키호테와 산초가 서로 대립하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말해 보자.
이끌어주기 :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대립 양상을 통하여 작품의 구조와 주제를 생각해 본다. 즉 이 두 인물 간의 대립은 작자가 의도한 주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갈등 구조를 형성한다는 점을 강조하여 지도한다.
예시답안 :
이 작품은 돈 키호테의 무모한 행동과 그것을 만류하는 산초의 대립을 바탕으로 한다. 작자는 이 작품을 수십 년에 걸쳐 집필하면서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을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개성적인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주인공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이다. 돈 키호테는 환상 주의자로 , 기사도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으로 현실을 해석하고 행동하며, 그 행동에 현실을 맞추려고 한다. 따라서 돈 키호테는 현실 세계에서 좌충우돌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이에 반해 산초 판사는 현실주의자이다.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대립은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의미하며,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출발이라는 역사적 변혁기를 배경으로 중세적 질서를 비판하려는 작자의 주제 의식과도 연결된다.
(2)이 글에서 '풍차' 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이끌어주기 :
이 작품에서 '풍차'는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라는 것을 알도록 하고, '풍차'가 지니는 상징성을 작자의 의도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게 한다.
예시답안 :
'풍차'는 이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중의 하나로서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풍차'는 미래 기술의 발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미래의 주역은 기사가 아니라 그러한 풍차를 만드는 사람이다. 미래 세계에서 환상이나 로맨스는 더 이상 설자리가 없다. 단지 물질적인 생활의 진보와 실용성만이 존중될 뿐이다. 작자는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의 삶의 방식을 대비시키는 데 '풍차'를 등장시킴으로써 다가올 미래의 인간들이 직면해야 할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3) 토의토론
돈 키호테와 산초 중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말해보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지 서로 이야기해 보자.
이끌어주기 :
돈 키호테와 산초는 대립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우선 두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 보도록 한다. 그리고 대립되는 두 인물의 성격을 이해한 후, 자신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한다.
예시답안 :
산초 판사라는 농부를 종자로 거느린 돈 키호테는 모든 것을 기사도 식으로 해석하고 그 이상에 따라 살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산초는 주인과 반대로 어떤 경우에도 현실과의 타협을 잊지 않으며, 게으르지만 주인에게 충실한 종자이다. 이 소설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흔히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은 돈 키호테를 바보라고 손가락질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런 돈 키호테가 더 좋다. 단순히 그의 영웅적 행동이나 이상주의자적인 면모를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돈 키호테의 광적인 행위는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인간의 삶과 정신을 확립하는 데 장애가 되는 요소나 대상을 향해 있다. 따라서 '사악한 무리들을 물리치겠다.`는 말에는 비본질적이고 부조리한 현실에 대항하는 비판적 지성의 태도와 저항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2. 흔히 일상생활에서 사람의 성격을 판단할 때 '돈 키호테형' 이냐 '햄릿형'이냐로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작자가 '돈 키호테'의 인간형을 통해 말하려고 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이끌어주기 :
우리 일상생활에는 여러 가지 인간형이 있음을 알고, 작품의 인물 유형을 일상생활에서의 인물의 성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도록 한다.
예시답안 :
인간의 유형은 크게 '돈 키호테형'과 '햄릿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돈 키호테 인간형은 현실을 무시하고 독선적인 정의감에 이끌려 이상을 향해 돌진하는 성격의 소유자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며 배운 것은 없지만 마음이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을 상징한다. 이 형은 주로 단순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많이 나타나지만, 강한 실천력으로 성공한 사례도 많다. 그러나 항상 불안해 보이는 인간형이다. 이에 반해 햄릿형은 사색적이며 회의적인 경향이 강하고 결단과 실행력이 약한 성격의 소유자다. 햄릿은 고뇌와 갈등과 번민을 거듭하는 지성인의 상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하고, 저렇게 생각하면 저러하니 도저히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이 작품에서 작자는 돈 키호테형의 인물을 내세움으로써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이상만을 추구하는 인물을 풍자하고 있다. 즉, 중세의 봉건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근세 전환기의 시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형을 희극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중세적 질서에 대한 비판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1. 이 작품에서 돈키호테가 편력 기사가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정리해보자.
교수·학습 방법 :
작품의 줄거리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하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돈키호테는 편력 기사가 되기 위해 먼저 수백 년 동안 까맣게 잊혀져 구석에 처박혀 녹이 슬고 곰팡이가 난 조상이 쓰던 갑옷을 정리한다. 투구의 얼굴가리개를 만든 후 말의 이름을 짓는다. 로시난테로 말의 이름을 정하고 나서 자신의 이름을 돈키호테로 정하고 열렬히 사랑을 바칠 귀부인으로 이웃 마을의 농가집 처녀를 모델로 '둘씨네아 델 또보소'로 정한다.
2. 우리의 고전 소설 작품과 이 작품을 인물의 성격 창조라는 관점에서 비교해보자.
교수·학습 방법 :
판소리계 소설을 제외한 우리 고전 소설의 주인공은 한결같이 재자가인(才子佳人)이라는 점에 비추어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격 창조상의 특징을 파악하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우리 고전 소설 작품 속의 인물은 모두 영웅적이며 천인 하강의 이미지로 제시되는 등 고귀한 존재이다. 이들은 고난에 빠지게 되나 자신의 능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고난을 극복하고 현실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나, 여러 군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이러한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환상에 빠져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고귀한 영웅의 이미지가 아니라 조금은 모자라고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렇듯 평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근대 소설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3. 돈키호테처럼 책을 읽고 환상에 빠진 적이 있는가? 자신을 환상에 빠뜨리게 한 책의 내용에 대해서 발표해보자.
교수·학습 방법 :
이 문제는 문학 작품의 효과적인 감상을 위해 작품 속 인물과 독자 자신과의 동일시 기회를 가졌는가에 대해 자유롭게 발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함에 목적이 있다. 학생들이 자유스러운 발표를 통해 책 속의 허구적 세계와 현실과의 관련성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돈키호테는 중세 기사에 대한 로망스를 많이 읽고 나서 환상에 빠졌다. 현실에 없는 환상을 생각하고 그러한 환상을 현실 속에서 실현하고자 한다. 이처럼 나도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읽으면서 환상에 빠진 적이 있었다. 실제로 인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확장하기
1. 이 작품을 읽고, 다음 활동을 해보자.
(1) 이 작품에 등장하는 '돈키호테'와 '산초'의 행적을 항목화하여 정리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모든 학생들에게 부과하기는 쉽지 않은 활동이다. 따라서 학습 활동 전체를 여러 모둠으로 나누고 한 모둠에 속하는 학생들에게 부과할 필요가 있다.
예시 학생 활동 :
·돈키호테의 행적 - 중세 기사의 로망스에 탐독하여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 후 자신이 기사라 생각하고 편력 기사의 여행을 시작한다.
· 산초의 행적 - 돈키호테의 편력 기사로서의 여행에 동행하면서 돈키호테에게 현실의 모습을 말해준다.
(2) 이 작품이 세계문학사에 차지하는 위상을 조사하여 발표해보자.
교수·학습 방법 :
인터넷을 통해 정보 검색을 하되, 이 작품이 봉건 사회와 근대 사회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예시 학생 활동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는 중세 로망스의 구성을 차용하고 있지만 인물의 설정과 사건의 진행 측면에서 중세 소설과 다른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고귀하고 영웅적인 인물이 등장하는 중세 로망스와 대조적으로 '돈키호테'의 주인공은 현실을 인식하지 못해 실수를 거듭하는 평범한 인간이다. 즉 인물의 설정 측면에서 그 전과 다른 차이점을 보이고 있고 이러한 특징은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평가받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2. 다음은 영화 '저스트 비지팅(Just Visting)'의 한 장면이다. 이 영화를 관람하고 소설 '돈키호테'의 어떤 요소가 작품에 수용되었는지 설명해 보자.
교수·학습 방법 :
'저스트 비지팅'이라는 영화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작품이다. 학생들도 흥미를 가지고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1)처럼 특정한 모둠에게 과제로 부과한 후 이를 발표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예시 학생 활동 :
'저스트 비지팅'은 중세와 현대를 오고가며 이루어지는 주인공들의 해프닝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돈키호테'의 모티프가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먼저 인물 구성의 측면에서 보면, 명예를 중시하는 기사와 현실적이고 세속적이며 약삭빠른 시종이 등장한다. 또한 주인공 기사는 현대라는 시간 속에서 중세와의 차이점을 인식하지 못하고 현대 문명의 이기를 파괴한다. 이것은 풍차를 용으로 착각하여 파괴하려고 하는 돈키호테의 행태와 유사하다. 또한 저스트 비지팅에서 현대로의 시간 여행은 기사가 자신이 사랑하는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돈키호테 역시 귀부인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험을 선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Just Visiting(저스트 비지팅)
줄거리 :
때는 12세기. 기사 티보와 그의 사랑하는 약혼녀 로잘린은 결혼을 앞두고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로잘린의 왕국을 노리던 워릭 백작은 음모를 꾸며 티보 스스로 로잘린을 죽이도록 만드는데. 절망에 빠진 티보에게 마법사는 시간 여행이라는 해결책을 내놓는다. 마법의 약을 마신 티보는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그제야 마법사는 자신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닫는데...
마법사의 실수로 티보가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2001년 시카고의 중세박물관. 복잡한 미래, 티보는 그저 혼란스러울 뿐이다. 이때 정신 못 차리는 티보에게 로잘린이 나타나는데. 가만히 살펴보니 그녀는 로잘린을 꼭 닮은 티보의 후손 줄리아다. 줄리아는 티보를 막대한 유산을 남기고 실종된 자기 사촌으로 착각하여 집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티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줄리아의 음흉한 약혼자 헌터. 헌터는 티보를 없애고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티보는 만약 자신이 과거로 되돌아가지 못한다면 후손들도 사라져버리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데.... 이제 그에게 적은 두 사람. 워릭 백작과 헌터. 구해야 될 사람도 두 사람. 로잘린과 줄리아. 두 사람을 구해내야만 하는 티보의 과거는 이제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돌아가게 된다.
이해와 감상
돈 키호테는 기사도 이야기에 미친 한 노신사가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겠다고 모험의 길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본래, 작가는 16세기 서구 사회를 휩쓸던 중세 기사들의 허황된 무협 연애담을 희화화(戱畵化)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 즉 그는, 기사 소설을 사실로, 역사로 믿고 날뛰던 당시 풍조가 사실과 거짓을 왜곡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포함해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진실로 돌아오도록 바로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편 52장, 후편 74장으로 엮어진 방대한 분량으로, 등장 인물의 수만 해도 거의 600명에 달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 판사, 그리고 돈 키호테가 사모하는 여인 둘시네아이다.
이런 이야기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패러디(parody, 풍자적으로 꾸민 익살 시문)와 유머의 바닥에 인간에의 끝없는 애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물질과 정신,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돈 키호테의 성격으로부터 키호티즘(Quixot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돈 키호테적인 성격이나 생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실상 모든 선구자, 예언자, 개혁자들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적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높은, 보다 가치 있는 환상적 현실, 즉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의 성격인 것이다. 왜냐 하면, 키호티즘이란 결국 현실적 물질성에 도전하여 어떤 이상향의 세계를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도요, 의지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소설 돈 키호테를 단순한 미친 사람의 이야기에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높은 뜻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1
돈 키호테는 기사도 이야기에 미친 한 노신사가 이 세상의 부정을 바로잡겠다고 모험의 길에 나서는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본래, 작가는 16세기 서구 사회를 휩쓸던 중세 기사들의 허황된 무협 연애담을 희화화(戱畵化)하고 조롱하기 위해서 이 소설을 썼다. 즉 그는, 기사 소설을 사실로, 역사로 믿고 날뛰던 당시 풍조가 사실과 거짓을 왜곡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포함해 이런 환상에 빠져 있는 무리들을 진실로 돌아오도록 바로잡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소설은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편 52장, 후편 74장으로 엮어진 방대한 분량으로, 등장 인물의 수만 해도 거의 600명에 달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돈 키호테와 그의 종자 산초 판사, 그리고 돈 키호테가 사모하는 여인 둘시네아이다.
이런 이야기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우리에게 의미를 주는 것은 패러디(parody, 풍자적으로 꾸민 익살 시문)와 유머의 바닥에 인간에의 끝없는 애정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물질과 정신,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돈 키호테의 성격으로부터 키호티즘(Quixot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돈 키호테적인 성격이나 생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실상 모든 선구자, 예언자, 개혁자들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적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높은, 보다 가치 있는 환상적 현실, 즉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의 성격인 것이다. 왜냐 하면, 키호티즘이란 결국 현실적 물질성에 도전하여 어떤 이상향의 세계를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도요, 의지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소설 돈 키호테를 단순한 미친 사람의 이야기에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높은 뜻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 (출처 : 박갑수 외 2인저 지학 문학교과서)
이 부분은 돈키호테가 2차 편력에 나서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모험담이다. 돈키호테는 30,40개의 풍차를 '서른이 훨씬 넘는 괘씸한 거인들'의 모습으로 착각하고 풍차와 싸움을 결의한다. 산초 빤사가 그것은 거인이 아니라 풍차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미 결심을 굳힌 돈키호테는 산초의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고 풍차와 대적할 준비를 갖춘다.
'풍차'는 이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 중의 하나로서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차에 대한 착각은 돈키호테가 구시대적 이념에 사로잡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성찰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가 지나간 시대의 기사도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 준다.
돈키호테와 풍차의 싸움은 당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것이었고, 따라서 돈키호테의 패배와 그의 낙마 장면이 상당히 희극적으로 묘사되었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바라던 세계가 정말로 실현된 듯이 행동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즉, 관념이 현실인 듯이 행동한다. 그는 풍차의 본질을 알면서도 그것을 거인으로 간주하고 싶은 자신의 상상의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돈키호테에 비해 산초 빤사는 단지 상식적인 인간에 불과하며, 돈키호테의 상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돈키호테는 자신의 패배를 애써 자위하며 또 다른 모험의 길을 떠난다. 하지만, 여기서 돈키호테는 다양한 해석을 받고 있는데, 시대에 따라 해석이 다르고, 바보에서 이상주의자 또는 비극적 투쟁을 벌이는 영웅으로 보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돈키호테의 광증을 이해해야 하는데 돈키호테는 광인(狂人)이라기 보다는 집념(執念)의 인간으로 보아야 하며, 꿈꾸고 있는 환상의 성격으로 보면 된다.
이해와 감상2
'돈키호테'는 1605년에 씌어진 작품으로, 서양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평은 이 작품이 그전의 다른 소설 작품과 비교하여 ‘인물의 묘사와 발전 과정 및 이야기의 역동적, 심리적 진행' 등이 두드러진다. 르네상스 운동이 한창이던 시대에 '기사도'에 미련을 두고 있던 사람들의 시대 착오적인 정신 상태를 바로잡기 위해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쓰는 목적을 '기사도 이야기로 세속에 있는 권세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민중 사이의 기사도 이야기에 마지막 쐐기를 박는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 동시에 이 작품에는 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라는 인간 존재의 심각한 문제들이 나타나며 돈키호테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고, 이 두 인물들이 서로 서로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 서로에 반응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실존적 문제가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해와 감상3
이 소설은 전편 52장, 속편 74장으로 된 대작으로, 기사 이갸기의 황당무계함을 놀려 주기 위하여 주인공의 모험을 항상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있다. 몰락 계급에 속하며 시골 사람인 돈키호테는 기사 전설을 탐독한 후, 허무한 과거와 미래를 꿈꾸면서 종자(從者)인 산초 빤사와 늙은 말 로시난테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여러 사건을 겪는다.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군(巨人群)으로 오인(誤認)하여 창을 찌르기도 하고,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가는 양떼를 백만 군졸(軍卒)로 착각하여 돌격하며, 비를 피하기 위해 놋대야를 둘러 쓴 이발사를 보고 황금의 투구를 쓴 기사(騎士)라고 하여 공격하는 등의 흥미 진진한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해와 감상4
돈키호테가 풍차에 돌진하는 유명한 이 일화는 그가 2차 편력에 나서서 처음 맞이하는 모험담이다. 그는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했는데, 산초가 풍차라고 거듭 깨우치자 이번에는 프레스똔이 거인을 풍차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이 거듭된 착각은 돈키호테가 풍차처럼 돌아가는 현실의 변화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며 기사도 정신이라는 이미 지나가 버린 가치를 결코 버릴 수 없다는 의식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므로 풍차로의 돌진과 패배는 기사도의 정신이 그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을 뜻한다. 이처럼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 것을 계속 지고한 가치로 신봉하는 상황에서 희극이 성립된다. (출처 : 김윤식 김종철 공저 한샘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5
이 작품은 중세 시대에 매우 인기 있었던 기사들의 모험담을 모방하면서,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사담이 담고 있는 막연한 이상과 허영을 풍자하고 있다.
'로망스'라는 독특한 문학 양식 내에서 취급된 이야기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기사들의 삶을 주제로 하였다. 이러한 기사담은 중세 사회의 이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돈키호테'는 고상하고 탁월한 능력을 갖춘 자로 신비화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을 공유(公有)한 인간형으로 제시된다. 그가 구사하는 위엄 있는 대사와 허풍, 적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기와 결단력은 하인 '산초'의 시각에 포착되어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작자 세르반테스는 구체적인 현실과 드높은 이상적 가치를 극단적으로 대비시킴으로써, 근대 소설의 한 전형을 창조하였다.
근대 사회에서는 중세와 달리 성스러운 이념보다는 세속적인 가치가 중시되기 시작했다. 국왕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 연인을 향한 헌신적인 사랑, 종교에 대한 열정 등 중세 사회를 지배해 왔던 이념들이 서서히 부정되고, 구체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들의 세계가 근대 소설에서 주로 다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변화를 읽어 내지 못하고, 봉건 사회에서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고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세르반테스는 근대 사회 속에서 아직 중세적인 이념과 생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돈키호테'라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을 통하여 중세와는 달라진 근대 사회의 일면을 부각시켰다.
'돈키호테'를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하는 것은, 이 작품이 봉건 사회와 근대 사회를 분명하게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출처 : 한계전 외 2인 공저 대한 문학교과서)
이해와 감상6
'돈키호테'는 서양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며 또한 최대의 소설 중의 하나라는 평을 듣는다. 돈키호테의 근대성은 인물 묘사와 인물의 발전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서양의 중세 시대에 '로망스'라는 독특한 문학 양식에서 취급되던 이야기는 숭고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기사의 삶을 주제로 하였다. 이러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기사는 중세 사회의 이상을 반영하는 고귀하고 숭고한 인물들이었다. 반면 돈키호테의 주인공인 기사는 고상하고 탁월한 능력을 갖춘 인물로 신비화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인 약점을 가진 인물로 제시된다. 게다가 주인공이 구사하는 위엄 있는 대사와 허풍, 적을 향하여 돌진하는 용기와 결단력은 하인 '산초'에 의해 조롱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돈키호테의 인물들은 중세 로망스에서 보이는 고상하고 위대한 기사라는 전형적인 인물 유형을 벗어나, 광기에 사로잡혀 실수를 연발하는 기사라는 새로운 인물 유형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돈키호테의 인물은 중세적 허구와 근대적 사실주의적 성격이 공존하고 있으며 중세적 특성이 조롱 풍자되고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또한 '이야기의 역동성, 심리적 진행'의 측면에서 전 시기 소설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이다. 세르반테스는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소설가인 보카치오 역시 근대 소설의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그려진 사회적 전형들로서 사건이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들에게' 발생할 뿐이며, 인물의 성장 발전 과정은 전혀 무시되고 있다.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 최초로 소설 문학에 도입한 뛰어난 기교이다.
세르반테스는 수십 년간에 걸쳐서 '돈키호테'를 쓰면서 그 작중 인물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동시에 모르는 중에 성장했다. 이 역시 근대 소설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개발한 것이 되었다. 애초의 그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만인을 즐겁게 해 줄'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시작했는지 모르나, 점점 인간 존재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속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돈키호테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인물이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 반응하는 모습을 그려나간 솜씨는 만인의 찬탄을 받을 만하다. 그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가며 그 둘의 관계는 세르반테스의 정신 속에 은밀히 전개되고 있던 내적 대화의 극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에게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배우며, 그 배워나가는 과정이 또한 그들을 더욱 실감 있게 만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소설가의 작가적 성장 과정의 모범이 된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심화 자료
풍차의 상징적 의미 :
'풍차'는 이 작품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중요한 제재 중의 하나로서 '빠르게 돌아가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차에 대한 착각은 돈키호테가 구시대적 이념에 사로잡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새로운 성찰을 갖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그가 지나간 시대의 기사도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정신과 물질,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돈키호테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높고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이에 비해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실제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중시한다.
키호티즘(Quixotism) :
이 소설의 대립적인 두 인물,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는 이상과 현실, 물질과 정신, 환상과 사실의 충돌을 상징한다. 여기에서, 자신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저돌적으로 나아가는 돈키호테의 성격으로부터 키호티즘(Quixotism)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것은 돈키호테적인 성격이나 생활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실상 모든 선구자, 예언자, 개혁자들의 보편적인 특성이 되어 있다. 눈앞에 보이는 사실적 현실을 부정하고 보다 높은, 보다 가치 있는 환상적 현실, 즉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의 성격인 것이다. 왜냐하면, 키호티즘이란 결국 현실적 물질성에 도전하여 어떤 이상향의 세계를 이 세상에 실현하려는 이상주의적 시도요, 의지력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소설 '돈키호테'를 단순한 미친 사람의 이야기에 머물게 하지 않고 더 높은 뜻을 지니게 하는 것이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돈키호테'의 집필 동기
'돈키호테'의 전편은 1605년, 후편은 1615년에 출판했다.
세르반테스는 이 작품을 쓴 목적을 '당시의 항간에 풍미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권위와 인기를 타도하기 위해서' 라고 했듯이 그 당시 에스파냐에 크게 유행했던 기사도 이야기의 패러디를 쓰려고 했었다. 그러나 감흥이 솟는 대로 일정한 계획도 없이 써 나가는 동안, 처음 의도한 바를 잊고 주인공 돈키호테와 종자(從子)인 산초 판사의 성격을 창조한다는 새로운 주제에 열중하여 드디어 인생 전체를 포괄하는 대작이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현실 사회는 어디까지나 환상(가상)같은 구석이 있다고 본 것 같다. 적어도 절대적 이상 세계는 없다고 본 것이다. 사회 문제가 생긴다면 인간 내부의 근원적인 변화를 통해서만 고칠 수 있다고 보았지, 외적현상을 고치는 것은 문제 해결이 안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세상을 바르게 잡아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른바 '돈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돈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두 인물이 중심이 되는데, 기사의 고매한 이상은 산초 판사의 실제적이고 비속한 물질주의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 보완하며, 인간성의 양면을 나타낸다. 두 사람의 보편적인 인간성은 국적·인종·나이·성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친근감과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세르반테스는 셰익스피어와 함께 성격 묘사의 요령을 알고 있는 보기 드문 작가였다.(출처 : 김병국 외 4인 공저 한국교육미디어 문학)
돈키호테형과 햄릿형
돈키호테형 : 러시아의 투르게네프가 명명한 것으로 예의 바르고 교양도 있고, 정의감에 넘쳐 있기는 하나 현실을 무시하고 분별 없는 행동을 제멋대로 하는 격정적인 행동형의 인간, 또는 과대망상적인 공상을 실현하려고 하는 인간형을 가리킨다.
햄릿형 : 행동력이 부족한, 우유부단한 인간형으로 사념적이고 고민하는 유형의 인간을 말함.
모험소설
모험과 난관을 무릅쓰는 행동과 사건들이 이야기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소설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확대되면 신념과 이상을 관철하기 위해서, 뜻있는 삶의 목표를 발견하거나 추구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모든 인간의 행동도 모험이라고 볼 수 있다. 세르반테스, 브론테, 도스토예프스키, 카뮈, 카프카 등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도 행동과 사건을 주도하는 예외 없는 모험가라 할 수 있다. 즉, 모험 소설이란 영원히 해소되기 어려워 보이는 갈등-현실과 이상, 이성과 감성, 본질과 비본질 사이에 화해와 조화를 모색하고자 하는 야심에 찬 문학적 의도가 담긴 이야기 현상이라고 포괄할 수 있겠다.
'돈 키호테'의 소설사적 의미
'돈 키호테'는 서양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며 또한 최대의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작품이 그전의 다른 소설 작품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인물의 묘사와 발전 과정 및 이야기의 역동성과 심리적 진행`이 그 두드러진 차이이다. 보카치오 역시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그려진 사회적 전형들로서 사건이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들에게` 발생할 뿐이며, 인물의 성장 발전 과정은 전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가 최초로 소설 문학에 도입한 뛰어난 기교이다.
세르반테스는 수십 년 간에 걸쳐서 이 소설을 쓰면서 그 작중 인물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은연중에 성장하였다. 이 역시 근대 소설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개발한 것이 되었다. 애초의 그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만인을 즐겁게 해줄'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시작했을지 모르나, 점점 인간 존재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속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인물이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그려 낸 솜씨는 만인의 찬탄을 받을 만하다. 그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가며 그 둘의 관계는 세르반테스의 정신 속에 은밀히 전개되고 있던 내적 대화의 극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자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에게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배우며, 그것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또한 그들을 더욱 실감 있게 만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소설가의 작가적 성장 과정의 모범이 된다.
'돈 키호테'에 나타난 세계관
일반 독자들은 이 작품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 키호테'는 확실히 소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약간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을 중세의 기사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보는 이들도 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랬고 이 견해는 아직도 서양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다. 바이런 같은 낭만주의자는 기사도 같은 낭만적 제도를 이 작품이 추방해 버린 것을 오히려 개탄했다. 그러나 역사를 좀더 잘 아는 이들에 의하면 편력 기사 등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기보다 중세인들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확실히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세르반테스가 기사적인 용맹을 조소했을 리 없다. 그가 조소한 것은 기사도를 주제로 해서 무질서하게 생겨난 우스꽝스런 문학이었다.
다시 말하면 세르반테스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사회 개혁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와 왕권에 무척 충성스런 온건한 시민이었다. 그를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인 현명 분자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교회와 왕권에 충성했다고 해서 그가 유독 신앙심이 열렬한 카톨릭 교도였다거나, 애국 열사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전통적 의미의 평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신학이나 철학의 전문적 학식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소설가처럼 인생의 신비에 민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현실 세르반테스는 현실 사회라는 것이 어딘가 정말 진짜가 아니고 가상 내지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은 듯하다. 적어도 절대적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상대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사회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외적인 현상을 고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돈 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돈 키호테는 집념에 사로잡힌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보다는 사람에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함부로 남의 일에 뛰어들어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해를 가져오는 자기 중심적 유토피아주의자로 볼 수도 있다. 돈 키호테가 농부의 머슴인 안드레스를 구해 준다고 간섭한 까닭에 안드레스가 더 불행하게 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확실히 희극적이기보다는 풍자적이다.
돈 키호테의 광증은 이 작품의 중심 문제이다. 확실히 그의 광증은 평범한 의미의 실성 정신 착란 정신 이상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보통 실성한 사람을 비웃는 것은 인륜상 용납되지 않으나 돈 키호테의 특수한 광증에 대해서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다. 돈 키호테는 광인이 아니라 집념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자기의 환상의 성격을 잘 안다. 사실 그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그랬다면 정말 평범한 광인에 불과하다) 자기가 보는 것을 환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집념, 다시 말하면 특별한 신념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병자가 아니라 상상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적 철인이다. 자기가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시인이 주장하는 권리이다. 위에서 우리는 돈 키호테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여기서 다시 그가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시적 철학의 대상이 될 뿐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블랙박스 문학교과서)
이상섭 교수의 '돈키호테'에 대하여
쎄르반떼스가 《돈키호테》에서 표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이 작품에 나타나는 세계관, 인생관은 어떤 것인가?
어린이 또는 단순한 독자들은 이 작품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키호테》는 확실히 소극적(笑劇的) 요소가 다분히 있다.
약간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을 중세의 기사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보는 이들도 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랬고 이 견해는 아직도 서양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다. 바이런 같은 낭만주의자는 기사도 같은 낭만적 제도를 이 작품이 추방해 버린 것을 오히려 개탄했다. 그러나 역사를 좀더 잘 아는 이들에 의하면 편력기사 등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기보다 중세인들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확실히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쎄르반떼스가 기사적인 용맹을 조소했을 리 없다. 그가 조소한 것은 기사도를 주제로 해서 무질서하게 생겨난 우스꽝스런 문학이었다.
다시 말하면 쎄르반떼스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인 아니라 문학적,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사회개혁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와 왕권에 무척 충성스런 온건한 시민이었다. 그를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인 혁명분자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교회와 왕권에 충성했다고 해서 그가 유독 신앙심이 열렬한 카톨릭교도였다거나, 애국열사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전통적 의미의 평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신학이나 철학의 전문적 학식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소설가처럼 인생의 신비에 민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쎄르반떼스는 현실사회라는 것이 어딘가 정말 진짜가 아니고 가상 내지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은 듯하다. 적어도 절대적 이상에 비추어볼 때 상대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사회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외적인 현상을 고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돈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집념에 사로잡힌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 그보다는 사람에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함부로 남의 일에 뛰어들어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해를 가져오는 자기 중심적 유토피아주의자로 볼 수도 있다. 돈키호테가 농부의 머슴인 안드레스를 구해준다고 간섭한 까닭에 안드레스가 더 불행하게 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확실히 희극적이기보다는 풍자적이다.
돈키호테의 광증은 이 작품의 중심 문제이다. 확실히 그의 광증은 평범한 의미의 실성·정신착란·정신이상이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보통 실성한 사람을 비웃는 것은 인륜상 용납되지 않으나 돈키호테의 특수한 광태에 대해서는 마음놓고 웃을 수 있다. 돈키호테는 광인이 아니라 집념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자기의 환상의 성격을 잘 안다. 사실 그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그랬다면 정말 평범한 광인에 불과하다) 자기가 보는 것을 환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집념, 다시 말하면 특별한 신념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병자가 아니라 상상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적 철인이다. 자기가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시인이 주장하는 권리이다. 위에서 우리는 돈키호테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여기서 다시 그가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시적 철학의 대상이 될 뿐이다.
더욱이 제2편에 들어오면 돈키호테의 형이상학적 의미의 밀도가 짙어짐을 아니 느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말하는 진리, 또는 실체란 무엇인가? 사물의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사람은 자기 영혼의 욕구를 충족시킬 진리를 스스로 창안해 낼 수 있는 권리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어떤 조건에서인가? 등등의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이는 궁극적으로 실체와 가상의 충돌에서 빚어지는 인생의 비극과 관련된 문제이다. 현대의 많은 평론가에 의하면, 근대소설은 바로 이 문제를 근본문제로 삼고 있다고 한다. 《돈키호테》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도 근대 사실주의 소설의 아버지가 된다.
돈키호테는 자기가 바라는 대로의 세계가 정말 실현된 듯이 행동하겠다는 고집을 버리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관념이 현실인 듯이 행동한다. 그는 둘씨네아 아가씨에 대해서 환상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둘씨네아가 있는지 없는지는 알 바 아니다. 나는 단지 그 아가씨가 존재해야만 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이 말을 들으면 누구나 키에르케고르 같은 실존철학자들을 생각하게 된다. 개인의 자유로운 실존이 사물의 사실성에 앞선다는 생각 말이다. 중세의 기사도 문학에 대한 공격은 단지 소설의 한 모티브일 뿐이고 이 작품의 진정한 의도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명제에 대한 탐구이다.
돈키호테와 산초 빤싸는 이 심각한 문제를 가운데 놓고 계속적으로 대화를 통해 탐구해 들어간다. 산초는 단지 상식적 인간의 전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근본에 있어서는 돈키호테와 동일한 문제에 봉착하여 있다. 실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주인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제41장에 끌라빌레뇨라는 천마의 모험이 나온다. 산초는 이 모험에서 광명한 천상의 경험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돌아오자 온갖 허황스런 체험담을 늘어놓는데 그 자신이 그것을 믿는지 안 믿는지 확실치 않다. 즉 현실과 상상의 차이가 무시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제23장에서 돈키호테는 몬떼시노스의 동굴 속을 탐험하고 나서 허황된 모험담을 늘어놓았다. 결국 주인과 하인이 꼭 같은 체험에 대하여 꼭 같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돈키호테는 경험담을 말한 산초에게 "산초, 자네가 하늘에서 본 것을 나에게 믿게 하려면, 내가 몬떼시노스 동굴에서 본 것을 자네가 믿으면 되네."라고 말한다. 둘은 꼭같은 철학적 입장에 처해 있어 동지가 된 것이다.
몬떼시노스와 끌라빌레뇨 모험은 두 사람의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믿으려 하는 그들의 의지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렇게 되면 상상의 세계와 현실 세계는 종잡을 수 없이 뒤얽히고 만다. 그들 자신들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제25장에서 <예언하는 원숭이>는 몬떼시노스의 환상이 정말이냐고 산초가 묻자 그것은 정말이기도 하고 가짜이기도 하다고 대답한다. 제62장에서도 마술에 걸린 두상은 몬떼시노스의 모험이 진실이냐 꿈이냐고 돈키호테가 묻자 역시 진실과 꿈이 다 얼마씩 섞여 있다고 대답한다. 이것은 진실이고 저것은 꿈이라고 자신있게 단언하는 자는 실상 우스운 자라는 진리를 쎄르반떼스는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돈키호테는 그저 우스꽝스럽기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그는 상상의 자유를 믿는 용사이기도 하다.
흔히들 돈키호테적 인간과 햄릿적 인간을 대립시켜, 전자를 생각 없이 행동만 하는 타입으로, 후자를 행동없이 생각만 하는 타입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후편의 돈키호테의 철학적으로 성장한 모습을 생각지 않은 얄팍한 상식론에 불과하다.
《돈키호테》의 최후는 확실히 구슬프기 짝이 없는 장면이다. 이상 추구의 용사의 말로가 보잘것없는 시골 홀아비 지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비애감을 준다. 인생이란 그래서 비극이란 말인가? 그러나 한편 그 임종의 장면은 자아의 정화가 성취되는 승리의 순간으로도 볼 수 있다. "집에 계셔서 재산을 돌보시며 자주 고해성사를 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세요."하고 가정부가 그에게 충고한다. 이 평범한 충고는 보통 사람에게는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할 것이지만 환상과 가상으로 가득한 우주의 신비를 탐색하고 돌아온 피곤한 이상주의자에게는 귀중한 충고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긴 여행은 고향의 아름다움을 새로이 발견하게 해 줄 때 가장 의의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진리도 일단 그것으로부터 떨어졌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것을 진리로 알아보게 된다. 쎄르반떼스는 이상만을 추구하라고 설교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현실만이 좋은 것이란 주장도 하지 않는다. 둘은 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이고, 특히 현실은 이상세계에의 모험을 통하여 새롭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암시하는 것이다. 인생은 그저 비극도, 그저 희극도 아니며, 아마도 희비극일 것이다. (출처 : 이상섭)
돈키호테에 대한 다양한 해석
돈키호테에 대한 해석은 각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성주의가 번창하던 17세기에는 돈키호테를 환상적인 소극(笑劇)으로 해석했고, 격식, 양식, 질서 등을 중히 여기던 계몽주의 시대인 18세기에는 돈키호테를 규범화된 양식에서 벗어난 짓을 하는 바보 같은 사람에 대한 풍자로 평가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기사 돈키호테를 이상주의자요, 이상과 현실의 갈림길에 서서 비극적 투쟁을 벌이는 영웅으로 보았다.
돈키호테가 창작될 당시의 스페인
돈키호테가 창작될 당시 스페인은 문학의 황금시대였다. 이 시기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프랑스의 몽테뉴 등이 활약하던 때이기도 하다. 스페인 문학의 황금 시대는 스페인 민족의 교유한 카톨릭 전통에서 생겨난 것으로서 민중적이며, 다정다감하고 하고, 유럽에 비해 덜 학구적이고 철학적이었다. 세르반데스 역시 이탈리아 의 고전주의 내지 귀족적 문학에 대하여 익히 알고 결국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고국 스페인의 민중 문학이 지닌 전통을 따랐던 것이다.
돈키호테의 광증(狂症)
돈키호테의 광증은 이 작품의 주제이다. 확실히 그의 광증은 평범한 의미의 실성(失性), 정신 착란, 정신 이상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실성한 사람을 비웃는 것은 인륜상 용납되지 않으나 돈키호테의 광적인 태도에 대해서는 마음은 놓고 웃을 수 있다. 돈키호테는 광인이라기보다는 집념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자기가 꿈꾸고 있는 환상의 성격을 잘 안다. 사실 그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 자기가 보는 것을 환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이것이 그가 특별한 신념의 사나이로 평가되고, 또한 병자가 아니라 상상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적 철인으로 불리는 이유이다.
'돈 키호테'의 소설사적 의미
'돈 키호테'는 서양 최초의 근대적 소설이며 또한 최대의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작품이 그전의 다른 소설 작품과 비교하여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인물의 묘사와 발전 과정 및 이야기의 역동성과 심리적 진행`이 그 두드러진 차이이다. 보카치오 역시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나, 그의 인물들은 평면적으로 그려진 사회적 전형들로서 사건이 그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그들에게` 발생할 뿐이며, 인물의 성장 발전 과정은 전혀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인물과 이야기의 내적 역동성이야말로 세르반테스가 최초로 소설 문학에 도입한 뛰어난 기교이다.
세르반테스는 수십 년 간에 걸쳐서 이 소설을 쓰면서 그 작중 인물을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작가 자신도 은연중에 성장하였다. 이 역시 근대 소설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개발한 것이 되었다. 애초의 그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 '만인을 즐겁게 해줄' 기막힌 이야기를 들려 주겠다는 단순한 목적에서 시작했을지 모르나, 점점 인간 존재의 가장 심각한 문제들 가상과 실체, 존재와 비존재의 문제 속으로 더듬어 들어갔다. 돈 키호테와 산초는 이 문제의 양면을 각각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두 인물이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에게 반응하는 모습을 그려 낸 솜씨는 만인의 찬탄을 받을 만하다. 그 둘은 점점 서로를 닮아가며 그 둘의 관계는 세르반테스의 정신 속에 은밀히 전개되고 있던 내적 대화의 극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작자는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에게서 인간 실존에 대한 진리를 배우며, 그것을 배워나가는 과정이 또한 그들을 더욱 실감 있게 만드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 소설가의 작가적 성장 과정의 모범이 된다.
'돈 키호테'에 나타난 세계관
일반 독자들은 이 작품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돈 키호테'는 확실히 소극적인 요소가 다분하다. 약간 식견이 있다는 사람들 중에는 이 작품을 중세의 기사도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로 보는 이들도 있다. 특히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들이 그랬고 이 견해는 아직도 서양 역사를 좀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견지하고 있다. 바이런 같은 낭만주의자는 기사도 같은 낭만적 제도를 이 작품이 추방해 버린 것을 오히려 개탄했다. 그러나 역사를 좀더 잘 아는 이들에 의하면 편력 기사 등은 역사적 사실이었다기보다 중세인들의 상상의 산물이었다. 확실히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세르반테스가 기사적인 용맹을 조소했을 리 없다. 그가 조소한 것은 기사도를 주제로 해서 무질서하게 생겨난 우스꽝스런 문학이었다.
다시 말하면 세르반테스의 목적은 사회적,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문학적, 철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사회 개혁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교회와 왕권에 무척 충성스런 온건한 시민이었다. 그를 새로운 세계를 불러들인 현명 분자로 생각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그러나 교회와 왕권에 충성했다고 해서 그가 유독 신앙심이 열렬한 카톨릭 교도였다거나, 애국 열사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단지 전통적 의미의 평민이었다는 말이다. 그는 신학이나 철학의 전문적 학식을 추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소설가처럼 인생의 신비에 민감하였던 것은 사실이다.
세르반테스는 현실 세르반테스는 현실 사회라는 것이 어딘가 정말 진짜가 아니고 가상 내지 환상 같은 데가 있다고 믿은 듯하다. 적어도 절대적 이상에 비추어 볼 때 상대적인 데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이른바 사회 문제가 생긴다면 그 문제는 외적인 현상을 고침으로써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문자 그대로 돈 키호테가 되는 것이다. 돈 키호테는 집념에 사로잡힌 반동적 보수주의자로 간주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보다는 사람에게 정의를 실현한다고 함부로 남의 일에 뛰어들어 자신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해를 가져오는 자기 중심적 유토피아주의자로 볼 수도 있다. 돈 키호테가 농부의 머슴인 안드레스를 구해 준다고 간섭한 까닭에 안드레스가 더 불행하게 된 사건에서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이 장면은 확실히 희극적이기보다는 풍자적이다.
돈 키호테의 광증은 이 작품의 중심 문제이다. 확실히 그의 광증은 평범한 의미의 실성 정신 착란 정신 이상이 아니다. 그렇게 때문에 보통 실성한 사람을 비웃는 것은 인륜상 용납되지 않으나 돈 키호테의 특수한 광증에 대해서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있다. 돈 키호테는 광인이 아니라 집념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자기의 환상의 성격을 잘 안다. 사실 그는 환상을 보는 게 아니라(그랬다면 정말 평범한 광인에 불과하다) 자기가 보는 것을 환상이라고 믿으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집념, 다시 말하면 특별한 신념의 사나이가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는 병자가 아니라 상상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적 철인이다. 자기가 상상한 것을 믿을 수 있는 권리는 모든 시인이 주장하는 권리이다. 위에서 우리는 돈 키호테가 사회학이나 정치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말하였거니와, 여기서 다시 그가 심리학의 대상이 될 수 없음도 단언할 수 있다. 그는 시적 철학의 대상이 될 뿐이다.(출처 : 한계전 외 4인 공저 블랙박스 문학교과서)
기사도(騎士道/chivalry)
봉건시대의 기사계급, 또는 기사가 갖추어야 할 용맹함과 명예심, 예의바름을 뜻하고, 이 단어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슈발리에(chevalier)라는 말은 중세봉건시대의 기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잉글랜드의 법률에 따르면 영지를 받아 기사로서 봉사하는 것을 가리켰다. 에드워드 3세는 기사법정을 설치해 기사들이 죄를 지을 경우 즉결심판했는데, 주로 군사상의 문제를 다루었고 보안무관장(保安武官長)과 문장원(紋章院) 총재가 공동재판을 진행했다.'기사로서 가져야 할 명예롭고 예의 바른 행동'이라는 기사도의 개념은 12~13세기 때 최고조에 달했으며 십자군전쟁으로 인해 초창기의 여러 기사단들이 생기면서 그 의미가 한층 더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때 생긴 기사단에 구호기사단·빈자(貧者)기사단(Order of the Poor Knights of Christ)·성전(聖殿)기사단 등이 있는데 뒤의 두 기사단은 성지 순례자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14~15세기에 들어와 사람들은 기사도 정신의 가치를 전투에 직접 나가는 것보다 귀족들의 과시 행위나 공적인 의식에 더 많이 두게 되었다.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건달 소설 (=악한 소설)
건달, 좀더 정확하게는 '재미있는 무뢰한' 을 뜻하는 스페인어 '피카로(picaro)'에서 유래한 소설 양식의 개념으로 이 양식은 주로 건달의 이야기를 다루며, 기사들의 환상적인 로맨스나 상류층의 이상주의적 문학에 맞서는 하류층 문학, 또는 기존의 관습에 대한 반동의 형태를 지니는 문학으로서의 특징을 가진다. 주로 하층 계급의 속하는 인물이 주인공이 되어, 비정하고 부도덕한 현실 사회에 맞서 재치 있는 임기 응변과 심각하지 않은 탈선을 범하는 일종의 사회적 모험담의 성격이 짙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 는 이 부류의 가장 대표적 작품이며,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모험' 에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나 있다. '피카레스크(picaresque) 소설'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 9. 29(?) 스페인 알칼라데에나레스~1616. 4. 23 마드리드.
스페인이 낳은 가장 위대한 소설가·극작가·시인으로 그의 소설 〈돈 키호테 Don Quixote〉(1605)는 60여 가지 언어로 완역 또는 부분적으로 번역되었고, 꾸준히 판을 거듭하고 있으며, 작품에 대한 비평적 논의도 18세기 이래 줄기차게 계속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라는 두 인물은 미술·연극·영화 등을 통해 널리 알려져 세계 문학의 다른 어떤 허구적 인물들보다도 일반에게 친숙한 모습이 되었다. 세르반테스는 위대한 실험가로서, 서사시를 제외한 모든 주요문학 장르에 손을 댔다. 그는 뛰어난 단편소설 작가였으며, 그의 〈모범 소설집 Novelas exemplares〉에 실린 몇몇 작품은 규모는 작지만 〈돈 키호테〉에 필적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1547년 9월 29일(성 미카엘 축일) 마드리드에서 32㎞가량 떨어진 알칼라데에나레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며, 분명히 10월 9일 세례를 받았다. 본래 하급 귀족이었으나 영락한 가문의 일곱 자녀 중 넷째였고, 아버지는 이발사 겸 외과의로서 접골·사혈 등 사소한 의료행위를 했다. 가족은 여러 마을을 떠돌아다녔으며, 세르반테스가 어렸을 때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 없다. 〈모범 소설집〉에 실린 이야기의 한 대목으로 미루어보아 한때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았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당시 비천한 출신의 작가들까지 포함한 대부분의 스페인 작가들과는 달리 그는 대학에 다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어느 무렵엔가 열렬한 독서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한 공립학교 교장으로 에라스무스적인 지적 성향을 지니고 있던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라는 이름의 어떤 인물을 가리켜 그의 "친애하는 생도"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는 1569년의 일로, 만일 그것이 세르반테스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면 당시 21세였을 미래의 작가는 전에 그 학교의 교생이었거나 아니면 로페스 데 오요스에게 배운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발표한 최초의 시(펠리페 2세의 젊은 왕비 발루아의 이사벨이 죽은 것을 애도하는 내용)가 나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군인 및 노예 시절
1569년 세르반테스는 스페인을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이탈리아로 건너간 이유가 당시 한 난투사건에 가담한 결과 법망에 의해 수배된 '학생'이 그였기 때문이었는지의 여부는 또다른 수수께끼이다. 아무튼 이탈리아로 간다는 것은 당시의 많은 스페인 젊은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출세하기 위해 택하는 길이었다. 그는 한동안 로마에서 추기경 줄리오 아크콰비바 가문의 집사로 일했던 것 같다. 그러나 1570년에는 스페인 왕국령이던 나폴리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보병 연대에 속해 있었으며 약 1년간 그곳에 머물다가 실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셀림 2세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과의 관계는 위기에 이르렀고, 투르크인들은 1570년에 키프로스를 점령했다. 투르크 선단과 베네치아, 교황령, 스페인 해군과의 교전은 불가피했다. 1571년 9월 중순 세르반테스는 '마르케사호'를 타고 출항했다. 이 배는 오스트리아의 후안 공이 이끄는 대함대 소속으로, 이 함대는 10월 7일 코린트 근처의 레판토 만에서 교전에 들어갔다. 치열한 전투는 투르크의 참패로 끝나 이후 투르크는 지중해의 패권을 잃게 되었다. 세르반테스의 무공에 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은 한결같이 그의 용맹함을 입증하고 있다. 열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후방에 남기를 거부하고 격전의 중심에 뛰어들었으며, 가슴에 총상을 2번 입었고 3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손을 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항상 자랑스레 전공을 회상했다고 한다. 1572~75년에는 주로 나폴리에 근거를 두고 군대생활을 계속했다. 나바리논에도 있었고 튀니스와 라골레타의 전투에도 참여했으며, 한편으로 틈만 나면 이탈리아 문학을 접했음이 분명하다. 1575년 9월 세사 공과 요한 공이 스페인 왕에게 보내는 추천장을 지니고 스페인으로 떠난 것은 사령관으로 진급하기 위해서였거나 단순히 군대를 떠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항해에서 타고 가던 배가 난파하여 바이에른 해적선에게 사로잡혀 세르반테스는 형제 로드리고와 함께 당시 이슬람교도 세계에서 그리스도교도 노예매매의 중심지였던 알제리에서 노예로 팔렸다. 그가 지니고 있던 편지들을 발견한 노예상인들이 그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기 때문에 몸값이 올라가 잡혀 있는 기간도 길어졌지만, 한편으로는 4번이나 탈출을 꾀하다 실패했을 때도 사형이나 고문, 신체 손상 등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의 주인이었던 배교자 달리 마미와 하산 파샤는 무슨 이유 때문인지 그에게 상당히 너그럽게 대했다. 같은 시기에 알제리에 잡혀갔던 그리스도교도 포로들의 생활을 기록한 적어도 2개의 문헌에 세르반테스가 언급되어 있는데, 그는 포로 사회에서도 분명히 용기와 지도력으로 명성을 얻었던 것 같다. 로드리고가 자유의 몸이 된 지 3년 만인 1580년 9월 마침내 그의 가족은 성삼위일체회 수도회 수사들의 도움과 중재로 세르반테스의 석방을 위한 금화 500에스쿠도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 시기는 하산 파샤가 팔다 남은 노예들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떠나기 직전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는 세르반테스의 생애에서 가장 모험에 찬 시기로서, 그의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돈 키호테〉에 나오는 포로의 이야기와 알제리를 무대로 한 2편의 희곡 〈알제리의 교통 El trato de Argel〉·〈 알제리의 감옥들 Los banos de Argel〉, 그리고 본격적인 자서전 형식으로는 씌어진 적은 없지만 다른 여러 작품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작가시절
스페인으로 돌아온 뒤, 세르반테스는 여생의 대부분을 이전의 격동과 위험스러운 시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인 방식으로 보냈다. 그는 지루하고 힘든 일을 하며 항상 돈에 쪼들렸던 것 같다. 〈돈 키호테〉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그로부터 25년이나 지난 후의 일이다. 귀국한 뒤 곧 그는 물가가 올랐으며 많은 사람들, 특히 그의 가족과 같은 중류 계층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현저히 떨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레판토 해전에서 거둔 승리는 옛 일이 되고 말았다. 세르반테스의 무훈에 대한 기록은 이제 그가 기대했던 만큼의 보상을 가져다주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사업에 따르는 여러 군데 행정직에 지원해보았으나 허사였다. 고작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581년 왕의 특사로 잠시 오랑에 파견되었던 것뿐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궁정을 따라 새로이 병합된 포르투갈의 리스본까지 갔으나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이무렵 젊은 유부녀 아나 데 비야프란카(또는 아나 프란카 데 로하스)라는 여성과 연애 사건을 일으켰고, 그결과 딸 이사벨 데 사아베드라를 낳았다. 이사벨은 그의 유일한 딸이었고 뒤에 그의 집에서 자랐다. 그후 1584년 자신보다 18년 연상의 여인인 카탈리나 데 살라사르 이 팔라시오스라와 결혼했다. 그녀는 라만차의 에스키비아스 마을에 작은 영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애정관계가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세르반테스가 어쩔 수 없이 오랫동안 집을 떠나 있어야 할 때가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결혼이 그럭저럭 괜찮은 동반 관계로 자리잡았다고 보아서 안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가 당시 쓰고 있던 시나, 최초로 출판된 소설이자 새롭게 유행하던 전원 로맨스 〈라 갈라테아 La Galatea〉(1585)의 등장인물들이 카탈리나에게서 영감이나 모델을 얻었다고 보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 출판업자 블라스 데 로블레스는 이 작품에 1,336레알을 지불했는데, 첫 작품치고는 만족할 만한 값이었다. 이 작품을 아크콰비바의 친구 아스카니오 콜론나에게 헌정한 것은 후원을 얻으려는 시도였으나 소득이 없었던 것 같다. 시인 루이스 갈베스 데 몬탈보를 위시한 문학 친구들의 도움으로 이 책은 세르반테스에게 고급 독자층 사이에서의 명성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작가의 생전에 이 작품이 스페인어로 다시 발간된 것은 1590년의 리스본판과 1611년의 파리판뿐이었다. 〈라 갈라테아〉는 이야기 중간에서 갑자기 끝나버리는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쓰겠다고 여러 번 의사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아 세르반테스는 분명히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스페인 연극의 황금기가 막 시작되려던 이무렵에 세르반테스는 극작에도 손을 댔다. 1585년 가스파르 데 포라스라는 극장 지배인과 2편의 극을 쓰기로 계약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일찍이 썼던 작품 중 가장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술회했던 〈혼동 La confusa〉이다. 수년 뒤에 그는 이 시기에 20~30편의 희곡을 썼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적어도 관중의 야유는 받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의 수는 확실하지 않으며, 남아 있는 것은 〈라 누만치아 La Numancia〉·〈알제리의 교통〉 2편뿐이다. 그는 9편의 희곡을 들고 있으나, 그중 몇몇 작품은 제목으로 미루어보아 뒤에 〈8편의 새 희곡과 8편의 막간극 Ocho comedias, y ocho entremeses nuevos〉(1615)에 실린 작품들의 원형인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의 주요도시에는 상설극장들이 설립되고 있었고 전에 없이 오락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희곡 시장은 급성장했다.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 나타난 로페 데 베가는 스페인 연극에 자신의 독창성을 부여해 그의 작품에 비하면 세르반테스의 것들까지 포함한 이전의 모든 희곡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어색한 것이 되었다. 극작가로서는 실패할 것이 뻔했음에도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극작품을 받아줄 지배인들을 계속 찾아다녔다. 1587년경에는 글을 써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해져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는 무적함대를 위한 식량조달관이 되었다. 농촌에서 억지로 옥수수와 기름을 차출하는 일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으나, 결국 이것이 그의 고정직이 되었다. 일 때문에 그는 안달루시아 지방 일대를 돌아다녀야 했고, 이는 작품을 살찌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그는 미로처럼 복잡한 재정적 문제의 책임을 맡고 있었고, 장부상의 수지를 맞추지 못할 때는 상관들과 거듭 반복되는 불화를 겪었다. 또한 시나 교회 당국과 끊임없는 마찰을 빚었고, 교회로부터는 여러 차례 파문을 당했다. 문제시된 회계와 협상에 관해서는 상당한 자료들이 남아 있다.
1588년 무적함대가 참패한 뒤에 스페인의 상업 중심지이자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 가운데 하나인 세비야로 갔다. 1590년 서인도제도 의회에 지원하여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비어 있는 4개의 요직 가운데 하나라도 얻기 원했으나, 그의 청원은 깨끗이 거절되었고 회계에 대한 분쟁과 급여 체불은 계속되었다. 그는 문단과 어느 정도 교분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몇 권의 책을 샀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것들을 읽으려 시간을 냈음이 분명하다. 1592년에 로드리고 오소리오라는 극장 지배인에게 6편의 희곡을 써주기로 계약했으나 무산되고 말았다. 조달관 업무는 계속되었고, 분쟁은 막바지에 이르러 1592년 9월 카스트로델리오에 며칠간 감금되었다.
1594년 마드리드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 다시금 안달루시아로 돌아가 체납된 세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승진에 해당하는 일이기는 했으나 이전 일보다 나을 바가 없었고, 전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곤란과 분쟁이 따르는 일이었다. 세르반테스에게는 사업가 기질이 없었다. 아마도 상호 합의에 의해 그 임무는 1596년에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그 전해에 그는 사라고사에서 열린 시 경연대회에서 1등상(은수저 3개)을 수상한 바 있었고 세비야로 돌아와 비로소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메디나 시도니아 공작의 행실에 관한 심술궂은 풍자 소네트나 이어서 당시에 서거한 국왕에 대한 은근히 불경스런 소네트가 씌어진 것도 이 시기였다. 다시금 그는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1597년 여름에는 3년 전에 맡았던 회계에 차질이 생겨서 세비야 왕실 감옥에 감금되어 1598년 4월말까지 그곳에 있었으며, 세르반테스는 그곳에서 〈돈 키호테〉를 구상한 듯하다. 이후 4, 5년간의 행적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세비야를 떠나 아마도 잠시 에스키비아스와 마드리드에서, 그리고 분명히 바야돌리드(1601~06년 왕의 궁정이 그곳에 세워졌음)에서 〈돈 키호테〉의 첫부분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초기 단편들 중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Rinconete y Cortadillo〉·〈질투심 많은 엑스트레메뇨 El celoso extremeno〉는 프란치스코 포라스 데 라 카마라가 잡다한 글들을 엮은 미발표 선집에 실리게 되었다.
1604년 7월(또는 8월)에 세르반테스는 출판업자이자 서적상인 프란치스코 데 로블레스에게 〈라만차의 현명한 신사 돈 키호테 El ingenioso hidalgo Don Quixote de la Mancha〉의 저작권을 팔았다. 그가 받은 액수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9월에 출판이 허가되었고, 1605년 1월에 발간되었다. 출판되기도 전에 책의 내용이 당시 세르반테스와 최악의 관계에 있던 로페 데 베가를 비롯해 여러 사람에게 알려졌으리라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텍스트의 상당히 많은 오류들이 오랫동안 저자의 실수로 여겨졌으나, 오늘날 많은 오류에 대한 책임이 마드리드에 있는 후안데라쿠에스타인쇄소의 식자공들에게 있음이 밝혀졌다. 〈돈 키호테〉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599년에 나온 마테오 알레만의 〈 구스만 데 알파라체 Guzman de Alfarache〉 제1부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1605년 8월 이전에 마드리드에서 2판, 리스본에서 2판, 발렌시아에서 1판을 찍었고, 뒤이어 1607년에 브뤼셀, 1608년에 마드리드, 1610년에는 밀라노, 1611년에는 다시 브뤼셀에서 판을 거듭했다. 〈라만차의 현명한 기사 돈 키호테의 제2부 Segunda parte del ingenioso cavallero Don Quixote de la Mancha〉는 1615년에 나왔으며, 1612년에는 토머스 셸턴이 번역한 제1부의 영역판이 나왔다. 세르반테스의 이름은 곧 스페인뿐 아니라 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도 알려졌다.
그러나 저작권을 팔았다는 것은 그가 자신이 쓴 소설의 제1부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재정적 이익을 누릴 수 없음을 의미했다. 그는 후원자와 관련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해야 했다. 책을 젊은 공작 베야르에게 헌정한 것은 실수였으나, 훨씬 더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던 레모스 남작과 톨레도의 대주교 산도발 이 로야스와는 좀더 나은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되어 레모스 남작에게 제2부와 3편의 작품을 헌정했다. 그리하여 재정적 형편이 다소 나아졌으나 세르반테스는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국민적 작가로서 인정받기를 갈망했으며, 로페 데 베가나 시인 루이스 데 공고라 이 아르고테에 견줄 만한 명성을 원했다. 자신의 변변하지 못한 위치에 대한 의식은 〈파르나소로의 여행 Viage del Parnaso〉(1614) 또는 이후의 2~3편의 서문들, 그리고 몇 가지 외적 자료들을 통하여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교적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야심과 소설 형식에서의 지칠 줄 모르는 실험 의욕은 남은 생애가 12년도 채 남지 않은 57세의 세르반테스로 하여금 가장 왕성한 창작기를 맞이하게 했다.
한편 가정생활도 여의치 못했다. 1605년 6월 바야돌리드에 있는 집앞 길에서 칼부림이 일어나 어처구니없게도 온 가족이 체포되었다. 뒤에 그들이 마드리드로 궁정을 따라갔을 때도 그는 여전히 돈문제로 분쟁에 휘말렸으며, 이사벨의 시끄러운 결혼문제까지 겹쳐 끊임없이 고통을 받았다. 가족은 그뒤 여러 해 동안 여러 동네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카예데레온에 정착했다. 당시의 많은 작가들처럼 세르반테스도 1610년 나폴리 총독이 된 레모스 남작의 비서직을 얻고자 했으나 실망만 안게 되었다. 1609년에 당시 유행하던 종교단체인 '지복성사의 노예'(Slaves of the Most Blessed Sacrament)에 가입했던 그는 4년 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재속 회원이 되었는데, 이는 보다 진지한 결단이었다. 또한 1612년에는 일종의 작가 단체인 아카데미아 셀바헤에 참여하는 등 문단 생활에 전보다 활발히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듬해에 12편의 소설이 실린 〈모범 소설집〉이 발표되었다. 그 서문에 유일하게 알려진 작가의 자화상이 실려 있다. "독수리 같은 생김새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 부드럽고 훤한 이마, 명랑한 눈매, 균형이 잘 잡힌 매부리코, 20년 전까지만 해도 금발이었으나 하얗게 세어버린 수염, 커다란 콧수염, 작은 입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이빨들, 이빨은 이제 6개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건강하지도 않고 아래윗니가 제대로 맞지도 않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키에 피부색은 흰 편이다. 어깨는 다소 묵직하고, 걸음걸이는 그다지 가볍지 않다." 이 서문에 밝힌 대로 세르반테스가 카스티야 방언으로 최초로 독창적인 노벨라(이탈리아풍 단편소설)를 썼다고 한 주장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으나 각 작품의 정확한 창작 연대는 불확실하다. 선집에는 약간의 다양성이 있어, 크게 로맨스에 기초한 이야기들과 사실적인 이야기들로 구분된다. 악한소설과 비슷한 노벨라 〈개들의 대화 El coloquio de los perros〉와 그 틀이 되는 이야기인 〈 사기 결혼 El casamiento enganoso〉은 아마도 〈돈 키호테〉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작품들일 것이다. 17세기에는 낭만적인 이야기들이 더 인기가 있어서, 제임스 매브는 이런 이야기만을 면밀히 선별하여 1640년에 영역판을 냈다. 19~20세기에는 사실적인 이야기들을 선호했으나, 다른 이야기들도 공정한 평가를 받았다.
1614년에 세르반테스는 〈파르나소로의 여행〉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신화를 모방하여 풍자적 어조로 쓴 긴 알레고리 시로, 산문으로 된 후기가 덧붙어 있다. 당대의 많은 시인들을 칭송하는 한편 몇몇 시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으며, 작가는 시를 쓴다는 것이 자신에게 쉬운 일이 아님을 인정하면서도 시야말로 결코 경시되어서는 안 될 순수예술이라고 경의를 표하고 있다. 자신의 희곡 중 단 1편도 상연되지 않으리라 낙심한 그는 1615년 그중 8편을 골라 8편의 희극적인 막간극과 함께 〈8편의 희극과 8편의 막간극〉이라는 책으로 엮어냈다. 그 희극들은 창의성과 독창성이 부족하지는 않으나, 연극이라는 매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막간극들은 걸작으로 간주된다.
세르반테스가 〈돈 키호테〉 제2부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1614년 7월말 이전에 절반 이상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9월경에 날조된 제2부가 타라고나에서 알론소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라는 신원불명의 아라곤인에 의해 발표되었다. 이 책은 나름대로 장점도 있으나 원전에 비하면 조잡한 것이었다. 로페 데 베가의 찬미자였던 이 작가는 서문에서 세르반테스에게 근거 없는 모욕을 퍼부었는데, 세르반테스는 당연히 반격하여 응수했다. 하지만 당대의 어떤 문학적 경쟁자들 사이에 오간 욕설에 비하면 그의 반격은 비교적 절제된 것이었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소설 제59장 이하에서도 페르난데스 데 아베야네다와 '가짜' 돈 키호테 및 산초에 대한 비판을 싣고 있다. 〈돈 키호테〉 제2부는 1615년말 제1부를 펴냈던 같은 인쇄소에서 출간되었다. 그것은 1616년 브뤼셀과 발렌시아에서, 1617년 리스본에서 재인쇄되었고, 1617년 바르셀로나에서는 처음으로 제1·2부가 합본되었다. 제2부의 프랑스어 번역판은 1618년에, 영역판은 1620년 이전에 나왔다. 제2부는 제1부에 잠재된 가능성을 작가의 목적에 맞게 이끌어내어 친숙해진 테두리 안에서 내용을 다양하게 발전시키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2부가 제1부보다 더 풍부하고 심오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말년의 세르반테스는 여러 편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바 있으나, 그것들은 실제로 씌어지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발표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로는 〈베르나르도 Bernardo〉(스페인의 전설적인 영웅의 이름)·〈정원에서의 주일들 Semanas del jardin〉(〈데카메론 Decameron〉 형식의 이야기집)·〈라갈라테아〉 속편 등이 있다. 실제로 출판된 작품은 마지막 로맨스인 〈페르실레스와 시히스문다의 사역:북방의 이야기 Los trabaios de Persiles y Sigismunda, historia setentrional〉(1617, 사후 출판)뿐이다. 거기에서 세르반테스는 사랑과 모험을 내용으로 하는 영웅 로맨스를 헬리오도로스(230경~240 활동)의 〈아이티오피카〉풍으로 개작하려 했는데, 이는 17세기 프랑스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될 지적으로 탁월한 장르였다. 교훈과 오락을 동시에 제공하려는 의도를 지닌 〈페르실레스〉는 로맨스가 지닌 신화적·상징적 잠재력을 활용한 야심적인 작품으로 발표되자 큰 성공을 거두어 2년 만에 스페인어로 8판이 나왔고, 1618, 1619년에는 각기 프랑스어 번역판과 영역판이 나왔다.
죽기 3일 전에 쓴 헌정사에서, 세르반테스는 '이미 한 발을 말 등자에 올려놓고서' 감동적인 어조로 세상에 하직을 고하고 있다. 그는 마지막까지 맑은 정신을 잃지 않고 최후의 평정한 상태에 도달했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생각되었던 것처럼 1616년 4월 23일이 아니라 4월 22일에 사망했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며, 매장 확인서에 따르면 바로 다음날 '카예데칸타라나스'(지금의 카예데로페데베가)에 있는 맨발의 삼위일체회(Discalced Trinitarians)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그러나 무덤의 정확한 위치는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남긴 유언장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요성과 영향
세르반테스의 가장 위대한 작품 〈돈 키호테〉가 나온 것은 1세기 이상에 걸쳐 이루어진 스페인 산문소설 작가들의 혁신적이고 다양한 성취의 결과였다. 그 직전에 악한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작품들이 갑작스레 유행했었는데, 세르반테스 역시 〈린코네테와 코르타디요 Rinconete y Cortadillo〉라는 악한소설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6세기의 다른 어떤 종류의 소설들보다도 많이 출판되었으나 당시 스페인에서는 눈에 띄게 쇠퇴해가던 장르였던 기사도 로맨스의 패러디인 〈돈 키호테〉는 흔치 않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인 노신사는 그러한 로맨스들을 읽는 데 중독이 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져서 그 이야기들을 역사적 사실로 믿으며 자신도 순례기사가 되어 세상에 나가 몸소 기사도 로맨스를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주인공의 행적이 기본적으로 사실적인 소설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은 개발할 만한 괄목한 잠재력을 지닌 것으로 입증되었다.
돈 키호테, 산초 판사, 돈 키호테의 말 로시난테 등은 즉시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아 1605~17년 페루에서 독일로 이어지는 축제 행렬에도 이들의 모습이 등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그 책을 이후 세대들이 그러했듯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으나, 16세기말에는 특히 외국에서 그 주가가 치솟았다. 〈돈 키호테〉는 산문으로 된 일종의 서사시로 간주되었고, 작가의 아이러니가 지닌 '장중하고 진지한 어조'는 찬탄의 대상이 되었다. 때로는 이것을 정치적이거나 기타의 내용을 싣고 있는 위장된 풍자로 보는 비의적 해석들도 나타났다. 노신사를 점차 동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독일 낭만주의자들에 의한 해석적 변형의 시작을 알렸으며, 가장 희극적인 책의 우스꽝스러운 주인공은 가장 슬픈 책의 비극적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그 같은 왜곡에도 불구하고 세르반테스의 소설은 오늘날 의심할 여지 없는 깊이를 드러내고 있다.
현대소설사에서 〈돈 키호테〉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소설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 증거는 디포·필딩·스몰렛·스턴 등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스콧, 디킨스, 플로베르, 페레스 갈도스, 멜빌, 도스토예프스키 등 19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주요작품들과 연관되어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어 왔다. 나아가 조이스에게서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사실주의 이후의 20세기 많은 작가들에게도 〈돈 키호테〉의 영향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영향'이라기보다는 세르반테스가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닌 가능성의 핵심을 갈파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뿐 아니라 〈돈 키호테〉는 다른 장르나 매체의 예술가들에게도 탁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17세기 이래 이 소설을 바탕으로 많은 연극·오페라·발레·음악 작품이 만들어졌으며, 20세기에 들어서는 영화·텔레비전·만화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또한 〈돈 키호테〉는 호가스·고야·도미에·피카소 등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작품의 삽화로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것들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E. C. Riley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모방욕망과 소설이론 :
모방욕망과 소설이론
1. 모방-욕망의 삼각형
르네 지라르의 관심은 소설 주인공의 욕망분석을 통한 소설이해의 새로운 시각을 찾는 문학비평에서 출발하여 여기서 발견한 인간의 욕망구조에서 기인하는 인간의 본질적 폭력을 막는 장치를 문화적 제도 속에서 찾는 문화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이런 사실은 그가 문학비평가일 뿐만 아니라 사회학자 혹은 문화인류학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라르의 일차적 관심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욕망은 어떻게 행해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다. 여기서 그는 중 요한 두 가지 사실을 찾아낸다. 소설 주인공들이 비자발적인 욕망을 하면서도 스스로는 때로 자발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낭만적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과, 그러다가도 소설 결말에 가서는 진실로 돌아온다는 사실이었다. 이런 진실을 외면해온 기존의 낭만적 비평가들의 문학 연구태도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소설이해의 길을 연 그의 최초의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 문학비 평가로서의 그의 작업이었다면, 이같은 욕망의 구조하에서 인류가 공동체를 꾸려올 수 있었던 메커니즘을, 폭력발생과 그 방지책 을 중심으로 연구한 『폭력과 성스러움』, 『희생양』, 『세상 설립 이래 감추어져 온 것들』 등의 저서는 문화인류학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는 작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사회학을 주창한 뤼시엥 골드만은 그의 『소설사회학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소설사회학의 연구는 루카치와 르네 지라 르에서 출발했다.”라고 쓰고 있다.1)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17세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19세기 스탕달의 『적과 흑』, 20세기 초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욕망의 양태를 살피면서, 주인공들이 자신의 욕망 에 대해 스스로 여기고 있는 자발적 욕망이라는 것은 환상이며 실은 그 욕망은 비자발적인 욕망이라는 것을 밝혀내고 있다.
비자발적 욕망의 구조는 욕망주체와 그 대상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직선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 주체로 하여금 그 대상을 욕망 하게끔 유발하는 제삼자로서의 타자가 존재하는 삼각형적인 구조이다. 이때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이 타자는 욕망의 모델인 동시 에 대상과 주체를 연결시켜주는 중개자<仲介者 )>가 된다. 이런 욕망의 구조는 직선적인 2항구조가 아니라, 주 체와 대상 사이에 중개자가 들어있는 3항구조가 되는데, 이를 가리켜 지라르는 ‘삼각형적인 욕망’ 혹은 ‘중개된 욕망’, ‘모방된 욕망 이라 명명하고 있다.
가령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가 멋진 기사도를 꿈꾸면서 유명한 기사 아마디스를 흠모할 때, 그의 모든 행동은 자연히 아마 디스를 뒤따르고 있어, 그의 욕망은 자연스레 아마디스의 욕망을 모방한 욕망(모방욕망)이 되면서 아마디스에 의해 중개되고 있 다. 돈키호테는 자신이 아마디스를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굳이 감추지 않고 오히려 자랑스럽게 외치고 있다.
산쵸, 난 저 유명한 골족의 아마디스가 가장 완벽한 방랑기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려주고자 하네. (……) 그와 마 찬가지로 아마디스는 모든 용감한 기사와 애인들의 북극성이요, 새벽별이요, 태양이라네. 그래서 사랑과 기사도의 깃발 아래 말 을 달리는 우리는 모두 그를 모방해야 하지. 내 친구 산쵸, 그러니까 말일세. 그를 제일 잘 모방하는 기사는 완전한 기사도에 가 장 가까이 갈 수 있지 않겠나.2)
스탕달의 『적과 흑』에서도 욕망의 모방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 양상은 조금 복잡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고 있는 베리에르 의 시장인 레날씨는 자기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그 고장의 수재인 줄리앙 쏘렐을 가정교사로 채용하려 한다. 그러나 지라르는 레 날씨의 이 욕망을 자식에 대한 애정의 발로인 자발적인 욕망으로 보지 않는다. 레날씨의 이 욕망은, 그 도시에서 레날씨 다음으 로 영향력 있는 발르노씨라는 사람이 쏘렐을 그의 집 가정교사로 채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나온, 쏘렐을 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나온 욕망, 즉 비자발적 욕망이라는 것이다.
돈키호테의 중개자는 그가 탐독하는 기사도 이야기에 나오는 멋진 기사 아마디스이며, 레날씨의 욕망의 중개자는 발르노씨인 셈이다. 아마디스와 발르노씨는 다 같은 중개자이지만 그 양상은 다르다. 우선 돈키호테는 위 예문에서처럼 아마디스가 자기욕망 의 모델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레날씨는 발르노씨를 모방하여 욕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 기면서 오히려 자신의 욕망은 자발적인 욕망으로 비치기를 바라고 있다.
여기서 지라르는 돈키호테의 경우와 같이 욕망주체와 중개자의 거리가 먼 중개를 <외적중개(mㄹiation? externe)>라고 부르고, 레날씨의 경우와 같이 중개자와의 거리가 가까운 중개를 <내적중개(mㄹiation interne)>로 구분한다. 외적중개에 서 돈키호테가 아마디스를 모방하듯이 내적중개에서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모방이 일어나고 있지만, 욕망주체는 타인의 욕망에 대 한 모방을 조심스럽게 감추면서, 자신의 욕망이 자발적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 이 두 중개의 큰 차이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시대적인 차이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시간적으로 거리가 멀수록 인물들은 돈키호테처럼, 자신의 욕망의 모방성을 인정하는 외적중개를 하고 있고,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레날씨처럼, 자신의 모방을 인정치 않는 내적중개를 하 고 있다는 차이 말이다.
이 두 가지 중개 중에서 지라르의 관심을 더 많이 끈 것은 내적중개의 경우이다. 그것은 내적중개에서 선망, 질투, 증오와 숨 은 원한과 같은 폭력의 씨앗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2. 폭력-증오와 원한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나 역사상의 위인을 전범(典範)으로 삼고서 그를 모방하는 외적중개는 그 모방 자체를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지 않으므로 감추거나 숨기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욕망주체의 심리에 아무런 갈등도 일으키지 않고 어떤 문제도 일으키 지 않는다.
이에 반해 비교적 현대로 올수록 많이 나타나는 내적중개에서는 내면적으로는 모방하면서도 모방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면서 그 사실을 감추고 있는데, 이런 현상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지라르는 앞서 얘기한 시대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에서 찾고 있다. 가령 17세기의 돈키호테와 아마디스 사이에는 건너뛸 수 없는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순신과 오늘날의 군인, 예수와 기독교인, 공자와 옛 선비들은 분명 동일한 지평에 존재할 수 없을 만큼 엄연한 차이가 존재하고 있기에 외적중개 가 일어나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감출 필요도 없다. 오히려 그런 모방 자체를 자랑스럽게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의 『적 과 흑』에서는 내적중개가 일어나고 있는 레날씨의 중개자는 발르노씨이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레날씨와 발르노씨는 ‘ 같은’ 대상을 욕망하는 ‘같은’ 입장의 개인들이다.
이같은 내적중개의 극단적 경우의 욕망주체들은 레날씨와 발르노씨처럼 동일한 대상을 욕망하는 동일한 신분과 입장에 처한 개 인들이다. 그런데 이처럼 욕망주체와 그 중개자의 거리가 아주 가까워질수록 문제는 복잡해진다. 대상에 대한 충동은 곧 중개자 에 대한 충동인데, 이 충동은 그것을 가르쳐준 바로 그 중개자에 의해 오히려 제지당하게 된다. 중개자 본인이 자신이 가르쳐준 그 대상을 소유하고 있든지 아니면 그것을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같은 중개자의 위상을 가리켜 지라르는 적절하게 ‘이중명 령(double bind)’이라 부르고,3) 이처럼 욕망주체와 너무 가까운 사이여서 경쟁관계를 비롯한 온갖 갈등을 빚는 내적중개의 중 개자를 특별히 ‘짝패(double)’라고 부른다.4) 이 표현은 각 개인들 사이의 변별적인 차이가 점점 줄어들어 모두가 쌍둥이와 같 은 욕망주체와 중개자 사이가 되어버린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모든 욕망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과 너무나 흡사한, 그 래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경쟁자(중개자)에 대한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인간욕망이 거의 대동소이한, 다시 말해 무차별 상태 에서는 결국 인간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악마와도 같은 짝패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극단적인 내면중개 속에서의 중개자는 외적중개에서처럼 단순한 욕망의 모델이라는 중개자의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의 실현을 가로막는 방해자인 장애물의 역할도 행하고 있다. 바로 이때 욕망주체는 그 중개자에 대해 ‘가장 순종하는 경애심’과 함께 동시에 ‘가장 강렬한 악의’라는 분열된 감정을 동시에 갖게 된다. 이것이 바로 <증오>라는 감정의 실체 이다.
그 스스로 우리에게 불어넣어준 욕망을 우리가 만족할 수 없도록 막는 그 존재야말로 진정한 증오의 대상이다. 이때 증오하는 자는 우선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데, 그것은 그 증오가 숨기고 있는 (그 증오의 대상에 대한) 은밀한 찬양 때문이다. 이 절망적인 찬양을 타인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숨기기 위해 그는 중개자를 장애물로만 보려한다. 결국 세심하게 모방되는 모델이라 는 중개자의 원래 역할은 감춰지고 중개자의 두 번째 역할만이 전면에 나서게 된다.5)
욕망하는 자가 자기욕망의 중개자를 증오하게 되면, 자기욕망의 기원인 그 모델을 증오하는 것이므로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증오하는 셈이 된다. 이렇게 되면 욕망주체는 모델을 자신의 욕망을 낳게 한 기원으로 보지 않고 단지 자신의 욕망의 실현을 가 로막는 방해자로만 보게 된다. 이와 동시에, 사실은 자신의 욕망보다 먼저 존재한 모델의 욕망을 은연중에 자신의 욕망보다 뒤에 생겨난 것이라고 믿게 되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허위의식(mauvaise foi)이 생겨나게 된다. 이 허위의식에는 자신과 타인의 욕망 이 닮은 것은 자신이 그 타인의 욕망을 모방해서가 아니라 그 타인이 자신의 욕망을 모방하였기 때문이라고 믿는 것도 포함된다.
왜 이같은 현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현대로 올수록 인간들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자율 적 인간’이라는 덕목 때문일 것이다. 자율적 인간이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것을 판단, 결정하는 자이다. 이 런 덕목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분위기에서는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율적인 인간이 아니라 자율적·독창적이기만을 바라는 현대인의 여망은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이루고 있다 고 볼 수 있다. 돈키호테와 아마디스처럼 중개자가 시·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진 사이가 아니라, 아주 가까워서 심지어는 자 신의 바로 옆 사람, 동료가 되어 있는 현대사회일수록, 즉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없어진 무차별화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과 차이가 나기를 더 바라고 있는 것이다.
욕망주체는 자신과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가까운 중개자에 대해 묘한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 중개자가 갖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안으로는 은밀하게 욕망하면서도 겉으로는 철저히 폄하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처럼 거의 차이도 없을 정도로 아 주 닮아 있는 가까운 사이인 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묘한 입장을 가리켜 지라르는 ‘악마 같은 적(ennemi diabolique)’이라 칭하 고 있다.
차이가 없는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생겨나는 대표적인 감정으로는 증오 외에도 질투와 선망, 숨은 원한 등이 있다. 모든 내적 중개와 마찬가지로 질투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항상 자발적이라고, 다시 말해 오로지 그의 욕망은 그 대상에서만 연유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중개자에 의해 이미 소유되고 있거나 중개자에게 더 유리한 위치에 있을 때 그 욕망 주체는 스스로를 어떤 가혹한 부정의 희생물로 간주하면서 자신이 처한 이런 상황의 정당성을 의심하려 한다. 이렇게 되면 중개 자와의 관계는 동일한 대상을 향한 경쟁의 관계가 되는데, 그럴수록 중개작용은 더욱더 가속화되게 되고 중개자의 위력은 더 커 지고 이 주체가 볼 때 중개자와 대상은 더 가깝게만 보여질 따름이다. 이런 의미에서 선망, 질투, 무기력한 원한 등을 두고 스탕 달이 ‘현대적 감정’이라고 부른 것은 의미심장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감정들은 예전에는 없던 것이 현대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대로 올수록 심해지는 가까운 사이의 내적중개의 부작용들이 바로 이런 감정들이기 때문이다.
이 현대적 감정들이 만연하는 것은, 유감스럽고 기이하게도 선망의 기질이나 질투심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점점 없어져가는 세계에서 이 내적중개가 더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6)
오늘날에 올수록 욕망의 모방성을 쉽게 찾아내기가 힘들다. 그것은 예전보다 모방이 적게 일어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전보다 훨씬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가장 강렬한 모방일수록 가장 강렬하게 부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내적중개가 극심해지면서 자율적 욕망은 줄어든다.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에 의해 욕망된 대상을 욕망 할 만한 것으로 그대로 믿는 타율적인 욕망이 성행하게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속물(snob)’이나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조장하는 ‘유행의 노예’가 생겨나고 있는 원인을, 인간의 모방본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가 없어진다는 것은 욕망주체와 중개자 사이의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장애물 로 나타나는 중개자를 극복하기는 더욱더 어렵게 된다.7)
3. 낭만적 거짓/소설적 진실
지라르의 소설분석에서 뛰어난 점은 세르반테스, 스탕달, 프루스트, 도스토예프스키 등 서구의 중요한 소설가들의 소설을 통해 인물들의 욕망이 중개되고 있다는 것, 즉 욕망이 모방에 의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을 밝혀낸 점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뛰 어난 것은 그의 소설 결말에 대한 분석일 것이다.
인물들은 중개된 비자발적 욕망을 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자발적인 욕망을 하고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지라르는 이 런 태도를 ‘낭만적’이라 부르고 이런 태도에서 나오는 욕망을 ‘형이상학적 욕망’이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모두 ‘ 낭만적 거짓’에 속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지적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설 속의 인물들은 계속해서 이런 낭만적 거짓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욕망 을 하고 있지만, 그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소설가 자신은 이미 그런 태도의 허구성을 인식한 사람이므로, 때로는 독자들에게 자 신의 인물들이 자발적 욕망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보여주면서 혼자 즐기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자기인물들을 행동하고 말하게 해놓고는 한쪽 눈을 흘낏하면서 우리에게 그 인물의 중개자를 내보이는 것이다. 소설 가는 그의 인물이 내세우는 욕망위계의 헛된 주장을 믿는 것처럼 하여 안심시키면서도 은밀하게 진정한 욕망의 위계를 다시 세워 나가는 것이다.8)
여기서 우리는 또다시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작가와 작중인물의 내면세계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의 내면과 작품의 내면세계가 일치하지 않는 유일한 장르가 소설이라는 주장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런 불일치도 소설의 결 말부분 이전에서만 그러하다. 서로 일치하지 않던 작가와 인물의 의식이 만나서 화해하는 순간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소설의 결 말부분이다. 결말에 가서 작가가 인물의 낭만적인 태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작중인물이 작가의 태도 쪽으로 개종하게 된다. 작중인물은 그때까지 자신이 지니고 있던 낭만적 거짓을 인식하고서, 즉 자신의 욕망이 모방에서 나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중개 의 굴레를 벗어나면서 죽어간다. 가령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 스테판은 죽음이 임박해지자 낭만적 거짓에서 벗어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난 일생 동안 거짓말만 해왔다. 진리를 말할 때조차 난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 말했다. 전에도 알고는 있었지 만 깨닫게 된 것은 바로 지금에 와서이다.9)
또한 아마디스를 숭배하면서 그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던 돈키호테도 소설 결말부분에 가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거짓된 태도를 자각하면서 죽어간다.
이제야 난 자유롭고 분명한 판단력을 갖게 되었다네. 이젠 더 이상 슬프고도 지긋지긋한 그놈의 저주할 기사도책의 탐닉이 날 가렸던 무지의 환영에 싸여 있지 않다네. 이제는 그것들이 터무니없었고 또 날 속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겠어.10)
이 순간의 돈키호테는 기존에 갖고 있던 형이상학적 욕망을 포기하는 돈키호테이다. 자신의 욕망을 지배해온 중개자의 존재를 폭로하면서 더 이상 이 중개자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골의 아마디스와 그 부류의 수많은 군인들은 모 두 나의 적일세. 오늘에서야 신의 은총으로 내 자신을 희생하고 나서야 난 현명해졌다네. 난 그들이 정말 지긋지긋해.” 11) 라 고 고백하는 것이다.
욕망중개를 인정하는 것은 자기욕망의 비자발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욕망의 비자발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의 독창성을 부인하 게 되는 것이 된다. 당연히 이것은 자신의 자존심에 심한 타격을 입히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소설의 결말부분은 낭만적이고 형이상학적이던 이전의 단계를 초월하는 진정으로 숭고한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소설의 대단원에 나타나는 이런 대전환은 다름아니라 이같은 ‘진실에의 도달’이다. “거짓이 진실에게 자리를 내주며, 타자에 대한 욕망은 자신에 의한 욕망으로, 빗나간 초월은 수직적 초월로 바뀌게”12)되는 이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부분적이거나 상대적인 변화가 아니라 전면적이고 절대적인 변화이며 이전 단계에 대한 완전한 해체와 재구성이라 할 수 있다. 결말에 이르기 전의 소설인물들이 그러했듯이, 형이상학적 욕망에 사로잡힌 낭만적 거짓의 태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서, 이처럼 뚜렷이 드 러나는 소설결말의 특징을 무시하는 ‘낭만적’인 비평가들을 지라르는 비판한다. 소설인물들은 이미 그 단계를 초월했는데도 여 전히 그 단계에 안주해 있다는 것이다.13)
낭만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욕망을 견지하던 소설 주인공들이 수직적 초월을 통해서 진실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지라르의 소설결 말 분석은 사실 천편일률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지라르는 바로 이같은 진부함을 인정할 때에 소설의 참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소설결말의 진부함은, 전에는 ‘독창적’이었으며 지금은 처음에는 망각에 의해, 다음에는 ‘재발견’과 ‘재건’에 의해 다시 독창적이 될 수 있는, 지엽적이거나 상대적인 진부함이 아니다. 그것은 서구문명의 본질적인 것의 절대적인 진부함이다. 소설의 대단원은 개인과 사회, 인간과 성스러운 것 사이의 화해이다. (……) 소설가는 이 마지막 순간에 서구문학의 모든 정상에 도달 한다. 즉, 위대한 종교적 모랄과 숭고한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이 도달하기에 가장 힘든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14)
소설결말의 한결같은 진부함 때문에 그것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낭만적 경향의 비평은, 현실 자체의 진부함을 인정하 지 않는 것과 같다. 그들이 진부함을 인정치 않으려 하는 것은 소설인물이 형이상학적인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유와 같다. 소설결말의 진부함을 인정하게 되면 욕망의 모방을 인정하게 되고, 욕망의 모방을 인정하게 되면 자기 자신의 바탕인 독창성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지라르가 이 책의 제목으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이라 이름붙인 까닭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지라르의 생각에 따라서 소설인물의 의식세계의 변화를 중심으로 우리는, <독창성이나 자발적 욕망이라는 낭만적 거짓의 세 계 속에서 진실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결말에 가서야 진정한 세계, 즉 소설적 진실에 도달하는 과정의 이야기>로 소설을 정의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진실은 결말에 가서야 도달하게 되므로, 과정의 이야기 자체인 소설의 세계는, 정확히 말해 소설본문의 세계는, 아직은 형이상학적인 낭만적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그에게 있어서도 역시, 소설은 문제적 자아에 의한, 타락한 세계 속에서 진정한 가치에 대한 타락한 추구의 이야기이다.”라는 골드만의 지적에 수긍할 수 있게 된다.15)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지라르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소설 주인공의 내면세계의 개종과정으로 이해하면, ‘낭만적 거짓에서 소설적 진실까지’가 소설의 진정한 주제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4. 짝패의 위기:폭력의 위기:새로운 대안―사랑
지라르의 소설인물 욕망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개인의 차이가 점점 없어져가는 현대로 올수록 성행해져가는 내적중개의 부작용 으로 원한과 증오, 질투, 선망 등의 짝패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같은 짝패의 갈등은 모방을 본능으로 타고난 인간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숙명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짝패의 갈등은 인류의 숙명이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잠재적인 폭력이며 폭력의 잠재태이다. 또한 여기서 나오는 폭력은 하나의 국가가 성립할 때마다 행해져온 가장 근본적인 폭력이었다는 점에서 지라르는 이것을 ‘초석적 폭력’이라고, 그 리고 그대로 내버려둘 경우 그에 대한 복수로서 다른 폭력을 유발시킨다는 의미에서 ‘상호적 폭력’이라 부른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의 짝패가 되어버린,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는 이런 상황은 지라르의 표현대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대립’이며, 홉 스의 표현대로 ‘만인의 투쟁’인 셈이다.
결국 자연발생적인 상태에서의 인간의 현실은 이런 상호적 폭력의 확대 재생산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는 꼭 그러하지만 은 않았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질서와 체제를 유지해오면서 문명을 이루어왔다. 이때 우리는,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인류는 과연 어떻게 해서 질서를 유지해올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 의문은 곧 짝패의 갈등을 감추면서 이 근원적인 위기 로부터 문명의 질서가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의문에 대한 천착의 결과가 그의 대표적 저서인 『폭력과 성스러움』이다. 이 책에 의하면 짝패갈등, 즉 모방위기의 극복 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애초에 폭력의 발생을 막으려는 금기가 첫 번째 것이라면, 폭력이 발생하더라도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희생제의가 그 두 번째 것이다. 금기는 개인이나 계층 사이의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애초부터 아예 ‘저 사람은 나와 같다. 그러므로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욕망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을 품지 않게 하여 그 타인을 중개자로 삼 지 않도록 하는 효과를 갖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금기는 개인들 사이 의 동일성, 혹은 무차별성을 인정치 않으려는 장치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금기라는 이름의 이런 제도적 장치의 본질은 개인 들 사이의 동일성이나 무차별을 없애는 차별화(diffㄹenciation)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희생제의는 자연발생적인 상호적 폭력으로부터 집단전체가 당할 피해를 막거나 그 피해의 정도를 줄이기 위해서 다 른 대상에게로 폭력을 돌리는 제도이다. 희생제의에 쓰이는 희생물을 선정하는 기준에서 지라르는 폭력의 주요한 속성을 찾아내 는데, 일단 발생한 폭력은 어떤 식으로든 외부의 대상을 향해 분출되고 만다는 것과, 희생제의에 쓰이는 희생물은 폭력의 실제대 상과 가장 유사한 것으로 그 폭력을 속이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결국 희생제의는 폭력의 실제대상을 희생물로 대체하여 폭력 을 속이고 있는 ‘희생대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희생제의가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결조건이 필요하다. 집단전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가장 무관한 어떤 개인에게로 폭력의 방향을 돌리는 것은 그 폭력을 당하는 개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하나의 폭력임에 틀림없다. 이렇 게 볼 때, 희생제의는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다’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로서 자연발생적 복수와 같은 폭력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 이런 혼란을 막기 위한 선결조건은 이들 폭력 사이의 차별화이다.
집단전체를 향하던 애초의 폭력은 마땅히 거부해야 할 ‘나쁜 폭력’이며, 희생물에게 가하는 폭력은 집단전체를 구원한다는 숭고한 의미를 담고 있는 ‘좋은 폭력’으로 차별화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폭력에도 좋고 나쁜 것이 있게 되는데, 지라르는 전 자의 폭력을 ‘본질적 폭력’ 혹은 ‘불순한 폭력’이라고 후자의 폭력을 ‘순수한 폭력’ 혹은 ‘순화적 폭력’이라 구분해서 칭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금기와 마찬가지로 희생제의도 그 본질도 ‘차별화’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차별화의 기준은 무엇일까? 온갖 전쟁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성전(聖戰)’이라는 이름에서 암시받을 수 있 듯이, 순화적 폭력에는 ‘성스러움’이라는 속성과 함께 명예와 권위가 부여되어 있다.
이처럼 희생제의는 집단의 단합을 꾀하는 기능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대립’을 ‘만인 대 일인에 대한 대립’으로 전환시키는 데서 나오고 있다. 집단전체가 엄청난 피해를 당하여 민심이 분열되는 사건이 있고난 뒤에는 항상 그 사 건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되어지는 어떤 개인에 대하여 집단전체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단죄라는 희생제의가 있어왔다는 것을 우리 는 익히 알고 있다.
‘만인 대 일인의 대립’ 자체는 이미 일인보다는 만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다. 자연발생적인 폭력과 이 폭력을 징벌하는 재판이라는 이름의 폭력 사이에는, 그 본질은 똑같은 폭력이라 하더라도 그 권위와 속성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나타낸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차이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어느 시대에나 재판제도가 있었던 사회에서는 재판을 집행하는 담당자 는 예외 없이 권위를 부여받았다는 사실은 이런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재판장의 높은 좌석이나 법복이라는 이름의 색 다른 복장 등은 다 차별을 조성하기 위한 장치이다. 바꾸어 말하면, 모든 권위는 차별화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들 사이의 유사성을 거부하는 이런 금기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도전당해 왔었다. 천부인권설이나 사회계 약론으로 대표되는 인간평등사상은 이런 금기를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인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만인의 욕망이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욕망의 중개자 즉 짝패가 되어버린 현대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위에서 말한 의미의 금기는 그 효과가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라르가 조사했던 자연발생적인 상호적 폭력을 막는 방책들 중에서 아직 그 효력이 남아있는 것으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을 희생제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제도에 의지하면 되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제도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다수가 소수에게 행하는 박해가 바로 희생제의인 것이다. 이처럼 이 제도는 근본적으로 약육강식의 힘의 논리, 혹은 숫자의 논리에 다름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은 길은 무엇일까? 인류의 숱한 박해의 기록물들 속에서 희생제의의 흔적들을 살펴본 『희생양』의 결말에 가서 지라르는, 진부하게 들릴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다음과 같이 사랑을 대안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행하는 그들을 우리는 마땅히 용서해야 할 것이다. 우리 서로를 용서해야 할 시간은 왔다. 기 다리기만 하기에는 더 이상 시간이 없다.16)
여기서 우리는 지라르가 왜 갑자기 용서, 즉 사랑을 주장하는 것인지 그 까닭을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 그 해답은 사실 이미 그의 출발점에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보았던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그가 구분했던 두 가지 유형의 욕망의 중개에 서 지금껏 문제시해온 것은 내적중개였다. 그렇다. 돈키호테의 예에서 보았듯이,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중개지 외적중개는 아니 다. 인류가 지금까지 내적중개로만 치달려 왔다면, 지금부터라도 외적중개, 즉 우리로부터 거리가 먼 모델을 모방하는 쪽으로 방 향을 돌릴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모델로는 무엇이 적당할까? 지라르는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염두에 두고 있다. 여기서 우 리는 지라르는 기독교인으로 거듭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진식
1954년 출생. 서울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출처 : http://newcentury.netian.com/letter/mun3.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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