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랑 망해사>의 새로운 해석
by 송화은율「처용랑 망해사」의 새로운 해석
「처용가」를 이해하려면 먼저 작품「처용가」와 『삼국유사』에 실린 배경설화와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고대의 시가가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처용가도 그에 대한 배경설화와 함께 공존함으로 인해서 그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둘을 모두 논의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르게 되기 때문이다.
처용가를 독립적인 하나의 고대시가로 두고 연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된 적이 있으나 그렇게 처용가를 배경설화와 분리해 버렸을 때 그로부터 얻어진 결론은 처용가의 본의를 왜소하게 만드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또 다른 방법은 역사 연구의 한 자료로서 ‘처용가’를 취급하는 것이다. 즉 처용랑을 신라 때 울산만에 출입하던 이슬람 상인이라고 보거나,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는 것이 그 한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들은 처용설화가 일차적으로는 문학작품이라는 점에서 역사를 반영할 수는 있어도 역사 자체는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성급한 결론은 자제되어야 한다.
처용가와 배경설화를 독립적인 작품으로 해체시키고 나면 작품으로서의 생명감은 오히려 감퇴되지 않을까 싶다. 배경설화 역시 문학작품이기는 마찬가지요, 이들의 결합형태 자체가 하나의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처용가는 고대의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시대적 상황과 관련되는 문맥까지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처용가를 배경설화에서 분리시키면 곧바로 미아가 되고, 이렇게 되면 처용가 자체만이 아니라 뒤에 남겨진 배경설화 역시 불구적인 작품이 되고 만다.
처용가는 「처용랑 망해사」조의 눈과 같다. 눈만 따로 하여 그것을 생명체라 부를 수 없듯, 눈이 없는 생명체 역시 생각하기 곤란하다.
(1)「처용랑 망해사」조의 새로운 검토
설화를 면밀하게 검토해본 독자라면 누구나 이것은 단순한 처용설화가 아니고 처용 이외의 이야기는 전부 무시되어도 좋은 서사구조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처용 이야기는 이 설화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 대부분의 사건들은 헌강왕의 놀이와 관계되는 일련의 체험들이고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통치자와 국민의 어리석음이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라는 사실로 연결된다. 다시 말해 이 설화는 신라 말기의 사회상이 우의적으로 반영된 이야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이 설화의 중심인물은 처용이 아니라 헌강왕이다. 물론 처용과 그의 아내, 그리고 역신 등이 만들고 있는 이 짧은 이야기는 충분히 자족적이고 자율적인 설화구조를 만들고 있다. 그러나 처용과 역신과의 이야기가 종결되고 나서 바로 이어지는 내용은, 헌강왕이 돌아와 영취산 동쪽 기슭에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절을 세우고 '망해사'라 이름했다는 것과 이 절은 용을 위해 세웠다는 것으로 설화를 일단락 짓고 있다. 여기까지의 설화는 헌강왕 이야기의 틀 안에 처용의 이야기가 끼워져 있어서 일종의 액자식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설화 속에 담긴 처용 이야기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서사단락 | 주요내용 | 중심인물 | 현신 |
1 | 개운포의 유래 | 헌강왕 | 수신 |
2 | 처용이야기 | 처용 | 역신 |
3 | 포석정 남산신 출현 | 헌강왕 | 남산신 |
4 | 금강령 북악신 출현 | 헌강왕 | 북악신 |
5 | 동예전 지신 출현 | 헌강왕 | 지신 |
6 | 참요와 망국 | - | - |
도표를 보면 헌강왕이 겪어 나가는 이야기들은 개별적인 단락을 이루고 있으면서 하나의 서사구조로 통합되도록 하기 위하여 유사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심인물은 헌강왕이며 처용은 그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도 확인된다. 게다가 처음부터 끝까지 헌강왕 앞에 신들이 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발단부분에서 신라가 태평하였으나 점점 사건이 진행되면서 신들의 경고를 받아야 할 만큼 나라가 피폐해 지고 마침내 나라가 멸망하는 사실을 순차적으로 제시하는 일종의 완결된 구조를 드러낸다. 이 같은 내용을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도출할 수가 있다.
첫 번째 現神인 동해 용왕은 아마도 어지러운 나라의 형편과 도덕적 타락에 대한 경고로서 정법(正法)이 제자리를 찾는 사회가 회복되기를 바라며 춤을 춘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며 절을 지으라는 임금의 호법적 결정에 만족하여 아들을 바치고 물러났을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은 여전히 놀이에만 열중하고 사회는 부도덕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자 이번에는 산신이 나타나 노골적인 경고를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금의 행동이 여전히 변화를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또다시 북악신과 지신이 등장하여 같은 내용의 춤과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들의 출현은 신라가 망할 것을 우려하고 경고한 것이며 이 설화의 핵심적 배경은 바로 신들의 출현과 헌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즉 이 설화는 헌강왕대의 어수선한 사회를 이야기하면서도 동해의 용왕도 끌어들이고 처용과 역신과 아내의 이야기도 추가한다. 그것은 설화로 번역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상상력이 도달한 또다른 삶의 현장이다. 역사적 사실과 설화적 사실이 같이 공존하는 설화의 공간, 그것이 「처용랑 망해사」의 인간과 신이 공존하는 시간이며 공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처용랑 망해사」는 헌강왕과 당대인들에게, 여러 신들로부터 주어진 경고의 메시지가 수용되지 않음으로써 마침내 나라가 망하고 만다는 단순한 골격이 드러나고, 그 골격을 감싸고 있는 언어와 사고는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다양한 신비체험이나 신성에 의해 하나의 복잡한 설화를 형성하고 잇다는 점을 비로소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 헌강왕과 처용의 관계
처용설화와 처용가에서 확인되듯 처용은 아름다운 아내를 집에 두고 놀러 다니며 지냈다. 이는 마치 헌강왕이 풍요로운 나라에서 놀러 다니던 것과 같다. 헌강왕에게서의 국가가 처용에게서는 가정이요, 헌강왕의 왕국이 풍요롭다는 것이 처용에게는 아내가 미인이었다는 것과 상통하고 있다. 아름다운 나라가 아름다운 여인으로 비유되어 있는 것이다. 즉 헌강왕과 처용은 동일한 상황에 놓인 동일한 성격을 지닌 인물이다.
하지만 다음 상황이 되면 양자는 전혀 다른 모습을 지니게 된다. 헌강왕이 놀러 다닐 때 이곳 저곳에서 신들이 나타나 국가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는 몸짓으로 춤을 추고 또 노래했다. 그러나 헌강왕은 나라가 처한 위기를 알아채지 못했고 오히려 상서로운 기운으로 생각했다.
반해 처용은 자신의 가정에 닥친 불행을 직시했다. 그의 아내가 역신에게 능욕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 곧바로 그의 눈에 비친 것이다. 이는 마치 헌강왕설화에서 신들이 신라에 닥친 위난을 곧바로 인지했던 것과 같다. 따라서 처용은 상황의 인지능력이라는 점에서 신들과 동일한 반열에 서 있다. 처용은 역신이 사람의 모습일 때도 볼 수 있었지만, 본래의 모습인 귀신의 형상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를 볼 수 있었다. 인간과 신의 모습을 다 볼 수 있는 처용은 그 자신 역시 신이며 인간인 때문이었다.
처용의 아내가 역신에게 욕을 본 것은 신라가 적군에 의해 유린된 것과 대비될 수 있다. 나라를 지켜주는 것으로 믿었던 방위신들은 미래를 예견하고 미리 경계토록 헌강왕 앞에 나타나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신들의 메시지는 왜곡되고 말았다. 처용랑 역시 신이다. 처용랑은 신라로 가상되는 가정을 통해 직접적인 체험으로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지리가」가 신들의 메시지 듯 「처용가」가 역시 신의 메시지다. 신라말 헌강왕에 대한 신들의 메시지는 용왕이라는 수신, 남악령의 산신, 금강령의 산신, 그리고 동례전의 지신까지가 동원되어 계속 보내졌고, 더구나 처용랑에 의해 훨씬 형상화된 형태로까지 전달되었다.
처용랑 출현시 본래 신이었던 그가 인간으로 된 것과는 반대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던 그가 처용가를 부르면서 다시 신의 모습을 되찾았다. 비유적인 상황을 통해 스스로 헌강왕의 입장이 되어 나타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신의 입장이 되어 메시지를 전해야 하는 사명감을 동시에 실현하다 보니 자연히 두 가지의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하는 이중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래서 헌강왕과 같은 형태로서 아리따운 아내를 두고 놀러 다니는 배역을 맡았는가 하면, 그를 범한 역신의 모습을 직접 알아차리는 신의 능력을 겸비하여 처용가를 불러 경계했던 것이다.
신라는 하나의 소우주다. 그러나 처용의 집 역시 하나의 소우주다. 그 평면적 크기에 있어 엄청난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양적 크기는 배제되고 단지 그것의 구성원리가 동일한 것으로 사고되는 것이 바로 신화적 공간인 것이다.
(3) 「처용가」와 「지리가」
설화를 중심에 놓고 보면 「처용가」와 「지리가」는 삽입가요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노래들은 서정적인 내용이 아니라 짧지만 서사적인 내용을 담았다.
「지리가」
슬기로써 나라를 다스릴 사람들이
미리 알고 밤에 도망을 가므로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다.
「처용가」는 처용설화를 압축해서 노래로 부른 것이고, 「지리가」는 헌강왕대의 정황을 압축한 노래다. 이렇게 볼 때 처용설화는 헌강왕 설화와 등위적인 구조와 내용을 가진다. 즉 처용가는 독립된 시가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헌강왕 이야기, 처용랑 이야기, 어법집의 기록, 지리가 등과 등위적인 관계를 지니면서 불리었던 노래다.
향가가 향찰로서 기록되게 된 가장 궁극적인 요인은 그것이 노래로 불리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처용가 역시 당시에 불리어졌던 것으로 가정한다면, 이는 참요적 기능을 가지는 노래로서 대중들 사이에서 불리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참요란 국가 장래와 관련을 내용을 가지며, 더구나 국가가 위험에 처하거나 혼탁한 풍세를 보이게 되면 반드시 나타난다.
그러나 처용가가 참요적 기능을 하는 것은 바로 「처용랑 망해사」라는 하나의 설화 속에 그것이 위치해 있을 때 뿐이다. 이러한 문맥적 상황을 벗어난 다른 텍스트의 경우 처용가는 결코 참요적 기능을 가진 노래로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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