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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處容歌)

by 송화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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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가(處容歌)

 

 

동경명기월량

야입이유행여가

입량사침의견곤

각오이사시량라

이힐은오하어질고

이힐은수지하언고

본의오하시여마어은

탈질량을하여위리고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요점 정리

 

작자 : 처용(處容)

연대 : 신라 헌강왕(875-885)

갈래 : 8구체 향가(4·4조의 민요조로 됨)

표현 : 향찰로 표기, 직서적(直敍的 : 상상이나 감상 따위를 덧붙이지 아니하고 있는 그대로 서술)인 표현. 체념적인 농사(弄詞), 풍자, 제유법

성격 : 축사(逐邪)의 노래

구성 : 1-4행 역신의 침범, 5-6행 대상에 대한 의문 7-8행 처용의 관용, 또는 체념으로 역신과 화자의 대화가 있음(5. 6행)

주제 : 아내를 범한 귀신을 쫓아냄, 혹은 아내의 부정을 체념함, 축신(逐神-귀신을 쫓음)

내용 : 아내를 빼앗은 역신에게 관용의 정신을 베푸는 이야기.

 

의의 :

1. 벽사 진경(僻邪進慶 : 간사한 귀신을 물리치고 경사를 맞이함)의 소박한 민속에서 형성된 무가(巫歌 : 무속의 노래)이다. 무격 신앙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처용은 제웅(역신을 쫓기 위하여 음력 정월에 동구밖에 내던져 액을 면하게 한다는 볏짚 인형. 처용과 제웅은 발음 및 축사의 기능이 같으므로 처용을 곧 제웅이라고도 한다.)과 연결시킬 수 있다.

 

2. 의식무, 또는 연희의 성격을 띠고 고려와 조선 시대까지 계속 전승되었다.

 

3. 고려 속요에도 '처용가'가 있어 향가 해독(解讀)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출전 : 삼국유사(三國遺事)

 

내용 연구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1-4행 : 역신의 침범)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5-8행 : 처용의 관용)

 

 

아내와 역신의 동침 장면을 '다리 넷'으로 표현한 것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사람을 나타내는 제유적 표현 방식이라는 말이고, 풍자는 어리석음의 폭로, 사악함에 대한 징벌을 주축으로 하는 기지(機智, wit)·조롱(嘲弄, ridicule)·반어(反語, irony)·비꼼(sarcasm)·냉소(冷笑, cynicism)·조소(嘲笑, sardonic)·욕설(辱說, invective) 등의 어조를 포괄한다. 그런 점에서 역신에 대한 처용의 태도에서 풍자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마지막 행에서 처용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동침하는 장면을 목격하고서도 아내나 그 사내를 비난하지 않고 관용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때 처용의 심리는 슬픔과 체념, 그것을 극복하는 달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설화에 따르면 처용은 아내의 간음에서 오는 심리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데, 이는 대상에 대한 부정과 공격을 통한 해결 방식이 아니라, 자기 절제와 초극을 통한 갈등 해결 방식이라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이러한 절제와 초극은 아내와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윤리적 우월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역신이 처용에게 감복한 이유도 이러한 윤리적 우월성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고려 속요 '처용가'

'악학궤범'에 실려 있는 고려 속요 '처용가'에 향가 '처용가' 중 6구가 다음과 같이 한글로 옮겨 있어 향찰 문자 해독의 열쇠가 되었다.

 

 

 

 

 

이해와 감상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고 있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살펴 보면,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라 한다. 이 노래는 신라 49대 헌강왕 때 처용랑이 역신(疫神)을 쫓기 위해 지어 부른 8구체 향가이다. 이 노래의 변형이 고려시대 `처용가'로 악학궤범과 악장가사에 실려 있으므로 향찰로 표기된 어려운 향가를 해독할 수 있는 열쇠를 얻은 것이다.

 

이 노래의 내용에 대해서 학자들은

① 민속학의 관점에서 처용을 무속과 관련지어 보는 견해,
② 정치사의 관점에서 처용을 지방호족의 아들로 보는 견해,
③ 신라시대에는 멀리 서역 지방과도 교역이 있었다고 보아 처용은 이슬람 상인으로 보려는 견해 등이 있다.

 

그러나 ①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 하다. 그 까닭은 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도 노래 부르며 춤추며 물러났다고 하는 것은 상식을 범주를 벗어난 무격 사회에만 있는 풍습이기 떄문이다. 또한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에서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이 노래의 절정은 7행과 8행이다. 이는 체념적인 주사(呪詞)로 볼 수 있으나 오히려 처용의 상황(초극적인 이미지)을 부각시킨 것으로 후대로 오면서 벽사( 邪)의 위력으로 발전한 것을 이해할 만 하다. 이를 무가(巫歌)의 일종으로 보아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하지 않고는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무속에서는 악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내는 것이 통례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해와 감상2

 

헌강왕이 개운포를 지나는데, 깜깜해지는 변괴가 일자 그 자리에 절을 지어 주기로 하니 어둠이 가셨다. 이 자리에 절을 지으니 망해사이다. 동해 용왕이 이에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인 처용을 헌강왕에게 바쳐 서라벌에서 살게 되었다. 처용이 벼슬을 하고 있을 때 역신이 그의 아내를 범하여 이 노래를 부르니 역신이 감읍하여 처용의 상이 있으면 범접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것은 벽사(僻邪)에 해당하는 것으로, 문이나 지붕에 처용상을 붙이게 된 기원, 즉 문신의 좌정 과정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 설화와 관련지어 작품을 읽어 보자.

 

이 노래는 동해 용왕의 아들인 처용이 신라에 와서 벼슬을 하던 어느 날, 그가 늦게까지 놀고 있는 사이에, 역신이 매우 아름다운 그의 아내를 흠모하여 몰래 동침했다. 집에 돌아와 상황을 안 처용은 이 노래를 부르자 역신은 크게 감복하여 용서를 빌고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로 사람들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 귀신을 막았다. 이런 배경 설화를 가진 이 노래에 대한 해석에 여러 가지 견해가 있으나 축사(逐邪) 및 벽사진경( 邪進慶)의 노래로 이해하는 것이 통설이다. 역신이 처용의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자백하고 퇴각한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에서는 아무리 악신(惡神)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악신을 보내는 '뒷전풀이'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해와 감상3

 

이 작품은 종교적, 역사적, 축사 및 벽사진경의 시각으로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한편, 역신이 처용의 너그러운 태도에 감복하여 자신의 본체를 밝히고 물러간 내용과 관련하여 무속(巫俗)에서는 아무리 악한 신이라도 즐겁게 하여 보낸다는 풍속과 한국인의 여유에 찬 생활의 예지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 노래는 역신을 보내는 뒷풀이로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노래의 절정 부분인 시의 마지막 두 구는 표면상은 체념의 태도를 해학적으로 표현한 말에 해당하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일상인의 생각과 감정을 뛰어넘는 처용의 초극적인 이미지를 찾아볼 수 있다.

 

이해와 감상4

 

신라 헌강왕 때 처용이 지었다는 8구체 향가. 삼국유사 권2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에 관련설화와 더불어 원문이 실려 있다.

〔배경설화〕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에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원문 및 해석〕

 

처용이 역신 앞에서 부른 노래는 삼국유사에 무분절로 기재되어 있다. 東京明期月良夜入伊遊行如可入良沙寢矣見昆脚烏伊四是良羅李隱吾下於叱古二隱誰支下焉古本矣吾下是如馬於隱奪叱良乙何如爲理古.


이 노래에 대한 양주동(梁柱東)의 해독은 다음과 같다. “棋巧串 래/밤드리 노니다가/드러 자리 보곤/가리 네히어라./둘흔 내해엇고/둘흔 뉘해언고/본 내해다마/아坮堪 엇디릿고.


노래의 풀이는 서울 밝은 달에 밤들이 노니다가/들어와 잠자리를 보니/가랑이가 넷이도다./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본디 내 것이지마는/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이다.


처용의 존재에 대해서는 벽사가면의 인격화現人邪神설, 반중앙적 지방 호족의 아들로서의 질자(質子아들을 인질로 보냄)설, 이재술(理財術)을 지녔던 이슬람 상인설, 호국호법룡의 불교 상관 인물설, 무격(巫覡) 또는 무격의 몸주主神설, 풍월도적 미륵신앙을 갖고 있는 화랑설 등이 있다.


이름에 대해서는 훈차로 본 터알 바가지설, 곧즛(龍顔)설, 곶얼굴(花容)설과 음차로 본 무(巫)의 뜻인 자충(次次雄慈充)설, 용(龍)의 뜻인 (稱)설, 청룡(靑龍)의 이기(異記)설 등이 있다.


처용의 왕정 임무에 관해서는 그의 본고장 울산의 사정에 관한 정부의 자문 임무설, 신라 말기 위기에 처한 경제체제를 개혁하기 위한 이재가(理財家)로서의 보좌설, 역신(疫神)을 물리치는 굿으로서의 보좌설, 의무(醫巫)로서의 보좌설, 무격으로서 주술과 가무로써 기상의 변괴를 물리치는 직책설, 왕권 강화와 국가 수호의 임무설 등이 제기되었다.


역신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열병신(熱病神천연두·홍역·학질을 일으키는 질병신)으로 보고 있으나, 병든 도시의 유한공자(遊閑公子), 곧 타락한 화랑의 후예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탐락과 방탕 풍조에 빠져 있던 반도덕적인 패륜아의 상징으로 보는 견해, 나라를 병들게 하는 어두움과 악의 화신으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내용 및 형식〕

 

처용가의 내용과 형식은 시적 화자가 역신의 화자 처 범접(犯接)을 보고서 그 현장 상황과 그에 대한 화자의 대응태도를 일인칭 독백체 형식으로 노래하되, 노래에는 주가(呪歌)의 성격이 전혀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처용이 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나니 역신이 처용의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여 사죄하고 물러갔으므로 이 노래를 일반적으로 주가로 본다.


한편 이 처용가에 대해 의례의 한 부분이던 신화무가 중의 일부로써 주적 정조인 창사 부분의 일부라는 견해, 처용이라는 법행룡(法行龍)이 창한 일종의 진언(眞言)이요 불교적인 주문이라는 견해, 주술 기원의 재연(再演)인 서사 부분과 짝해서 역신 퇴치 주술의 핵을 이루게 된 주사라는 견해, 처용신의 유래를 설명한 서사무가에 삽입된 주술 무가라는 견해, 강자에 의한 아내의 정조 유린이라는 비애를 골계로 표현한 민요격 향가라는 견해, 동해의 용신제의(龍神祭儀)에서 불리던 무가라는 견해 등이 제기되어 있다.


이 노래는 가사가 부연되어 고려·조선 시대의 나례(儺禮음력 섣달 그믐날 밤에 궁중이나 민가에서 악귀를 쫓기 위해 베풀던 의식) 공연 때 처용가무에서 불린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古歌硏究(梁柱東, 博文書館, 1957), 鄕歌解讀法硏究(金完鎭, 서울大學校 出版部, 1980), 新羅文學에 있어서의 鄕歌論(琴基昌, 太學社, 1993), 鄕歌批解(兪昌均, 螢雪出版社, 1994), 鄕歌新解讀硏究(姜吉云, 學文社, 1995), 鄕歌文學論과 作品硏究(羅景洙, 集文堂, 1995), 삼국유사 향가연구(양희철, 태학사, 1997), 處容說話의 綜合的 考察(大東文化硏究 別集 1,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72), 한국고시가의 거시적 연구(김학성, 집문당, 1997), 處容歌硏究(金東旭, 東方學誌 5, 1961), 處容說話의 硏究(張籌根, 國語敎育 6, 1963), 處容說話攷(玄容駿, 國語國文學 39·40 합병호, 1968), 三國遺事所載 處容說話의 一分析(李佑成,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處容說話의 一考察(李龍範, 震檀學報 32, 1969), 處容歌의 巫俗的 考察(徐大錫, 韓國學論叢 2, 1975), 處容歌舞의 演劇史的 理解(趙東一, 演劇評論 15, 1976), 處容說話와 그 歌謠의 硏究(金承璨, 韓國文學論叢 4, 1981).(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용가의 다양한 해석

 

1. 불교 신앙적 관점

종교적 의도를 문학 작품에 반영한 것으로 파악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호국(護國)호법(護法)의 용(龍)으로 보고, 그의 왕정 보좌와 가무(歌舞)는 중생(衆生) 교화(敎化)의 임무수행이자 불교적 교화 가무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는 견해이다.

 

2. 역사적 관점

신라 말기의 역사적 현실과 처용 설화 전체 문맥을 결부시켜 해석하는 입장으로서, 처용을 중앙의 왕권에 순복(順服)하지 않는 지방 호족의 자제로 보아, 헌강왕의 개운포 출유는 지방 호족의 무마책이고, 동해 용왕의 조화는 지방 호족의 중앙 왕권에 대한 도전의 표시이며, 용의 아들 처용의 입경(入京)과 왕정 보좌는 고려(高麗)의 기인(其人) 제도(制度)와 같이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잡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리고 처용의 아내를 범한 역신을 중앙 귀족 자제의 타락한 모습으로 파악한다.

 

심화 자료

서역국과의 교류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는 처용가

 

향가 "처용가"와 고려가요 "처용가"의 비교

 

 

 

전문 풀이

 

(전강) 신라 성대(新羅聖代) 밝은 성대의

천하태평은 나후(羅後)의 덕

처용(處容) 아비여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이로써 사람들이 별말이 없게 되니

(부엽) 모든 재앙(災殃)이

일시에 소멸하도다.

(중엽) 아아, 아비의 모습이여

처용 아비의 모습이여

(부엽) 머리에 가득 꽂은 꽃이 무거워

기울어진 머리

(소엽) 아아, 수명(壽命)이 장수(長壽)할

넓으신 이마

(후강) 산(山) 모양 비슷한

긴 눈썹

애인을 바라보는 듯한

너그러운 눈

(부엽) 바람이 잔뜩 불어

우글어진 귀

(중엽) 복사꽃같이

붉은 얼굴

(부엽) 진기한 향내 맡으시어

우묵해진 코

(소엽) 아아, 천금(千金) 먹으시어

넓어진 입

(대엽) 백옥(白玉) 유리같이

하얀 이빨

복이 많다 칭찬 받아

밀어 나온 턱

칠보 무거워서

숙어진 어깨

좋은 경사 너무 많아

늘어진 소맷자락

(부엽) 슬기를 모두어

유덕(有德)한 가슴

(중엽) 복과 지혜가 다 풍족하여

불룩한 배

붉은 띠 무거워

굽은 허리

(부엽) 태평성대를 같이 즐겨

길어진 다리

(소엽) 아아, 계면조(界面調)에 맞추어 도는

넓은 발

(전강)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바늘도 실도 없이

바늘도 실도 없이

(부엽) 처용 아비를

누가 만들어 세웠는가.

(중엽) 많이도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

(부엽) 십이 제국이

모두 만들어 세워

(소엽) 아아, 처용 아비를 많이도 세워 놓았구나.

(후강) 버찌아 오얏아 녹리야

빨리 나와 내 신코를 매어라.

(부엽) 아니 곧 맨다면

궂은 말 떨어지리라.

(중엽) 신라 서울 밝은 달 아래

밤새도록 노닐다가

(부엽) 들어와 내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로구나.

(소엽) 아아,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이뇨.

(대엽) 이럴 적에

처용 아비만 본다면

열병신(熱病神)이야

횟감이로다

천금(千金)을 주랴

처용 아비야

칠보(七寶)를 주랴 처용 아비야

(부엽) 천금 칠보도 말고

열병신 잡아 날 주소서

(중엽) 산이나 들이나

천 리 밖으로

(부엽) 처용 아비를

비켜 갈지어다.

(소엽) 아아, 열병대신(熱病大神)의

발원(發願)이로다.

요점 정리

 

작자 : 미상

갈래 : 고려가요. 속악가사

구성 : 비연시(非聯詩). 희곡적 구성

성격 : 무가(巫歌)

표현 : 향가 "처용가"의 일부가 들어 있음

내용 : 4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사(序詞)로서의 첫째 단락과 처용의 위압적인 모습을 그린 둘째 단락, 처용의 가면을 제작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셋째 단락, 역신에 대한 처용의 위용을 말함으로써 역신을 물리치고 접근을 방지하고자 하는 넷째 단락이 그것이다.

주제 : 축사(逐邪)의 노래

출전 : <악학궤범>. <악장가사>

 

향가 "처용가"와 고려가요 "처용가"의 비교

 

1. 속악가사와 고려가요

학자에 따라서 고려 시대의 노래를 고려가요 혹은 고려속요라 하기도 하고 속악가사라 하기도 한다. 고려가요라는 명칭은 단순히 '고려시대의 노래'란 뜻이 담겨 있고, 고려속요라는 명칭은 노래의 성격을 뜻한다. 즉 별로 우아하지 않은, 속된 노래란 뜻이다.

 

속악가사라는 명칭은 <고려사> 악지(樂誌)에 고려 시대 노래를 아악(雅樂), 당악(唐樂), 속악(俗樂)으로 분류해 놓은 구분에 따른 것으로, 아악은 국가의 공식 행사에 소용되는 노래란 뜻이고, 당악은 당나라에서 들어온 것, 속악은 국내에서 생긴 노래라는 뜻이다.

 

2. 향가 "처용가"와 고려가요 "처용가"

위의 자료들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고려 시대의 "처용가"는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와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변모는 원래 향가인 "처용가"가 주술적 효력을 발휘해 역신을 물리치는 기능을 발휘하자, 그것을 전승시킨 무당들이 굿이라는 행사에 적합하도록 길게 고쳤기 때문일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3. 신라의 향가인 "처용가"는 고려에 와서 궁중의 나례(儺禮-잡귀를 쫓기 위한 의식)와 결부되어 '처용희(處容戱)', '처용무(處容舞)'로 발전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는 제야(除夜)에 구나례(驅儺禮)를 행한 뒤 두 번 처용무를 연주하여, 그 가무(歌舞)와 노래가 질병을 몰아내는 주술적(呪術的) 양식으로 바뀌었다.

 

 

처용(處容)

 

동해 용왕의 일곱째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체는 알 수 없고 학자간의 의견도 구구하다. '처용가'가 처용희(處容戱)로 불리었다는 점에서 처용은 작자라기보다 처용의 역을 하면서 노래를 부른 사람인지도 모른다.

 

처용 설화

 

이 노래는 유사 권 2 처용랑조에 실려 있다.

 

제 49대 헌강왕때에 서울서 바다 어구까지 집들이 총총 들어선 가운데 초가가 한 채도 없으며 길에는 피리 소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고 비바람도 철을 따라 순조로웠다. 어느 때 대왕은 개운포에 놀이를 베풀었다가 환가하는 길에 바닷가에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일고, 천지가 캄캄하여 앞길조차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괴이하여 좌우에게 물어보니 일관이 아뢰옵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행하여 이를 풀어야겠습니다."라고 한다. 그래서 소관 관리에게 칙령을 내려서 용을 위하여 그 근처에 한 절을 세우게 하기로 하였는데, 이 칙령이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다 개었다. 그래서 거기를 개운포(開雲浦)라 불렀다.

 

동해의 용은 기뻐서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타나서 왕의 덕을 찬송하여 노래하고, 음악을 올리며 춤을 추고, 그 한 아들을 왕께 주었다. 함께 서울에 와서 정치를 보좌하게 하였다. 이 용의 아들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을 오래 멈추어 두기 위해서 미녀를 골라 아내를 삼게 하고, 또 급간 벼슬을 주었다. 처용의 아내는 절세의 미인임으로 역신이 그를 흠모해서 사람의 모양으로 변신을 하고, 어떤 날 밤 그의 집에 이르러서 몰래 함께 자고 있었다. 처용은 바깥에 나갔다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둘이서 함께 자고 있는 지라 자기는 노래를 부르며, 춤추며, 그 곳을 물러갔다. 이 때에 역신은 모양을 나타내고 처용의 앞에 꿇어앉아서 "제가 공의 부인을 흠모하여 지금 범했는데, 공이 보시고도 노여워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시니 이 후로는 공의 화상만 있는 곳이라도 결코 들어가지 않고, 피하리다." 하고 사죄하였다. 이로말미암아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화상을 문간에 붙여서 사귀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벽사 진경: 僻邪進慶)

왕은 서울로 돌아오자 이내 영취산(지금의 울산에 있는 산) 동쪽 기슭의 경치 좋은 곳을 가려서 절을 세우고 망해사 또는 신방사라 하였으니 용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처용희(處容戱)

 

신라·고려·조선 시대에 걸쳐 계속 전승되어 온 구나의식무(驅儺儀式舞)이면서 연극으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가면을 쓰고 잡귀를 물리치는 것은 구나 의식의 보편적인 방식의 하나이며, 부락 굿에서도 그러한 예를 흔히 찾을 수 있다. 처용은 신인 동시에 인간이며, 인간적인 감정을 지니고 역신과 대결한다는 점에서는 처용희를 연극이라고 말한다. 굿에서 연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것이 처용회의 근본적 성격이었으나,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이 복합되어 실제 공연하던 처용희를 이루었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의 처용희는 용신, 산신, 불교의 의식의 복합이고, `악학궤범'에 전하는 처용희는 처용이 오방(五方) 처용으로 되어 연화무학무(蓮花舞鶴舞)와 복합되어 있으며, 여기(女妓)가 처용가에 있어서 봉황음 삼진작(鳳凰吟 三眞勺) 등의 다른 노래를 하도록 되어 있다.

 

고려와 조선의 처용희는 주로 궁중에서 거행되는 세말(歲末)의 나례에서 공연되었으나, 민간의 처용회도 있었다. 의식무로서의 기능이 유지되기는 했으나, 놀이로서의 성격이 확대되었다. 영조 이후에는 중단되었다가 1920년대에 `악학궤범'에 의거해서 다시 시작해 오늘날에 전한다.

 

제웅

 

① 민속에서는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물건. 음력 정월 열나흗날 저녁에 제웅직성이 든 사람의 옷을 입히고 푼돈도 넣고 이름과 생년을 적어서 길가에 버림으로써 액막이를 하거나, 무당이 앓는 사람을 위하여 산영장을 지내는 데 쓴다. 비슷한 말로 초우인·초인(草人). 최 씨 부부는 미실이 입고 자던 옷을 벗겨 제웅에게 입혔으며 구색에 맞춰 염도 했다.≪이문구, 장한몽≫ ② 분수를 모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제웅으로 만들었나 매우 어리석은 사람을 비꼬는 말.

사진 출처http://my.dreamwiz.com/zipculture/frameset3.htm

인형

흙 ·나무 ·종이 ·헝겊이나 고무 ·셀룰로이드 ·비닐 등으로 만든 사람 형상의 완구 또는 장식품.

 

Ⅰ. 개관

흙 ·나무 ·종이 ·헝겊이나 고무 ·셀룰로이드 ·비닐 등으로 만든 사람 형상의 완구 또는 장식품.

인형은 나라마다 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간소한 구성으로서 행복을 부르고 재액(災厄)을 쫓는 종교적인 의미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서도 만들어졌다. 또 문화가 발달하여 미(美)에 대한 감각이 갖추어짐에 따라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미적으로 만들어져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인형도 탄생되었다.

 

인간을 본뜬 상(像)이 최초로 출현한 것은 구석기시대 오리냐크 문화기(BC 25000년경)이며, 이 문화기에 예술작품이 인류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여 유명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비롯한 여성의 흉부나 둔부 등 신체의 특성을 강조한 인물상이 유럽에서부터 시베리아에 걸친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들은 다산(多産)을 상징 ·기원한 것이라고 하나 인형의 부류에는 넣지 않는다. 그후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인형의 기능을 가진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인형의 기원은 종교적 ·주술적인 것뿐 아니라 상당히 일찍부터 장난감으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집트나 그리스 ·로마의 어린아이 묘에 인형이 묻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 근처의 하이나란 작은 섬은 섬 전체가 고대 마야 문명의 유적지인데, 점토제의 인물상이 묘, 특히 어린아이 묘에서 다량 발견되고 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소녀와 인형은 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로서 혼기를 맞은 처녀는 필요없게 된 인형을 여신 다이아나의 신전에 바쳤다고 한다.

 

BC 500년 이후의 그리스 인형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인형의 목을 매달고 악의에 찬 주술을 행하는 흑마술(黑魔術)에 인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적(敵)을 본뜬 밀[蠟]이나 납[鉛] 인형을 주문을 외면서 파괴하는 일은 이미 로마 시대에 행해지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에서는 밀인형에 주문을 걸고 심장부를 바늘로 찌르면서 상대방 인물에게 병이나 죽음이 오기를 기원하는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인형은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Ⅱ. 역사

가장 오래 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품일 것이다. 그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서 얇은 널판지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머리카락 대신에 목제의 염주(念珠) 같은 것을 몇 줄 드리우고 있다. 또, 고대 이집트의 제19왕조(BC 1304∼BC 295)의 유아(幼兒)의 묘에서는 당시의 복장을 한 손이 움직이는 목제 인형이 발견되어 당시 이미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끈을 잡아당기면 널판지 위의 남자가 점토 덩어리를 앞뒤로 움직여서 빵반죽을 하도록 장치된 목각인형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유적에서도 많은 인형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BC 8세기~BC l세기에 만든 타나그라 지방의 초벌구이 소상(小像)은 타나그라 인형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 고대 로마에서는 조상을 본뜬 인형을 신성한 장소에 안치하여 집을 지키는 신(神)으로서 존경을 바쳤으며, 이 풍습은 근래까지도 유럽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밖에 인간을 대신하여 역병(疫病)·재화(災禍) 등을 떠맡기기 위해, 또는 풍작(豊作)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속신앙적(俗信仰的) 인형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였다.

 

인형이 오로지 어린아이의 완구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8∼9세기경에는 포제(布製) 인형이 유럽 각지에 있었으며, 13∼14세기에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강탄인형(降誕人形)이 유행하였다. 점차 유럽 각지에 퍼지면서 크리스마스에 교회를 비롯한 일반 가정에서도 그리스도 강탄인형을 장식하게 되었다. 또, 14세기 초에는 파리의 의상점이 아름다운 포제 인형을 고안하여 패션모델 대신 외국에 파송했으며, 이것이 프랑스 인형의 시작이라고 한다.

19세기에 들어와 사진이나 인쇄물로 의상이 선전될 때까지 그 구실을 다하였다. 같은 무렵 독일의 존네베르크 지방의 나무꾼이나 사냥꾼이 겨울의 한가한 틈을 타 만든 토켄이라는 목각인형이 시장에 선을 보이면서 이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세계적인 인형생산국이 되었다.

 

또, 16∼18세기에 걸친 유럽 상류사회에는 ‘인형의 집’이 유행하였다. 자기 집과 가족의 모형을 실제와 똑같이 극히 정교하게 만들어 전면(前面) 벽을 뜯어내고 설치하여 감상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독일의 귀족이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점차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이탈리아의 귀족 사이에 유행하였다. 그 중에서도 영국 메리 여왕의 것은 특히 유명하다.

 

밀인형은 4세기경부터 만들어졌으며, 사자(死者)의 기념으로 교회 벽에 세우는 풍습이 14세기경까지 계속되다가 후에 완구로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성행하였으며, 실물의 모발을 한 가닥씩 심은 것도 있었다.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만든 베이비 인형은 획기적인 것으로, 그 때까지는 거의 성인(成人) 모습으로만 만들던 인형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가미하게 되었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 무렵 소녀였으나 수십 개의 인형에 의상을 입히고 각각에게 궁중의 여관(女官)의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어 1826년에는 잠자는 인형이 만들어지고, 그 후 에디슨에 의해 배 속에 축음기를 장치한 노래하는 인형도 만들어졌다. 19세기 말에는 고무 인형이나 셀룰로이드 인형이 만들어지고, 셀룰로이드의 큐피 인형은 마스코트로서 전세계에 보급되었다. 뒤에 인화(引火)되기 쉬운 셀룰로이드의 결점을 보완하여 불연성 셀룰로이드와 합성수지가 사용되었다.

 

이 밖에 각국에는 각각의 풍습을 나타낸 많은 인형이 있으며, 그것들은 그 민족 특유의 얼굴 모습, 그리고 특산의 재료로 만들었으므로 각국의 생활풍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에스파냐의 플라멩코를 나타낸 무용인형, 러시아의 티 포트를 보온(保溫)하는 커버 인형, 체코의 유리인형, 스위스의 목각인형 등은 널리 알려진 것들이다.

 

중국에서는 한(漢)·당대(唐代)에 순사자(殉死者)의 대용으로 흙인형[土俑]을 매장하였다. 종이인형(목각인형에 종이를 여러 겹 바르고 마른 다음 목각을 빼낸 것)도 중국에서 창시되어 전세계에 퍼졌다. 또 여러 반죽 ·도제(陶製)·목제 등의 창작기법도 중국에서 전해진 것이다. 이 밖에 아시아 ·유럽 각지에 실로 조종하는 인형(마리오네트),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기뇰) 등이 있고, 인도네시아나 이슬람권 지방에는 인형극에 쓰이는 독특한 모양의 인형이 있다.

 

Ⅲ. 한국

 

한국의 인형을 고증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신라의 고분(古墳)에서 발굴된 유물 속에는 인형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 토우(土偶)가 있다. 점토로 사람의 모습을 만들어 모자 같은 것을 씌웠거나 말을 탄 모습으로도 만들었다. 이러한 토우들은 부장품(副葬品)으로 만들어넣은 것이다. 이로써 당시에 흙인형이 있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으며, 따라서 한국 인형의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밖에 풀인형인 풀각시가 있었으며, 질기고 가는 파란 풀을 손가락만한 나뭇가지에 실로 동여매고 세 가닥으로 땋아 머리 모양을 만들고 색헝겊으로 저고리와 치마를 만들어 입혔다. 또 정월 대보름을 전후해서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제웅’이라 부르고, 1년 동안의 액을 때우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이 있었다. 이것은 민간신앙과 인형이 연결되어 주술적인 기능을 나타냈던 예이다.

 

이것이 후에 무당이나 점장이에게는 신(神)으로 모셔졌고, 한편 단순한 오락으로 발달한 것에 조선시대 중기 이후의 인형극 ‘만석중놀이’와 ‘꼭두각시놀음’이 있다. 연기자가 막 뒤에 숨어서 인형을 조종하여 극적인 효과를 나타냈으며, 이러한 인형들은 모양의 아름다움보다 성격적이며 개성적인 면이 두드러지도록 만들어졌다.

 

근대에 와서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아 실내장식을 위주로 한 아름다운 인형을 만드는 경향이 짙어짐으로써 소박하고 상징적인 것보다는 사실적인 것을 주로 만들게 되었다.(출처 : 동아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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