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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삼제(秋三題) - 벽공(碧空) - 이희승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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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삼제(秋三題) - 벽공(碧空) - 이희승


 요점 정리

 지은이 : 이희승

 갈래 : 연시조 중 1수. 평시조. 정형시

 율격 : 외형률(3·4조 4음보)

 성격 : 시각적, 청각적, 관조적, 심미적

 심상 : 묘사적 심상

 구성 :

    초장   거울같이 맑은 하늘

    중장   푸르게 고인 물 같은 하늘

    종장   티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

 제재 : 벽공(碧空)

 주제 : 맑고 깨끗한 푸른 하늘 찬미. 인간(세속)의 더러움과 대조된 하늘의 티없이 맑고 깨끗함을 예찬하고 그렇지 못한 인간 세계를 비판

 표현 : 구별 배행(句別排行). 청각, 촉각, 시각을 통한 극히 섬세한 감각. 시조 특유의 간결한 형식과 맛이 있음

 출전 : <박꽃>(1947)

내용 연구

벽공[푸른 하늘, 벽락(碧落), 벽허(碧虛), 벽소(碧 ), 벽천(碧天), 청천(靑天), 창공(蒼空)]

손톱으로 툭 튀기면

쨍 하고 금이 갈 듯.[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결합으로 거울 같이 맑은 하늘을 비유]

 

새파랗게 고인 물[하늘이 원관념]이

만지면 출렁일 듯,[촉각적 이미지, 깨끗하게 고인 물 같은 하늘을 비유하고 있으며, 푸른 물이 출렁이는 듯한 하늘의 모습이 그려진다.]

 

저렇게 청정 무구(淸淨無垢 : 맑고 깨끗하여 더럽거나 속된 데가 없음)를

드리우고 있건만.[시적 여운 효과를 주며,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에 대비되는, 혼탁한 인간세계에 대한 탄식을 듣는 듯하다.] - 이 시조와 관련된 고사성어로 볼 수 있는 것은? 명경지수(明鏡止水 :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이해와 감상

 1936년 <현대문학>에 발표한 이 시조는 '낙엽', '남창(南窓)'과 함께 "추삼제(秋三題)"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연시조의 1편이다.

 

 이 시조는 가을 하늘의 맑음을 예찬한 서정적 노래이다. 자연을 대하는 작가의 마음이 청신한 비유를 통해 명경지수(明鏡止水)의 경지에 이르고 있다. 이 시조의 묘사적 성격은 한 폭의 수채화의 회화미를 보이고 있다. 가을 하늘을 제재로 하여, 원관념은 나타내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티없이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을 예찬하였다. 또한 시각·청각·촉각 등의 감각적 수법이 뛰어나다.

 

 아주 맑고 깨끗한 가을 하늘은 손톱으로 가볍게 튀겨도 쨍 소리를 내며 금이 갈 것 같고(초장), 새파란 가을 하늘은 살짝만 만져도 넘쳐 날 것 샅은 잔잔함과 풍요로움(중장)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한없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없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상태다.(종장). 그러면서도 '드리우고 있건만'이란 말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이 여운의 의미는 무엇일까? 한없이 맑고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없는 가을 하늘과 대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이 살아가는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문명 사회일 것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이기적이고 이해 타산만 앞세우는 혼탁한 사회에 대한 무언의 탄식을 듣는 것 같다.

 청각, 시각, 촉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본래 시조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간결한 형식과 맛을 느끼게 한다. 특히, 중장에 나타난 지극히 섬세한 감각은 이 시조의 격을 더욱 높여 주고 있다.

 

 심화 자료

 명경지수 [明鏡止水] : 밝은 거울과 정지된 물이라는 뜻으로, 고요하고 깨끗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明 : 밝을 명 鏡 : 거울 경 止 : 그칠 지 水 : 물 수)

 

 '장자(莊子)' 덕충부편(德充符篇)에 나오는 말이다. 노(魯)나라에 죄를 지어 다리를 잘린 왕태(王?)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를 따라 배우는 사람이 공자의 제자 수와 같았다. 공자의 제자가 그에게 사람들이 모여드는 까닭을 묻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사람은 흘러가는 물에는 비춰 볼 수가 없고 고요한 물에 비춰 보아야 한다. 오직 고요한 것만이 고요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을 고요하게 할 수 있다(人莫鑑於流水 而鑑於止水 唯止能止衆止 / 인막감어유수 이감어지수 유지능지중지)."

 

물론 '장자'의 다른 부분과 같이 장자 자신이 공자의 말을 빌려 하는 형식이다.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신도가(申徒嘉)는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으로 정자산(鄭子産)과 함께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 정자산이 신도가에게 말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거든 자네가 머물러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러 있음세." 이튿날 같은 방에 자리를 함께 하고 있을 때 정자산은 또 신도가에게 말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거든 자네가 머물러 있고, 자네가 먼저 나가면 내가 머물러 있기로 하세. 지금 내가 나가려고 하는데, 자네는 머물러 있겠는가, 나가겠는가. 또 자네는 집정(執政) 하는 나를 보고도 피하지 않으니 자네도 집정하는 나와 같단 말인가?" 이에 신도가가 말하였다. "선생님 문하에서 집정이란 세속적 지위가 문제가 되는가? 자네는 자기가 집정임을 내세워 사람을 무시하고 있네. 듣건대 거울이 밝으면 먼지가 끼지 못하고, 먼지가 끼면 거울이 밝지 못하네. 어진 사람과 오래도록 함께 있으면 허물이 없어진다고 하네(鑑明則塵垢不止 止則不明也 久與賢人處 則無過 / 감명칙진구부지 지칙부명야 구여현인처 칙무과). 세상에는 잘못을 변명하는 사람은 많으나 제 잘못을 인정하면서 그로 인해 받는 죄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적네" 하며 정자산을 꾸짖었다.

 

 이와 같이 명경지수란 본래 무위(無爲)의 경지를 가리켰으나 후일 그 뜻이 변하여 순진무구한 깨끗한 마음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희승(李熙昇)   

 1896∼1989. 국어국문학자. 본관은 전의(全義). 호는 일석(一石). 경기도 광주 출생. 종식(宗植)의 맏아들이다. 1903년부터 5년간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고, 1908년 이정옥(李貞玉)과 혼인한 다음 곧 상경하여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에 입학하였으나, 1910년 경술국치로 이 학교가 폐교되어 3년만에 졸업하였다.

 

이어 1911년 9월까지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양정의숙(養正義塾)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1914년 사립 신풍학교(新豊學校) 교원으로 취임하고, 한편으로 1915년 사립 중동학교 야간부에 통학하였으며, 이어 1918년 사립 중앙학교 4년을 졸업하였다.

 

같은 해 경성직뉴주식회사(京城織紐株式會社)에 서기로 입사하여 근무하다가 1919년부터 4년 반 동안 경성방직주식회사에 근무하였다.

 

1923년 전문학교 입학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1925년 연희전문학교 수물과(數物科)를 졸업하고 이어 1927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료한 다음, 193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 및 문학과를 졸업하였다.

 

같은 해 조선어학회에 입회하여 간사(이사)와 간사장(대표간사) 등을 역임하면서 이 회에서 추진하고 있던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 완성)과 ‘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1937년 완성)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1930년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 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직에 취임하여 국어학 및 국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서 1945년 8월 17일까지 3년 동안 복역하였다.

 

광복 후 1945년 12월 새로 개교한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에 취임하고, 1946년 10월 22일의 학제개편으로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어 국어학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진 국어학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2년 서울대학교대학원 부원장, 195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장 등을 역임하고, 1960년 4월 25일 3·15부정선거규탄 대학교수단 데모에서는 앞장을 섰다. 1961년 9월 30일 서울대학교를 정년퇴임함과 동시에 서울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3월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에 피선되고, 1962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에 피임되었으며, 1963년 8월 동아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여 2년 동안 군사정권 아래에서의 언론창달에 진력하였다.

 

1965년 9월 대구대학 대학원장에 피임되어 학계에 복귀한 뒤,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71년부터 1981년까지 단국대학교 부설 동양학연구소 소장직을 맡아 국학 및 동양학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한편, 1969년부터 19년 동안 한국어문교육연구회 회장으로서 국한문혼용 주장 등 어문교육 시정에 힘썼고, 1968년부터 20년 동안 현정회(顯正會) 이사장으로서 단군의 존숭사업에 공헌하였다.

 

학문적 업적은 국어학분야가 주이면서도 국문학분야에도 걸쳐 있어서, 첫번째 저서가 1938년에 간행된 ≪역대조선문학정화 歷代朝鮮文學精華≫ 상권이었으며, 이어서 1946년에 ≪조선문학연구초 朝鮮文學硏究초崇≫가 출간되었다.

시집으로 ≪박꽃≫(1947)·≪심장의 파편≫(1961)등이 있으며, 수필집으로 ≪벙어리 냉가슴≫(1956)·≪소경의 잠꼬대≫(1964) 등이 있다.

 

1946년에 출간된 ≪한글맞춤법강의≫는 1933년에 확정된 ≪한글맞춤법통일안≫의 원리를 각 항마다 이론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일찍이 조선어학회의 기관지인 ≪한글≫에 1938년부터 1940년까지 20회에 걸쳐서 연재한 것을 하나로 모으고 일부 내용을 보완한 책이다.

 

또한, 1947년에 간행된 ≪조선어학논고 朝鮮語學論攷≫는 1930년부터 1940년까지에 발표하였던 20여편의 논문 가운데에서 16편만을 수록한 것이다. 이러한 기초적인 연구 끝에 1955년에 간행된 ≪국어학개설 國語學槪說≫은 우리나라 국어학연구의 방향을 제시한 명저였다.

 

그의 문법에 관한 이론은 대학에서의 문법론 강의자료에 상당히 많은 분량에 걸쳐 나타나 있었으나, 공간(公刊)되지 못하여 중고등학교의 문법교과서를 통해서 문법체계를 엿볼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교과서로는 ≪초급국어 문법≫(1949)과 이를 보완한 ≪새고등문법≫(1957)을 출간하였는데, 문법을 정의하기를 ‘단어와 단어가 서로서로 관계를 맺어서 글월을 이루는 법칙’이라 하고, 문법의 영역을 총설·품사·글월〔文〕의 3부문으로 하였다.

이는 최현배(崔鉉培)의 ≪우리말본≫(1937) 등에서 문법의 영역을 소리갈〔音聲學〕·씨갈〔詞論〕·월갈〔文章論〕과 같이 음성학이나 음운론 분야를 문법학에 포함시켜 오던 연구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또, 용언의 활용어미는 독립된 품사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체언과 결합되는 여러 가지 곡용(曲用)어미는 이를 독립된 단위로 인정하여 ‘조사’라고 하였으며, 체언에 조사가 결합되는 언어형식을 ‘어절(語節)’이라고 하고, 품사론의 단위는 단어, 글월의 단위는 어절로 잡았었다.

 

품사는 명사·대명사·동사·형용사·존재사·관형사·부사·감탄사·접속사·조사로 하고, 지정사(指定詞) ‘이다'는 체언의 활용인 서술격조사로 처리하였다.

 

그의 이러한 문법체계는 최현배의 문법체계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법체계의 2대계열을 형성하여 왔다. 문법론 이외에도 단어와 어휘분야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1961년에 발행한 ≪국어대사전≫(수록어휘 257,854)은 또 하나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1957년 학술원공로상, 1960년 서울특별시교육공로상,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1978년 인촌문화상, 1989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참고문헌≫ 一石李熙昇博士年譜(國語學會, 國語學 14, 1985), 一石先生의 學問世界(姜信沆, 顯正會, 1990).(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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