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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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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평양은 옛조선의 서울이다. 은(殷)을 이기고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방문하였을 때, 기자가 홍범(洪範) 구주(九疇)의 법을 일러주었으므로 무왕은 기자를 이 땅에 봉하였으나 신하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곳의 명승 고적으로는 금수산(錦繡山), 봉황대(鳳凰臺), 능라도(綾羅島), 기린굴(麒麟窟), 조천석(朝天石), 추남허(楸南墟) 등이 있는데, 영명사(永明寺)의 부벽정(浮碧亭)도 그 중의 하나였다.

영명사는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구제궁(九梯宮)이었다.

이 절은 성밖 동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있는데, 굽이굽이 흘러가는 긴 강을 옆으로 하고 앞으로는 평원을 바라보매 아득하기 가이없으니, 참으로 승경(勝境)이었다.

 

날이 저물어 그림 그린 상선(商船)들이 대동문(大同門) 밖에 있는 유기(柳磯)에 닿으면 사람들은 으레 강물을 따라 올라와 이곳을 구경한 후에 돌아가곤 하였다.

 

부벽정 남쪽에는 돌로 된 사닥다리가 있는데, 왼쪽은 청운제(靑雲梯), 오른쪽은 백운제(白雲梯)라 한다. 돌에다 글자를 새기고 화주(華柱)를 세워 구경꾼들의 흥미를 끌었다.

 

정축년(丁丑年)에 개성에, 사는 부호가의 아들 홍생(洪生)이 있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비록 나이는 어리나 글을 잘하였다. 홍생은 팔월 한가위날을 맞아 면사(綿絲)를 사려고 친구들과 함께 평양장에 포백(布帛)을 싣고 와서 강가에 배를 대었다.

성중(城中)에서 구경나온 기생들이 홍생을 보고 모두 눈짓을 하였다.

때마침 성중에 사는 홍생의 친구 이생(李生)이 잔치를 벌여 홍생을 환영하였다. 술이 취한 뒤 배로 돌아갔으나 밤은 서늘하고 졸음도 오지 않았다. 문득 옛날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의 시를 연상하며 맑은 흥취를 진정하지 못하여 작은 배를 불러 달빛을 가득 싣고 노를 저으면서 강물을 따라 올라가 곧 부벽정 밑에 이르렀다.

홍생은 뱃줄을 갈에 매어두고는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가 난간에 비겨 시를 낭랑히 읊었다.

 

때마침 달빛은 환하고 물결은 흰 비단 같아 청학과 기러기의 울음 소리를 듣자 마치 하늘 위 옥황님이 계신 곳인 듯싶었다. 한편 옛서울을 돌아보니 내 낀 외로운 성에 물결만 철썩거릴 뿐이었다. 그는 고국(故國)의 흥망을 탄식하며 여섯 수의 시를 잇달아 읊었다.

부벽정 높은 곳에 홀로 올라 읊으니

구슬픈 강물 소리는 애끊는 듯하여라

고국이 어디런고 영웅은 간 곳 없고

황성(荒城)은 지금까지 봉황의 얼굴이라

모래에 달빛 희니 기러기는 아득하구나

숲속엔 내 걷히어 반딧불이 날고있네

인사(人事)는 변천하여 풍경조차 쓸쓸하다

한산사(寒山寺) 깊은 곳에 종소리만 들려오네.

님 계신 구중 궁궐 가을 풀만 쓸쓸한데

갈수록 아득해라 높은 바위 구름길은

청루(靑樓)는 어디 있나 변화는커녕 자취도 없고

담 너머 희미한 달 찬 까마귀 우지진다.

풍류는 간데 없어 진토만 남았도다

적막한 외로운 성에 가시가 덮여 있네

어즈버 물결 소리 의구히 울어 옐 제

주야로 쉬지 않고 깊은 바다 향하누나.

쪽(藍)처럼 푸르도다 대동강 굽이굽이

슬프다 천고 흥망 한한들 어이하리

금정(金井)에 물 마르고 담쟁이만 드리웠네

석단(石壇)엔 이끼 낀 채 능수버들 늘어졌네

타향의 좋은 풍월 한없이 시만 읊고

정든 고국 생각에 술이 건들 취하누나

달빛이 밝은 탓인가 졸음조차 아니 오고

계수 그늘 밤 깊은데 매운 향내 풍겨 온다.

오늘이 한가위라 저 달빛은 곱구나

외로운 옛 성터를 바라볼수록 슬프도다

기자묘(箕子廟) 뜰 앞에는 늙은 숲이 우거지고

단군사(檀君祠) 벽 위에도 담쟁이가 얽히었네

영웅은 자취 없어 어디로 돌아갔느뇨

초목만 의희(依稀)한데 몇 해나 되었더냐

옛날이 더욱 그립구나 둥근 달만 의구하도다

맑은 빛이 흘러흘러 객의 옷에 비치네.

동산에 달 뜨거라 잠든 오작 왜 나느냐

깊은 밤 찬 이슬은 나의 옷에 함초롬

문물은 천년이라 옛모습은 간데 없고

산천을 변천하여 허물어진 성뿐이라

하늘에 오르셨는가 님은 아니 돌아오고

인간에 끼친 얘기 무엇으로 증거하리

누런 수레 기린 타고 가신 자취 아득하다

풀 우거진 옛길 위에 홀로 가는 저 선사(禪師)야.

찬 이슬 내렸으니 온갖 초목 다 지겠다

청운교냐 백운교냐 우뚝우뚝 솟았구나

수나라 사졸들은 여울에서 구슬피 우는구나

가을 매미 울음 소리 동명왕의 넋이런가

옛길에 내 끼고 수레 소리 간데 없네

푸른 솔 우거진 곳 늦은 종만 처량하다

높이 올라 읊으련만 뉘라서 화답하리

바람 맑고 달빛 흴 때 흥만 겨워하노라.

홍생은 시를 다 읊고 난 뒤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한 구절을 읊을 때마다 슬픈 뜻을 걷잡지 못하여, 비록 퉁소와 노래의 유창한 화답은 없다 하더라도, 구슬픈 운율은 넉넉히 깊은 물에 잠긴 용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에 실린 과부를 울릴 만하였다.

 

어느덧 밤이 깊어 돌아오려 할 때에 서쪽에서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홍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절에 있는 중이 찾아오는 것이겠지?'

 

그러고는 앉아서 기다리니 뜻밖에도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을 두 아이가 좌우에서 모시고 따르는데, 한 아이는 옥 파리채를 들었고 다른 아이는 비단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인의 위의(威儀)는 정제하고 그 몸가짐이 귀족집 처녀 같았다.

 

홍생은 뜰 아래로 내려가 담 틈에 비껴 서서 그녀의 태도를 엿보았다. 그 여인은 남헌(南軒)에 기대 서서 달빛을 바라보며 곱게 시를 읊는데, 그 풍류와 기상이 매우 얌전했다. 시녀가 비단 방석을 펴니 여인은 다시금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에서 방금 시 읊는 소리가 났는데 갑자기 어디로 가버렸소? 나는 요물이 아닙니다. 다만 좋은 저녁을 맞이하여 구름 없는 하늘에 달이 둥실 솟고 은하수 맑은 가에 백옥루(白玉樓) 차디찬데 계수 그림자 비낀 이때 한잔 마신 후에 읊어서 그윽한 회포를 풀어 이 밤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홍생은 한편으론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여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이내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여인은 곧 시녀를 시켜 그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아씨 명령을 받들어 모시러 왔나이다."

 

홍생은 시녀를 따라서 그녀의 앞에 가 예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인은 별로 공손한 태도도 보이지 않고 시녀를 시켜서 낮은 병풍으로 앞을 가려 단지 얼굴 반쪽만 서로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말했다.

"아까 그대가 읊은 시는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의아하게 생각지 말고 나에게 다시 들려주세요."

 

홍생은 그 시를 빠짐없이 다시 들려주었다. 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와는 시를 논할 만하구려."

곧 시녀를 시켜서 술을 주는데, 차려놓은 모든 음식이 인간의 것과 같지 않아 먹으려 해도 딱딱하고 술맛 역시 쓰기만 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

 

여인은 한번 빙긋이 웃으면서 시녀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속세에 살던 선빈데 어찌 백옥례(白玉醴)와 홍규포(紅 脯)를 알겠습니까. 얘야, 빨리 신호사(神護寺)에 가서 절밥을 조금만 빌려오너라."

 

시녀가 얼른 절밥을 얻어왔으나 간장이 없는지라 또 시녀를 시켜 주암(酒巖)에 가서 간장을 얻어오게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서 잉어적을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 음식을 먹는 동안 그 여인은 홍생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계전(桂箋)에 써서 시녀를 시켜 홍생에게 건넸다.

 

부벽정 오늘 저녁 달빛은 더욱 밝구나

한없는 맑은 얘기 느낌이 어떻더냐

의희한 나뭇빛은 푸른 일산(日傘)처럼 퍼져 있고

고요히 이는 강물은 흰 비단을 둘렀는 듯

광음(光陰)은 흘러흘러 비조(飛鳥)같이 빠르거늘

세사(世事)는 속절없어 놀란 물결 무상해

이날 밤 깊은 정회(情懷) 뉘라서 알쏘냐

깊은 숲 풍경(風磬) 소리 한 소리 또 한 소리.

옛성을 바라보니 대동강이 여기로구나

푸른 물결 맑은 모래 울어 예는 저 기러기

기린은 오지 않고 고운 님을 여읜 뒤에

퉁소 소리 끊어지고 높은 무덤뿐이로다

갠 메에 비 오려나 내 시(詩)는 이미 이루었네

외로운 절은 고요하나니 술 한잔에 건들 취해

술 속에 빠진 동타(銅駝) 가련할손 차마 보랴

몇천 년 묵은자취 뜬구름이 되었구나.

풀 밑에서 슬피 우니 쓰르라미 소리로다

오르니 높은 정자 생각조차 아득할 때

그친 비 남은 구름 옛일이 슬프도다

떨어진 꽃 흐르는 물에 세월을 느끼네

가을이라 밀물 소리 더욱더욱 비장하구나

물에 잠긴 저 다락엔 달빛마저 처량하이

알게나! 이곳은 옛날의 번화지라

거친 성 늙은 나무 남의 애를 끊는구나.

금수산(錦繡山) 앞이러냐 강산도 가려 하구나

단풍은 붉은 채로 옛성을 비춰주고

가을밤 방추(紡錘) 소리 유달리 요란하구나

배 저어라 한 곡조에 어정(漁艇)은 돌아오네

바위에 비긴 고목 담쟁이는 얽혀 있고

숲속에 누운 빗돌 이끼 가득 끼었구나

말없이 난간에 비겨 옛일을 생각하니

달빛과 파도 소리 슬픔을 자아내네.

성긴 별은 몇 개냐 푸른 하늘 속삭인다

은하수 맑고 옅고 달빛은 밝을세라

아느냐! 번화로운 옛일은 이제야 헛것이라

저승을 기필(期必)하랴 이승에서 만나보세

술 한잔 가득 부어 취해본들 어떠하리

풍진(風塵)의 삼척검(三尺劍)을 마음에다 둘쏘냐

만고의 영웅들도 진토 되었으니

세상에 끼친 것은 헛이름뿐이로다.

이 밤이 어찌 됐나 밤은 이미 깊었구나

담장 위에 걸린 달은 오늘 저녁 둥글건만

진토를 떠나가다 님은 어찌하려느뇨

한없는 즐거움을 나와 함께 누리리라

강 위의 구슬 다락 사람들은 흩어지고

뜰 앞엔 예쁜 나무 이슬 처음 듬뿍할 때

묻노라 어느 때에 서로 거듭 만나려나

봉래산 복숭아 익고 푸른 바다 마른다네.

홍생은 그 시를 읽고 매우 기뻐, 그녀가 빨리 돌아갈까봐 좋은 이야기로 만류하려고 이렇게 물었다.

"미안하지만 당신의 성씨와 보계(譜系)를 듣고자 하옵니다."

"예, 이 몸은 옛날 은왕(殷王)의 후예요 기씨(箕氏)의 딸입니다. 나의 선조 기자(箕子)님께서는 처음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예법과 정치를 한결같이 성탕(成湯)님의 유훈을 따라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오래도록 문화가 빛났는데 갑자기 국가와 민족이 비운에 빠져, 나의 선고(先考) 준왕(準王)께서는 필부의 손에 패하여 드디어 국가를 잃으시고, 위만(衛滿)이 틈을 타서 보위(寶位)를 도적하니 나 같은 약질은 이때를 당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죽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 거룩한 선인이 나타나셔서 나를 어루만지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 본디 이 나라의 시조(始祖)로서 부귀를 누린 뒤에 바닷섬에 들어가 선인이 된 지 벌써 수천 년이 되었느니라. 그대는 나와 함께 상계(上界)에 올라가 즐겁게 노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시기에 곧 응낙하였더니, 그분은 나를 데리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 이르러 별당을 지어 나를 접대하고, 또 나에게 삼신산의 불사약을 주셨습니다. 이 약을 먹고 나니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고 기분이 상쾌해져서, 공중에 높이 떠서 우주를 굽어보며 세계의 명승지를 빠짐없이 유람하였는데, 어느 날 가을 하늘이 맑고 유난히 밝은지라 별안간 멀리 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달나라에 올라 광한청허지전(廣寒淸虛之殿)을 구경한 후 수정궁(水晶宮) 안으로 가 항아(姮娥)를 방문하였더니, 항아는 내 절개가 곧고 글월에 능통하므로 꾀어 이르기를 '인간 세상에도 명승지가 없지 않으나 모두 풍진이 소란하니, 어찌 청천에 한 번 솟아 흰 난조를 타고 맑은 향내를 계수에 뿜으며 옥경(玉京)에 설렁이고 은하에 목욕하는 것과 같겠느냐?' 하고는 즉시 나를 향안(香案)의 시녀로 하여금 양쪽에서 모시게 하니 그 기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녁에 갑자기 고국 생각이 간절하여 하계의 인생을 내려다보니, 산천은 의구하나 인물은 간데 없고 명월은 내를 덮고 백로는 티끌을 씻은지라, 옥경을 하직하고 슬며시 내려와 조상님 무덤을 배알한 후 부벽정에 올라 시름을 달래려 하였는데 마침 당신을 만나 한없이 기쁘기도 하고 또한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더구나 노둔(駑鈍)한 붓을 들어 아름다운 시에 화답했으니, 시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마음속에 품은 생각을 대충 말한 것입니다."

 

여인은 비참한 어조로 이렇게 답했다.

홍생은 머리를 숙여 절하며 말했다.

"하토(下土)의 어리석은 이 백성이 초목과 함께 썩음이 마땅하온데, 어찌 갸륵하신 선녀님과 시를 창수하리라고 꿈엔들 기약하였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의 모든 것을 청산하지 못한 저는 주시는 주식도 먹지 못하고, 다만 글자를 대략 알았을 정도이므로 내려주신 시를 읊어 보았사오니, 다시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로 제목을 삼아 한 편 사십운(韻)을 지어 저에게 가르쳐주심이 어떻겠나이까?"

 

여인은 곧 응낙하여 붓을 풀어 한 번 쓰는데 마치 구름과 내가 서로 찬란히 얽힌 듯하였다.

부벽정 달 밝은 밤 높은 하늘 옥로(玉露) 내려

오동에 맑은 빛이, 은하수도 잠겼어라

희디흰 삼천리요 아리따운 열두루(樓)에

구름도 한 점 없고 두 눈에는 맑은 바람

흐르는 물 뜨는 배에 다정스레 따르는구나

선창(船窓)도 엿보면서 갈꽃 물가 비쳐주네

예상곡(霓裳曲)을 들으려나 옥도끼로 깎았던가

금조개로 집을 짓고 탑 그림자 비꼈도다

지미(知微)와 구경하거나 공원(公遠)과도 놀아보세

달빛 차니 까치는 놀라 날고 오(吳)의 소는 헐떡인다

은은한 곳 푸른 메요 둥글둥글 바다 위를

님과 함께 거닐리라 주렴 고리 높이 걸곤

오강(吳剛)은 계수 깎고 이백(李白)이 술잔 멈춰

찬란한 비단 병풍 수놓은 채 휘장 치고

보배 거울 처음 걸고 얼음 바퀴 구를 때

금물결은 쓸쓸하고 은하수는 떨어지네

금두꺼비 베려나 옥토끼를 사냥할 때

먼 하늘에 비 처음 개고 좁은 길에는 내 녹았네

숲에 솟은 헌함(軒檻) 아래 깊은 못물 굽어보고

머나먼 길 아득 잃고 고향 친구 만났도다

좋은 시를 주고받아 이름난 술 가득 부으니

아껴보세 이 광음을 취하도록 또 한 잔

화로 속의 까만 숯불 게 끓이는 쟁개비라

용봉탕을 맛보려나 항아리에 가득 찼네

외로운 솔의 학은 울고 네 벽에는 귀뚜라미

호상(胡牀)의 말 끝나면 먼 물가에 노닐리라

황성(荒城)은 의희하고 우는 잎은 소소할 때

붉은 단풍 누런 갈은 쓸쓸하기 그지없네

선경(仙境)엔 천지 넓고 진토에는 세월 빨라

벼 익은 옛 궁터요 고목 우거진 들의 고사(古祠)라

남은 자취 빗돌뿐인가 흥망은 백구(白驅)에게 물어보리

맑은 빛이 몇 번 찼는고 인생이란 하루살이

고운 님은 어디 가고 궁궐조차 절이 됐노

깊은 숲속 가린 휘장 반딧불만 번득인다

옛적 일도 슬프건만 오늘 근심 어이하리

목멱산(木覓山)은 단군터요 기자 여기 오셨던가

굴 속에 무엇 있나 기린 자국 완연하이

들판에서 주운 물건 숙신(肅愼)의 화살이라

선녀는 용을 타고 문사 또한 붓을 멈춰

난초라 매운 향내 푸른 공중에 풍기누나

곡조를 마친 뒤에 하직이란 웬 말이냐

바람은 고요한데 놋소리만 처량하구나.

여인은 다 쓰고 나서 붓을 던져버리고는 공중에 높이 솟아 간 곳이 없고, 다만 시녀를 시켜서 홍생에게 말을 전하였을 뿐이다.

"옥황님의 명령이 엄하셔서 나는 곧 흰 난조를 타고 돌아갑니다. 다만 청아한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하여 몹시 섭섭합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홍생이 앉은 자리를 걷어가고 그 시를 날려버렸다. 대체로 이런 일을 인간 속세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홍생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동안 서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지라 난간에 홀로 기대 서서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한 말들을 기록하고, 또 좋은 인연을 얻어서 흉중에 쌓인 이야기를 다 못했음을 한탄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비갯더니 구름이야 하염없이 한 꿈이라

가신 님은 언제나 퉁소 불며 돌아올꼬

대동강 푸른 물결 무정하다 마소서

님 여읜 저곳으로 슬피 울며 나는구나.

다 읊고 나자 산사에서 종이 울리고 물가 마을에서 닭이 노래를 부르는데 달은 서천에 걸려 있고 샛별만 반짝이며, 뜰 아래의 쥐와 상 밑의 벌레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홍생은 초연히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론 온몸이 수굿하여 다시금 유(留)할 수 없으므로 서둘러 돌아와 배에 올라타고 옛 물가에 닿았다. 그가 돌아온 것을 안 친구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물었다.

"도대체 어젯밤엔 어디서 자고 오는가?"

 

홍생은 속여서 말했다.

"사실은 어제 낚싯대를 메고는 달빛을 따라 장경문(長慶門) 밖 조천석까지 가서 고기를 낚으려 하였으나, 밤이 서늘하여 물결이 찬 탓으로 붕어 한 마리도 낚지를 못했네그려!"

 

친구들도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 홍생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해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신이 멍하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 병사에 누워 있었으나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홍생에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당신의 재주를 몹시 사랑하시어 견우성 막하(幕下)의 종사(從事) 벼슬을 명령하셨사오니 하루 속히 부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생이 깜짝 놀라 깨어 깨끗하게 목욕을 한 뒤에 향을 태우며 자리를 정리하고 잠깐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나게 되니, 바로 9월 보름이었다.

 

그의 시신을 빈소에 안치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얼굴빛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뿐이었다.

 

"홍생은 아마 신선을 만나서 시신이 선화(仙化)한 것 같다."

요점 정리

작자 :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연대 : 세조

갈래 : 고전소설, 한문소설, 명혼 소설, 전기소설, 애정 소설, 시애소설

성격 : 도교적, 전기적, 낭만적, 비극적, 환상적, 신선사상이 바탕이 됨.

구성 : 4단 기승전결 구성, 단순 구성

홍생이 평양으로 유람을 갔다가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읊음

홍생의 시를 듣고 온 기자왕의 딸로서 수정궁의 상아가 된 선녀와 시를 주고 받음

선녀는 하룻밤을 지낸 후 승천하고, 선녀를 못 잊은 홍생은 상사병에 걸림

홍생은 선녀의 시녀를 꿈에서 만난 후, 세상을 떠남. 빈장(일명 초빈(草殯)으로 사정상 장사를 속히 치르지 못하고 송장을 방 안에 둘 수 없을 때에, 한데나 의지간에 관을 놓고 이엉 따위로 그 위를 이어 눈비를 가릴 수 있도록 덮어 두는 일. 또는 그렇게 덮어 둔 것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안색이 변하지 않음

제재 : 남녀 간의 사랑

주제 : 수천 년전의 기씨 여인과의 사랑,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사랑

특징 : 한시가 상당량을 차지하고 있고, 도가적인 취향과 주체적인 사관을 내면적인 신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볼 수 있고, 시애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이 작품은 기자 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하여 부호가의 아들 홍생과 죽어서 선녀가 된 기자의 딸 사이에 이루어진 정신적인 사랑과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일종의 애정 소설이다.

줄거리 : 송도 부호의 아들 홍생이 유람을 겸한 장사를 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서 친구들과 같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 휘흥을 이기지 못하여 홀로 작은 배를 타고 부벽정 아래에 이르러, 정자 위에 올라가서 난간을 의지하고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며 시를 지어 낭랑히 읊고 삼경(三更)이 되어 돌아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발자국소리가 들려 온다.

홍생은 영명사의 중이 찾아오는가 생각했으나, 뜻밖에도 한 미인이 좌우에서 시녀를 거느리고 비단 부채를 들고 나타나는데, 그 위의(威儀)가 엄숙하고 정숙하여 마치 귀족 집안의 처녀 같았다고나 하거니와, 홍생이 시녀의 내영(來迎)을 받아 누상(樓上)으로 올라가서 그 미인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그 미인의 신분은 은왕의 후예요, 기자왕의 딸로서, 부왕이 위만에게 왕위를 빼앗긴 후로 정절을 지켜 죽기를 기다리는데, 신선이 된 선조가 나타나 불사약을 주어 그 약을 먹고 수정궁의 상아가 되었다는 것이다.

홍생이 부벽루에서 그 선녀와 하룻밤을 지내며 서로 시를 주고받으며 부르다가 날이 새자 그 선녀는 승천하고, 홍생은 집에 돌아와 그 선녀를 생각하며 사모하던 끝에 병에 걸렸는데, 그 선녀의 시녀가 나타나, "우리 아가씨가 상제께 아뢰어 견우성 막하의 종사를 삼았으니 올라오라."고 일러 주는 꿈을 꾸고 난 뒤,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분향하고 누웠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빈장(嬪葬)한 지 몇 달이 지나도 안색(顔色)이 변하지 않았다.

출전 : 금오신화로, 중국 명(明)나라 구우(瞿佑)가 쓴 '전등신화(剪燈神話)'의 영향을 받음

내용 연구

 

(전략)

 

정축년(丁丑年)에 개성에, 사는 부호가의 아들 홍생(洪生)이 있었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비록 나이는 어리나 글을 잘하였다.[재자가인형의 고대 소설 주인공의 전형] 홍생은 팔월 한가위날을 맞아 면사(綿絲)[무명실]를 사려고 친구들과 함께 평양장에 포백(布帛)[베와 비단]을 싣고 와서 강가에 배를 대었다.

 

성중(城中)에서 구경나온 기생들이 홍생을 보고 모두 눈짓을 하였다.[염정소설의 요소이자 홍생의 인물됨의 준수함을 말함]

 

때마침 성중에 사는 홍생의 친구 이생(李生)이 잔치를 벌여 홍생을 환영하였다. 술이 취한 뒤 배로 돌아갔으나 밤은 서늘하고 졸음도 오지 않았다. - 등장 인물 제시

 

문득 옛날 당(唐)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지은 <풍교야박(楓橋夜泊)>의 시를 연상하며 맑은 흥취를 진정하지 못하여 작은 배를 불러 달빛을 가득 싣고 노를 저으면서 강물을 따라 올라가 곧 부벽정 밑에 이르렀다.

 

홍생은 뱃줄을 갈에 매어두고는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가 난간에 비겨 시를 낭랑히 읊었다.

때마침 달빛은 환하고 물결은 흰 비단 같아 청학과 기러기의 울음 소리를 듣자 마치 하늘 위 옥황님이 계신 곳인 듯싶었다. 한편 옛서울[기자 조선의 서울 평양]을 돌아보니 내 낀 외로운 성에 물결만 철썩거릴 뿐이었다. 그는 고국(故國)의 흥망을 탄식하며[맥수지탄(麥秀之歎/麥秀之嘆) : 고국의 멸망을 한탄함을 이르는 말. 기자(箕子)가 은(殷)나라가 망한 뒤에도 보리만은 잘 자라는 것을 보고 한탄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 여섯 수의 시를 잇달아 읊었다.[소설과 같은 작품 속에 시 등의 운문을 삽입하면 지루함과 단조로움을 피할 수 있고 인물의 심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작가 의식을 대변하거나 시대상을 제시할 수도 있다. 고구려의 멸망을 아쉬워 하고 있다.]

 

부벽정 높은 곳에 홀로 올라 읊으니

구슬픈 강물 소리는 애끊는 듯하여라

고국이 어디런고 영웅[고구려 동명성왕]은 간 곳 없고

황성(荒城)은 지금까지 봉황의 얼굴이라

모래에 달빛 희니 기러기는 아득하구나

숲속엔 내 걷히어 반딧불이 날고있네

인사(人事)는 변천하여 풍경조차 쓸쓸하다

한산사(寒山寺) 깊은 곳에 종소리만 들려오네. - 역사와 인생의 무상

님 계신 구중 궁궐 가을 풀만 쓸쓸한데

갈수록 아득해라 높은 바위 구름길은

청루(靑樓)는 어디 있나 변화는커녕 자취도 없고

담 너머 희미한 달 찬 까마귀 우지진다.

풍류는 간데 없어 진토만 남았도다

적막한 외로운 성에 가시가 덮여 있네

어즈버 물결 소리 의구히 울어 옐 제

주야로 쉬지 않고 깊은 바다 향하누나.

쪽(藍)처럼 푸르도다 대동강 굽이굽이

슬프다 천고 흥망 한한들 어이하리

금정(金井)에 물 마르고 담쟁이만 드리웠네

석단(石壇)엔 이끼 낀 채 능수버들 늘어졌네

타향의 좋은 풍월 한없이 시만 읊고

정든 고국 생각에 술이 건들 취하누나

달빛이 밝은 탓인가 졸음조차 아니 오고

계수 그늘 밤 깊은데 매운 향내 풍겨 온다.

오늘이 한가위라 저 달빛은 곱구나

외로운 옛 성터를 바라볼수록 슬프도다

기자묘(箕子廟) 뜰 앞에는 늙은 숲이 우거지고

단군사(檀君祠) 벽 위에도 담쟁이가 얽히었네

영웅은 자취 없어 어디로 돌아갔느뇨[영웅은 중국에 맞서 민족 의식을 고취했던 기자와 단군을 의미]

초목만 의희(依稀)[매우 비슷함]한데 몇 해나 되었더냐

옛날이 더욱 그립구나 둥근 달만 의구하도다[옛날 그대로 변함이 없다]

맑은 빛이 흘러흘러 객의 옷에 비치네.

동산에 달 뜨거라 잠든 오작 왜 나느냐

깊은 밤 찬 이슬은 나의 옷에 함초롬[차분하게 젖어 있는 모양]

문물은 천년이라 옛모습은 간데 없고

산천을 변천하여 허물어진 성뿐이라

하늘에 오르셨는가 님은 아니 돌아오고

인간에 끼친 얘기 무엇으로 증거하리

누런 수레 기린[고구려 동명왕이 탔다는 기린마] 타고 가신 자취 아득하다

풀 우거진 옛길 위에 홀로 가는 저 선사(禪師)야.

찬 이슬 내렸으니 온갖 초목 다 지겠다

청운교냐 백운교냐 우뚝우뚝 솟았구나

수나라 사졸들은 여울에서 구슬피 우는구나[수나라 수십만 대군이 살수에서 을지문덕에게 멸망한 고사]

가을 매미 울음 소리 동명왕의 넋이런가

옛길에 내 끼고 수레 소리 간데 없네

푸른 솔 우거진 곳 늦은 종만 처량하다

높이 올라 읊으련만 뉘라서 화답하리

바람 맑고 달빛 흴 때 흥만 겨워하노라.

[이색의 '부벽루'와 시상이 유사한 것으로 고국을 그리워하는 시의 내용이 은왕의 후예요, 기자왕의 딸을 불러내는 원인이 됨 ]

 

홍생은 시를 다 읊고 난 뒤 일어나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한 구절을 읊을 때마다 슬픈 뜻을 걷잡지 못하여, 비록 퉁소와 노래의 유창한 화답은 없다 하더라도, 구슬픈 운율은 넉넉히 깊은 물에 잠긴 용을 춤추게 하고 외로운 배에 실린 과부를 울릴 만하였다.[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오는 구절로 홍생이 시를 읊조리는 소리가 매우 감동적이었음을 이르는 구절] - 홍생의 고국 흥망에 대한 탄식

 

어느덧 밤이 깊어 돌아오려 할 때에 서쪽에서 갑자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홍생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마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절에 있는 중이 찾아오는 것이겠지?'

그러고는 앉아서 기다리니 뜻밖에도 아름다운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 여인을 두 아이가 좌우에서 모시고 따르는데, 한 아이는 옥 파리채[불자(拂子) : 먼지떨이. 혹은 '불교'에서 사용하는 것으로 짐승의 꼬리털 또는 삼 따위를 묶어서 자루에 맨 것. 원래 인도에서 벌레를 쫓을 때 사용하였는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선종의 중이 번뇌와 어리석음을 물리치는 표지로 지닌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를 들었고 다른 아이는 비단 부채를 들고 있었다[옥 파리채, 비단 부채는 여인의 신분을 알 수 있음]. 여인의 위의(威儀)[위엄이 있고, 엄숙한 태도나 차림새]는 정제하고 그 몸가짐이 귀족집 처녀 같았다.[여인은 기자왕의 딸로 천상계 선녀임]

 

홍생은 뜰 아래로 내려가 담 틈에 비껴 서서 그녀의 태도를 엿보았다. 그 여인은 남헌(南軒 : 남쪽 난간)에 기대 서서 달빛을 바라보며 곱게 시를 읊는데, 그 풍류와 기상이 매우 얌전했다. 시녀가 비단 방석을 펴니 여인은 다시금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 새로운 인물의 등장

 

"이곳에서 방금 시 읊는 소리가 났는데 갑자기 어디로 가버렸소? 나는 요물이 아닙니다. 다만 좋은 저녁을 맞이하여 구름 없는 하늘에 달이 둥실 솟고 은하수 맑은 가에 백옥루[(白玉樓) : 문인(文人)이나 묵객(墨客)이 죽은 뒤에 간다는 천상의 누각. 당나라 시인 이하(李賀)가 죽을 때에 천사가 와서 천제(天帝)의 백옥루가 이루어졌으니 이하를 불러 그것을 기록하게 하려 한다고 말했다는 데서 유래한다.] 차디찬데 계수[계수나무 잎] 그림자 비낀 이때 한잔 마신 후에 읊어서 그윽한 회포를 풀어 이 밤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홍생은 한편으론 기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여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이내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여인은 곧 시녀를 시켜 그에게 전하도록 하였다.

"아씨 명령을 받들어 모시러 왔나이다."

홍생은 시녀를 따라서 그녀의 앞에 가 예를 드리고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인은 별로 공손한 태도도 보이지 않고 시녀를 시켜서 낮은 병풍으로 앞을 가려[여인의 신분이 높음을 알 수 있음] 단지 얼굴 반쪽만 서로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말했다.

"아까 그대가 읊은 시는 무엇을 의미한 것입니까? 의아하게 생각지 말고 나에게 다시 들려주세요."

홍생은 그 시를 빠짐없이 다시 들려주었다. 여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와는 시를 논할 만하구려."

곧 시녀를 시켜서 술을 주는데, 차려놓은 모든 음식이 인간의 것과 같지 않아 먹으려 해도 딱딱하고 술맛 역시 쓰기만 하여 마실 수가 없었다.[죽은 여인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으로 홍생이 처음에 선녀가 주는 술과 음식이 쓰고 딱딱해서 먹지 못한 사실을 말함- 명혼 소설적인 요소]

 

여인은 한번 빙긋이 웃으면서 시녀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속세에 살던 선빈데 어찌 백옥례(白玉醴 : 신선이 마시는 술)와 홍규포(紅 脯 : 용의 고기를 말려서 만든 포)를 알겠습니까. 얘야, 빨리 신호사(神護寺)에 가서 절밥을 조금만 빌려오너라."[홍생과 기녀씨의 신분 차이가 드러나는 것으로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녀가 얼른 절밥을 얻어왔으나 간장이 없는지라 또 시녀를 시켜 주암(酒巖)에 가서 간장을 얻어오게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서 잉어적을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 음식을 먹는 동안 그 여인은 홍생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계전(桂箋 : 계수나무 잎)에 써서 시녀를 시켜 홍생에게 건넸다.

 

(중략)

 

"옥황님의 명령이 엄하셔서 나는 곧 흰 난조를 타고 돌아갑니다[인간계와 천상계를 구별하는 작자의 사상이 나타나 있음]. 다만 청아한 이야기를 다 끝내지 못하여 몹시 섭섭합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불어 홍생이 앉은 자리를 걷어가고 그 시를 날려버렸다. 대체로 이런 일을 인간 속세에 알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홍생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한참 동안 서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지라 난간에 홀로 기대 서서 정신을 차리고 그녀가 한 말들을 기록하고, 또 좋은 인연을 얻어서 흉중에 쌓인 이야기를 다 못했음을 한탄하며 시 한 수를 읊었다.

 

비갯더니 구름이야 하염없이 한 꿈이라

가신 님은 언제나 퉁소 불며 돌아올꼬

대동강 푸른 물결 무정하다 마소서

님 여읜 저곳으로 슬피 울며 나는구나.

 

다 읊고 나자 산사에서 종이 울리고 물가 마을에서 닭이 노래를 부르는데[새벽이 되었음을 의미] 달은 서천에 걸려 있고 샛별만 반짝이며, 뜰 아래의 쥐와 상 밑의 벌레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배경이 현실로 전환되었음을 알려 줌]

 

홍생은 초연히 슬프기도 하고, 한편으론 온몸이 수굿하여 다시금 유(留)할 수 없으므로 서둘러 돌아와 배에 올라타고 옛 물가에 닿았다. 그가 돌아온 것을 안 친구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물었다.

"도대체 어젯밤엔 어디서 자고 오는가?"

 

홍생은 속여서 말했다.

"사실은 어제 낚싯대를 메고는 달빛을 따라 장경문(長慶門) 밖 조천석까지 가서 고기를 낚으려 하였으나, 밤이 서늘하여 물결이 찬 탓으로 붕어 한 마리도 낚지를 못했네그려!"

친구들도 그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후 홍생은 그 여인을 잊지 못해 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갔으나, 정신이 멍하고 말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는 오랜 기간 병사에 누워 있었으나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속에 소복한 여인이 나타나 홍생에게 말했다.

"우리 아가씨께서는 당신의 재주를 몹시 사랑하시어 견우성 막하(幕下)의 종사(從事) 벼슬을 명령하셨사오니 하루 속히 부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홍생이 깜짝 놀라 깨어 깨끗하게 목욕을 한 뒤에 향을 태우며 자리를 정리하고 잠깐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나게 되니, 바로 9월 보름이었다.

 

그의 시신을 빈소에 안치한 지 여러 날이 되어도 얼굴빛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세상에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할 뿐이었다.

 

"홍생은 아마 신선을 만나서 시신이 선화(仙化)한 것 같다."[작품의 결말에서 홍생의 시체를 빈소에 안치한 뒤 수일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은 것은 그가 신선이 되었음을 뜻하는데, 이는 천상회귀를 갈망하는 지상인의 염원과 인간 본연의 신선 사상을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취유부벽정기'는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천상에서 지속해 보려는 초월적 현실주의 사상과 도가적 신선 사상이 혼합되어 있는 작품이다.]

유기 : 버들 숲속의 고기낚는 돌

화주 : 돌기둥

동타 : 구리고 만든 낙타

기필 : 틀림없이 꼭 이루어지기를 기약함

성탕 : 고대 중국의 전설적인 임금

상계 : 천상계

항아 : 달나라에 산다는 아름다운 선녀

옥경 : 옥황상제가 산다는 하늘나라 수도

노둔 : 둔하고 미련함

창수 :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 받으며 노래함

지미 : 당의 술사 조지미가 달을 감상하던 전설

공원 : 당의 술사 나공원

오나라 소는 달을 보고도 태양인가 하여 헐떡인다 함

헌함 : 다락이나 누각 등에 모서리로 돌아가면서 만들어 놓은 좁은 마루

고목 우거진 들의 고사(古祠) : 옛 사당

백구(白驅) : 흰 물새

고조선 시대 만주지방에 있던 나라인 숙신에서 나는 유명한 화살

이해와 감상

 

금오신화(金鰲新話)에 실린 5편 중 한 단편으로 같은 금오신화 내의 작품인 '만복사저포기'가 불교적이요, '이생규장전'이 유교적이라면, 이 작품은 도교적으로, 도교의 중심 사상은 신선사상인데, 이와 같은 신선담을 표현한 것은 작자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선 사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작품은 평양(平壤)의 부벽루(浮碧樓)에서 선녀와 더불어 논 이야기로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작자는 이 작품 속에서 기자(箕子)를 들어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의 처사를 은연중 비난하였고, 죽은 여자의 혼령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 주인공과 어울렸다는 점에서 명혼(冥婚)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만남이 꿈속의 일인 것 같다는 설정은 몽유소설과 상통하지만, 꿈의 시작과 끝을 불분명하게 해서 한층 더 미묘한 분위기를 조정했다. 도가적인 취향과 주체적인 사관을 내면적인 신념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볼 수 있고, 시애 설화와도 관련이 있다.

이해와 감상1

 

조선 초기에 김시습 ( 金時習 )이 지은 한문소설. 원본은 전하지 않고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작자의 단편소설집 ≪ 금오신화 金鰲新話 ≫ 에 실려 있다.

〈 취유부벽정기 〉 는 기자조선의 도읍지로 알려진 평양을 배경으로 하여 한 남자 상인과 죽어서 선녀가 된 기자(箕子)의 딸 사이에 이루어진 정신적인 사랑과 고국의 흥망에 대한 회고의 정을 진하게 담은 일종의 애정소설이다. 구조유형상 ‘ 명혼소설(冥婚小說) ’ 또는 ‘ 시애소설(屍愛小說) ’ 이라고도 부른다.

〈 취유부벽정기 〉 는 개성의 상인 홍생(洪生)이 달밤에 술에 취하여 대동강 부벽루에 올라가 고국의 흥망을 탄식하는 시를 지어 읊었다. 한 아름다운 처녀가 나타나 홍생의 글재주를 칭찬하면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홍생이 처녀와 시로써 화답하며 즐기다가 신분을 물었다. 처녀는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로서 천상계에 올라가 선녀가 되었다. 그런데 달이 밝자 고국 생각이 나서 내려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기씨녀는 홍생의 청을 받고 긴 시 한수를 더 읊었다. 그 내용은 자기들의 사랑의 아름다움과 고국의 흥망성쇠에 관한 것이었다. 그 뒤에 기씨녀는 천명을 어길 수 없다며 사라지고 홍생은 귀가하여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병이 들었다. 어느날 홍생은 기씨녀의 주선으로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는 내용의 꿈을 꾸고 세상을 떠났다.

〈 취유부벽정기 〉 는 평양을 배경으로 하고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킴으로써 토속적인 성격 및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남녀간의 사랑을 제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자의 작품인 〈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 〉 및 〈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 과 동일하다. 정신적인 사랑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그들과 구별된다.

〈 취유부벽정기 〉 는 불의와 폭력에 의하여 정당한 삶과 역사가 좌절되는 아픔을 표현한 작품이어서 짙은 우수가 서려 있다. 귀가한 주인공이 기씨녀를 그리워하다가 죽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작품이 비극적 성격을 지니나 죽어서 신선이 되었다고 함으로써 그러한 성격이 다소는 약화되어 있다.

〈 취유부벽정기 〉 의 해석과 평가에는 여러 가지 견해가 엇갈려 있다. 작품에 나타난 사건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의 우의(寓意)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선녀와의 연애 및 선계로의 승화를 현실도피로 보고 그것은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 모순되는 것이기에 작품은 결국 작자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또한, 모순에 찬 세계를 개조해서 세계와 화합하려는 자아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대결을 통하여 소설적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견해도 있다.

〈 취유부벽정기 〉 를 도가적(道家的) 문화의식의 투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나타난 갈등을 동이족(東夷族)의 문화적 우월감과 함께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극렬한 반존화적(反尊華的) 민족저항의 분한(憤恨)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 참고문헌 ≫ 金鰲新話, 梅月堂金時習硏究(鄭 泄 東, 新雅社, 1965), 韓國小說의 理論(趙東一, 知識産業社, 1977), 韓國古典小說의 探究(李相澤, 中央出版社, 1981), 現實主義的世界觀과 金鰲新話(林熒澤, 國文學硏究 13, 서울大學校, 1971), 金鰲新話의 悲劇性에 對한 超越의 問題(崔三龍, 語文論集 22, 高麗大學校, 1981).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심화 자료

 

취유부벽정기의 우의성

 

기자왕이 위만에서 나라를 빼앗긴 것은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것과 유사하다. 즉 홍생이 기자왕의 딸을 사모한 것은 단종에 대한 연모의 정을 표현한 것이다. 이렇듯이 이 작품을 수양 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은 역사적 사건을 빗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는 반면, 주인공이 선계로 승화한 것을 현실도피로 보고 작자의 현실주의적 사상과의 정신적 갈등을 반영한다고 고는 견해가 있다.

금오신화의 의의

 

각 편들은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전기소설(傳奇小說)인 〈전등신화 剪燈新話〉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첫째, 최녀로 대표되는 굳건한 기상이나 의지를 지닌 한국적 인물들을 창조했다는 점,

둘째, 공간적 배경을 조선으로 함으로써 주체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점,

셋째, 주인공들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작가의 기구한 처지를 투영하고 있다는 점,

넷째, 애민적(愛民的) 왕도정치사상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 등은 작가의 창작의도를 알 수 있게 한다.

특히 유가적 선비의 입장을 견지하던 주인공들이 불교적 인연관이 투영된 만남을 통해서 결국엔 죽음이나 부지소종(不知所終:어디에서 일생을 마쳤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뜻)의 도가적 모습으로 귀결되고 있는 공통점은 유·불·도 3교를 두루 통하고 화합을 지향했던 작가의 철학체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소설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이 작품은 〈수이전 殊異傳〉의 〈최치원 이야기〉, 〈보한집 補閑集〉의 〈이인보(李寅甫) 이야기〉 같은 명혼설화(冥婚說話)와 〈삼국유사〉의 〈조신(調信) 이야기〉 같은 몽유설화를 계승하여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을 확립시켰고, 그 이후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한 국외로는 일본의 전기문학인 도기보코[伽婢子]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 (자료 출처 : 브리태니카백과사전)

금오신화의 가치

 

1. 강한 사회성 내포 : 현실적인 신분의 장애 혹은, 외적인 폭력에 의해 갈등과 비극의 발생

2. 허구를 통한 현실의 보상 : 현실에서는 힘을 쓰지 못하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다른 세상에 가서 한을 풀고 오는 이야기

3. 세련된 소설적 수법과 작가 의식 : 풍성한 내적 장치를 갖추고 있어 이전의 작품들에게 없는 생동감이 있고, 작품 속에 빈번히 등장하는 시들을 통해서 등장 인물의 심리를 세세하게 묘사하고, 작품 안에서 모든 것을 완결짓는 수법 등은 확실히 다른 작품들과는 질적으로 구분된다. 김시습은 허구적 대리인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으므로 현대적 의미의 '작가 의식'을 보여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 금오신화의 주인공들이 모두 재자가인형이라는 한계가 있으나 문장 표현이 사물을 극히 미화시켜 표현했다는 점과 일상적, 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을 그린 점 등 전기 소설의 일반적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내용상 인간성을 긍정하고 현실 속에서 제도, 인습, 전쟁, 인간의 운명 등과 강력히 대결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금오신화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문하자, 기자가「홍범(洪範)」구주(九疇)의 법을 일러주었다. 무왕이 기자를 이 땅에 봉하였지만 신하로 삼지는 않았다.

이곳의 명승지로는 금수산, 봉황대, 능라도, 기린굴, 조천석, 추남허 등이 있는데, 모두 고적이다. 영명사의 부벽정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영명사 자리는 바로 고구려 동명왕의 구제궁터이다. 이 절은 성 밖에서 동북쪽으로 이십 리 되는 곳에 있다. 긴 강을 내려다보고 평원을 멀리 바라보며 아득하기 그지없으니, 참으로 좋은 경치였다.

그림 그린 놀잇배와 장삿배들이 날 저물 무렵 대동문 밖에 있는 유기에 닿아 머물게 되면, 사람들은 으레 강물을 따라 올라와서 이곳을 마음대로 구경하며 실컷 즐기다가 돌아가곤 하였다.

부벽정 남쪽에는 돌을 다듬어 만든 사닥다리가 있다. 왼편에는 청운제, 오른편에는 백운제라고 돌에다 글자를 새겨 화주(華柱)를 세워 놓았으므로, 호사자(好事者)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천순(天順) 초년에 개성에 홍생이라는 부자가 있었다. 그는 나이도 젊고 얼굴도 잘생긴데다 풍도가 있었으며, 또한 글을 잘 지었다. 그가 한가윗날을 맞아 친구들과 함께 평양에 베를 안고 와서 실을 바꾸었다. 그런 뒤에 배를 강가에 대자, 성안의 이름난 기생들이 모두 성문 밖으로 나와서 홍생에게 추파를 던졌다.

성안에 이생이라는 옛 친구가 살았는데, 잔치를 베풀어 홍생을 환영하였다. 홍생은 술이 취하자 배로 돌아갔지만 밤이 서늘하고 잠도 오지 않아서, 문득 장계가 지은 「풍교야박」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그래서 맑은 흥취를 견디지 못해 작은 배를 타고는, 달빛을 싣고 노를 저어서 올라갔다. 흥취가 다하면 돌아가리라 생각하고 올라가다가, 이르고 보니 부벽정 아래였다.

홍생은 뱃줄을 갈대 숲에 매어 두고, 사닥다리를 밟고 올라갔다.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며, 맑은 소리로 낭랑하게 시를 읊었다.

그때 달빛은 바다처럼 넓게 비치고 물결은 흰 비단처럼 고운데, 기러기는 모래밭에서 울고 학은 소나무에서 떨어지는 이슬 방울에 놀라서 푸드덕거렸다. 마치 하늘 위에 옥황상제가 계신 곳에라도 오른 것처럼 기상이 서늘해졌다.

한편 옛 서울을 돌아보니 하얀 성가퀴에는 안개가 끼어 있고, 외로운 성 밑에는 물결만 부딪칠 뿐이었다. 「맥수은허」의 탄식이 저절로 나와, 이내 시 여섯 수를 지어 읊었다.

 

부벽정 올라와 시흥을 못 견디고 읊으니

흐느끼는 강물 소리가 애끓는 듯하여라.

용 같고 호랑이 같던 고국의 기상은 이미 없어졌건만

황폐한 옛성은 지금까지도 봉황 모습 그대로일세.

모래밭에 달빛이 희니 기러기는 갈 길을 잃고

풀밭에는 연기가 걷혀 반딧불만 날고 있네.

사람 세상에 바뀌고 보니 풍경마저 쓸쓸해져

한산사 깊은 곳에서 종소리만 들려 오네.

 

임금 계시던 궁궐에는 가을 풀만 쓸쓸하고

구름 낀 돌층계는 길마저 아득해라.

청루 옛터에는 냉이풀만 우거졌는데

담 넘어 희미한 달 보며 까마귀만 우짖네.

풍류롭던 옛일은 티끌이 되었고

적막한 빈 궁성엔 찔레만 덮였구나.

오직 강물만이 옛날 그대로 울며 울며

도도히 흘러서 바다로 향하누나.

 

대동강 저 물결은 쪽보다도 더 푸르네.

천고 흥망을 한탄한들 어이하랴.

우물에는 물이 말라 담쟁이만 드리웠고

돌 단에는 이끼가 끼어 능수버들만 늘어졌네.

타향의 풍월을 천수나 읊고 보니

고국의 정희에 술이 더욱 취하여라.

달빛이 난간에 밝아 졸음조차 오지 않는데

밤 깊어지며 계화 향기가 살며시 떨어지네.

 

오늘이 한가위라 달빛은 곱기만 한데

외로운 옛성은 볼수록 서글퍼라.

기자묘(箕子廟) 뜨락에는 교목이 늙어 있고

단군사(檀君祠) 벽 위에는 담쟁이가 얽히었네.

영웅은 적막하니 지금 어디에 있는가

풀과 나무만 희미하니 몇 해나 되었던가?

오직 그 옛날의 둥근 달만 남아 있어

맑은 빛이 흘러나와 이 내 옷깃을 비추네.

 

동산에 달이 뜨자 까막까치 흩어져 날고

밤 깊어지자 찬이슬이 나의 옷을 적시네.

 

문물은 천년이라 옛 모습 간 데 없건만

만고의 강산에도 성곽은 허물어졌네.

하늘에 오른 성제(聖帝)께선 돌아오지 않으시니

인간에 남긴 이야기를 무엇으로 증거하랴.

황금수레에 기린 말도 이제는 자취 없어

연로(輦路)에는 풀 우거지고 스님만이 홀로 가네.

 

찬이슬이 내리자 뜰의 풀이 다 시드는데

청운교와 백운교는 마주보고 서 있구나.

수나라 대군의 넋이 여울에서 울어예니

임금의 정령(精靈)이 가을 매미 되었던가.

한길에는 연기만 낀 채 수레 소리도 끊어졌는데

소나무 우거진 행궁(行宮)에는 저녁 종소리만 들리네.

누각에 올라 시를 읊어도 그 누가 함께 즐길 건가

달 밝고 바람도 맑아 시흥이 시들지 않네.

 

홍생은 읊기를 마친 뒤에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일어나 그 자리에서 춤을 추었다. 한 구절을 읊을 떄마다 흐느껴 울었다. 바로 뱃전을 두드리고 퉁소를 불며 서로 화답하는 즐거움은 없었지만, 마음 속으로 느꺼워하였다. 그래서 깊은 구렁에 잠긴 용도 따라서 춤추게 할 만하였고, 외로운 배에 있는 과부도 울릴 만하였다.

시 읊기를 마치고 돌아오려 하자 밤은 벌써 삼경이나 되었다. 이때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 왔다. 홍생은 마음 속으로

"절의 스님이 시 읊는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하여 찾아오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하며 앉아서 기다렸다. 그런데 나타나고 보니 한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두 시녀가 좌우에서 따르며 모셨는데,

 

한 여인은 옥자루가 달린 불자(拂子)를 잡았고, 다른 한 시녀는 비단 부채를 들고 있었다. 여인은 위엄이 있고도 단정하여, 마치 귀족집 처녀 같았다.

 

홍생은 뜰 아래로 내려가 담 틈으로 비켜서서 그가 어떻게 하는지 살펴보았다. 여인은 남쪽 난간에 기대어 서서 달빛을 보며 작은 소리로 시를 읊었는데, 풍류와 몸가짐이 엄연하여 범절이 있었다. 시녀가 비단방석을 펴자, 여인이 얼굴빛을 고치고 자리에 앉아 낭랑한 소리로 말하였다.

"여기서 방금 시를 읊던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 어디에 있소? 나는 꽃이나 달의 요물도 아니고, 연꽃 위를 거니는 주희도 아니라오. 다행히도 오늘처럼 아름다운 밤을 맞고 보니, 만리장공 넓은 하늘에는 구름도 걷히었소. 달이 높이 뜨고 은하수는 맑은데다, 계수나무 열매가 떨어지고 백옥루는 차갑기에, 한잔 술에 시 한 수로 그윽한 심정을 유쾌히 풀어 볼까 하였소. 이렇게 좋은 밤을 어찌 그대로 보내겠소?"

 

홍생이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찌할까 머뭇거리다가 가늘게 기침소리를 내었다. 시녀가 기침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와서 청하였다.

"저희 아가씨께서 모시고 오라 하였습니다."

 

홍생이 조심스럽게 나아가서 절하고 꿇어앉았다. 여인도 또한 별로 어려워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그대로 이리 올라오시오."

 

시녀가 낮은 병풍으로 잠깐 앞을 가리었으므로, 그들은 얼굴을 서로 반만 보았다. 여인이 조용히 말하였다.

"그대가 조금 전에 읊은 시는 무슨 뜻이오? 나에게 외어 주시오."

 

홍생이 그 시를 하나하나 외어 주자, 여인이 웃으며 말하였다.

"그대는 나와 함께 시에 대하여 이야기할 만하오."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여 술을 한차례 권하였는데, 차려 놓은 음식이 인간세상의 것과 같지 않았다. 먹으려 해봐도 굳고 딱딱하여 먹을 수가 없었다. 술맛도 또한 써서 마실 수가 없었다. 여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였다.

"속세의 선비가 어찌 백옥례(白玉醴)와 홍규포(紅 脯)를 알겠소."

 

여인이 시녀에게 명하였다.

"너 빨리 신호사에 가서 절밥을 조금만 얻어 오너라."

 

시녀가 시키는 대로 가서 곧 절밥을 얻어 왔다. 그러나 밥뿐이었고, 반찬이 또한 없었다. 그래서 다시 시녀에게 명하였다.

"얘야. 주암(酒巖)에 가서 반찬도 얻어 오너라."

 

얼마 되지 않아서 시녀가 잉어구이를 얻어 가지고 왔다. 홍생이 그 음식들을 먹었다. 그가 음식을 먹고 나자, 여인이 이미 홍생은 시에 따라 그 뜻에 화답하였다. 향기로운 종이에 시를 써서 시녀로 하여금 홍생에게 주도록 하였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부벽정 오늘밤에 달빛 더욱 밝은데

맑은 이야기에 감회가 어떻던가?

어렴풋한 나무 빛은 일산처럼 펼쳐졌고

넘치는 저 강물은 비단치마를 둘렀네.

세월은 나는 새처럼 어느새 지나갔고

세상일도 자주 변해 흘러가 버린 물 같아라.

오늘밤의 정회를 그 누가 알아주랴

깊은 숲에서 종소리만 이따금 들려 오네.

 

옛성에 올라 보니 대동강이 어디런가

푸른 물결 밝은 모래밭에 기러기 떼가 울며 가네.

기린 수레는 오지 않고 님도 벌써 가셨으니

봉피리 소리 끊어졌고 흙무덤만 남았어라.

갠 산에 비가 오려나, 내 시를 벌써 이뤄졌는데

들판 절에는 사람도 없어 나 혼자 술에 취하였네.

숲 속에 자빠진 동타(銅駝)를 내 차마 보지 못하니

천년의 옛 자취가 뜬구름 되었어라.

 

풀뿌리 차갑다고 쓰르라미 울어대네.

높은 정자에 올라 보니 생각조차 아득해라.

비 그치고 구름 끼니 지나간 일이 가슴아픈데

떨어진 꽃 흐르는 물에 세월이 느껴지네.

가을이라 밀물소리 더더욱 비장한데다

물에 잠긴 저 누각엔 달빛마저 처량해라.

이곳이 그 옛날엔 문물이 번성했었지

황폐한 성 늙은 나무가 남의 애를 끊는구나.

 

금수산 언덕 앞에 금수가 쌓여 있어

강가의 단풍들이 옛성을 비쳐 주네.

어디서 또닥또닥 다듬이소리가 들려 오나?

뱃노래 한 가락에 고깃배가 돌아오네.

바위에 기댄 고목에는 담쟁이가 얽혀 있고

풀 속에 쓰러진 비석에는 이끼가 끼었구나.

말없이 난간에 기대어 지난 일을 생각하니

달빛과 파도소리까지 모두가 슬프기만 해라.

 

별들이 드문드문 하늘에 널렸는데

은하수 맑고 옅어 달빛 더욱 밝았구나.

이제야 알겠으니 모두가 허사로다

저승을 기약키 어려우니 이승에서 만나 보세.

술 한잔 가득 부어 취해 본들 어떠랴

풍진 세상에 삼척검을 마음에다 둘 텐가?

만고의 영웅들도 티끌이 되었으니

세상에 남는 것은 죽은 뒤의 이름뿐일세.

 

이 밤이 어찌 되었나, 밤은 이미 깊어졌네.

담 위에 걸린 달이 이제는 둥글어졌네.

그대와 지금부터 세속 인연을 벗었으니

한없는 즐거움을 나와 함께 누려 보세.

강가의 누각에는 사람들이 흩어지고

뜰 앞의 나무에는 찬이슬이 내리네.

이 뒤에 다시 한 번 만날 때를 알고 싶다니

봉래산에 복숭아 익고 푸른 바다도 말라야 한다네.

 

홍생은 시를 받아 보고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돌아갈까 봐 염려되어, 이야기를 하면서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송구스럽지만 당신의 성씨와 족보를 듣고 싶습니다."

 

여인이 한숨을 쉬더니 대답하였다.

"나는 은나라 임금의 후손이며 기씨의 딸이라오. 나의 선조(기자)께서 실로 이 땅에 봉해지자 예법과 정치제도를 모두 탕왕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였고, 팔조(八條)의 금법(禁法)으로써 백성을 가르쳤으므로, 문물이 천년이나 빛나게 되었었소.

갑자기 나라의 운수가 곤경에 빠지고 환난이 문득 닥쳐와, 나의 선친(준왕)께서 필부(匹夫)의 손에 실패하여 드디어 종묘 사직을 잃으셨소. 위만(衛滿)이 이 틈을 타서 보위(寶位)를 훔쳤으므로, 우리 조선의 왕업은 끊어지고 말았소.

나는 이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절개를 굳게 지키기로 다짐하고 죽기만 기다렸을 뿐인데, 홀연히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나를 어루만지며 말씀하셨소. '나는 본래 이 나라의 시조인데, 나라를 잘 다스린 뒤에 바다 섬에 들어가 죽지 않는 선인(仙人)이 된 지가 벌써 수천 년이나 되었다. 너도 나를 따라 하늘나라 궁궐에 올라가 즐겁게 노니는 것이 어떻겠느냐?' 내가 응낙하자 그 분이 마침내 나를 이끌고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가서 별당을 지어 나를 머물게 하고, 나에게 현주(玄洲)의 불사약을 주셨소.

그 약을 먹고 몇 달이 지나자 홀연히 몸이 가벼워지고 기운이 건장해지더니, 날개가 달려 신선이 된 것 같았소, 그때부터 하늘에 높이 떠서 천지 사방을 오가며 동천복지(洞天福地)를 찾아 십주(十洲)와 삼도(三島)를 유람하지 않은 곳이 없었소.

하루는 가을 하늘이 활짝 개고 하늘 나라가 밝은데다 달빛이 물처럼 맑았소. 달을 쳐다보니 갑자기 먼 곳에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소. 그래서 달나라에 올라가서 광한청허지부(廣寒淸虛之府)에 들어가 수정궁으로 항아를 방문하였더니, 항아가 나더러 절개가 곧고 글을 잘 짓는다고 칭찬하면서 이렇게 달래었소.

 

'인간세상의 선경(仙境)을 비록 복지(福地)라고는 하지만, 모두 풍진(風塵)의 땅이다. 하늘나라에 올라와서 흰 난새를 타고 계수나무 아래에서 맑은 향내를 맡으며, 푸른 하늘에서 달빛을 띠고 옥경(玉京)에서 즐겁게 놀거나 은하수에서 목욕하는 것보다야 낫겠느냐?'

 

그리고는 나를 향안(香案) 받드는 시녀로 삼아 자기 곁에 있도록 하여 주었는데, 그 즐거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었소.

그러다가 오늘 저녁에 갑자기 고국 생각이 나서, 인간 세상을 내려다보며 고향땅을 굽어보았소. 산천은 옛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은 달라졌고, 밝은 달빛이 연기와 티끌들을 가려 주었으며, 맑은 이슬이 대지에 쌓인 먼지를 깨끗이 씻어 놓았기에, 옥경을 잠시 하직하고 살며시 내려와 보았소. 조상님의 산소에 절하고는, 부벽정이나 구경하면서 회포를 풀어 볼까 해서 이리로 왔었소.

마침 글 잘 하는 선비를 만나고 보니, 한편 기쁘고도 한편 부끄럽소. 더군다나 그대의 뛰어난 시에다 노둔한 붓을 펼쳐 화답하였으니, 감히 시라고 한 게 아니라 회포를 대강 펼쳤을 뿐이오."

 

홍생이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아래 세상의 우매한 사람이야 초목과 함께 썩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나라의) 왕손이신 선녀를 모시고 시를 주고받게 될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홍생은 그 자리에서 한 번 읽어 본 시를 기억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엎드려서 말하였다.

"우매한 이 사람은 전세에 지은 죄가 많아서 신선의 음식을 먹을 수 없습니다만, 다행히도 글자는 대강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녀께서 지으신 시도 조금은 이해하였는데,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사미(四美)를 갖추기가 어려운데 (이제 이 네 가지가 다 갖추어졌으니), 이번에는 「강정추야완월(江亭秋夜玩月)」로 제목을 삼아서 사십 운(韻)의 시를 지어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붓을 적셔 한번에 죽 내리썼다. 구름과 연기가 서로 얽힌 듯하였다. 붓을 달려서 곧바로 지었는데, 그 시는 이러하였다.

 

부벽정 달 밝은 밤에

먼 하늘에서 맑은 이슬이 내렸네

맑은 빛은 은하수에 빛나고

서늘한 기운은 오동잎에 서려 있네.

눈부시게 깨끗한 삼천리에

십이루(十二樓)가 아름다워라.

가녀린 구름에는 반 점 티끌도 없는데

가벼운 바람이 눈앞을 스치네.

넘실넘실 넘치며 흐르는 물에

아물아물 떠나는 배를 보내네.

배 안에서 창 틈으로 엿보니

갈대꽃이 물가를 비추는구나.

「예상곡」이 들리는 건가

옥도끼로 다듬은 건가.

진주조개로 집을 지어

염부주(炎浮洲)에 비치는구나.

지미(知微)와달구경하고

공원(公遠)을 따르며 놀아 보세나.

달빛이 차갑자 위나라 까치가 놀라고

오나라 소는 그림자보고 헐떡이네.

은은한 달빛이 푸른 산을 두르고

둥근 달이 푸른 바다에 떴는데,

그대와 함께 창을 열어 젖히고

흥겨워 주렴을 걷어올리네.

이자(李子)는 술잔을 멈추었고

오생(吳生)은 계수나무를 찍었지.

흰 병풍이 빛도 찬란한데

아로새긴 채색 휘장이 쳐져 있네.

보배로운 거울을 닦아 내어 처음 걸고

얼음 바퀴 구르던 것도 멈추지 아니하네.

 

금물결은 어이 그리도 아름다우며

은하수는 어이 그리도 유장한지,

요사스런 두꺼비는 칼을 뽑아 없애고

교활한 옥토끼는 그물을 펼쳐 잡아 보세.

먼 하늘에는 비가 처음 개고

돌길에는 맑은 연기가 걷혔는데,

난간은 숲 사이에 솟았고

섬돌에선 만 길 못을 굽어보네.

머나먼 곳에서 그 누가 길을 잃었나?

고향 나라 옛 친구를 다행히도 만났네.

복사꽃과 오얏꽃을 서로 주고받으며

잔에 가득 부어 술도 주고받았네.

초에다 금을 그어 다투어 시를 짓고

가지를 더해 가며 취토록 마셔 보세.

화로 속에선 까만 숯불이 튀고

노구솥에선 보글보글 거품이 이네.

오리 향로에선 용연향(龍涎香)이 풍겨 오고

커다란 잔 속에는 술이 가득해라.

외로운 소나무에선 학이 울고

네 벽에선 귀뚜라미가 우는구나.

호상에서 은호와 유량이 이야기하고

진저(晉渚)에서 사령운이 혜원과 노닐었었지.

어렴풋이 거친 성터에

쓸쓸하게 초목만 우거져,

단풍잎은 하늘하늘 떨어지고

누런 갈대는 차갑게 사각거리네.

선경이라 하늘과 땅이 넓기만 한데

티끌 세상엔 세월도 빠르구나.

 

옛 궁궐엔 벼와 기장이 여물었고

사당에는 가래나무와 뽕나무가 늘어졌네.

남은 자취는 빗돌 뿐이던가

흥망을 갈매기에게나 물어 보리라.

달님은 기울었다가 다시 차니

인생이란 하루살이 같아라.

궁궐은 절간이 되고

옛날의 임금들은 세상 떠났네.

반딧불이 휘장에 가려 사라지자

도깨비불이 깊은 숲에서 나타나네.

옛날일 생각하면 눈물만 떨어지고

지금 세상 생각하면 저절로 시름겨우니,

단군의 옛터는 목멱산만 남았고

기자의 서울도 실개천뿐일세.

굴속에는 기린의 자취가 있고

들판에는 숙신(肅愼)의 화살만 남았는데,

난향(蘭香)이 자부(紫府)로 돌아가자

직녀도 용을 타고 떠나가네.

글 짓는 선비는 붓을 놓고

선녀도 공후를 멈추었네.

노래를 마치고 사람들 흩어지려니

고요한 바람에 노 젓는 소리만 들려 오네.

 

여인은 쓰기를 마친 뒤에 공중에 높이 솟아 가버렸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여인이 돌아가면서 시녀를 시켜 홍색에게 말을 전하였다.

"옥황상제의 명이 엄하셔서 나는 이제 흰 난새를 타고 돌아가겠소. 맑은 이야기를 다하지 못했기에 내 속마음이 아주 섭섭하오."

얼마 뒤에 회오리바람에 불어와 땅을 휘감더니 홍생이 앉았던 자리도 걷고 여인의 시도 앗아가 버렸는데, 이 시도 또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전하여 퍼뜨리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홍생은 조용히 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는데,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니었다. 난간에 기대서서 정신을 모으고는 여인이 하였던 말들을 모두 기록하였다. 그는 기이하게 만났지만 가슴속에 쌓인 이야기를 다하지 못한 것이 서운하여, 조금 전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시를 읊었다.

 

양대(陽臺)에서 꿈결에 님을 만났었네.

어느 해에야 옥피리 불며 다시 돌아오시려나.

대동강 푸른 물결이야 비록 무정하지만

님 떠난 저 곳으로 슬피 울며 가는구나.

 

시 읊기를 마치고 사방을 둘러보니 산 속의 절에서는 종이 울고 물가 마을에서는 닭이 우는데, 달은 성 서쪽으로 기울고 샛별만 반짝이고 있었다. 다만 뜰에서 쥐소리가 들리고 자리 옆에서는 벌레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홍생은 쓸쓸하고도 슬펐으며 숙연하고도 두려워졌다. 마음이 서글퍼져서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돌아와 배에 올라탔는데도 우울하고 답답하였다. 어제 놀던 강언덕으로 갔더니 친구들이 다투어 물었다.

"어제 저녁에는 어디서 자고 왔는가?"

 

홍생은 속여서 말하였다.

"어제 밤에는 낚싯대를 메고 달빛을 따라 장경문 밖 조천석 기슭까지 가서 좋은 고기를 낚으려고 하였었지. 그런데 마침

 

밤 날씨가 서늘해서 물이 차가워져, 붕어 한 마리도 낚지 못하였다네.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친구들도 그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뒤에 홍생은 그 여인을 연모하다가 병을 얻어 쇠약해진 몸으로 자기 집에 돌아왔지만, 정신이 황홀하고 헛소리가 많아졌다. 병상에 누운 지가 오래 되었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었다.

 

홍생이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엷게 단장한 미인이 나타나서 말하였다.

"우리 아가씨께서 선비님의 이야기를 옥황상제께 아뢰었더니 상제께서 선비님의 재주를 사랑하시어, 견우성 막하(幕下)에 붙여 종사관으로 삼으셨습니다. 옥황상제께서 선비님께 명하셨으니 어찌 피하겠습니까?"

 

홍생은 놀라서 꿈을 깨었다. 집안 사람을 시켜서 자기 몸을 목욕시키고 옷을 갈아 입히게 하였다. 향을 태우고 땅을 쓴 뒤에 뜰에 자리를 펴게 하였다. 그는 턱을 괴고 잠깐 누웠다가 문득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구월 보름날이었다.

그의 시체를 빈소에 모셨는데, 며칠이 지나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홍생이 신선을 만나서 시해(弑害)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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