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KAPF)에 대하여
by 송화은율카프(KAPF, Korea Artista Proleta Federatio,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 1922년 이적효, 이호, 최승일, 심훈, 송영, 김영팔 등에 의해 조직된 행동적인 좌익운동체 <염군사>와, 이듬해 김팔봉, 박영희, 안석주, 김형원, 이익상, 이상화 등에 의해 조직된 무산계급문학운동 단체 <파스큘라>가 합동하여 1925년 8월 박영희, 김팔봉, 이호, 김영팔, 이익상, 박용대, 이적효, 이상화, 김온, 안석주, 송영 등을 발기인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곧 이어서 이기영, 한설야, 박세영, 박팔양 등이 가입, 당시 가장 강력한 예술단체로서 계급주의적인 좌익문학을 지휘하였고, 1926년 1월 기관지 <문예운동>을 발행하여 예술성보다 계급의식을 중요시하고 작품 창작보다 이론전개에 더 치중하였다. 1927년 일본에 있던 조중곤, 김두용, 홍효민, 한식 등이 귀국, 종래의 미온적이던 문화주의를 비판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전국대회를 열고 보다 급진적인 슬로우건을 채택, 기관지 <예술운동>을 발간했다.
이 무렵 염상섭, 양주동 등의 소위 국민문학파 및 김화산의 아나키즘과 논전을 벌였고, 자체 내에서도 내용과 형식, 창작방법론 등을 중심으로 논쟁을 전개했다. 1930년경 일본에서 귀국한 임화, 권환, 김남천, 안막 등이 카프의 불셰비키화를 부르짖어, 카프의 사상적 내분이 싹텄다. 1931년 6월 제1차 검거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고, 이듬해 10월 박영희가 퇴맹원을 제출함으로써 이른바 전향기에 돌입, 1934년 5월 제2차 검거 사건으로 80여 명이 경찰에 체포되지 마침내 이듬에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신문학사 탐구] (14회) 한국문학이냐 문학이냐?
객 : 카프문학이 우리 근대문학사의 뼈대 중의 하나라는 것은 사실인 모양인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주 이 점이 궁금해집니다. 원래 인간이라는 종자가 정치적 동물인 까닭일까. 혹은 이데올로기를 향한 열정을 타고난 까닭일까.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해방공간에서의 저 격렬한 좌우익 문학이데올로기 논쟁들, 70~80년대에 그 왕성했던 민중적 문학론들의 근거는 무엇일까. 카프문학을 대할 적마다 저는 이 점이 궁금해집니다.
주 : 인간 자체가 선험적으로 지닌 이데올로기 지향성도 검토해 볼 만하지요. 문학 자체가 일종의 관념형태이니까. 그러나 먼저 시대정신이랄까, 일종의 유행성을 염두에 둘 필요가 없을까. 서구에서도 마르크스주의가 20세기 최대의 사회사상이었지요. 근대가 기본적으로는 국가간 민족간의 경쟁, 침략, 식민지화, 전쟁에 휘말린 시대 아니었던가. 그 근본원인은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하는 자본주의국가의 모순에서 말미암지 않았던가. 이 자본주의체제를 사회주의에로 바꾸기만 하면 우선 그런 모순이 해소될 수 있다는 논리만큼 매력적인 것이 있을까.
객 : 설득력이랄까 호소력이 제일 강했다는 것과 그것이 과학(진리)이라는 것과는 별개 아닙니까. 칼 포퍼는 마르크스주의가 반증을 거치지 않은 사상이기에 절대로 과학일 수 없는 한갓 신화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지만('역사주의의 빈곤')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설득력 탓이겠지요. 당대의 과학이란 그러니까 한갓 설득력으로 구성된 픽션에 지나지 않겠지요. 토머스 쿤이 말하는 패러다임의 일종이라고나 할까.
주 : 설득력을 내세운 시대정신에 매달린다면 갈 데 없는 상대주의가 아니겠는가. 인간의 선험적인 이데올로기 지향성에 기대는한 그것은 형이상학(관념)에 떨어지는 것. 이데올로기가 지닌 아포리아(배리)가 아닐 수 없지요. 이런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워 준다는 뜻에서도 역사공부의 값이 있지 않겠는가. 제가 카프문학에서 이 점에 초점을 거듭 맞추는 까닭도 이 점에 있을 따름.
객 : 전주사건이 몰고 온 최대의 쟁점이 소위 전향론 아닙니까. 그것도 상대주의 범주인가 혹은 절대주의(관념) 범주인가요.
주 : 역사공부란 자료의 분석에서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그 분석에 영향을 줄 요소는 일단 멀리할 필요가 없을까.
객 : ················.
주 : 전북 금산서에서 좌익청년을 신문한 결과 카프 소속 극단 '신건설사'와 관련되었음이 드러남. 전주에서 공연한 작품은 '서부전선 이상없다'(레마르크). 이를 계기로 전주서가 중심이 되어 '신건설사' 임원 및 카프 중요 문인 거의 대부분을 검거함. 총 60여명 중 23명이 기소됨. 1934년 8월에서 1935년 12월까지 약 1년 반 복역. 최종 판결은 1935년 12월28일. 전원 집행유예로 석방됨. 전주법원에서 벌어진 재판 장면은 김남천의 3회에 걸친 상세한 방청기(그는 조선중앙일보 특파원자격)가 남아 있음.
객 : 한 가지 궁금한데요. 이미 전향선언(얻은 것은 이데올로기요 잃은 것은 예술 자신)을 한 바 있는 박영희를 비롯, 이기영, 한설야, 권환, 백철까지 검거되는 판에 임화가 어째서 빠졌을까. 당시 그가 카프 서기장이었는데. 김남천은 공산주의협의회 사건으로 복역한 바 있었기에 이해가 되긴 하지만.
주 : 병 때문이었다는 기록도 있긴 하나 불투명하지요.
객 : 집행유예로 풀려난 이들의 태도랄까 행동규범에 대한 감각이 전향론의 핵이겠는데.
주 : 카프사건이란 근본적으로는 일본국가의 사상통제방식의 일환인 만큼 그 문맥에서도 접근해 볼 필요가 없겠는가. 일본사법부가 공산당을 대거 검거한 것은 1931년이었으며, 공산당 두목격인 사노, 나베야마 두 사람의 긴 옥중 전향문이 나온 것은 1933년 5월이었지요. 미결수 30%, 기결수 36%가 이 성명을 따랐다고 지적되어 있습니다. 방대한 전향사상범을 사회에 복귀시키는 문제가 대두될 수밖에. 사상범 보호관찰법(1936)이 만들어졌으며, 각 지방재판소 부설로 보호관찰심사회가 설치되고 그 위원은 검사, 판사, 경찰관, 형무소 당국자등이었지요. 이 법체계가 조선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던 것이지요. 전향자의 보호란, 생활인으로 사회에 복귀시키기와 그들을 감시하기의 이중적 기능을 가진 셈. 사상범이란 정치범이기에 죄인일 수 없지만, 그렇다고 방치할 수도 없는 존재니까. 1938년까지 1만3,000명이 사회로 복귀했음.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을까. 전조선전향자대회(1938.7.21, 부민관)도 있었거니와, '사상객들은 전시하에 얼마나 전향했는가? 경성보호관찰소에 나타난 현상'('삼천리', 1938.5)에 나타난 통계를 보면 150명. 보호관찰소의 알선으로 17명이 생활안정을 얻었고 복직한 교원이 6명, 공직에 나아간 자가 31명.
객 : 이런 상황을 다룬 소설이 한설야의 유명한 '이녕'(1939), 김남천의 '등불'(1942)이겠군요. 출옥한 주인공이 보호관찰소의 알선으로 창고회사에 취직한 것이 '이녕', 모회사 구매계에 취직한 것이 '등불'. 입에 풀칠하기는 해결될지 모르나 이런 굴욕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작가의 모럴감각이 운명처럼 그려져 있어 안타깝더군요. 방향모색의 시기라고나 할까. 이 점에서 30년대 중반 이후의 문학은 중요하더군요. '주인공.성격.사상'(임화)이냐, '세태.사실.생활'(김남천)이냐의 갈등도 리얼리즘의 수준을 가늠해 주는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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